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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한국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다

 

소설가의 책상, 에쎄이스트의 책상

배수아 장편소설 『에세이스트의 책상』 읽기

 

 

백낙청 白樂晴

문학평론가, 서울대 명예교수. 저서로 『흔들리는 분단체제』 『분단체제 변혁의 공부길』 『민족문학의 새 단계』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등이 있음. paiknc@snu.ac.kr

 

 

1

 

‘에세이스트의 책상’이라는 배수아(裵琇亞) 장편의 제목은 장르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저자도 「작가의 말」에서 주로 이 문제를 언급한다.

“나는 소설을 쓰기를 원했으나, 그것이 단지 소설의 형태로만 나타나기를 원하지는 않았다. 혹은 처음에는 그 기간 동안 내가 읽고 들은 몇 권의 책과 소소한 음악에 관해서 짧고 단조로운 에세이를 쓰고 싶었으나, 그러기 위해서 소설의 도움을 받기를 원했다”(배수아 장편소설 『에세이스트의 책상』, 문학동네 2003,197면)는 첫마디가 집필과정에 소설가로서의 욕구와 에쎄이스트로서의 욕구가 함께 작용했음을 알려준다. 그 결과물이 소설로 불리는 데 대해서는 짐짓 대범한 태도다.

 

이 글을 쓰면서 나는 가능하다면 다른 것을 쓰되, 사람들이 그것을 소설이라고 불러도 아무래도 상관없는 그런 형태를 원했다. 사람들이 이것을 소설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내가 일단은 소설가이기 때문이고 대개 소설을 썼기 때문이고 또한 이것의 공식적인 타이틀이 소설이라고 불려질 것이기 때문이다.(197~98면)

 

그러나 저자의 좀더 뼈있는 주장은 그 단락의 끝머리에 나온다.

 

어느 순간에 달콤한 멜로디에 의존한 크리스마스 선물용 바이올린 음악의 선율이 참을 수 없게 여겨질 수 있는 것처럼 어느 순간에는 글 속에 담긴 스토리 자체를, 혹은 그런 선명한 스토리에 의존해서 진행되는 글을 내게서 가능한 한 멀리 두고 그 사이를 뱀과 화염의 강물로 차단하고자 했다. 무엇이라고 불리는가 하는 것은 그 이후의 문제가 될 것이다.(198면)

 

자신의 글쓰기가 소설문학의 어떤 낯익은 모습에 대한 치열한 거부의 소산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을 무엇이라 부를지를 정하는 것이 본고의 목적은 아니다. 실제로 호칭의 문제에서는, 소설 또는 장편소설이라는 ‘공식적인 타이틀’을 갖고 서점의 소설 코너에 나와 있는 책들은 일단 소설이라고 불러주자는 것이 내 입장이다. 그것이 온갖 불필요한 관념적 논의를 피해가는 길이기도 하려니와, 실제로 그 수많은 책들의 형식을 두루 포용할 만큼 다양하며 변화무쌍한 것이 소설의 장르적 특성이라는 생각이기도 하다. 따라서 나는 배수아가 상정한 ‘사람들’과 더불어 ‘이것을 소설이라고 부르는’ 데 아무런 이의가 없다.

글머리에 장르 이야기를 꺼낸 것은 다른 이유에서다. 책의 제목이나 작품이 지닌 ‘에쎄이적 요소’ 또는 저자의 에쎄이스트적 욕구 표명에 이끌려서 『에세이스트의 책상』이 실제로 보여주는 소설적 성과를 과소평가할 우려가 없는지 따져보았으면 하는 것이다.

이 작품의 (‘비소설적 산문’이라는 뜻에서의)‘에쎄이적’ 면모로는 먼저 작가 자신이 말한 ‘선명한 스토리에 의존해서 진행되는 글’과의 거리를 떠올릴 수 있다. 동시에 작가가 애초에 쓰고 싶었다는 ‘짧고 단조로운 에세이’보다 훨씬 많은 분량의 독서감상과 음악평, 그밖의 숱한 관념적 담론이 도처에 발견되는 점을 들 수도 있다.1 게다가 작중의 1인칭 화자는 비록 고국에서 ‘작가’로 활동했다는 언급이 나오기는 하지만,M을 마지막 만날 무렵에 쓰고 있는 것이 음악에 관한 에쎄이이며,M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쓰기 시작한―아마도 이 책의 내용에 해당할―글 또한 그녀에게는 허구가 아니라 성찰과 회상의 기록, 즉 비소설적 산문인 것이다.

그러나 소설의 내용이 실존인물의 진실된 기록이라는 설정이야말로 낯익은 소설적 장치다. 실제로 사실에 충실한 기록일지라도 소설이라는 ‘공식적인 타이틀’을 일단 내건 책에서 그것이 사실의 기록이라는 주장이 나오면, 이 주장 자체를 허구(虛構=픽션)로 읽기로 독자와 작가 간에 암묵적인 계약이 성립하는 것이다. 이런 기록이 ‘선명한 스토리에 의존해서 진행되는 글’이 아니라는 점은, 그것이 스토리(=이야기) 자체의 전면적인 부재가 아닌 한, 현대소설에서 전혀 새로운 현상이 아니며, 실은 서구의 장편소설이 처음 자리잡아가던 18세기 영국에서 이미 『트리스트럼 섄디』(Laurence Sterne, Tristram Shandy, 1760~67)의 선례가 있다.

사변적인 담론의 존재 또한 전통적인 장편소설에서 오히려 흔한 현상이다. 현대소설로 올수록 저자의 논설적 개입을 차단하려는 경향이 강해지지만, 작중의 대화나 1인칭 화자의 서술은 경우가 다르다. 사변적인 언설 자체가 (1인칭 화자를 포함한) 해당 인물의 형상화 수단일 수 있으며, 이런 언설을 작품의 일부로 삼는 포용성이야말로 장편소설이 지닌 큰 매력이다. 다만 그런 대목들이 무언가 저자의 생경한 개입으로 느껴져서 독자의 공감을 사지 못할 때 그것을 나쁜 의미로, 즉 소설임을 표방하면서 제대로 소설이 되지 못했다는 의미로, ‘에쎄이적’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에세이스트의 책상』은 지식인의 사변적 언어를 작중인물의 실감나는 진술이자 이야기 진행의 유기적 요소로 포용했다는 점만으로도 한국소설에 흔치 않은 성취라 할 만하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이 작품의 소설적 성취가 과연 어떤 것이며, 혹 나쁜 의미의 에쎄이적 요소가 그래도 있다면 어떤 것인지를 진지하게 따져보는 일이다.

 

 

2

 

먼저 분명한 것은, 작품의 제목이나 제1장의 파격적인 출발이 줄 수도 있는 선입견에 사로잡히지 않고 책을 읽었을 때, 선명한 줄거리가 없다뿐이지 개별화된 인물과 극적인 사건이 작품의 길이에 비해 결코 적지 않은 소설이 『에세이스트의 책상』이라는 점이다.M에 대해서는 뒤에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주인공급인 ‘나’와 M이 모두 개성을 지닌 인물로 등장하며 요아힘, 아네스, 에리히, 수미 등 군소인물도 각기 생생한 인상을 남긴다.

제3장의 경우는 전통적 사실주의 소설의 한 장을 방불케 할 정도다.1,2장과 달리 3장에서는 사건진행의 앞뒤가 어느정도 정돈되기 시작한다. 화자가 3년 만에, 그것도 갑작스럽게 독일에 다시 왔다든가, 요아힘과는 중도에 만나 그의 집으로 왔고, 요아힘은 머잖아 슐레스비히 홀슈타인 지역으로 여행을 떠나는데 화자는 따라가지 않을 참이라든가, 때는 크리스마스 철이라 성탄절 전날 저녁에 요아힘의 어머니 집을 방문키로 되어 있다는 사실 들이 고전적 소설에서처럼 솜씨있게 소개된다. 또한 요아힘의 거처와 그곳에서의 일상, 추운 저녁 어머니 집을 찾아가는 두 사람의 모습과 주변의 풍경 등이 드문드문 끼어드는 회상과 함께 실감나게 묘사된다.

특히 그 집에 도착한 후 요아힘의 어머니 아네스, 그녀의 (몇달 단위로 바뀌는) 동거자 비욘, 요아힘의 쌍둥이 형제 페터 등과 카푸치노를 마시면서 주로 아네스와 화자만이 대화를 나누다가 모두가 아무런 대화 없이 오리고기 요리를 먹는 장면은 전혀 난해하지 않으면서 재미있는 명작소설의 한 장면 같다. 음악 이야기가 아네스와의 대화 도중에 나오기는 하지만, 화자 자신의 음악관에 대한 난해한 담론은 없다. 아네스가 소장한 음반을 보면서,“나는 하나하나의 CD 재킷을 모두 꼼꼼하게 읽었다. 흥미가 있었던 것은 물론 아니다. 나는 듣기 편하고 소프트한 음악을 몹시 싫어했으나 특별히 할 일이 없었고, 아네스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서였다”(39면)라고 언급하는 정도다. 화자와 M이 공유하는 전혀 다른 음악론은 우회적으로만 제시되고 아네스의 성격이나 그때의 분위기를 재현하는 데 주안점이 두어져 있는 것이다. 식사를 마친 뒤 요아힘과 둘이서 교회의 자정 예배를 구경갔다가 헌금통을 돌리기 직전에 빠져나와서 집으로 돌아오기까지의 마지막 대목 또한 잘 만든 단편의 마무리처럼 깔끔하다.

물론 제3장은 이 작품에서 매우 예외적인 부분이다.M에 대한 언급이 단 한차례도 안 나오는 유일한 장이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요아힘과 함께 지내는 날들의 기록은 제4장으로 이어지는데, 섣달 그믐날 요아힘 친구들의 파티로 시작해 며칠 뒤 요아힘이 슐레스비히 홀슈타인으로 떠나고 화자가 요아힘의 애견 베니를 돌보며 남게 되는 데서 끝난다. 여기서도 파티의 묘사 같은 것은 3장의 사실주의적 재현 솜씨를 그대로 보여준다. 하지만 M 이야기가 끼어들면서 시간상의 이동이 한결 어지러워지고 M 또는 화자의 생각이, 적어도 이 싯점에서는, 이해하기기 힘들어진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복선이 준비되기도 하는데, 예컨대 파티에서 어떤 남자가 물었고 돌아오는 길에 요아힘이 다시 묻는 ‘M은 어떻게 지내?’라는 질문은 바로 화자가 자주 꾸는 악몽 속의 질문이기도 함이 그 다음 장에 가서야 밝혀지며,누군가 아는 사람이 자연스럽게 묻고 자연스럽게 돌아서는 그 꿈이 왜 악몽이어야 하는지는 책을 거의 다 읽으면서야 조금씩 분명해지는 것이다.

표면상의 이야기는 5장으로 이어져 요아힘이 떠난 뒤 화자의 생활을 들려준다. 베니를 데리고 나가는 산책 외에는 거의 독서로 시간을 보내는 단조로운 일상이기 때문에 자연히 이때 읽은 책 이야기, 특히 『책 읽어주는 사람』과 『사람들이 모여 함께 살기』에 관한 화자의 반응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도 작가의 에쎄이스트적 통찰 못지않게 이야기꾼으로서의 솜씨가 돋보인다. 『책 읽어주는 사람』을 읽던 경험에 대한 긴 서술(80~88면)은 M과의 독일어 수업에 대한 기억과 착종되는데, 전차를 타고 가다가 종점의 빈 찻간에 홀로 남겨질 때까지 독서에 정신없이 몰입했던 것이 주로 책 내용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M에 대한 기억이 더 강력하게 작용했는지 분명치 않은 것도 인상적이다.

산책과 독서 외에 화자가 즐겨 하는 또 한가지는 음악을 듣는 일이다. 그리고 쇼스따꼬비치에 관한 이야기로 5장이 끝날 때, 독자는 한편으로 1장에서 다소 곤혹스럽게 마주쳤던 쇼스따꼬비치 음악과 죽음에 관한 발언을 회상하면서, 다른 한편 제11장 끝머리 가까이에 쇼스따꼬비치가 다시 언급되는 대목을 포함하여 음악과 죽음에 대해 거듭되는 명상에 한걸음 다가선다. 그런 뒤에 제6장에 이르면, 요아힘의 집에서의 시간이 잠깐만 언급될 뿐 M이 (에리히와 더불어) 등장하는 과거 이야기가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마치 ‘이야기의 한가운데로’(in medias res) 뛰어들 듯이 시작했던 소설의 제1장이 이 과거의 어느날이었음은 4~5장을 읽어가면서야 분명해진다. 그리고 “더 많은 죽음이거나 더 많은 알몸(나체의 개체수를 나타내는 것이 아닌), 더 많은 (단 한 명인) 최초의 인간, 더 많은 우주, 더 많은 음악의 영혼, 더 많은 유일한 것, 더 많은 더 멀리 그쪽으로, 더 많은 멘델스존, 더 많은 M, 그리고 더 많은 그 겨울”(8면) 같은 아리송한 구절이 아무렇게나 나열된 것이 아니고 악곡에서처럼 반복되면서 발전시켜나갈 주제들을 심어놓은 것임은 작품을 통독하면서야 온전히 드러난다.

주인공이 물에 빠지는 극적인 사건을 서술한 제2장이 도대체 언제 이야기며 어떻게 끝난 사건인지는 훨씬 나중에 밝혀진다.2장은 “최초로 물에 빠졌을 때는”(14면)이라고 시작해서 화자가 서서히 죽음에 다가가는 상태에서 끝나버리는데, 화자가 M과 작별하는 시간(9장 142면)에 가서야,M과의 결별을 작심하고 M의 집에서 나온 뒤에 그런 사건이 있었음이 알려지는 것이다.

당장에는, 물에 빠진 순간에 베니가 짖어대고 곧바로 3장에서 요아힘과 베니가 소개되기 때문에 독자는 일단 이 무렵의 사건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특히,“성탄절 전날 저녁에 나는 요아힘의 집을 방문하도록 되어 있었다”(20면)라는 3장의 서두는 얼핏 그런 싯점에 사고가 발생했다는 이야기로 들리기도 한다. 실제로 작가는 통상적인 스토리 진행에 익숙한 독자를 일부러 어리둥절하게 만들려 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요아힘 어머니 집을 방문하기 바로 전날 도착한 화자가 물에 빠질 사이가 없었음은 금방 밝혀지며, 이후 9장에서 다시 언급될 때까지는 사고에 관해 일언반구도 안 나온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 어떻게 물에 빠져서 어떻게 살아났는지에 대한 독자의 궁금증이 소설 내내 따라다니게 되며, 물속에서 화자가 했던 M에 대한 생각, 죽음에 대한 생각 들이 꾸준히 독자의 머릿속에 남게 되기도 한다.

이처럼 『에세이스트의 책상』은 줄거리가 없기는커녕 거의 교활하다 싶을 정도로 치밀한 운산과 정교한 복선을 깔고―“정교하면서도 자유롭고 즉흥적인 수학의 제국”(10면)을 예찬하는 작품답게―펼쳐지는 서사(敍事)이다. 제목이나 「작가의 말」 중 어떤 구절 또는 그 서사의 파격성만 갖고서 소설이 아니라거나 사건이 없는 이야기라고 속단할 일이 아닌 것이다.

물론 이런 원칙론만으로 『에세이스트의 책상』의 구체적인 소설적 성취를 가늠할 수는 없다. 좀더 자상한 분석이 필요하고 무엇보다 M이라는 인물을 검토해야 할 것인데, 그에 앞서 이 소설의 문체에 대해 잠깐 언급하고자 한다. 앞서 3장을 두고 명작소설의 한 장면 같다고 했지만 때로는 그 생경한 문장이 ‘번역본 명작소설’을 연상시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번역투 문체는 배수아의 초기작부터 더러 만나보곤 하는 것이었으나 이 작품의 경우 좀 다른 차원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2 예컨대 3장에서 화자가 요아힘 어머니 집을 찾아갔을 때 이런 대화가 있다.

 

“카푸치노?”

아네스가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나에게 물었다. 나는 고마워,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여행은 어땠어? 하고 비욘이 소파에서 몸을 돌리고 물었다.(36면)

 

이건 서툰 번역투라기보다 ‘막 나가는’ 직역에 가깝다. 독일인과 독일어로 진행되는 대화의 느낌을 효과적으로 재현하기 위해 의도된 수단으로 봐야 할 것이다.

직역이 독특한 울림을 내는 경우도 있다. 물에 빠진 화자가 베니에게 “내 사랑, 아무 일도 없을 거야. 거기 기다리고 있으면 내가 곧 돌아올 테니까. 착하지, 내 사랑”(15면)이라고 속으로 말하는 것은 실상 요아힘의 말투를 그대로 따른 것이고, ‘내 사랑’은 한국어의 뉘앙스와는 전혀 다른 독일어의 습관적 호칭을 직역한 것이다. 그러나 독자에게는 화자의 어떤 애틋한 심정으로 전달되며, 실제로 “나는 내가 M보다 더 빨리 죽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M 또한 그러했을 것이다”(18면)라는 대목과 연결되어 묘한 시적 여운을 남긴다.“최초로 물에 빠졌을 때는”이라는 표현도 번역투를 교묘하게 활용한 예라 할 수 있다. 한국어의 어법으로는 여러번 물에 빠져본 사람의 첫번째 경험을 뜻하기 십상인데, 이 작품을 다 읽고 나면 물에 빠졌을 때 ‘처음에는’ 이러저러한 느낌이었다는 말로 해석하는 것이 맞겠다는 판단이 선다. 제2, 제3의 사고에 대해서는 언급도 없고 관심도 안 보이는 것이다. 한국어로는 부자연스러운 어법을 동원함으로써 독자의 궁금증을 돋우고 어쩌면 의도적으로 농락하기까지 한 예이다.

이러한 언어상의 실험은 『동물원 킨트』에서 저자가 말하는 ‘이방인 놀이’만큼 과격한 것은 아니다. 이방인 놀이란 외국에 안 가고도 이방인 됨을 즐기는 혼자만의 놀이인데, 모국어를 쓰면서도 외국어처럼 서툴게 말하는 것도 그 한가지다.“머릿속에서 문법에 맞는 문장을 만들고, 그것을 신경써서 발음해가면서 말이다. 자신의 모국어를 외국어처럼 받아들이는 것이 이 놀이에서는 가장 중요하다.”3 물론 『동물원 킨트』도 내용은 독일에서 주로 독일어로 진행되는 것이므로 문자 그대로 ‘이방인 놀이’의 기록은 아니다. 다만 그러한 놀이의 정신이 작품의 문체에 두드러지게 반영돼 있는데, 어쩌면 그러한 실험을 거친 덕에 『에세이스트의 책상』의 좀더 신축자재한 언어가 가능해졌는지 모른다. 물론 『에세이스트의 책상』에도 한국어를 단순히 잘못 썼다고 봐야 할 예가 없지 않으며,4전반적으로 이 소설의 문체가 얼마나 상찬할 만한지는 대목마다 또는 문장마다 더 세밀히 따져볼 일이다.

 

 

3

 

그런데 M은 과연 어떤 존재인가?

화자 스스로 M의 실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순간이 있기는 하지만, 작중의 세계에서는 M이 환각이나 추상이 아닌 실존인물이요, 그것도 상당한 구체성이 부여된 인물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소설 첫머리의 M에 대한 묘사는 오히려 극사실(極寫實)에 가까울 정도다.

 

빗물은 M의 희고 윤기 없이 창백한 이마를 지나 감기를 앓은 다음이라 더욱 움푹 들어간 눈두덩과 끝이 약간 아래쪽을 향한 코를 따라 흘러내렸다. 마지막 순간에 M이 고개를 들자 그것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엷고 섬세하며, 미소짓고 있지 않을 때라도 양옆으로 충분히 길고, 아침의 태양빛이 스며든 듯 밝고 붉은 입술로 떨어졌다. 섬세하고 완만하게 두드러진 골격의 광대뼈, 학교에 다닐 무렵 핀족 혹은 에스키모인의 광대뼈,라고 놀림을 받았다고 하는 그것 바로 아래의 피부가 경련하듯 순간적으로 떨리는 것을 아주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5~6면)

 

물론 M이 인물인 동시에 그 이상의 어떤 것을 상징하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하다.(M은 ‘음악’을 뜻하는 독일어 Musik의 첫 글짜이기도 하다. 물론 M이 곧 음악을 상징한다고 말하는 건 가당치 않지만,“음악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 중에 유일하게 인간에게 속하지 않는 어떤 것이다”(145면)라는 명제의 신봉자가 ‘M’이라고 불리는 것은 어울리는 바 있다.) 그러나 상징성을 제대로 논하기 위해서도 M이 작중인물로서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특징을 보여주는지에 대한 기본적인 파악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다소 저급한 비평방법일지 모르나 화자와 M 사이의 진행을 스토리 차원에서 시간순으로 정리해볼까 싶다.(실제로 그 윤곽은 나 자신의 경우 두 번을 읽고 더러는 책장을 되넘겨가면서야 정리할 수 있었는데, 비슷한 경험을 해본 독자가 적지 않으리라 본다. 반면에 처음 읽는 독자로 하여금 적이 헛갈리게 하는 것이 작가의 의도였다면, 스토리의 윤곽을 미리 알고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한 독법은 아닐 게다.)

먼저, 화자가 M을 처음 만난 것은 화자의 첫 독일체류 기간 중 그녀의 두번째 독일어 선생으로 요아힘이 소개해서이다. 이 만남은 제5장과 6장 그리고 마지막 12장으로 분산되어 단편적으로 언급된다(각기 82~83면,110면,171~73면).

M과의 독일어 수업은 한달 만에 끝난다. 둘은 급속히 가까워져 “수업기간의 마지막 순간에 우리는 함께 살았으며 더이상 독일어 교사와 학생이 아니었다.”(97면) 소설 첫머리 비오는 날의 장면은 그렇게 된 뒤 언젠가였을 것이고, 그때 둘은 M의 작고한 숙모 집에 “그녀의 물건을 가지러 가기로 되어 있었다.”(6면) 실제로 바로 숙모 집에 차를 타고 가는 길이었기 쉬운데, 어쨌든 집에 도착했을 때도 비는 내리고 있었다. 둘은 빗속을 거닐다 왔고, 돌아온 뒤 “M은 서재에 있는 긴 의자 위에 누워서 눈을 감은 채 가슴에 양손을 얹고 불규칙적인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나는 욕실 선반장에서 마른 수건을 찾아내서 M의 맨발을 닦았다.”(7장,115면)

화자가 세번째 독일어 교사 에리히에게 작문을 제출하면서 M에 관한 이야기를 쓰는 것은 그후의 일이다. 그리고 작문을 돌려받은 지 2주일 뒤에 에리히의 생일파티―3년 뒤 다시 독일에 온 화자가 요아힘과 함께 참석한 4장의 연말 모임에서 누군가가 기억해서 언급하는 그 파티―가 열린다. 이 파티에서, 특히 돌아오는 길에,M과 화자 사이에 결정적인 사건이 벌어지는데, 이날의 사건 역시 특유의 토막난 서술을 통해 전달된다.6장 끝머리에 M과 화자의 벅찬 ‘희열의 순간’을 에리히가 끼어들며 중단시켰다가(111~12면),7장에 들어가 사랑에 대한 단상, 비오는 날의 회상, 요아힘과 M에 대한 생각, 그리고 뒷부분에 가서 플라텐과 슈베르트에 관한 진술들이 다양하게 전개되는 틈새에 끼어들어(123~24면 및 128면), 예의 결정적인 대화가 거의 지나가는 말처럼 전달된다.

 

전차 안은 난방이 들어오지 않아 몹시 추웠기 때문에 M은 울 스카프로 턱과 입을 가리고 있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M이, 단지 순수한 육체적인 호기심 때문에, 더이상의 다른 의미는 전혀 없이,에리히와 잠자리를 같이한 적이 있다는 말을 했을 때, 그 목소리는 분명하게 들리지 않았다.(128면)

 

이 고백을 듣고 난 직후 화자는 M의 집을 나와 원래 빌려놓았던 공동숙소의 방으로 돌아온다(8장 131면).M이 찾아와서 “아무리 벨을 누르고 애원해도 내가 문을 열어주지 않자 M은 현관문 앞에서 밤새도록 웅크리고 있었고 다음날 아침 앰뷸런스에 의해 병원으로 실려갔다.”(9장 137면) 귀국하기까지 시간이 더 남았지만 M을 영영 다시 안 보겠다는 것이 애초 화자의 결심이었다. 그러나 이 사태로 한달 정도 입원했던 M이 퇴원하자마자 찾아왔을 때 마지막의 만남이 이루어진다(139~44면). 헤어지는 순간 그들의 눈동자에 담긴 “절망적인 최후의 몸짓”(143면)을 빼면 둘의 대화는 마치 평상시처럼 차를 마시고 음악을 논하는 가운데 진행된다. 화자가 물에 빠지는 사고를 당한 것이 M이 입원한 동안이었음이 밝혀지는 것도 이 자리에서다. 그러나 죽지 않고 살아난 경위에 대해서는 끝내 설명이 없다.“그 사고에 대해서 내가 기억하는 부분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나는 M에게 설명해줄 수 없었다.”(142면)

M과의 직접적인 만남은 이것으로 끝이다. 다만 화자는 3년 후 다시 베를린에 돌아왔을 때, 요아힘 집에서 혼자 사는 시간이 끝나갈 무렵 M이 살고 있을지 모른다고 요아힘으로부터 얼핏 들은 바 있는 시떼포슈 구역을 찾아간 일이 있다(12장 168~72면). 그러나 M에 대해 알아볼 생각은 않은 채 혼자 산책을 하고 모퉁이 까페에서 석양빛을 보다가 다시 전차를 타고 돌아온다.화자는 “내가 시떼포슈에 간 것은 M을 생각해서가 아니었다. 나는 알렉산더 광장에서 가장 먼저 온 전차를 갈아탔고, 그것이 나를 시떼포슈로 데려가주었을 뿐이었다”(169면)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러나 10장 끝머리에서 고백한 M에 대한 그리움이, 즉 그런 의미의 ‘M 생각’이 불식간에 작용하지 않았다고는 보기 어렵다.

12장 첫 토막에서의 시떼포슈 방문 직후 M과의 장면이 하나 더 서술된다. 바로 다음 토막은 이렇게 시작한다.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M은 책상 곁에 서 있었다. 창으로 빛이 스며들어와 M의 모습이 반쯤은 금빛으로 빛나고 반쯤은 그늘 속에 잠긴 상태였다. 나를 보자 M은 성큼성큼 큰 보폭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우리는 악수를 했다.(171면)

 

시간의 진행과 함께 순차적으로 전개되는 서사라면 이는 막판의 멜로드라마틱한 반전을 이루는 해후 장면이 될 터이다.사실은 물론 정반대다.M과의 첫 만남과 첫날 수업 이야기가 약간의 변주를 거치며 되새겨진 것일 따름이다. 상투적인 소설의 깜짝사건을 기대하는 부류의 독자를 또 한번 골탕먹일 의도였는지도 모르며, 더 중요하게는 M에 대한 그리움이 시떼포슈 방문 이후에 더욱 절절해졌음을 암시하는 수단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 모든 사건이 진행되는 동안 M과 관련해서 한번도 명시적으로 언급되지 않는 것이 있으니, 곧 M의 성별이다. 뜬금없이 들릴지 모르지만, M은 남자인가 여자인가?

이런 원시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은, 화자가 여자이므로 그녀가 사랑했던 M은 남자이리라고 독자가 단정하기 십상이고, 실제로 나 자신 한참을 그렇게 읽었기 때문이다. 다른 독자들의 반응을 널리 탐문해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김영찬의 해설이나 백지연의 단평 모두 M의 성별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표명하지 않았다.5작중의 화자도 M을 두고 ‘그녀’는커녕 ‘그’라는 대명사조차 사용하지 않지만, 이것이야말로 작가의 주도면밀한 계산을 암시하는 것 아닌가.

어쨌든 M이 남자려니 하며 읽던 나의 선입견이 처음 흔들린 것은 에리히와의 육체적인 관계에 대한 그녀의 고백 대목에서였다.(나는 특별한 경우 외에는 서양식 어법에서 유래한 ‘그녀’보다 우리 전래의 어법대로 남녀를 통칭하는 ‘그’를 선호하지만, 이제부터 작품의 용례를 좇아 M을 ‘그녀’로 지칭하기로 한다.) 물론 남자하고 육체적인 관계를 가졌다고 자동적으로 M을 여자로 규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내 수치심 속에서 M은 호객행위를 하는 거리의 여자들처럼 과장해서 허리를 비트는 걸음을 옮겼고 에리히의 무릎 위에 앉아 내 작문을 읽었으며 부스럼이 난 얼굴을 쳐들고 추호의 부끄러움도 없이 외설적인 몸짓을 취했다”(134면)는 화자의 공상 속에 M은 일단 여자의 모습으로 등장하며, 화자의 분노에 찬 생각이 계속되면서 M의 성별은 조금 더 분명해진다.“M은 에리히가 페니스를 가진 남자이며, 보통의 여자들이 추구하는 보통의 쾌락을 제공한다는 그 사실을 강조해서 말한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M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말 때문에 에리히에게 질투심을 느끼지는 않았다.(…)M에게 침실에서의 에리히는 속삭이는 바이브레이터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확신한다.”(135~36면) 훗날 M과 이별한 화자가 M에 대한 그리움에 시달리고 있을 때, 혹시 M이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 것일까 하고 일시적으로나마 생각하는 대상도 모두 여자들이다(157면 및 174면).

그러면 M이 여자라고 할 때 화자와의 사랑은 어떤 성격인가? 그것이 단순한 우정을 넘어선 사랑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문자 그대로의 동성애 관계라고 보는 것도 타당치 않은 것 같다. 가슴 벅찬 순간에 “M의 맨발을 다 닦은 다음 바닥에 앉아 M의 젖가슴 위에 머리를 기울이고 M의 심장의 고동 소리를”(122~23면) 듣기도 하고,“나는 손가락으로 M의 젖가슴과 사슴처럼 고집스러우면서도 우아한 늑골과 매끈거리면서 열이 있는 배와 소름이 돋아 있는 팔 위를 미끄러져”(123면)가기도 하지만, 이런 대목들은 설혹 남녀 사이일지라도 욕정의 표현과는 거리가 있다.M과 화자 관계가 육체적인 결합보다 정신적인 일치에 근거한 것이라는 점은 M의 ‘중성적’ 성격에 대한 거듭된 강조에 의해서도 밑받침된다.6

화자 자신의 경험이나 철학에서도 육체적 관계는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치부된다.M의 고백이 촉발한 고통스러운 명상은 다음과 같은 자기성찰과 질문으로 끝난다.

 

그러나 단지 순수한 육체적인 호기심 때문에 이성과 잠자리를 같이할 때 내가 수치심을 느꼈던가? 도덕적인 저항을 느꼈던가? 정신과 육체의 괴리에 대해서 질문을 던졌던가? 그렇지 않다. 조금도 그렇지 않았다. 나에게 육체적인 관계란, 특히 쾌락을 가지고 오는 육체적인 관계란 신성시될 이유가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성인이 되기 이전부터 그런 입장을 오랜 시간 동안 지켜왔다. 나는 육체적인 행위를 통해 더 가까워지거나 더 멀어지는 관계를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나는 M을 더이상 받아들일 수가 없는가? (136면)

 

이러한 정신주의는 M도 동조하는―오히려 그녀가 선도했을―철학이기도 하다.“개인적인 친밀감이나 인간적인 애정을 초월하여 M이 지속적으로 봉사하고자 하는 인간 외부에 따로 존재하는 관념”(69면)이라는 그녀의 사상, 음악에 대한 두 사람의 공통된 헌신, 언어의 한계에 대한 고통스러운 인식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또한 「작가의 말」을 끝맺으면서 저자가 열정적으로 지지하는 세계,“그것이 없다면 모든 사물이 태어난 그대로의 영혼 없는 무의미함으로 흘러가버릴, 음악이 곧 언어이자 문학이며 언어가 곧 침묵인 그 세계”(198면)와도 통한다.

그러나 M과 화자와 저자 사이의 이러한 사상적 일치를 근거로 『에세이스트의 책상』을 그들의 공통된 철학을 설파하는 작품으로 읽는 것은 이 소설에서 ‘나쁜 의미의 에쎄이적 요소’가 지배적이라는 판정에 다름아닐 것이다. 육체적인 관계를 초월한 어떤 절대의 세계에 대한 에쎄이스트적 탐구, 이를 위한 ‘고립된 삶’의 예찬 내지 그 비극성의 증언, 그리고 고립을 견디지 못하는 군중에 대한 비판과 저항의 발언이 작품의 주된 성과가 되는 셈이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한 편의 뜻있는 작품일 수 있지만, 과연 그렇게 읽는 것이 『에세이스트의 책상』에 대한 충분한 대접인가?

 

 

4

 

실제로 『에세이스트의 책상』은 그런 각도로 읽더라도 빛나는 대목이 많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 작품의 한층 빛나는 성취는 M과 화자―그리고 어쩌면 저자 자신―의 정신주의에 대한 소설적 교정장치를 풍부하게 내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나는 육체적인 행위를 통해 더 가까워지거나 더 멀어지는 관계를 알지 못한다”는 명제를 보자. 화자의 이 말은 따지고 보면 여러모로 수상쩍은 발언이다. 그러나 화자로서는 정직한 진술일 터이며 십중팔구 M도 동의했을, 아니 선창했을 주장이다. 저자 스스로도 이것이 영·육(靈肉)이 쌍전(雙全)하는 삶에 대한 얼마만큼의 무지를 드러내는 주장인지를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하지만 작품 자체는 이 수상쩍은 명제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여러 계기를 담고 있다.

이 주장이 나오는 명상만 보더라도,“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나는 M을 더이상 받아들일 수가 없는가?”라는 질문이 곧바로 뒤따르면서 끝난다. 사실 M의 고백―이라기보다 통보에 가깝지만―을 되새기며 괴로워하는 화자의 마음속에서 M이나 화자 자신의 평소 신념은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러자 그 이전에 M의 얼굴에서 내가 읽었던 수많은 것들, 나에게 찾아가야 할 문장과 노래가 되어주었던, 보편문법과 야만인의 언어가 되어주었던 그 수많은 아름답고 숭고한 의미들이 아무런 항변이나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그 다음에는 한 낯설고 척박하게 메마른 얼굴이 거기 누워 있을 뿐이었다.(134면)

 

더구나 그 말을 해주었을 때의 M의 눈을 떠올리면,“그렇게 말하면서 M은 내가 상처받을 것을 미리 계산했을 것이 분명했다.”(135면)

“단 한 번의 응시로 무언의 극치로 내닫는 M의 눈동자”(110면)는 첫 만남에서부터 화자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바 있는데, 최후의 만남에서도 그 눈동자는 다시 화자를 사로잡는다. 하지만 동시에 드러나는 것은 훨씬 범상하고 인간적인 감정이다.“그러나 그날 M의 눈동자는 거기에 또다른 것을 말하고 있었다.M은 수치스러워하고 있었다.M은 자신이 나를 떠나기 위해 선택했던 방법과 그리고 내가 떠난 뒤에도 완전히 나를 떠날 수 없는 자신에 대한 수치스러움을 완벽하게 숨길 수 없었다.”(143면)

그러면 무엇이 그들을 헤어지게 만들었고 M으로 하여금 ‘미리 계산’하고 그런 말을 하게 했을까? 그 동기가 단순하거나 선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화자가 일치의 순간을 맛볼 때마다 미래에 대한 예감과 불안을 느끼곤 했던 것이 사실이며,M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에리히의 생일파티에서 둘이 팔을 잡고 서 있을 때,

 

그때 나는 M을 만나게 된 것이, 나에게 M이 이 세상의 그 누구와도 다르다는 것이,M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이런 희열의 순간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알지 못했다는 것이, 그 모든 것이 순간적으로 벅차서 M의 손등에 입술을 가져다댔다.M이 다른 손으로 내 손을 강하게 잡았다. 내 얼굴이 붉어지고 갑자기 미래의 시간이 강하게 떠올랐다. 나는 아마도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 가게 되리라.(111~12면)

 

당장의 ‘미래’에는 그녀가 한국을 다녀와야 할 사정이고 언제 다시 온다는 확실한 언질을 줄 수 없다는 현실이 포함된다. 그러나 이런 현실적인 사정과 관련해서도,“너무 오래 사랑하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던가? (…)M이 베를린에 홀로 남게 되는 것을 두려워했던 것처럼 사랑 안에서 그렇게 홀로 남게 되는 것을 나는 두려워하지 않았던가?”(119면)라는 의문이 뒤섞여 있다.M 또한 베를린에 홀로 남게 되는 것에 더하여 “너무 오래 사랑하게 되는 것”을 두려워했음이 분명하다. 에리히와의 육체적 관계를 고백한 것은 “자신이 나를 떠나기 위해 선택했던 방법”(143면)이었던 것이다.

화자는 이별 장면에서 그 점을 부각시키지만, 다음 순간(제9장의 마지막 토막) 언어와 음악에 대한 언설로써 M과의 실패한 관계를 정리한다.

 

나는 M에게서 언어를 배우는 대신에 음악을 배워야만 했었다. 혹은 M을 위해서 오랜 시간 무대 위에서 현악기 연주를 했어야만 했었다. 만일 우리가 언어가 아니라 단지 음악으로만 대화를 나누었다면, 나는 M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거나 혹은 그 반대로 모든 것을 알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M에게서 완전히 놓여나든지 아니면 M을 완전히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144면)

 

인간들의 일시적이지 않은 교제가 “단지 음악으로만 대화를 나누”는 관계가 된다는 것은 어차피 환상적인 가정이지만, 화자의 이런 진술을 허위의식이 다소간에 가미된 작중인물의 상념으로 보느냐 아니면 저자의 전면적 지지를 받는 사상의 개진으로 보느냐에 따라 ‘소설’과 ‘에쎄이’의 미묘한 차이가 벌어진다. 이때 저울추가 ‘소설’ 쪽으로 확실히 기운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화자와 M이 결별하는 과정에 그들 스스로가 의식하지 못하는―또는 순간적으로 감지했다가 금세 고매한 언어로 덮어버리곤 하는―복잡한 동기가 작용하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게다가 요아힘 같은 인물의 존재도 단순히 M을 돋보이게 만드는 이상의 효과를 지닌다.

요아힘은 분명 속된 인간이고 사고력의 한계도 뚜렷하다. 그러나 화자가 생각하기에도 실상이 겉보기만큼 단순한 것은 아니다.

 

M이 언제나 냉소하고 있었던 것은 요아힘의 사고력의 단순성과 협소한 지평이었으나 요아힘은 언제나 파생되는 결과만을 가지고 거꾸로 되묻곤 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토론을 듣고 있노라면, 그것을 토론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다면, 요아힘이 점점 더 바보스러운 고집쟁이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요아힘이 진심으로 M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해서 그랬던 것은 아니라고 짐작할 수 있다. 요아힘은 단지 거기에 동의할 수 없었을 뿐이다.(70면)

 

그리고 요아힘이 동의할 수 없었던 것은 속물성이라거나 ‘사고력의 단순성과 협소한 지평’말고도 그 나름의 절실한 인생체험이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그가 군복무를 대신해서 양로원 소속의 노인병동에서 사회봉사요원으로 일할 때 “매일 아침 수십 명의 나이 든 여자들의 배설물로 더럽혀진 아랫도리를 씻어내줘야 했”(67면)던 경험은 너무나 실감나게 전해지며,M과 화자의 철학에서 소홀히 취급되는 인간 육체의 또다른 “정말 실제적”(같은 곳)인 위력을 상기시킨다.

이런 의미심장한 소설적 교정장치들이 눈에 띔에도 불구하고 저울추가 ‘소설’ 쪽으로 확실하게 기울었다고 말하기 힘든 것은, 독자가 흡족한 소설적 성취에서 기대함직한 것들을 결한 바 또한 적지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요아힘과 화자의 관계만 해도 그렇다. 두 사람의 일상―마치 오래 같이 살아온 부부처럼 무덤덤하기까지 한 일상―은 풍부한 디테일로 묘사되지만 정작 이 남녀가 어떤 사이인지는 설명되지 않는다. 이는 다분히 의도적인 것일 테다. 남녀가 한집에 살기만 하면 성행위를 했냐 안했냐부터 캐려 드는 유치한 호기심을 거부하면서,“나는 육체적인 행위를 통해 더 가까워지거나 더 멀어지는 관계를 알지 못한다”는 신조를 입증하는 사례로 제시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화자 쪽에서는 어떤지 몰라도, 요아힘은 그의 성격상 3년 전에도 친했고, 함께 여행을 가도 좋다고 제안했으며,3년 만에 다시 만나 한방에 계속 머무는 여성과 육체적인 교섭 없는 동거를 두말없이 받아들였을 것 같지 않다. 적어도 육체관계 없이 지냈다면 지낸 대로의 긴장이 있었을 테고, 반대로 좀더 ‘정상적’인 동거생활이었다면 또 그에 따른 감정의 기복이 감지되어야 마땅하다. 작중의 상황은 그도 저도 아니며, 예의 신조를 가진 사람에게 너무도 맞춤하게 설정되었다.

화자의 한국생활이나 한국에서의 과거가 거의 언급되지 않는 것 자체는 결함이랄 게 없다. 어설프게 작품의 무대를 넓히기보다는 주제와 직결된 부분(학교의 경험이나 수미와의 영화관람 등)만 언급함으로써 집중성을 도모하는 것도 그럴듯한 전략인 것이다. 하지만 화자의 시야와 자기인식에 어떤 본질적인 문제점이 있다고 할 경우에는 그 문제점의 개인적·사회적 뿌리를 규명하려는 자세가 바람직하다. 그런데 『에세이스트의 책상』에서는 문제점의 존재가 부각되기는 하지만 규명의 노력이 뒤따르기보다는 (제9장의 끝머리에서처럼) 새로운 신비화와 도취의 언어가 시야를 가려버리곤 한다.7

한국사회의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려내는 배수아의 솜씨가 근년에도 여전함은 『에세이스트의 책상』 직전의 장편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에도 드러난다. 그 점에서 이 작품은 『이바나』에서 『동물원 킨트』를 거쳐 『에세이스트의 책상』으로 이어지는 선에서 일탈하는 모습인데, 딱히 “소설에는 주인공이라는 것이 있고 그리고 그의 여정을 따라가는 것이 소설 읽기라고”(「작가의 말」,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 291면) 단정해서가 아니라, 그 풍부한 세태묘사와 ‘빈곤’에 대한 작가의 관심이 제대로 융합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이 또한 ‘나쁜 의미의 에쎄이적 요소’가 잔존한 소설이라 할 것이다. 다만 이 경우에는 작가가 자신의 에쎄이스트적인 관심에 지나치게 몰입해서라기보다 『에세이스트의 책상』의 주인공 화자처럼 작가에게서 혼신의 집중을 이끌어내는 인물이 없기 때문에 ‘소설’로서의 아쉬움을 남긴 형국이다.8

『에세이스트의 책상』의 화자가 이런 반응에 개의할 것 같지는 않다. 그녀의 마지막 발언(이자 소설의 마지막 단락)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대답의 가능성 자체를 일축한다.

 

책상 앞에서 나는 계속해서 쓴다. 페터 한트케의 말처럼, ‘단지 글을 쓰고 있을 때만이, 나는 비로소 내가 되며 진실로 집에 있는 듯이 느낀다.’ 그러므로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 그것은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을 것이다.(174면)

 

물론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형이상학적 물음에는 답이 있기 어려울뿐더러 질문 자체가 부질없기 쉽다. 그러나 배수아의 책상이 어디까지나 소설가의 책상이라는 점이 확인될수록, 책상에 대한 다분히 낯익은 집착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에 대해서도 한결 폭넓고 예리한 소설적 탐사가 이루어지기를 주문하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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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책의 해설자도 이 점을 강조한다.“그 때문에 이 소설은 마치 M을 정신적 질료로 하여 그에 대한 회상에서부터 풀려나오는 언어나 음악에 대한 생각과 예술 텍스트에 대한 개인적 논평을 펼쳐놓은 에세이처럼 읽히고, 또 실제로 소설 전체가 인물이나 사건이 별로 중요하지 않은 에세이적인 형식을 띠고 있기도 하다. 이 소설의 제목이 ‘에세이스트의 책상’이라는 것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김영찬 「자기의 테크놀로지와 글쓰기의 자의식」, 『에세이스트의 책상』 181면)
  2. 작가 스스로도 자신의 번역투 문장에 대해 의식하고 있음은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에서 노용이 편지를 쓰다가 “어떠냐? 이런 완전한 번역투가”라고 괄호 속의 한마디를 덧붙이는 데서도 짐작된다(배수아 장편소설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 문학과지성사 2003,235면).
  3. 머리말 「동물원에 간다」, 배수아 장편소설 『동물원 킨트』(이가서 2002)8면.
  4. 예컨대 “자세하고 명쾌하게 설명하려고 하면 할수록 내 문장은 길어지고 구구절절해지며”(118면)라고 할 때의 ‘구구절절’은 특별한 창안이라기보다 ‘구구해지며’를 잘못 쓴 것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5. 김영찬은 배수아 소설이 “인물의 성별을 의도적으로 삭제”(『에세이스트의 책상』 176면)하는 현상을 언급하지만 이는 『동물원 킨트』를 염두에 둔 말인 것 같고,M을 ‘그녀’가 아닌 ‘그’로 지칭한다(179면). 백지연 「배수아, 존재를 증명하는 글쓰기―배수아의 신작 『에세이스트의 책상』」, 창비웹진 2004년 4월호(http://www.changbi.com/webzine/content.asp?pID=334&pPageCnt= 1&pWmuTitle=문학칼럼)에서는 M의 성별에 대한 언급이 아예 없다.
    『동물원 킨트』의 실험은 성별문제에서도 훨씬 급진적이다. 머리말의 첫 대목에서 저자는 “드물게도, 이 글은 분명하게 미리 생각되어진 면이 있었다. 그것은 주인공의 성별을 규정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5면)고 공언한다. 결과는 이러한 의도와 무관하게 주인공이 여자라는 느낌을 주지만, 이런 극단적 반소설(앙띠로망)적 의도를 그만큼 일관되게 밀고 나간 것도 만만찮은 성취다.
    그 직전의 배수아 장편 『이바나』(이마고 2002)에서는 K와 ‘나’가 연인 사이이고 K는 ‘그’로 지칭되는데, 소설이 절반 가까이 나간 지점에서야 K가 여학교를 다녔다는 사실이 슬그머니 언급되고, 또 한참을 더 가서야 “K는 또한 자신의 성적인 정체성을 부정했다.K는 그녀,라고 불리는 것을 철저하게 거부했다. 그리하여 나는 글 내내 K를 그,라고 부른다. 그것이 K에게 가지고 있던 내 호의를 표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98면)라는 해명이 나온다. 하지만 K가 처음부터 여성으로 설정된 것만은 명시적으로 밝혔다.
  6. 앞서 인용문에서 중략된 대목에는 “단순한 자웅결합의 쾌락에 순응하기에 M은 너무나 독립적이고 너무나 중성적이고 너무나 강하고 너무나 저항적이었다”(136면)는 말이 나온다.M과의 첫 만남을 서술할 때도 ‘중성적’이라는 인상이 되풀이된다.“처음 만난 M은 키가 컸고 중성적이고 아름다웠으나 엄격하게 보였다.”(82면)“첫번째 인상은 우선 놀랍도록 창백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토록 충격적일 정도로 중성적인 얼굴을 본 일이 없었다.”(171면)
  7. 배수아의 초기작들을 두고 신수정은 “도취는 결핍을 부른다”(신수정 「포스트모던 테일―배수아론」, 『푸줏간에 걸린 고기』, 문학동네 2003,164면)는 점을 지적했는데, 애초에 어떤 결핍이 도취를 불러왔을 가능성도 생각해볼 일이다. 실제로 배수아의 초기작에서는 도취가 결핍으로 귀결하는 과정과 함께 도취를 유발하는 한층 원초적인 결핍에 대한 인식도 틈틈이 엿보인다. 이에 비해 『에세이스트의 책상』은 애초의 결핍에 대해―학교시절의 고립과 억압말고는―거의 무관심하다. 물론 그 대신에 도취와 결핍이 엇갈리는 현상이 그 어느때보다 절실하게 부각되는 것이 사실이다.
  8. 비슷한 예로 근년의 단편 「우이동」(『세계의 문학』 2000년 겨울호)을 들 수 있다. 이 작품은 사실주의적 단편의 명품으로서의 면모를 거의 완비했지만,1970년대라는 그 시대적 배경과 작가가 사는 현재와의 관계에 대한 아무런 관심도 엿보이지 않기 때문에, 즉 『에세이스트의 책상』에서와 같은 작가의 절실한 현재적 관심사와 동떨어져 있기 때문에, 무언가 뜬금없다는 인상을 남긴다. 배수아의 초기작에서 민중생활의 수많은 진실을 포착한 신승엽의 읽기는 당시로도 적절했고 지금도 「우이동」이나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 같은 작품에 적용될 수 있지만, 그것이 단편적 인식을 넘어 어떤 역사적인 ‘주체 형성의 노력’으로까지 발전할 전망은 당시에도 밝지 않았고 지금도 거의 안 보인다고 해야 할 것 같다(신승엽 「배수아 소설의 몇 가지 낯설고 불안한 매력」, 『민족문학을 넘어서』, 소명출판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