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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윤지관 엮음 『영어, 내 마음의 식민주의』, 당대 2007

영어의 광풍에서 제정신 차리기

 

 

황정아 黃靜雅

이화여대 연구교수, 영문학 jhwang612@hanmail.net

 

 

영어내마음의이제는 그냥 유행이나 열풍도 아닌, 영어‘광풍’이라고 한다. 아무리 그래도‘미쳤다’는 수식어까지야… 하는 느낌은, 멀게는 혀수술, 가까이는 토플대란을 비롯하여 하나하나 되새겨볼 것도 없는 각종 영어관련 세태들을 떠올리는 순간 미련없이 사라진다. 하기야‘광풍’이란 말 자체도 애초의 충격효과를 상실한 지 오래인 것 같다. 어떤 바람이든 한번 불기 시작하면 미친 듯이 휘몰아치게 만드는 팽팽한 강박의 자기장 속에서 살아가는 일이 어느덧 일상이 되어버린 탓이다.

일상이 되었다고 해서 강박에서 비롯된 온갖 정서적 혹은 물리적 이상증상이 고통스럽지 않을 리는 없고, 그래서 마침내‘도대체 영어가 뭐길래’하는 탄식까지 쏟아내게 된다. 『영어, 내 마음의 식민주의』의 몇몇 필자들도 고백하듯이, 소위‘원어민’이나‘원어민에 방불하는’영어실력을 갖추지 않은 다음에야 잘하건 못하건 영어 때문에 치사하고 괴롭기는 매한가지인 것이다. 그런데‘광풍’이 과연‘광풍’인 까닭은 이렇게 대다수의 사람이 엇비슷한 압박에 시달리고 또 어느 순간엔 엇비슷한 회의와 마주치면서도, 어디까지나 개인의 능력 문제로 돌릴 뿐‘영어를 해야 한다’는 것은‘주어진’사실이자‘논란의 여지 없는’대세로 받아들이기 일쑤라는 점이다.

그런 심정에서 보면 이 책이 나온 것이 반갑기는 고사하고 숫제 짜증부터 앞설지 모른다. 영어가 이데올로기이고 자본이고 권력이고 계급인 줄은 다 안다, 하지만 그걸 아는 게 내가 영어를 해야 하는 현실을 바꿔줄 수 있는가, 싶은 것이다. 그러나 언뜻 영어 이데올로기에 대한 개인의‘반응’으로 보이는 이‘다 안다, 하지만 현실은 어쩔 수 없다’는 논리 속에서 영어 이데올로기가 가장 활발히 작동되며, 나아가‘안다’는 잠재력을‘어쩔 수 없다’는 무기력과 효과적으로 연결하는 점이야말로 이데올로기 일반의 대표전략인지 모른다.

그렇다면 대체 우리가‘알고 있는’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영어가 대학입학에 결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고 취업에도 그러하며 또 소득이나 계층과 상관관계가 밀접하다는 것을, 한마디로 영어가‘출세’와 긴밀한 관련이 있음을 알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영어가 학업이나 업무 수행능력과 구체적으로 어떻게 연관되는지, 그에 앞서 개별적인 학업 혹은 업무의 내용에서 영어가 각각 어떻게, 얼마나 관련이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또 우리는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국가가 소위‘국제경쟁력’이 높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은 나라의 경쟁력 향상이 영어와 정확히 어떻게 혹은 얼마나 관련되는지 알지 못한다. 요컨대, 우리는‘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드는 방식으로만‘알고 있는’것은 아닐까.

이 책은 영어 광풍 그리고 그에 대한 우리의 자학적 냉소에 맞서 영어라는 물건이 우리 삶과 마주하는 접점들을 다양하게 포괄하면서 각각의 양상을 분석적이고도 생생한 방식으로 보여준다.‘우리에게 영어는 무엇인가’라는 제목이 붙은 1부에서 영어의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다양한 역사적·사회적 틀을 통해 그리고 때로는 구체적인 예를 인용하며 밝혀주는 한편, 2부‘영어, 어떻게 배우고 가르쳐야 하나’에서는 영어교육과 관련된 매우 흥미로운 사례들과 방법론을 제시하고, 마지막 3부‘영어의 지배,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서는 영어에 담긴 정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논리를 다시금 짚어주면서 영어 공용어화 주장을 비판하고 적절한 대응방식을 탐색한다.

이렇듯 다루는 내용의 폭이 넓다 보니 각각의 글이 때로는 개념적으로 조금씩 어긋나는 면도 없지 않다. 가령 영어가‘도구’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해서, 어떤 글에서는 “실제의 필요에 따라 사회적 분업이 이루어져야”(송승철, 149면) 한다는, 다시 말해 더 엄밀히 도구로 대해야 한다는 데 촛점을 맞추는가 하면, “하나의 언어가 가지고 있는 도구 이상의 무엇에 대한 존중과 깨달음”(윤지관, 400~1면)을 강조하는 글도 있다. 영어교육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목적과 필요에 따라서 세분하게 재단된”(이병민, 189면) 교육으로 효용성 제고가 시급하다는 점이 강조되기도 하고, 다른 곳에서는 “교양있고 지적 균형이 잡힌 국제인”(김진만, 172면) 양성에 중점을 두기도 한다. 하지만 너무 고지식한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 다음에야 이런 차이들은 중대한 의견대립이나 목표의 충돌이 아니라 풀어야 할 과제의 여러 측면을 두루 제시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 빈번하게 등장하는‘이데올로기’라는 단어 또한, 영어가 중립적인 매체가 아니라 자본이나 권력과 연루된 정치적인 것임을 지시할 때도 있고, 물신화나 우상화 같은 현상과 맞먹는 수식어로도 쓰이고, 또 다르게는 인종차별주의 제국주의 식민주의 같은 구체적인 억압기제를 지칭하는 등, 다양한 맥락과 의미로 사용된다. 이런 여러 용법이 촘촘히 연결된 관계망 속의 다른 위치일 뿐이라는 점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굳이 공통점 한가지를 추출해본다면 과잉에 관한 지적, 곧 우리가 영어를 지나치게 평가하고 지나치게 강조하고 그것에 지나치게 투자하고 있다는 지적이 아닐까 싶다. 물론 이‘과잉’은 필연적으로 질적인 왜곡을 수반하며, 따라서 양적인 조절만으로 교정될 수 있는 성격이 아니라는 단서도 붙어야 할 것이다.

이 책은 그런 과잉의 실상과 연원을 밝힐 뿐 아니라 그에 대한 저항의 실마리를 어디서 찾을 것인지도 함께 다루고 있는데, 당연히 그것은 과잉의 거품을 걷어내는 일에서 출발한다. 다시 말해 우리가 실제로 영어를 무엇을 위해, 얼마나 또 어떻게 익힐 필요가 있는지 차분하게 파악하여 그에 맞게 대접하자는 것이다. 따지고 말고 할 것 없이 그저 더 많이 해야 한다는‘묻지 마’식 광풍이기 때문에 이런 제정신의 환기가 지닌 의미는 더 커진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서 이 책에 대한 아쉬움이랄지 아니면 후속작업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거품을 걷은 영어의‘제자리’를 지목하는 일이야말로 이데올로기적인 논쟁이 가장 치열하게 벌어지는 공간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주어진 수요를 계산하고 그에 맞게 공급을 준비하는, 한마디로‘인과관계’를 밝히는 작업이 될 수 없으며, 수요 자체를 어떤 관점에 따라 결정하는가 하는 문제다. 영어가 이데올로기라는 말은 무엇보다 영어의‘제자리’라는 것이 언제나 이데올로기적으로 정의된다는 뜻이 아닌가. 따라서 이 책의 문제의식이 실질적인 변화로 이어지려면 영어 이데올로기가 특정 세력이 수요를 부풀려 특정 정책으로 고착시킨‘광풍’임을 하나하나 밝히는 작업과 함께, 어떤 가치를 중심에 두어야 제정신을 찾을 수 있을 것인지 더 구체적으로 규명하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