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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이 시대는 어떤 인문학을 요구하는가

 

묻혀버린 질문

‘윤리’에 관한 비평과 외국이론 수용의 문제

 

 

황정아 黃靜雅

문학평론가, 이화여대 영문과 연구교수. 역서로 『도둑맞은 세계화』 『쿠바의 헤밍웨이』 『이런 사랑』 『종속국가 일본』(공역) 등이 있음. jhwang612@hanmail.net

 

 

1

 

‘해체’ ‘윤리’그리고 더 최근에는 ‘정치’같은 단어를 매개로 외국이론들은 이제 국내 비평에서 부동의 자리를 차지한 인상이다. 이론가들의 배경도 다양해졌고 주목받다가 사라지는 주기도 빨라졌다. 이런 경험이 쌓이면서 유행하는 이론에 대해‘이 또한 지나가리라’하는 냉소도 생긴다. 냉소적 태도를 권장할 일은 아니지만 필경 지나가기 마련인 하나의 이론에 과도하게 몰입하는 경향에 대한 경고로 삼을 법은 하다. 특정 이론을 모르면 논의에 끼지 못하는 사태가 지적 나태함에서 비롯한 것일 수도 있지만 해당 논의 자체가 이론의 단순 반복인 탓도 있을 것이다. 지금쯤은 오가는 이론들을 차분하게 바라볼 내공이 쌓일 시점이 됐는지 모른다.

어쨌든 이즈음의 비평을 들추다 보면 각종 이론들의 향연처럼 보일 때가 많다. 여전히 강력한 정신분석의 영향으로 분열적 주체와 상징계의 결핍과 실재가 논의되는 사이에 한쪽에서는 사건, 진리, 절대적 타자, 벌거벗은 생명, 환대 같은 개념이 운위되고 또 어느새‘감각적인 것’혹은‘정치적인 것’하는 말들이 중심으로 진입하고 있다. 이런 복잡한 양상들이 보기보다 서로 더 깊이 연관되어 있으리란 추측도 해봄직한데, 그 유행의 흐름에서 한동안 우리 곁에 머무르는 뚜렷한 이론적 키워드 가운데 하나가‘윤리’이다.

‘윤리’는 지난 몇년간 비평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주제였지만 사실 우리에게는 그보다 더 오랜, 익숙한 단어이기도 하다. 새삼‘국민윤리’까지 거슬러가지 않아도, 돌이켜보면 어떤 의미에선 윤리(라는 말)의 과잉을 겪었다고 할 만하다. 흔히 이념의 시대로 지칭되는 1980년대도 많은 이들에게는 윤리적 강박의 시대로 경험되었으며, 그런 측면에 대한 반발로 90년대 이래 또다른 유행어인‘욕망’은 윤리 과잉의 억압에 대한 저항의 이름으로 스스로를 정당화하기도 했다. 이번에는 그에 대한 재반발인지 어떤지 더 따져볼 일이겠으나 최근의 비평담론에서‘윤리’는 때로‘절대적’이라거나‘무조건적’이라거나 하는, 겉보기에 무시무시하게 억압적인 형용구들을 당당히 동반하면서 한층 강화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윤리’와 관련해서는 한때 유행했던‘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성’이라는 말을 쓰고 싶게 만드는 묘한 이중적 태도가 있는 듯하다. 한편에서는 여전히 윤리의 억압성에 대한 반발이 있고, 다른 한편에선 유례없이 강력한 위상을 부여받은 윤리가 거론되는 것이다. 이런 모호한 공존 양상이‘윤리’이론의 범람을 더 흥미로운 상황으로 만들어주는지 모른다.

실상 우리 비평계에서‘윤리’의 출현은 해당 주제를 내세운 외국이론의 도입에 크게 영향받았음을 부인할 수 없다.‘윤리’의 유행 이전이든 이후든‘언제나 이미’외국이론들의 존재가 개입되어 있기 때문에 이 유행을 두고 자생적 필요 따로, 수입 이론의 영향 따로, 이렇게 구별하는 일은 거의 무의미할 것이다. 이념 혹은 거대담론의 종말과 해체, 욕망의 분석, 윤리와 정치담론의 재조명 같은 대체적인 수순이 외국 학계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일어나고 있다면 그 현상은 나날이 동질화되는 현실세계의 경험과 그 경험이 만들어내는 요구와 관련되어 있음이 분명하다.

이 글에서는‘윤리’와 관련하여 최근 많이 거론되는 두 외국 이론가, 알랭 바디우(Alain Badiou)와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이 국내 비평에서 어떻게 다루어지는가에 초점을 두고자 한다. 미리 밝혀두자면 왕성하게 활동중인 이들의 진면목이나 사상사적 중요성을 짚어낼 능력은 없고 국내 비평으로 수용된 부분을 중심으로 논의할 테지만, 이‘수용’만 하더라도 정색하고 접근하기가 애매한 면이 있다. 특정 이론가의 주장에 전반적으로 기댄 것이 분명한데도 인용임을 표시하지 않고 이제는 상식이 되었다는 투로 전제하거나, 이론의 문맥과 관련 없이 다분히 수사적인 차원에서 활용한 사례가 많은 것이다. 그같은 수용방식에도 문제제기를 할 필요가 있겠으나, 여기서는 이론가들을 본격적으로 인용하고 논평한 (따라서 좁은 의미의 문학비평이 아니라 인문학 담론 성격이 더 강한) 몇몇 글에 국한하겠다. 그것도 수용 사례에 대한 세세한 개별 점검보다는 이들 이론가의 중요한 주장인데도 국내 비평에서는 ‘묻혀버린’ 부분이 있다는 생각에서 출발하여 그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는 데 목적을 둔다.

 

 

2

 

실제로 어떤 암묵적 의도 혹은 어떤‘정치적 무의식’이 작용했는가를 떠나 윤리를 논한 비평들이 명시적으로 제시하는 배경이자 윤리가 시급히 요청되고 실현되어야 할 근거로 거론되는 개념은‘타자’이다. 이때‘타자’는 대개 이방인 혹은 외국인이라는 구체적인 이름과 짝지어지며,‘타자’가 어떤 성격이며 어떤 종류의 윤리를 요구하는가를 논하는 지점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론가가 바디우이다.

윤리론을 적극 개진하는 비평에서 바디우를 언급하는 것은 당연하면서도 아이러니한 면이 있다. 그가 『윤리학』(L’Éthique)의 저자이기는 하지만 서문에서 공공연히 표명하듯이 이 책은 윤리가 중심무대로 등장하게 된 현재의 “윤리로의 회귀”1 현상을 비판하는 일을 한 축으로 삼기 때문이다. 바디우는 이 현상을 더이상 사회혁명을 희망하지 못하고 집단적 해방을 위한 새로운 정치용어를 모색하지 못하는 지식인들의 무능함과 일정하게 연관시키는데, 그들의 무능함이 추상적이고 보수적이며 서구중심적인 자유주의 인권론과 그 근거인 보편적 인간 주체 같은 개념에 굴복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11~12면). 그런데 바디우의 비판에서 또 하나의 주된 표적은 “일종의 윤리적 급진주의”(27면)인 레비나스(E. Levinas)의 타자 혹은 차이의 윤리이다. 그가 보건대 타자의 윤리란 타자의 윤리적 우선성에 기반하고 이는 다시 근본적이고 절대적인 타자성을 담보로 요구하는데, 그같은 절대적 타자성은 결국 종교에 다름아니다. 바디우는 타자와 차이의 윤리가 현실에서는 결국‘나처럼 되어라, 그러면 너의 차이를 존중하겠다’로 귀결된다고 지적한다(34면). 그는 이런‘윤리 이데올로기’들이 (인간이니 권리니 타자니 하는) 추상적 범주에 기댈 뿐 어떤 적극적인 것에도 기반을 두지 못한 탓에 현존 질서를 추인하거나 심지어‘무’와 죽음을 열망하는 허무주의에 빠진다고 판단하면서, 윤리는 오로지 진리와 관련하여 존재할 수 있을 뿐이라 선언한다(38면).

여기서 바디우를 매개로 윤리론을 펼치는 비평을 한번 들여다보자. 김형중(金亨中)은 이방인-타자-윤리라는 구도를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글2에서 이방인이 “철학에 있어서나 예술에 있어서나 정치에 있어서나 사랑하고 결혼하는 방식에 있어서나 공히 기존의 패러다임 내에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을 제기”(28면)한다는 의미에서 “바디우적인 의미에서의 사건”(29면)이라고 정의하며 바디우를 들여온다. 그는 이런 의미의 이방인이라는 “완전히 다른 타자,‘절대적으로 외부에 있는’타자는‘무조건적인 환대’를 위한 전제조건”이며 이렇듯 “타자의 절대적 외부성이 보장될 때만 환대는 윤리가 된다”고 주장한다(37~38면).

이처럼 바디우에서 출발하여 절대적 타자로 오는 과정의 가장 큰 장애물이 바로 바디우 자신이‘타자의 윤리’를 누누이 비판한 사실임을 김형중도 무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는 “이 양자〔바디우의 진리의 윤리학과 레비나스/데리다의 환대의 윤리학-인용자〕의 대립은 보편과 차이의 대립처럼 보인다. 바디우는 유행과는 달리 차이라는 것, 그리고 그 차이의 담지체로서의 타자의 중요성을 인정하지 않는다”(33면)는 점을 일단 상기시킨다. 하지만 그같은‘대립’을 규명하는 절차로 나아가는 대신, 이내 “바디우의 진리의 윤리학이 최종적으로는 다시 환대의 윤리학으로 회귀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35면)는 진술이 뒤따른다. 그리하여 김형중은 바디우가 진리에 대해 “굳어진 의견들 사이에서 사건에 의해, 느닷없이 도래”한다고 말한 대목을 두고 그러니 진리라는 사건은 기존의 것들과 절대적‘차이’를 갖는다는 해석을 적용함으로써, “바디우에게 진리인 것이 레비나스와 데리다에게는 타자이자 이방인”이라고 결론 내린다.(36면)3

이쯤 되면‘진리가 절대적 차이를 갖는다’는 것과‘절대적 차이가 진리이다’는 진술 사이의 논리적 비약을 무릅쓰면서 왜 구태여 바디우를 동원했을까 의아해진다. 여기서 실질적으로 바디우가 기존의 것들을 뒤흔드는 타자의‘절대성’과 환대의‘무조건성’을 한층 강조하기 위한 수사 이상의 역할을 하는지 의문이다. 실상 바디우가 말하는‘사건으로서의 진리’또는‘진리의 사건성’이라는 개념은 바디우를 인용하는 비평에서 가장 흔하게 등장한다. 바디우는 사건으로서의 진리가 이미 확립되고 승인된 지식, 사실, 구조, 공리, 법 등의 영역과 대비되며 그 영역으로 결코 환원될 수 없는 잉여나 초과로서 예외적인 영역을 구성한다고 설명하는데, 이 과정에서 그가 구사하는 어구들은 급진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기에 더없이 적절하다.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존재방식을 결단하도록 강요”한다든지(『윤리학』 54면), “내재적 단절”이라든지(『윤리학』 56면), “새로운 시대를 열어” “가능성과 불가능성의 관계를 바꾼다”4든지, “주어진 상황의 내재성”이 결코 아니라든지, “모든 법규에 대해 순수 과잉”이라든지(SP 57면) 하는, 사건과 진리에 대한 설명들은 모두 어떤 근본적 차이와 새로움을 내세우는 수식어로 풍부하기 때문이다.

이런 수사적 활용 자체가 문제는 아니지만 어차피 수식의 대상인 개념어들을 동반하는 만큼 문맥에서 지나치게 멀리 끌고 와서 바디우가 강조하려 한 논지를 덮어버리거나 심지어 논지 자체와 화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사용하는 건 곤란한 일이다. 진리에 관한 바디우의 논의는 무엇보다‘보편주의’에 관한 모색이며 보편성이야말로 진리의 사건성을 이루는 핵심이므로 그의‘보편’은 김형중의 글에서처럼 간단히 지나칠 사안이 아니다. 기독교를 보편적 진리로 성립시킨 인물로 사도 바울을 평가하고 그를 통해 보편주의에 관한 논의를 펼치기에 앞서 바디우는 오늘날 어떤 사소하고 불명료한 기제라도 이를 뒷받침하는 인류 집단이 있으면 동등한 가치를 인정해주고 특히 그 집단이 희생자로 여겨질 때는 더더욱 인정해주는 문화주의 이데올로기 혹은 공동체주의/정체성주의 때문에 보편으로 향한 접근이 차단되었다는 비판(SP 6면)으로 시작한다. 그는 진리가 어떤 종류의 정체성이나 공동체에 의해서도 뒷받침되지 않을 뿐 아니라, 진리의‘단독성’(singularity)이란 바로 그것이 “즉각 보편화할 수 있다”(SP 11면)는 뜻이라고 강조한다. “진리와의 통약가능성을 통해 익명의 개인들은 언제나 인류 전체의 담지체로 변형”되며(SP 20면), 진리의 표지는 “모두를 위한 것이며 예외가 없다”(SP 76면)는 설명도 같은 맥락이다. 바디우에게는 실상 “진리만이 그 자체로서 차이에 무관심”하고 “모든 자에게 동일”(『윤리학』 38면)한 것이며, 사건으로서의 진리는 바로 이런 의미의‘보편성’이 기존의 것들에 대해 갖는 절대적 새로움을 뜻한다.

따라서 바디우의‘진리’혹은 진리에 대한 충실성을 내용으로 하는‘진리의 윤리학’을 차이나 타자, 혹은 타자로서의 이방인/외국인과 연결시키는 것은 단순히 “차이들이란 모든 진리가 내버리는 것”이고 “어떤 구체적 상황도‘타자의 인정’이라는 주제를 통해 해명될 수 없”으며(『윤리학』 37면), “대단히 어려운 진짜 문제는 오히려 동일성의 인정”(『윤리학』 35면)이라는 등의 명시적 발언과 어긋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이 갖는 또 한가지 중대한 문제는 그가 공들여 강조한 보편성 논의를 애써 외면하는 처사라는 사실이다.

 

 

3

 

보편성과 관련된 논지를 외면하는 경향은 바디우의 강조점이 무엇보다 보편주의에 있음을 인정하는 경우에도 크게 바뀌진 않는 듯하다. 가령, 서동욱(徐東煜)은 바디우(와 아감벤)이 사도 바울을 통해 보편주의를 천착한 점에 초점을 맞추어 “현금의 전세계적인 징후인 외국인에 대한 배타적 정치를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정치모델 확립을 위해” “바울을 다시 읽을 때가 온 것”이라며 공감을 표한다.5 그런데 이렇듯 바디우의 논의가 바울을 통한 보편주의 정립이었음을 지적하면서도 서동욱은 보편주의의 의미를 주로 (율)법의‘파괴’와‘철폐’라는 견지에서 해석해낸다. 그는 바디우에게 “율법은 늘 특수한, 즉 국지적인 규정에 불과”하고 “이런 지엽적 규정이 바로 차이(차별)를 만들어낸다”(262면)고 강조한 다음, “자국민에 대한 규정이 실질적으로 가지는 함의는 외국인에 대한 차별과 박해라는 것이다. 바디우가 바울의 보편주의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는 까닭이 바로 여기 있다”고 주장한다(262면). 따라서 “율법을 파괴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바디우의 보편주의의 핵심으로 제시되며(260면) 이는 그의 글에서 바디우에 대한 절의 제목을‘바디우: 율법에 맞서는 바울의 보편주의’라고 붙인 데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하지만 바디우에게서 보편주의적 진리와 법의 관계는 철폐라는 말로 요약될 만큼 그리 단순하지가 않다. 서동욱은‘(율)법’이 의미하는 바를 “개인의 행위지침을 알려주는 도덕법이나 외국인들을 토박이로부터 갈라내는 특정 규정 등등으로 읽을 수도 있다”(260면)고 설명하고 있으며 대체로 자국민을 규정/보호하면서 외국인을 차별/박해하는 법을 지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바디우에게서 법은 진리와의 관계에서 등장하며 진리와 대비되는 영역, 요컨대 기존의 정립된 지식, 차이, 집단, 구조 등과 같은 영역에 속한다. 바디우에게 이런 것들은 철폐나 폐지가 아니라 무엇보다 진리가 “내버리는 것”(『윤리학』 37면) 혹은 “내버려두어야 하는 것”(SP 103면), 진리에 의해 “중요하지 않은(indifferent)”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아무 가리키는 바(signification)가 없는 것”(SP 23면)이 되며, “보편성이 건설되기 위해 가로질러야 하고”(SP 98) “무심함(indifference)”으로 “초월되어야” 하는 것(SP 100면)이다.

이런 대목들은‘법의 철폐’같은 도식이 성립하기 어려움을 확인시키는 동시에 실제로 바디우가 이 두 층위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 상당히 고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진리와 법의 관계를 시원하게 해명해주기보다는 더욱 의심하고 고민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서동욱의 논의는 바디우를 더욱‘심문’해야 마땅할 것 같은 지점에서 납득하기 힘든 주장으로 이어진다. 그는 역시 사도 바울의 텍스트를 다룬 아감벤의 분석을 바디우와 연결시키고 아감벤의‘잔여로서의 주체’가 바디우의 보편적 주체와 유사하다고 지적한 다음, 돌연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보편적 주체의 성립과 더불어서만 토박이와 외국인을 가르는 모든 장치는 폐기 가능하게 된다. 그러나 이 주체가‘외국인에 대해서’특별한 위치(물론 사실적 위치가 아니라‘도식’이 되는 위치)를 점해야 된다는 점을 기술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주체는 어떻게 외국인과 토박이들의 이익을 가르는 율법에 대해 구체적인 저항을 할 수 있는가? 바로 외국인을‘환대’할 수 있는 위치, 즉 외국인보다 더 낮은 자리에 위치하는, (외국인과의)‘비대칭성’-그러므로‘평등’이 아닌-을 구현할 때 그럴 수 있지 않겠는가? (271면)

 

여기서‘환대’와‘낮은 위치’의 연결이 갖는 논리적 문제점 같은 것은 일단 접어두기로 하자. “보편성의 필연적 상관물이 평등”(SP 60면)이라는 발언을 포함하여 바디우가 차이, 타자, 정체성 등등에 관해 제시한 명시적인 주장들과 정면으로 어긋날뿐더러, 앞서 서동욱 자신이 요약한 바디우의 보편주의 및 보편적 주체 개념과도 들어맞지 않는 이런 주장이 느닷없이 등장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 글의 맥락에서는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레비나스로 가기 위한 포석이라는 설명 외에 달리 답을 구할 도리가 없다. 그리하여 결국 다시 “다양성을 오로지 평등에만 내맡겨 놓는다면, 그것은 잠재적 분쟁, 폭력, 억압의 위험에 원리상 노출될 수밖에 없지 않는가? 평등한 항들 사이의 대칭성은 늘 경쟁적이고 교환적이지 않는가? 타자에 대한 절대적 책임성(우리의 맥락에서 바꾸어 쓰자면,‘외국인에 대한 환대’)이 보편성의 핵심에 자리하고 있음을 인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방향으로 나아간다(273면). 여기서도 바디우의 보편주의는‘(타자/외국인을 차별하는) 율법 철폐’로 환원되는 절차를 거쳐 다시금 레비나스와 연결되는 것이다.

이렇듯 바디우의 인용이 어디서 출발하든 상당히 무리한 경로를 거쳐 결국‘차이(에 대한 인정)’과‘타자(에 대한 환대)’로 이어지는 것을 볼 때 우리의 비평담론이 이런 단어들에 대해 어떤‘정치적 정답’의 특권을 부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솟는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는 보편성, (혹은 보편성까지는 용인한다 치더라도 그에 동반되는) 동일성과 평등은 곧 전체주의적 억압에 이른다는 또다른‘정치적 정답’을 염두에 둔 것일까. 정작 바디우 자신은 바로 이런 식의 통념에 저항하며 말 많고 탈 많은 보편주의를 과감히 주장했다는 점에서 또다른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바디우는 보편적 사유가 낳은 동일성이 결국 나찌의 집단수용소로 귀결되는 것 아니냐는 비판에 대해 그 수용소에서는‘사소한’차이가 생사를 가르는 절대적 차이가 되었음을 상기시키며 오히려 동일성을 폐쇄한 결과가 나찌라고 주장한 바 있다(SP 109~110면). 물론 이와는 다른 각도에서‘전체주의’라는 비판이 제기될 가능성은 언제나 있겠지만 그 또한 바디우의 보편성 논의를 더 면밀히 검토한 다음의 일일 것이다.

 

 

4

 

앞에서 제기한‘진리와 법의 관계’에 대한 물음은 여전히 남아 있음을 기억하면서 이번에는‘윤리’와 관련하여 인용되는 또다른 이론가 아감벤으로 옮겨가보자. 앞에서 잠시 언급한 대로 아감벤 역시 바울에 대한 연구서를 통해 바울의 글을 “근본적인 메시아주의 텍스트의 지위로 회복”6시키며 이 메시아주의를 중심으로 새로운 주체와 새로운 정치를 모색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비평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기로는 그 전에 국내에 소개된 책에서 제시된‘호모 사케르’라는 개념일 것이다.7 바디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아감벤이 비평에 들어오는 경로는 김재희가 말하고 있듯이 주로 “국적, 인종, 종교, 언어, 문화, 계급, 성 등 기존의 패러다임으로는 동질적인 실체적 집단으로 구성할 수 없는, 새로운 차원의 정치적 소외와 고통 속에서 겨우 살아가는” “외국인들의 헐벗은 삶과 소외된 정치적 위상을 사유하는 데 적절한 개념적 도구를 제공한다”8는 맥락에서이다.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는‘생명정치’9로서의 근대정치를 분석한 푸꼬의 논의에서 출발하여, 생명정치적 신체를 생산하는 것이 근대에 국한하지 않은 주권권력의 본래적 활동임을 밝히고 따라서 근대의 생명정치를 가능하게 한 토대가 바로 이런 주권의 근원적 구조라고 설명한다. 여기서 주권의 구조는‘예외상태’의 창출에 근거를 두는데 이는 법질서의 효력을 정지시키는 예외를 만들어냄으로써 비로소 법질서가 효력을 발생하는 공간이 생겨난다는 의미이다. 아감벤이 중점을 두고 해명하는‘예외상태’는 주권자가 그 반대편 극단에 위치한‘벌거벗은 생명’인‘호모 사케르’를 추방령을 통해 법질서에서 배제하면서 동시에 여전히 권력의 대상으로 포섭하는 복잡한 작동방식을 지니는 데 그치지 않고, 애초에 추방령을 통해 비로소 정치권력의 대상으로서‘벌거벗은 생명’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더욱 문제적이다. 말하자면 예외도 규칙만큼, 아니 그보다 더욱 근본적으로 권력에 연루되어 있고, 따라서 내부와 외부의 구분이 자의적일 뿐 아니라 양자가 근본적으로 연계되어 있어서 이런 구조에서 벗어나기란 더욱 어려운 일이 된다. “주권이란 오히려 법이 삶을 참조하며 삶을 보류함으로써 삶을 자기 내부에 포함시키는 본래적인 구조”(『호모 사케르』 79면)라는 표현은 이런 점에서 실감을 확보하며, 아감벤의 사유에서 “문제는 누가 주권을, 정의를, 법을, 언어를, 진리를‘차지하느냐’가 아니다. 보다 근본적인 것은 역사와 주권을 성립시키는 저 분할선, 즉 생명-목소리를 인간의 질서 바깥으로 몰아내면서 인간의 질서(역사-주권-법-언어)를 성립시키는 분할선에 다름 아니다”고 말한 김항의 지적10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그러므로 주권적 구조에서 벗어나 “새로운 정치, 더이상 벌거벗은 생명의 예외화에 기반하지 않은 정치”(『호모 사케르』 50면)를 실현하기란‘인간의 질서’에서 벗어나는 일에 육박하는 어떤 근본적 변화에 다름 아니게 된다.

예외상태에 대한 아감벤의 분석을 곱씹어볼수록 특정 범주의 누군가에서‘호모 사케르’의 특징을 발견하는 일 자체가 그리 생산적인 행위가 되지 못함은 물론이고 어떤‘바깥’을 상상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으리라는 무거운 느낌이 남는다. 그런 점에서 아감벤이 “바로 이 주권의 구조가 또한 폭력적인 법의 지배로부터 삶이 벗어날 수 있는 독특한‘전회’의 자리임을 발견한다”거나(246면) 그가 예외상태에서 “전복의 가능성, 오히려 삶이 법으로 탈바꿈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246~47면)고 본 김재희의 설명은 아감벤이 새로운 정치를 위해 반드시 대면해야 할 역설적 지점을 표시한 대목들을‘대안’의 제시로 과잉해석한 인상이 짙다. 김재희는 아감벤이 벤야민의‘신의 폭력’과 아리스토텔레스의‘잠재태 개념’,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 주인공인 바틀비의‘거부’, 카프카의 「법 앞에서」에 등장하는 시골사람의‘무위’, 그리고 (하이데거와 낭시의)‘내버려짐’등등을 예외상태 전복의 가능성으로 제시했다고 보지만(244~47면), 아감벤은 “주권 원리를 넘어선 존재를 사유하려는, 드물지만 중요한 몇가지 시도”(『호모 사케르』 116면)라고 하면서도 여전히 “이러한 형태들은 주권의 아포리아를 극한으로 밀어붙이지만 주권자의 추방령으로부터는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은 상태”(『호모 사케르』 117면)라거나 “우리시대가 주권자의 추방령을 완전히 극복하고자 할 때 부딪히게 되는 어려움을 표현하고 있다”(『호모 사케르』 134면)는 단서를 붙인다. 심지어 (벤야민의‘진정한 예외상태’나 유대교 메시아주의를 논할 때처럼) 어떤‘전회’의 단초를 기술하는 듯 보이는 대목에서조차 적어도 『호모 사케르』에서는 소개 이상의 적극적 태도를 유보한다.

그러므로 김재희가 아감벤의‘새로운 삶과 정치의 가능성’을 적극 부각시킨 다음 순간, 아감벤이 “호모 사케르의 헐벗은 삶들이 제기하는 긴급한 호소에 대한 응답으로는 정치적 행위의 가능성을 지나치게 추상화하고 축소하는 것은 아닌가?”(248면)라고 물으며 데리다의‘환대’에서 해답을 구하는 것은 아감벤에 대한 정당한 대우가 아님은 물론이고 그에 대한 생산적 수용이라고 보기 어렵다.‘전회’의 근거와 논리를 이렇다하게 규명하지 않은 상태에서‘전회’의 언급 자체를 대안으로 판정한 독법의 귀결인 셈인데, 아감벤의 주안점이 가능성보다 넘어서야 할 지점을 보여준 데 있음을 감안할 때 오히려 데리다의‘환대’개념이 아감벤의‘예외상태’를 넘어섰는지 묻는 편이 더 적절한 방향인지 모른다.

이렇게 아감벤에서 서둘러 대안을 찾다보면 자칫 호모 사케르의 극단적 형상으로 제시된 나찌 수용소의‘무젤만’(Muselmann)11에서 가능성을 보는 발상도 제기될 수 있다. 아감벤이 무젤만, 곧 “굴욕감, 두려움 및 공포가 (…) 모든 의식과 모든 인격을 완전히 제거시킴으로써 결국 절대적인 무기력 상태에 이르게 된 사람”(『호모 사케르』 347면)이 “규칙〔법〕과 절대적으로 구분되지 않는 어떤 생명”으로서 “생명으로 자신을 완전히 변형시키려는 〔수용소의〕 법”을 위협한다고 한 대목(『호모 사케르』 348면)을 두고 무젤만을 저항의 전범으로 끌어내는 독해는 지젝이 지적하듯‘외설적인’(obscene) 주장이 아닐 수 없다.12 무젤만이 법을 위협한다면 그것은 철저히 법적 대상이 됨으로써 법이 더이상 할 일을 찾을 수 없게 만드는, 더이상‘인간’이기를 그침으로써 정치적 주체로 인정하는 일과 벌거벗은 생명을 만드는 일이 아무런 차이도 낳을 수 없게 만드는, 남김없는 자기파괴의 부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무젤만 대목과 관련하여 “본능적인 것이 모두 말소된 그러한 삶의 형식으로부터 해방을 말할 자신이 아직 우리에게는 없다”라고 한 차미령(車美怜)의 토로13는 자신감의 부족이 아니라 분별력의 증거로 받아들여져야 하며, 다른 형식의 해방을 더 적극적으로 모색할 이유가 되어야 한다.

 

 

5

 

아감벤이 좀더 적극적으로 가능성을 탐구하는 것은 아무래도 앞서 말한 사도 바울의 메시아주의 분석을 통해서이다. 서동욱은 바디우와 아감벤 “양자가 표면적으로 매우 대립적인 바울 해석을 보여주면서도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고 보고 그같은 공통점으로 “정체성을 지닌 민족들-외국인에게 배타적인-을 초월하는 보편적 주체”를 내세운 점과 이런 주체의 성립이 “율법과의 거리 두기에서 가능”하게 된 점을 든다(264~65면). 사실 아감벤은 바디우가 바울을 통해 “보편적 사유가 (…) 어떻게 동일성과 평등을 만들어내는가를 보여주려”(Time 51~52면) 했지만 바울에서 이런 식으로 “차이를 관용하거나 지나치는” “초월적”인 보편자는 없고, 잘리고 갈라져 스스로와 결코 일치할 수 없는, 다시 말해‘자기동일성’을 가질 수 없는 “잔여/나머지”(aremnant)가 있을 뿐(Time 52~53면)이라며 스스로를 바디우와 구분하고 있지만, 이‘잔여의 주체’가 바디우의 주체만큼‘정체성주의’에 대립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메시아주의적 주체와‘율법’의 관계가 서동욱이 주장하듯 (그에 따르면 바디우와 더불어) “아감벤에서 반복(즉결심판)을14 통한 토라〔율법〕의 완성은 사실 율법을‘위반’하고‘금지’하는 일이다”(269면)는 것으로 귀결되는지 살펴볼 차례이다.

아감벤은 바울이 신으로부터 받은 아브라함의‘약속’과 모세의‘법’을 대립시키고‘법’이‘약속’을 폐지할 수 없다고 한 대목에서 출발하여 이 문제에 접근한다. 그런데 이 약속(혹은 믿음)과 법의 대립은 간단치가 않아서 바울 스스로 이 대립을 무화시키고 법의 존엄을 재확인하는 태도를 보일 때도 많으며 나아가 “믿음의 법”(the law of faith)이라는 이율배반적 표현을 쓰기도 하는데, 아감벤은 “약속과 믿음에 대립하는 것은 법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의 규범적(normative) 측면”이라고 구분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Time 93~94면). 다시 말해 “법에는 구조적으로 규범을 초과하고 규범에 환원되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메시아의 법(‘믿음의 법’혹은‘사랑’)은 “법의 단순한 부정이 아니”고 “낡은 규정을 새로운 규정으로 대체하는 것을 뜻하지 않”으며, 바로 이런 “법의 규범적 상(figure)과 대립하는 법의 비규범적 상을 정립하는 것”을 말한다(Time 95면).

아감벤은 메시아적 힘이 법의 영역과 그 작동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은 “부정하거나 폐지하는 게 아니라 활동력을 없앰으로써(de-activating) 작동하지 않게(inoperative)” “집행할 수 없게”(inexecutable) 만드는 식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법을 “잠재성의 상태”(state of potentiality)로 복원하는 것은 곧 법을 “보존하고 완성”하는 일이며 이는 “파괴가 아니라 더 나은 상태를 향한 전진”이라고 본다. 그는 이렇듯‘작동하지 않는’법이 어떤 성격인지를 예의 그‘예외상태’와 비교하면서 부연한다. 예외상태에서 법이 갖는 근본 특징이 첫째, 내부/외부의 절대적 결정불가능(즉 예외의 형태로 외부를 포함함으로써 결국 법의 외부란 없고 법이 현실 그 자체와 일치됨), 둘째, 법의 준수와 위반 사이의 구별 불가능(즉 법 준수가 위반을 함축하거나 거꾸로 위반이 법의 집행으로 여겨질 수 있음), 셋째, 정식화 불가능(즉 규정이나 금지의 형태를 갖지 않음)으로 정리하고 여기에 메시아적 지평에 놓인 법의 상태를 대비시키는 것이다. 먼저, 메시아주의의‘잔여의 주체’는 딱히 법의 내부에도 외부에도‘있지 않기’때문에 법을 작동하지 않게 만드는 “암호”이며, 이렇듯‘법을 작동하지 않게 하는 것’의 다른 이름인‘믿음의 법’은 “‘법 없는 정의’(justice without law)의 현시”이자 “법 없이 법을 준수하기”(observing the law without law)이다. “법의 부정이 아니라 실현이자 완성”이라는 것, 그리고 메시아적인 법의 완성이 “예외상태의 지양”이 된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이다(Time 104~107면).

여기까지 오면 아감벤이 메시아주의와 법의 관계를 폐지나 위반으로 볼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한 사실은 분명해진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규범과 의무로서의 법이 작동될 필요가 없도록 그보다 더 상위의 차원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하여 문제의 소지 자체를 해소한다는 주장 같지만, 다른 한편으로 애초에 약속(메시아적인 것)과 법의 관계를 해명하다가 법 내부의 양면성(이 양면성은 다시‘법 이전’prelaw상태에서 가졌던 종교와 법의 통일성으로 부연되기도 한다)으로 이어지는 복잡한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그가 대립을 해결하기 위해 또다른 대립을 들여오고 한 층위에서 발생한 일을 수습하기 위해 또다른 층위를 설정하는 방식으로 끝없이 물러나기만 하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도 받는다. 이것으로 해명이 된 것일까.‘법 없이 법 준수하기’는‘법 준수하기’와 어떤 관계가 있으며,‘법 없는 정의’에서‘법적 정의’는 전제로서 실현되는 것일까.

 

 

6

 

바디우적‘보편주의’나 아감벤적‘메시아주의’와 법의 관계를 더 캐묻고자 하는 것은 그들의 논리를 세심하게 이해하려는 의도만은 아니다. 한국 비평에서 진리, 사건, 절대적 타자, 무조건적 환대, 법의 폐지, 새로운 정치 등 이들 이론가를 매개 삼아 등장하는 급진적 언사들이 얼마나 탄탄한 인식에 근거하는가를 점검하려는 것이며 탄탄한 인식의 부재가 새로움에 대한‘강박적’선언과 연결되어 있지 않은가 하는 문제제기를 겸한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절실한 이유는 이론을 통해‘윤리’의 영역으로 비약하거나 포복하는 과정에서 때로 너무 간단히 처리된, 하지만 한편에서 계속 발목을 붙잡는 엄연하고 실정적인‘법(으로 대표되는 권력기제)의 영역’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의문에 답을 구하기 위해서이다. 바디우와 아감벤의 논의에서 끌어낼 수 있는 최소한의 결론이 있다면 그들에게 이 문제가‘법에 어떻게 저항할 것인가’혹은‘법을 어떻게 폐지할 것인가’로 단순화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것은 또한 그들이 법의 영역에 일면적인 평가를 내리지 않았음을 말한다.

그렇더라도 바디우와 아감벤은 진리라는 사건 혹은 메시아의 도래라는 별개의 영역에서‘법’을 바라보는 방향을 취했다는 사실이 분명하고, 그 선택은‘법’의 영역에서 이러저러한 입장을 취하고 변화를 도모하는 일이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전제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방향에 선뜻 동참하기 전에 그들의 이야기를 더 세심히 살펴보아야 마땅하다는 것이 이 글의 주장이었거니와, 그와 더불어‘법’의 편에서 할 수 있는‘이야기의 다른 절반’에도 같은 대접을 해주는 일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이번에는‘법’에서 출발하여 진리와 메시아적인 것으로 향하는 경로를 점검하는 일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실상 바디우와 아감벤에서도‘이야기의 다른 절반’을 경청할 필요는 암시되고 있다. 바디우는‘반(反)유대주의’라는 비판에서 바울을 변호하며 바울이 “유대적 특수성(Jewish particularity)을 폐지”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담론과 관계맺어 새로운 주체가 될 수 있도록 “내적으로 그것에 활력을 불어넣는”(animating it internally) 임무를 스스로 부여했다고 말한다(SP 101면). 또 반(反)여성주의라는 비판과 관련해서는 바울이 “보편화하는 평등주의가 하나의 불평등한 규칙의 역전가능성을 통과하도록 만들”(making universalizing egalitarianism pass through the reversibility of an inegalitarian rule)었다는 표현을 사용한다(SP 104면). 특수한‘차이’에 대해 때로는‘활력을 불어넣고’또 때로는‘역전시키는’서로 다른 대응책을 언급한 것은 바디우가 말하는‘무심함’이 단순한 방치를 의미할 수 없고 (차이를 만드는)‘법’의 차원에서 작동시킬 적극적인 전술이 있어야 함을 방증한다. 또 비록 아감벤이 바울에게 법이란 “법〔자체〕의 실행이 불가능함을 보여주는 임무”를 수행하여 “메시아적인 것으로 인도하는‘교육자’(pedagogue)”였다고는 하지만(SP120면), 법과 믿음의 대립이 법 자체에‘내재’한다는 그의 논지로 보건대 그렇듯 내재된 양면성을 포착하기 위해서라도 법의 영역을 천착해야 한다는 얘기가 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여기서 바디우나 아감벤과는 전혀 다른 태도로 접근한 지젝을 참조하는 것도 한가지 방법일지 모른다.15 지젝 또한 레비나스가 제시하는 절대적 타자의 무조건적인 윤리적 명령이라든가 타자와의 비평형 관계를 문제삼고 이런 비평형의‘비밀’이 특정 집단의‘특권화’라고 비판한다(Neighbor 155면). 바디우를 겨냥한 듯 지젝은 레비나스가 고려하지 못한 것은 모든 인간의 근저에 깔린‘동일성’이 아니라 “근본적인, 비인간적 타자성”(radical, inhuman Otherness)(Neighbor 160면), 말하자면‘무젤만’으로 예시되는 타자성이자 “실재의 차원에 있는 타자”(the Other in his or her dimension of the Real)(Neighbor 162면)라고 지적한다. 그런 점에서 레비나스적인‘이웃의 얼굴’이란 그 자체로 이미‘괴물 같은 비인간적인 이웃’에 대한 방어이며 이렇듯 감당할 수 없는 이웃을 적절한 거리에 두려는 시도가 “율법의 궁극적 기능”(the ultimate function of the Law)이라는 것이다(Neighbor 162~63면).

더 정확한 비교를 위해서는,‘법’에 대한 상이한 평가를 함축한 지젝의 이런 발언이 법이 외적으로 허용하는 것, 다시 말해 기존의 질서가 암묵적으로 금지하지만 명시적으로 허용하는 것에 철저히 충실하게 따르는 일이야말로 가장 전복적이라는 주장16과 연결되고‘인권’같은 개념에도 결과적으로 더 적극적인 평가를 내리는17 과정을 세세히 따라가는 일이 필요하다. 또한 지젝에 대한 참조가 바디우에 대한 논의에서 언급했던‘보편주의’와‘평등’이라는‘오래된’주제와 다시금 씨름하고 이 주제를 새롭게 조명할 것을 요구하리라 생각하지만, 여기서는 양자의 입장 차이를 언급하는 데 그치겠다. 다만 이런 맥락에서 지젝을 살펴보는 것이 주로 라깡주의자의 면모만 강조하는 지젝의‘수용’방식을 다변화하는 효과도 있음을 지적하고 싶다.

지금까지 외국이론을 인용한 몇몇‘윤리’비평이 상당히 급진적인 수사를 동반하는 데 비해 치밀한 점검을 생략하고 해당 이론가 스스로 강조한 주장을 덮어버린 면이 있음을 살펴보았다. 그것들이 예전‘거대담론’의 문학적 변형인지 변명인지, 혹은 새로운 정치에 대한 모색인지 회피인지 우려와 기대가 엇갈리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우려가 아니라 기대에 부합하기 위해서는 우리 비평이 개념과 사유의 진화 가능성에 좀더 열려 있어야 하며, 이제‘상수(常數)’가 된 외국이론들을 더 면밀하게 들여다보고 때로 맞부딪치게 몰아세우기도 해야‘윤리’에 관해서건‘정치’에 관해서건 우리의 비평담론이 더 풍성해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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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알랭 바디우 『윤리학』, 이종영 옮김, 동문선 2001, 8면. 앞으로 이 책의 인용은 대체로 국역본에 근거하되 필요한 경우 영역본을 참고한다. 이하 괄호 안에 제목과 면수만 표기한다.
  2. 김형중 「사건으로서의 이방인:‘윤리’에 관한 단상들」, 『문학들』 2008년 겨울호.
  3. 김형중의 글 후반부는 어떤 것이 되었든 윤리 담론을 문학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으며 문학은 “이방인이라는 사건에 대해 문학적인 방식으로 충실해야 한다”(50면)는 주장을 담고 있다. 여기서는 바디우와 관련된 논의에 한정한다.
  4. Alan Badiou Saint Paul: The Foundation of Universalism, trans. Ray Brassier (Stanford: Stanford UP 2003) 45면. 국역본으로 『사도 바울:‘제국’에 맞서는 보편주의 윤리를 찾아서』(새물결 2008)이 있으나 미처 참조하지 못했다. 이 책에서의 인용은 영역본에 근거하며 제목은 SP로 약칭하고 면수를 표기한다.
  5. 서동욱 「사도 바울, 메시아, 외국인: 익명적 주체 또는 보편주의」, 『세계의문학』 2008년 가을호 260면. 뒤에서 다룰 김재희의 글과 더불어‘외국인이란 무엇인가?’라는 기획에 속한 글이다.
  6. Giorgio Agamben, The Time That Remains: A Commentary on the Letter to the Romans, trans. Patricia Dailey (Stanford: Stanford UP 2005) 1면. 국역본 『남겨진 시간: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 관한 강의』(코나투스 2008)는 거의 참조하지 못했다. 이 책에서의 인용은 영역본에 근거하며 제목은 Time으로 약칭하고 면수를 표기한다.
  7. 조르조 아감벤 『호모 사케르: 주권 권력과 벌거벗은 생명』, 박진우 옮김, 새물결 2008.
  8. 김재희 「외국인, 새로운 정치적 대상: 아감벤과 데리다를 중심으로」, 『세계의문학』 2008년 가을호 239~40면.
  9. ‘생체정치’혹은‘생명체정치’로 옮길 때 더 의미가 분명해지는‘생명정치’(biopolitics) 개념은 개인이 무엇보다 생물학적인 신체로서 권력과 정치기술의 지배대상이 되는 사태를 뜻한다. 이와 관련하여‘벌거벗은 생명’(bare life) 또한 다른 모든 것이 박탈되고 그저‘맨 목숨’으로 남은 존재를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호모 사케르』 국역본의 번역에 따른다.
  10. 김항 「독재와 우울,‘마지막 인간’을 위한 결정 혹은 각성: 칼 슈미트와 발터 벤야민의 1848년」, 『자음과모음』 2008년 겨울호 376~77면.
  11. 원래 무슬림을 뜻하는 독일어로, 수용소에 갇힌 유대인들 중 곧 죽음을 맞을 이들을 가리키는 은어로 사용되었다.
  12. Slavoj Zizek, “Neighbors and Other Monsters: A Plea for Ethical Violence,” Slavoj Zizek, Erick L. Santner and Kenneth Reinhad, The Neighbor: Three Inquiries in Political Theology (Chicago: Univ. of Chicago Press 2005) 160면(이하 Neighbor). 지젝은 희생자와 동일시하는 상징적 제스처, 즉‘우리 모두는 무젤만이다’는 식의 동일시가 불가능하다는 점이야말로‘무젤만’이 제기하는 중요한 문제라고 지적한다.
  13. 차미령 「소설과 정치:‘소설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단상」, 『문학동네』 2009년 봄호 361면. 황정은의 작품 「오뚝이와 지빠귀」에서 “오뚝이와 보통인 상태를 오가”다가 마침내 완전히 오뚝이가 된 인물을 어떻게 볼 것인가 논하는 대목에서‘무젤만’으로 이어진다.
  14. 아감벤에게서 반복(recapitulation, 때로 요약반복summary recapitulation으로 표현됨)은 물론 동일한 형태의 단순 반복이 아니라 요점이나 핵심을 반복하는 것을 말하고, “이를 통해 과거의 사건들이 진정한 의미를 획득하고 그럼으로써 구원받을 수 있게 된다”(Time 77면). 서동욱이‘즉결심판’으로 옮기는‘summary judgment’도‘즉결심판’이라는 단어가 자칫 연상시킬 수 있는 살벌한 의미가 아니라 바로 이같은 반복과 연관된다.‘즉결심판’이라는 “이 결정적 순간에 우리는 무엇보다 과거와의 빚을 청산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아감벤은 말한다(Time 78면).
  15. 서동욱의 글에서도 각주를 통해 지젝이 언급된다(263면 주8번). 그는 “요컨대 바디우의 바울에서 가장 근본적으로 대립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법’과‘사랑’이다”고 정리하면서 지젝이 “법과 사랑의 문제와 관련하여서는 바디우와 대립적”이고 “지젝의 입장은 근본적으로 후자〔‘법을 경험의 최종 지반’으로 보는 시각〕의 견지에서 사랑을 법에 매개시키는 것”이었다고 소개한다. 그러나 본문에서 이와 같은 지젝의 견해를 중요한 입장으로 제시하거나 참조하지는 않는다.
  16. 이 점에 관해서는 Slavoj Zizek, The Fragile Absolute or, why is the Christian legacy worth fighting for? (New York: Verso 2000) 147~50면 참조.
  17. 슬라보예 지젝 「반인권론」, 『창작과비평』 2006년 여름호 402~404면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