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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현기영 玄基榮

1941년 제주 출생. 197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소설집 『순이 삼촌』 『아스팔트』 『마지막 테우리』, 장편 『지상에 숟가락 하나』 등이 있음. key0116@naver.com

 

 

 

장편연재 (제1회)

누란(樓蘭)

 

 

■ 연재를 시작하며

6세기경 타클라마칸 사막의 모래 속으로 사라진, 영화를 누리던 옛 도시 누란(樓蘭)을 아시는지? 모든 욕망은 헛되이 한줌 모래로 화할 뿐임을 누란은 증거해준다. 모래는 모든 것을 무효화시킨다. 죽음의 손길로 모든 것을 지워버린다. 모래폭풍이 일고, 황사가 자욱한 저 거대한 모래 바다들이 점점 제 영토를 넓혀가고 있다. 우리에게 ‘황사 3일’로 알려져 있던 봄철 황사현상이 지금은 시시때때로 발생하고 보름을 넘기기도 한다. 그것은 인간의 무한욕망이 자연을 착취하여 사막화를 촉진하는 현상을 상징해주기도 한다.

9·11사태는 더욱 구체적으로 인간 욕망의 허무함을 증언한다. 그러나 자신의 이기적 욕망만을 생각하는 인간은 그 사태가 가르치는 묵시록적 교훈을 깨닫지 못한다. 그 사태로 촉발된 위기상황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음에도, 사람들은 그 심각성을 애써 외면하려고 한다. 한반도에도 그 어느 때보다도 싸늘한 냉전의 냉기가 흐르고 있음에도 우리는 대개 무감각하거나 무기력하다. 핵무기 사용도 불사하겠다고 강대국이 언어도단의 발언을 해도 우리는 남의 일처럼 무덤덤하다. 우리는 단지 어리석은 상품소비자일 뿐인가? 문명충돌, 자연파괴 등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인터넷 교란 하나만으로 인간 문명이 붕괴될 개연성이 있다는 것은 지금이 묵시록적 상황임을 말해준다. 그런데도 상품소비자인 우리는 오로지 새로운 욕망, 새로운 감각, 새로운 쾌락을 좇아다니느라 여념이 없다.

그리하여, 이 소설은 묵시록적 상상에 사로잡힌 한 시민의 지적·정서적 편력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1

 

영하의 추운 겨울밤, 자정이 훨씬 지난 시간이다. 가게들이 철시하여 어두워진 그 삼거리 우체국 옆의 조그만 편의점 하나가 어두운 상가를 배경으로 마치 무대 쎄트처럼 을씨년스럽게 떠올라 있다. 건물들의 검은 씰루엣 위 반공(半空)에 날카롭게 굽은 초승달이 박혀 있는데, 가로등이 카드뮴의 누런 불빛을 뿌리고, 그것의 흐릿한 반사광을 입고 있는 검은 아스팔트 위에는 군데군데 물이 얼어붙은 자국들이 깨진 유리파편처럼 반짝인다. 이따금씩 택시들이 스쳐 지나갈 뿐, 춥고 늦은 시간이라 인적이 드물다.

이렇게 밖은 괴괴한 정적인데, 편의점 안에는 TV의 심야방송으로 떠들썩하다. 가게주인은 머리숱이 많아 머리통이 뻑시게 보이는 중년 사내다. TV 화면에는 북중미 골드컵 축구대회, 한국과 쿠바의 경기가 실황 중계되고 있는 중이다. 손님은 열예닐곱살쯤 되어 보이는 두 아이들뿐이다. 한 녀석은 검정색 야구모자를 쓰고 다른 녀석은 부스스한 노랑머리인데, 지금 한창 라면을 먹으면서 화면을 보고 있다. 뜨거운 라면발을 후후 불어 삼키면서, 화면 속의 축구선수들을 향해 연방 욕을 해댄다. 씹새들, 똥뽈 차고 있네, 똥뽈. 최용수, 저 시끼 뽕 먹었나, 왜 빌빌해? 이천수는 왜 또 저래? 플레이 메이커라는 시끼가! 얼라 얼라, 잘 논다. 또 패스 미스야?

“야, 씨바, 열받네! 저 시끼들, 그냥 팍!”

노랑머리가 제풀에 화가 나서, 유리탁자를 내리칠 듯이 주먹쥔 오른손을 부르르 떤다.

“야, 싸이코, 또 발작이야? 정신차려! 또 사고치려구 그래? 야, 밖으로 나가자!”

야구모자한테 떠밀려 밖으로 나온 노랑머리가 편의점 앞의 가로수를 걷어차며 화풀이한다.

“씨바, 쿠바 같은 약팀한테 쩔쩔매다니, 말이 돼? 나쁜 시끼들!”

막 더운 음식 먹고 나온 두 녀석의 입에 흰 입김이 머플러처럼 날린다. 우체국을 끼고 돌아 주택가로 향하는 동안 그들은 언제 화를 냈느냐는 듯이 깔깔대고 웃는다. 밤의 정적을 깨는 요란한 웃음소리.

“얼라, 오늘 무슨 날이야? 이 늦은 시간에 불켠 집들이 있네!”

하면서 노랑머리가 주택가 쪽을 가리킨다. 삼사층짜리 다가구주택의 밀집지역인 그 어두운 주택가에는 아직도 소등 않고 불 밝힌 창문들이 꽤 많이 보인다.

“야, 싸이코, 역시 넌 형광등이라 늦게 켜지는구나. 축구중계 본다고 저 지랄이지, 뭐야.”

“빙신들, 그따위 졸전을 뭐하러 봐.”

“저 빙신들도 열받아 부글부글 냄비뚜껑 열리고 있을걸.”

야구모자가 지금 막 산 담뱃갑을 꺼내 한개비 뽑아 물자, 노랑머리가 불쑥 손을 내민다.

“나도.”

“야, 싸이코, 넌 거지같이 맨날 달래기만 하냐?”

“야, 이 씹새, 치사하게 나올 거야, 정말?”

“형편 안되면 담배 끊지 그러냐? 낄낄.”

“야, 당분간 이 가난한 성님한테 담배 좀 대주면 안되냐, 엉?”

“성님? 웃기고 있네. 성님은 나야. 나한테 ‘성님, 담배 한까치만 주세요’ 해봐. 그러면 주지.”

“욜라 지랄하고 자빠졌네. 이 시끼, 쌍코피 나기 전에 얼릉 못 내놔?”

하면서 노랑머리가 상대방의 손에 들린 담뱃갑을 번개같이 낚아챈다.

“아카카카! 요 양아치 시끼 봐!”

야구모자가 담뱃갑을 도로 빼앗으려고 달려드는 것을 노랑머리가 한손으로 펀치 먹이는 시늉을 하면서 능숙하게 이리저리 피한다. 야구모자가 달려들다 말고, 두 손으로 나발을 만들어 입에 갖다대고는 어두운 주택가를 향해 느닷없이 소리를 질러댄다. 공포에 질린 듯 다급한 목소리를 흉내낸다.

“사람 살려어! 강도야, 강도! 사람 살려어!”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얼어붙은 밤의 정적을 산산이 깨뜨린다. 잠깐 뜸들였다가 다시 똑같은 비명을 질러댄다. 그 소리가 텅 빈 거리에 음산한 메아리를 남기면서 사라지자 두 아이는 서로 오른손 바닥을 마주쳐 하이파이브 하면서 깔깔깔 웃어댄다. 깔깔대던 야구모자가 이내 시무룩해져서 침을 퇘 뱉는다.

“씹새들! 들은 척도 하지 안잖아, 사람 살려달라는데. 저기 불켜져 있는 집들도 텔레비만 보고 있어. 씹새들, 아무도 내다보지 않아.”

“저치들 니가 거짓말하는 줄 다 알고 있는 거지.”

“그럼, 난 양치기 소년?”

“허걱! 웬 양치기? 넌 웃겨. 넌 양아치야, 비행 청소년……”

“난 아니야. 싸이코, 니나 양아치 해라.”

“어쭈구! 이젠 양아치 안하겠다고? 그럼, 너 배신 때리겠다, 이거야?”

“난 양치기야.”

“씹새, 좆까고 있네.”

야구모자가 다시 한번, “사람 살려!” 하고 소리친다.

“거봐, 아무도 듣는 놈 없잖아. 어디, 내가 한번 해볼까?”

이번엔 노랑머리가 “강도야, 강도!” 하고 소리지른다. 그러고는 귀기울여 듣는 시늉을 하다가 벌컥 화를 내며 신호등 기둥을 걷어찬다.

“씨바, 들은 척도 안해. 저 꼰대들! 아무도 우리한텐 신경 안 쓴단 말이야!”

“좋다, 이거야! 우리도 신경 끈다, 이거야! 신경 안 쓴다, 이거야!”

“우리가 우리한테도 신경 안 쓰는데, 좆또, 우리가 왜 꼰대들 말에 신경써? 웃겨!”

“씨바, 정말, 팍 꾸겨버리고 싶어! 찢어버리고 싶어! 아, 짱나! 야, 싸이코, 내 담배 빨랑 내놔!”

“‘성님, 한까치만 주십시오’ 하면 주지. 낄낄낄.”

야구모자가 덩달아 낄낄 웃다가, 아까처럼 두 손을 입에 대고서 또 소리를 질러댄다.

“엄마야아! 엄마야아! 승철이가 내 담배 뺏어갔어! 빨랑 와서 이 시끼 때려주라구!”

그 소리가 다시 한번 인적 없는 거리를 요란하게 흔들어놓는다.

“거봐, 니 엄마도 못 들은 척하잖아. 니 엄마도 이젠 신경 껐어. 누구도 니한테 신경 안 써. 니 엄마 주정뱅이잖아. 요새도 술 먹고서 울어쌓니? ‘아이고, 아이고 내 팔자야’ 하면서?”

야구모자가 발끈 화를 내면서 노랑머리의 가슴팍에다 아프게 스트레이트 펀치를 먹인다.

“너 이 시끼, 우리 엄마 욕하지 마! 아무리 그래도 엄마는 엄마야. 내가 속 썩여서 그래. 공부는 안하고 맨날 말썽만 피우니까 그렇지. 우리 엄만 정말 불쌍해. 밤늦도록 시장일에 고생하시고…… 엄마가 불쌍한 줄 알면서, 내가 왜 그러는지 몰라. 엄마만 보면 왠지 화가 나서, 마구 욕하게 돼. 아, 엄마!”

야구모자가 모자를 벗어서 신호등 기둥을 마구 휘갈기더니, 거기에다 이마를 대고 끅끅 흐느껴 운다. 노랑머리가 그 옆에서 깝죽대며 조용필 노래로 놀린다.

 

엄마야 나는 왜 자꾸만 기다리지

엄마야 나는 왜 자꾸만 보고 싶지

아마 나는 아직은 어린가봐 그런가봐

엄마야 나는 왜 자꾸만 슬퍼지지

엄마야 나는 왜 자꾸만 울고 싶지

 

“야, 씹새, 울지 마! 니가 그러면 나도 눈물나잖아! 에이, 게임 망쳤어. 자, 니 강아지 도로 가져가.”

하면서 노랑머리는 담배 한개비만 뽑아 입에 물고는, 담뱃갑을 야구모자에게 던져준다. 둘은 우울한 표정으로 담배를 피워문다. 입김에 섞인 다량의 연기가 분노처럼 두 입에서 쏟아져나온다. 차도를 건너기 시작한다. 빈 아스팔트를 가로질러 두 개의 그림자가 기다랗게 내던져진다.

“씨바, 꾸겨버리고 싶어!”

“찢어버리고 싶어!”

“니네는 진짜 웃겨!”

“니네들이 좆같은지 왜 몰라!”

거칠게 서로 어깨를 부딪쳐대다가, 아예 차도 한가운데 멈춰서서 복싱 연습하듯이 느린 동작으로 상대방에게 펀치 먹이는 시늉을 한다. 잽을 먹이고 피하면서, 상체를 상하좌우로 깝죽깝죽 더킹 모션을 하다가, 그것이 어느덧 갱스터랩 동작으로 바뀐다. 번갈아 내뻗는 두 팔의 동작에 맞춰 툭툭 내지르는 사나운 목소리가 광물성으로 얼어붙은 네거리 공간을 음산하게 울려퍼진다.

 

아이브 빈 루킹 포 어 트레이스 루킹 포 어 하트 루킹 포 어 저스티스 (…) 앤 아이 노우 아이 돈 니드 유어 룰즈, 아이 저스트 원티드 투 브레이크 프리

니네는 진짜 웃겨, 가만히 듣고 하다보면 진짜로 웃겨

너는 내가 본 새끼들 중에 제일 웃겨

왜 니가 뭣 땜에 된다 안된다 참견이 많은지 몰라, 누가 그걸 몰라

청소년들이 욕을 왜 몰라 니네가 좆같은지 왜 몰라

니네가 그렇게 입을 막고 또 손을 묶고 해도 뭘 잘 몰라

누가 좆같다 안 가르쳐도 다 좆같은 게 좆같은 거지

 

급히 달려오던 택시 한대가 그 앞에서 급커브를 튼다. 스칠 듯이 비켜 지나가는 차를 향해 노랑머리가 “개새끼!” 하면서 발로 걷어차는 시늉을 한다.

 

누가 좆같다 안 가르쳐도 다 좆같은 게 좆같은 거지

(…)

그렇게 관심없이 멋대로 굴다간 좆되지, 솔직히 까고 말해

니네 비행 청소년들의 미래 관심있기나 해?

까놓고 상관이나 해? 그렇게 사회라는 조직 위에

편히 숨어서 남에게 해 끼치기만 해 돈 벌려면 벌어

근데 딴거 해서 벌어 벌어 벌어

………………………

 

길을 건넌 두 아이는 계속 노래를 부르면서, 우체국 옆 교회건물을 돌아 어두운 주택가 안으로 사라진다. 멀어지는 노랫소리. 아이브 빈 루킹 포 어 트레이스 루킹 포 어 하트……

네거리는 다시 조용한 부동의 풍경으로 돌아간다. 교회 앞 검은 아스팔트 위에 반사된 붉은 네온 빛이 핏물처럼 번져 있다. 어두운 허공에 떠 있는 교회 첨탑의 핏빛 네온 십자가.

그러고서 약 30분 후인 새벽 두시경, 축구중계로 늦게까지 켜 있던 주택가의 불빛들이 마저 꺼져버린 시간에, 택시 한대가 스르륵 미끄러져 편의점 앞에 와 멈춰선다. 그 차에서 서른아홉살의 대학선생 허무성이 내린다. 술에 취한 그는 엄습하는 차 밖의 냉기에 진저리치면서 버버리 코트 호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넣고는, 비척거리며 편의점 안으로 들어간다. 머리숱이 많아 뻑시게 보이는 두상의 중년 사내가 자울자울 졸다가 문 열리는 차임벨 소리에 눈을 뜬다. 그러나 허무성은 그쪽으로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곧장 주류 진열장으로 가서 킹 싸이즈의 맥주 한병을 집어든다. 이틀에 한번 꼴로 술에 만취해 이렇게 귀가가 늦어지는 날이면 가끔씩 이 가게에서 더도 아니고 맥주 딱 한병을 사는 것이 그의 버릇이다. 카운터에서 맥주병을 비닐봉지에 넣어주면서, 주인 사내는 허무성의 모습을 몰래 살핀다. 이 가게에 종종 들르긴 하지만, 물건값 묻는 것 외에는 달리 말 걸어온 적이 없는 손님이다. 말 걸기는커녕 눈 마주치기조차 꺼리는 기색이다. 안경 너머로 눈빛이 어둡다. 뭔가 고민이 있는 모양이다. 그렇지만 왜 맥주를 한병만 살까? 큰 키에 마른 몸매, 알코올로 표백된 얼굴은 희다 못해 핼쑥하게 푸른 기가 돌고, 양미간은 괴롭게 찡그려져 있다. 그 모습이 마치 언젠가는 터져버릴 시한폭탄처럼 위태로워 보인다.

그러나 실은 킹 싸이즈의 그 맥주병이 시한폭탄이라는 걸 가게주인은 모른다. 허무성이 맥주 한병을 사는 이유는 언제나처럼 그것을 매개로 해서 이 늦은 밤에 아내를 깨워놓고 무슨 얘기를 하고 싶기 때문이다. 아내는 오늘도 TV를 끄지 않은 채 잠에 곯아떨어져 있을지 모른다. 방영이 끝나 영상이 사라진 TV에는 탁한 음색의 정신 사나운 소음과 함께 화면 가득히 전자 입자들이 세균 무리처럼 뒤엉켜 바글거린다. 사람 형태를 갖추고 움직이던 영상들이 부서져 바글거리는 전자 입자들로 변한 그 화면과 그 곁에서 입을 쩍 벌린 사나운 몰골로 잠에 곯아떨어져 있는 아내의 모습은 언제나 그에게 죽음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허무성은 이 깊은 밤 그 음산한 장면을 깨뜨리고 싶어한다. 영상은 죽고 전자 입자들만이 바글거리는 그 TV 화면을 끄고, 아내를 깨워서 뭔가 절실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그 ‘절실한’ 이야기란 지난 일년 몇개월 동안 미해결 상태인 채 똑같은 내용을 똑같은 표현방식으로 반복해온 것이어서, 이제는 별로 절실하지 않은 상투어가 되어버렸다. 한밤중이면 이따금씩 그 방에서 분노의 불꽃이 사납게 일곤 했다. 아마도 열흘에 한번 꼴은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관성적으로, 요식행위처럼 치러지는 그 해프닝을 어떻게 분노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그것은 분노라기보다는 광증이었다. 단 삼사분 동안에 집중적으로 벌어지는 그 격렬한 광증의 소용돌이 속에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오로지 허무성뿐이다. 문정선, 정선아, 우리 이러지 말고, 어떻게 좀 해보자, 언제까지나 이렇게 지낼 수는 없잖아. 심기일전해보자구, 응? 그러나 아내는 졸린 눈을 내리깐 채 언제나 묵묵부답이다. 그 모습이 멍청하게 비어 있는 TV 화면 같다. 달래고 애원해보지만 소용없다. 그의 목소리는 오래 참지 못하고 어느덧 사납게 변한다. 맥주를 병째 나발 불면서 소리지른다. TV를 꺼! 왜 끄지 않고 자는 거야, 도대체! 정신이 죽어버린 거야? 정말, 더이상 이대로는 안돼! 이 집은 죽어 있어. 어떻게든, 뭔가를 해봐야 할 거 아냐, 엉? 그러나 아내는 무릎을 감싸안고 그 위에 머리를 얹은 채 미동도 하지 않는다. 어떤 때는 그런 자세로 잠이 들어 옆으로 비틀 하기도 한다. 눈을 떠! 눈을 뜨고 나를 보란 말이야! 너 죽었니? 죽었냐구? 왜 대답 없어? 왜, 왜, 왜? 그 순간, 광기의 벼랑 끝에서 악성을 지르면서 허무성은 맥주병을 내던진다. 깨지는 것은 주로 창문과 책장의 유리들이지만, 값비싼 TV가 표적이 된 적도 두 번이나 있었다. 전자 입자들이 바글거리는 화면이 맥주병에 맞아 펑! 하는 폭음과 함께 박살날 때도, 아내는 그 순간만 몸을 움찔할 뿐, 여전히 눈을 내리깐 채 요지부동이곤 했다. 마치 수난을 참아내는 성녀라도 된 듯이.

편의점을 나온 허무성은 길을 건너지 않고 좌측으로 꺾어돌아 주택가 길로 접어든다. 고개를 떨군 채 알코올에 묵직해진 두 다리를 끌며 비척비척 걸어간다. 오른손 끝에 매달려 흔들거리는 검은 비닐봉지 속의 맥주병. 다가구 주택 일색인 길가의 집들은 대부분 소등한 채 짙은 그늘 속에 우중충하게 서 있고, 그 사이로 뻗은 콘크리트 포장 길이 가로등 불빛에 희게 바래 있다. 인적이 없는 그 흰 길을 자신의 그림자를 내려다보며 혼자서 걸어간다. 그의 머릿속도 알코올에 하얗게 바래졌다. 아무것도 생각 못한다. 무거워진 머리를 가슴 위에 푹 떨군 채 단 한번도 뒤를 돌아다보지 않는다. 그의 의식이 아니라, 그의 발이 습관적으로 그를 집으로 데려간다. 역시 아무 의식 없이 습관적으로 응얼응얼 흘러나오는 노래. 사랑한단 말할까, 좋아한단 말할까. 아니야 아니야 말 못해 나는 여자이니까. (…) 사랑한단 말 대신에 웃음을 보였는데, 모르는 체하는 당신, 미워 정말 미워……

두번째 가로등이 서 있는 골목 어귀, 거기까지 와서도 그는 여전히 고개를 쳐들지 않는다. 고개를 쳐들고, 뒤돌아본다 한들, 짙은 그늘 속에 몸을 숨기고, 주차한 승용차들 뒤에 달라붙으면서 몰래 따라오는 자들을 과연 발견해낼 수 있었을까? 대학 4학년 때, 그는 바로 그 골목 어귀에서 뜻밖의 급습을 당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미 15년이 흐른 그 옛일이 지금 이 순간 술 취한 그의 뇌리에 떠올라 지금 막 벌어질 사태에 경종을 울려줄 리 만무하다. 그날 밤도 그 골목 안에서 돌연 급습을 당했다. 수배를 피해 잠행한 지 거의 한달 만에 병중인 부친을 뵈러 가는 중이었다. 골목 안으로 발을 들여놓는 순간, 바로 앞에서 실내등을 끈 채 주차하고 있던 승용차의 뒷문이 벌컥 열리더니, 두 명의 괴한이 튀어나와 그를 에워쌌던 것이다. 얼굴에 쏟아지는 플래시 불빛과 “너, K대 허무성 맞지?” 하는 날카로운 목소리와 함께 그는 차 안으로 떠밀려 넣어졌다. 그때도 집집마다 창문이 꽁꽁 닫힌 영하의 겨울밤이었다. 아무도 그의 연행을 목격하지 못했다. 제집을 바로 눈앞에 둔 채, 거기에 홀로 누워 계실 아버지도 뵙지 못한 채, 그렇게 납치되었던 것이다.

이제 그가 들어가고 있는 어두운 골목 안에는 승용차 두 대가 지붕에 흰 서리를 얹고 주차해 있다. 골목 어귀에서 불과 50미터 거리에 그의 집이 있다. 다가구 주택 두 채 사이에 끼여 있는 낡은 단층 슬라브집이다. 지난 15년 사이에 그의 아버지는 지병인 혈압으로 세상을 뜨고, 그 대신 대학 써클후배인 문정선이 5년 전 그의 아내가 되어 그 집에 들어와 있다. 그녀는 지금, 방영이 끝나 전자 입자들만이 버글거리는 TV 화면 옆에서 입을 쩍 벌린 채 사나운 잠을 자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한 식구인 마당가의 발바리 암캐가 있다. 털빛이 희어서 이름이 희영인데, 요즘 못된 버릇이 생겼다. 술 취해 늦게 귀가할 때마다 주인을 낯선 사람 대하듯 적의를 가지고 사납게 짖어대곤 하는 것이다. 저 암캐도 아내 편이다. 술 취해서 아내한테 벌이는 한밤중의 소동을 저 개도 싫어하는 것이다. 지금도 저년은 귀를 쫑긋 세우고 내 발걸음 소리를 기다리고 있을 테지. 곧 터져나올 개 짖는 소리에 미리 진저리치면서, 허무성은 바로 눈앞의 집 대문을 향해 비척비척 걸어간다, 꾸부정하게 등을 숙인 채. 그러나 개 짖는 소리를 듣기 전에 일이 벌어진다.

그의 무심한 등뒤로 검은 그림자 셋이 빠른 걸음으로 소리없이 접근한다. 허무성이 인기척을 느끼고 몸을 홱 돌리는 순간, 놈들이 와락 달려들어 덮친다. 허무성이 반사적으로 담벼락에 등을 붙이면서 맥주병을 깬다. 그러나 그들이 더 빠르다. 순간적으로 뭔가 둔중한 물체가 옆얼굴을 강타한다. 비명을 지르며 맥없이 모로 쓰러진 그의 몸 위로 사나운 발길질이 달려든다. 사람 살려! 사람 살려! 소리를 지르려고 사력을 다해보지만, 그것은 고통 속에 갇힌 힘없는 목소리일 뿐이다. 한놈이 무섭게 낮춘 음성으로 다급하게 명령을 내린다. 이 새끼 소리 못 지르게 더 밟아버려! 그 말과 함께 무서운 발길질이 양쪽 갈비뼈를 번갈아 강타한다. 갈비뼈들이 부러진다. 범 아가리에 물려 아드득 씹히는 순간이다. 정신을 마비시키는 혹독한 고통에 허무성은 아뜩 까무러친다. 의식 잃은 상태로 모로 쓰러져서, 달막달막 가쁜 숨을 내쉰다. 얼굴 반쪽은 피투성이고, 다른 쪽 뺨은 차가운 시멘트 포석 위에 놓여져 있다. 의식의 단절. 영하의 차디찬 공기가 그의 피를 냉각시키려고 덤벼들고 있다. 죽음의 그림자가 바로 옆에서 얼쩡거린다. 아마 두어 번만 더 가격한다면, 그의 목숨은 끊어질 것이다. 그러나 폭력은 시작처럼 갑자기 거기에서 끝난다. 쓰러진 그의 몸 위로 지갑을 찾는 손들이 민첩하게 훑고 지나가더니 곧 그림자들이 사라진다. 급히 사라지는 발걸음 소리에 그는 기절상태에서 흠칫 깨어난다. 바닥에 떨어진 안경을 찾아 쓰고 몸을 움직여보다가 고통 때문에 다시 주저앉는다. 이제 골목 안에는 얼굴 반쪽이 피투성이인 채 넝마처럼 짓이겨진 허무성 외에는 아무도 없다. 순식간에 일어났다가 순식간에 사라진 그 무자비한 폭력을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 방금 거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소등한 골목 안의 집들은 컴컴한 어둠의 절벽처럼 요지부동이다. 아무도 불을 켜지 않는다. 아무도 내다보지 않는다. 개 짖는 소리도 없다. 희영이년은 왜 오늘따라 짖지 않는가? 그의 아내도 역시 아무것도 모른 채 잠들어 있다. 그녀가 잠들어 있는, 길가 쪽 방은 불과 3미터 전방이다. 그 방의 창문에 TV 화면의 흰빛이 떠올라 있다. 다시 상체를 일으키려다가, 무서운 고통에 다시 드러눕고 만다. 할 수 없이, 드러누운 자세 그대로 등밀이로 몸을 움직여 대문을 향한다. 간신히 철제문에 다가가 몸을 부딪쳤을 때야 비로소 그 개가 잠에서 깨어난다. 월월월, 적의가 가득한 개 짖는 소리가 어두운 골목길에 울려퍼진다.

 

 

2

 

그날 밤의 사고로 허무성은 오른쪽 관자놀이뼈가 함몰되고 갈비뼈 네 개가 나가는 중상을 입었다. 먼저 벽돌로 얼굴을 쳐 쓰러뜨려놓고, 사정없이 짓밟아버린 때문이다. 그렇게 중상을 입혀놓고 그들이 갈취해간 것은 신용카드도 없이 만원권 석장과 신분증밖에 안 들어 있는 얄팍한 지갑이었다. 겨우 3만원을 갈취하려고 멀쩡한 사람을 그렇게 넝마처럼 구겨버린 것이었다. 신고를 받고 파출소에서 정복차림의 순경 두 명이 병원으로 찾아왔는데, 흔히 겪는 일이어서 그런지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반쪽이 퍼렇게 멍들고 탱탱 부은 탈바가지 같은 얼굴을 하고 누워 있는 허무성을 보고 혹시 원한관계에 있는 사람이 있느냐고 묻고는, 없다고 하니까, 그럼 원한에 의한 청부 테러는 아니고, 비행 청소년의 소행이 분명하다고 했다.

“어유, 교수 양반, 정말 크게 다치셨어. 그래도 그만하기 다행이지,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네. 요새 이런 범죄가 부쩍 늘었거든. 밤늦게 귀가하는 취객의 지갑을 강탈하려고 그런 끔찍한 폭행을 저지르는 거요. 요새 어린것들 참, 말할 수 없이 흉포해졌어. 정말, 세상 말세야, 말세. 우리 구역만 따져도, 지난 한달 사이에 선생이 당한 것까지 포함해서 모두 네 건이 발생했어요. 일명 ‘퍽치기’라고 하기도 하고, 취객이 춤추듯 비틀거린다고 해서 ‘아리랑치기’라 하기도 하는데, 맞아죽은 사람도 한둘이 아닙니다. 일단 걸려들면 저항해서는 절대 안돼요. 얼굴을 쳐다봐도 안되고. 어떤 가해자가 자신의 인상착의가 알려지길 좋아하겠수? 무조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야 하는데, 하여간에 선생은 너무 경솔했수. 맥주병 깨고 덤비려고 했으니, 허 참! 조사는 해보겠지만, 너무 기대하지는 마슈. 순식간에 후닥닥 해치우고 달아나기 때문에 놈들을 붙잡기가 쉽지 않아요. 우리 구역에서 일어난 사건이지만, 가해자가 우리 구역이 아닌, 타지역에서 원정온 놈들이 분명해요. 십중팔구는 그 택시를 합승한 그 두 놈과 운전사가 범인일 거요. 선생을 편의점 앞에 내려주고 난 다음, 좀 떨어진, 어두운 곳에 차를 세우고서 몰래 뒤따라가 범행을 한 거죠. 아무튼 술에 너무 취하지 말고 조심하는 수밖에 없어요. 재수없으면 당하는 거지, 뭐.”

며칠 후 파출소에서 전화통보가 왔는데, 역시 예상한 대로 성과 별무라는 내용이었다. 단서를 발견할 수 없어 수사를 포기할 수밖에 없노라고 했다. 그들이 수사한답시고 한 일이라곤, 그 편의점을 찾아가보고, 사건 30분 전에 거기에서 라면을 먹고 나간 고교생 두 명을 의심해본 정도였다. 그들은 근처에 사는 불량소년들이긴 했으나, 알리바이가 있었다. 결국 그 전화통보는 ‘퍽치기’ 범죄는 경찰로서도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이라는 고백이나 다름없었다.

함몰된 오른쪽 관자놀이 부근의 꿰맨 상처와 시퍼런 멍이 아문 다음에도 부러진 갈비뼈들은 좀처럼 붙지 않아 한달 남짓이나 병원에 다녀야 했다. 그 폭행사건은 마음에도 상처를 주어, 그것을 생각할 때마다 허무성은 그 무자비한 냉혈성에 치를 떨곤 했다. 목격자도 없고 경찰도 밝혀낼 수 없었기에, 그 사건에는 가해자가 부재했다. 지난 시절의 정치테러가 그랬다. 그가 운동권 학생이었을 때에도, 심야에 정치테러가 종종 있었는데, 매번 피해자는 쓰러져 피를 흘리는데 가해자는 없었다. 오직 피해자의 운수소관일 뿐이었다. 이번 사건도 가해자가 부재함으로 해서 오로지 피해자인 그에게 국한된 문제가 되어버렸다. 하기는 가해자들은 어둠속에서 깜박하고 명멸한 영상처럼 처음부터 얼굴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택시 속에서도 술 취해 졸았기 때문에 어떻게 생긴 자들과 합승했는지 전혀 기억에 없었다.

이렇게 가해자의 실체가 모호하고 보니 그 폭행이 사람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한순간 느닷없이 불어닥친 사나운 폭풍의 타격처럼, 혹은 산비탈에서 우연히 굴러내려 덮친 바위처럼 일종의 천재지변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가해자는 없고 피해자의 고통만 극대화된 그 고립된 상황에서 허무성이 경험한 것은 죽음 그 자체였다. 기절했다는 것은 죽음 근처까지 갔음을 뜻한다. 두어 번만 더 발길질당했더라도 아마 죽고 말았을 테지. 차디찬 시멘트 블록 위에 의식을 잃은 채 얼어죽었을 테지. 그렇게 죽은 자신의 시체가 그후부터 걸핏하면 뇌리에 떠올라, 그럴 때마다 그는 무섬증에 몸서리치곤 했다. 그 두려움은 15년 전 바로 그 골목에서 납치된 후 겪었던 지옥체험과 연결되어 나타나곤 했다. 그때 모 정보기관에서 경험한 것이 바로 죽음의 감각이었다. 지금도 종종 방심상태를 비집고 나타나곤 하는 그 두려움, 죽음의 감각이 이제 그 퍽치기 사건으로 인해 더욱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3

 

허무성이 모 정보기관에 연행된 것은 S대생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하기 열흘 전쯤의 일이었다. 임기 1년을 남겨놓고 학생운동세력에 크게 불안해진 전두환이 “조직의 배후는 강압적 수사 없이는 캐낼 수 없다”라는 요지의 이른바 ‘각하의 분부 사항’을 내려보낸 시기가 바로 그 무렵이었다. 개학 후에는 골치 아프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현재 관찰·공작중인 것들을 모두모두 그전에 끝내라는 것이었는데, 그 명령에 따라 세 정보기관이 서로 경쟁적으로 ‘문제’학생들을 잡아다가 고문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박종철 고문치사는 이미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악명 높은 남산의 한 지하실로 끌려가 고시 출신 강한일 과장(고문 현장에서 그는 전무님이라고 불렸다)으로부터 모진 고문을 당했던 허무성의 뇌리에는 영원히 지울 수 없는 두 장면이 각인되어 있다. 체포된 첫날은 신병이 인도되는 순간부터 불문곡직 매질부터 당했다. 오래 끌 것 없이 속전속결로 끝내기 위해서, 아예 혼쭐부터 빼놓고 다스리겠다는 의도였다.

 

“이 새꺄, 무릎 꿇어!”

말단 담당에게 인계되는 순간, 허무성은 무방비 상태의 죄수로 전락하고 만다. 다짜고짜 머리채를 힘껏 앞으로 잡아채는 바람에 허무성은 앞으로 고꾸라진다.

“기어! 개같이 기란 말이야!”

머리채를 잡아끄는 대로 복도의 시멘트 바닥을 정신없이 뿔뿔 기어가는 그를 뒤에서 다른 한놈이 엉덩이를 걷어차면서 사납게 몰아댄다. 복도 끝에서 지하로 계단을 타고 허둥지둥 내려간다. 어느 방으로 문을 밀고 들어간다. 환풍기 구멍 하나만 남겨놓고 사면이 콘크리트 벽으로 꽉 막힌 그 좁은 방에 왜 욕조가 있는지 생각할 틈도 없다. 벽에 세워진, 손잡이에 초록색 테이프가 감겨진 몽둥이 하나가 얼핏 눈에 들어온다. 검정양복 차림의 강한일 과장, 그가 불문곡직하고 죄수의 안경을 낚아채면서 귀뺨을 한대 때린다.

“0.5초 내로 군복 갈아입어!”

시퍼런 군복 한벌이 발밑에 떨어진다. 입고 있던 옷을 얼른 벗고 군복 바지를 집어든 허무성은 옷 가랑이가 붉은 피에 흥건하게 젖어 있는 걸 보고 질겁한다.

“이 새끼, 뭘 꾸물거려?”

“여기, 피가!”

다른 바지가 던져지고, 거기에 두 다리를 넣으려고 허무성은 마구 허둥댄다. 미처 상의를 입기도 전에 부하 두 놈이 달려들어 몽둥이 찜질을 안기기 시작한다. 매질은 숨돌릴 틈 없이 돌풍처럼 집중적으로 그의 몸뚱이를 난타한다. 과장이 지켜보는 가운데, 두 놈이 빠른 동작으로 능숙한 솜씨를 발휘한다. 한놈은 몽둥이를 휘두르고, 다른 한놈은 조수 역할을 한다. 매가 몸에 터질 때마다 비틀거리며 쓰러지려는 그를 조수가 바로 세우고, 자꾸만 허우적거리려는 두 손을 매에 다치지 않게 꽉 붙잡으면서, 때리기 좋게 몸을 전후좌우로 능숙하게 돌려놓는다. 엉덩이를 헌 짚신바닥처럼 되도록 작신 조져댄 몽둥이는 허벅지로 내려간다. 매는 허벅지 주위를 돌면서 빈틈없이 골고루 타격한 후, 다른 허벅지로 옮아가고, 이어서 종아리, 팔뚝, 어깻죽지 등 급소와 뼈를 피해 살집 많은 곳만 골라 정확하게 자근자근 타격한다. 신중히 계산된 매질이다. 그들은 결코 분노하지 않는다. 영혼 없는 기계처럼 냉혹하고 정확하다. 그들은 육체의 고통을 더도 덜도 아닌 어느 한계까지 몰고 가면 정신이 굴복하는가를 잘 알고 있는 기술자들이다. 그들의 동료 중에는 피의자를 흔히 칠성판이라고 불리는 고문대에 뉘어놓고 어깨뼈를 탈골시켜 양쪽 팔을 덜렁거리게 하다가 다시 접골시키는 해부학의 대가들도 있다. 그렇게 신중하게 계산하고 정교하게 해부해서 만들어진 그 알맞은 분량의 고통이란 애당초 인간이 견딜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을 부정하고, 생명을 부정하고, 인간을 개의 수준으로 만들어버리는 테러행위일 뿐이다. 그의 입에서 토해져나오는 것도 외마디 동물적 비명소리다. 이 극한상황은 ‘제발, 살려주세요’ 같은 인간의 말을 발음할 틈새를 주지 않는다. 단 두마디 말도 발음하기에 너무 길어 오직 악, 악, 외마디 비명만 지를 따름이다. 고통은 참으로 혹독하다. 그 고통은 숨이 꽉 막히게 근육을 경직시키면서 지진에 의한 땅의 균열처럼 살 속 깊이 뚫고 들어가 뼈대와 내장을 찌르고 두개골의 골수를 흔들어대는 것이다. 생생하게 느껴지는 죽음의 감각. 지옥이 무엇인지 미리 알려주는 고문이다. 아니, 내가 죽어 있는 것은 아닐까? 이미 죽어서 지옥의 불에 내던져져 있는 것은 아닐까? 활활 타는 지옥의 유황불 속에서 그의 전존재가 불타고 있다는 느낌이 절실하다.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은 고통. 헐떡거리며, 침을 질질 흘리며 단말마의 비명을 계속 질러대지만, 자신의 귀에는 전혀 들리지 않는다. 고문은 그의 인격을 반쯤 파괴해놓고서 약 5분 만에 끝이 난다. 5분이 영원처럼 느껴진 그 상황이 지나자, 죄수는 눈에 공포의 빛이 가득한 한마리의 똥개로 변하고 만다. 물, 물, 제발 물 좀 주세요! 꽉 쉰 목소리, 타는 갈증으로 헐떡거리는 그의 입 안으로 샤워기 물이 들어간다. 이 샤워기의 호스를 길게 훑어내리면서 강한일이 말한다. 훅, 끼치는 독한 술냄새, 헛구역질이 올라온다.

“죽고 싶겠지? 죽고 싶어도 맘대로 안되는 데가 여기야. 두달 전엔 한 새끼가 고문에 못 견뎌 이 샤워 호스를 목에 감아 자살하려고 하다가 들켰지. 자, 이제 시작해볼까? 네가 소속한 지하써클이 학내 시위를 지휘한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야. 우린 널 검거하기 전에 몇번 미행했기 때문에 대충 알 건 안다구. 써클후배 문정선이가 네 애인이라는 것도, 그리고 네가 그년과 재미 보려고 금요일마다 여관에 드는 것까지 알고 있어. 죄다 불어야 해! 네가 알아서 불어야지, 그러지 않으면 그년까지 잡아다가 족칠 수도 있어!”

어디선가 좀 떨어진 곳에서 악, 악, 하고 처절한 비명소리가 들려온다. 방음문이 조금 열려 있고, 그 틈새로 비명소리가 들려온다. 고문당하는 다른 사람의 비명소리를 들려주려고 일부러 문을 조금 열어놓았나보다. 허무성은 자신의 비명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 들려오는 소리가 방금 자신이 내질렀던 비명의 메아리처럼 느껴져 부르르 몸서리친다. 나도 저렇게 처절하게 비명을 질렀겠지.

 

그 샤워기와 그것이 붙어 있는 욕조는 그 다음날 고문도구로 쓰였는데, 그 물고문은 전날 파괴당하고 남은 그의 인격의 절반을 마저 파괴해버렸다. 그들은 물고문을 ‘수도공사’라고 불렀다.

 

환풍기 구멍 외에는 사면이 벽으로 밀폐된 정방형의 방, 바깥세상과 절연된 지하 2층, 마치 숨구멍 하나만 남겨놓고 심해 바닥에 가라앉은 컨테이너 박스 속 같다. 이승도 아니고 저승도 아닌, 그 사이의 공간이다. 한쪽 벽에 물이 가득 찬 욕조가 놓여 있고, 그 맞은쪽 벽 가까이에 전기스탠드가 서 있는데, 갓등의 불빛이 욕조를 향하도록 비스듬히 조정되어 있다. 그래서 전기스탠드 뒤쪽은 어두운데, 그 그늘진 배후에 이 드라마의 연출자인 강한일 과장이 작은 책상을 앞에 놓고 버티고 앉아 있다. 그의 검정양복 정장이 배후의 그늘과 어울려 악마적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팬티만 남겨놓고 벌거벗겨진 채 죄수 허무성은 욕조 옆의 의자에 앉혀진다. 그 전날 매타작당한 그의 알몸은 잉크빛 멍든 상처들로 뒤덮여 있다. 안경을 빼앗겨 시야가 흐릿해진 상태여서, 그는 제 알몸의 무방비 상태가 더욱 절실하게 느껴진다. 두손이 등뒤로 묶여 있고, 두발도 묶여 있다. 보통 크기의 평범한 아이보리색 욕조다. 따뜻한 목욕물, 분홍빛 알몸의 나른한 쾌감을 위한 그 문명의 이기가 이제 돌연 야만의 흉기로 변한다. 양옆에 붙어선 두 명의 고문자가 갑자기 그의 양어깨를 잡아 물속에 처박는다. 머리통이 욕조바닥에 부딪힌다. 물을 안 먹으려고 결박된 몸을 마구 버둥거린다. 숨을 참을 수 없다. 어느새 뒤에 다가와 보고 있던 과장이 맹렬히 몸부림치며 떠오르는 그 머리통을 구둣발로 짓눌러 물속에 도로 처박는다. (이로부터 열흘쯤 후에 S대생 박종철이 이와 똑같은 물고문을 받고 숨졌는데, 검시 결과 폐 속에서 물거품 소리가 뽀글뽀글 들렸다고 했다.) 드디어 몸 안으로 물이 공격해 들어온다. 물을 울컥 삼킨다. 코로도 입으로도 물이 들어온다. 그 구멍들이 자신의 육체를 배반하고 적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몸이 몸을 먹는다. 그의 테두리, 그를 그답게 지켜주던 몸의 경계를 허물어뜨리면서 타인의 몸이 들어온다. 무자비한 수컷이 들어온다. 그 잔인한 능욕이 바로 권력이다. 고문자 강한일의 몸이 체제의 권력 크기로 커져간다. 무한대로 커지는 그의 몸뚱이에 깔려 죄수 허무성의 몸뚱이는 무한소로 작아진다. 허무성이 지닌 모든 것이 의심되고 부정되고 파괴된다. 그의 이념도, 그의 사랑도 철저히 부정된다. 그 무엇에도 비교할 수 없는 고통. 비교할 것이 있다면 오직 죽음뿐인 그 절대적인 고통. 파쇼권력은 그렇게 그의 알몸을 덮쳐 내부를 유린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죽음을 흉내내면서 허무성이라는 인간 생체에 인간 부정, 생명 부정의 해체작업을 벌인다. 물이 들어오는데도 콧속은 불길이 치솟는 듯 뜨겁다. 물이 새들어오는 귓속에서 쌕쌕쌕 이명이 무섭게 울린다. 아, 참을 수 없다. 더이상 못 참고 기도의 날름막마저 열어주면 그 순간이 곧 죽음이다. 정선의 얼굴이 얼핏 떠올랐다가 사라진다. 육체가 참을 수 없는 고통의 거대한 덩어리로 한없이 부풀어오른다. 육체가 고통을 참지 못하고, 정신을 배반하려고 한다. 아, 까무러칠 수만 있다면! 아니, 차라리 죽을 수만 있다면! 이 저주의 육체를 포기해버릴 수만 있다면! 그러나, 능숙한 고문자들은 그 시간을 정확히 안다. 위기 직전에서 머리를 수면 위로 들어올려 잠깐 숨통을 틔워준다. 푸아, 푸아, 가쁜 숨을 몰아쉬는 희생물 앞에 얼굴을 바싹 들이대면서 강한일이 소리친다.

“이 빨갱이 새끼, 허무성! 항복해! 뭐, 더이상 자백할 게 없다구? 네가 소속한 써클은 그렇다 치고, 각 대학 연합써클의 계보도 알고 있을 거 아냐! 자백할 게 없으면, 소설이라도 써봐, 픽션이라도 만들란 말야. 내가 필요한 것이 그따위 시시한 정보인 줄 아나? 내가 필요한 것은 너의 완전한 항복, 다른 사람 되게 탈바꿈시키는 것이야. 네가 완전히 항복할 때까지 고문은 멈추지 않을 거야. 도중에 고문치사도 있을 수 있지. 그렇다고 우리가 눈이나 끔뻑할 줄 알아? 관리상 실수로 처리하면 그만이야. 이 새끼 다시 물에 처박아!”

그렇게 물속에 머리를 처박아넣기를 여러번 반복한다. 멈춰진 시간, 의식이 지워진 그 죽음의 백지 위에 정선의 얼굴이 얼핏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사형집행은 진행되고 있으나, 최후의 일격은 계속 미뤄지고 있는 상황이다. 다섯 주전자쯤의 물이 뱃속에 들어갈 즈음, 그들의 냉혹 정확한 고문기술에 자칫 이상이 온다. 조직의 배후를 캐기 위해서는 강압수사가 불가피하다는 ‘각하의 분부’가 그들의 손에 과도하게 힘을 실어준 모양이다. 그는 마침내 까무룩 의식을 잃는다. 흐릿하게 의식을 잃어가는 그의 머릿속에 정선의 얼굴이 다시 떠오르고는 20여년 생애와 관계된 듯한 수많은 영상들이 마구 겹쳐지면서 빠른 속도로 줄지어 지나간다. 죽었다가 용케 숨이 돌아와 살아난 사람들이 죽음체험 속에서 보았다는 그 영상들이. 그는 의식을 잃은 채 욕조 밖으로 끌어내진다. 물 먹은 배가 항아리처럼 부풀어 있다. 고문자들이 놀라서 황급히 결박을 풀고 응급치료를 한다. 손바닥으로 가슴을 반복해서 여러번 치고, 뺨도 때린다. 다행히 다시 의식이 돌아온다. 과장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담배를 피워문다.

“어휴, 이 새끼가 사람 놀래키네!”

물 먹어 부풀어오른 뱃구레를 한놈이 구둣발로 쿨렁쿨렁 밟자, 입과 코에서 물줄기가 호스물처럼 뿜어져나온다. 강한일의 입과 코에서는 담배연기가 푸짐하게 뿜어져나온다. 그의 검정양복에 욕조물이 몇방울 튀어 있다. 잠시 휴식. 허무성은 기진맥진 쓰러진 채 가쁜 숨을 몰아쉬고, 부하 두 놈도 담배를 피워물고 숨을 돌린다. 이윽고 과장이 작업 실시를 명한다.

“그놈, 칠성판에 올려!”

허무성의 푸르게 멍든 알몸은 물과 땀으로 흠씬 젖어 있다. 그 몸이 담요로 싸여 고문대에 뉘어진다. 고문 도중 요동질 못하게 끈으로 발목, 무릎 위, 허벅지, 허리, 가슴, 다섯 군데를 차례로 묶는다. 과장이 말한다. 그의 입에서 역한 술냄새가 풍긴다.

“허무성, 왜 이걸 칠성판이라고 부르는지 들어서 알고 있겠지? 시신 넣는 관의 바닥판이 칠성판인데, 다섯 군데를 묶어 염한 시신이 그 위에 눕혀지는 거다. 잘 들어라, 허무성! 너는 지금 염한 시신 되어 칠성판에 누워 있는 거다. 다시 말하면, 너는 지금 새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 죽어 있는 거야. 우린 정신의 유물론을 믿고 실천하는 사람들이다. 정신이란 두뇌 신경조직의 화학작용에 의해 산출되는 물질일 뿐이야. 그래서 정신은 얼마든지 조작이 가능하지. 뜯어고칠 수 있어. 우린 말로 묻는 신문 따위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 우리의 방식은 정신에 묻지 않고, 몸에 묻는 것이다. 몸에 물으면 곧바로 정신이 대답해주거든. 반역의 정신을 깡그리 지우고, 그 자리에 순종의 정신을 심는 거지. 그게 녹화사업이란 거다. 너의 머릿속의 불그죽죽한 의식을 녹색으로 바꿔주는 거지. 정신을 부수고 재조립하는 거야, 너는 지금 여기서 죽어서 다른 사람으로 태어나야 해. 자, 그럼 시작해볼까?”

눈이 가려진 다음, 코와 입 위에 수건이 덮이고, 그 위에 샤워기 물이 쏟아진다.

 

 

4

 

매질과 물고문당할 때의 그의 몸은 철저하게 빼앗긴 몸이었다. 빼앗긴 몸은 고문자 강한일의 무기가 되어 역으로 그를 공격해왔다. 몸이 몸을 공격했고 제 몸이 제 몸을 먹는 듯한 무서운 고통이었다. “그 새끼들 누구 누구야? 이름을 말해! 다 불어, 불란 말이야!” 하고 궁지로 몰아붙일 때, 써클동지 이름들 역시 고문자의 무서운 무기가 되지 않았던가. 결국 허무성은 항복하고 말았다.

그렇게 하루 반 동안 집중적으로 혹독한 고문을 안긴 이유는 자백을 빨리 받아내서 용의자들이 지하로 숨기 전에 일제검거하기 위해서였다. 각 대학 연합 지하써클들은 선 조직으로 되어 있어서, 한 조직원이 감쪽같이 증발되더라도 이틀만 지나면 자연히 선이 끊어진 것이 밝혀지기 때문이었다. 하루 반 동안의 그 혹독한 고문은 허무성의 내부를 온전한 것 남기지 않고 폐허로 만들어버렸다. 고문받은 몸이 마침내 정신을 배반하여, 그로 하여금 자신의 정치적 신념과 동지들을 배반하게 만든 것이었다. 그의 자백에 의해 21명의 주동자급 문제학생들의 신원과 소재가 드러나고 말았다. 최종 자술서를 받아낸 강한일은 생판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태도가 부드러워졌다. 고문의 상처를 핥아주기라도 할 듯이, 그의 목소리는 부드럽게 울림이 좋았고, 이미 마음이 망가져버린 허무성은 그 달콤한 목소리에 무방비 상태로 끌려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강한일은 신파 연극의 능숙한 연기까지 갖춘 세련된 극우 이론가였고, 눈물 흘리는 죄인을 어루만져주는 검은 양복의 사제이기도 했다.

“어때, 죄다 불고 나니까, 시원하지? 자네 자술서에 올라 있는 용의자 21명을 검거하려고 이제 막 우리 회사 직원들이 출발했어. 그놈들은 잡히는 족족 모두 감옥행이야. 죄질로 봐서 자네도 최하 2년짜리 징역감은 충분해. 자넨 내가 고마운 줄 알아야 되네. 이것으로 끝나길 얼마나 다행인가? 병중인 부친을 팽개치고 어떻게 감옥에 들어가겠나, 그렇지? 그럼, 그럼, 실컷 울어, 긴장 풀어지게. 그간의 억하심정도 눈물로 씻어버려. 지나간 과거는 잊어버리고 이제부터 새사람으로 탈바꿈하는 거야. 아암, 우린 아무나 선택하지 않아. 자네를 선택한 건 자네가 맘에 들었기 때문이지. 자넨 그 싸가지 없는 독종 놈들과 달라. 우선 학구적인 자세가 맘에 들었어. 지하 이념써클을 하는 놈들은 대개 학과공부를 아예 무시해버리거든. 그런데 자넨 그와 정반대로 학점이 아주 좋았어. 그건 달리 말해서, 자네가 겉보기에는 과격해도 골수분자는 아니라는 뜻이지. 자넨 기질적으로 천생 학자야. 공부를 계속할 수 있도록 우리가 도와주지. 나도 그렇게 무식한 사람은 아니야. 고시 패스한 엘리뜨가 야심 없이 왜 이런 데 있겠나? 우리 회사가 앞으로 필요한 것은 유능한 지식인들이야. 변화하는 시대에 맞게 이론을 세우고, 선전·선동하려면 세련된 지성이 필요하다구. 무식한 군바리들만 가지고는 어림도 없지. 허무성! 이제부터 우리와 같이 일하는 거야, 알았지?

이건 자네와 나만을 위한 자리야. 이 뜻깊은 자리를 위해서 이 술을 마련했지. 이거 아주 좋은 술이야, 씨바스 리갈! 알지? 그날 밤 궁정동 안가의 술. 자, 이젠 그만 눈물 닦고, 한잔 하게. 어서 이 술잔 받아. 이런 말 들어봤는가? 고문을 독하게 당한 직후, 고문자로부터 얻어마시는 술맛보다 더한 쾌락은 이 세상에 없다는 거야. 이 술맛의 기억은 낙인 같은 것이어서 평생 잊지 못하지. 씨바스 리갈! 자, 술 들어! 땡 하자구, 땡! 그렇지. 크으! 알코올이 목구멍에 짜릿하구먼. 어때, 술맛이? 기막히지? 꽉 조여졌던 심신의 긴장이 이제 서서히 아주 기분 좋게 풀릴 거야. 그래, 이틀 동안 얼마나 고생 많았는가. 날 너무 매정한 사람으로 보지는 말게. 사실은 자네를 위해서 일부러 고문의 강도를 높였던 걸세. 자네 머릿속의 반체제 정신을 부수어 자네를 완전히 우리 사람으로 만들고 싶었던 거야. 자네가 우리 사람으로 재탄생하기 위해서 마땅히 치러야 할 절차인 거네. 히야! 한잔 들어가니까 대번에 기분 좋아지는구먼. 씨바스 리갈! 역시 좋은 술이야. 자넨 왜 술잔 안 드나? 자넨 학교에서 소문난 술꾼이잖아. 술꾼은 역시 술로 통한단 말이야. 그만 눈물 닦고 술 들라니까! 아니, 그렇게 입만 댔다 놓지 말고, 스트레이트로 쫙 들어. 그렇지, 그렇지! 봐, 벌써 자네 얼굴에 화색이 예쁘게 돌기 시작하잖아! 역시 자넨 미남이야. 솔직히 난 자네한테 반했어. 여기 들어오기 전부터, 난 자네가 좋았네. 관찰대상이던 자네가 수배자 명단에 오른 것은 1개월쯤 전이었지. 좀처럼 잡히지 않는 자네 때문에 내가 속 좀 썩었어. 그동안 난 자네를 집중적으로 연구한 셈이지. 부하들이 미행·염탐해서 물어오는 정보들과 자네 사진들, 그리고 문건에 가명으로 쓰인 자네의 글들을 검토하면서 말이야. 그러다보니 이상하게 자네한테 애정이 가대. 허 참, 아니할 말로, 자네의 그 과격한 글도 좋아지고 말이지. 자네의 글은 논리적이고 힘이 있었어. ‘국민의 1%밖에 안되는, 한줌도 못되는 파쇼세력’이라고 자네는 말했지. 그렇게 우리 쪽을 ‘한줌도 못되는 파쇼세력’이라 규정하고, 타협과 절충의 개량주의자들까지 적으로 몰아세우면서 민중의 비타협적 투쟁을 선동했는데, 논조가 과연 섬뜩하더군. 혁명 운운하려면 그 정도는 과격해야지 않겠어? 박쥐처럼 중간에서 이 눈치 저 눈치 보는 개량주의놈들은 우리도 싫어해.

자네는 또 미행을 따돌리는 데도 아주 선수더군. 홍길동처럼 말이야. 자넨 미남이니까 가발만 쓰면 감쪽같이 여학생으로 둔갑되곤 했지. 내 부하들이 자네 때문에 얼마나 골탕먹은 줄 아나. 하여간 멋쟁이였어. 자넨 주로 여학생들 속에 은신해 있더구먼. 가발 쓴 자네를 여러 여학생들이 에워싸 숨겨주고 있는 광경을 상상하면 정말 질투가 안 날 수 없었지. 내가 질투한 것은 자네가 아니라 자네를 독점하고 있는 그년들이었어. 결국 내가 그년들로부터 자네를 빼앗아왔지만 말이야. 이제 자네는 우리의 사랑 속에 놓여 있네. 고문, 그것도 내가 자네를 사랑한 한 방식이야. 통과의례로 고문이 불가피했다는 걸 이제는 이해하겠지? 자네의 고통을 보면서, 솔직히 그 고통을 가하는 나 자신도 괴로웠어. 글쎄, 그때 내가 느낀 것이 괴로움인지, 기쁨인지 잘 모르겠어. 고통 속의 기쁨이랄까…… 나를 싸디스트라고 생각해도 할 수 없네. 하여간 그것은 사랑의 기쁨, 사랑의 쾌락이었어. 그래, 나는 자네의 고통까지 뜨겁게 사랑한 거야. 자네의 알몸은 아름다웠어. 그 아름다운 알몸이 창에 찔린 짐승처럼 이리저리 뒤틀리면서 계속 몸부림쳐댔는데, 아, 그걸 무어라 형언하면 좋을까? 나는 숨이 가빠 계속 헐떡거렸어. 정말 눈이 뒤집히고 피가 거꾸로 흐르는 것 같았어. 마침내 그 알몸은 시퍼렇게 멍들고…… 그리고 그 푸른 상처가 나를 슬프게 하고…… 이렇게 해서 나는 자네를 좋아하게 된 거야. 음, 얼마나 아팠을까? 엉뎅이 좀 만져봐도 되겠지? 왜, 놀래? 얼마나 다쳤는지 좀 만져보는 것뿐인데, 뭘 그래……

씨바스 리갈! 자, 한잔 더 해야지. 그렇지, 그렇지, 다시 한번 땡! 술맛 좋지? 자, 이제 결론으로 들어가자구. 궁정동, 그 사건 이후 난 그분을 애도하는 뜻에서 이 술을 좋아하게 됐지. 영어 스피릿(spirit)은 ‘영혼’ 외에 ‘알코올’이란 뜻도 있잖아. 그래서 그런지 이 알코올을 마시면 돌아가신 그분의 영혼이 내 몸 안에서 되살아나는 느낌이 들어. 그래, 우리의 가슴속엔 그분의 영혼이 언제나 살아 있어. 그리고 이 술을 마시면 그분의 슬픔도 느껴지지. 그날 밤, 그 안가에서 옆에 앉아 기타 치면서 노래 부르던 심수봉, 「그때 그 사람」의 슬픔도 느껴지지. 영부인을 먼저 보낸 슬픔 때문에 평소 자주 약주를 하셨다는구먼. 약주에 취하면 경호원에게 업어달라고 하셨어. 비스마르크에 못지않은 철혈의 사나이인 그분이 가슴 한구석에 그렇게 촉촉한 물기를 지니고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닌가. 그럼, 진정한 카리스마에는 그렇게 슬픔이 내포되어 있어야 하는 거지.

씨바스 리갈! 자, 술잔 들게! 그러나 무엇보다 슬픈 것은, 그날 밤 불시에 발생한 죽음이었지. 온 국민이 슬퍼하지 않았던가. 조기를 걸어놓고, 1주일간 계속된 그 애도의 물결을 생각해봐. 그때 자넨 안 울었나? 울었다고? 자네 몇살이었지? 8년 전이니까, 중3 때라고? 과거에 우리가 그분의 죽음을 도대체 상상이나 할 수 있었나? 불가사의한 일이 발생한 거지. 그야말로 있을 수 없는 일이 발생한 거야. 그래서, 그분의 죽음과 함께 나라도 없어지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이 생길 지경이었지. 왜냐하면, 그분은 체제 그 자체였으니까. 이 파시즘의 체제는 그분이 만든 거야. 그분이 저격당했다고 해서 이 체제가 붕괴되었는가? 천만에! 그 비참한 최후, 온 국민을 눈물 흘리게 한 그 슬픔은 오히려 고인의 카리스마를 더욱 높여준 결과가 되지 않았는가 말이야. 그분은 예수처럼 더욱 강한 카리스마로 부활하기 위해 죽은 거야. 이땅의 군신(軍神)으로 부활한 거야. 씨바스 리갈! 자, 그분의 영원한 신화를 위하여!

씨바스 리갈! 자, 마시고 취하자구. 사연 많은 이 술은 그래서 자네를 위해 특별히 준비한 거야. 이 자리에서 자네를 그분과 연결해주기 위해서야. 정신적으로 말이야. 이 자리는 자네의 개종을 기념하는 의식의 자리라고 할 수 있네. 나는 그 의식을 집행하는 사제라고 생각해줘. 술도 스피릿, 영혼도 스피릿이라고 했지? 그러니까 이 술은 일종의 영성체인 셈이지. 씨바스 리갈! 자, 쭈욱 들이켜 그분의 스피릿을 느껴보게나. 그분은 가셨지만, 그 영혼은 이 체제의 원동력으로서 우리 속에 살아 있는 거야. 그분은 우리의 신앙이고, 우리 삶의 근거인 거야. 나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야. 교회 집사이지만, 교회 못지않게 그분에 대한 신앙 또한 중요하다고 봐. 이 체제를 지탱해주는 정신적·물질적 기반이 바로 우리 기독교 신자들 아닌가. 그분은 불멸의 존재야. 그분은 죽지 않고 우리의 마음속에 굳건히 살아 있어. 그분이 세운 이 파시즘의 체제도 불멸이야. 인류가 발견한 가장 이상적인 체제가 바로 파시즘이야. 허무성, 이 자리는 자네가 나를 통해서 그분과 연결되는 의식의 자리야. 이제 자네도 나처럼 그분의 노선을 따라가야 하는 거지.

알려진 대로 그분은 한때 큰 시련을 겪었네. 젊어서 좌파사상에 심취해본 적 없는 자도 바보지만, 나이가 들어서 빠져나오지 못한 자는 더 큰 바보라고 하지 않는가. 그분은 청년장교 시절 사상범으로 특무대에 잡혀가 험하게 고문을 당했지. 고문에 이길 장사는 없어. 사람의 정신은 상처받지 않는 금강석하고는 다르니까. 그때 그분은 맘을 바꾼 거지. 위기를 호기로 바꾼 거야. 그러한 지혜가 없었더라면, 나중에 그분이 보여준 불멸의 영웅상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을걸. 물론 빨갱이들은 그것을 변절이라고 말하겠지. 그분의 자백으로 군대와 육사 내의 남로당 세포들이 많이 적발되어 처형당했으니까. 그러나 그건 자백이 아니라 고발이라고 해야 옳아. 그분이 고발한 남로당계 군사조직표가 수뇌부에서 말단까지 피라미드형으로 차트에 작성되었는데, 그 수가 어찌나 많았던지 어른 키높이만하더라는 거야. 왕창 일망타진된 거지. 하여간 결과적으로 국가를 위해서 잘된 일 아냐? 허무성, 자네의 경우도 마찬가지야. 고문에 굴복했다고 낙담하지 말아. 도대체 고문에 이길 장사가 어디 있나. 아무도 고문을 이겨내지 못해. 굴복하는 건 당연하지. 우리의 막강한 그분도 그랬잖은가. 요는 그분처럼 이 위기를 호기로 삼는 것이 중요해. 변절이 아니야. 그렇게 비관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생각하게. 변절이 아니라 반체제 음모자들을 고발한 것뿐이라고. 그래, 자네 이제는 우리 사람이 된 거야.

씨바스 리갈! 자, 한잔 더 들게. 이제 자네는 내 손을 빌려 새롭게 태어났으니, 내 양자인 셈이야. 열다섯살 차이니까, 충분히 아들뻘이 될 만하지. 허무성, 그렇지 않나? 자백을 한 이상, 자네는 이전의 상태로 결코 돌아갈 수 없어. 거기로 돌아가면 자네는 그들에게 배신자일 뿐이야. 빼도박도 못할 지금 자네의 처지를 우리가 아니면 누가 돌봐주겠나. 나는 내 아들의 장래에 대해 결코 무관심하지 않겠어. 자네를 우리 회사의 장학생으로 삼을 생각이야. 일본과 서독에서 공부하는 유학생들 중에는 우리 장학생이 더러 끼여 있지. 그들은 아르바이트 삼아 정보원 역할도 하면서 공부하고 있어. 아까도 말했지만, 이 체제를 시대 변화에 맞게 세련화해야 해. 그것을 위해서 여러가지 프로젝트를 세워놓고 있는데, 유능한 이론가, 선전·선동가들을 양성하는 것도 그중 하나이지. ‘박정희학’이라는 이름의 학문이 이제는 나와야 할 때야. ‘박정희학’ 즉 ‘박올로지’에는 다른 나라의 파시즘과는 조금 다른, 한국 고유의 그 무엇이 있지. 그걸 연구해야 해. 이제는 무식한 군바리들이 무대 전면에 나서는 시대는 지났어. 상무정신으로 무장한 세련된 지식인 파시스트들이 필요할 때야. 우린 자넬 일본으로 유학보낼 생각이야. 탁월한 파시스트였던 일본 최고의 소설가 미시마 유끼오를 혹시 아나? 그렇지, 그렇지! 역시 자네는 유식해. 파시즘의 화신인 그가 군인이 아니라 지식인이었다는 것이 중요해. 일본 최고의 소설가였어. 군국주의 대의를 전파하기 위해 그가 감행한 그 놀라운 할복자살의 드라마를 생각해봐. 그 장면을 떠올리면 난 지금도 흥분으로 몸이 떨려. 전세계를 경악하게 했지. 세계대전의 종식과 함께 패퇴했던 파시즘이 다시 살아나는 극적인 순간이었지. 그때가 대학 졸업하고 군대에서 ROTC 장교로 근무할 때였는데 말이야, 할복자살의 그 참혹한 장면을 세세하게 묘사한 신문기사를 읽고 까무러치게 놀랐지. 젊은 나의 의식에 미시마의 죽음이 끼친 영향은 결코 작은 게 아니었어. 머리에서 발끝까지 완전히 매료당하고 말았으니까. 일본에 가거든 그 위대한 작가를 만나보게. 거기에 가보면, 죽은 그가 일본 군국주의의 군신으로 부활해 있는 걸 보게 될 거야.

자, 오늘은 이야기를 이쯤에서 마무리하기로 함세. 일본유학 가기 전에 먼저 군대부터 갔다와야겠지? 자네가 이번 사건 때문에 배신자 소리 들을까봐 전전긍긍인 모양인데, 아예 지금부터 증발해버리는 거지, 뭐. 졸업반이니까 더이상 학교 나갈 필요 없잖아. 이참에 군대 갔다오게. 병역을 마치면, 곧장 일본으로 유학가는 거야. 군대 3년, 일본유학 3년, 그렇게 6년을 세상 밖에 나가 있다가 돌아오면 모든 게 달라져 있을 거야. 일본에 가서 거기 대사관 일을 아르바이트 삼아 도와주면서 한 3년쯤 공부하고 오라구. 그때는 자네를 위해 어느 대학에 전임자리가 마련되어 있을 거야. 허무성! 다시 말하지만, 자네는 이제 몸 바꿔 전혀 딴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명심하게. 자네 몸도 나처럼 이 체제, 이 씨스템의 일부가 된 거야. 박정희 장군은 이 체제 그 자체야. 그분의 생명도, 이 체제의 생명도 불멸이야. 우리는 가신 그분의 살아 있는 육체로서 여기에 있어. 이 체제가 불멸이라면, 이 체제의 일부인 우리도 불멸인 거야. 이것이 나의 생사관이자 철학인데,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항이니까, 나중에 진지하게 의논하기로 하세. 씨바스 리갈! 자, 술 들어. 스트레이트로 쭈욱! 옳지, 옳지!”

 

 

5

 

고문의 멍든 상처들은 보름쯤 지나자 완전히 아물었는데, 그러자 그의 귀가가 허락되었다. 집에 돌아온 그는 일제검거로 두 대학 5개 지하 이념써클의 핵심이 완전 공백상태가 되어버린 것을 알고,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는 다리를 넘어선 자신의 처지를 뼈저리게 절감해야 했다. 반수 이상이 검거되고 나머지는 지하로 종적을 감추었다. 남아 있는 몇명의 후배들 중에 문정선이 있었지만, 그녀를 만나는 일이 너무도 괴로웠다. 한달간이나 집에 틀어박혀 지내다가, 여러번 망설인 끝에 마지막으로 정선을 만났다. 역시 예상한 대로 그녀의 태도는 달라져 있었다. 자신의 존재 이유가 오직 운동과 문정선뿐이라면서, 그 둘을 동시에 열정적으로 사랑해온 그였다. 그녀와의 사랑은 운동의 전투적인 내용을 언제나 풍요롭고 로맨틱한 분위기로 감싸주곤 했다. 그렇게 운동과 사랑은 한몸이었다. 그러므로 표리일체를 이룬 그 둘 중에서 운동을 잃고서 사랑을 기대한다는 것은 아예 가망없는 일이었다. 한가닥 실낱 같은 기대를 가지고 만났지만, 결과는 예상대로 절망이었던 것이다. 그녀에게 그는 애인도 동지도 아니고 오직 배신자일 뿐이었다. 잉크빛 멍들이 인멸된 지금, 그녀에게 그 고문의 고통이 어떠했는지를 이해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무리 고문이 심했다고 해도, 어떻게 동지들을 배신할 수 있느냐고 정선은 그를 비난했다. 죽음의 몇보 전까지 육박해들어간 그 치열한 고통을 당사자 외에 누가 이해할 수 있겠는가. 또다른 당사자인 강한일도 그 고통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고문을 가하는 자이지, 고문을 당하는 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것이 상대방에게 어떤 고통의 감각을 일으키는지 알 리 만무했다. 고통에 비명지르고 몸부림치는 허무성에 대해 그가 느낀 감정이란 싸디스트의 은밀한 쾌락일 뿐이었다. 모든 것을 자백하지 않으면 안되는 그 절대적 고통의 상황을 정선은 이해하지 못했다. 불완전하게나마 그를 소생시킬 수 있는 것은 사랑뿐이었건만, 그녀는 단호하게 결별을 고하고 떠나버렸다. 버림받은 사랑은 비참한 것이었다. 남산 지하실에서 겪은 것이 육신의 지옥체험이었다면, 이제는 정신이 그 체험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떠나가버린 문정선은 그의 새로운 고문자였다. 사랑이 뜨거웠던 만큼 그녀가 남긴 기억들 어느 하나 아픈 가시가 아닌 것이 없었다. 아름다운 눈, 그윽한 깊이의 검은 눈빛을 잊어야 하는 것이다. 너무나 탐스러워 살포시 입술을 대보던 눈두덩의 도톰한 감각, 울림 좋은 감미로운 목소리도, 샴푸를 쓰지 않은 생머리의 풋풋한 냄새도, 그리고 알몸! 아아, 뭉클한 젖가슴, 잘룩한 허리, 펑퍼짐한 둔부와 같은 알몸의 등고선들을 손바닥으로 더듬을 때의 그 감미로운 감촉을 어떻게 잊을 수 있으랴! 기억은 그렇게 그의 가슴을 갈가리 찢어놓았다.

결국 허무성의 이름 위에는 배신자라는 지워지지 않는 낙인이 찍혀버렸다. 동지들과 공유했던 이념과 명분을 그는 잃어버렸다. 지금까지 자신의 인간적 실존을 지탱해주던 이념과 명분, 사랑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동지들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 배신한 것이고, 그것은 곧 정신적 죽음을 의미했다. 그리하여 허무성은 S대의 박종철과 비슷한 시기에 검거되어 비슷한 고문을 받았지만, 정반대의 처지가 되고 말았다. 한 사람은 죽고 다른 한 사람은 살았지만, 정신적인 면에서 생과 사는 정반대의 것이 되었던 것이다. 죽은 박종철이 그해 6월의 광장에서 자유의 넋으로 거대하게 부활하는 기적을 목도한 그는 자신의 정신적 죽음을 뼈저리게 느껴야만 했다. 방위병으로 서울 근교에 근무했던 그는 퇴근 후에 몇번 민간인 복장으로 바꾸고 도둑처럼 밤거리의 시위군중 속에 끼어들어보았으나, 그 열광은 전혀 그의 것이 아니었다.

허무성은 방위병으로 병역을 마친 뒤, 예정된 코스대로 일본에 건너가 모 대학교 대학원에 적을 두고 일본의 동아시아 침략사를 전공했다. 대학시절에 일본판 좌익서적을 읽기 위해 일본어를 배워둔 덕택에 학업에는 비교적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고, 고통스러운 그 사건의 기억을 잊기 위해서라도 공부에 몰두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석·박사 과정의 재학생 18명 중 유일한 외국인 학생이었던 관계로 그는 여러모로 심리적 갈등을 겪어야 했다. 식민지 조선의 피해 역사이기도 한 일본의 가해 역사를 그 나라에 가서 그 나라의 학생들 속에 끼여 공부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했던가. 수업 도중 조선 식민지인들의 혹독한 피해 사례를 만날 때마다 그는 여간 곤혹스럽지 않았다. 처음 아는 사례들은 물론이고, 이미 알고 있는 것들도 수업 도중에 언급되면 정신이 혼란스러웠다. 마땅히 분노와 증오를 느껴야 할 계제에 곤혹스러운 자기모멸감에 빠졌던 것이다.

특히 충격이 컸던 것은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의 조선인 학살사건에 대한 한 일본학생의 논문발표를 들었을 때였다. 허무성이 대학 2년생으로서 역사과 선배들과 처음 참가한 시위가 전두환의 방일반대 시위였고, 그 학살사건의 비참한 진상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은 바로 그 시위를 통해서였다. 국가원수가 방일하여 일본왕을 만나는 일은 양국 교류사상 전례없는 굴욕외교라고 재야·학생운동권의 강한 비판을 받았다. 총칼로 정권을 탈취한 자가 권력의 정통성을 인정받아볼 요량으로, 일본 천황을 알현하러 간다는 비판이었다. 그런데 그 일정이 하필이면 관동대지진 당시 6천여 조선인들이 학살당했던 그 시기에 맞추어져 있어 더 문제였다. 택일문제가 쟁점화되지 않은 걸로 보아 시위 주최측도 모르고 있음이 분명했다. 함께 시위에 참가한 과선배들로부터 그러한 사실을 들었을 때, 허무성은 너무도 어이가 없었다. 엄청난 대량학살임에도 불구하고, 지난 반세기 동안 단 한번도 저쪽에서 사과한 적이 없고, 또 이쪽에서도 사과를 요구해본 적이 없는데, 하필이면 그 시기에 일본왕을 만나다니! 전두환이야 워낙 무식한 군바리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그 주위에 빌붙어 있는 민간 엘리뜨들은 뭔가. 그러나 역사에 까막눈이기는 시위 주최측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적은 제 손금 들여다보듯이 우리의 역사, 우리의 사정을 빤히 알고 있는데, 우리는 적의 것은 물론 우리 자신의 것까지도 별로 아는 게 없으니 백전백패일 수밖에. 격분한 선배들은 이렇게 성토하면서, 방일하는 전두환 일행을 환송하고 돌아오는 초등학교 아이들 수십명을 좋은 말로 설득하여 손에 들린 일장기들을 수거, 소각했다. 그날의 충격적인 경험은 대학 햇내기인 허무성으로 하여금 운동권으로 뛰어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그 대학살 사건은 허무성에게 각별한 의미가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 사건은 일본땅에서 전혀 다른 충격으로 그에게 부딪쳐왔다. 그 사건에 대해서 대강 윤곽만 알고 있던 그에게 그 학생이 발표한 논문은 너무도 놀라운 것이었다. 풍부한 자료를 토대로 사건의 자초지종을 매우 치밀하게 진술하고 있는 그 논문에는 6천여 조선인들을 해친 대학살의 참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대지진의 위기를 수습하기 위해서 일본정부는 흉흉해진 민심을 몰아다가 재일조선인들을 증오의 표적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불령선인들이 폭동을 일으키고, 우물에 독약을 풀어넣고, 살인 방화한다”는 날조된 유언비어에 눈이 먼 일본인들이 도처에서 죽창으로 찌르고 몽둥이로 박살내면서 닥치는 대로 조선인들을 공격했는데, 지나가는 행인의 손등에 몰래 담뱃불을 갖다대 그 사람의 입에서 ‘아이따’ 대신에 ‘아야’ 소리가 나오면 조선인으로 판단해서 죽였다고 했다.

그 논문발표를 들으면서 그는 정신이 혼란스러웠다. 얼굴이 홧홧 달아오르고 눈에 눈물이 솟았다. 그것은 창피함, 굴욕적인 자기연민일 뿐 분노는 아니었다. 주위 일본인들의 시선이 자기에게 집중되고 있음을 의식하면서 그는 고개를 푹 숙였다. 너무 괴로워 강의실 밖으로 나가버리고 싶었지만, 그럴 용기마저 생기지 않았다. 무력감이 그의 발목을 붙잡고 놓지 않았다. 일본땅에서 일본인들 속에 포위되어 앉아 있는 느낌, 적지에 손들고 들어간 투항자처럼 무력감을 느껴야 했다. 더이상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고문으로 황폐해진 그의 가슴에는 더이상 증오와 분노의 혈기가 남아 있지 않았다. 강한일이가 그 모든 것을 빼앗아가버렸다. 세월이 흘러도 강한일이 남긴 고문의 정신적 후유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고문의 기억은 문득문득 죽음의 기습처럼 찾아들어 그를 두려움에 헐떡거리게 하곤 했다. 잠자리에서도 그것은 악몽으로 불쑥불쑥 나타나곤 했다. 강한일이가 계속 원격조종으로 고문하고 있었다. 두려움을 억누르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았다. 자신의 내부에 제어할 수 없는 다른 자아가 생긴 것 같았다. 고문자에 의해 만들어지고 조종되어지는 새로운 자아 말이다. 그는 그 두려움을 잊기 위해서 자주 술을 마셨다. 그렇게 마신 술은 자연히 그 지하실의 씨바스 리갈 맛과 연결되곤 했다. 강한일이 이렇게 말했다. 고문을 독하게 당한 직후, 고문자로부터 얻어마시는 술맛보다 더한 쾌락은 없지. 이 술맛의 기억은 낙인 같은 것이어서 평생 간다구.

허무성은 일본 체재기간 내내 재일동포사회를 염탐해 대사관에 정보를 물어 나르는 일을 하면서 학교를 다녔는데, 3년 후 석사과정만 마치고 귀국했을 때는 군사정권이 종식되고 민간정권이 들어서 있었다. 강한일이 믿어 마지않던 완고한 파시즘 체제가 마침내 허물어진 것이었다. 그래도 그의 신념은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민간정권 밑에서 강한일은 오히려 더 출세하여 고문자에서 여당 소속 국회의원으로 탈바꿈해 있었다. 그는 허무성을 귀국 후 처음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파시즘의 체제가 붕괴된 것 같아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아. 우리가 이렇게 건재해 있는데 무슨 소리야. 체제의 핵심은 정보와 수사권을 한손에 틀어쥐고 있는 우리가 아닌가. 정권이 군사에서 민간으로 바뀌어도 우리는 여전히 건재하게 돼 있어. 무대의 전면에 있다가 잠시 뒤로 물러나 있을 뿐, 퇴장은 전혀 아니올시다지. 감옥 간 전두환, 노태우는 도마뱀이 위기의 순간에 스스로 잘라버린 꼬리 같은 거야. 날 봐. 나는 이 민간정권에서 오히려 더 출세했잖아. 그렇지만 난 국회의원에 앞서 정보맨이야. 말하자면 국회에 파견된 프락치인 셈이지. 지금은 체제가 많이 허물어져 있지만, 우리가 건재해 있는 한, 다시 부활할 거야. 우리는 결코 죽지 않아. 일제 때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했던 사람들이 해방 후에 어떻게 됐나? 벌받았나? 천만에! 벌받기는커녕 도리어 자유당 정권에 재등용되어 소위 민주투사라는 것들을 잡아다 족쳤지. 그들이 바로 우리 선배야. 역대 집권자들은 언제나 자신의 안보를 위해 우리를 필요로 했지. 우리야말로 유한한 정권을 넘어서는 불멸의 존재라구.”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