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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미국이라는 우리의 난제

 

우리의 미국인식, 고정관념을 깨자

 

 

황정아 黃靜雅

서울대 기초교육원 초빙교수, 영문학. 주요 논문으로 「D. H. 로런스의 근대 문명관과 아메리카」 등이 있음. jhwang6@snu.ac.kr

 

 

1. 우리에게 미국은 무엇인가

 

미국을 주제로 무슨 말인가 하려고 할 때 ‘우리에게 미국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가장 흔하고 무난한 출발점이다. 사뭇 비장한 어조마저 감도는 이 물음은 그만큼 답을 절실히 찾는다는 인상을 주지만 동시에 의문형을 만드는 ‘무엇인가’라는 부분이 은근히 마음을 짓누르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인가 저것인가 혹은 이러저러한 것인가와 달리, ‘무엇인가’는 ‘역사란 무엇인가’나 심지어 ‘존재란 무엇인가’따위를 연상시키면서 대답을 얻고자 하는 질문 본연의 의도를 거슬러 마치 ‘결코 알 수 없을걸’하는 암시가 배어 있는 듯하다. 다른 한편, ‘우리에게’라는 말 역시 질문의 막연함을 덜어주는 효과가 있는 것 같지만, 실은 미국이 ‘우리에게’ ‘그들 자신에게’혹은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각각 다른 무엇일지 모른다는 애매함을 남긴다.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미국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미국의 ‘정체’를 제대로 규명하는 일이 과연 가능한 목표인가, 그리고 ‘우리’의 주체적 인식은 여기에 어떻게 연관되는가 하는 복잡한 질문들의 요약본이기도 하다. 이 글은 굴곡의 현대사를 거치며 양과 질에서 많은 성과를 축적한 우리의 미국연구에 여전히 반복되는 문제점들을 짚어봄으로써, ‘정체를 제대로 규명하는’ ‘주체적인’미국인식이라는 이 주제를 간접적으로 다루어보려 한다.

미국연구의 범위와 수준이 방대하고 다양한만큼 ‘문제점’에 국한하더라도 대상을 상당히 제한할 수밖에 없다. 미국에 대한 체계적이고 학문적인 인식을 ‘미국학’으로 통칭한다면 그 안에서도 미국학 자체에 대한 포괄적인 논의와 구체적인 분야별 연구로 구분되고, 후자는 다시 인문학 분야와 사회과학 분야로 나뉜다. 그리고 흔히 ‘대중서’로 분류될 법한 내용 중에도 학문적 성과를 일정하게 반영하면서 좀더 대중적인 교양에 촛점을 둔 연구가 있는가 하면 그야말로 개인적인 경험이나 여행담에 가까운 부류가 있다. 여기서는 ‘학술’과 ‘대중’그리고 ‘총론’과 ‘각론’의 범주를 모두 대상으로 하되, 2000년 이후 나온 글 가운데 너무 전문적이고 세부적이거나 지나치게 개인적인 내용을 제외하고 크게 보아 ‘미국문화연구’와 관련된 글을 중심으로 몇편을 골라 살펴보겠다.

 

 

2. 미국학의 정체성

 

『한국에서의 미국학: 이론과 실제』라는 책을 보면, 미국학은 기존의 분과학문처럼 분명한 경계나 체계가 확립되기 어려운 성격이어서, “그것이 생긴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그 학문적 정체성 때문에 많은 논의가 계속”되는 실정이다.1 그러나 이 점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고 미국학이 지니는 “다양성, 학제성, 협동성, 실용성의 특성들이 오히려 오늘날 전개되고 있는 많은 전통적인 학문분야의 연구경향이라고 볼 때 어떤 면에서는 미국학이 전통적인 학문분야가 나아가려고 하는 방향에 대해 하나의 모델이 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고 한다(124면). 그렇더라도 이런 정체성 문제는 한국의 미국학이 안고 있는 주요 관심사이자 과제이며, 더구나 미국학이 미국에서“일종의 국책학문”으로 시작되었고“미국의 국가기관인 미공보원이 지속적으로 미국의 아메리카학회 또는 각국의 아메리카학회를 지원하여”(124면) 육성된 점을 감안하면 이 문제는 한층 복잡해지고 첨예해지리라 예상할 수 있다.

『한국에서의 미국학』의 집필 목적도 “우리의 실정에 맞는 미국학을 정의하고” “한국에서 미국학 교육의 모델을 제시하고 더 나아가 미국학을 활성화시키는 데 하나의 참고가 되도록 하기 위함”(머리말)이며, 따라서 책의 내용도 크게 ‘이론’편과 ‘실제’편으로 나누어 정체성이라는 이론적 주제와 교육의 실제 내용을 각각 다룬다. 그런데 미국학의 기원과 성격을 생각할 때 적어도 미국학 이론을 다루는 데서는 한국의 ‘미국학’이 어떤 차별성을 가져야 하는가의 문제가 가장 핵심적인 화두로 제시되어야 마땅할 듯하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다. 가령 「한국에서의 미국학 교육의 바람직한 방향」 같은 글은“미국에서 시작된 미국학이란 학문분과가 어떤 것인가를 살피고, 과연 미국의 미국학이 한국의 교육에서 어떻게 자리를 잡을 수 있는가를 생각”해보는 데 촛점이 있다고 밝히고 있다.2 그래서인지“냉전시대에 미국은 자국의 이데올로기를 우방국들에 수출하기 위해 미국학을 도구로 사용”하기는 했지만“미국에서 행해지던 연구의 내용과 방법론과는 다른 수출용 미국학을 개발한 경우는 없”기 때문에“미국학 자체가 제국주의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주장은 지나친 것이고”또 최근에는“미국학의 냉전적 전통에 대한 반성과 교정을 요구하는 학자들도”등장했다는 점을 강조한다(89면).

물론 그런 과거가 있으니 미국의 미국학이 애초에 그랬듯 언제까지고 ‘이데올로기 수출 도구’에 머무를 거란 주장은 터무니없다. 미국의 미국학이 단일한 흐름이 아님을 감안하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반대도 늘 진실은 아니라는 데 있다. 심지어 ‘반성과 교정’을 요구하는 움직임도 크게 보아 ‘국책 이데올로기’가 아니란 보장이 처음부터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이 책에도 여러번 지적된 것처럼, 한국의 미국학이“유럽에서와는 달리 무엇보다도 미국의 주도적 역할에서 비롯되었고”3 특히 ‘한국아메리카학회’가 창설 당시나 지금까지 미국공보원과 한미교육위원단의 후원을 받는다는4 ‘불편한’사실을 한국에서의 미국학의 현재적 한계 정도로 간단히 치부하는 것도 걸리는 대목이다. 후원을 받는다고 해서 영향까지 받는다고 단정할 순 없지만, 여러 면에서 미국과 이해관계의 갈등을 겪는 마당에 ‘중립적인’후원이 있다는 가정도 너무 안이한 태도로 보인다.

다른 한편, 미국의 미국학과 다르고 또 달라야 한다는 것을 큰 전제로 받아들일 때조차 막상 차별성을 실제로 논의하는 지점에선 뜻밖에도 다시 미국의 사례에 기대는 경향이 있다. 이는 ‘타자로서 미국 연구하기’의 대안으로 ‘지역학’을 제시하면서도 그“학문분야와 교육모델을 ‘미국 지역학’으로 설정”5하기 때문이다.6 그렇기 때문에 미국(대학)의 지역학 교육 프로그램을 소개하는 것으로 한국의 주체적 미국학에 대한 모색을 대체하는 결과가 빚어진다. 여기서도 하나의 ‘참조사항’으로 미국의 지역학을 검토하는 일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고 또 필요하지만, 이를 ‘주된’참조점이나 심지어 하나의 ‘모델’로 채택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미국인이 자신을 연구하는 학문인 미국학과 타자를 연구하는 학문인 지역학을 대비한다면, 우리의 경우 미국에 대한 연구는 지역학의 개념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타당하다”(3면)는 것 이상의 납득할 만한 설명이 있어야 한다. 미국 아닌 다른 지역을 대상으로 한 한국의 지역학 연구도 참고할 가치가 있을 것이며, 만일 국내 지역학이 미국학만큼 확고히 정립되지 못한 형편이라면 차라리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의 미국학 연구는 어떤가? 언뜻 생각하기에 차라리 그편이 ‘한국에서의’미국학 연구에 더욱 큰 시사점을 던져줄 수 있고 또 이미 축적된 성과도 상당하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미국학』에서는 일본의 사례만, 그것도 현황을 중심으로 간단히 소개될 뿐 본격적으로 검토할 필요조차 언급되지 않는다.

어쩌면 이런 경향은 학문의 정체성이나 주체적 연구라는 이론적인 난제들과 찬찬히 씨름하기에는 미국학에 대한 ‘실용적’요구가 너무 부각되는 탓인지 모른다. 이 책의 필자들도 미국의 세계적 지위나 한미관계의 특수성에서 비롯된 한국인, 특히 한국학생들의 미국에 대한 높은 관심을 전제하고 일차적으로 그런 현실적 요구에서 미국학의 존재근거를 찾는 듯하다. 그러나 이런 실용성이라는 측면도 자명한 문제가 아니며 미국에 관한 관심이 높다 해도 그것이 꼭 미국을 더 알아야 할 근거로, 더구나 하나의 학문으로 확립하고 교육할 근거로 해석할 필연성은 없다. 미국이라는 연구대상의 영향력 그리고 미국학의 기원과 정체성의 모호함을 감안할 때, 연구의 독자성과 주체성을 확보하려면 앞에서 살펴본 것보다 훨씬 더 치열한 모색이 필요하리란 생각이다.

 

 

3. 이데올로기를 작동하는 인식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미국의 ‘무엇’을 알아야 하는지, 그 인식의 내용 면을 살펴보자. 미국학 얘기를 꺼낸 김에” “미국학 강의를 위한 교과서”(서문)를 염두에 두고 씌어진 『미국학』에서 논의를 시작하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7 교과서를 겨냥한 목표에 걸맞게 이 책은 미국의 지리와 역사부터 지적 전통, 정치, 외교, 경제, 언론, 그리고 이민, 남부, 흑인, 여성에 이르기까지 매우 포괄적인 주제를 다룬다. 그 가운데 비교적 개관에 가까운 「미국의 지리적 조건과 역사」는 전반부를 미국의 다양한 지역을 소개하는 데 할애하고 후반부에선 미국 역사 및 역사를 보는 시각을 검토한다. 짧은 분량에 많은 내용을 담다보니 요약 설명에 그치게 되어 문자 그대로 너무 ‘교과서’에 가까운 점은 어쩔 수 없는 한계이겠지만, 시종일관 ‘그들의’주장을 전하는 데 주력했다는 인상은 남는다.

예를 들어 청교도의 역사관을 두고는” “영국 정부와 국교가 부패하여 그 기능〔신과의 계약 이행〕을 수행하지 못하기 때문에 청교도들은 아메리카로 건너와 신의 뜻에 맞는 사회를 건설하려 하였다. 신과 역사는 그들의 편이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청교도들에게 아메리카 땅은 신이 바라는 ‘산 위의 성’이며 따라서 독특한 것이었고 그들은 사명감을 가졌다”8고 정리하는데, 어디까지가 역사적 ‘사실’혹은 그들의 ‘실제’동기이고 어디까지가 그들의 ‘주장’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이를테면 당시 영국의 ‘부패도’를 가늠하는 잣대가 무엇인지, 또 청교도들이 건설한 사회의 ‘순수성’을 가늠하는 잣대는 무엇인지 아무런 언급이 없는 것이다. 이런 최소한의 근거 제시를 시도했다면 실제와 주장 사이의 혼란은 훨씬 줄었을 것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청교도는 미국인의 도덕적 자부심의 원천이며 미국이 그 뿌리부터 자유의 땅이었다는 근거로 끊임없이 활용되는데, 앞의 설명도 그런 ‘자유로운 미국 건설의 선조’로서의 청교도라는 기본 도식의 반복이다.

또 ‘합의의 역사학’을 다루면서도” “그들의 눈에는 갈등의 요소보다 오히려 합의의 요소가 더 많은 듯이 보였다. 왜냐하면 미국은 봉건제도가 없는 자유로운 사회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들에 대해서만은 미국인들의 의견이 일치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국인들이 자유롭고 관대하게 된 것은 풍요한 토지 때문인 것 같았다”(69면)는 부분은 이 역사관의 기본 내용을 요약하는 맥락이지만 역시 아무런 거리도 없이 전달되기 때문에 의심의 여지 없는 사실을 기술하는 듯 읽힐 소지가 매우 많다. 하지만 ‘봉건제도가 없다’는 사실이 ‘자유로운 사회’의 유일한 기준일 수는 없다. 또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들에 ‘의견이 일치했다’는 것이 정확히 그 가치들의 완전한 실현을 지향했다는 말인지, 아니면 일정한 제약을 전제로 이 가치들을 인정했다는 것인지도 애매하다.

이렇듯 오해(?)를 무릅쓰면서까지 논평을 자제하는 이 글의 태도는 우리의 미국인식에서 종종 노정되는 한가지 문제점을 매우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요약하자면 미국이 자신들의 역사와 전통에 대해 내세우는 (따라서 이미 우리에게도 어느정도 익숙한) 주제들을 답습할 뿐 아니라 그런 주제를 설명하는 방식 또한 그들의 주장이 확립된 사실인 것처럼 반복한다는 것이다. 외교분야를 다룬 「외교정책의 전통: 예외주의 역사의식」에서 미국의 팽창주의 외교정책인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을 정리한 부분도 비슷한 예다. 여기서는 남북전쟁 전후로 국무장관을 지내면서 팽창주의를 더 강력하게 추진한 윌리엄 씨워드(William H. Seward)를 언급하며 영토확장에 대한 그의 관심이” “제국에 대한 꿈”이라고 정의하면서도, 곧이어” “씨워드가 꿈꾼 제국은 일차적으로 미국의 정치나 경제적 힘을 증가시키는 것이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미국의 자유를 확대시키는 것이었다. 앞에서 언급한 퓨리턴들과 마찬가지로 씨워드도 미국은 세계를 향한 사명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라든지, “그러나 씨워드의 꿈은 영토 확대가 전부는 아니었다. 그는 미국식 민주주의를 다른 나라에 전파하기를 원하고 있었다”같은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9 이 또한 일차적으로는 씨워드라는 인물이 어떤 생각을 품었는지 전달하는 형식이지만 그것이 그저 그가 스스로 ‘믿고 싶어하는 것’이었는지 아니면 그를 움직인 진정한 동기였는지, 또 민주주의의 전파라는 것이 ‘명백한 운명’이 표방하는 바인지 아니면 그것의 실제 내용인지 아무런 가늠을 하지 않음으로써 결국은 그가 생각하는 바가 곧 실제 일어난 것인 양 서술되는 효과를 낳는다.

미국의 건국신화로 늘상 지목받는 사안들을 다루는 글에서 ‘신화적’측면, 다시 말해 이데올로기적 측면에 대한 고려가 완전히 배제되어 있다는 점은 놀랍다. 설문조사라도 한 건 아니지만 한국의 평균적인 일반인에게조차 팽창주의의 핵심이 민주주의의 전파일 리가 있겠는가 하는 의문은 상식에 가깝다. 더구나 학문적 영역에서라면 어떤 주장의 이데올로기적인 성격을 고려하는 일은 초보적인 작업에 속하며 설사 그 이데올로기를 대체로 승인하는 입장이라 해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과정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보면 상당히 ‘순진한’태도로 그런 이데올로기적 서사를 반복하는 것은 곧 그 이데올로기를 ‘작동’시키는 사태를 낳을 수밖에 없다. 가령 ‘명백한 운명’으로 ‘민주주의를 전파’한다는 논리가 지금도 기세등등하게 살아서 부시 대통령의 이라크 침공에도 활용되는 점을 상기하면 이런 태도의 결과는 더욱 엄중해진다.

이데올로기 얘기가 나왔으니 그 작동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를 몇가지 더 살펴보자. 살림지식총서에서 2003~4년에 걸쳐 출판한 미국학 씨리즈는 대중교양서를 표방한만큼 길지 않은 분량에 비교적 평이하게 씌어져 있지만 대체로 본격적인 연구에 기반을 둔 내용들을 담고 있다. 그중 미국문화의 핵심요소를 설명하는 책 가운데 『미국의 정체성: 10가지 코드로 미국을 말한다』에서도 앞에서 언급한 문제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제목에 실린 10가지 코드는 개인주의, 자유, 다문화주의, 개척정신 등으로 우리가 익히 아는 교과서적 항목들인데, 사실 이런 것들로 미국의 문화를 설명하려는 시도는 이를테면 ‘홍익인간(弘益人間)’으로 한국의 문화를 설명하려는 시도만큼 공허할 수 있다. 더구나 코드를 읽는 방식도, 가령 개인주의에 대해“민주주의의 위험인 다수의 횡포를 막는 해독제”이며“모든 사람들은 동등한 가치를 가졌고 자신들의 운명을 지배할 수 있다는 개념으로 정의”된다는10 대단히 막연하고 단순한 소개에 그칠 뿐, 그렇다면 개인주의가 다수의 합의를 무시할 위험은 없는가, 이런 식의 개인주의를 통해 실제로 미국사회에서 모든 사람이 동등한 가치를 지니는가 하는 의문들은 고려대상이 아니다.

이데올로기의 반복을 가장 ‘순진하게’또 가장 ‘극단적으로’보여주는 예는 같은 총서의 『미국의 문화지도』에 나온다.“이런 의미〔미국의 힘은 여러 다양한 것을 포용하는 너른 마음과 트인 자세에서 나온다는 의미〕에서 미국은 결국 나라가 아니라 하나의 가치이자 이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미국이 기리고 간직하고 추구하고 발전시키려는 그 가치와 이상을 같이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미국의 부분이 될 수 있다”11는 논평이 그것이다. 이 부분은 ‘미국의 꿈’(American Dream)이라는 ‘이상’을 문자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며 이상과 사실의 경계를 도무지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하나의 ‘선전’이라 불러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미국이야말로 사람이 태어나서 어떤 인위적인 제도나 조직이나 정책으로부터 구속되지 않고, 가장 자유로워질 수 있는 곳이기 때문”(91~92면)이라는 단정도 그런 선전의 연장이다.

이처럼 미국의 주장, 더 정확히는 미국 ‘일각’의 주장을 단순히 반복, 전달함으로써 ‘기정사실화’하는 것만큼이나 빈번하고 뚜렷한 또 한가지 문제점은 ‘(잘못된) 보편화’라는 이름으로 정리할 수 있다. 그것은 이해와 평가를 도모하되 미국이라는 맥락을 기준으로 하고, 또 그렇게 해서 나온 판단을 어떤 ‘보편적’기준을 통과한 것으로 다루는 경향을 말한다. 대상이 미국이니만큼 일단 미국의 내적 맥락에서 갖는 의미를 살피는 일이나 그런 맥락에서 해당 사건이나 주제가 갖는 중요성을 언급하는 것은 당연히 필요하다. 하지만 그때의 중요성을 다른 시각에서 한번 걸러주는 작업이 생략되면 그것이 곧 ‘보편적 가치’로 둔갑하는 결과를 피하기 힘들다.

「미국의 지적 전통과 위기」라는 글에서 다른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대단히 억압적이었던 청교주의의 이면을 설명하다가, “황야에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이해한다면 청교도 성직자들이 추구했던 법과 질서의 엄격함을 단순히 청교도의 경직성과 불관용으로 몰아붙이기보다는 내셔널리즘의 완성에 중요한 기여를 했던 부분으로 평가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12라고 평가하는 대목은 이런 식의 ‘보편화’를 잘 보여주는 예다. 미국 내의 어떤 관점에서 본다면 ‘내셔널리즘에 대한 기여’가 ‘경직성과 불관용’보다 더 중요하다는 판단도 가능하겠지만 그것이 그대로 우리의 평가기준이 될 근거는 없다. 게다가 ‘관용’이야말로 더욱 ‘보편적’인 잣대가 아닌가.

『미국을 만든 사상들』에도 비슷한 경향이 나타난다. 이 책은“오늘날의 미국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형성, 즉 혁명과 헌법제정을 통한 국가건설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13는 전제 아래 미국혁명과 헌법제정을 둘러싼 전통적 해석, 공화주의적 수정론자들의 해석, 수정주의 비판들을 차례로 정리하고 헌법제정기의 연방주의자와 반연방주의자의 논쟁까지 소개한다. 그런데 결론적으로 제시하는, “개인을 국가의 권력으로부터 해방시킨다는 미국혁명 초기의 원칙은 헌법의 새로운 제도 속에도 그대로 구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원칙은 오늘날에도 살아 있다. 미국헌법은 그야말로 미국혁명의 완성인 것이다”(81면)라는 평가는 겉으로는 ‘보편적’기준에 의거했다는 인상을 자아내지만 실은 이 책이 소개하는 미국내 이념적 논쟁의 맥락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역사가 사람들의 주장에 불과하다는 믿음이 있다면 모를까, 그리고 미국혁명을 인류 보편가치의 순수한 현현으로 본다면 모를까, 객관성을 지향한다면 ‘미국헌법이 미국혁명의 완성’이라는 평가는 동어반복에 불과하다. 최소한 미국혁명이 ‘개인을 국가의 권력에서 해방’시킨 면이 있는 만큼이나 그렇게 ‘해방된’개인들이 지극히 제한적이었다는 것, 게다가 첫 미국헌법은 심지어 노예제까지 승인하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미국의 ‘다양성’도 이런 식의 ‘보편화’에 흔히 등장하는 항목이다. 서울대 미국학연구소에서“새로운 세기로 진입하는 싯점에서 미국이 겪는 변화의 흐름과 당면한 과제를 분석”하여“이 방면에 대한 체계적 지식뿐만 아니라 우리 스스로를 성찰하는 준거와 지혜를”얻을 것을(「머리말」) 취지로 편집한 『21세기 미국의 역사적 전망 Ⅱ: 문화·경제』에서도 이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일례로 미국의 종교를 다룬 글에서“사실상 건국 초기의 통일적 신앙체계는 단순한 맹신이 아니라, 하나의 광적인 신앙에 편협된 몰입을 거부하는 뉴잉글랜드의 공공적 신앙전통에 의하여 세련된다”는 설명도 언뜻 촛점을 파악하기 힘들거니와, “이러한 가운데 결국에는 종교다원주의가 확대되는데, 여러 개별종교들의 서로를 향한 반응은 부정적”이라는 대목에 오면 이렇듯 서로에 부정적인 개별종교들이 단순히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에서 ‘다원주의’라는 표현을 끌어낼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14 그리고 “모든 종교다원주의의 본보기적 모델로 여겨지곤”(37면) 한다는 미국의 이런 다원적 종교상황은“타종교들에 대하여 적대적인 동시에 개방적이면서도 또 같은 하나의 커다란 지붕을 상정하려는 측면”을 특징으로 하며, 그것이“긴장을 통해 변증법적 합일의 성공적 존재방식을 창출해낼 수 있는 특유의 영적 재산”(48면)이라는 설명에도 모호함은 여전하다. ‘통일지향성’이 미국 종교다원주의의 독특성이라면 그것이 얼마나 ‘보편적으로’바람직한 통일성인지가 규명되어야 ‘본보기적 모델’이란 논리가 성립할 것인데도, 여기서는 그런 필수적인 점검과정이 생략되어 있다.

이런 경향이 ‘미국 예외주의’와 관련이 있음은 분명하다. 모든 나라의 예외주의를 인정하는 입장이 아닌 한, 예외주의라는 것은 단순히 미국이 어떤 보편적 경로의 예외라는 주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예외적’으로 보편적 가치를 더욱 담보한다는 암시를 동시에 갖는다. 따라서 예외주의를 고스란히 인정해줄 요량이 아니라면 이 암묵적인 주장을 예민하게 감지하면서 미국을 기준으로 다시 미국을 평가하는 순환논리에서 벗어나 ‘보편성’의 잣대를 더욱 엄정히 적용할 필요가 있다.

 

 

4. 폭로와 균형의 한계

 

물론 미국의 이데올로기를 반복하는 인식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아서, 앞에서 살펴본 살림지식총서의 미국학 씨리즈 중에서도 『미국인의 발견』이나 『마이너리티 역사』 등은 미국의 문화와 역사를 읽는 지배적 코드가 가리는 이면에 촛점을 맞춘다. 우리의 미국인식이 균형을 잡는 데 비판적 관점이 중요한 기여를 하리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런 비판 자체가 균형잡힌 인식을 보여주는가는 다른 문제인데, 미국의 ‘공식’이데올로기를 표적으로 삼은 탓인지 그에 상반되는 양상을 드러내는 ‘폭로’에 그치는 경우가 흔하다. 예컨대 개인주의라는 코드에 대비하여 미국인이 실은 얼마나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는지 보여주는 사례를 들거나 자유의 땅이라는 신화에 맞대어 새로운 이민자들을 억압한 역사를 예시하는 식이다. 다시 말해, 효과적인 반박이기는 하지만 그 스스로 ‘다른 면도 있지 않느냐’는 재반박의 대상이 되기도 그만큼 쉽다.

이런 종류의 비판의 한 갈래로, ‘반미’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입장을 명시한 『생각하는 한국인을 위한 반미 교과서』를 살펴보자. 이 책은“ ‘반미’가 미국의 모든 것에 반대하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나아가 미국이야말로 ‘악의 제국’이므로 이 세상에서 없어져야 한다는 것을 뜻하지도 않는다. 대부분의 경우에 ‘반미’는 미국의 한계와 문제를 비판하고 바로잡으려는 실천행위”15라고 기본입장을 정리하지만, 미국인식의 구체적인 내용에서는 일면적 태도가 나타난다.“아메리카합중국의 역사는 ‘전쟁으로 이루어진 역사’이다. 아메리카합중국은 전쟁을 통해 건국된 나라일 뿐만 아니라, 전쟁은 이 나라를 운영하는 하나의 절대원칙이다. 이 나라가 해체되지 않는 한, 이 원칙은 폐기되지 않을 것”(44면)이며“전쟁국가 미국은 〔부시 같은〕 이런 전쟁광들을 계속 낳을 것”(70면)이라는 식이다. 미국이 참여하거나 주도한 전쟁이 내재적 동인에 의한 사건임을 강조하는 수사적 표현이라기엔 지나친 이런 진술들이 계속 이어지면서, 전쟁은 경제와 문화 등 모든 면을 포괄하며 아예 미국의 ‘본질’처럼 묘사된다.

‘전쟁의 역사’라는 규정은 ‘민주주의와 자유의 역사’라는 말만큼 단순화된 정의이며, 미국이란 나라가 ‘유독’ ‘처음부터’그렇게 되어 있었다고 선언한 다음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들은 입증 사례로만 활용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뒤집힌 예외주의’라 할 수 있다. 이런 논리는 전쟁 이외의 다른 양상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기도 하지만, 전쟁에 관해서도 각각의 전쟁이 구체적으로 어떤 조건과 결과를 갖는지 규명하는 일에 소홀하게 만든다. 게다가 전쟁이 한편으로는 미국 주도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핵심수단이지만 동시에 질서유지의 값비싼 댓가이며 심지어 붕괴 조건이자 조짐일지 모른다는, 좀더 복합적인 문제들을 차단하는 면이 있다. 따라서 이런 식의 인식은 자칫 ‘미국만 그런가’하는 냉소적 반응을 낳기 쉽고 운동의 차원에서도 연대의 폭을 좁히는 결과를 야기할 수 있다.

다른 한편, 미국내 미국학 연구에서 탈식민주의나 다문화주의 등을 통해 좀더 균형잡힌 인식에 도달하려는 시도가 꾸준히 있었고, 이런 움직임을 반영하는 국내의 연구도 나오고 있다. 『차이를 넘어서: 탈식민시대의 미국문화읽기』는“미국문화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수자와 소수자의 문화를 균형있게 수용할 필요가 있다”16는 문제의식 아래, ‘다수자와 소수자의 문화’를 각각 미국 내부의 ‘식민성’과 ‘탈식민성’으로 설명하는 탈식민주의 담론으로 이런 균형있는 미국문화 이해를 시도한다.

이 책은 먼저 미국내 탈식민주의 미국학 연구의 다양한 시각들, 이를테면 미국이 영국제국으로부터 정치적·문화적 독립을 이룬 (최초의) 탈식민국가라는 점을 일방적으로 강조하여“미국의 역사적 복잡성과 내적 식민주의 요소를 간과”(129면)하는 경향, 미국을 탈식민국가로 간주하는 것이 또다른 문화적 지배논리가 될 수 있다는 비판적 관점, 미국이 탈식민국가이긴 하지만 식민 폭력도 행사했다는 점에서 특별히 도덕적 우월성을 갖지는 않는다는 논의를 각각 소개한다. 그런 다음, “미국문화의 정체성은 미국 독립혁명이 지니는 역사적 탈식민성과 신생국 미국의 19세기 제국주의적 팽창과 국내 소수인종의 억압이라는 식민성이 병존한다”고 전제하되, 미국문화에 대한 탈식민주의 논의는 후자 즉“아메리카 인디언의 학살, 흑인의 노예제도와 인종차별, 여성인권 억압, 다양한 해외이주민에 대한 노동착취 등 내적 식민주의를 비판하고 극복하려는 타자의 인간화에 촛점이 맞추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표명한다(133면). ‘탈식민성’과 ‘식민성’을 동시에 고려하면서도 이 두 가지를 기계적으로 병치하기보다는 현재적 시각에서 더 중요한 내적 식민성 극복 문제에 비중을 두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렇듯 여러가지 편향을 의식하면서 균형을 취하려는 태도가 돋보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탈식민주의는 미국의 탈/식민성과 관련된 한가지 중요한 항목, 즉 미국의 ‘외적’식민주의 요소를 빠뜨렸다는 점에서 처음부터 심각한 한계를 안고 있다. 어차피 식민성의 함의를 넓혀 미국내 소수자들에 대한 억압까지 포괄했다면 미국이 외부세계와의 관계에서 행하는 각종 폭력을 식민성에 넣지 않을 논리상의 이유가 없다. 소수자에 대한 억압이 여전히 온존하지만 ‘미국인’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미국의 역사에서 대체로 ‘탈식민성’이 두드러질 것이기에, ‘내적’식민성에 한정된 시야는 처음부터 일방적인 노선에 접어들기 쉽다. 이 책에서도 9·11 이후 미국내 언론들에 의한 이슬람세계의 재현이 지닌 폭력성 등 ‘외부’에 대한 언급이 없지는 않으나, 근본적으로 미국이 내부의 식민성과 씨름한 ‘탈식민’의 역사가 외부적 식민성을 강화하는 측면이 있음을 간과한다. 탈/식민성 문제에서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점은 이렇듯 식민적 억압의 대상이 그 성격상 특정집단에 고정되어 있지 않고 그때그때의 필요에 따라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어느 한 범주의 집단, 혹은 심지어 한 국가 내의 거의 모든 집단에 행하는 식민주의적 억압이 상대적으로 줄었더라도 그것이 식민성 자체의 극복에 대한 증거가 될 수 없음(또 그 역도 성립하지 않음)을 감안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내/외의 긴밀한 연관을 고찰하는 일이 반드시 필요하다.

미국문화에 대한 일면적 관점을 거부하고 균형잡힌 이해를 추구하는 또 한가지 중요한 시도로 ‘다문화주의’를 들 수 있다. 인종, 성, 민족 등의 다양한 범주를 포괄하는 다문화주의를 연구의 구체적인 면면으로 검토하자면 끝이 없을 것이므로, 다문화주의를 ‘이론’으로 평가하는 데서 나타나는 문제점을 간략히 살펴보자. 미국내 미국학의 역사를 개괄한 「미국학(미국문화연구)의 역사적 전개과정에 대하여」를 보면, “1990년대와 2000년대 다문화주의를 주창하는 미국학”의 등장으로“미국학이 ‘문화비판’으로서 또 ‘급진적 비판’으로 거듭”났다고17 할 만큼 다문화주의는 미국의 지배적 담론의 편향을 바로잡고 미국학 내부의 비판적 전통을 계승한 이론으로 소개된다. 그런데 이 글은 다문화주의를 통해“미국이 미국문화의 다양성을 내세워 또다른 예외주의를 산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에 대한 의구심을 저버릴 수는 없다”(250면)고 하면서도, 이 의구심에 대한 별다른 해답 없이 다문화주의를 탈식민주의와 함께“미국문화의 다양성과 생동감, 그리고 그 비판성이 현재에도 여실히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방향계”라고 판단한다. 이 논리에 따르면 미국문화에 대한 ‘비판’으로서의 다문화주의가 미국문화의 ‘속성’으로서의 다문화주의를 입증하는 증거가 되는 셈인데, 이는 ‘또다른 예외주의’라는 ‘의구심’이 괜한 것이 아님을 역설적으로 입증한다.

다문화주의를 둘러싼 미국내 논란을 다룬 「다문화주의를 넘어서」 역시, 다문화주의가 계층문제를 주목하지 못했다거나 제도화되어 특히 교육과정에 많이 반영되었지만“교육과정이 다문화적으로 변했다고 해서 일상에서 인종간의 평등이 이루어진 것이 아님”은 물론이고 인식상의 변화도 근본적인 수준은 아니었다는 등의 한계를 지적한다.18 하지만 그러면서도“다른 집단에 속한 개인의 인간다움을 인정하고 함께 인간답게 사는 사회를 구현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목적이라면 다문화주의의 궁극적 목적은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것”(160면)이라는 평가를 내린다. 그러나 다문화주의와 민주주의의 관계는 사실 자명하지 않다. 다문화주의가 실제 현실과는 거리가 있고 또 현실의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대응이 되지 못할 가능성은 이 글에서도 지적한 점이다. 나아가 민주주의는 결국 다양성을 존중하는 쪽을 향하지만 다양성의 존중이 민주주의를 호도하는 상황도 있을 수 있다. 앞서 탈식민주의와 관련해서도 논의했다시피, 더 다양한 관점이 존재하고 더 다양한 집단의 문화가 가치를 존중받더라도 그것이 발언권을 획득한 집단들간의 이해 ‘조정’에 그칠 뿐, 어떤 다른 집단(의 문화)에 대한 억압이 남아 있고 심지어 더 강화되는 예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은 다문화주의를 더 밀고 나가 개별 문화주체들의 동질성을 흔들고 경계를 가로지른다 해도 변함이 없을 것이다.

 

 

5. ‘미국’ 인식에서 벗어나기

 

‘우리에게 미국은 무엇인가’라는 서두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미국의 공식 이데올로기는 말할 것도 없고 이를 극복하려는 이론도 미국에 대한 정당한 인식으로 우리를 곧장 안내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우리에게’가 함축하는 ‘주체적’인식의 필요성은 더욱 커진다. 하지만 ‘우리’를 내세울수록 도리어 ‘무엇인가’가 더 미궁에 빠지는 사태도 일어난다. 알려지지 않은 미국의 이면을 보고 균형을 취하려는 노력이 비판의 대상인 미국 예외주의를 다시 암묵적으로 추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문제의 핵심은 ‘미국은’이란 대목에 있지 않을까. 미국에 대한 인식을 논하는 마당에 인식대상인 미국이 문제라는 말은 다소 엉뚱하지만, 이것이 미국 그 자체를 알 필요가 없다는 뜻은 물론 아니다. 우리의 미국인식에서 반복되는 몇가지 문제들은 결국 ‘미국’에 시야를 한정시키거나 ‘미국’의 정체성 규명에 매여 있는 데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한편으로는 인식의 범위를 넓혀 미국과 (미국이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나머지 세계를 연관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때그때의 구체적 사안으로 범위를 좁히되 판단의 잣대를 더욱 보편화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이것은 미국학 연구자들이 제기한 ‘지역학’으로서의 미국연구를 진정으로 실천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지역’으로 미국을 연구한다는 말은 ‘세계’안의 하나의 지역으로 대한다는 의미이며 세계에 적용되는 기준으로 평가할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미국학’의 경계는 더욱 모호해질지도 모르지만 실제 미국연구의 내용은 한층 풍성해질 것이고, 그런 가운데서 ‘주체적’인 인식의 가능성도 생겨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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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정연선 「한국에서의 미국학: 그 활성화를 위하여」, 정연선 외 『한국에서의 미국학: 이론과 실제』, 한국외국어대출판부 2005, 123면. 머리말에서는“이 책은 2003년도 한국아메리카학회가 ‘한국에서의 미국학: 그 현황과 발전방향’이라는 주제로 개최한 3회의 미국학포럼에서 발표된 논문들을 중심으로 몇편의 논문을 추가로 모집하여 엮은 것”으로 소개하고 있다.
  2. 이상돈 「한국에서의 미국학 교육의 바람직한 방향」, 같은 책 88면.
  3. 정연선 「한국에서의 미국학: 그 활성화를 위하여」, 정연선 외, 앞의 책 141면.
  4. “학회의 주요활동은 미국공보원과 한미교육위원단(풀브라이트위원단)의 후원하에 개최하는 연례 미국학 국제쎄미나”라고 한다. 김용권 「한국의 미국학: 과거—현재—미래」, 정연선 외, 앞의 책 159면.
  5. 이현송 「미국 지역학의 개념과 교육 프로그램」, 정연선 외, 앞의 책 3면.
  6. 앞의 「한국에서의 미국학: 그 활성화를 위하여」에도“미국학이 지역연구가 되어야 한다는 전제를 인정한다면 우리는 미국의 대학에서 개설하고 있는 미국의 외국연구 프로그램을 살펴봄으로써 우리의 실정을 감안한 하나의 대안을 만들 수 있을 것”(133면)이란 주장이 들어 있다.
  7. 김형인 외 『미국학』, 살림 2003.
  8. 이주영 「미국의 지리적 조건과 역사」, 김형인 외, 같은 책 67~68면.
  9. 김남균 「외교정책의 전통: 예외주의 역사의식」, 김형인 외, 같은 책 162~64면.
  10. 김형인 『미국의 정체성: 10가지 코드로 미국을 말한다』, 살림 2003, 9~10면.
  11. 장석정 『미국의 문화지도』, 살림 2003, 86면.
  12. 이형대 「미국의 지적 전통과 위기」, 김형인 외, 같은 책 82면.
  13. 정경희 『미국을 만든 사상들』, 살림 2004, 5면.
  14. 김종서 「미국적 종교다원주의의 독특성 연구」, 미국학연구소 편 『21세기 미국의 역사적 전망 Ⅱ: 문화·경제』, 서울대출판부 2002, 34~36면.
  15. 홍성태 『생각하는 한국인을 위한 반미 교과서』, 당대 2003, 8면.
  16. 김상률 『차이를 넘어서: 탈식민시대의 미국문화읽기』, 숙명여대출판부 2005, 머리말.
  17. 권석우 「미국학(미국문화연구)의 역사적 전개과정에 대하여」, 『미국학 논집』 37.3(2005년 겨울호), 249면.
  18. 정상준 「다문화주의를 넘어서」, 미국학연구소 편, 앞의 책 158~5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