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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과 현장

 

근대 한국의 이중과제와 녹색담론

‘이중과제론’에 대한 김종철씨의 비판을 읽고

 

백낙청 白樂晴

서울대 명예교수, 문학평론가. 최근 저서로 『통일시대 한국문학의 보람』 『한반도식 통일, 현재진행형』 『백낙청 회화록』(전5권) 등이 있음. paiknc@snu.ac.kr

 

 

1. 글머리에

 

‘근대의 이중과제’론, 곧 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을 이중적인 단일과제로 추진한다는 논의는 추상수준이 매우 높을 수밖에 없다. ‘근대’를 세계역사상 자본주의시대로 규정할 경우 그 구체적인 기간에 대해 여러 학설이 있지만, 여하튼 짧게는 2, 3백년, 길게는 5백년 이상에 걸쳐 있으며 아직도 지속중인 시간대이다. 공간적으로도, 자본주의가 자리잡은 지역이 처음에는 지구의 한 모서리에 불과했으나 지금은 전세계를 망라하는 공간이 되었다. 이렇듯 거대한 시·공간에 전반적으로 적용되는 담론이라면 추상성이 높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반면에 근대 개념의 다양성이라든가 ‘이중과제’ 실행의 현실적 어려움 등은 다른 문제다. 사람마다 개념을 달리 쓰더라도 자신은 근대의 기준을 어디에 두는지를 밝혀주면 그만이고, 실천적인 어려움은 그것대로 따로 고민할 일인 것이다. 다만 이중과제론이 추상수준이 높은 담론임을 솔직히 인정하면서 다른 차원의 담론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지를 성찰하는 과제가 남는다. 이에 대해 나는 최근에 조효제(趙孝濟) 교수와의 대화에서 세계체제라는 차원에 맞춰진 이중과제론이 한반도에 적용될 때 분단체제극복론이 되고, 추상수준을 조금 더 내릴 때 남한사회 내에서의 변혁적 중도주의가 된다는 개략적인 설명을 제시한 바 있다.1

그런 점에서 이 대화가 포함된 지난호 특집 ‘한반도에서의 근대와 탈근대’에서 이남주(李南周), 백영서(白永瑞), 홍석률(洪錫律) 등이 이중과제 수행을 위한 자기 나름의 시도를 보여준 것은 무척 반가운 일이다. 이 가운데 홍석률의 「대한민국 60년의 안과 밖, 그리고 정체성」은 이중과제론의 본격적 전개를 꾀한 것은 아니지만, “국민국가, 산업화, 민주화 등 근대의 과제들이 서로 분리된 채 선후관계를 형성하여 상호 배제하고 근대의 온전한 성취와 탈근대론이 서로를 배제하는 사고가 아직 우리 사회에서 극복되지 못하고 있다”(『창작과비평』 2008년 봄호 66면)는 문제의식이 이중과제론과 기본적으로 일치하고 있다. 다른 한편, 변혁적 중도주의를 통한 한반도 분단체제 극복과 전지구적 자본주의에 대응하는 문제를 연결지은 이남주의 「전지구적 자본주의와 한반도 변혁」이나, 그간의 동아시아론을 한걸음 진전시키면서 분단된 한반도에서의 남북연합 같은 복합국가를 건설하는 문제를 동아시아 지역연대의 중요 의제로 부각시킨 백영서의 「동아시아론과 근대적응·근대극복의 이중과제」는 각기 자신의 관심분야에서 이중과제론의 구체화를 시도한 예이다. 그 성과는 많은 토론을 거치며 검증할 일이겠지만 이중과제론이 끝내 추상적인 언술로 겉돌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 셈이다.

반면에 김종철(金鍾哲) 『녹색평론』 발행인의 「민주주의, 성장논리, 農的 순환사회」는 이중과제론을 포함한 나의 이런저런 주장에 대해 분명한 반대의견을 내놓았다. 이는 물론 창비 편집진과 입장을 달리하는 목소리를 듣고자 한 기획의도에 합치하며, 기획에 호응하여 성의있는 비판을 해준 필자에게 나 자신과 동료들뿐 아니라 많은 독자들도 고마움을 느낄 것이다. 내 쪽에서도 그의 비판을 진지하게 검토하고 솔직하게 답변하는 것이 도리일 터인데, 논쟁이라기보다 공유하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담론의 진전을 주된 목표로 삼고자 한다.

 

 

2. 성장논리 비판과 담론의 차원 문제

 

먼저 나는 근대의 기본적인 성격을 비롯한 많은 사안에 대해 김종철과 인식을 같이하고 있음을 상기하고자 한다. 예컨대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두고,

 

경제성장의 과실이 보편적으로 나눌 수 있는 성질의 것이라고 믿는 것은 어리석은 망념(妄念)이다. 오늘날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요구하는 소비형태는 본질적으로 낭비를 제도화하고 있는 것이지만, 그 낭비적인 소비수준을 누릴 수 있는 인구는 현재는 말할 것도 없고 미래의 어떤 지점에서도 세계인구의 소부분에만 국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부의 균점은 자본주의의 성장 메커니즘이 결코 허용할 수 없는 것이며, 만약 실제로 균점이 실현된다면 이미 그것은 자본주의 씨스템이 아닐 것이다. (『창작과비평』 2008년 봄호 77~78면)

 

라고 하는 그의 말은 나도 내 나름으로 주장해온 내용이다. 생태계의 위기에 관해서는 물론 나의 공부와 실행이 많이 못 미치지만, 김종철의 다음과 같은 주장 역시 나의 지론과 기본적으로 일치한다.

 

에콜로지의 관점에서 볼 때, 자본주의 근대문명의 근본문제는 그것이 순환의 법칙에 의해 돌아가는 세계 속에서 끊임없이 직선적인 ‘진보’를 추구하도록 강요하는 메커니즘에 종속된 씨스템이라는 것이다. 이 근본적인 모순이 해소되지 않는 한, 조만간 자본주의의 종언은 필연적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니, 이대로 가면 자본주의의 종언보다 먼저 세상의 종말이 닥칠 가능성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같은 글 84면)

 

김종철의 녹색담론에서 또 하나 매력적인 점은 민주주의 문제에 대한 그의 남다른 관심이다. 이는 그가 녹색운동에 뛰어들기 전부터 견지해온 입장으로서, 어느덧 100호를 맞이하는 『녹색평론』의 편집·발행을 포함한 그의 실천활동에서도 생태계운동과 민주주의적 지향을 결합하려는 그의 열정을 확인할 수 있다. 이번 글에서도 그는 “민주주의란, 간단히 말하여, 민중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다스린다는 것을 의미한다”(71면)는 전제 아래, “이른바 ‘민주화 이후’ 시대라는 지난 20년 동안 우리가 민주주의에 대해 지나치게 낙관적인 태도로 살아온 게 아닌가〔…〕. 우리는 이제 ‘민주화’는 성취했으니까 다음 과제는 ‘선진화’라고 생각하고 있었는지 모른다”(68면)라는 반성을 제기하면서, 노무현정부가 한미FTA협상을 강행함으로써 “이 나라의 민주주의의 토대가 얼마나 허약한 것인가가 폭로되는 데 큰 기여를 했다”(69면)고 꼬집는다. 하나같이 동의가 되는 명제들이다.

하지만 논술이 진행되면서 완전히 수긍하기 힘든 대목도 눈에 뜨인다. 예컨대 민주주의에 관해서도 한미FTA체결에 대한 비판에 이어, “지난 20년 동안 ‘민주화 이후’ 시대 전체에 걸쳐서 민주주의가 한번도 제대로 실현된 바가 있는지 의심스럽〔…〕다. 오히려 사태는 점점 더 악화되어왔다고 보는 것이 정당한 판단일 것이다”(69면)라는 주장에 이르면, 민중자치로서의 민주주의가 한번도 제대로 실현된 바 없다는 데는 동의할 수 있고 자본주의의 고도화에 따라 민중자치의 여건이 악화된 면이 분명히 있다고는 해도, 지난 20년 동안 한국 민주주의가 줄곧 후퇴해왔다고 거침없이 말해도 되는지는 의문이다. 민중자치의 조건을 두고도, “참다운 민주주의의 성립에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민중이 주체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자립과 자치의 조건이다. 요컨대 노예의 삶을 강제당하지 않기 위한 근본적인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71면)라는 온당한 주장은 민중이 경제성장의 과실을 일부라도 차지할 현실적 필요성으로 이어질 법도 하건만, 그는 “이런 각도에서 볼 때, 사람들이 흔히 믿고 있는 것과는 달리, 경제성장은 민주주의의 발전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같은 곳)고 단언하는 쪽을 선택한다. 그리고 이런 극단적인 판정에 대해 어떠한 사실점검이나 단서조항도 없이, “경제성장은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의 심화·확대를 의미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갈수록 민중의 자치·자립의 역량을 근원적으로 훼손하고, 불평등한 사회적 관계를 끝없이 확대재생산한다”(71~72면)는 원론에 호소할 뿐이다.

그밖에도 예컨대 우리나라 전통마을의 ‘민주주의적 생활방식’에 관해 그가 인용하는 보고(73면)가 얼마나 충실한 것인지, 또 거기 적시된 특징들이 사실에 부합하더라도 그것은 지난날 농촌공동체의 비민주적·성차별적 요소들과 연동된 것이 아닌지 등, 따져볼 문제가 적지 않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무릇 어떤 담론이건 그것이 적합한 차원을 벗어나면 무리한 이야기가 되기 십상인데, 김종철의 글에서는 그러한 ‘차원의 혼동’이 거듭 일어난다는 점이다.

예컨대, “경제성장은 현재의 사회경제적 격차를 토대로 해서만 성립될 수 있는 것이며, 성장의 결과는 기왕의 불평등을 해소하거나 완화시키기는커녕 그 불평등구조를 온존·심화시키는 데 기여할 뿐이다. 그리고 다시금 그러한 불평등구조는 계속적인 성장의 토대가 되는 것이다”(77면)라는 대목이 그렇다. 이는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작동원리라는 높은 추상수준의 담론으로서는 타당하지만-적어도 나 자신은 타당하다고 동의하지만-자본주의체제하의 특정 시기 특정 지역에서의 불평등 해소 또는 완화 가능성이라는 좀더 낮은 차원으로 옮겨가는 순간 독단적인 주장에 불과해지고 만다. 아니, ‘성장의 토대’라는 측면에서도, 아무리 자본주의체제라 해도 사회경제적 격차가 클수록 반드시 성장에 유리한 것은 아니며 불평등구조의 일정한 완화가 성장을 돕는 일이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나의 ‘적당한 경제성장’ 내지 ‘자기방어적 성장전략’에 대한 비판에서도 바로 이러한 차원의 혼동이 일어난다.

 

자본주의 씨스템은 원래 ‘빈곤’을 제거할 수 있는 씨스템이 아니다. 빈곤을 해소한다는 명분으로 전개되는 경제발전은 오히려 새로운 형태의 빈곤을 만들어내고, 경쟁력이 약한 고리에 위치한 사람들을 비참한 곤경으로 내몰 뿐이다. 경제발전 혹은 성장의 논리는 생태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81면)

 

이는 또 한번 자본주의 씨스템의 ‘원래 성격’에 대한 높은 추상수준의 담론에 해당한다. 반면에 나의 ‘적당한 성장’개념은 어차피 자본주의체제 아래 살아갈 수밖에 없으면서도 현대 한국, 즉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특정 시기 특정 지역에서 이 현실을 극복하는 방향으로 살고자 하는 처지에서의 구체적인 대응전략으로 제안된 것이다. 이에 따른 고심을 김종철도 전혀 모르지는 않는 듯, “계속하면 환경도 파괴하고 인간성도 파괴할 수밖에 없는 경제성장이지만, 그렇다고 안할 수도 없다-이러한 딜레마를 뚫고 나가자면 그야말로 엄청난 ‘지혜’가 필요할 것임은 말할 필요가 없다. 그 결과, 아마도 고심 끝에 백낙청이 내놓은 처방이 ‘방어적인 경쟁력 노선’ 혹은 좀더 간단하게 ‘적당한 경제성장’이라는 개념인 듯하다”(같은 곳)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기왕이면 이 개념에 입각한 이런저런 방안들이 실제로 얼마만큼의 ‘지혜’를 담았는지를 점검해주기까지 했으면 좋으련만, “지금으로서는 ‘적당한 경제성장’이라는 것이 하나의 추상적인 언술로서는 성립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과연 그것이 구체적인 현실에서 무엇을 어떻게 하자는 전략인지 분명치 않다”(81~82면)는 말로 일축해버린다.2 그러고는 다시금, “분명한 것은 자본주의 경제의 틀에 일단 ‘적응’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한, 어떠한 경우에도 ‘적당한 경제성장’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82면)는 원칙론으로 되돌아간다.

‘적응’이란 낱말은 사람마다 다르게 쓸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삼아야 할 ‘적응’은 어디까지나 동시에 ‘극복’ 노력이기도 한 이중적 단일과제의 일부로서의 적응, 다시 말해 극복하기 위해서도 최소한으로 필요한 적응, 극복 노력이 따름으로써만 ‘투항’이 아니라 주체적인 ‘적응’에 값하는 적응이다.3 물론 이때 중요한 것은 낱말의 뜻을 놓고 다투는 일이 아니라, 실천적인 상황에서 ‘적당한 성장 또는 경쟁력 확보’가-김종철의 물음대로-“과연 현실적으로 성립할 수 있는 개념인가 하는 것이다.”(81면)

그러나 정작 삶의 현장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나름으로 이런 개념에 따라 살고 있는 것 아닐까. 물론 개인이건 국가건 자본주의의 무한축적 원리에 충실하여 최대한의 돈벌이에 목을 매고 사는 경우가 대다수지만, 적어도 개인이나 한정된 집단 차원에서는 그런 세태에 맞서 자신을 지켜내고 나아가 이런 기막힌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라도 꼭 필요한 돈벌이를 하고 경쟁에서 탈락하지 말아야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결코 적지 않을 것이다. (당장에 나 자신과 김종철을 이런 개인들 틈에 포함시켜도 되지 않을까.)

아무튼 ‘적당’여부는 무엇을 위한 적당이냐에 따라 판별하는 것이지 만사에 두루 해당되는 ‘적당’이란 없다. 특정 상황에서 특정 주체가 ‘극복을 위한 생존 내지 적응’을 위해 도모하는 ‘방어적인 경쟁력 노선’이 과연 그 목적에 비추어 적당한지, 아니면 말로만 ‘방어’지 공세적인 추수주의(追隨主義)와 하등 다를 바가 없는지, 또는 ‘방어’를 꾀하다가 방어마저 제대로 못하고 오히려 낙오하게 마련인 전략인지, 이런 문제는 구체적인 사안을 놓고 판단할 일인 것이다.

김종철도 부분적으로 인용하는 대목에서 나는 ‘적당한 경쟁력’의 기준을 남한 및 범한반도적 당면과제가 요구하는 적정선에 두었다. “한번 낙오하면 항구적인 약자로 전락하기 일쑤고 약자는 강자로부터 사람대접을 기대하기 어려운 현존 세계체제의 현실에서 우리가 애써 쟁취한 그나마의 민주적 가치를 보존하고 한반도의 분단체제 극복과정에 능동적으로 개입할 수 있기 위해서라도 근대극복의 노력들과 슬기롭게 일치하는 적응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졸저 『한반도식 통일, 현재진행형』, 창비 2006, 269면, 강조는 원문) 실제로 이런 입장이 ‘적정선’에 제대로 맞췄는지는 논의할 여지가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김종철이, “우리가 생명의 지속에 필요한 물질적 여건을 개선하려는 노력 자체를 거부해야 할 하등의 이유는 없다”고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여전히 물자와 써비스의 낭비를 구조적으로 강제하는 근대적 생활을 유지·확대하기 위한 양적 성장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그다지 의미있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83면)고 결론지은 것은 정작 힘든 문제를 회피해버린 느낌이다. 이런 자세로 그가 주장하는 대로 “성장논리와는 무관한 질적으로 전혀 다른 삶, 즉 비근대적 방식으로 방향전환하려는 급진적 노력”(84면)이 과연 얼마만큼의 실행력을 확보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하기야 새 정부의 출범 이후 더욱 기승을 부리는 성장주의와 개발주의의 광풍 속에서 근본주의적 반대운동의 효용은 그것대로 소중하다. 그러나 좋은 이야기라도 논리가 그토록 허술해서는 긴 싸움에서 승리할 방도가 안 나오는 것이다.4

 

 

3. 분단체제 극복운동이라는 매개항

 

거듭 말하지만 나는 “비근대적 방식으로 방향전환하려는 급진적 노력”을 원칙적으로 지지한다. 근대의 극복이란 바로 그런 급진적 방향전환에 다름아니기도 하다. 따라서 김종철이 결론에서 강조하는 “〔자본주의 근대의 폭력적인〕 독주에 맞서서 ‘비근대적인’ 삶의 양식을 보존·확보하려는 세계 전역에 걸친 풀뿌리 저항운동”들은 당연히 근대극복운동의 소중한 자산이다. 다만 이들 저항운동이 현실 속에서 실행력과 지구력을 발휘하고 있다면 그것은 또한 ‘적응’의 사례들이기도 함을 지적하고자 한다. 이런 토를 단다면, “모든 노력을 다하여 그러한 저항운동에 합류”(90면)하자는 그의 다그침에 기꺼이 동조할 수 있다.5

물론 이중과제론을 주장해온 지식인들이 그러한 노력을 실제로 얼마나 했느냐는 것은 별개문제다. 나 자신은 녹색담론의 개발이나 녹색운동의 실행에 이바지가 너무 적었음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다. 다른 한편, 이중과제의 한반도적 실천에서 핵심고리의 몫을 하는 분단체제 극복문제에 대해 김종철의 녹색담론이 얼마나 진지한 고려를 보여주었는지도 생각해볼 일이다. 그의 이번 글에서 분단체제에 관해 일언반구가 없는 점도 심상치 않다. 물론 사람마다 주된 관심분야가 다르고 적절한 역할분담이라는 것도 있는 법이니까 평소에 그가 분단체제 논의에 적극 참여하지 않은 것을 탓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의 이중과제’라는 말이 추상적인 언술로는 그럴듯하게 들리는 개념이면서도 정작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한다는 것인지, 그 실천적인 상황을 생각하면, 지극히 모호한 것으로 되어버리는”점을 논박하고 나선 마당에는 좀 달라야 할 것 아닌가 싶다.

김종철이 통일문제에 비교적 냉담한 것은 기존의 통일담론이 자본주의 반대를 표방하는 경우에조차 자본주의적 근대의 기본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마디로, ‘강성대국’을 지향하는 북한과 ‘선진화’에 몰두하는 남한이 합쳐서 무슨 급진적 방향전환이 일어나겠느냐고 반문함직하다. 그런 생각이라면 백번 옳다. 하지만 아무렇게나 통일만 하자는 게 아니라 지금의 남북 어느 쪽보다 나은 더 민주적이고 환경친화적인 사회를 한반도에 건설하자는 분단체제 극복운동은 전혀 다른 성격이다. 물론 이런 한반도사회가 건설되더라도 그것이 생태적 전환을 온전히 이룩한 사회가 되기는 힘들다는 점에서 김종철이 보기에 너무나 미적지근한-아니, 자칫 생태전환을 먼 장래의 목표로 설정한 채 근대주의에 실질적으로 투항해버리는 위험한-노선으로 비칠 수 있다. 그러나 근대극복이라는 장기적 과제와 지금 당장 남한사회의 곳곳에서 가능한 수준의 민주주의 및 생태전환 작업이라는 단기적 과제를 연결해줄 ‘분단체제 극복’이라는 중기적 과제는 필수적인 매개항이다. 그런 의미에서 『녹색평론』 70호(2003년 5-6월호)에 기고한 「새만금 생태보존과 바다도시 논의」에서도 나는 단·중·장기 목표의 동시적 추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나는 자본축적의 논리에 얽매이지 않는 인간사회의 진정한 발전이 가능하다는 뜻에서 ‘개발’ 대신 ‘발전’이라는 표현을 일부러 썼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장기적인 목표다. 그리로 가기 위해서는 합리적 개발론자들과도 연대해서 새만금 갯벌을 최대한으로 지켜내는 단기적 작업도 수행해야 하며, 좀더 길게 ‘중기적’ 차원에서는, 비록 한반도 분단체제의 극복이 곧바로 자본주의 세계시장으로부터의 이탈을 가져오지는 못할지라도 이 과정에서 좀더 친환경적인 개발패러다임을 찾아야 한다고 믿는다. 그렇게 함으로써만 통일을 해도 분단체제 아래서보다 나은 사회를 이룩하는 통일이 될 것이며, 세계체제의 변혁에도 획기적인 이바지가 될 수 있을 것이다.(『한반도식 통일, 현재진행형』 216~17면)

 

그리고 바로 이런 중간매개항이 누락될 때 녹색담론의 추상화·관념화와 녹색운동의 파편화가 불가피해진다고 믿는 것이다.

예컨대 김종철의 이중과제론 비판에서는 자본주의 씨스템과 미래의 ‘농적 순환사회’에 대한 거대담론으로부터 갑작스레 당면한 남한현실의 문제로 내려와 권력층 및 지식인들의 농업경시 사상과 이명박 인수위원회의 절대농지 폐지 구상을 언급하는데(88면), 이런 대목에서라면 오늘날 한국의 온갖 반생명적 작태와 광적인 개발주의가 분단체제와 어떻게 연결된 것인지를 당연히 검토했어야 하지 않을까. 이런 문제의식은 매사가 분단 때문이며 통일만 되면 환경문제도 저절로 해결된다는 식의 ‘분단환원론’이 아니고, 생태계가 악화되건 말건 통일만 하면 된다는 통일지상주의도 아니다. 그러나 한국의 산업화가 유달리 야만적으로 진행된 것은, 구한말과 일제시대의 근대화가 타율적으로 이루어진 탓 말고도, 박정희의 공업화전략이 분단체제의 고착화와 남북대결을 전제로 수립된 탓임을 부인할 수 없다. 이제 박정희시대의 노골적인 국가개입이 사라진 대신 신자유주의의 세계적 대세를 업은 ‘민주화 이후 정부’의 방조 아래 그 위세가 전혀 줄지 않은 개발 광풍을 제어하기 위해서라도, 분단체제 극복과정이 제공하는 새로운 변수들을 정확히 인지하고 최대한으로 활용하여 새로운 한반도 경제와 그에 걸맞은 국가기구, 사회제도, 문화양식 들을 설계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4. 순환사회와 농업문명

 

김종철이 제안한 “성장논리와는 무관한 질적으로 전혀 다른 삶”이야말로 추상적인 언술로서나 그럴듯하게 들리는 개념이 아닐까라는 의문에 대한 답으로 그가 내놓는 것이 ‘농적(農的) 순환사회’다. 이때 그 개념의 실행설계까지 내놓으라는 것은 분명 무리다. 분단체제가 극복된 한반도라는 ‘중기적’성과에 대해서조차 개략적인 구상 이상을 제시하지 못하는-미리 제시할 수 없다고 믿는-나로서는 더욱이나 그런 무리한 요구를 할 까닭이 없다.

반면에 전제를 이루는 명제들의 타당성이나 논리전개의 책임성은 당연히 요구해야 한다.

‘농적 순환사회’ 개념과 관련해서는, 근대 이전의 농촌사회들이 유지하던 순환구조가 자본주의의 발달로 파괴되었다는 점, 인류문명의 존속을 위해서도 새로운 순환구조가 만들어져야 한다는 점, 그러자면 인간활동과 자연환경의 긴밀한 상호의존을 요구하는 농업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할 필요가 있다는 점 등은 논박하기 힘들다. 하지만 김종철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소농과 그 공동체를 기반으로 한 생태적 순환사회”(90면)를 제창한다. 그런데 이것이 농업만의 사회는 아니고 그동안의 공업 및 과학기술 발전의 성과를 깡그리 되물리자는 주장도 아니지만, 정작 김종철 자신은 ‘고도자본주의 사회’로부터 ‘소농공동체 기반의 사회’로의 이행과정에 대해 아무런 설명을 내놓지 않는다. ‘그것이 구체적인 현실에서 무엇을 어떻게 하자는 전략인지’ 도무지 막막하기만 한 것이다.

이렇게 되는 데에는 그가 동원하는 논거가 부정확하거나 부실한 탓도 적지 않다. 가령 그는 “소농 혹은 소생산자 연합체를 떠나서 ‘합리적인 농업’이 불가능하다는 맑스의 통찰”을 “무엇보다도 귀중한 지침”(87면)으로 제시하는데, 맑스가 일부의 오해와 달리 생태계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진 사상가였음을 짚어준 것은 환영할 일이다. 그러나 인용된 맑스의 구절들이-또는 부족한 대로 내가 맑스에 관해 알고 있는 바가-김종철의 소농공동체 구상을 밑받침해주는지는 의문이다. 김종철의 글 86면의 첫번째 인용문은 『자본론』 제1권 제4편 제15장 중 대규모 공업이 농업에 미치는 영향을 논한 절의 마지막 부분인데,6 자본주의적 농업에서의 기술적·물량적 진보가 “노동자를 착취할 뿐 아니라, 토양까지도 약탈하는 방식으로 진행”됨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인용문의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맑스는, “하지만 그러한 신진대사〔즉 인간과 토지 사이의 신진대사(Stoffwechsel, metabolism)〕의 단지 자연발생적으로 조성된 환경을 파괴함으로써 자본주의적 생산은 신진대사가 사회적 생산의 규제적인 법칙으로, 그리고 인류의 온전한 발전에 적합한 형태로 체계적으로 재건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Werke 23권 528면)라고 하여, 자본주의 농업의 파괴적인 결과조차 인류의 더욱 원만한 발전을 향한 변증법적 과정-그렇다고 ‘필연적인 역사법칙’은 아닌-의 일부로 인식한다는 점에서 김종철과는 다른 생각을 피력한 것이다.7

소농에 관한 직접적인 언급이 나오는 것은 두번째 인용문인데 이 대목에서는 원문의 왜곡된 사용마저 눈에 띈다. “합리적인 농업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일하는 소농이나 혹은 연합된 생산자들에 의한 관리이다”라고 인용하면서, 이를 “소농(小農) 혹은 소규모 생산자 연합의 중요성”(86면, 강조는 인용자)에 대한 주장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8 여기서 맑스 원전에 대한 훈고학적 논의를 벌이자는 건 아니다. 다만 ‘농적 순환사회’의 논거로서 맑스가 남다른 매력을 갖는다면 무엇보다도 그가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이 철저한 공업화를 거쳐나간 사회를 운영하는 날을 꿈꾸었기 때문일 터인데, 이를 ‘소농 혹은 소규모 생산자 연합’으로 이해하게 되면 정작 중요한 문제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만다. 예컨대 미래의 순환사회에서 합리적 공업(소위 IT산업을 포함해서)을 어떻게 추구하며 합리적 농업과 어떻게 배합할 것인가 하는 등의 난제가 맑스의 권위를 업으면서 슬그머니 소멸해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하루빨리 산업문명이 농업문명에 대한 진보를 나타낸다고 생각하는 근대주의적 발전사관의 덫에서 해방될 필요가 있다”(89면)는 김종철의 주장은 경청해 마땅하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가 ‘산업문명 대 농업문명’이라는 구분법 자체를 넘어서야 한다. 근대 즉 자본주의시대는 산업혁명 이전에 자본주의적 농업의 성립과 더불어 이미 시작되었다는 학설이 설득력이 크고, 산업혁명 이후의 근대만 하더라도 영국이 패권을 장악하던 시기의 ‘산업주의적 근대’(industrial modernity)가 미국의 패권 아래 ‘소비주의적 근대’(consumer modernity)로 이행했다는 주장이 나온 바 있다.9

산업주의 단계의 반체제운동을 대표하던 사회주의운동과 사회주의권 국가들이 실패한 것도 미국이 대표하는 새로운 단계에 이미 과거지사가 된 유형의 근대를 겨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소비주의적 근대의 최대 위협이 바로 지구환경 자체의 돌이킬 수 없는 파괴이기 때문에 환경운동이 이 단계의 핵심적 저항운동이 된다는 것이 테일러의 주장이다(「세계 헤게모니에 대한 반체제적 대응들」 141~42면 등 참조). 하지만 환경운동이 이런 역사적 소임을 감당하려면 스스로도 ‘근대’와 ‘산업사회’를 동일시하는 습성에서 벗어나야 한다. “일상언어에서나 이론적 담론에서나, ‘근대적’과 ‘산업적’은 마치 샴쌍둥이처럼 붙어다녔다. ‘산업사회’와 ‘근대사회’는 동의어로 간주되어온 것이다. 〔…〕 그리하여 다양한 이론가 사이의 중요한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한가지 유사성이 두드러졌다. 즉, 다양한 이론들이 모두 ‘산업적〓근대적인 것’과 ‘농업적〓전통적인 것’의 대립을 기초로 정립되었다.”(Modernities 19면) 그리고 사회주의자와 환경주의자들이 모두 이런 틀에서 자유롭지 못한 채 ‘산업사회’를 근대사회 전체의 성격으로 간주해왔다는 것이다(같은 책 86면).

“체제 내에서 갈수록 심화되는 물질적 불평등 및 갈수록 가까워지는 체제의 물질적 한계점, 이 둘에 동시에 맞서는 일”(테일러, 앞의 논문 151면)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수행할지는 김종철과 나 모두에게 절실한 관심사지만, 테일러의 견해를 여기서 자세히 검토할 겨를은 없다. 다만 그의 단행본 저서에 이르면 ‘환경론적 사회주의’에 대한 전망이 논문에서보다 한결 조심스러워지고 일상생활에서의 작은 친환경적 변화들의 누적에 더 큰 기대를 걸게 된다는 점에서(Modernities 131~32면 및 134면), 국가단위의 해결을 불신하는 김종철의 입장에 가까워지는 면이 있다. 하지만 나는 이 문제에서도 오늘의 한국인은 기존국가 차원의 ‘정치’냐 아니면 테일러가 울리히 벡(Ulrich Beck)을 원용하여 제시하는 ‘하위정치’(sub-politics)냐 하는 이분법의 덫에서 벗어나, 기존국가 해체전략이자 한결 개방적이며 주민친화적인 국가기구의 창안작업을 포함하는 분단체제 극복과정에서 전지구적 생태전환을 향한 중대한 진전과 뜻있는 학습체험을 얻어낼 수 있다고 믿는다.

 

 

5. ‘생명지속적 발전’에 관하여

 

분단체제 극복이 중기적 목표라면 장기목표는 세계체제의 변혁, 곧 현존 자본주의체제와 달리 ‘생명지속적 발전’을 허용하는 체제로의 이행이다. 이에 대해 김종철은 “‘생명지속’을 위한 발전이 실제 현실에서 어떻게 구체화될 수 있는 것인지는 여전히 의문”(83면)이라고 비판했는데, ‘생명지속적 발전’이란 구상의 구체화 전략뿐 아니라 개념 자체가 충분히 밝혀지지 못한 상태인 것이 사실이다. “‘생명지속적 발전’이라는 이념이 주류 환경론자들이 말하는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논리와 근본적으로 어떻게 다른지 모호하기는 마찬가지다”(같은 면의 직전 문장)라고 몰아친 것이 설혹 좀 야속하더라도, 개념을 제시만 해놓고 지속적으로 발전시키기를 게을리했으니 누구를 원망할 일은 아니다.

‘생명지속적 발전’을 애초에 내세운 취지는 두가지라 할 수 있다. 한편으로 주류 환경론자들의 ‘지속가능한 발전’이 자연을 ‘인간을 위한 환경’으로 설정한 채 그 지속에 초점을 두거나 심지어는 ‘성장의 지속’을 지상목표로 삼는 데 반해, 우리가 유지하고 북돋아야 할 것은 ‘생명’ 자체라는 일종의 생명사상을 표방한 것이었다. 동시에 많은 근본주의적 생태론자들이 ‘발전’ 자체를 거부하는 데 대한 이의제기이기도 했다. 그 취지를 집약한 것이 김종철도 인용한 다음 문장이다. “생명의 발전에는 일정한 물질적 여건이 필수적이며, 어떤 영역에서는 물질생활의 지속적 향상이 요구될 수도 있고 이런 필요에 부응할 적극적인 개발도 있어야 하는 것이다.”(『한반도식 통일, 현재진행형』 254면)

이 명제에 대해 정면으로 반발할 녹색운동가들이 많을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급진적 생태주의자들이 볼 때 ‘개발’은 물론 ‘발전’이나 ‘진보’만 해도 성장논리에 매몰된 발전주의, 근대화론의 ‘일직선적 진보’ 이데올로기와 다를 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10 김종철 자신은 나의 생각이 “옳은 것일지 모른다”(83면)고 일단 인정해줄 태세를 보인다. 그럼에도 결국은 (앞서 인용한 대로) 주류 환경론자들의 ‘지속가능한 발전’ 개념과 근본적으로 어떻게 다른지 되묻고 넘어가는 것을 볼 때, 서로간에 많은 대화가 필요함을 절실히 느끼게 된다. 오해를 제거할 것도 많고, 끝내 의견이 갈리는 지점을 정확히 짚을 필요도 있을 듯하다.

예컨대 내가 ‘새로운 안빈론(安貧論)’을 비판한 데 대해 그는 자신과 『녹색평론』이 강조해온 것은 ‘안빈’이 아닌 ‘공빈(共貧)’ 즉 “단순히 개인적 차원에서 물질적 결핍상태를 기꺼이 감내하는 생활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공생공락의 가난이었다”(80면)고 항변한다. 그러나 내가 ‘새로운’ 안빈론이라고 했을 때는 ‘공생공락의 가난’도 염두에 둔 것이며, 비판의 취지도 그것 자체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었다. 김종철과 마찬가지로 나도 미래의 바람직한 사회는 (비록 “어떤 영역에서는 물질생활의 지속적 향상이 요구될 수” 있을지라도) 자본주의시대의 과소비에 비하면 사람들이 훨씬 ‘고르게 가난한’생활에 자족하는 사회라고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안빈’ ‘공빈’ 또는 ‘청빈(淸貧)’이 다 좋은 것이며 그 정의를 둘러싼 논란에 너무 몰입할 일은 아니다.

문제는 그런 의미의 ‘공빈’을 현실에서 어떻게 이룩하느냐는 것이다. 지난날 선비들의 ‘안빈낙도(安貧樂道)’ 역시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는 아니었고 일정한 사회적·경제적 기반과 이런 가난을 공유하며 공락하는 유형·무형의 공동체가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했다. 오늘날 ‘공빈’의 사례로는 ‘무소유’를 표방하는 승가집단이나 ‘가난’을 서약한 천주교 수도자들이 그나마 방불할 터인데, 이들 또한 각자의 수행뿐 아니라 교단의 경제기반과 사회제도의 밑받침으로 ‘공생공락의 가난’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어느 토론마당에서 ‘새로운 안빈론’을 거론하면서 내가 주목한 것도 그런 현실적 기반의 확보 문제였다.

 

또 〔최원식 교수의〕 기조발제에서는 중세 안빈론을 언급했습니다만, 중세보다 더 올라가서 노자(老子)가 말하는 소국과민(小國寡民), 즉 나라는 작고 인구는 적은 것이 좋다는 사상과 통한다고 보는데, 저는 여기에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해볼 만한 바가 분명히 있다고 믿습니다. 다만 장래의 ‘작은 나라’는 어디까지나 전지구적 인류공동체의 일부이지 옛날식의 고립된 공동체와는 달라야 하고, ‘적은 수의 백성들’ 역시 세계시민으로서의 식견과 저항력을 갖춘 사람들이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이 가능하려면 그 전제조건으로서 첫째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달해야 하고, 둘째로는 과학기술과 인간의 관계가 지금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변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것은 단순히 과학기술과의 관계만이 아니라 사회체제의 변화 내지는 변혁을 의미하는 것이겠죠. (졸저 『통일시대 한국문학의 보람』, 창비 2006, 446면)

 

따라서 ‘공빈’을 근대극복의 목표로 삼는 경우에도 그것이 고도의 과학기술 발달을 전제하는 것인지 아닌지, 과학기술과 인간의 관계를 지금과는 전혀 다르게 만들어줄 어떤 사회체제를 구상하는지, 그리고 그러한 체제로의 변혁을 이룩할 무슨 중·장기 전략을 가졌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동시에 비록 깨끗하고 따뜻한 가난일지라도 그것을 배타적인 목표로 설정하는 것은 하나의 편향임을 지적해야겠다. 다음 대목은 직접적으로는 대중의 개발욕구 속에도 존중할 만한 그 무엇이 있음을 변호하기 위해 쓴 것이지만, 생명의 욕구 일반에 대해 내가 『녹색평론』과 의견을 달리함을 밝힌 대목이기도 하다.

 

깨끗하고 품위있는 가난이 인간의 어떤 깊은 욕구에 상응하듯이 장엄(莊嚴)과 영화(榮華)에 대한 욕망 또한 중요한 본능인 것이다. 생명의 욕구는 실로 다양한 것이며 이들을 포용하고 조화시키는 것이 참된 지혜이지 그중 어느 하나만을 절대시하는 것은 독단이며 자신의 이상을 남에게 강요하는 억압행위가 되기 십상이다. (『한반도식 통일, 현재진행형』 253~54면 각주 11)

 

미래의 ‘순환사회’ 역시 한결같이 가난을 나누는 사회라기보다 각자가 넉넉하면서도 검약과 절제를 터득한 사회, 그리고 사회 차원에서는 인간의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킬 물질적 부(富)를 축적하되 그 처분이 민주적으로 이루어지는 사회여야 할 것이다. 이는 현존 세계체제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제도들의 치밀한 마련을 뜻하는 동시에, 이에 수반하면서 그것을 가능케 해줄 개개인의 큰 공부를 전제하기도 한다. 민주주의〓민중자치의 주체가 될 민중의 자기훈련이 필요한 것이다. 가난해서 마지못해 아끼는 것도 일종의 지혜임에 틀림없으나, 풍요가 가능해진 사회에서도 최대한으로 아끼되 쓸 곳에는 아낌없이 쓰는 것이야말로 정말 소중한 지혜일 터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합당한 이름은 ‘공빈’보다는 ‘중용(中庸)’ 혹은 ‘중도(中道)’라는 친숙한 낱말이지 싶다. 이런 중용 내지 중도가 ‘공빈’ 또는 ‘농적 순환사회’보다 덜 근본적이고 변혁적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그리고 이것이 단지 현실주의적 고려 때문인 것도 아니다. 이와 관련해서, 맑스가 ‘유토피아주의자’들을 비판한 것은 그가 진정한 의미의 유토피아적 지향이 저들보다 부족해서라기보다 오히려 미래에 대한 고정된 철학적 구상을 실현하려는 시도가 “현존체제의 상태에 낯익은 발상과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해 새로운 발생에 대한 예감을 담지 못하기 때문”11이었다는 지적은 귀담아들을 만하다. 오늘의 한국에서 변혁적 중도주의를 실천하고 한반도의 분단체제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자본주의 근대에 대한 변혁세력으로서의 실력을 확보하고 구사하는 과정에서, ‘산업화 대 농업화’ 또는 ‘자본주의적 과소비 대 공생공락의 가난’이라는 틀에 얽매이지 않는 새로운 것들이 발생할 가능성을-아니, 녹색이 덜 선명한 담론과 실행을 포함하여 이미 발생하고 있는 새로운 것들을-좀더 골똘히 읽어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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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리고 당연한 이야기지만, “구체적인 과제를 놓고 근대에 적응하는 일과 근대극복의 비전을 실현해가는 일이 어떻게 결합될지는 우리가 사안별로 점검도 하고 새로운 방안도 개발”해야 한다고 덧붙였다(백낙청-조효제 대화 「87년체제의 극복과 변혁적 중도주의」, 『창작과비평』 2008년 봄호 125면).
  2. 이어지는 문장에서는 이중과제론 자체가 동일한 판정을 받는다. “이것은 마치 ‘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의 이중과제’라는 말이 추상적인 언술로는 그럴듯하게 들리는 개념이면서도 정작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한다는 것인지, 그 실천적인 상황을 생각하면, 지극히 모호한 것으로 되어버리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82면) 『녹색평론』 97호의 머리말에서도 그는 동일한 태도를 보여준 바 있다. “물론 근년에 와서 ‘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의 동시적 수행이라는 명제를 내걸고 활동해온 지식인 그룹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 명제가 단순히 그럴듯한 슬로건의 수준을 넘어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그다지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2007년 11-12월호 9~10면)
  3. 이남주는 근대에 대한 ‘추수’도 아니고 근대로부터의 (현재로서는 불가능한) ‘탈출’도 아닌 것을‘적응’으로 규정하면서, “실천전략을 설명하는 경우 적응과 극복을 구분하기보다는‘적응’이라는 개념을 이 양자의 의미를 모두 포함하는 뜻으로 사용하는 것이 혼란을 줄일 수 있다”(「전지구적 자본주의와 한반도 변혁」 19면 각주 9)고 주장한다. 그러나 적응과 극복이 이중의 단일과제임을 누누이 설명해도 김종철 식의 오해가 생기는 마당에, ‘적응’ 한마디만 썼을 때 그것이 ‘추수/탈출/적응’의 3분구도에 속하는 적응임을 헤아려줄 사람이 얼마나 될지 의문이다. 번거롭더라도 ‘적응과 극복의 이중과제’라는 표현을 계속 쓸 수밖에 없을 듯하다.
  4. 『녹색평론』 83호 머리말의 다음 발언은 더욱 심한 논리의 비약을 보여준다. “이른바 글로벌 경제의 바깥에서 생존할 수 있는 가능성은 지금으로서는 거의 없고, 따라서 우리는 싫건 좋건 설혹 그것이 제국주의적 지배의 논리라고 하더라도 현재의 세계화의 지배체제 속에서 활로를 모색하지 않을 수 없다는 주장은 아마도 논박하기 어려운 논리일 것이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과연 오늘날 우리가 보는 것과 같은 경제성장과 사회적 발전이 정말 발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가?”(2005년 7-8월호 2~3면)
  5. 굳이 그런 토를 다는 데서 짐작되듯이, “우리는 모든 노력을 다하여 그러한 저항운동에 합류하는 데서 희망의 길을 발견해내는 수밖에 없다”는 김종철의 마지막 문장이 전적으로 미더운 것은 아니다. ‘비근대’를 선명하게 표방한 저항운동이기만 하면 그 적응력에 대한 점검을 소홀히하고 선명성이 덜한 근대극복운동은 너무 쉽게 배제해버리는 자세가 엿보이는가 하면, “희망의 길을 발견해내는 수밖에 없다”는 구절 또한 희망을 체득한 넉넉한 자신감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6. Karl Marx/Friedrich Engels, Werke, Dietz Verlag Berlin 1987, 제23권 529~30면. 인용문의 정확한 출처를 확인해준 유재건(柳在建) 교수에게 감사한다. (Werke에서는 이 대목을 제4편 제13장으로, 국내의 김수행 역본과 Penguin판 영역본에서는 제15장으로 정리했다.)
  7. 막스 베버의 경우는 김종철과는 더욱 이질적인 사상가인데 ‘고도자본주의’의 폐해에 관한 베버의 발언 역시 편의적으로 원용되었다(76면). H. H. Gerth and C. Wright Mills, eds., From Max Weber: Essays in Sociology (Oxford University Press 1946)의 편자해설에서 길게 인용한(71~72면) 편지 내용만 보아도, 베버는 초기 자본주의야말로 ‘자유와 민주주의’를 제대로 꽃피운 동력으로 인식했고 자본주의가 고도화하면서 이들 근대적 가치가 위협받는 데 대해 깊은 우려를 표명하고 있는 것이다.
  8. 실제로 원문(Werke 제25권 131면)에서는 “합리적 농업은 자작소농의 손길이나, 아니면 연합된 생산자들에 의한 관리를 요한다”(die rationelle Agrikultur … entweder der Hand des selbst arbeitenden Kleinbauern oder der Kontrolle des assoziierten Produzenten bedarf)라고 하여, 미래사회의 생산자연합과 지난날의 소농을 분리시키고 있다. 김수행본에서는 이 대목이 “자기 노동에 의존하는 소농(小農: small farmer)을 필요로 하거나 결합생산자(結合生産者: associated producers)들에 의한 통제를 필요로 한다”고 번역했다(『자본론』 III〔상〕, 제1개역판, 비봉출판사 2004, 제1편 제6장, 139면). 역시 ‘생산자연합’과 ‘소농’의 분리를 명백히하고 있는 것이다.
  9. 피터 테일러 「세계 헤게모니에 대한 반체제적 대응들」, 『창작과비평』 1998년 봄호 참조(원문은 “Modernities and Movements: Antisystemic Reactions to World Hegemony,” Review 1997년 겨울호). 이후 저자는 이 논문의 수정 보완된 내용을 포함한 저서를 출간했다(Peter J. Taylor, Modernities: A Geohistorical Interpretation, Polity Press 1999). 테일러 논문의 요지는 졸저 『흔들리는 분단체제』(창작과비평사 1998) 제1장 「분단체제극복운동의 일상화를 위해」 중 ‘생태계문제와 민족민주운동’ 대목(41~44면)에서 소개한 바 있다.
  10. 더구나 보수진영의 ‘대한민국 선진화’ 구호를 받아서 ‘한반도 선진사회’를 제창하기까지 한다면(졸고 「남남갈등에서 한반도 선진사회로」, 『창작과비평』 2006년 겨울호) 혐의는 더욱 짙어질 법하다. 남과 북이 같이 선진화하기만 한다면 된다는 것인가라는 반문이 가능하다. 그러나 개인이든 사회든 국가든 좋은 쪽으로 계속 향상하려는 노력은 생명 자체의 욕구라 할 수 있으며, ‘국가’-그것도 분단국가-위주가 아니라 사람들이 모여사는 ‘사회’ 위주로 생각하면서 분단체제 극복을 통해 한반도에 더 나아진 사회를 건설하려는 기획은 ‘생명지속적 발전’을 현실에서 구체화하는 과정의 핵심적인 일부이다.
  11. 유재건 「맑스의 과학적 사회주의와 현실적 과학」, 『창작과비평』 1994년 가을호 264면. “맑스가 유토피아주의라 비난할 때는 그것이 현존체제의 관념에 얽매여 이상형태나 체계를 설정해서 실현하려 한다는 것을 겨냥한 것이었다.”(같은 글 26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