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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1 | 한국문학의 오늘, 민족문학의 새로운 구도

 

순수·초월의 서정시와 불순·대항의 열린 시

젊은 시인들을 중심으로

 

 

김승희 金勝熙

시인. 서강대 국문과 교수. 시집 『태양 미사』 『왼손을 위한 협주곡』 『달걀 속의 생』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싸움』 『빗자루를 타고 달리는 웃음』 등이 있음. sophiak@sogang.ac.kr

 

 

1. 대문자 시의 죽음, 소문자 시의 활성화

 

‘시는 죽었다’─흔한 말이다. ‘문학은 죽었다’─이것 역시도 흔하디흔한 말이다. 흔한 말을 하기는 너무 쉽다. 그리고 흔한 말을 믿는 것도 너무 쉽다. 디지털문화와 대중문화의 확산과 더불어 문학의 지위가 격하되고 대중의 관심이 문학 고유의 범주로부터 멀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로만 야콥슨의 지적대로 시대의 변화와 더불어 시라는 하나의 특정 장르 안에서도 지배소가 달라지기도 하고 또한 한 특정 시대의 문화 안에서도 지배소의 장르가 변화하는 것일 뿐 한 장르가 그저 그대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 지배소는 개개 예술가의 시작품, 혹은 어떤 시파의 규범체계, 곧 시적 규준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특정한 시대의 예술, 곧 특수한 전체상으로서의 한 시대의 예술 속에서도 발견된다. 예컨대 르네쌍스 시대의 예술에 있어서 그 지배소는 시각예술에서 찾아지고 낭만주의 시대의 예술에서는 지고의 가치를 음악성에 두었다. 그렇기 때문에 낭만주의 시는 음악성을 지향하였다. 낭만주의 시대의 운문은 그 촛점이 음악성에 있었고 그에 따라 운문의 억양도 음악적 선율을 모방하였다. 사실주의 미학에서 지배소는 언어예술이었다. 따라서 시적 가치의 위계도 그에 따라 변모된다.”1

따라서 우리는 ‘시는 죽었다’는 대중적인 담론에 우리의 절망을 다 내어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 시대는 영화나 디지털매체 같은 시각예술이 지배소가 되어 지배적인 자리에 있는 것일 뿐 시 자체가 죽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시는 단지 이 시대의 문화 안에서 지배적으로 전경(前景)화되어 있지 않다뿐 후경(後景)에 머무르고 있으며, 대중적인 힘을 상실한 대신 오히려 더 비의적으로 될 수 있고 매니아를 위한 강력한 소수문학이 될 수 있다.  

시인이란 기본적으로 생산은 없고 소비만 만드는 주류의 담론, 즉 ‘지금-여기-있는-세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또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부르주아 담론에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주류보다는 소수의 자리에, 주체보다는 타자의 자리에 자기정체성을 놓을 때 더욱 강력하고 생명적인 예술을 창조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생산은 하지 않고 소비만 하는 부르주아를 싫어했던 롤랑 바르뜨의 입장2을 나는 존중한다.

‘시는 죽었다’라고 말할 때의 시란 ‘대문자’로서의 시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대문자로서의 시란 당대의 역사나 사회, 문화 속에서 무언가 중심적인 기능을 할 수 있었고, 그럼으로써 시인이 문화의 자리에서뿐만 아니라 역사·사회·정치의 자리에서도 전경화되어 있던 그런 시대의 예언적·사회반영적·계시적·행동지향적인 시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시는 죽었다는 말에 나는 수긍할 수 있다. 대문자로서의 시는 죽은 것이다. 대문자로서의 시가 존재하려면 시대와 세계를 총체적으로 파악하게끔 하는 중심이라거나 근원, 형이상학적 원천이 구심적으로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구심력을 가진 중심이나 세계의 총체성이 파편화된 지 오래된, 분산적인 원심력의 세계이다. 이러한 분산의 시대, 다원적인 세계 속에서 대문자로서의 시의 기능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대문자 시의 죽음의 제단에 필요 이상의 헌사나 비탄, 회한 등을 바칠 까닭은 없다. 대문자 시의 죽음은 오히려 다양한 소문자 시들의 자유로운 활성화를 낳을 수 있기 때문에 나는 어느 면에서는 대문자 시의 죽음이 오히려 무수한 젊은 시인들의 게릴라적 분출과 다양한 실험정신을 낳을 수 있는 축성(祝聖)의 계기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어머니의 불타죽은 시체에서 불의 새 포이닉스(phoinix)가 태어날 수 있듯이 대문자 시의 죽음이라는 태 안에서 힘차고 아름답고 실험적이며 자유롭고 분방한 젊은 소문자 시들이 태어나지 않겠는가?

그러나 현실은 오히려 대단히 우울하게도 시단의 무기력증과 상상력의 식물인간적 징후를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주류시인들─이렇게 말하는 것이 가능할까? 가령 권위있는 문학상을 수상하고 저널들의 각광을 받는 시인들을 그렇게 부를 수 있다면─의 시세계는 장르상 표현적인 서정시에만 국한되어 있고, 그 서정시적 경향은 대중들의 선호와 더불어 우리 시단의 광범위한 유행을 이루고 있다. 아니면 지나친 성적 표현의 방종한 배설을 해방된 시로 생각한다거나 생명사상에 대한 시를 쓰려면 꼭 자연을 노래한다든가 하는 구태의연한 규범들이 조금의 반성도 없이 되풀이되고 있다.  

실례를 무릅쓰고 말해본다면 오늘날의 우리 시단은 이상하게도 젊은 시인들이 늙은 시를 쓰고 있고, 나이든 시인들이 젊은 시를 쓰고 있는 것 같다. 가령 천양희·오규원·오탁번·최승호·김혜순·임영조·허만하·최정례·문정희 등이 탄력성과 긴장을 유지하면서 신선하고도 역동적인 젊은 시를 쓰고 있다면, 젊은 시단의 주류적 경향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는 서정시 계열의 시인들은 언어의 기교면에서 어떤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시를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새롭고 강렬한 시정신, 전복적인 시각, 생동하는 언어의 역동성을 보여준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미학적 기능만을 고려한다면 그들의 시는 현대시사에서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것으로 상당히 만족스럽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사실 그것은 우리 주류시단의 지나친 서정화 경향이라는 대세와 맞닿아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서정시란 가장 늙은 시이면서도 가장 젊은 시가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서정시편들은 젊다거나, 그렇기에 모반의 열정이 있다거나, 전대(前代)로부터 받은 문학적 규범 안에 무언가 자신의 새로운 지문과 뜨거운 숨결을 새긴다는 면에서는 아직 뭔가가 미흡하다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마치 그들은 자신들이 이미 만들어놓은 미학적 둥지의 범주 바깥으로 나가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며 그 밖으로 나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듯 보인다. 그것은 그들이 언어의 다원적 기능을 고려하기보다는 미학적 기능 한가지만에 배타적으로 골몰하기 때문이다.    

시작품이 단지 미학적 기능만을 내포한다고 보는 것은 단원론적 관점일 뿐이다. 하나의 시 텍스트는 지배소로서의 미학적 기능을 가지면서 동시에 다양한 언어적 기능들의 위계를 내포하고 있다. 가령 지시적(referential) 기능, 표현적(expressive) 혹은 감정표시적(emotive) 기능, 능동적(conative) 기능, 시적 기능, 메타언어적(metalingual) 기능 등3 다양한 언어적 기능들을 가지면서 각 기능들이 지배소에 의해 통합되고 활성화될 때 시의 탄력성과 다원적 의미, 읽는 즐거움 등이 확장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주류시단은 그러한 다양한 언어적 기능을 활성화하는 다원적 관점을 수용, 수행하기에는 너무 늙고 게으르고 뒤떨어져 보인다. 그것은 근년의 무수한 시문학상 수상자들과 그것을 결정하는 심사위원들의 세계를 검토해보면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루이 알뛰쎄르나 테리 이글턴의 미학이데올로기4를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러한 서정화 경향의 지나친 주류화 현상은 어쩌면 현대시의 범주와 영역을 실험적으로 갱신하고 확장하여 시대와 세계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탄력성있고 개성있는 젊은 시인들을 키우고 시적 지평을 확대하는 데 장애물이 된다. 지나친 서정화 경향이 배타적으로 시단을 이끌어나갈 때 젊은 시인들의 도전적 실험정신이 위축되고 상상력이 식물인간화되고 급변하는 시대와 세계에 대한 응전력이 약화된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지나친 서정화 경향이 젊은 시인들의 시정신을 마비시키고 자유로운 반미학의 실험성을 무력화하고 프랑켄슈타인의 괴물 같은 자본주의 앞에 정신의 죽음을 헌납한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서정화 경향이 주류시단을 차지하고 있는 한켠에 유하·서동욱·함성호·함민복·박상순과 같은 시인들의 치열한 실험과 김선우·김소연·이원 등의 여성시인들의 자유분방한 상상력과 새로운 시문법이 자리하고 있다. 주류에서는 벗어나지만 소문자 시로서의 다양하고 활기에 넘치는 응전력과 새로운 시문법, 역동적인 즐거움의 텍스트가 만들어진다. 이렇게 소문자로서의 시들이 활기를 띠고 새로운 시문법으로 새로운 텍스트들이 만들어질 때 내일의 시는 좀더 풍요해지리라고 생각한다.5

 

 

2. 아름다운 서정시—뉴에이지 음악?

 

우리 시대를 풍미하는 서정시의 기능 중의 하나를 나는 뉴에이지 음악의 기능과 연결시켜 생각해보고 싶다. 무한경쟁을 촉발하는 신자유주의의 채찍을 맞으며 하루하루 노예시절의 벤허처럼 살아가는 21세기 초엽 인간들의 탕진된 삶, 테러와 정신의 죽음 등 파멸적 징후들로 가득 찬 이 문명세계, 아무리 비판을 해보아도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시대와 세계 속에서 결코 주체가 될 수 없는 나 자신의 무력함을 위안해주는 평화로운 음악이 그리워 현대인들은 뉴에이지 같은 명상음악을 즐겨 듣는다. 죠지 윈스턴(George Winston), 유끼 쿠라모또(Yuhki Kuramoto, 倉本裕基), 씨크릿 가든(Secret Garden) 등의 음악은 고전음악이나 포크뮤직을 포함하여 광범위한 음악장르를 포괄하는 연주음악으로, 청각적으로 부담이 없고 인간에게 신비로운 위안을 준다는 의미에서 무공해 음악이라 불리기도 한다. 주류시라고 부를 수 있는 서정시들은 그런 무공해 뉴에이지 음악의 기능을 메마르고 탕진된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해준다고 생각한다. 잠시 운율적 향기와 더불어 한조각의 무위(無爲)를.

 

다른 때는 아니고,

참으로 마음이 평화로워졌다고 생각하고 한참 만에 고개를 들면 거기에 梧桐꽃이 피었다

살아온 날들이 아무런 기억에도 없다고, 어떡하면 좋은가…… 그런 평화로움으로 고개를 들면 보라 보라 보라

梧桐꽃은 피었다 오오

무엇을 펼쳐서 이 꽃들을 받을 것인가

─장석남 「梧桐꽃」 전문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창작과비평사 2001)에 수록된 이 시의 언어적 기능은 오직 시적 기능 하나에만 촛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 시의 언어는 자기충족적이며 자기지시적일 뿐 텍스트 바깥에 대한 어떤 지시적 기능이나 메타언어적 기능과도 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 시적 화자에게 우주는 오직 오동꽃 하나로 응축되어 다가오고, 그런 절대적 아름다움의 목도는 어느 누구에게나 영원하고 탈시간적인 감동의 경험이다. 선사(禪師)의 체험이다.

“살아온 날들이 아무런 기억에도 없다고, 어떡하면 좋은가……”라는 시구가 암시하듯 이 절대적 아름다움의 체험은 탈시간적이고 탈공간적이며 순진무구하다. 시대의 질병에 끊임없이 감염되어 살고 있는 역사적 존재, 상황적 존재, 세계-내-존재로서의 인간의 흔적은 이 텍스트 안에서 찾을 수 없다. ‘오동잎 한잎의 평화’에 의해 ‘살아온 날들이 아무런 기억에 없어지는’ 이 순진무구한 황홀. 과연 인간이 그토록 순진무구해질 수 있는가? 우리가 태어날 때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알몸의 벌거숭이였다고 해서 그때는 순수한 존재였던 것일까? 태어나자마자 우리를 코드화하려고 기다리고 있는 어마어마한 상징적 질서의 글자들이 그렇게도 쉽게 무화되는가? 테렌스 호옥스는 롤랑 바르뜨에 대한 설명에서 그의 저술 전체가 ‘순수’(innocence)라는 무언의 전제에 대한 공격이었으며 이 ‘순수’라는 전제는 ‘현대 부르주아 사회의 특징이 되는 부패라고 바르뜨가 보고 있는 그 무엇’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를 상상의 힘으로 만들어낸다. 말하자면 우리는 주어져 있는 것을 변경하고 재구축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이 거대한 감추어져 있는 공동사업의 한가닥씩을 걸머지고 있는 터이므로 어느 누구도, 영원히 존재하는 ‘현실’의 세계에 대한 ‘코드화되지 않은’(uncoded) ‘순수한’(innocent) 경험에 접근하기를 주장할 수는 없다. 간단히 말하면 어느 누구도 순진무구하지는 않다.”6

이와같은 순진무구한 서정시가 주는 위안, 신비주의적인 평화, 절대적인 것 앞에서 다른 모든 존재의 오염은 사라지고 만다. 우리는 이 시대 최고의 아름다운 서정시 중의 하나인 장석남(張錫南)의 시 앞에서 순수 혹은 무구(無垢)라는 것을 가지고 지금-여기-현실이라는 징후에 의해 오염되어 있는 ‘현실 존재로서의 나’를 탈구축하고 해체해야만 한다. 그리고 ‘참으로 마음이 평화로워졌다고 생각하고’ 바라보면 ‘거기 있는 오동꽃’에 의해 초월적인 순수를 얻게 된다. 즉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현실 존재를 떠나 역사나 사회, 공간에 의해 전혀 ‘코드화되지 않은’ 순결의 상태로 들어가게 된다. 자신의 상황을 벗어나 ‘순결의 미’에 감염되는 것이다. 뉴에이지 음악을 듣는 것과 같이 우리는 자신의 육체에 이미 부여되어 있는, 불순한 정치적·역사적·사회적·문화적 코드를 떠나게 된다. 이러한 위안, 초월적 순결에의 감염, 시대의 지문으로 가득 찬 육체와 정신의 정화—그런 것들은 아주 소중하다고 할 수 있지만 ‘지금-여기’라는 탈시간적·탈공간적 초월 안에 오히려 우리를 갇히게 한다.

 

내 서른여섯살은 그저 초여름이 되기 전에 살구를 한두어 되 땄다는 것으로 기록해둘 수밖에는 없네. 그것도, 덜어낸 무게 때문에 가뜬히 치켜올라간 가지 사이사이 시들한 이파리들의 팔랑임 사이에다가 기록해둘 수밖에는 없네.

 

살구나무에 올라

살구를 따며

어쩌면 이 세상에 나와서 내가 가져본 가장 아름다운,

살구에게 다가가 부드럽게 손아귀를 펴는 내 손길이

내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

살구를 따서 쥐고는 그 이쁘디이쁜 빛깔을 잠시 바라보며

살구씨 속의 아름다운 방을 생각하고

또 그 속의 노랫소리, 행렬, 별자리를 밟아서

사다리로 돌아와 땅에 닿았을 때 나는

이 세상을 다시 시작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내 서른여섯살은 그저 지나간 어느 저녁

살구를 한 두어 되 따서는

들여다보았다고 기록해두는 수밖에는 없겠네

─장석남 「살구를 따고」 부분  

 

오동잎 한장의 아름다움으로 응축되었던 세계는 이제 아름다운 살구로 응축된다. 시적 화자에게 서른여섯살은 ‘살구를 두어 되 땄다’는 것 외에는 덧없는 일이고 ‘그저 지나간 어느 저녁’이 될 뿐이다. 이러한 무욕, 덧없음, 초월적 무심 등은 선(禪)적인 것이지만 그의 시에서는 선적 시가 가지는 순간적으로 현실에 금을 내리긋는 돌연한 파열이나 격렬한 부정의 정신은 볼 수 없다. 그런 정신의 파열 없는 감수성만의 선적 경지란 아름답고 순진무구하지만 일상적·역사적·사회적으로 감염되어 있는 존재로서의 나의 불순함을 정화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불순함을 은폐하는 기능을 하지는 않을까? 시적 자아가 지나치게 초시간적 존재의 틀에 갇혀 있을 때 삶은 추상이 되고 시는 미학의 공허한 속박이 되고 벌거숭이 삶에 대한 팽팽한 반응이 삭제되어 삶과 시 사이, 텍스트 내부의 외연과 내포 사이 긴장이 소멸되고 만다. 이 말은 반성 없이 비만해져만 가는 우리 주류시단의 지나친 서정화 경향에 대한 비판이다.          

 

 

3. 창조적 저항, 복수적·파계적 텍스트, 비트의 함성

 

뉴에이지 음악 같은 지나친 서정화 경향의 주류 시작품들보다는 문명으로부터 고통받는 자아를 미학적으로 열려 있는 파계의 형식으로 써내려갔던 앨런 긴즈버그(Allen Ginsberg)나 로렌스 펄링게티(Lawrence Ferlinghetti), 잭 케루악(Jack Kerouac) 같은 비트(Beat) 시인들의 창조적 저항정신과 형식이 우리 젊은 시단에 더욱더 필요하다. 고고한 자기충족적 시보다는 문명과 제도, 자본주의의 비틀림 아래서 고통받는 ‘나’, ‘나’의 분열증적 광기를 표현할 수 있는 아방가르드적 예술은 세계와 나 사이의 격렬한 찢어짐을 인식하지 않고서는 나올 수가 없다. 유하의 『천일馬화』, 함성호의 『聖 타즈마할』, 강정의 「초토에서」 등의 시들, 김소연의 『극에 달하다』, 신현림과 하혜정의 작품들, 함민복의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서동욱의 『랭보가 시쓰기를 그만둔 날』 등은 그러한 주체의 분열과 세계의 파편화, 충동의 분출로서의 파계적 형식의 텍스트, 자본주의적 편집증에 대항하는 분열증적 예술가의 고뇌를 보여준다.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도 시적 기능만이 아니라 지시적 기능, 메타언어적 기능 등 텍스트 내부와 바깥을 연결하는 복수적 기능을 활성화하고 있다.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창작과비평사 1996)의 함민복(咸敏復)의 시에는 가짜 초월의 껍질을 벗기고 고정관념을 균열시키는 해체의 재미가 있다. 그의 텍스트는 역설의 두 자장(磁場) 안에 부유(浮游)하고 있으며 그 부유가 의미의 확장과 미결정성을 낳고 또한 언어는 미적 기능에만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 바깥의 세계를 환기시키는 지시적 기능, 혹은 텍스트 바깥의 담론을 슬쩍 뒤집는 메타언어적 기능까지를 가지고 있어 시 읽기의 복수(複數)적 즐거움을 선사한다.

 

달빛

장독대

한 사발

아, 저것이 美信이다

—함민복 「七夕」 전문  

 

이 시는 일단 형태적으로도 새로운 실험을 보여준다. 달빛이 장독대로 흘러내려 ‘장독대’에 고이는 모습과 또 흘러내려 ‘정안수 한 사발’에 고이는 모습과 서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텍스트는 형태적으로 환기시킨다. 이 시는 달빛을 받으며 정안수 한 사발을 놓고 서서 기도하는 어머니의 사랑에 대해 단선적으로 가치평가를 하지 않는다. 표층적으로 읽으면 ‘아, 저것이 美信이다’라는 표현을 통해 어머니의 사랑을 ‘아름다운 신념’으로 예찬하고 있는 것 같지만 이 시의 재미는 그러한 단선적 해석을 뒤집는 데에 있다. ‘아, 저것이 美信이다’를 심층적으로 읽어보면 ‘미신’이라는 기표에는 또하나의 기표와 이중의미가 겹쳐져 있다. 우리가 흔히 미신이라는 기표에서 연상하는 것은 迷信이라는 한자이기 때문에 美信이라는 기표 위로 迷信이라는 기표가 겹쳐서 다가오게 된다. 그리하여 ‘아, 저것이 美信이다’라는 말에는 어머니의 기도가 ‘아름다운 신념’이라는 예찬과 더불어 또한 ‘어머니의 기도는 迷信이다’라는 모성의 부정적 억압이 함께 읽히게 된다. 한국의 남성시인들에게 모성은 아무리 찬미해도 지나치지 않는 절대가치이므로 迷信은 美信이라는 기표 아래 흔적으로만 존재한다. 거기에서 우리는 ‘모성은 최고의 아름다운 신념이다’라는 지배담론에 대한 메타담론적 전복과 시적 자아의 균열을 읽을 수 있다.

또한 의미는 차이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고 지연되는 것이라는 데리다(J. Derrida)의 ‘차연(差延)’이 발생한다. 그리하여 마지막 행은 의미가 단일하게 결정되지 않고 美信과 迷信 사이에서 지연되며 의미작용의 범위가 넓어져서 의미는 불확정적인 가능성 위를 떠돌게 된다. 이러한 의미 결정이 지연되는 가능성 사이에 시 읽는 쾌락이 발생하고 텍스트는 즐거운 텍스트가 되고 이러한 머뭇거림 사이에 ‘어머니의 사랑은 아름다운 신념’이라는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고정관념이 전복되고 그러한 메타담론적 환기에 의해 절대모성에 대한 우리의 인식에 금이 가면서 그 이중적 의미에 의해 인식은 새로워진다.

 

어쩌자고 백목련은 항복의 白旗로

 

한 해를 시작하는가

 

한 생을 해탈한 자의 눈부신 파멸이여

─함민복 「백목련」 전문

 

먼저 음운적 층위에서 이 시는 ‘ㅎ’음이 커다란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백목련〓항복의 백기’의 은유도 신선하지만 ‘한 해’ ‘한 생’ ‘해탈’에서 ‘ㅎ’음의 흐름이 음악적 결합을 만들고 있다. 그러한 음악적 결합은 시의 통일성이나 긴밀성에 큰 작용을 하는데 그러한 음악적 결합은 ‘해탈’ ‘파멸’과 같은 이질적·대립적인 의미를 가진 단어 차원에서는 다른 작용을 하게 된다. 즉 ‘ㄹ’의 음운적 동질성을 우리가 느끼는 사이 또한 ‘해탈’ ‘파멸’의 의미의 이질성·대립성을 함께 느끼게 된다. ‘해탈’이 곧 어떤 세계의 ‘파멸’이라는 처절한 모순을 ‘ㄹ’의 동질성에 의해 더욱 강하게 느끼게 된다.

그리하여 이 ‘항복의 백기’가 가진 ‘해탈’과 ‘파멸’이라는 역설적 이중적 의미에서 ‘ㄹ’음의 동질성에 의해 그 이질성이 더욱 강하게 전경화되고 해탈·파멸 사이 목련의 흰빛은 그 의미의 결정 가능성이 넓어진다. ‘항복이 곧 파멸’이라는 자본주의사회의 판에 박힌 고정관념도 ‘해탈’에 의해 무너지며 탈영토화된다. 독자들은 이런 종류의 전복과 역설을 통한 탈영토화를 통해 환자처럼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편집증적으로 자본주의의 문법 속에 사로잡혀 달려온 굳은 정신의 껍질을 부수고 내면의 자유를 획득하게 된다.

 

『랭보가 시쓰기를 그만둔 날』(문학동네 1999)의 서동욱의 시는 전위적 시정신으로 가득 차 있으며 시문법이 새롭고 우리가 갇혀서 살고 있는 의식의 금기들을 가로지르며 우리 시대 상징적 아버지의 법에 항거하는 전복의 힘을 가지고 있다. 때로 그의 시는 랭보의 삶이나 시인 이상(李箱)의 삶을 환기시키는 겹쳐지는 텍스트, 복수적 텍스트의 열려 있는 형식을 보여주는데 「서시적 종생기」라는 그의 시집 첫번째 시가 그러하다.

 

묘지명(墓地銘)이라

스물 셋이요—3월이요—각혈, 아니

비만이다

 

여섯달 잘 기른 수염을 하루

면도칼로 다듬어 코밑에 다만 나비처럼

남겨가지고

살 빼는 약 한 제

지어들고 ××관광단지 내

온천으로 갔다

게서 나는 죽어도 좋았지만

더 살이 찌긴 싫었다……

 

이상의 「종생기」와 「봉별기」를 뒤섞으면서 시작하는 이 시는 이상이 스물세살 때 폐결핵에 걸려 총독부 기사직을 그만두고 한약 한제를 지어들고 ‘신개지 한적한 온천’으로 요양차 갔던 일을 패러디하고 있다. 이 시의 화자는 치명적인 병인 폐결핵을 고치러 가는 게 아니라 후기자본주의의 치명적 병인 비만을 고치러 간다. 폐결핵을 고치러 배천온천으로 갔던 이상이 거기서 금홍이를 만나 서로 사랑하였던 비극적 만남은 ‘관광단지 내 온천’으로 가서 ‘온천장의 금모(某)라는 마사지걸’을 만나는 일로 패러디되면서 전국토가 유흥지화된 우리 시대의 죽음 같은 퇴폐를 환기시킨다. 금모는 메타언어적 기능으로 이상의 치명적인 애인이었던 작부 금홍과 연결되기도 하고 지시적 기능으로 황금 페티시(fetish)에 걸려 있는 이 시대 여성들의 기호가 되기도 한다.

시의 첫 구절인 “묘지명이라”는 이상의 「종생기」 중간에 나오는 “묘지명이라. 일세의 귀재 이상은 그 통생의 대작 「종생기」 일편을 남기고 서력기원후 일천구백삼십칠년 정축 3월 3일 미시 여기 백일 아래서 그 파란만장(?)의 생애를 끝막고 문득 졸하다. 향년 만 이십오세와 십일개월. 오호라! 상심커다. 허탈이야 잔존하는 또하나의 이상 구천을 우러러 호곡하고 이 한산 일편석을 세우노라”를 비극적으로 환기시키면서 또한 희극적으로 이 시대의 묘지명은 즉 관광단지요, 온천장이요, 전국토화된 유흥장임을 암시한다. 이 시에서의 언어적 기능은 이상의 「종생기」 「봉별기」와 연결되어 있는 메타언어적 기능이 지배소가 되고 있고 지시적 기능, 시적 기능들이 복합적으로 활성화되어서 복수적 텍스트의 묘미를 느끼게 한다.

 

이 종말록의 표지화

(드디어 때가 왔는가?)

심판이 시작되자 순식간에

수챗구멍마다 가득 차는

영혼들.

 

「서시적 종생기」는 시인 이상의 개인적 종생기이기를 넘어 시대의 종생기로 확장되어간다.

 

그러니 써볼까?

 

목에 칼을 맞기 일분 전에

눈물을 찔끔거리며, 이제서야

남은 시간을 다해서,

피둥피둥한 돼지들의 이야기

 

이를테면 이렇게,

스물셋이요—삼월이요—비만이라.

나 금모(某)의 정부(情夫)는 천하 눈 있는 선비들의 간담을

간지럽혀줄 종생기 일편을 남기고 졸(卒)하다

 

요사로구나

아니올시다 비만사올시다

 

「종생기」를 쓴 일세의 귀재 이상은 ‘금모의 정부(情夫)’로 바뀌고 ‘선비의 간담을 서늘케 할’ 종생기 일편은 ‘선비들의 간담을 간지럽혀줄’ 종생기로 바뀌고 (스물다섯 11개월 아름다운 청년의 요사인) ‘노사’는 ‘비만사’로 바뀌어 있다. 귀재 이상/금모의 정부, 간담을 서늘케 할/간담을 간지럽혀줄, 청년의 노사/비만사의 차이를 만드는 희극적이면서도 무표정한 패러디에 의해 우리는 죽음 이후의 질병을 앓고 있는 후기자본주의 시대의 절망 이후의 절망이라는 징후를 읽게 된다. 이상의 질병이 식민지시대 역사의 위기의 환유였다면 서동욱 시의 ‘질병으로서의 비만’은 후기자본주의 시대의 정신의 위기에 대한 환유이다.    

 

그날 X는 우리에게 훈계하고 있었다

수프를 따르기 직전 접시 바닥에서

이물질이 발견되었던 것!

중대한 사고일 수도 있지만

우리는 가소로웠다 떠들고 있는 그는 실은 X가

아니라 X의 최하급 시종에 불과했다

지금은 출세했지만

   (…)

그러나 X는 죽고 그

시종은 처형되고

나는 더이상 주방에서 일하지도 않는데,

기억은 물거품처럼 부스러졌고

생활은 안정되었는데,

 

도대체 몸 안에 뭐가 있길래 가렵지?

현상 밑엔 반드시 그 뿌리가 있는 법이지

한번 찾아내보자

손톱을 세워 긁기 시작하니

처음엔 피부가 벗겨지고 다음엔 뻘건

살이, 그리고 근육과 혈관들이

터져나가고 마침내

손톱 밑에선 하얀 뼈가 사각

사각 긁히고 있었다 야

뼈도 가려워하고 있었구나

—서동욱 「가려움증에 대해서—X 혹은 신체적 형벌 1」 부분

 

보이지 않고 들리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지만 곳곳에 편재하며 무수한 권력을 조종하면서 시적 자아의 현실 속으로 파고드는 상징적 절대자 X는 카프카(F. Kafka)의 『심판』이나 죠지 오웰(George Orwell)의 『1984』, 마가렛 애트우드(Margaret Atwood)의 『하녀들 이야기』 등에 잠복되어 있는 상징적 남근, ‘숨어 있는’ 절대권력자의 은유이다. 예술적 자아는 이러한 상징적 남근과 맞서 있는 긴장과 전복적 열정, 곳곳에서 X의 암호를 풀려는 동물적 에너지를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세속적으로 위축된 자아의 희극적 반응, 가려움증에 집중함으로써 숭고한 초월적 의지를 가질 수조차 없는 이 시대의 초라한 자아의 비천함을 드러내준다. 투명한 X의 권력, 혹은 그것의 작은 기표들 앞에서 거부적 자아가 느끼는 것은 이전 세대의 숭고한 항거와는 거리가 먼 고작 ‘가려움증’ 같은 것이지만 시적 화자에게 그것은 원시적 본능의 진지한 반항충동 같은 것으로서 그 X의 권력의 절대성을 훼손하려는 약동의 함성과도 같은 부정성의 징후가 된다고 하겠다.

 

 

4. 대항과 탈주의 힘

 

나는 한국시가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지금처럼 나른하고 초시간적인 서정화 경향의 대세에서 벗어나 나르씨시즘적이고 유아적인 거울 단계를 파괴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여성시인에 대해 언급하지 못했지만 1980년대 이후 여성시들이 보여준 전복적 에너지와 미학의 쇄신, 상상력의 활력은 폭발적이었다. 그들이 현대시의 미학과 내용의 한 지평을 확대할 정도로 폭발적인 아방가르드적 열정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처한 새로운 주체 인식에서부터 출발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타자다, 나는 소수다, 나는 일그러진 세계 속에서 일그러진 상징계의 힘에 의해 왜곡되어 있는 존재이며 그 왜곡의 암호를 풀고 싶다, 그 왜곡의 암호는 내 정신뿐만 아니라 내 육체에까지 새겨진 암호이다, 그리하여 내 시는 무의식으로서의 창조적 파괴력과 동시에 창조적 대항의 상상력을 가져야 한다. 지배담론에의 순응의 거부와 대항의 고통을 바치면서 동시에 새로운 우주를 창조할 수 있었던 뜨거운 상상력.’

그러한 소수자의 벌거벗은 고통의 인식과 절박한 경험은 안정된 서정화 경향의 미학적 우주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게 했으며 열린 미적 프로그램을 다양하게 스스로 발명할 수 있게 하였다고 생각한다. 미국문학에서도 주류계급 백인남성의 문학이 무기력하고 미학적으로 보수성에 머물러 있는 데 반해 백인여성, 흑인여성, 혹은 아시아계 아메리칸, 라틴계 아메리칸, 토착 아메리칸 등 소수자들의 문학이 훨씬 더 활기차고 전복적인 힘과 열린 형식을 찾아내고 있다. 초시간적이고 탈역사·탈공간적인 시들보다는 ‘지금-여기-나’를 발견하는 대항적인 담론과 열려진 파계의 형식의 텍스트들이 더 활력을 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정이라는 이름의 진공(眞空)적인 초시간의 시학에서 ‘지금-여기-역사와 사회에 의해 불순해진 나’의 시간성과 공간성, 상황성을 복수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시문법의 발견이 정말 절실하다는 생각이다. 아드리엔 리치(Adrienne Rich)의 말이 생각난다. “시를 쓴다는 것은 잘 다듬어진 얼마간의 재료를 미리 정해진 구조 속으로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며 새로운 활력과 새로운 깨달음을 만들어나가는 것이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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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Roman Jacobson, The Dominant, Twentieth-Century Literary Theory (St. Martin’s Press 1997) 6〜7면.
  2. 테렌스 호옥스, 오원교 옮김 『구조주의와 기호학』(신아사 1982) 152〜53면 참조.
  3. R. Jacobson, 앞의 책 8〜9면.
  4. 미학이데올로기라는 어구는 문학텍스트의 평가와 미학적 고찰의 존중을 포함하여 문학 및 문학비평 생산의 조건이 되는 일단의 신념과 관행을 말한다. 미학이데올로기의 이론은 알뛰쎄르의 뒤를 이어 테리 이글턴에 의해 정리되었는데, 이글턴에 의하면 미학이데올로기란 일반 이데올로기 중에서 예술에 관계하는 영역에 존재하고, 미적 반응이란 자발적이며 비이데올로기적이라고 이해되는 개인적 경험과 연계되는 힘을 가진 것으로 본다. 그래서 미학이데올로기가 산출하는 지식은 실은 역사적으로 구축된 것이면서도 ‘자연스러운 것’처럼 보인다. Terry Eagleton, The Ideology of the Aesthetic (Cambridge: Blackwell 1990) 참조.
  5. 이 글에서는 남성 시인의 시만 주로 언급한다. 여성시에 대해서는 필자의 편저인 『남자들은 모른다』(마음산책 2001) 참조.
  6. 테렌스 호옥스, 앞의 책 148면 참조.
  7. James Breslin, From Modern to Contemporary: American Poetry, 1945〜1965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4) 61면에서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