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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이론과 비평의 결합, 그 매력과 위험

신형철 평론집 『몰락의 에티카』

 

 

황정아 黃靜雅

이화여대 연구교수, 영문학. 주요 논문으로 「조너선 코의 사회소설과 대처시대 영국」, 번역한 책으로 『이런 사랑』 『도둑맞은 세계화』 등이 있다. jhwang612@hanmail.net

 

 

‘내가 먹는 것이 곧 나’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신형철(申亨澈)의 평론집을 읽으며 이 표현을 떠올린 이유는‘그가 읽는 것이 곧 그의 글’이라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느낌은 일차적으로 그의 평론이 대상으로 삼은 텍스트에 가까이 다가갔거나 잘 부합했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면이 있지만 평론가가 읽은 여러 이론의 존재감이 강하다는 점과 더 관련된다. 최근 문학평론들을 드문드문 넘겨본 바로는 그것들이 이론(특히 지젝Zizek을 경유한 라깡Lacan의 정신분석이론)에서 상당한 영감을 얻은 경우가 많은 듯한데, 『몰락의 에티카』(문학동네 2008) 역시 하나의 추세를 이룬 그와같은 이론 성향을 공유하는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소설론과 시론, 작품론을 그야말로‘집대성’하면서 또한 “시학-윤리학(po-ethica)”(203면) 담론이기도 한 이 묵직한 책에 경의를 표하는 것이 옳은 순서일 것이다. 뒤표지의 찬사에 살짝 기댄다면, 문장이면 문장, 논리면 논리, 열의면 열의, 어느 하나 빠지지 않는다는 데 선뜻 동의가 된다. 차라리 이 셋이 어울리며 서로를 상승시키는 것을 신형철 글의 강점으로 꼽는 편이 더 정확할 법하다. 가령, 자칫 공허하기 쉬운 선언이나 경구풍의 수사를 많이 쓰는 스타일인데도 오히려 논리적 밀도를 한껏 끌어올리는 효과를 낸다. 말을 뒤집으면 그가 구사하는 논리가 수사적 표현을 요구할 만큼 생기발랄한 직관과 긴밀히 공조한다는 얘기도 된다.

앞서‘먹는 것’의 비유를 끌어왔지만 실은 신형철 자신이 “소설은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먹는다. 이를테면 거울이 아니라 위장이다”(23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좋은 거울이 아닌‘좋은 위장’처럼 그의 평론 또한 먹은 이론을 잘 소화하여 비평으로 만들어낸다. 모르긴 해도 이론 성향을 뚜렷이 나타내면서 이만큼 논리적으로 매끄럽고 감성적으로 탄력있게 이론을‘구사’한 예가 많지는 않으리라 짐작된다. 대상에 따라 적절한 이론적 틀을 서두에서 마련하고 이를 발랄한 지적 수사들로 변주하고 이어붙이며 결론까지 깔끔하게 마무리하는 솜씨는 만만치 않은 이론적 상상력의 소산일 것이다. 특히 2부에서‘뉴웨이브’로 이름붙인 시들을 논한 글을 보면 그가 읽은 것, 곧 균열과 해체와 불가능을 강조한‘주체’와‘실재’의 이론들이 시에 나타난 새롭고 이질적이고 분열되고 혼란스러운 것에 대한 감각, 곧‘차이에 대한 감각’을 예리하게 다듬어주었음을 기꺼이 인정하게 된다.

‘몰락의 에티카’라는 제목을 달고 있으나 이 책에서 가장 부각되는 것은 실상‘새로움’혹은‘새로운 윤리’다. 이 새로움은 “씨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방호벽”으로서의 “선의 윤리학”과 달리 “씨스템을 다시 부팅하는 리쎗 버튼”으로서의 “진실의 윤리”(18면)로, 또 “특정 정치를 보족하는 윤리”(17~18면)가 아니라 “‘나’의 정체성에 대한 격렬한 질문과 전체로서의 형식에 대한 해방적 교란”이 촉발한 “‘다른 정치’를 향한 상상력”(234면)으로 표현된다. 새로움을 해명하는 과정에서 무엇이 낡은 것인지도 대략 규명되거니와 비평의 영역에서 이 낡음은 “작품이‘무엇을 말하는가’에 몰두하면서 소재와 전언을 2차 담론으로‘번역’하는 일이 비평이라고 생각”하여 “‘어떻게 말하는가’에 대해서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당당하게 무심”한 태도(711면)로 요약된다.

씨스템이든 현실이든 자아든 그런 것들의 완결성·총체성·정체성을 불신하고 그 경계 혹은 경계 너머를 대면해야 한다는 주장은 여전히 경계의 든든함을 확신하는 태도에 비해 어떤 급진성을 담고 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런 식의 낡음과 새로움의 대립구도는 그 자체로 어딘지 심하게 낡은 인상을 주는 것 또한 사실이다. 물론 이 평론집에는 전선이 꼭 이런 식으로 그어지는 게 아닐지 모른다는 의식도 있다. “‘새로워서 좋다’가 아니라‘좋은데 새롭다’”(272면)여야 한다거나 “주체의 분열 혹은 해체를‘수행’” 혹은‘유희’하는 것과 “분열된 혹은 해체된 주체의 세계로‘귀환’”하는 것이 다르다고 말할 때(275면), 신형철은 지금 새로움의 양상을 띠는 것들 사이에 (혹은 그것과 앞으로 올 더 새로운 것들 사이에) 어떤 중대한 변별이 필요함을 인정하는 듯하다. 하지만 이 또 하나의, 어쩌면 진정으로‘새로운’전선은 언급되기만 할 뿐 정작 그곳을 둘러싸고 싸움이 벌어지는지는 의문이다.

신형철의 비평을 강력히 떠받쳐주는 정신분석이론의 논리로 보더라도 새로움 즉 균열과 해체가, 새로움에 대해 말하는 것 곧 균열과 해체의 표상과 동일하지 않을 것이므로 변별의 요구는 한층 엄중해진다고 할 만하다. 그러나 때로 그 역시 (스스로 비판했던 비평적 태도와 유사하게)‘소재와 전언’차원의 균열과 해체 여부에 시선을 고정시킨다. 가령, 「만유인력의 소설학」과 「속지 않는 자가 방황한다」에서는 김영하, 강영숙, 박민규, 김훈의 소설들이 표면적으로 말하는 바를 다분히 고지식하게 수용하는가 하면, 박성원의 소설을 다룬 「아포리아의 제국」에서는 “(상징계로서의) 현실을 먹고 실재를 토해”(43면)낸다는 새로운 소설의 정의를 문자 그대로 반복 설명하는 데 그치는 인상이다. 서정성의 상투적 메커니즘을 넘어 “‘나’와 타자와 자연의 어떤‘실재’를 향해 나아가”는(202면) 새로운 시를 논할 때‘실재’의 이론적 특성을 명시하는 듯한 구절들을 다시 그‘실재’의 이름으로 평가하는 순환논리가 빚어지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다 보니 스스로 경계함에도 불구하고 라깡적‘실재’가 마치 하나의 현실적 실체처럼 다뤄지는 혼란이 생기는데, 이같은 아이러니, 즉 가장 힘주어 내세우는 이론적 주장을 본의 아니게 배반하는 사태는 이론과 비평의 거리가 너무 가까운 데서 발생하는 위험으로 보인다. 이론을 구현한 작품을 서둘러 평가할 것이 아니라 이론을 다 쏟았는데도 여전히 저만큼 있는 작품을 찾아나설 일이며, 이는 이론과의 일정한 거리를 전제해야 가능한 작업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비평가는 시집과 소설책을 읽는 사람이 아니라‘문학적인 것’을 발견해내고 그것을 질문으로 전환해내는 사람”이며 “설사 시집과 소설책이 더이상 제작되지 않고 팔리지 않는” 때가 오더라도 “기어코 어디서든‘시적인 것’과‘소설적인 것’을 찾아낼 것”(16면)이라는 신형철의 주장에, 시적인 것이 시를, 소설적인 것이 소설을, 문학적인 것이 문학을 대체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덧붙여야 할지 모른다.‘실재’의 환기를 수없이 반복한들 그것이‘현실세계’의 분석을 대신해주지는 않는 법이다. 『몰락의 에티카』에서 정작 “이 세계의 완강한 일각을 더불어 침몰”시킨다는‘몰락’의 이야기가 약한 것도 우연만은 아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