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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마이클 S. 최 『게임이론가, 제인 오스틴』, 후마니타스 2025
오스틴 소설의 색다른 독법에 귀 기울이기
김명환 金明煥
서울대 영문과 명예교수
kmh@snu.ac.kr
제인 오스틴이 2백여년 전에 쓴 6편의 소설은 지금도 영어권만이 아니라 전세계에서 널리 읽힌다. 오죽하면 영국에서는 19세기 말부터 이 소설들의 열혈 팬을 칭하는 ‘제이나이트’(Janeite)라는 말이 등장했는데, 이들은 자기들끼리 작가를 제인이라고 부른다니 우리로 치면 박완서 읽기모임에서 “우리 완서의 최고작은 누가 뭐라 해도 이 작품이지?”라며 대화하는 식이다. 지구 곳곳의 애독자들이 다 ‘제이나이트’와 똑같을 리 없지만, 대중의 오스틴 사랑은 당분간 여전할 것 같다
오스틴 붐의 배경으로 그의 작품이 영화와 TV 드라마로 거듭 제작되어 인기를 얻으며 꾸준히 팬층을 형성했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런 문화현상의 대세는 오스틴의 소설을 ‘로맨틱 코미디’로 소비하는 것이다. 2005년 영국에서 만들어진 영화 「오만과 편견」(Pride & Prejudice)은 한국에서도 흥행에 성공했고 덩달아 번역본도 평소보다 훨씬 많이 팔려나갔다. 물론 적지않은 관객들이 영화를 보며 로맨틱 코미디 이상의 무언가를 발견한 덕분일 텐데, 이 책 『게임이론가, 제인 오스틴』(Jane Austen, Game Theorist, 2014, 한국어판 이경희 옮김)을 쓴 사회과학자 마이클 S. 최(Michael S. Chwe)도 영화를 먼저 접한 후 오스틴 소설을 읽게 되었다고 한다.
정작 오스틴의 작품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청춘남녀의 달콤한 ‘밀당’이나 행복한 결말의 로맨스가 아니라 견고한 신분사회와 철저한 물질주의를 배경으로 결혼시장에 나온 주인공들의 갈등과 좌절, 선택의 어려움이 훨씬 더 피부에 와닿는다. 저자는 작품의 이러한 진면모를 발견하고 자신의 전공인 게임이론과 오스틴 문학을 연결짓는 색다른 시도에 뛰어든 것이다
저자가 한국 독자를 위해 쓴 편지가 책에 미처 실리지 못해 출판사의 블로그에 번역되어 있는데, 여기서 그는 1960년대 중반 미국 남부로 이주한 한국인 이민 가정에서 태어나 인종차별을 겪으며 성장한 개인사를 언급한다. 게임이론이 사회적 저항을 위한 조정과 협력의 이론이라는 그의 입론은 미국의 인종차별을 비판하는 활동에 적극적이고 한국의 민주화운동에도 관심이 많은 개인적 이력과도 이어져 있다. 그는 미국 주류 사회과학의 대세인 게임이론에 가해진 다양한 부정적 평가, 즉 기성체제를 정당화하는 이론이라는 등의 비판에서 벗어난 새로운 게임이론을 구축하려고 노력해왔다
이 책의 목적은 게임이론을 활용한 오스틴 소설분석이 아니다. 저자는 오스틴이 오히려 게임이론의 ‘선구자’이며 그의 소설이 ‘약자들의 무기’로서 게임이론의 발전에 기여할 풍부한 통찰을 담고 있음을 밝히려고 한다. 그래서 멀리 거슬러올라가 미국 흑인 노예의 민간 설화 등에서 노예가 생존을 위해 구사하는 전략을 살피며 게임이론의 원형을 찾기도 하고, ‘눈치’라는 한국어의 용법을 들어 게임이론에서 상대방의 언행을 보고 속마음을 빨리 파악해 대응하는 전략적 사고와 선택이 결정적으로 중요함을 설명하기도 한다. 평자에게 게임이론을 제대로 평가할 능력은 없지만, 문학과 사회과학의 생산적 대화로서 이 책이 지니는 가능성은 살펴볼 가치가 있다. 그 방편으로 문학연구 분야에서 널리 인정받는 분석을 뒤집는 논의가 나오거나 문학연구가 간과한 통찰이 있는지를 살피는 것이 지름길이다
저자는 오스틴의 소설 6편을 고루 다루지만 상대적으로 많이 언급하는 인물은 『맨스필드 파크』(Mansfield Park)의 여주인공 패니 프라이스와 『설득』(Persuasion)의 앤 엘리어트, 그리고 『에마』(Emma)의 에마 우드하우스이다. 패니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입 하나라도 덜어보려고 어릴 적부터 부유한 이모집에 보내져 얹혀 사는 처지이고, 앤은 열아홉의 나이에 무일푼의 해군장교 웬트워스와 사랑에 빠지지만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의 친한 벗이자 보호자 격인 레이디 러셀의 설득에 못 이겨 그의 청혼을 뿌리친 후 이제는 짝을 찾을 가능성이 없이 시들어가고 있다. 패니는 소극적이고 주변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지만, 저자의 평가대로 오스틴 소설의 인물 중에 가장 단호하며 지극히 불리한 현실에서도 전략적 선택을 해내며 성장해 마침내 행복을 쟁취한다. 앤 역시 아버지와 자매들의 오만과 몰이해에 시달리면서도 8년 만에 재회한 웬트워스와 우여곡절 끝에 사랑을 확인하고 맺어진다. 패니와 앤은 ‘약자의 무기’로서 게임이론의 전략적 사고와 선택을 적절하게 해냄으로써 행복을 찾는 대표적 주인공인 것이다. 반면에 에마는 앞의 두 여성과 대조적으로 부족한 게 없는 유복하고 사랑스러운 주인공인데, 저자는 그를 전략적 사고의 함정에 빠진 인물로 풀어낸다. 에마는 타인의 언행 뒤에 숨은 동기를 자기중심적으로 지레짐작하고 행동하다가 거듭 낭패를 당하고 그런 약점을 넘어설 때에야 비로소 사랑을 얻게 된다
오스틴 전문가의 눈에는 저자의 논의가 별로 새롭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게임이론에 근거한 작품해석은 오스틴의 냉철한 현실감각을 돋보이게 하는 효과가 크다. 가장 명징한 예가 『오만과 편견』의 넷째 딸 리디아에 대한 분석이다. 리디아는 부모 몰래 위컴과 사랑의 도피를 감행하지만, 위컴은 큰 지참금 없이는 리디아와 결혼할 생각이 없는 파렴치한 인간이다. 그런데 저자는 애당초 리디아가 지참금을 얻어 결혼할 유일한 길은 이같은 위기상황을 자초해 재력 있는 친척이 집안의 명예를 위해 자신을 구제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을 던진다. 리디아는 그런 전략적 선택에 딱 맞는 위컴이라는 인물을 만난 것이며, 경박한 어머니 베넷부인도 딸이 저지른 망신스러운 곤경을 자신의 부유한 동생 가드너가 해결하리라 기대하는 태도를 보인다. 엘리자베스를 사랑하는 다아시가 위기의 해결사가 된 덕분에 이루어진 리디아의 때이른 결혼은 언니인 제인과 엘리자베스, 그리고 독자들에게는 어리석음과 방종에 대한 망측한 보상처럼 보일 뿐이지만, 저자는 오스틴이 리디아를 대하는 냉혹한 시선을 인지하면서도 리디아의 선택이 지닌 나름의 합리성을 꿰뚫어보고 있다
이 흥미로운 책은 오스틴이 기법적으로 완성한 자유간접화법에 대한 정확한 분석을 비롯한 여러가지 강점에도 불구하고 수학적 모델을 기반으로 한 게임이론과 문학 사이의 거리를 여전히 느끼게 하는 면도 있다. 책을 마무리하며 저자는 『오만과 편견』의 셋째 딸 메리가 통주저음법(음악 기보법의 하나)과 인간 본성에 대해 연구하는 대목을 거론한다. 이 장면에서 메리가 가차없는 풍자의 대상일 뿐임을 저자도 잘 인식하고 있지만, 작가인 오스틴이 수학적 원리에 토대를 둔 기보법을 거론한 점이 게임이론과 연관하여 시사적이라고 발언하는데, 이는 다소 비약으로 들린다. 서로 다른 학문 간의 대화는 어렵지만 긴요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