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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시간의 원근법과 잔여물

박형준·전남진·이원의 최근 시를 중심으로

 

 

김수이­ 金壽伊

문학평론가. 경희대 강사. 평론집 『환각의 칼날』이 있음. whitesnow1@hanmail.net

 

 

1. 다양한 시간들의 공존

 

우리 시대의 자연과 문명은 화합이 아닌 일차원적인 ‘합성’의 상태에 있다. 자연과 문명이 기계 인간처럼 합성된 세계에서 오늘의 시인들은 어디에 속해 있어야 할까? 또 시간이 제 운명을 다하기도 전에 미래가 급습해 과거의 생성 속도를 빠르게 하는 시대에 시인들은 어떤 시간을 살아야 할까? 근대의 초기에 뛰어난 선각자들이 간파했듯이, 우리는 ‘근원의 키메라’(니체)가 죽임을 당하고, 자족적 유기체인 자연이 무너져 ‘반자연의 미학’(보들레르)이 예술의 모토가 되었으며, 아우라를 상실한 산업사회에 반발하는 ‘소외된 세계의 재소외’(아도르노)를 통해 진정성에 이르는 기묘한 세계에 살고 있다. 근대는 처음부터 ‘자연’과 ‘과거’를 낡고 무용한 것으로 취급하였다. 근대의 터전은 파괴된 자연 위에 마련되었고, 근대의 정당성은 미래의 환상으로 확보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대에 대한 반성이 가속화되는 지금도, 자연과 과거는 여전히 부정적인 대상으로 분류된다. 다시 찾고 싶은 아름다운 세계이지만, 분별없이(?) 그리워해서는 안되는 것. 문명과 현재를 성찰할 수 있는 좋은 거울이지만, 망각의 도피처가 될 가능성이 있어 위험한(?) 것. 자연과 과거에 대한 선입관은 어느정도 고정된 느낌마저 든다. 그러나 차원이 다를 뿐 문명과 현재 역시 우리에게는 부정의 대상이다. 인간의 본성을 억압하는 문명과 인간을 분절하고 소외시키는 시간을 승인할 수는 없는 까닭이다. 근대세계는 이처럼 시간과 공간을 동시에 분리함으로써 존재를 이중으로 분열시켜왔다. 오늘날 시인들이 끊임없이 근원을 갈구하는 것은, 근대문명이 선천적으로 근원의 결핍을 안고 있는 강박의 문명인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시공간의 분할과 합성이 근대세계의 중요한 특징임을 감안할 때, 최근 젊은 시인들의 시에서 비동시적인 시간의 공존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흥미롭다. 거창하게 말하면, 이는 우리 사회에서 진행되는 근대의 단계를 시사하는 현상으로도 볼 수 있다. 젊은 시인들이 그리는 다양한 시간은 마치 시간의 역사적 단면을 한곳에 펼쳐놓은 듯한 인상을 준다. 이질적인 가치가 범람하는 시대에 젊은 시인들은 사실상 하나의 시대감각으로 통합되지 않는다. 이들의 시에 다양한 시간이 혼존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인 셈이다. 비동시적 시간의 공존은 두 가지 배경으로 설명될 수 있다. 첫째, 근대의 가속도가 몇 세대를 압축할 정도에 이르러 그 중첩이 젊은 시인들의 시에 반영되었다는 것. 역사적으로 전개된 시간이 한 지점에 집결하는 이러한 현상은 세계의 변화속도가 빨라지면서 앞으로 더 심화될 것이다. 둘째, 90년대 이후 문학의 다원화로 우리 시가 다양한 시간의 스펙트럼을 갖게 되었다는 것. 시간의 스펙트럼은 시간의 차원을 넘어 시인의 세계관과 감각 및 가치의 다양성을 포괄한다. 시인들은 이제 자신이 존재할 시간을 ‘선택’함으로써 시적 지향과 미학적 입지를 드러내는 중에 있다.

이런 관점에서 박형준·전남진·이원의 최근 시들은 젊은 시인들의 다채로운 시간 유형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가 된다. 어린시절과 전설 속의 시간이 살아숨쉬는 박형준의 『물속까지 잎사귀가 피어 있다』, 일상적인 현재의 시간이 빽빽이 꽂혀 있는 전남진의 『나는 궁금하다』, 해체되고 가공된 미래의 시간이 스멀거리는 이원의 『야후!의 강물에 천 개의 달이 뜬다』는 현재 우리 시가 소유한 폭넓은 시간의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세 시인들은 안주할 수 있는 진정한 시간이 사라진 세계에서 각기 다른 시간에 편입된 삶의 풍경을 그리면서, 시의 기본 코드인 자연과 문명, 생활세계와 바깥세계,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개성적인 방식으로 조합해낸다. 이들의 시가 한곳에 모여 있는 풍경은 하나의 거대한 ‘시간의 박물관’을 형성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그 속으로 풍성한 시간여행을 떠나게 해준다.

 

 

2. 오래된 시간의 성(城)---박형준

 

지금 우리 시단에는 과거 어느 때보다 미학적인 열망이 번성하고 있다. 경험적 현실과 일상의 감각보다는 자연과 내면을 우위에 두는 시인들은 미묘한 시세계를 빚어낸다. 각기 성향은 다르지만, 장석남·나희덕·박형준·안도현·고두현·고창환·문태준·권혁웅·김선우 등의 시인이 여기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굳은 감각의 각질을 벗겨 새살이 돋게 하는 ‘감각의 박피술’이나, 기억의 내용물을 훼손하지 않고 그대로 보존하는 ‘기억의 응고술’을 활용한다. 미적인 것에 대한 갈망이 하나의 경향이 된 것은 주목해야 할 사안이다. 여기에 관해서는 비판적인 시선이 좀더 우세한 듯하다. “초월적 순결에 감염”되어 “반성 없이 비만해져가는 우리 시단의 지나친 서정화 경향”을 질책하고(김승희), “삶의 경험적 실감보다는 섬세한 상상적 미감을 줄곧 택하”는 시인들의 태도와 “우리 시에 만연해 있는 자연 과잉, 유년(기억) 편향에 대한 근원적이고 비판적인 검토”를 제안하는(유성호) 것은 대표적인 경우이다. 진지한 성찰과 비판정신이 돋보이는 이 견해들은 문제의 본질을 날카롭게 간파하면서 경청할 만한 방향성을 제시한다. 그러나 자연과 과거의 시간이 갖는 시적 의미에 대해서는 더 숙고해볼 여지가 있다고 생각된다.

우선, 자연의 미학이 중심 담론이 된 근본적인 이유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현실적인 배경에 있다. 근본적인 변화의 가능성이 없는 현실 속에서 시인들은 ‘미적인 것’을 하나의 출구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현실의 공허함에서 촉발된 미학적 열망은 자연과 과거의 삶에 대한 그리움과 연결되며, 이때 문학적 진정성은 현실적·윤리적 규범이 아닌 미학적 규범이 된다. 오늘날의 시인에게 요구되는 것이 창조적인 반미학의 정신이나 불합리한 세계에 대한 현실대응력인 것은 분명하지만, 자연을 노래하는 일이 반드시 이에 위배되는 것은 아니다. 자연은 문명과 현재의 경험된 과거이자, 시인이 꿈꾸는 당위적 미래이기 때문이다. 과거형이나 미래형으로만 존재하는 세계가 시인의 의식 속에서 재구성될 때, 기억과 상상의 행위는 현재를 극복하고 자아를 회복하는 하나의 미학적 실천이 된다. 이는 자연을 노래하는 모든 시들의 정당성을 주장하고자 함이 아니다. 현재 자연이 처해 있는 특이한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 시대 ‘자연의 미학’은 자연의 실물이 이미 파괴되었기에 그 자체로 ‘반자연의 미학’의 성격을 띠게 된다. 자연이 곧 반자연이 되는 역설은 아름다운 자연을 노래하거나 황폐한 자연을 노래하거나 똑같이 발생한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 진정으로 자연을 노래한다는 것은 이 역설의 운명을 껴안는 일이며, 매순간 기억 속의 자연과 현재의 자연 사이에 있는 격차를 고통스럽게 확인하는 일이 된다. 문제는 미(美)에 도취되거나 자연을 미학화하는 일 자체에 있지 않으며, 시인이 이 역설의 운명을 얼마나 성실하게 감당하는가에 있다. 이 성실성이 아름다운 시어나 초월적인 시간을 배제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다. 더불어 중요한 것은 한편의 시에서 자연과 과거가 어떤 문맥에서 소환되고, 그 재문맥화에 따른 잔여물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이러한 항목들이 얼마나 깊이 인식되고 있는가에 따라 그 시에 대한 평가는 달라지게 될 것이다. 자연을 노래하는 시들의 문제점을 경계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 배후와 맥락을 꼼꼼히 따져보는 일이 선행되어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이런 배경에서, 박형준(朴瑩浚)이 최근에 펴낸 시집 『물속까지 잎사귀가 피어 있다』(창작과비평사 2002)는 ‘자연의 미학’을 전면에 내세운 문제적인 텍스트가 된다. 소멸의 문제를 깊이 천착해온 박형준은 지나간 시간들을 현재로 불러들여서 서로 접목시키며, 의식 속의 자연의 풍경을 공들여 묘사한다. 그는 ‘시간의 주술사’처럼 “기억이 없는 곳”(「城에서 1」)까지 손길을 뻗쳐 ‘시간의 성(城)’을 축조한다. 이 성에는 해당화와 백동백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고, 능구렁이의 울음소리가 들리며, 노망든 할머니가 ‘남묘호랑갱이요’를 중얼거리고, 팔순의 어머니가 아들에게 가슴을 찢어야 삶이 보인다고 가르친다. 시간의 성은 곧 박형준의 울창한 ‘내면의 성(城)’으로, 그의 내면에 존재하는 여러 시간들로 이루어진다. 이 시간들은 그의 내부에서 서로 뒤섞여 저마다의 생을 지속한다. 시집 『물속까지 잎사귀가 피어 있다』는 박형준의 내면의 풍경을 부조한 음화(陰畵)이며, 그 스스로 행한 정신분석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내면의 풍경은 거의 예외없이 자연의 사물을 빌려 묘사된다.

박형준의 내면 밑바닥에는 생에 대한 난감함과 존재적 불안이 도사리고 있다. 그는 생보다 오히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마음을 다해 자신의 소멸을 희구한다. 이를테면, 그에게 ‘죽음’은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활짝 핀 모란꽃 옆에서/졸음에 빠져들며/자신을 잊어가는 것”(「자취」)이다. 그가 원하는 소멸을 몽환적으로 서술한 이 구절은 죽음이란 자기망각이며 존재육탈이라고 말한다. 박형준에게 생의 난감함은 존재한다는 사실과 자신에 대한 멈출 수 없는 자의식에서 연유한다. 시집 전체에 걸쳐 등장하는 ‘뱀’과 ‘속’ ‘구멍’ ‘심연’의 이미지는 존재의 고통과 끊임없이 내파(內破)하는 그의 의식의 방향성을 보여준다. 박형준의 내면에는 아무리 허물을 벗어도 육탈할 수 없는 ‘뱀’이 있고, “우물에 먹혀 영원히 함께 죽고 싶었”(「城에서 1999」)던 소멸에의 갈망이 있다. 그러나 목이 잘린 채 강물에 버려져도 ‘뱀’은 “흘러서 흘러서/내 얼굴로 돌아오”(「내 얼굴로 돌아오다」)고, ‘나’는 결코 내가 원하는 깊은 내부에 이르지 못한다. “심연에 내려가려면,/날개가 있어야 하”(「폭풍의 날개」)기 때문이다.

 

심연을 잃고

물 밖에 떨어진 잎사귀

그게 나다,

도망은 끝난 지 오래다

---「폭풍의 날개」 부분

 

박형준은 “도망은 끝난 지 오래”인 생의 현실에 발이 묶여 있다. 생과 자신에게서 도망할 수 없는, “심연을 잃”은 그에게 도달해야 할 다른 생의 공간은 없다. 남은 것은 흘러가거나 한곳에 고여 있는 시간이며, 이것을 견디는 자신이다. 박형준이 자주 사용하는 ‘멀리’ ‘건너가는’ ‘떠나는’ 등의 공간을 전제한 어휘들은 실제로는 시간의 감각을 진술한다. ‘〜이었습니다’ ‘〜였던 것이었습니다’ ‘〜고 있었다’ ‘〜인 것이다’ ‘〜라네’ 등의 과거형 어미가 자주 활용되는 것도 그의 주된 경험공간이 지금의 여기가 아니라는 점을 증거한다. 박형준에게 자아와 세계의 분열은 시간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는 이 분열을 ‘옛 세계와 새 세계의 충돌’로 이름 붙이는데, 홍수에 떠내려온 ‘살모사’와 ‘물고기’의 관계는 그가 생각하는 이 세계와 현실의 구도를 우화적으로 보여준다.

 

(…나무뿌리에 걸린 물고기가 살모사의 입 속으로 들어가자, 그 순간, 지상에는 새로운 이미지가 만들어졌다. 처절하며 철저한 후회---옛 세계를 삼킨 새 세계의.)

홍수에 떠밀려 하류로 휩쓸려온 얼룩동사리와

살모사의, 이질적인 두 세계의 충돌.

살모사의 목구멍 속에서,

죽은 순간까지 후회하는---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영원히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비명소리가 터져나온다.

---「城에서 1999」 부분

 

‘성(城)’을 제재로 한 연작의 하나인 이 시는 위태로운 실존과 존재의 운명을 비극적 아이러니로 묘파한다. 익사의 위기 속에서도 먹이를 삼킬 생각에 즐거운 살모사, 그 살모사에게 잡아먹히다 살모사의 혀를 깨물어 같이 죽음에 이르는 얼룩동사리는 서로의 외부이면서 내부이다. 서로를 삼키는 구멍[심연]이면서 구멍의 바깥이다. “옛 세계를 삼킨 새 세계”는 이러한 모습으로 결합해 있다. 다르게 말해서, 우리 세계의 과거와 현재, 근원과 현실, 자아의 내부와 외부는 표면상 흡수·통합의 관계에 있으나, 속으로는 “아아아〜”의 비명소리가 끊이지 않는 대립의 관계에 있다. “이질적인 두 세계의 충돌”은 “처절하며 철저한 후회”를 남긴 채 양자의 몰락으로 끝이 난다. 이 결말에는 현실에 대한 박형준의 부정적인 진단이 개입되어 있다. 그렇다면 박형준은 죽음의 위기에서도 먹이를 탐하는 살모사일까, 잡아먹히는 순간 살모사의 혀를 깨무는 얼룩동사리일까, 혹은 둘 다 죽은 후에 “홀로 전생의 기억을”(같은 시) 떠올리는 나무뿌리일까?

박형준이 이 모두라는 것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뱀’이 그의 자아의 변신체(變身體)라는 것은 앞에서 보았거니와, 이 시집은 ‘뱀’과 ‘얼룩동사리’와 ‘나무뿌리’의 변주된 이미지들로 가득하다. ‘뱀’의 상징성은 그와 어머니와의 관계에서도 확인된다. “여러개로 분리되어 허공을 날아다니며/눈이 된 어머니를 녹여 먹”(「얘야, 밖에 눈이 온단다」)으며 자란 그는 성인이 되어서는 어머니의 사랑에 속수무책으로 결박(?)당한다. (그러고 보니, 살모사는 새끼가 어미를 잡아먹고 크는 동물이다.) 또한, 박형준은 “죽음의 공포를 이겨내기 위해 자신의 이름을 외고 있”(「城에서 1999」)는 ‘얼룩동사리’이다. “개뚝지, 개미고기, 구구라기, 구구락지, 구구리, (…) 쭉저거리, 쭉제기, 참복찌, 후구락지”(같은 시) 등 한 페이지가 넘게 이어지는 이름들은 반복과 차이를 지닌 언어의 주술을 통해 자아의 정체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을 보여준다. 이때의 박형준은 “남묘호랑갱이요”(「나비」)를 외우며 나비가 되고 싶은 소원을 비는 할머니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박형준이 유년기의 설화적 세계를 복원하는 것은 자기 정체성 확인의 의지에서 비롯되며, 자연의 사물은 그 은밀한 상징으로 기능한다.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나는 장소는 ‘성(城)’이다. 카프카의 성을 닮은 박형준의 ‘성’에는 단절과 죽음, 일상의 황량함과 독신자의 비애가 쌓여 있다. “친근한 영혼은 모두 내 곁을 떠나가”(「봄밤의 경적」)고, 오직 “한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동지」)는 개별적인 실존의 공간이 성이다. 성과 존재는 흡사 살모사와 얼룩동사리와 같은 관계를 맺고 있다. 고독한 존재 K는 자신만의 성에 갇혀 있지만, 놀랍게도 “城은 언제나, K의 내부에 있었다”(「城에서 1995」). 이 지점에서 박형준의 ‘내부와 외부의 변증법’은 새로운 단계에 돌입한다. 성과 존재가 서로의 내부이며 외부이기에 존재를 둘러싼 공간적 정황은 크게 변한다. 이제 ‘구멍’은 존재를 무화시키는 심연이 아니라, 존재를 살아 있게 하는 ‘숨통’이 된다. ‘묘지의 구멍들’이 영혼의 숨통으로 화하는 다음의 시는 아름답고 따스한 장면을 연출한다.

 

새집은 나무의 숨통이다

겨울강 밑에 떠다니는 물고기들이

뚫어놓은 구멍들, 묘지의 구멍들,

다 영혼이 숨을 잘 쉬기 위해 그런 것이다.

 

(…)

나는 산이 부화시키고 있는 알,

숨겨진 무덤들과

그 밑으로 펼쳐진 조그만 강을 아득하게 바라본다.

그리고 나무에 기대어

하늘로 뻗어 올라가는 길을 더듬는다.

 

밤이 되면 성은 기다란 몸을 추슬러

푸른빛을 섞은 뱀이 되어

나무 위로 올라간다

---「城에서 1」 부분

 

삶의 도처에 뚫려 있는 구멍들은 이제 존재의 소멸이 아닌 생성에 기여한다. 존재의 공간적 등가물인 ‘성’이 생명을 지닌 대리물인 ‘뱀’으로 변하는 순간에 시인의 실존적 자아와 원초적 자아는 하나가 된다. ‘성’이 ‘뱀’이 되어 올라간 ‘나무 위’는 박형준이 “발자국을 낳고 싶”은 곳이며, “아이를 낳고 싶”은 ‘달’로 가는 중간 경유지이다(「봄밤」). 이번 시집에서 박형준이 그리는 자아의 드라마는 여기에서 완성된다. 박형준이 인식하는 이질적인 두 세계[과거와 현재, 자연과 문명]의 충돌은 얼룩동사리의 대립쌍인 ‘뱀’과 존재의 등가물인 ‘성(城)’의 합일, 그리고 죽음의 심연에서 생명의 숨통으로 화한 ‘구멍’ 이미지의 변주를 통해 발전적으로 해소된다. ‘성→뱀→나무’로 표상된 ‘고립된 공간→죽음의 동물적 이미지→생명의 식물적 이미지’의 전이도 그의 의식의 상승과정을 보여준다. 이는 박형준이 이번 시집에서 이룬 중요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한가지 문제로 남는 것은 박형준이 표출하는 미의식에 있다. 어느날 그는 길에서 발견한 예쁜 ‘헝겊’이 그것을 집는 순간 ‘뱀꼬리’로 변하자, “이제는 집을 수도 발을 뗄 수도 없는 붉은 헝겊이 내게는 美의 전부였음을 안다”(「능구렁이 울음소리」)고 토로한다. 실체와 착시 사이에 존재하는 이 거리가 그의 미의식이 발생하는 자리라면, 이는 현실적인 문제를 유발하게 된다. 그의 말처럼 미의 실제 내용은 대부분 자아의 주관적인 상상이나 환상일 수 있다. 그러나 아름다움이 대상과의 관계가 아닌 자아의 착시로 발생하게 될 때, 박형준이 애써 이룬 화합은 ‘봉합’으로 그칠 가능성이 크다. 이 경우 그는 시간이 초래한 자아의 분산도, 과거와 현재, 자연과 문명의 균열도 감당하지 못한 채 자기 반복의 ‘주술’에 빠질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자연의 미학’을 노래한 시들이 받고 있는 비판을 그 역시 면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내게는/뒷면에 유황칠이 돼 있는/그런 오래된 말이 있다” “나는 밤마다 미열에 시달리며/손톱 끝으로 불을 벗겨내는 환영에 빠져” 있다(「열망」). 박형준은 새 시집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이 환영은 뜨겁고 고통스러운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진정한 시의 탄생을 위해서는 환영의 고통이 아닌, “설움으로 까맣게 타서 죽는”(「거미」) 실물(實物)의 고통이 요구됨을 그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3. 가난과 일상의 고통을 그러안은 현재의 시간---전남진

 

전남진(全南鎭)의 첫시집 『나는 궁금하다』(문학동네 2002)가 속해 있는 시간은 현재이다. 이 시집에서 지나온 과거는 일정한 필연성 아래 현재 속에 삼투된다. 전남진 시의 지배적 시간이 현재인 것은 시의 주제와 관련이 있다. 그는 소시민의 기계적인 일상과 하층민의 힘겨운 생존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이를 자기 성찰의 계기로 끌어올린다. 전남진이 소유한 리얼리즘의 시정신은 우리 시에서 이미 오랜 전통을 가진 것이지만, 최근 들어 어느정도 약화된 까닭에 상대적인 개성을 부여받는다. 현실의 문제에 아픈 각성을 보여주는 전남진의 시에는 삶의 도처에서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프레스공장에서 손가락이 잘려 과일장수가 된 후배 원인호, 길에서 전단을 돌리는 할머니, 값싼 가요테이프를 파는 리어카 노인, 차에 치여 죽은 노점상, 불쌍한 외국인노동자, 실업자, 걸인 등은 지난 연대에 우리 시가 뜨겁게 노래하던 소외된 사람들이다. 구호는 사라졌으나 모순은 항존하는 현실에서 전남진은 인간적인 연민과 애정으로 이들에게 다가선다.

시집의 표제작인 「나는 궁금하다」는 “아크릴 상자 칸칸 애벌레처럼 채워진 넥타이를 하루종일 만지작거리는 아주머니가 하루에 몇개를 파는지”로 시작해 안흥찐빵, 얼룩 지우는 약, 조잡한 장난감 등을 파는 길거리 상인들의 안부를 묻는다. 이 시가 평면적인 나열에 그친 아쉬움이 있다면, 같은 계열의 시 「과일을 피우는 팔」은 과일장수와 손님, 좌판의 과일이 어우러져 하나의 유기적인 풍경을 만들어낸다.

 

북새통 속에서 그는 과일을 판다

한쪽 손이 항상 주머니 속에 있지만

그 속이 비어 있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과일을 봉지에 담고 거스름돈을 건네주는

그의 남은 팔이

어떤 전쟁과 관계가 있다고

고백하지 않은 추측이 좌판에서 과일을 고르면

그제서야 제 속의 맛을 스스로 익혀내듯

과일은 나무에서 방금 떨어진 싱싱한 열매가 된다

---「과일을 피우는 팔」 부분

 

팔리는 순간 “나무에서 방금 떨어진 싱싱한 열매가 되”는 ‘과일’은 사는 사람의 손길과 파는 사람의 ‘비어 있는’ 팔에서 동시에 살아난다. 이 작디작은 무언의 소통은 소외된 사람들과 교류하는 전남진만의 조촐한 방법이다. 단, 그는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의 삶을 그릴 때는 비판적인 관찰자가 되지만, 자신의 삶을 서술할 때는 일상의 무기력한 소시민으로 돌아온다. 출퇴근의 살인적인 반복 속에 자신을 잊어가는 그는 “아름다운 저항을 위해 부동의 자세로 투항하는 것일 뿐/결코 내가 섰던 자리를 잊어버린 것이 아니다”(「가로수를 심는 노인」)라고 스스로를 다잡아보지만, 저항은 그렇게 간단치가 않다. 몇푼의 돈으로 환원되는 일상의 노역은 그를 원하지 않은 삶으로 몰아가고, 현실은 언제나 그보다 더 ‘위대하다’. 더 자세히 말하면, 안온한 시간에 중독된 그에게는 필요한 것을 구하기 위해 일하는 월요일보다 마약 같은 일요일이 훨씬 더 ‘위대하다’.

 

그래도 나는 생각한다. 내 일생이 이렇듯 일요일에 마약처럼 취했다가

손을 부들부들 떨며 약을 구하기 위해 월요일에 손을 내밀어

가련한 얼굴로 또한 며칠을 버티게 되더라도, 일요일은 내게 위대하였다고.

---「월요일은 슬프다」 부분

 

일요일의 위대함을 숭배하는 노동자는 전(前) 시대의 문학에 형상화된, 불합리한 노동현실의 개혁을 위해 투쟁하는 노동자와는 다른 곳에 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이 시는 패배의식에 물든 자의 병적인 독백에 불과하다. 그러나 일요일의 희망 하나로 지루한 평일의 노동을 견디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이 시의 절절한 리얼리티에 공감하게 될 것이다. 전남진은 명철한 통찰력을 지닌 지식인의 눈이 아닌, 평범한 생활감각을 지닌 일상인의 눈으로 현실을 이야기한다. 그의 시가 현실을 산문적으로 기록하면서 긴장이 풀어지기도 하는 반면, 첫시집을 내는 시인이 가질 법한 포즈나 자기과잉에서 비껴나 있는 것은 이같은 소박한 시정신에서 연유한다. 현실과 일상의 삶을 그린 전남진의 시편들은 창조적인 상상력보다는 사실의 기록과 해석에 치중한다. 이를테면, “공중에 정지하기 위해 양 날개를 젓고 있을 때, 2001년 4월 한국의 공식 실업자수는 260만명이었다. 매일 그 할머니 먹다 남은 밥알을 말려 새들에게 던지고 있을 때, 나는 그 곁을 지나 회사로 출근했다. (…) 새의 부리에 밥알이 꽂힐 때 일본 역사교과서는 수정됐다.”(「지나간 사실은 사실이 아니다」)와 같은 방식이다. 이런 단순어법의 시에서는 현실의 부정성을 강하게 환기하는 극적 효과나, 부정적인 현실 속의 자기자신을 반추함으로써 생기는 페이소스가 감소된다. 반면, ‘나’는 이 도시의 매연과 직장 노예제와 가난에 의해 ‘타살’되었다고 주장하는 시 「유언」은 비극적인 섬뜩함을 안겨준다. “아내여, 기억하라/나는 타살되었으므로 나는 보상되어야 한다는 것을. 당신과 우리의 딸과 또다시 태어날 한 아이를 위해 나는 반드시 타살이어야 한다는 것을!”(「유언」) 유언을 가정한 이 외침에는 오늘날 소시민의 현실이 아프게 각인되어 있다.

도시에서 산다는 것은 서서히 타살되는 일이지만, ‘내’가 타살의 피해자인 것만은 아니다. ‘나’ 역시 타살에 가담하고 있는 살해 용의자이다. 아니, 모든 사람이 용의자이다. 도시의 시민들은 광포한 문명에 타살되면서 동시에 “동사한 알코올 마약 중독자 포개진 나체의 시신처럼/무. 심. 코. 서로를…… 겨누고 있”는 것이다(「비석」). 시집의 1, 2부에 황량한 도시의 삶을 건조하게 기술한 시들이 배치되어 있는데 비해, 3, 4부에는 섬세한 감수성을 노래한 서정적인 시들이 실려 있다. 어린 시절 고향에서의 삶과 청년기의 사랑을 다룬 시들은 가난의 생활사와 개인적인 상처의 내력을 비애의 어조로 노래한다. 유년의 기억은 “리어카로 오일장을 다니는 부모님”(「어린 시절」)과 친척들, 이웃들의 가난했던 삶에 집중되어 있다. 전남진의 시들에서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의 고달픈 삶이 부각된 데는 오랜 연원이 있었던 것이다. 가난은 그에게 과거로부터 계속된, 그러나 늘 현재형으로 존재하는 삶의 난관이며 사건이다. 따라서 그에게 현실을 살아간다는 것은 가난이라는 난관과의 끊임없는 싸움의 과정을 의미하게 된다.

전남진의 첫시집에서 외적 지향과 내적 지향은 다른 색채를 보인다. 비판적 현실인식을 내세운 시들과 내면의 감성을 그린 시들 사이에는 느낌의 차이가 뚜렷하다. 현실을 다룬 시들에서 그가 주체와 관찰자 사이를 머뭇거리며 오가고 있다면, 자신의 내면을 고백한 시들에서는 호소력 있는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어내고 있다. 둘 사이의 긴밀한 소통은 앞으로 전남진의 과제로 남는데, 시의 감동은 이 중 후자에서 더 진하게 우러나고 있다.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슬퍼도 슬프다고 말하지 않는 마음/안과 밖, 경계 사라진 한없이 넓은 마음에/그리움이라 해도 좋을 것들을 그 하나를 잃어버리고/혼자 돌아와 눕는 내 마지막 집이여”(「마지막 집」)와 같은 구절은 시간의 흐름을 마음의 넓이로 바꾸는 자의 내면의 유로(流路)를 아름답게 서술한다. 이제 막 출발한 신인 전남진이 산문적인 현실과 서정적인 지향 사이의 간극을 어떻게 메워갈지 지켜볼 일이다.

 

 

4. 미래보다 앞질러 흐르는 미래의 시간―이원

 

이원(李源)은 첫번째 시집 『그들이 지구를 지배했을 때』(1996)에서 “우주의 모든 것은 몸이 시간이다 그렇다 몸이 시간이다”(「몸과 공기」)라고 정의한 바 있다. 신의 영역을 파괴하는 첨단문명을 다룬 시에서 원초적인 몸의 담론을 읽게 되는 것은 이채로운 일이다. 이원은 또 “캄캄한 한가운데로 시간의 커서가 내려가고 있다”(「PC---서시」)거나, “시간은 더 깊게 비어간다”(「밥그릇과 그림자 사이」)고 시간의 새로운 양태를 서술하기도 했다. 이원은 전자문명시대의 시간의 운명을 묵시록적인 어조로 말하고 있거니와, 삶의 세목들 중에서도 시간을 재정의해야 할 가장 시급한 대상으로 인식해왔다. 시간은 인간이 경험하는 실존의 가장 기본조건이며, 이제 전혀 새로운 시간이 인간을 지배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단 시간뿐만이 아니다. 이원의 시는 전자문명시대의 수많은 존재와 개념에 대해 새로운 정의들을 발표하는 담화문과도 같다. 이 담화문의 주제는 나, 인간, 몸, 시간, 공간, 꿈, 거울, 달, 사막 등 대부분 인문학적 탐구대상이 되는 질료들이다. 전자문명이 재영토화한 것들이 인간과 인간적인 삶의 조건이라는 점은 역으로 이 문명의 지향점을 엿보게 한다. 인간을 해체하여 완전히 새로 구성하는 것, 인간을 지배하는 완벽한 여건을 갖추는 것이 그것이다. 이원은 첫시집 이후 5년 만에 출간하는 『야후!의 강물에 천 개의 달이 뜬다』(문학과지성사 2001)에서 전자문명의 실체를 본격적으로 해부한다. 아직은 현실의 작은 부분이지만 디지털 환경의 전면적인 확장 프로그램이 운영되는 미래의 상황을 가정하며 그녀의 시는 씌어진다. 오늘날 우리가 삶의 일부분으로 경험하고 있는 전자문명을 넘어, 인간의 삶을 완전히 점령한 미래의 전자문명을 시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이원의 시는 경험의 상상적 확장과 과학적 인식에 바탕한 예측을 통해 씌어진 미래형의 시에 속한다. 따라서 부분적인 경험을 전면적인 경험으로 확대하는 실감의 상상력, 첨단문명의 실체를 앞질러 간파하는 인지능력이 시를 지탱하는 중요한 뼈대가 된다. 감성보다는 논리에 의지하는 이원의 시는 시에 담긴 인식의 폭과 예측의 정확성에 따라 달리 평가될 소지를 자체적으로 안고 있다. 미래보다 더 빠르게 미래의 시간을 살아야 하는 것, 이것은 이원의 시가 지니고 있는 아이러니컬한 운명이다.

시집 『야후!의 강물에 천 개의 달이 뜬다』는 제목에서부터 불교의 전언을 강하게 환기한다. 하늘의 달[실재]과 강물에 비친 천 개의 달[현상]의 관계를 비유한 유명한 전언의 패러디는 ‘야후!의 강물’이 불변의 실재가 아닌 시시각각 변하는 현상의 영역임을 분명히 선언한다. 실재의 환영만을 비추는 이 강물은 실재를 왜곡하며 심지어는 지워버린다. 수천년 전의 불교문화뿐 아니라 21세기의 전자문명에서도 인간이 보존해야 할 가장 중요한 실재는 다름아닌 ‘나’이다. 이원의 시가 ‘나’를 주어로 한 거대한 진술 체계를 이루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 시집에서 ‘강물’의 계열 이미지인 ‘거울’과 ‘달’은 아예 실재의 반영능력을 상실한 상태로 그려진다. “사막의 달은 차고 환해 내가 들여다봐도 내가 나오지 않는 거울이야”(「거울 속에서 낙타는 어디까지 갔을까」) “내 앞까지 온 길은 거울 앞에서/접촉 불량 회로처럼 끊어졌다”(「모니터, 캔산소, 거울」) “전면의 대형 거울은/늘 넘기지도 못하는 텅 빈 무덤을 삼키는 중이다”(「인체를 위한 접속 코드 1」) 등의 장면은 이를 잘 보여준다.

‘내’가 증발된 이 새로운 문명의 공간을 이원은 ‘전자 사막’이며 ‘미로’라고 부른다. ‘나’는 증발된 상태로 황량한 전자사막·미로를 끝없이 떠돌아야 한다. 이는 새로운 형태의 ‘유목’(이광호)이기보다는 길을 잃고 헤매는 ‘방황’이 될 가능성이 크다. ‘전자 사막’은 백화점, 대형 할인매장, 심야버스, 컴퓨터, 휴일, 출근, 외출, 연애 등 시공간과 행위의 형태로 수시로 경험된다. 그 속에서 ‘나’의 정체성은 뿌리째 흔들린다. 그런데 “뿌리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 날 밤부터 잠이 오기 시작했다”(「실크 로드」). “나는 어디에서도 접속 가능한”(같은 시) 기계이며 프로그램이다. 더불어 모니터 앞에 앉아서 손가락 하나로 세계를 파괴하고 창조하는 전능한 주체(?)이다.

 

나는 세계를 연속 클릭한다

클릭 한 번에 한 세계가 무너지고

한 세계가 일어선다

(…)

나는 그러나 어디에 있는가

나는 나를 찾아 차례대로 클릭한다

광기 영화 인도 그리고 ………누고

……오는…홀로 소송……또(주)…

나누고 싶은 이야기……지구와 …………

---「나는 클릭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부분

 

그러나 ‘’만은 클릭할 수도 창조할 수도 없는 ‘나’는 “나를 가동시키는 플러그가 어디로/꽂혀 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서부극, 냉장고, 플러그」) 다시 사막을 떠돌아야 한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허공이라는 시스템에 연결되었”(「콘센트에 관한 명상」)고, 개인에게는 다만 프로그램이 오작동할 때에 간헐적인 탄식만이 허락된다. “아 그것은 날마다 빠른 속도로 생겨나요. 우리는……그것에 갇혀가고 있어요………그것이 가리키는 방향에……우리는 잘 길들여져 있어요.”(「사이보그 2―정비용 데이터 A」) 그리하여 전자 사막에 거주하는 인간의 최후는 아마도 이렇게 장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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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에 관한 짧은 노트 2」 부분

 

이원은 두번째 시집 『야후!의 강물에 천 개의 달이 뜬다』를 통해 그녀만의 시세계를 확고하게 구축한다. 사실 그녀만큼 전자문명의 실체와 폐해를 집중적으로 통찰해온 시인은 드물다. 인간과 자아에 대한 오랜 믿음을 바탕으로 빠르게 현재화하는 미래를 성찰하는 이원의 시는 곧 우리가 경험할 세계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인간의 멸(滅)주체를 예감하는 그녀의 시들이 우울한 전망에 치우쳐 있는 것도 사실이다. 새로운 시대에 인간은 그에 맞는 새로운 존재방식을 창조할 것이며, 다양한 저항의 선들을 만들어내게 될 것이다. 현단계 이원의 시에는 이 부분이 누락되어 있다. 미래의 현실에 대한 정밀한 예측에 몰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인간의 내적 저항의 기제에 대한 성찰이 병행될 때 이원의 시는 더욱 탄탄해질 것이다.

 

 

5. 각각의 시간 뒤에 남는 것

 

근대문명의 발전이 가져온 비동시적인 시간의 동시적 공존현상은 현재 젊은 시인들의 시를 중심으로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같은 시간대를 사는 시인들이 다른 시간에 편입되어 있는 현상은 단순한 심리적인 지향을 넘어 자의식 및 세계관의 문제와 직결되게 된다. 이제 우리 시는 주제와 유형, 기법의 다양성을 넘어 다양한 시간을 사는 법을 터득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한 시인이 (시 속에서) 어떤 시간을 사는가가 그의 내면세계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이 된 것이다. 지금까지 시인들이 도시와 농촌, 산과 바다, 집과 거리 등 독특한 시의 공간을 선택함으로써 지향점을 확보했다면, 이제 어느 시간을 택하는가에 따라 시세계의 정체성은 달라지게 된다.

박형준·전남진·이원은 자신의 시에 각기 과거·현재·미래의 시계를 장착해두고 있다. ‘자연의 미학’에 기대고 있는 박형준에게 과거는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한 근원의 시간으로 각인되어 있다. 그는 현실에서 위태로운 실존에 처할 때 과거를 불러들임으로써 자아의 균형을 유지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과거는 사라지지 않고 그의 내면에서 현재형으로 흐르고 있다. 그의 내면의 성(城)은 이 시간들의 균열과 충돌이 일어나는 혼돈의 성이며, 그의 시적 성패는 이 균열과 충돌을 얼마나 감당하는가에 따라 좌우되게 된다. 그의 ‘자연의 미학’의 성패 여부도 이 점과 직결된다. 아쉽게도 박형준의 최근 시들은 부분적으로는 성공을 거두었으나 실패의 위험을 안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현재의 시간에 충실하는 전남진의 시는 세계의 리얼리즘적 재현에 목표를 둔다. 그는 가난과 소외, 노예적 일상이라는 현재형의 문제를 부단히 그러안으면서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의 삶의 실상을 그리는 데 시쓰기의 의미를 둔다. 이런 세계의 한켠에는 그의 섬세한 내면의 감성이 뭉클거리고 있다. 단조로운 서술과 나열, 군더더기에 불과한 비문(非文)들을 걷어내고, 현실과 서정 사이의 긴밀성을 더 확보한다면 전남진은 일상적 리얼리즘의 영역 확대에 기여하게 될 것이다. 미래의 시간을 앞질러 살아내는 이원은 전자문명이 새롭게 코드화할 인간과 세계의 자화상을 그린다. 그녀가 묘사한 것처럼, 모든 실재와 본질적인 의미를 휘발시키고 말 전자문명은 우리의 두려운 미래가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 그 세계는 시간 자체가 지워진 무시간성의 공간이 될 가능성이 있다. 이 점을 고려해 이원은 대항기제를 만들어낼 인간의 투쟁의지를 다음 시세계에 첨부할 필요가 있다. 시간의 낯선 변형을 슬기롭게 극복하는 것이 우리의 미래의 시간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양한 시간들의 공존은 지금 우리 시의 새로운 존재방식으로 확산되고 있다. 자신이 거주할 공간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선택하는 것,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는 시간을 발견하고 배양하는 것. 시가 인간 내면의 존재방식에 관여하는 가장 예민한 형식이라면, 이제 시세계의 중심은 시간에 집중되고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제 우리 시는 시간의 흐름과 축적을 동시에 병행함으로써 더 넓고 다양한 세계를 열어나가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