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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김안나 『어느 아이 이야기』, 을유문화사 2025

‘실패’한 기원 찾기 이야기

 

 

서정은 徐晶恩

국립한국교통대영어영문학과교수

jseo@ut.ac.kr

 

 

 

『어느 아이 이야기』(Geschichte eines Kindes, 2022, 최윤영 옮김)는 한국에서 태어나 두살 때 독일로 이주한 후 현재 오스트리아에서 독일어로 글을 쓰는 김안나의 소설이다. 발표작들이 유럽의 주요 문학상 후보작 및 수상작에 오르며 주목받아온 작가로 『어느 아이 이야기』는 국내에 소개된 그의 첫 작품이다.

서문에서 작가가 밝히듯 실화에 기반한 이 소설은 1953년 미국 위스콘신주의 작은 도시 그린 베이에서 백인 미혼모가 낳은 흑백 혼혈아 대니얼(대니)의 이야기, 더 구체적으로는 “그린 베이에 있는 단 한 명의 아프리카계 미국인”(21면)으로 태어나 자라면서 그가 겪는 인종주의에 관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소설의 시간적 배경인 1953년에서 2016년까지 동네 이웃들은 “그대로 모두 백인”으로 유지되며 이는 “그렇게 되도록 사람들이 신경을 썼기 때문”(112면)이다. 미국 중서부 도시의 견고한 인종주의에 대한 소설의 접근은 주제적으로는 익숙하지만, 형식적으로는 신선하다. 그리고 이 형식적 특징을 통해 가시적인 신체 특징에 기반해 인간을 분류하는 인종 개념의 허구성과 폭력성, 그것의 편재성과 지속성에 대한 중요하지만 익숙한 비판을 뻔하다는 느낌 없이, 게다가 본격문학에서 자주 만나기 어려운 흡인력을 가지고 전달하는 것이 이 작품의 주된 미덕이다.

소설은 2013년 체류작가로 그린 베이를 방문하는 동안 대니의 이야기를 알게 된 프란치스카(프랜)가 서술하는 틀서사와 그 과정에서 프랜 손에 들어온 보고서, 즉 1953년 출생부터 1959년 입양까지 대니를 담당한 사회복지국 담당자의 기록으로 이루어진 삽입서사의 교차로 구성된다. 틀서사와 삽입서사를 연결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60년 이상의 시차를 두고 대니의 친부를 찾으려는 다양한 인물들의 노력이다. 소설은 대니의 친부 찾기를 사건의 해결로 설정한 일종의 추리소설처럼 진행된다. 인물들은 두개의 시간대에서 두개의 서로 다른 목적으로 친부의 정체를 추적한다. 첫번째는 대니의 인종을 특정해 성공적인 입양을 진행하기 위해서, 두번째는 흑인으로서 벗어날 수 없는 신체적 가시성과 백인에 동화된 내면 사이의 괴리로 평생 고통받은 대니의 정체성 확립을 돕기 위해서이다.

먼저 삽입서사에서 사회복지국의 대니 담당자 마를레네 빙클러는 인종지학적 확신 아래 대니의 신체를 탐구하고 기록한다. 1930년대와 40년대 나치 치하 유럽의 우생학적 인류학을 공부한 그는 아이가 보이는 “머리카락의 형태와 색깔, 입술의 상태(두께), 코의 형태와 색소 침착, 그리고 손톱의 색깔”(44면) 같은 유력한 분류 특징들의 변화를 관찰하고, 생모인 캐럴의 가계와 그녀가 교제한 모든 남성의 가계를 조사해 유색인종의 흔적을 찾는다. 생부의 인종을 결정해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서로에게 적합한 아이와 부모를 맺어”줌으로써 “자연스러워 보이는 가정”을 만들어 “아이들의 행복을 보장”(36면)하기 위해서이다. 빙클러의 강박적인 조사는 생모 캐럴의 일상을 무너뜨리고, 캐럴이 자살을 시도한 후에야 그의 해고로 중지된다. 흥미롭게도 삽입서사는 빙클러의 조사에 동반된 폭력성을 뚜렷하게 표면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검둥이” “숙주 민족”(63면) 등의 인종주의적 용어를 반복적으로 사용하는데도 독자는 친부를 찾아 아이의 인종을 확정하려는 빙클러의 헌신적인 조사에 감정이 이입되고 친부를 찾을 실마리들에 빙클러 못지않게 몰두하게 된다. 인종이라는 정보가 한 인간의 삶에서 갖는 중요성에 쉽게 설득되고, 그 정보가 추적 가능한 실증적이고 객관적인 지표의 합이라는 가정을 부지불식간에 공유하게 되는 것은 낯설고 경각심을 일으키는 독서체험이다.

다른 한편 틀서사는 이 몰입을 깨고 근거없이 받아들인 인종에 대한 가정들을 질문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프랜이 서술하는 이야기 역시 표면적으로 대니의 친부를 찾는 과정으로 전개되는데, 뇌졸중 후유증으로 요양원에 입원한 남편 대니를 위해 그의 아내 조앤이 고향 오스트리아로 돌아간 빙클러를 찾아달라고 오스트리아 출신인 프랜에게 부탁하기 때문이다. 조앤은 빙클러가 보고서에 기록되지 않은 조사를 더 했으며 대니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고 확신한다. 그리고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면 대니의 신체뿐 아니라 긴 우울을 겪은 그의 영혼 역시 회복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체류작가 기간이 끝난 후 대니에 대한 사회복지국 서류철과 빙클러의 주소를 가지고 오스트리아로 돌아간 프랜의 추적은 정확히, 인종이 과학적인 인간 분류체계이며 한 개인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핵심요소라는 삽입서사의 가정을 무너뜨리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빙클러의 딸이 사망한 어머니가 받은 나치시기 인류학 교육의 유사과학적 성격을 폭로하고, 결정적으로 빙클러가 흑인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가장 유력한 대니의 친부 후보자에 대한 면담을 눈앞에서 포기했다는 사실을 밝히기 때문이다. 집요하고 강박적인 “인종 검사”(137면) 과정에서 빙클러가 발견한 것은 대니 친부의 정체, 혹은 대니의 정체성을 규명할 그의 인종이 아니라 흑인에 대한 자신의 두려움 혹은 ‘인종 검사’가 가능하고 필요하다는 믿음의 근간에 있는 인종주의적 혐오와 타자화 논리인 것이다. 두개의 시간대에서 다른 인물들에 의해 전개되는 이중의 추리서사가 만나는 지점에서 소설은 이렇게 밝혀져야 할 진실을 친부의 정체와 인종이 아니라 인종이라는 개념의 허구성과 폭력성으로 바꾸어놓는다. 그리고 빙클러가 죽은 지금, 결정적인 “정보원”(234면)인 그의 딸 질비아를 통해 대니에게 전달할 최종 진실로서 친부의 정체가 아니라 그 정체를 결국 “확인하지 못했다”(307면)는 사실을 제시한다.

친부 추적의 실패, 뿌리 찾기의 실패가 사실 실패가 아니라 이 소설의 지향임을 선명히 밝히는 것은 틀서사의 서술자 프랜이다. 한국인 어머니와 오스트리아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오스트리아에서 자란 프랜은 1950년대 미국 중서부 도시에서 대니가 겪는 인종주의를 반세기 후 유럽에서 여전히 겪으며 성장한 인물이다. 프랜 역시 외모에 기반해 자신을 “작은 아시아 여자”(140면)로 부르는 사회의 구속적 규정과 평생 갈등해왔다. 대니의 친부를 찾는 과정에 연루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고향과 과거를 방문하며, 대니의 경험과 공명하는 자신의 경험을 반추하는 프랜은 타자화된 자신의 소수자적 인종을 긍정하고 회복하는 디아스포라/이민자 서사의 일반적 여정을 취하지 않는다. 그 대신 정체성의 기원과 뿌리로서의 인종, 신체적 가시성을 한 인간을 규정하는 환원적 “멍에”(135면)로 만드는 사유를 넘어 “복잡함 속에, 개괄 불가능성 속에, 그리고 카오스 속에 존재하는” 삶 “특유의 아름다움”(235면)을 끌어안는 것으로 기원 찾기의 서사를 대체한다. 소설의 시작과 끝에서 끝없이 쏟아지며 가시성을 방해하고 사물의 윤곽을 지우는 그린 베이의 눈은 ‘그린 베이에 있는 한명뿐인 아프리카계 미국인’ 혹은 ‘작은 아시아 여자’의 이야기를 인종적 기원에 구속되지 않는 ‘어느 아이 이야기’로 다시 쓰려는 소설의 이런 의도를 시적으로 압축하는 상징이다.

그러나 인종주의에 대한 작품의 구체적인 사회비판과 가시성에 기반한 정체성 일반에 대한 작가의 철학적 성찰은 다소 아슬하게 연결된다. 가시성이라는 ‘멍에’를 벗어나 ‘어느’(eines)라는 부정관사의 자유를 확보한 인물들의 정체성은 이제 무엇 위에 자리잡는가? 인종만큼이나 근거없는 자유로운 개인의 선택이라는 관념이 저자가 제시하는 대안일까, 아니면 고정된 모든 정체성에 대한 부정이 그 지향일까. 이 질문에 대한 소설의 답은 가시성에 기반한 인종주의에 대한 비판만큼 선명하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