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평
한국문학에 대한 국내외의 새삼스러운 주목에 발맞추기라도 하듯 올해 창비신인평론상에도 전에 없는 응모 열기가 느껴졌다. 43편의 응모작들은 저마다의 개성으로 중견과 신예 작가들의 작품세계를 넘나들며 비평적 안목과 분석적 깊이를 보여주었다. 기후, 생태, 젠더, 노동, SF, 포스트휴머니즘 등 어느 한쪽으로 묶기 어려울 만큼 폭넓은 관심사들이 고루 포진해 있어 응모작을 따라 읽는 것만으로도 오늘날의 문학과 시대현실에 대한 총체적 파노라마를 접하는 느낌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지난 12·3 내란사태와 그 극복과정에서 분출했던 놀라운 사회적 에너지에 어떤 식으로든 힘입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많은 글들이 시대현실에 대한 진단을 포함하고 있는 점만 해도 그렇지만 그러한 면모가 겉으로 드러나 있지 않은 경우에도 공동체에 대한 ‘나’의 연루의식을 초점화하고 있는 사례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평 행위의 본래 의의 또한 살아 있는 현실과 문학작품 사이의 단순치 않은 상관관계에 어떻게 개입하느냐에 달린 만큼 이는 얼마간 자연스러운 현상이기도 할 것이다. 심사위원들은 응모작 가운데 우리 시대현실과 문학에 대한 남다른 문제의식과 분석력을 고루 갖춘 5편의 글에 주목했다.
「도망치지 않는 시」는 2000년대 이후의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시적 경향들이 새로움에 대한 막연한 정당화에 머물렀던 것은 아닌가 반문하면서 황유원의 시세계가 협소하기 이를 데 없는 ‘나’를 넘어서고 있는 지점들을 비교적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다. 시적 전사(前史)에 대한 적절한 비판과 치열한 극복의식이 무엇보다 강점이라 할 수 있지만 그러면서도 ‘불가능한 것을 꿈꾸기’와 같은 익숙한 서사적 틀을 가져옴으로써 오히려 자신이 비판하고 있는 2000년대 이후의 흐름에 과도한 권위를 부여하는 듯한 면모를 보인 것은 함께 생각해볼 지점이다.
김기태의 소설집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을 분석한 「‘우리’라는 실재」는 리얼리즘에 관한 평자 나름의 참신한 접근을 통해 소설적 유토피아 충동이 정동적 언어의 신체화를 거쳐 역사화에 이르는 과정을 시대와 작품에 대한 발랄한 통찰과 함께 보여준다. 서구담론에 대한 추수에서 어느정도 벗어나 있는 점도 신뢰를 주기에 충분했고, 김기태 소설의 어떤 담백한 핵심에 닿을 수 있었던 것도 그에 힘입었으리라 본다. 다만 『창작과비평』을 비롯하여 우리 문학장 안에서 진행된 리얼리즘 논의의 두터운 역사 가운데 자신의 비평적 목소리가 놓인 위치에 대한 점검도 따랐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김현·권박·조시현이 시에서 즐겨 활용하는 각주의 의미를 치밀하게 분석한 「잔영과 여음」은 그것이 단순한 형식실험 이상의 정치적·윤리적 기획임을 설득력 있게 논증하고 있는 글이다. 풍부한 논거들을 자유롭게 활용하면서도 집중력을 잃지 않는 전개가 특히 인상적이지만 그것을 고정된 주체나 의미 위계의 해체 같은 이제는 어느정도 익숙해져버린 서사 안으로 수렴시키고 마는 듯한 결론은 새로운 숙제를 남긴다.
안희연의 시에 나타난 침묵의 의미에 집중한 「지나치게 하이얀 빈 자리」는 무엇보다 작품에 대한 깊은 공감적 읽기가 눈에 띄는 글이다. 예술을 정동의 구조화이자 감응의 실천으로 파악하는 관점이 시종일관 긴장을 유지한 점도 미쁘거니와 자신이 다루는 작품에 주파수를 맞추는 듯한 차분한 문장도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때로는 공감적 읽기 바깥으로 연결된 비평적 거리두기가 필요할 것이다. 그랬다면 시적 윤리라는 안희연의 시에 관한 일각의 타성적 접근을 충분히 돌파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폭력의 동역학과 식물적 환상」은 니체의 자연관과 ‘힘에의 의지’를 통해 한강의 연작소설 『채식주의자』를 집중적으로 분석한 글이다. 여기서 ‘폭력의 동역학’과 ‘식물적 환상’이라는 두개의 구조적 본질이 추출되거니와 국가폭력의 문제를 정면으로 소설화한 『소년이 온다』나 『작별하지 않는다』 또한 그 변용의 일환이라는 점을 밀도있게 설명해내고 있다. 그러나 ‘한강과 니체’라는 부제의 무게를 염두에 둘 때 일단은 니체에 관한 논의가 소략하고 단순하다는 점이 걸렸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는 ‘생명’에 관한 니체 너머의 사유가 요청되지 않는가 하는 의문도 지우기 어려웠다.
심사위원들은 토론을 거쳐 「‘우리’라는 실재」를 당선작으로 뽑는 데 선선히 합의했다. 무엇보다 비평적 타성에서 벗어나려 하는 의욕이 상대적으로 힘있게 다가왔고 그것이 우리 시대의 어떤 전환적 에너지와도 무관하지 않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응모해주신 모든 분께 감사와 격려의 말씀을 전하며 아울러 당선자의 문운을 기원한다.
강경석 황정아
수상소감
이미진李美眞
1984년 전북 익산 출생. 고려대 비교문학 박사.
하루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기 위해 몸을 누이면, 어제와 비슷하면서도 또다른 낯선 감정들이 조용히 내려앉고는 합니다. 아마 누구나 그러리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잘 짜여진 것처럼 보이는 틀 안에서 그렇게 살아가지만, 가끔씩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계시들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순간들을 목도하기도 합니다. 저는 대체로 그것들이 신성할 정도로 중립적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매일 변덕을 부리면서도, 또 반성하고 힘을 내서 살아갈 수 있게 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부족한 글을 좋게 봐주신 심사위원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대학에서 만나 같이 글을 쓰며 청춘을 보낸 친구들, 대학원 안과 밖에서 함께 공부하며 서로 영감을 준 귀한 동료들, 존재 자체로 가르침을 주신 훌륭하고 좋은 선생님들께 감사를 전합니다. 우리가 만날 수 있었기에 계속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소중한 친척들, 가족들을 생각하며 글을 써나가겠습니다. 나의 일부이자 늘 사랑하는 엄마와 세상에서 제일 착한 동생 유진이 그리고 몽실이와 수상의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언제나 한결같은 따뜻한 마음으로 맞이해주신 조재룡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
때때로 어린 시절 기억 속의 친구들, 다른 나라에서 만났던 인연들이 부유하듯 떠오릅니다. 언젠가는 내 글들이 지난 여정들 속에서 그렇게 스쳐간 모든 인연들에 가닿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증발하고, 부식되고, 스며들어서, 그 형상은 알아볼 수 없게 되더라도, 기적처럼 다시 조우할 수 있기를 꿈꿔봅니다. 요즘에는 마돈나를 좋아한다고 했던, 카르마 때문에 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했던 작은 우끄라이나 친구가 종종 생각납니다.
잘 지내기를 바랍니다. 언제 어디서나, 그때처럼 안녕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