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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모니카 김 『심문실의 한국전쟁』, 후마니타스 2025

‘선택’을 묻는 전쟁

 

 

이선우 李宣玗

역사학자,이화여대사학과강사

sunoolee@gmail.com

 

 

 

한국인이 기억하는 가장 유명한 포로 이야기는 아마도 최인훈의 소설 「광장」(1960)일 것이다. 남도 싫고 북도 싫어 중립국을 선택한 포로의 이야기는 실제 사실에 기반했다는 점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그 핵심은 ‘선택’에 있었다. 정말 전쟁포로에게 선택의 자유가 가능했을까. 아니, 포로가 아니더라도 분단된 국가의 국민에게 진정한 선택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 모니카 김(Monica Kim)의 『심문실의 한국전쟁』(The Interrogation Rooms of the Korean War, 2019, 김학재·안중철 옮김)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2차 세계대전까지 전쟁이 끝나면 모든 포로를 본국으로 송환하는 것이 국제적 관행이자 인도적 조치였다. 그러나 한국전쟁 포로에게는 역사상 유례없이 ‘자원송환’의 원칙이 적용되었다. 전쟁포로가 전시 보호자의 지위를 넘어 자유의지를 행하는 하나의 정치적 주체가 된 것이다(20면).

이 책의 ‘옮긴이 후기’에 정리되어 있듯이, 2000년대 이후 한국전쟁 포로에 관한 굵직한 연구들이 여럿 등장했다. 이른바 한국전쟁 4세대 연구자들의 성과가 적지 않지만, 『심문실의 한국전쟁』은 그 수상경력이 증명하듯 단연 돋보이는 역작이다. 저자는 ‘포로를 어떻게 처우하는지가 전쟁의 성격을 규정한다’(126면)는 통찰에 기대어 포로의 선택이 연출되고 강요되는 방식을 거듭 추적하고, 전쟁의 본질부터 다시 고찰한다. 도대체 이 전쟁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나. 우리는 무엇을 위해 싸운 것인가.

저자는 카를 슈미트(Carl Schmitt)의 ‘인간성을 둘러싼 전쟁’(war over humanity)을 주목한다. 슈미트는 인권 및 인도주의를 앞세운 전쟁이 일종의 성전(聖戰)으로 변질되어 적을 악마화하고 총력전을 초래한다고 경고했다. 저자는 이러한 통찰이 냉전으로 향하는 한국전쟁을 관통한다고 본다. 2차대전 이후 국제사회는 유엔 창설(1945), 세계인권선언(1948), 제네바협약(1949)을 통해 ‘침략’전쟁을 범죄화하고 도덕적 보편주의를 최우선가치로 삼았다. 이러한 질서 속에서 미·소로 분단된 한반도는 어느 쪽의 탈식민화가 더 보편적이고 민주적인지를 싸우는 이념경쟁의 무대였다(21면). 결국 북한이 남침하자, 미국은 이를 ‘평화를 파괴하는 행위’로 규정하며 유엔군 개입을 정당화했다. 슈미트의 경고가 현실이 된 셈이었다.

그러나 전쟁은 곧 38선에서 교착상태가 되었다. 아무런 군사적 성과 없이 휴전 논의가 시작되자 미 심리전략위원회는 전쟁포로 문제에 주목했고, 1952년 1월 3일 판문점 협상에서 포로의 ‘자원송환’을 공식 제안했다. 저자에 따르면 이는 그들이 “포로 송환 협상에 전쟁의 의미·성격·이유 등과 같은 중요한 문제가 달려 있다는 점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102면)이다. 북한군·중국군 포로가 본국 송환을 거부하도록 함으로써 이들 국가가 자국민에게 행사할 수 있는 주권, 즉 강제송환의 권리를 무력화시키고, 동시에 이 전쟁을 인류 보편적 가치인 자유의지의 수호로 정당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전쟁은 군사적 충돌을 넘어 개인의 선택과 자유의지가 격돌하는 공간, 심문실로 옮겨갔다.

여기서 저자가 말하는 ‘심문실’은 포로수용소에 조성된 특수한 공간에 한정되지 않는다. 전쟁을 전후로 자신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설명해내야 했던 모든 한국인의 경험과 한반도의 풍경, 그것이 곧 냉전의 심문실이었다. 따라서 이 전쟁에 참여한 이들(한국인, 미국인, 중국인, 일본계 미국인 등)은 모두 서로에게 포로이거나 심문관이 되고, 전쟁 중의 낯선 만남들은 그 자체로 심문의 순간이 되었다. 이 책에서 말하는 ‘전쟁의 요소’가 심문, 포로, 심문관으로 구성되는 이유이다. 또한 원제목의 심문실(rooms)이 복수형으로 표현된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그 심문실‘들’을 들여다보면 좀더 다양한 결을 발견하게 된다. 가령 거제도 포로수용소장을 납치했던 북한군 포로들은 ‘광신적 공산주의자’로 악마화됐지만, 실상은 자신들을 국제법에서 규정한 전쟁포로로서 정당히 대우할 것을 요구하고 북한과 인민군의 주체성과 자율성을 주장했다. 특히 해당 사건 조사보고서의 “사실은”(in fact,)과 같은 표현에서 균열을 포착해내는 저자의 분석은 인상적이다. “납치범들이 그를 (…) 사실은 후하게 대접했다”는 문장은 문서 작성자조차 사건을 ‘반란’으로 규정하려는 냉전적 서사에 온전히 동의하지 않았음을 시사하며, 미군 내부에서도 이 사건을 이해하고 재현하는 데 한계가 있었음을 드러내는 파열(rupture)의 순간이라는 것이다(233~49면). 그와는 또다르게 반공포로들은 자신이 포로가 아니라고 호소하며, 이승만의 일민주의와 민족주의에 대한 충성심을 혈서와 문신으로 증명하고자 했다. 이처럼 남측의 수용소(심문실)는 식민과 냉전의 경계 위에서 누가 주권의 주체가 될 것인가를 둘러싼 탈식민투쟁의 최전선이었다.

판문점의 심문실은 더욱 교묘해진다. 중립국이라는 선택지가 추가되면서 이 전쟁을 둘러싼 국가 정당성 경쟁이 희석되고, 모든 것이 오롯이 포로 개인의 선택문제로 보이게 되었다. 그러나 포로들은 선택의 주체였다기보다는 “끊임없이 흔들리는 힘의 지형을 저울질하고 헤쳐”(323면)가야 했다. 이렇게 저자는 선택에 부여된 과도한 자유주의적 의미를 벗겨내고, 그 역사적·구조적 환경에 시선을 돌린다.

38선 북측의 심문실도 예외는 아니었다. 북한에 억류된 미군 포로에게도 ‘선택’의 기회가 주어졌지만, 미군 포로의 송환 거부는 ‘세뇌’로 해석되었고 귀환한 포로들조차 ‘잠재적 위협’의 요소가 되었다. 그러나 선택을 결정지은 것은 북한의 사상교육보다는 수용소 내부에 부활한 인종주의였다. 백인 포로들은 수용소 내에서 KKK를 조직해 미국사회의 인종주의를 재현한 반면, 인종차별의 구조 속에서 줄곧 배제되어온 다른 인종과 저소득층 포로들은 북한군과의 심문을 통해 “‘인민’(민중)이라는 수평적 존재로서의 정체성을 부여”(392면)받으며 선택의 주체가 되었다. 이처럼 저자는 38선 위아래로 흩어진 심문실들을 통해 이 전쟁이 초래한 파괴보다 전쟁의 폭력으로 만들어진 주체들을 주목하고, 그로써 한국전쟁과 분단의 현재적 의미를 성찰한다.

기존의 포로 역사서술이 한조각 한조각 끼워 맞추는 퍼즐이었다면, 이 책은 퍼즐 조각들 사이의 경계를 유연하게 오간다. 물론 조각과 조각 사이 연결고리가 부족하고, 자칫 모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러한 지적은 마치 추상화를 두고 ‘진짜와 다르게 생겼다’고 탓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경계를 타고 흘러내린 서사가 더 큰 그림을 재구성하기 때문이다. 심문실이라는 결절점을 따라 흘러가는 서사는 미국 자유주의 전쟁의 폭력성과 그 속에서 탄생한 주체를 비추며, 한국전쟁을 탈식민과 국가건설의 관점에서 새롭게 사유하게 만든다. 덧붙여 수년 전 처음 원서를 접했을 때 느낀 언어의 벽과 미지의 영역이 이 책을 통해 대부분 해소되었음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곳곳에 배치된 각주와 괄호 안의 부연설명이 큰 역할을 한다. 옮긴이들의 노고가 빛나는 지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