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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김금희

김금희 金錦姬

1979년 부산 출생. 200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함. novelist79@hanmail.net

 

 

아이들

 

 

1

 

정육점 주인이 엄마에게 건넨 것은 물푸레나무로 만든 코뚜레였다. 나는 열살이었고 올림픽 중계가 한창이던 1988년 9월이었으므로 코뚜레를 월계관처럼 써보고 싶었다. 하지만 엄마는 머리에 닿을 듯 말 듯만 대주고는 코뚜레가 이사갈 집을 지킬 거라고 말했다. “500킬로그램이나 나가는 황소 기운을 이긴 코뚜레야.” 검정 비닐 앞치마에 손을 쓱 닦으며 정육점 주인이 으스댔다. 그러면 황소와 코뚜레도 선수들처럼 시합을 벌였냐고 물었지만 정육점 주인은 붉은 고기를 네모난 칼로 발라낼 뿐 대답하지 않았다.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엄마는 이제 아파트 아이들처럼 굴어야 한다고 말했다. 아파트 아이들은 엄마가 일을 나가도 울지 않고 낯선 이에게 문 열어주지 않으며 밥도 혼자 찾아먹고 경비 아저씨에게 인사도 잘한다. “엄마도 아파트 아이였어?” “아니.” 일곱 남매가 득실대던 성주 시골집은 서까래가 훤히 드러난 초가였고 닫을 대문도 없는 집이었다 했다. “그러니 너는 행운아야.” 엄마가 속삭였고 그러자 동네친구와 헤어지는 일이 더이상 두렵지 않았다.

이삿날 엄마는 트럭에 올라탄 나를 안았고 아버지는 줄을 바짝 죄어 흔들흔들하는 밥상을 잡았다. 해바라기가 우르르 몰려 자라는 공터를 지나, 덩치 큰 개가 묶인 통장 아저씨네 집앞을 거쳐 트럭은 도로로 나왔다. 커브를 돌 때 종이인형 상자가 떨어졌고 발딱 일어선 나를 엄마가 도로 앉혔다. 옷도 입지 않은 세라와 나나 같은 계집애들이 옛 동네 쪽으로 바람 따라 날려갔다. “아빠 공장이다.” 엄마가 가리키는 곳에서는 밑동 잘린 나무들이 기중기에 매달려 어디론가 옮겨지고 있었다. “코뚜레 모양이네!” 원목 단면에는 붉고 파란 스프레이로 가, 아, A같은 약자들이 암호처럼 써 있었고 그중‘l’도 있었다. 코뚜레가 아니라 알파벳‘엘’이라고 설명한 사람은 아버지였다. 엄마는 늬 아빠는 만물박사야, 했다.

아버지는 나무들이 내가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멀리 있는 열대숲에서 잘려 나온다고 했다. 저 약자들은 나무를 베거나 수출하거나 수입하거나 사들인 회사들의 이름이다. 적나왕, 황나왕, 티크, 에보니 같은 나무 이름들은 쓰지 않는다고 했다. “중요한 건 나무가 아니라 공장에서 만드는 완성품들이야.” 같은 나무라도 어떤 과정을 거치느냐에 따라 판잣집 지붕도 되고 고급주택 기둥도 되고 장롱이나 소파도 된다. 아버지 말투가 어쩐지 비장해서 더 묻지 않았다. 그러다‘양’‘미’가 수두룩한 내 통지표 이야기로 곧 넘어갈 것 같았다.

목재단지를 지나 잠시 멈춘 트럭 운전사는 아버지에게 길을 묻고는‘콜롬비아 공원’쪽으로 달렸다. 넓적한 느티나무 잎 사이로 십자검을 든 군인상이 보였다. 공원을 지나니 비포장도로였고 트럭은 비탈길을 올랐다. 그리고 마침내 나타난‘새가정 아파트’는 골목도 도로도 가게도 가로수도 없이 불시착한 유에프오처럼 산비탈에 처박혀 있었다. 올라가며 세어본 계단은 층마다 열네개였고 우리 집까지는 전부 일흔개였다. “대체 집은 어디야?” 엄마가 철문만 덩그런 그곳이 집이라고 해서 놀랐다. 하지만 문 뒤로 현관, 방, 부엌, 화장실이 나타났고 나는 아파트가 과자상자나 성냥갑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그날 밤, 이불 속을 살그머니 빠져나가 맞은편 아파트 동을 지켜봤다. 하나, 둘, 셋, 넷, 불 켜진 집을 세는 동안 이가 듬성듬성하던 집주인 할아버지가 생각났다. 이제 마당을 어질러놓는다고 혼나는 일은 없겠다. 그사이 몇집이 불을 껐고 열둘까지 셌던 나는 다시 하나, 둘, 셋, 넷, 불 켜진 집에 눈도장을 찍었다. 전기세를 낼 때마다 텔레비전이 두 대라고 엄마가 반지하 순영이네를 흉보는 일도 없겠다. 아까 분명히 새카맣던 부근이 또 환해져서 한숨이 나왔다. 저들의 밤은 왜 자꾸 꺼졌다 켜졌다 하는 걸까? 그때 뭐가 되느냐가 중요하다는 아버지 말이 생각났고 저렇듯 깜박이다 아파트는 언젠가 별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2

 

나는 아파트단지에 새로 문 연 국민학교로 전학했다. 대부분 이사온 아이들이었기 때문에 텃세 같은 건 없었다. 대신 아이들은 마무리 공사로 하루 종일 시멘트가루가 날아드는 교실에 시무룩하고 불안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철마산 푸른 솔의 정기를 받아,라는 교가를 제일 먼저 배웠지만 불도저며 포클레인이 달라붙어 붉은 흙을 파내는 그 산에서는 어림없을 것 같았다. 아파트 동 열채 뒤에 11동과 12동을 짓고‘황해’‘뉴서울’‘하나’같은 이름의 아파트들도 머지않아 들어설 거라고 했다. 아파트들이 철마산을 죽 둘러싸고 몰아넣는 모양새였다.

엄마는 문제집 회사에 취직해 월간 학습지를 팔고 집집마다 배달하기 시작했다. 아파트로 오기 전에도 부업거리를 놓은 적 없던 엄마였으니 당연했다. 나뭇조각에 붉은 펠트를 붙여 피아노 부품을 만들거나 스웨터에 꽃무늬를 수놓는 엄마 옆에서 나는 자랐다. 아버지는 열쇠를 잘 간수해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남들 눈에 띄지 않게 윗옷 안으로 밀어넣는 바람에 심장 부근에는 언제나 차고 단단한 열쇠가 있었다. 기대와 달리 나는 바람직한 아파트 아이가 못 됐다. 괴괴한 적막에 휩싸인 아파트가 무서워 울었고 벨 누르는 교회 아줌마들에게 문을 벌컥 열었으며 빵이나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잔소리꾼 경비 아저씨를 미워했다. 열쇠를 몇번이나 잃어버려 아버지에게 혼이 났다.

 

왠지 아파트 놀이터가 시시했던 나는 건설사 부도로 공사가 멈춘 11동과 12동 건설현장에서 놀았다. 인형으로 삼은 기다란 볼트들을 드럼통에 재우고 나무부스러기를 먹였다. 플라스틱 통에서 흘러나오는 약품으로 칸을 그려 사방치기를 하다가 성공하면, 못이 박혀 있는 건설목에다 철사를 맸다. 어느날 공사장으로 가보니 살진 볼이 축 늘어진 남자애가 자전거 폐타이어를 주워다 굴리고 있었다. 끝이 디귿자인 철근으로 밀고 있어서 굴렁쇠 소년을 흉내내고 있다는 걸 알았다. 다른 애와 공사장을 나누고 싶지 않았지만 쫓아낼 방법도 없었다.

그 다음날도 남자애는 비닐을 여러겹 깔아 만든 웅덩이 앞에서 스티로폼 배를 만들고 있었다. 그건 미처 생각 못했던 놀이라서 쭈뼛쭈뼛 옆으로 다가갔다. 스티로폼 선체에 나무젓가락 돛대를 세운 다음 시멘트 포대로 돛을 달았다. 하지만 배는 자꾸 기우뚱했다. 그럼 그렇지, 흥미가 떨어질 즈음 등 뒤에서 어떤 여자애가 나타나더니 돛대를 배 밑까지 깊숙이 꽂으라고 했다. 여자애는 이목구비가 뚜렷해 예쁘장했지만 심한 짝눈이었고 긴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배배 꼬았다. 남자애가 어리둥절해하자 여자애는 이리 내, 하고는 스티로폼 정중앙에 나무젓가락을 쑥 박아넣었다. 그리고 연필을 꺼내 누런 돛에다 21세기호,라고 적었다. 배는 꼿꼿이 떠 있었고 남자애와 나는 와아, 환호했다.

우리 동 1층에 사는 남자애는 은욱, 3동이 집인 여자애는 주홍이었다. 그때부터 우리는 공사장을 아지트 삼아 고무호스로 줄넘기를 하거나‘후레시맨’이 되어 노끈으로 레이저빔을 쏘았다. 그러다 지치면 콘크리트 외벽 아래 앉아 붉은 흙이 조금씩 떨어지는 민둥산을 바라봤다. 아파트로 가로막혀 바람도 없이 조용했고 볕은 따뜻했다. 왠지 쓸쓸해지면 나는 여긴 외계성이고 우린 영영 집으로 못 돌아갈 거라고 눈물을 짰다. 주홍은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말라 했고 은욱은 정말 신나겠다고 소리쳤다.

물론 우리 사이가 항상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특별한 이유 없이 다투고 부러 모른 척하거나 딴 친구들과 어울리기도 했다. 하지만 허공으로 날았다가 손으로 착 감기는 요요처럼 우리는 아파트 어딘가에서 다시 만났다. 머리를 바글바글 볶은 우리 학교‘일진’이 은욱의 폐타이어를 빼앗아 웅덩이에 수장시킨 것 말고는 별다른 사건 없는 하루하루였다.

 

3

 

아버지가 우리 집 텔레비전만한 원목 토막을 공장에서 가져온 건 1989년 봄이었다. 둥근 나이테가 회오리쳤고 말끔히 간 겉면은 사그락사그락했다. 끌과 칼 그리고 녹슨 톱으로 아버지는 원목을 파고 켜고 쪼갰는데 주로 9시 뉴스를 챙겨본 다음이었다. 엄마는 그 옆에서 문제집 회사 로고가 새겨진 액자와 시계, 책받침 등을 놓고 선물로 환심 사야 할 집들을 골랐다.‘이달의 판매왕’이 되면 보너스가 나온다고 했다. 텅 빈 아파트가 싫었던 나는 방바닥에 엎드려 발을 까불면서 회사는 언제 그만둘 거냐 물었다. 베란다‘샷시값’벌 때까지, 식탁을 살 때까지, 너 사줄 피아노 값을 모을 때까지,라고 엄마는 말을 바꿨다. 그러면 난 입이 퉁퉁 부어 아파트 별로다, 하다가 엄마가 들여다보는 장부를 확 덮어버렸다.

원목이 어떤 형상을 띠기 시작한 건 6월 즈음이었다. 가운데가 옴폭 파여 아버지 말처럼 받침대 같았지만 오른편으로 난 계단 다섯개가 이상했다. 아버지가 작업을 마치고 신문지로 덮어놓으면 나는 낮 동안 그것을 들추고 골똘히 감상했다. 두 발을 넣었지만 앉을 수는 없었고 발바닥이 따끔따끔했다. 식탁 의자를 밟고 올라가 절대 만지지 말라던 코뚜레를 내려서 넣어보았다. 가운데 쏙 들어갔고 옅고 진한 나무색이 잘 어울렸지만 같은 이유에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모두 나무에서 났지만 하나는 어디다 쓸지 알 수 없는 받침대고, 다른 하나는 벽에 걸린 코뚜레다. 그런 건 누가 결정하는 걸까?

그날 퇴근한 아버지가 등 돌리고 앉아 신문지를 걷었을 때, 엄마가 힐끔 보며 그거 집이야? 물었다. 아버지는 아니라고 했지만 엄마는 퉁퉁 부은 발을 주무르며 부산집에 옥상으로 가는 계단이 있었는데, 했다. 부산 토박이였던 아버지는 1980년까지 그곳에서 살았고 당시‘수출왕’이었던 거대한 합판공장에 다녔다고 했다. 그 공장에서 엄마는 작업복을 맞춤하게 입고 게으른 공원들을 닦달하는 아버지에게 반했다. 하지만 내가 태어나자마자 대통령이 총 맞아 죽고 머리가 시원한 군인이 나타나 새 대통령이 되었으며 회사를 접수한 뒤 공중분해해버렸다. 하는 수 없이 아버지는 엄마와 날 데리고 밑동 잘린 나무들을 찾아 인천으로 흘러들었다.

“아빠도 아파트 아이였어?” “아니.” 시시하다고 하자 아버지는 그 집 앞에는 바다가 있어서 수영을 하거나 조개를 잡으며 놀았다고 했다. 바다라는 말을 들은 나는 눈앞이 환히 열리면서 굉장한데, 했다. 수면 위로 뛰어오르는 돌고래떼, 날카로운 이빨로 사냥하는 상어, 해골 깃발이 너울대는 해적선 따위가 생각났다. “그러니까 바닷가 아이였네.” 아버지는 나무밥을 손으로 그러모으면서 너도 바닷가 아이야, 했다. 여기서 버스로 다섯 정거장을 가면 목재단지가 있고 그 뒤로 항구와 바다가 있다고 했다. “거짓말!” “진짜라니깐.”

아버지는 목재단지 나무들이 그 항구를 거친다고 했다. 만톤이 넘는 커다란 배가 나무를 실어 오면 뗏목처럼 묶어서 소형선이 끌고 온다. 나는 나무를 바닷물에 그냥 띄워서 가져온다는 게 이상했다. “그러면 물에 젖잖아.” 아버지는 나무들마다 함수율이라는 것이 있어서 어느정도 물을 흡수하면 더는 젖지 않는다고 했다. 나무들마다 품을 수 있는 수분의 양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다. “너도 어느정도 밥을 먹으면 숟가락을 놓잖아, 그것과 같은 이치지.” 아버지는 바닷가를 북항,이라 불렀고 나는 그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남쪽 바다와 달리 우리 동네에서는 수영을 할 수 없다고 했다.

 

공사장에는 다시 인부들이 돌아왔고 우리는 하는 수 없이 아파트 옥상을 아지트 삼았다. 3동 옥상에 올라갔다가 담배를 물고 시시덕대는 파마머리 일진한테 놀라서 7동 옥상으로 옮겼다. 환풍기가 파르르 돌아가는 옥상에서는 아파트 사람들이 내려다 보였고 목재단지 굴뚝과 슬레이트 지붕도 가늠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북항은 보이지 않았다.

북항만큼이나 날 매혹시킨 것은 주홍이 말한 21세기호였다. 주홍은 서울에서 살다가 새엄마가 들어오는 바람에 인천 할머니네 집으로 내려왔는데, 틈만 나면 거긴 이런 게 있어, 하며 자랑했다. 온통 금칠을 했다는 63빌딩이나 동물원 이야기는 실감났다. 주홍은 한강의 21세기호 유람선을 타면 한시간 동안 서울 나들이를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 니들도 서울 아이들인 척할 수 있다고. 나는 누가 그런 거 부럽다니, 하며 토라진 말투로 받았다. 은욱은 21세기에는 외계인이 세상을 지배할 거라고 묻지도 않은 말을 했다.

북항을 보고 싶었지만 버스와 전철을 타고 멀리 가는 게 좋아서 21세기호를 선택했다. 주홍은 교통비와 유람선 값, 갈매기 먹이 살 돈을 셈하더니 한 사람 앞에 삼천원은 있어야겠다고 했다. 주홍은 할머니 지갑에서 돈을 훔칠 거라 했고 은욱은 아버지 장판가게 돈통에서 꺼내겠다고 했다. 지갑에 백원짜리가 몇개 있는지 다 기억하는 부모를 둔 나는 뾰족한 수가 없었다. 어떻게 삼천원을 만들까? 은욱과 주홍만 21세기호를 타고 금빛 빌딩 앞에서 갈매기 먹이를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우울했다.

그런데 마침 서울행 전날, 엄마가 밀가루와 콜라를 사오라고 시켰다. 아파트 슈퍼에는 창고로 통하는 뒷문이 있었고, 그곳 경비가 허술하다는 사실쯤은 알고 있었다. 밀가루와 콜라를 집어서 매장 안을 빙빙 돌다가 주인여자가 손님과 수다 떠는 틈을 타 뒷문으로 쑥 빠져나왔다. 아파트 광장을 가로질러 계단을 오르는데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낙제생에 이어‘도둑년’으로 낙인찍혀 고급 소파나 코뚜레도 아니고 화분 받침대나 판잣집 지붕이 될까봐 두려웠다. 일흔 계단을 걸어 올라온 내 몸은 긴장으로 온통 젖어 있어서 삼천원이 생겼다는 기쁨도 채 누리지 못했다.

 

4

 

방과후 우리는 교문 앞에서 만나 정류장으로 걸었다. 은욱은‘키미테’도 챙겨 왔는데 주홍이 촌스럽게, 했으므로 붙이지는 않았다. 부평역까지는 버스로 삼십분쯤 가야 하고 서울에서는 전철을 한번 갈아타야 한다고 했다. 감색 원피스를 입고 머리를 어깨까지 풀어 분홍띠를 한 주홍은 예뻤다. 괜히 학교 체육복을 입고 왔나 싶어서 집에 들르겠다고 하자 주홍은 안돼, 했다. 지금 출발해서 늦어도 8시까지는 아파트로 돌아와야 어른들한테 들키지 않는다는 말은 맞았다. 은욱도 태권도 도복 차림으로 가겠다 해서 잠자코 버스를 탔다.

은욱은 자기가 가장 힘이 세니까 돈을 맡겠다고 떼를 썼다. 주홍은 길잡이를 하고 은욱이 돈관리를 하면 난 뭘 할까? 주홍과 은욱이 마치 소꿉놀이 신랑각시처럼 굴려는 것 같아서 샘이 났다. 그러면 너는 유람선 타러 가는 길을 적으라고 주홍이 말했다. “나중에 우리끼리 두고두고 꺼내보자.” 은욱 역시 카메라가 없으니 그렇게라도 남겨야 한다고 맞장구쳤다. 왠지 그럴싸해서 나는 수첩을 꺼내 12번 버스, 라디오, 담다디, 극장 간판,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고 적었다.

버스에서 내려 전철역으로 들어서자 사람들의 구둣발소리와 말소리가 뒤엉켜 웅웅 울렸다. 개찰구 앞을 기웃거리다 뚱뚱한 검표원 손에 우리는 밀쳐졌다. 주홍은 유리창 너머 매표원에게 뚝섬이요, 했다. 나는 재빨리 뚝섬,이라고 수첩에 적었다. 국민학생 셋이에요, 하면서 주홍이 손을 내밀었지만 은욱은 돈을 주지 않았다. 책가방이며 신발주머니며 도복을 뒤지다가 울상을 지었다. 뒤에 서 있던 아줌마가 앞으로 끼어들어 표를 샀고 우리는 매점 쪽으로 또 밀쳐졌다. 은욱 몸을 샅샅이 뒤져보니 도복 바지주머니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아무도 집에 전화 걸자 하지 않았고 행인들에게 차비를 구할 생각도 못했다. 딱 한번 주홍이 두 팔로 느릿느릿 광장 바닥을 기고 있는 사내를 가리키며 돈바구니를 들고 달아날까, 했다. 풀이 죽어 있던 은욱은 달리기는 자신 있어, 했지만 주홍도 나도 그 말은 믿지 않았다.‘월남 상이용사를 도웁시다’라고 등에 써붙인 사내의 눈은 열대밀림 속 악어처럼 매섭게 번득였다. 나는 수첩을 꺼내 무서운 일,이라고 적었다.

지하상가를 통과한 우리는 아까 타고 온 버스를 곁눈질하며 그 방향으로 무작정 걸었다. 우리 동네와 달리 아파트들은 훨씬 높았고 아이들 입성도 나았다. 제복 입은 경비 아저씨가 지키는 공장 철문에서는 자동차를 여러대 실은 기다란 자동차가 나왔다. 은욱은 새카매진 도복 바짓단을 접어 올리면서 르망이다, 했다. 번쩍번쩍 광나는 몸체를 자랑하며 르망은 네 바퀴를 단단히 고정시킨 채 또다른 자동차에 날름 올라타 있었다.

우리는 한동안 자동차들을 구경했는데 정문 옆으로 수상쩍은 천막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주홍이 그 안을 들여다보다가 저 자동차들은 어디로 가요? 했다. 향불을 피워놓은 단상과 영정,‘단결’‘복직투쟁’같은 머리띠를 맨 남자들이 보였다. “우리 집 쪽으로 가면 태워주면 안돼요?”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한사람이 자동차들은 항구로 간다, 했다. “우리도 항구에서 왔어요.” 나는 아파트 가까이에 북항이 있다고 소리쳤다. “저 차들은 인천항으로 가는 거야. 그리고 우리는 지금 무척 바쁘다.”

우리가 계속 서성이자 가슴에 검은 리본을 단 남자가 마른 얼굴을 매만지며 나와서 집이 어디냐, 했다. 은욱이 먼저 울먹였고 뒤이어 내가 훌쩍댔다. 주홍이 버스비를 빌려달라고 하자 그는 주머니에서 동전 몇개를 꺼내주었다. “연락처를 주시면 나중에 꼭 갚을게요.” 주홍이 내 수첩을 내밀었고 그는 거기다 공부 열심히 해라, 적었다.

 

5

 

중학교 3학년으로 올라가던 1994년 봄, 아버지 공장에 불이 났다. 아버지는 이틀 만에 매캐한 탄냄새를 몰고 돌아와 하루종일 잤다. 이크, 엄마는 양말을 벗겨주다가 놀랐다. 못을 밟았는지 발바닥 상처가 깊었고 불그스름한 화상 자국이 여기저기 나 있었다. 나무 대신 아버지가 타버린 것 같아 눈 감은 얼굴에 손을 갖다대보았다. 한동안은 아버지가 집을 지켰으므로 열쇠목걸이가 필요 없었다. 엄마는 옆동네까지 배달을 다녀서 전보다 더 퉁퉁 부은 다리로 돌아왔다. 몇달 동안 집은 물속처럼 조용했고 나는 데인저러스, 디스어포인트먼트, 디스트로이 같은 영단어를 그제야 외우며 뻐끔댔다. 다시 부산으로 갈까? 엄마가 물으면 나는 아버지를 돌아봤고, 거기도 일자리가 없겠지? 엄마가 혼잣말하면 다시 단어장에 코 박았다.

아버지는 몇번 취직이 되었지만 금방 손을 놓았다. 엄마는‘어중간한 때’에 실직자가 되었다고 한탄했다. “좀더 빨랐으면 어디에서든 새로 시작하면 되고, 차라리 늦었으면 너라도 다 컸을 텐데.” 이제 남 밑에서도 일 못하고 그렇다고 뭘 차릴 형편도 아니니 어쩔 거냐고 화를 냈다. 묵묵히 듣던 아버지가 밥상을 홱 엎어버리고 나가 며칠씩 집을 비우는 일도 있었다.

엄마는 아버지가 경마장에 드나든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어디서 돈이 났는지 갈비를 사주고 내 안경을 새로 맞춰주고 엄마에게 스커트를 선물하고 나서였다. 큰 싸움이 벌어졌고 엄마는 이렇게 살아 뭣 하냐며 칼을 들었다. 아버지는 자기가 먼저 죽겠다며 칼을 빼앗았고 실랑이하는 둘을 말리다 나는 손바닥을 베었다. 손바닥이 찌르르 하면서 화끈거렸다. 여덟 바늘을 꿰맨 나는 집에 아무도 없을 때 코뚜레를 내려 패대기쳤다. 바싹 쪼그라든 나뭇결은 거칠거칠했고 믿을 수 없게 가벼웠다. 저런 게 아파트를 지켜준다고 믿다니! 한참 씩씩대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원래 자리에 걸어놓았다.

엄마는 아버지 마음도 잡고 목돈을 벌어볼 요량으로 아파트단지 초입에 자리한 시장거리에 분식집을 냈다. 그 자리는 본래 도로부지로 구청 땅이었지만 노점상들이 하나둘 들어서다 아예 시장이 만들어진 곳이었다. 자기 땅도 아니면서 포장마차 주인은 노점을 넘기며 권리금을 챙겼다. 아버지는 포장마차 주인이 남기고 간 긴 탁자를 잘라서 작은 탁자를 만들고 폐목재를 얻어다가 바닥에 깔았다. “너무 짜.” 엄마가 만든 떡볶이를 맛보다가 나는 대단한데, 하며 아버지를 치켜세웠다. 아주 오랜만에 엄마가 늬 아빠는 만물박사야, 했다. 아버지는 폐목재가 모자라 개수대 밑까지 다 못 채운 걸 아쉬워했다. 몇년 동안 베란다에 처박혀 있던 받침대도 천막으로 옮겨졌다. 아버지는 그걸 돈통 받침대로 썼고 그런대로 근사했다.

교복 치마를 발목까지 내려 입은 주홍과 키가 훌쩍 자란 은욱이 망치가방을 메고 나타나 우무나 떡볶이를 먹고 갔다. 통닭집 배달 오토바이를 몰고 다니는 일진도 들러 잔뜩 인상을 쓴 채 어묵국물을 마셨다. 생선 천막집 애는 오징어와 순대를 바꿔 갔고 육상부 애는 김밥을 스무줄씩 사갔다. 우리 천막 뒤편에는‘퐁퐁’이라는 놀이기구가 있어서 동그란 탄력성 매트에서 겅중대는 아이들의 환호가 온종일 들렸다. 엄마 욕심대로 목돈이 붙지는 않았지만 아파트 부금이 밀리는 일은 없어져서 다행이었다.

 

6

 

그해 가을, 담임이 나를 불러 인문계와 실업계 중에서 어디를 갈 거니, 물었다.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심장이 쿵쿵 뛰었다. 담임은 인문계 고등학교를 지원해도 떨어지지는 않겠지만 열심히 하지 않으면 다른 애들 들러리나 설 거라고 했다. 일찍 취직해서 자리잡는 것도 방법이라고 담임은 덧붙였다. “부모님 생각도 해야지.” 며칠 전 모처럼 곱게 화장하고 학교에 나타났던 엄마가 해쓱한 얼굴로 돌아간 이유를 알았다.

그날 가게로 가보니 엄마와 아버지는 용달차를 불러다 집기들을 옮기고 있었다. “마트 놈들이 또 민원을 넣은 모양이다.” 내일 철거반이 올 거라고 했고 두번째 겪는 일이었으므로 아버지는 눈치 빠르게 대처했다. 다음날 버스를 타러 가다 보니 정말 빨간 모자를 쓴 철거반원들이 포클레인을 가져와 노점들을 부수고 있었다. 미리 집기를 치우지 못한 여자들이 들쭉날쭉한 톱니마냥 아무렇게나 뜯긴 합판 위에서 엉엉 울었다. 푸른 천막들이 옆으로 내려앉아서 꼭 판자로 만든 뗏목을 타고 표류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앞으로도 몇번이나 벌어질 일이었다.

등교하자마자 나는 담임에게 내 성적으로 갈 만한 실업계 고등학교에 대해 물었다. “자격증을 빨리 따는 게 중요해.” 온종일 시무룩한 내 손을 툭 치며 옆짝이 말했다. 그애 언니는 실업계 고등학교 장학생인데 날아갈 듯 가벼운 손으로 타자기를 친다고 했다. 손가락을 까딱까딱하면서 팔을 들었다 놨다 했는데 꼭 허우적거리는 듯 보여서 나는 그만해, 했다.

그날 오후, 시장 사람들은 다시 판자를 세우고 천막을 쳤다. 아버지는 거 봐라, 하면서 집기들을 날랐고 엄마는 고추장과‘다시다’를 풀어서 떡볶이 양념을 만들었다. 동인천에 몰려 있다는 타자·부기학원을 미리 다닐까, 갑자기 의욕에 불타다가 이제 은욱, 주홍과는 다른 길을 가겠구나 싶어 언짢아졌다. 같은 버스를 타고 온 은욱과 만두 한접시를 나눠먹고 비탈길을 올랐다. 은욱은 이번 중간고사에서도‘그 자식들’이 10등까지 다 차지했다며 씩씩댔다. 걔네는 엘리베이터가 오르내리고 조용한 공부방이 있는 아파트에 산다. 걔네는 시험 전날, 텔레비전을 크게 틀고 전화해 공부를 하나도 못했다며 속임수를 쓴다. 걔네 아파트 주변 학원에는 명문대 출신 선생들이 수두룩하다. 걔네 아파트 엄마들은 갈빗집에서 담임들과 자주 저녁을 먹는다.

은욱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나는 화단 울타리를 툭툭 치며 아파트를 올려다봤다. 중국집 스티커가 잔뜩 붙은 현관에서 출발해 은욱네 창에서 잠시 멈춘 뒤 노란 가스배관을 휘감으며 우리 집으로 옥상으로 더 위로. 어둑어둑한 구름층을 뚫고 지나는 비행기 꼬리가 빛났을 때 북항이 정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 변성기 목소리 진짜 듣기 싫다.” 나는 홱 돌아서서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나왔다.

다섯 정거장을 가서 버스에서 내렸지만 한참 걸은 뒤에야 목재단지가 나왔다. 멀리 언덕 위에는 정유공장이 있어서 건물 씰루엣을 따라 노란 등이 빛났다. 목공소들은 녹슨 대문을 닫아놓은 채 어두웠다. 트레일러와 지게차들이 길 한편에 주르르 주차된 채 조용했다. 엎어질 뻔하다가 겨우 균형을 잡아 밑을 살피니 보도까지 뚫고 나온 나무뿌리가 울퉁불퉁했다. 담장 너머로는 아직 껍질을 다 벗지 않은 목재들이 쌓여 있고 말레이시아, 차이나, 인도네시아, 베트남 같은 지명들이 문신처럼 찍혀 있었다.

한시간을 걸으니 마침내‘북항’이라는 도로 표지판이 나타났지만 누가 다리를 붙든 듯 더는 움직일 힘이 없었다. 정말이었구나. 화살표가 가리키는 쪽에서 바람이 불었으니 이 바람은 북풍,이라고 생각했다. 마루공장 맞은편으로 창호공장이, 그 옆으로 가구공장이, 합판공장 뒤에는 악기공장이 웅 소리를 내며 기계를 돌리고 있었다. 이제 난 뭐가 되어서 세상으로 던져질까? 보도블록에 걸터앉아 다리를 꾹꾹 주물렀다. 우리에게도 함수율이라는 게 있어서 완전히 젖더라도 썩지 않을 수 있는 걸까? 하지만 누구도 그 답을 알 것 같지 않았다. 이윽고 북풍이 등을 밀었고 나는 절뚝거리며 아파트로 돌아왔다.

 

7

 

엄마가 분식집을 접은 건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가구공장 경리로 들어간 1998년이었다. 평소 몸이 자주 붓던 아버지는 심부전 진단을 받았고 의사는 심장마비가 올 수도 있다는 말로 엄마와 나를 울렸다. 아버지가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는 동안 엄마는 가게 차양을 내려둔 채 현미밥이나 생고등어 구이, 맹맹한 북어국을 상에 올렸다. 부추도 자주 무쳤는데 아버지와 엄마에게 그것은 정구지,였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흙먼지 나는 길을 굴러가는, 바닥이 다 해진 달구지가 떠올랐다.‘정’과‘달’뒤에 붙은‘구지’라는 말에서는 시큼한 땀내나 피로감 같은 것이 풍겼다. 부추에 아주 살짝 양념을 하며 엄마는 늬 아빠한테 소금기는 금물이다, 했다. 나는 소금기는 바다에서 왔다, 생각했고 어쩐지 아버지는 금방 털고 일어날 것 같았다.

‘미스 김’이라는 호칭에 익숙해지기도 전에 첫 직장이 문을 닫았다. 남동공단에 있는 전구 소켓공장에 두 달 다니다가 출퇴근이 고되어 다시 목재단지로 돌아왔다. 이제 보니 아버지 말은 반만 맞은 셈이었다. 무엇이 되느냐보다는 팔리느냐 팔리지 않느냐가 중요했다. 창고에는 비닐을 뒤집어쓴 책장과 문갑, 화장대가 즐비했고 대리점에서 실려온 반품들이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기도 했다. 공장에서는 그런 것들을 모아 상표를 떼어낸 뒤 할인매장으로 헐값에 넘겼다. 그마저도 안될 때는 해체해서 쓸 만한 부속들만 챙기고 보일러에 던져넣었다. 새카만 숯으로 변한 나무들에는 누구의 이름도 남아 있지 않았다.

 

8

 

그해 겨울, 주홍과 은욱을 만났다. 각자 다른 고등학교로 진학한 뒤로 사이가 한참 멀어진 터여서 약속은 갑작스러웠다. 주홍의 목소리를 듣고도 누구라고? 나는 일부러 두번이나 되물었다. 할머니가 죽고 서울로 간 주홍은 근사한 아르바이트 자리가 있어서 전화 걸었다고 했다. 전국 까페를 돌아다니면서 체험기를 쓰는 일인데 보수도 높고 노는 듯 할 수 있다고 했다. 나 회사 다녀, 하자 주홍은 주말에도 할 수 있는 일이야, 했다. 그러면 엄마가 식당보조 일을 덜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부평역으로 나갔다. 혹시 대학생들만 할 수 있는 일은 아닐지 잠깐 걱정하면서.

역 광장 커피숍에는 전보다 더 뚱뚱해진 은욱이 앉아 있었다. 대학에 떨어져 재수를 한다는 소식을 들은 게 생각났다. 아이보리색 패딩코트를 입고 나타난 주홍은 가죽장갑을 벗으며 우리 얼마 만이지, 했다. 주홍은 주말에만 일해도 백만원 가까이 쥘 수 있다며 서울로 가서 간단한 면접을 보자고 했다. 언제나 예상보다 적은 돈을 쥐여주는 게 회사인데 이상하다 싶었다. 바짝 돈을 벌려고 휴학했다는 주홍은 옛날 학교 일진도 같이 일한다고 전했다. “그래 봬도 걔 대학생 됐다.” 주홍은 아차 싶어 슬쩍 내 눈치를 살폈고 몇몇 애들 이름을 더 댔다. “친구들이 모여 있으니까 완전 가족 같은 분위기야.” 부모가 생선노점 하던 301호 여자애, 계모한테 매 맞던 207호 남자애, 학교 육상선수로 뛰었던 502호 여자애의 얼굴이 가물거리다가 사라졌다.

“너무 일 얘기만 했나?” 잠시 서먹하다 주홍이 갑자기 너네 그 놀이 생각나, 물었다. 그건 파출부 아줌마가 안 와서 엄마가 화났어, 우리 집 운전기사는 잘렸단다, 여름방학에는 우주선을 보러 미국에 갈 거야, 같은 말을 지어내는 일종의 연극이었다. 그러다 한명이‘타임’을 외치면 우리는 더 많은 구경꾼이 모여 있을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고는 누군가 사실로 들어주길 바라며 또 한바탕 거짓말을 해댔다.

주홍은 그때를 떠올리면 얼굴이 다 화끈거린다고 했다. “우리 열심히 해서 이제 정말 그렇게 살아야지.” 돈도 돈이지만 그 회사에서는 열정과 패기, 도전정신을 가르쳐준다고 주홍은 덧붙였다. “그때가 벌써 십년 전이야.” 은욱이 담배를 물었고 21세기에는 외계인이 세상을 지배한다던 말이 생각나서 나는 피식 웃었다. “우리 집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았어?” “졸업앨범에서 찾았지.” 주홍은 너희가 아직도 그 아파트에 살고 있을 줄은 몰랐다, 했다.

주홍을 따라 서울로 올라간 건 은욱 혼자였다. 전철로 오르기 직전에 나는 뒤로 슬쩍 빠졌고 주홍이 어머 얘, 하는 순간 문이 닫혔다. 플랫폼을 걸어나와 주머니 속 동전을 달그락거리며 역 주변을 걸었다. 자동차공장 사람들이 광장에 새카맣게 몰려들어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그즈음 버스를 타고 다니다 보면 자동차공장을 살리자는 플래카드를 쉽게 볼 수 있었다. 더이상 자동차들은 항구로 갈 수 없는 모양이었다. 공장이 사라지면 사람들은 어디로 흘러들까? 우리에게 이럴 순 없는 거라고, 그때처럼 붉은 머리띠를 한 남자가 마이크를 잡고 울먹였다.

그러자 졸업앨범을 들여다보며 지금도 형편이 그저 그럴 얼굴들을 골라냈을 주홍과 아파트 아이들이 떠올랐다. 아직 뗏목 신세야, 잘해야 분식집 탁자 정도? 듣자니 이태리산 원목가구가 되었다던데? 주홍이 내게 아주 뾰족한 돛대를 쑥 박아넣은 것처럼 아팠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정말 우리가, 우리한테 그러지는 말아야 하는 거 아닌가 싶어서 화가 났다. 너 다단계지? 이 한마디라도 할걸 그랬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차라리 유람선을 타러 가자고 불렀으면 나았을걸. 아니, 그래도 안 갔을 거다. 나는 그때에도 한강에 21세기호 따위는 없었으리라 생각하기로 했다. 코끝이 찡할 만큼 쓸쓸해졌지만 그래도 조금은 덜 아팠다.

 

9

 

장롱을 한참 들여다보던 커플은 돌아보고 올게요, 하더니 나갔다. 손으로 만지고 얼굴도 넣어보고 냄새도 맡아보며 아주 신중한 태도였다. 한번 사면 평생 쓸지도 모르니까, 유난히 큰 눈을 껌벅거리며 남자는 말했다. 책상쎄트 배달을 도와주고 났더니 저녁뉴스에서 한해의 사건사고를 정리하고 있었다. 뒷다리를 무겁게 끌며 축사 안을 기어 다니는 얼룩소 한마리가 나타났다 사라졌고 한동안 잊고 있었던 코뚜레가 떠올랐다.

물론 얼룩소는 검은 콧방울을 연신 혓바닥으로 핥았을 뿐 코뚜레는 하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허공으로 고개를 비스듬히 치켜올린 채 일어서기 위해 버둥거려서 누군가 한사코 잡아당기는 것처럼 보였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코뚜레는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이사하면서 진작 버렸지.” “그걸 버리면 어떻게 해?” “젊은애가 뭘 그런 걸 믿어?” 엄마와 나는 서로 타박하다가 저녁에는 뭘 먹을까, 하며 전화를 끊었다.

우리가 이사 나온 건‘도시재생사업’으로 아파트가 헐리던 해였다. 나는 시청이 위치한 도심지에 있는 가구매장의 매니저가 되었다. 일하면서 보니, 가구를 사려는 사람들은 대부분 원목의 이름을 물었다. 카탈로그를 보지 않고도 척척 대답하기 위해 처음에는 포스트잇으로 살짝 표시해두었다. 마호가니는 노란색, 월넛은 푸른색, 로즈우드는 붉은색. 합판으로 만든 저가 상품에는 아무것도 붙이지 않았다. 거기에는 바다를 건너온 다양한 나무들이 단단한 직조를 짜서 엉겨 있기 때문이다.

엄마는 보상금으로 마련한 빌라에 들면서 요즘은 빌라도 아파트만큼이나 잘 짓는단다, 했다. 생활비가 빠듯할 때면 버려진 농가도 많다던데 고향으로 갈까? 했고 그때마다 나는 어쩐지 섭섭했다. 병이 다 나아서 금의환향 못할 바에야 안 돌아가겠다는 아버지 말도 무심히 넘겨지지 않았다. 화려한 비단옷을 입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 말을 되새기다 보면 그럼 나는?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쯤이면 아파트는 다 무너져내렸을 텐데. 도미노처럼 쓰러진 아파트가 버스정류장을 덮었을 텐데. 이제 집으로 영영 돌아갈 수 없는 외계인들, 그 아파트 아이들도 어딘가에서 그럼 우린? 하고 있을 것 같았다.

매장에서 내 자리는 장롱과 책장들로 빙 둘러싸인 곳이고 햇볕이 잘 들지 않았다. 가끔 밑동 잘린 나무들이 공장을 거쳐 다시 숲을 이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른을 넘기고서도 나는 매장을 가득 채운 고급 가구들과 코뚜레와 뗏목 사이를 위태롭게 오갔다. 할인매장으로 팔려가거나 땔감이 될까 전전긍긍하다 보면 푸르고 차가운 바닷물이 발목을 휘감기도 했다. 그때마다 완전히 젖지는 않을 거다, 자신도 없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빠지지 않으려고 버둥댈 때나 파도에 몸을 맡겨 둥둥 떠다닐 때나 저편에서는 항구가 보였다. 남쪽이든 북쪽이든 열대숲이든, 그곳에서는 언제나 바람이 불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