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의 목소리
이번에는 내 차례인가 하는 마음의 지극한 사랑
▶ 입맛을 잃어 냉면과 비빔면만 먹으며 이 여름이 지나가기를 바라던 날 『창작과비평』 여름호를 펼쳐보았다. 계간지를 받으면 광고를 먼저 둘러본다. 이런 책이 나왔구나, 이런 문학상이 있구나 유심히 본다. 그다음에는 편집위원이 쓴 ‘책머리에’를 읽고, 다시 차례로 돌아가 어떤 글을 먼저 읽을지 마음속으로 정하곤 한다. 지난호에서 특집 ‘민주주의적 감정과 새로운 문학’을 흥미롭게 읽었다. 12·3 내란사태 이후 내게 남은 감정을 짧은 일기나 메모로라도 남기고 싶었으나 왠지 엄두가 나지 않고 적당한 말을 찾을 수 없었다. 황정아의 글(「역사적 감정의 존재양식과 『대온실 수리 보고서』」)을 읽으며 그 답을 찾은 것 같다. “이번에는 내 차례인가”(17면) 하는 감각. 12·3 내란으로 각성한 시민들의 심정을 딱 대변하는 것 같아 신기했다. 지난겨울을 지나며 사람들은 민주주의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고 저마다의 자리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고 있다. 문학을 통해 이 아름다운 순간을 포착하고 그 의미를 되새길 수 있음이 참 다행이다.
전기화의 「미래를 짓는 애도의 서사」에서도 흥미로운 표현을 발견했는데, 바로 숨을 받은 것이라는 의미의 “숨탄것”(37면)이다. 내가 너에게 빚을 졌다는, 그래서 이번에는 내가 다른 사람에게 빚을 갚을 차례라는 생각은 경쟁과 혐오에 찌든 이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보기 힘든 아가페의 사랑을 떠올리게 해 아름답다. 이문재 시 「세상에 참 평화 있어라」에서도 비슷한 정서를 발견할 수 있었다. “당신이 나에게 희망을 건네면/당신의 희망과 내가 받아안은 새 희망/그리고 우리 사이에 생겨난 새 희망/희망 하나가 이렇게 셋이 됩니다/같으면서 다르고 다르면서도/같은 셋이 됩니다”. 김혜진 소설 「우리와 우리 아닌 것」도 인상적이었는데,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이 딸에게 보낸 오타 섞인 문자 “도심해라, 석정된다”(162면)를 보고 꼭 우리 아빠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소설을 읽고 나서 어쩌면 아빠가 내게 뜬구름 잡는 듯한 말만 하는 것은 관심이나 애정이 없어서가 아니라 마음을 어떻게 전달해야 하는지 몰라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처음으로 해보게 됐다. 살면서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지, 무엇이 걱정되는지 스스로도 모르는 순간이 많다. 그런데 유독 가족 사이에서만 엄격하게 굴었던 나를 돌아보게 된다.
우리가 앞으로 만들어갈 나라는 어떤 모습일까. 그곳은 ‘내가 너에게 숨을 받아 여기 있다, 나는 너에게 빚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세상이면 좋겠다.
전현선
희망을 나누는 곳, 클럽창비
▶ 아픈 형제와 함께 살아온 나에게 돌봄은 때로 장벽이었고, 거기서 비롯된 소외감을 느끼는 날도 많았다. 그런 나에게 지난 일년여간 ‘돌봄’을 주제로 한 클럽창비 1기에 참여해 다른 클러버들과 이야기 나눈 것은 값진 일이었다. 몸에 관한, 아니 결국 마음에 관한 상처를 털어놓으며 서로 다독이는 시간이 필연처럼 느껴졌다. 돌보는 사람이기에 쓸 수 있는 글, 할 수 있는 말,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랑. 그 모든 게 내 삶을 지탱하는 자부심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혼자가 아니라고 속삭여준 책과 사람들 덕에 계속 읽고 쓰는 사람이 될 수 있었다.지난 여름호의 소설들을 보며 떠오른 하나의 장소는 광장이다. 억압에 저항하며 자유를 지켜내는, 새로운 미래가 펼쳐지는 공간이 그려졌다. 김혜진의 「우리와 우리 아닌 것」은 아둔한 사람이 사회를 얼마나 병들게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자멸하는지 절실히 깨닫게 했다. “그날, 오랜 고심 끝에 그가 보낸 건 뜻을 알 수 없는 이상한 단어의 조합이었다”(162면)는 말에서 계엄사태가 겹쳐 보였던 것은 우연이 아닐 테다. 문소이의 「창고 정리」는 비난과 혐오로 뭉친 인간들에게 가운뎃손가락을 들어올리듯 응원봉을 높이 치켜들었던 사람들을 떠올리게 했다. 무언가를 정성 들여 돌본 적 있는 사람만이 아는 사랑이, 끝에서도 다시 시작할 용기가 서린 얼굴들이 새록새록 생각났다. 최은미의 「김춘영」을 읽으면서는 이 희망을 어떻게 지켜나가야 할지 곰곰 생각했다.
특집의 황정아 글을 이어서 읽었다. 다수가 진실이라고 믿는 것들을 추종하지 않고 되레 그것에서 벗어난 것들에 더 마음을 쏟는 이유는 “서로에게 침투함으로써 더 깊은 역사적 의미를 만들어”(31면)내기 위함이 아닐까. 다른 무엇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삶의 결들에 오래 시선을 맞추며 그 삶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 연대라는 것을 다시금 느꼈다. 혐오와 차별, 편 가르기에 동조하지 않고 고유한 서로를 사랑하겠다는 결심이 희망의 원천이자 변화의 동력이다. 이남주·백낙청 특별대담 「2025년체제,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서 사회의 다양한 변화에 발맞추어 “시민적 요구가 헌법개정에 잘 반영되는 일”(84면)이나 ‘변혁적 중도’의 힘을 이야기한 것도 사랑의 결심을 통한 연대를 필요로 한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차원의 광장에 들어선 지금, ‘연결되는 마음을 위하여’ 이제 우리가 말할 차례다. 클럽창비 2기의 주제가 ‘연대: 연결되는 마음을 위하여’이다. 가을부터 밀려올 클럽창비 2기의 푸른 물결을 기다리며, 희망과 변화를 함께 노래할 클러버들을 다시 만나게 되기를 고대한다.
최유정
좋은 시 구절을 되뇌며
▶ 유난히 무더운 이번 여름, 찜통더위로 집에 있으려니 견디기가 매우 힘들다. 가까운 곳에 있는 수내도서관이 마침 새단장을 했다. 시간이 날 때마다 도서관을 찾아 보고 싶은 책들을 읽다가 돌아오곤 한다. 잡지 서가에 진열된 책들을 돌아보다 『창작과비평』 2025년 여름호에 시선이 꽂혔다. 다양한 읽을거리 중에서도 시란에 먼저 눈이 가는 것은 젊어서부터 마음에 평온을 주는 시 읽기를 좋아했기 때문일 것이다. 열두명 시인들의 시를 한편 한편 읽어나가니 마음이 고요해지며 살아 있는 일의 기쁨까지도 느낄 수 있었다. 천양희의 “시여, 너와 함께 있으면 나는 나를 안을 수 있다” “멀리 가서 멀리 오는 눈을 맞는다” “그리움에도 스위치가 있으면 좋겠다”(「시인이 좋아하는 시인 2」) 같은 문장에 사로잡혀 한동안 머물기도 하고, 나이 든 마음에 가슴 떨리는 설렘을 가져다준 시도 만난다. 이문재 시 「아침」이 그렇다. “스위치를 내려야 밤이 온다”는 구절과 “눈을 감아야 눈뜨는 것이 있다”는 구절을 몇번이고 마음속에 아로새겼다. 그렇게 마음에 담은 문장들을 되뇌며 도서관을 나온다. 한여름 폭염을 물리친 하루였다.김시운
누군가를 위한 그늘이 되어줄 수 있기를
▶ 지난호에서 유현아 시 「그늘 옮기기」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아버지는 그늘이었으므로/그늘 안까지 들어가본 적 없다/더 크게 원을 그려 햇볕이 그늘질 때까지 그늘이 되어 기다렸다/약간의 오차도 허락하지 않는”다는 부분을 읽으며, 어린 시절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어릴 적 해가 뜨거운 날이면, 아버지 뒤에 숨어 해를 피했던 기억이 있다. 아버지의 걸음을 총총 따라 밟으며 들어갔던 그늘. 그 넓던 그늘이 요즘 점점 줄어드는 것 같아 서글퍼진다. 흰머리가 생기고, 주름이 많아지고, 뱃살이 나오고, 주량이 줄어들고…… 나보다도 체력이 약해진 아버지를 볼 때마다 더이상 내가 어린 시절에 머물러 있지 않음을 실감한다. 얼마 전 어머니는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 ‘너는 더이상 부모님 그늘에 있을 수 없어’ 하는 선고를 받은 것만 같았다. 나는 항상 부모님의 그늘에 있었고, 부모님은 나를 대신해 뜨거운 해를 다 받고 있었다. 이제는 내가 더 큰 나무가 되어 두그루의 노목이 쉴 수 있는 그늘을 만들어주겠노라고 다짐한다.“사랑이라는 단어는 너무 거대해서 입 밖으로 내미는 것이 두렵다/슬픔이라는 단어는 너무 소소해서 입 밖으로 술술 나온다/그것이 그늘 곁에 있는 이유 같기도”(같은 시)라는 문장에 깊이 공감했다. 사랑한다는 말이 입 밖에 잘 나오지 않는다. 너무나 큰 풍선처럼 느껴져서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터질 것 같은 두려움이 있다. 언젠가 먼 미래에 나도 내 부모님을 땅에 잠들게 해야 하는 시간이 찾아올 것이다. 그때 슬프다는 말보다, ‘사랑했다. 사랑한다. 앞으로도 사랑할 것이다’라고 많이 말하고 싶다.
서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