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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평 │ 소설

 

사라진 ‘아비’와 글쓰기의 기원

 

백지연 白智延

문학평론가. 저서로 평론집 『미로 속을 질주하는 문학』이 있음. llauper@hananet.net

 

 

1. 가족로망스와 자기발견의 여정

 

근대 이후의 소설사에서 가족로망스(family romance)는 소설의 주인공들이 자기의식을 정립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유효한 틀이 되어왔다. 한 개인이 최초로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경험을 하게 되는 장이 바로 가족이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가족로망스야말로 인간의 삶을 다루는 소설장르의 특성을 가장 잘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프로이트(Freud)의 정의에 따르면 가족로망스는 자신이 부정하고 폄훼하는 친부모 대신 더 높은 지위를 지닌 다른 사람들로 부모를 대체하려는 신경증 환자들의 환상이다. 소설의 주인공들이 부모와 집으로부터 뛰쳐나가려는 욕망의 기원을 설명했다는 점에서 프로이트의 이론은 중요한 참조틀을 제공한다.

프로이트가 부모에게 강박된 자녀의 심리를 중심으로 가족로망스를 해석한다면, 린 헌트(Lynn Hunt)는 모든 가족로망스의 구도가 반드시 부모를 대체하거나, 부모의 자리를 메우려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린 헌트 『프랑스혁명의 가족로망스』, 조한욱 옮김, 새물결 1999, 52~53면 참조). 소설의 주인공들은 자신이 고아라고 여기며, 낯선 곳에 홀로 내팽개쳐져서 자기 힘으로 살아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이 ‘아버지의 보호 없이 살아가는 어린이들’을 내세우는, 지극히 반가부장적인 장르의 특성을 갖고 있다는 헌트의 지적은 공감할 만하다.

최근 소설의 흐름을 살펴보더라도, 가족을 다룬 많은 이야기들은 부모에 대한 뚜렷한 강박관념이나 열등의식을 보여주지 않는다. 아버지의 존재를 규명하려는 강박의식으로 시작되는 스토리더라도, 아버지를 극복하거나 복원하는 길로 향하지 않는다. 주인공은 처음부터 아버지의 부재를 당연시한다. 결국 그의 공허와 결핍을 채우는 것은 그 자신에 대한 연민과 애증이다. 탄생의 기원을 찾아가는 여정에서 아버지 대신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이 불안하고도 가슴 설레는 기록들은 이번 계절의 소설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특징이다.

그 첫번째 이야기로 구효서의 「소금가마니」(『창작과비평』 2005년 봄호)를 주목해보자. 이 작품은 출생의 비밀을 지닌 주인공이 어머니의 삶을 복원하는 과정을 통해 자아를 발견하는 결말을 드러낸다. 아버지 부재의 현실과 고아의식을 발랄한 화법으로 포착한 김애란의 「사랑의 인사」(『문학사상』 2005년 3월호)가 주목되는 것은 구효서의 소설과 다른 세대적 층위에서 자기애의 서사가 성립되는 지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다. 이들이 자아찾기의 일환으로 가족로망스에 접근한다면, 심윤경의 「토토로의 집」(『문학동네』 2005년 봄호)과 이기호의 「누구나 손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가정식 야채볶음흙」(『문예중앙』 2005년 봄호)은 가족로망스의 구조를 이야기의 기원으로 새롭게 활용하는 소설의 사례로서 관심을 끈다. 마지막으로 살펴보게 될 박완서의 「거저나 마찬가지」(『문학과사회』 2005년 봄호)와 박민규의 「코리언 스탠더즈」(『문학수첩』 2005년 봄호)는 구체적인 자본주의 일상에서 집과 가족의 의미가 해석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두 작품이 세태풍자의 기억으로 호출하는 80년대의 이야기도 비교해서 살펴볼 만한 흥미로운 지점을 제시한다.

 

 

2. 사라진 ‘아비’와 글쓰기의 기원

 

「소금가마니」는 근래 농밀한 서정성에 도달한 구효서(具孝書) 소설의 한 지점을 일러주는 수작이다. 동시대의 소설이 감당해야 할 사회적 주제의식과 실험적 형식문제에 늘 민감한 반응을 보였던 구효서의 전작들을 떠올려보면, 이러한 내향적이고 서정적인 탐구방식은 희귀하게 다가온다. 「소금가마니」는 「이발소 거울」(『한국문학』 2004년 여름호), 「시계가 걸렸던 자리」(『현대문학』 2004년 4월호)와 주제가 연결되는 기억의 연작이라 할 만하다. 그중에서도 「시계가 걸렸던 자리」는 어머니의 죽음과 고향 이야기를 소재로 밀도높은 자기성찰을 이끌어낸다는 점에서 「소금가마니」와 유사한 점이 많다.

「소금가마니」에서 기록적 복원의 대상이 되는 어머니의 삶은 가부장제 사회 속의 전형적인 여성수난사를 보여준다고 할 만하다. 여기서 어머니를 둘러싼 남성들의 형상이 부정적인 것은 당연한 설정으로 보인다. 어머니의 첫사랑으로 알려진 박성현은 6·25전쟁 때 처형당할 뻔한 어머니를 구출하긴 했으나 그녀의 고통스러운 삶을 근본적으로 구원하지 못했으며, 아버지는 어머니의 첫사랑을 빌미로 평생 그녀를 구타하고 괴롭혔다. 부정적인 두 남성의 모습과 견준다면 어머니는 상대적으로 성스럽고 인내심 많은 존경의 대상으로 신비화된다. 그녀는 온갖 수난을 스스로 견디고, 자식에 대한 헌신적 사랑으로 ‘집’을 지켜나간다. “어둠과 습기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자식을 사랑으로 지켜”낸 어머니는, “간수를 빼낸 새하얀 소금처럼 정화되어 꽃상여 안에 누워” 아흔일곱해의 생을 마감한다.

어머니의 삶에 대한 이야기로만 한정해서 읽을 때 이 소설이 보여주는 인물 일대기는 다분히 신비화된 모성성을 보여준다. 어머니는 평생 아버지에게 학대당하면서도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고, 자식들에게는 헌신적인 열정을 바쳤다. 그러나 정작 어머니가 왜 그토록 글을 읽고 쓰는 것에 집착했는지, 자신의 첫사랑을 어떤 방식으로 가슴속에 갈무리했는지, 그리고 생부의 존재에 대해 왜 화자에게 말해주지 않았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녀의 삶은 인내와 침묵 속에서 철저히 장막에 가려져 있다. 어떻게 보면 어머니-여성은 남성 자아가 아버지 부재의 현실을 견디기 위한 통로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 소설에서 어머니의 삶으로 재현되는 역사적 기억들이 구체적으로 다가오기보다는 신비스럽고 아득한 에피소드로 여겨지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인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실제로 이 소설에서 설득력있는 것은 어머니의 삶보다는 그것을 들여다보는 주인공의 내면에 소용돌이치는 자기발견의 욕구라고 할 수 있다. 작품의 미학적 긴장을 부여하는 대목 역시 주인공이 어머니의 책과 자신의 책을 비교하며 읽어가는 과정에 있다. 어떻게 보면 「소금가마니」를 이끌어가는 핵심은 ‘풍문으로 태어난 아이’인 화자의 탄생 비밀이 끝내 풀리지 않은 채 미궁으로 빠져드는 과정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소설 속에서 박성현과 아버지의 허망한 죽음 역시 이 ‘비밀’이 무의미해지는 과정을 드러내주는 상징적인 예로 읽힌다. 노루사냥에 나섰다가 덫에 걸려 심장이 뚫린 박성현과, 호화로운 세보(世譜)를 욕심내다가 어이없이 죽음을 맞게 된 아버지의 이야기는 새로운 집의 서사가 아비의 부재를 통해 이루어짐을 알리는 사건이다.

비밀의 해답을 찾는 과정이 유보될수록 모성의 신비적인 형상화라는 표층적 이야기 역시 조금씩 분열된다. 아버지가 사라진 빈집과 어머니가 외종형에게 남긴 “무엇이든 읽고 써야 한다”라는 다짐이나, “일흔세명의 원혼의 무덤, 그 복숭아밭 터에 위령비를 쓰는 일”을 부탁하는 외종형의 말은 아버지의 존재가 사라진 그곳에서 바로 자기확인과 글쓰기의 욕망이 시작되고 있음을 알려준다.

어머니의 삶을 통과한 자기성찰의 서사는 집―소금가마니―글쓰기라는 일련의 연결과정을 통해 밀도높은 서정적 비유를 성취한다. 자기 존재의 기억을 끊임없이 건져내려는 주인공의 정신적 고투는 어머니의 삶에 대한 평범한 묘사로 가라앉을 수 있는 이야기에 내밀한 정서적 긴장을 부여한다. 어머니가 두부를 만들며 삶의 불안과 공포를 견뎠던 소금가마니는 주인공이 스스로를 확인하려는 글쓰기의 욕망을 담은 공간으로 전환된다. 이 지점에서 「소금가마니」는 아버지의 질서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려는 전형적인 가부장적 가족로망스와 행보를 달리하게 된다.

구효서의 「소금가마니」가 어머니의 공간을 가로질러 아버지–집이 부재하는 현실을 수락하는 과정을 보여준다면, 김애란(金愛爛)의 「사랑의 인사」는 부재하는 아버지에 대한 집착과 연민을 발랄한 감수성에 담아 표현한다. 이 작품은 작가의 전작 「달려라, 아비」(『한국문학』 2004년 겨울호)의 연장선상에 있다. 아버지가 어머니와 자식을 버리고 간 상황을 유머러스하게 포착한 「달려라, 아비」는 「사랑의 인사」와 더불어 작가가 종종 변주하는 ‘고아의식’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들여다보게 한다. 김애란의 소설은 동세대 작가인 윤성희나 강영숙의 소설에서 볼 수 있는 소외된 개인의 고립감을 포착하면서도 그 속에서 타자와의 친밀한 애착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순간을 종종 보여준다. 특히 부모와 자식 관계에서 재현되는 이러한 애착의 양상들은 김애란 소설의 독특한 일면이다.

「달려라, 아비」에서 아버지가 부인과 자식을 버리고 신나게 달려서 사라져버린 것처럼 「사랑의 인사」에서 아버지는 공원에 어린아이를 놓아두고 사라져버린다. 수족관 관리요원이 되어 하루하루 고단하고 권태로운 삶을 살아가는 주인공에게 아버지는 마치 “나타났다 사라진, 혹은 사라졌다 나타나는 괴물”인 ‘네시’ 같은 존재로 다가온다. 『세계의 불가사의』를 옆구리에 끼워주고 사라진 아버지를 이해하기 위해 주인공은 긍정적인 고아의식을 연출한다. ‘아버지가 나를 버린 것’이 아니라 그냥 ‘아버지가 사라져버린 것’이라는 자기위안은 주인공이 현실을 견디게 하는 힘이 된다. 단절과 고립의 상황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긍정적인 부모에 대한 환상을 갈망하는 유아적인 고착심리를 연상케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러나 주인공의 간절한 환상에도 불구하고 어느날 아버지는 예고없이 수족관 앞에 나타나 다시 한번 주인공을 배반하고 만다. 아들은 자신과 아버지가 운명적으로 서로 알아볼 것이라 믿었지만 ‘아비’의 자의식을 갖추지 않은 아버지는 자식을 알아보지 못하고 다시 사라진다. “사랑의 인사를 하러 온” 것처럼 보였던 아버지가 가벼운 손짓을 남기고 대책없이 사라지는 장면은 ‘아비’의 환영이 깨질 수밖에 없는 단절의 상황을 서글프고도 우스꽝스러운 방식으로 환기시킨다. 그의 머릿속에서 존재하던 아버지는 처음부터 허상에 불과한 것이다.

김애란의 소설은 아버지에 대한 격렬한 대결의식을 더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 새로운 세대의 감수성을 포착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으로 읽힌다. 사라진 아버지는 처음부터 복원할 필요도 없는, 가상의 이미지였다. 운명이며 인연으로 믿었던 아버지의 존재가 허상에 불과함을 자각하는 장면은 이미 예상된 파국인지도 모른다. 작가는 고아의식 자체를 경쾌하게 수락하면서도 부재를 일상화하는 그 지점에서 애착과 머뭇거림을 보여준다. 소설의 결말이 모호하게 여겨지는 것도 사라진 ‘아비’에 대한 주인공의 감정을 드러내는 장면 때문이다. 아버지가 떠나고 수족관에서 울던 주인공은 어느 순간 권태의 현실로 돌아올 수밖에 없음을 자각하지만 그 발견이 아버지에 대한 환상과 애착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이 부재의식이 언제든지 평범한 향수와 동경으로 대체될 수 있는 아슬아슬한 지점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3. 허물어지는 ‘집’의 세계

 

심윤경의 「토토로의 집」과 이기호의 「누구나 손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가정식 야채볶음흙」(이하 「누구나…」)은 활달한 입담과 이야기의 매혹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작품들이다. 특히 심윤경은 전통적인 소설장르의 미덕을 신뢰하는 이야기꾼의 감각을 보여주는 작가인데, 전작 『나의 아름다운 정원』(한겨레신문사 2002)과 『달의 제단』(문이당 2004)에서도 집과 가족은 인간사의 가장 직접적이고 내밀한 드라마가 전개되는 장으로 포착된다. 「토토로의 집」과 더불어 올해 발표된 「루이지애나」(『문학사상』 2005년 2월호)와 「죽은 말들의 사회」(『실천문학』 2005년 봄호) 역시 심윤경 소설의 탄탄한 스토리가 갖는 흡인력을 실감케 하면서, 한편으로는 기존 서사의 한계를 작가가 새롭게 돌파하는 지점이 무엇인가라는 궁금증을 낳는 작품이다. 예컨대 선명한 알레고리 형식을 지닌 「죽은 말들의 사회」의 경우, 상품으로 소진되는 문학과 언어에 대한 강력한 고발이 돋보이지만, 문학의 상품화가 이미 뚜렷하게 가시화된 상황에서 이러한 주제의식 자체를 새롭게 평가하기는 어렵다. 마찬가지로 「루이지애나」의 경우 흑인노인이 고백하는 노예의 역사는 옛시대에 대한 눈물나는 향수와 기묘하게 겹쳐져서 작품이 지닌 문제의식을 불투명하게 만든다.

집과 가족의 역사 속에서 전통의 몰락을 지켜보는 작가의 시선에는 애틋한 연민이 어려 있다. 이러한 시선은 때때로 인물의 내적 고민을 모호하게 만들면서 집과 가족이 은폐하고 있는 환상이나 허위의식을 묵인하게 한다. 그것은 섬세한 심리묘사가 돋보이는 「토토로의 집」에서도 약점으로 떠오르는 문제이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외삼촌 밑에서 자란 주인공은 부유한 집안의 남자와 결혼하여 행복한 생활을 꿈꾸지만, 시부의 주식투자 실패로 경제적 위기를 맞게 된다. 소설의 흡인력은 “착한 남편, 든든한 시아버지, 주체할 수 없이 많은 재산, 예쁜 아기”에 대한 만족감이 순식간에 사라지면서 집안의 가장으로 나서야 하는 여성의 내적 고민을 섬세하게 짚어가는 데서 생겨난다. ‘온실 속에서 자란 고운 꽃나무’와도 같은 남편이 대학교수로 어서 자리잡기를 열망하는 주인공의 갈등은, “우리는 서로 떠안은 커다란 자격지심과 열등감을 가면처럼 덮어쓰고 함께 만나 같이 살게 될 날을 차일피일 미루어왔다”라는 고백으로 드러난다. 주인공의 절박한 육성은 경제적 안정과 사회적 지위, 단란한 가정이 다 갖추어진 표준적인 ‘행복한 가정’에 대한 일상인의 욕망이 얼마나 깊고 집요한 것인가를 숨김없이 드러낸다.

세속적 성공에 대한 간절한 기원은 한편으로 그것을 부끄러워하는 자의식을 불러오기도 하는데, 「이웃의 토토로」라는 애니메이션은 주인공의 자의식을 비추는 매개체가 된다. 숲의 정령에게까지 남편이 교수가 되게 해달라고 빌기는 부끄럽다는 그 자의식은 이 소설이 호소하는 가냘픈 윤리적 자존의 세계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부끄러움은 어떤 지점에서 더는 나아가지 않는다. 세속적 삶과 가치에 대한 열망은 소설 초반에 덧씌워졌던 불행한 운명에 대한 강박관념으로 합리화되며, 남편의 무능력함과 자신의 은밀한 성공 욕구를 날카로운 시선으로 들여다보지 못하게 한다. 물 흐르듯이 활달하게 펼쳐지던 이야기가 머뭇거림으로 끝나는 것은 이러한 현실적인 갈등에 대한 주인공의 유보적인 시선 때문일 것이다. 과연 주인공이 꿈꾸듯이 완벽하고 아름다운 ‘스위트홈’이 지구상 어디에 존재하기는 하는 것일까. 부부간에 야기되는 근원적인 갈등을 봉합하는 허위의식에 대해서 작가는 미미한 암시만을 남길 따름이다.

심윤경 소설이 보여주는 이야기의 복원이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가족과 집에 대한 애착을 담고 있다면, 이기호의 소설은 이와 정반대의 지점에서 가볍고 산뜻한 이야기로 가족서사를 변화시킨다. 직업군인인 아버지가 지하벙커를 마련해놓고 ‘적’의 침략에 대비해서 아들과 함께 지하대피훈련을 하는 이야기로 시작되는 「누구나…」는 허물어지는 집의 세계를 발랄한 화법으로 포착한다. 주인공이 왜 흙요리에 심취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되는 이 소설은 어떤 인과성이나 필연성도 의도하지 않은 채 꼬리에 꼬리를 무는 서술방식으로 진행된다. 새로운 집으로 이사간 주인공은 눈먼 소녀 명희를 데리고 지하벙커로 들어가 8킬로미터의 흙을 함께 먹어치우고 ‘땅굴 발굴조사단’에 의해 비무장지대 초입에서 발견된다. 소녀를 납치해 흙을 먹였다는 이유로 구속되었다가 급기야는 정신병원에 감금되는 주인공의 황당한 모험활극은 어떤 주제나 교훈도 제시하지 않는다.

작가는 순간순간 등장하는 에피소드에 현재의 삶을 통찰하는 풍자들을 실어나르지만 그것 자체가 응집되는 주제를 의도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에피소드들이 고정된 의미체계를 분산시키는 전략을 취하는 것도 아니다. 그 예로 「누구나…」에서 인민군이 남한을 침략할지 모른다는 아버지의 강박증이라든지 명희가 대리하는 소외된 아이들의 형상, 벙커 소동을 통해 희화화되는 분단상황은 현대인들을 괴롭히는 여러 종류의 ‘강박증’에 대한 가벼운 패러디에 한정된다. 소설 속의 사랑 방식을 현실로 재현하려다가 비웃음을 사는 우스꽝스러운 강박증 환자의 모습을 그린 「나쁜 소설」(『실천문학』 2005년 봄호) 역시 단편적으로 문학의 권위를 조롱할 따름이다.

이기호의 소설에서 우리는 한껏 텅 비워진 이야기들의 심연을 본다. 그러나 다양한 이야기의 형식들을 동원하는 이 신예작가의 경쾌한 소설적 행보는, 그것이 전복하려는 소설적 전범이 무엇인지 아직은 선명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그 생생한 입담의 성찬은 90년대 이후의 소설들에 등장한 능란한 이야기꾼의 출현에 힘입고 있지만 선배작가들이 반발하고 나선 문학적 권위나 진지한 담론의 강박에는 무심하고 초연하다. 신파와 감상조차도 부담스러워하는 이 매끈한 이야기의 성채는 가벼워질 대로 가벼워진 소설의 한 자락을 보여주는 듯하다.

 

 

4. 세속적 일상을 가로지르는 ‘집’과 ‘우주’

 

자본주의 일상공간으로서의 ‘집’은 각종 정치적·사회적 방식으로 구성원을 길들이고 훈육하는 동시에 이기적이고 물질적인 욕망을 구성하는 생활의 장이다. 박완서(朴婉緖) 소설에 등장하는 ‘집’ 역시 이러한 사회적 의미를 담아내고 있다. 「거저나 마찬가지」에서 ‘집’의 상징은 80년대를 통과한 386세대의 내면적 기억과 결부되어 드러난다. 그것은 이념적 명분을 내세워 속물적 부르주아지의 삶을 합리화하는 지식인계층과, 자신의 힘으로 가족을 이루려 하지 않는 무기력한 민중계층을 함께 비판하는 배경으로 동원된다.

소설에 등장하는 ‘운동권’ 출신 선배언니는 노동자계층을 끊임없이 경멸하면서도 ‘민중사랑’의 구호를 입에 달고 다니는 전형적인 속물지식인이다. 그녀는 각종 쓸거리를 타인에게 대필시키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르고 후배인 ‘나’를 수시로 이용하여 자기 이익을 챙기기 바쁜 인물이다. 이런 천박한 지식인이 성공적인 삶을 사는 것은 ‘바야흐로 운동권이 빛을 보기 시작’한 시대 덕분이라고 주인공은 일갈한다.

시종일관 경멸과 비웃음의 대상이 되는 ‘386세대 지식인의 타락상’은 작가가 마음먹고 감행하는 따가운 세태비판을 전달한다. 그러나 소설 곳곳에서 희화화되는 속물지식인의 민망한 행동들은 어느 순간 묵직하고 답답한 감상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그들에게 따가운 시선을 보내는 우리 자신 또한 희화화의 대상에서 얼마나 자유로운가라는 의문을 갖게 하는 불편함이다. 특히 “언니가 그 사람을 그렇게 얕보면 어떡해? 그 사람이야말로 민중이야. 언니가 사랑하자고 외쳐 마지않던 민중”이라는 화자의 빈정거림은 풍자 대상에 대한 작가의 시선이 선악의 가치판단 문제로 일면화되는 느낌마저 갖게 한다. 더구나 타락한 이들이 독점한 것처럼 비춰지는 세속의 성공과 부, 안정된 여가의 삶은 현대사회의 구성원들이 공통적으로 갈망하는 매력적인 자본의 가치라는 점에서 쉽게 경멸할 만한 것은 아니다.

지식인계층의 가식과 위선을 조롱하는 풍자의 기운이 절정에 달할 지점에서야 작가는 ‘관찰자로서의 자의식’ 문제를 끄집어낸다. 그 자의식은 글 쓰는 일을 도와준다는 명목으로 선배언니의 별장에 전세 보증금 500만원을 걸고 ‘거저나 마찬가지로’ 사는 사람이 되어버린 주인공이 느끼는 참담함에서 드러난다. 소설의 후반부는 적당히 ‘먹물’세례를 받은 대학중퇴자지만 뚜렷한 직장을 갖지 못한 주인공이 프리랜서라는 허명에 매혹되어 정당한 노동댓가를 착취당한 채 살고 있는 현실이 얼마나 기만적인가를 파헤친다.

엄연하게 댓가를 지불하고 자기 몫을 얻어내야 하는 자본주의사회의 경제법칙을 위반하고 ‘가짜 집’에 대한 약속을 주고받았던 주인공은 윤리적 자존심을 새삼스럽게 의식한다. 주인공이 ‘가짜 집’을 빠져나와 때죽나무 그늘에서 연인인 기남과 섹스를 치르는 장면은 그러한 자존심이 발동하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주인공이 기남을 채근하여 ‘거저로 사는 삶’을 청산하고 ‘진짜 집’과 ‘가족’을 꾸리자고 제안하는 것은 자기기만을 벗고 냉정하게 현실을 직시하자는 호소를 담고 있다. 자본주의적 일상에 대한 비판적 시선이 자존심의 자각으로 환원되는 이 과정은 박완서 소설 특유의 개인주의적인 윤리감각을 표출하면서 세태풍자의 수위를 조절해준다.

박완서의 소설이 바라보는 집과 가족의 세계가 자본주의적 일상의 비정함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박민규(朴玟奎)의 소설에서 집과 가족은 모든 사람의 생활양식을 획일화하는 자본의 위력을 드러내는 공간이다. 「코리언 스탠더즈」는 우리를 숨막히게 죄어오는 ‘한국인들의 표준적’ 일상이 무엇인지를 유머러스하게 포착한다.

소설에서 대학시절 학생운동의 ‘스타플레이어’로 활약했던 ‘기하형’은 주인공이 한때 존경했던 ‘80년대의 아비’와도 같은 존재다. 그는 “동지가 간 데를 알아도, 깃발은 나부끼지 않”는 2000년대의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신만의 신념을 고집한다. 80년대를 통과해온 다른 선배들이 정치권에 투신하여 유명인사가 되거나 이상한 ‘~꾸아’체를 연발하는 스타강사가 되어 돈을 많이 벌어들일 때, 몰락한 ‘아비’는 홀로 농촌운동에 투신한다. “한국의 표준이라 봐도 무방한 34평의 아파트”에 살고 있는 주인공은 버려진 ‘아비’를 비장한 마음으로 바라본다.

박민규 소설에 등장하는 ‘아버지’ 혹은 ‘선배’ 들은 이처럼 폐쇄적인 일상회로에 갇혀 소외된 자들의 전형이다. 「아, 하세요 펠리컨」(『문학과사회』 2005년 봄호)에서 오리배를 타고 세계일주를 떠나는 선착장 주인이라든지, 「헤드락」(『실천문학』 2005년 봄호)에서 레슬링 기술 연마에 삶의 에너지를 집중시키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우리는 일상적 질서를 일탈하기 위해 나름대로 안간힘을 쓰는 소시민들을 발견한다. 그의 소설 주인공들이 순간적으로 만나는 환상인 ‘우주’의 세계는 권태롭고 지루하고, 때로는 견디기 힘든 삶의 압박이 가해지는 ‘집’의 세계를 일시적으로 벗어나게 한다. 그러나 순간적인 우주적 초월의 방식은 거창한 메씨지를 약속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일시적으로 위무하는 대중예술의 소비적 성격을 강하게 드러낸다. 이러한 박민규 소설이 지닌 대중적 흡인력의 정체는 김영찬(金永贊)에 의해 편집증적 내러티브의 개념으로 설명된다. 즉, ‘강요된 자본주의적 삶의 제도가 기만의 전략이자 음모라는 인식론적 내러티브’는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일상의 가치체계와 이데올로기를 비웃으며 뒤집는 반전의 묘미와 기발한 풍자를 유발하지만, 본질적으로는 무력한 개인의 인식론적 상상지도라는 점에서 깊은 성찰적 사유를 제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김영찬 「개복치 우주(소설)론과 일인용 너구리 소설 사용법」, 『문학동네』 2005년 봄호 257~58면 참조). 그러나 박민규의 소설에서 이러한 교훈적 메씨지나 인식론적 내러티브는 소설의 뚜렷한 특징이나 한계로 작용한다기보다는 그의 소설이 보여주는 언어유희 속에서 순간적인 호소력을 발휘한 후 자동 폭파되어버리는 자기소비적 성격이 강하다. 오히려 그의 소설이 벌이는 언어유희는 의미의 응집성이나 서사적 긴장을 끊임없이 분쇄함으로써 이런 반전의 내러티브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코리언 스탠더즈」에서 보여주는 우주적인 상상력도 그런 점에서 찰나의 감동을 주는 순간적인 세계를 그려 보인다. 기하를 안쓰러워하며 착잡한 마음으로 시간을 보낸 주인공은 자신의 눈으로 “어스름한 언덕의 어둠을 배경으로 강렬한 형광색의 발광체가 떠 있”는 모습을 목격한다. 쌀개방조약이 기습적으로 발표되고, 소중히 키우던 젖소가 죽어나가며 하루하루 새로운 빚더미에 올라앉는 농촌의 비참한 삶은 기하가 주장한 대로 외계인의 음모와 습격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이다. 황량한 농토에서 갑자기 우주로 비약하는 이 소설의 절정은 박민규 소설이 지향하는 ‘따뜻한 위무’의 본질이 무엇인지 실감하게 만든다. 외계인에게 습격당한 것은 80년대의 투사이자 존경스러운 ‘아비’였던 기하뿐만이 아니다. 외계인은 ‘농촌’과 전혀 상관없이 평화롭게 살고 있던 주인공까지도 순식간에 포박해오는 자본의 덫인 것이다. 그 누구도 이 자본주의의 획일화 프로그램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임을 실감하는 순간 ‘아비’를 향한 동정의 시선은 공감의 시선으로 바뀐다.

단순해 보이는 이 진리의 깨달음은 의뭉스러운 말놀이를 통해 입체성을 갖게 된다. 인과의 서사에 얽매이지 않으려는 자유로운 단락 배열과 단어의 고정된 의미를 뒤집는 자유연상식 서술(운동권, 농촌, 헤드락, 문학 등등 모든 단어의 사전적 의미가 자유로운 방식으로 패러디되고 확장된다)은 심각해지려는 사건의 국면을 순간순간 뒤집는다. 예컨대 감옥에 있던 때보다 지금이 훨씬 더 외롭다고 기하가 고백하는 그 짠한 순간에, “표면장력이 강한, 투사의 눈물”이 다시 눈 속으로 스며드는 장면을 목격하는 주인공의 유머러스한 시선은 박민규 소설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라 할 만하다.

자유롭게 뻗어나가는 말놀이의 세계는 시시때때로 ‘한 방울의 눈물’의 세계, 혹은 “저렴한 인생들 사이에 흐르는 심야전기”(「아, 하세요 펠리컨」)의 세계와 접속한다. 박민규 소설은 이 울컥거림의 순간에 모든 사람들을 동정하고 연민하면서, 실은 그 소외된 군중 속에 자신도 속해 있다는 메씨지를 전달한다. 비애와 신파를 매우 효과적으로 결합하는 이 감성적 세계의 지향은 온갖 장르의 대중문화적인 정보를 ‘새로운 소설’의 이름으로 호명하는 결정적 요소이기도 하다. 90년대 이후 우리 소설의 중요한 서술전략 중 하나였던 사물과 풍경의 세심한 관찰 및 감정적 소통을 차단하는 냉정한 인물에 대한 형상화 방식을 떠올려본다면, 박민규식의 친근한 소설화법은 미학적 긴장을 거침없이 해제한 후 대중적 연민의 정서를 부담없이 동원한다는 점에서 이채롭다. 읽는이를 위로하는 동정과 연민의 감정은 소설적 영토 안에 들어오는 모든 대상을 휘어감아 순간적인 카타르씨스를 제공한다. 소설의 경계를 대중문화 장르와 끊임없이 접속시키는 이 따뜻한 세계는 사라진 ‘아비’의 시대를 활보하는 새로운 글쓰기의 징후로 우리 앞에 현현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