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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김항 『말하는 입과 먹는 입』, 새물결 2009

정치철학의 성좌들과 한국의 현실

 

 

김종엽 金鍾曄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jykim@hs.ac.kr

 

 

말하는입-표지꽤 도발적이고 매력적인 제목이다. 어쩌면‘언어와 존재’혹은‘법과 생’같은 좀더 무거운 제목이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말하는 입과 먹는 입’이라는 제목이 심각함을 덜어주는 역할만 하는 것은 아니다. 말하는 것과 먹는 것의 장소적 일치로써 생과 그것에 마주선 언어·법·국가 사이의 뒤얽힌 관계를 단번에 암시하는 힘도 있다.

체계적이기보다는 구불구불한 길을 가는 이 책은 어떤 여정의 느낌을 준다. 여행을 끝낸 자가 그려주는 지도라기보다 자신이 머뭇거리고 배회하는 순간마저 독자를 동반하려는 자세를 보인다. 제1부 제목‘새로운 성좌를 찾아서’가 그렇듯이 저자는 자신의 사유의 서성거림을 성좌를 찾는 일로 묘사한다. 성좌라…… 별자리란 수직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간격을 가진 별들을 천구라는 가상의 평면에 놓는 일, 그리고 별들 사이의 관계를 정신에 그려내는 일을 통해 만들어진다.

그가 그려내는 별자리를 이루는 별들은 토마스 홉스, 칼 슈미트, 발터 벤야민, 미셸 푸꼬, 질 들뢰즈, 자끄 데리다, 마루야마 마사오, 코바야시 히데오, 조르조 아감벤 같은 이들이거니와, 그중에서도 특별히 밝게 빛나는 별들은 홉스, 슈미트, 벤야민 그리고 아감벤이다. 이 네 사람의 이름은 잊혔거나 무시됐던 사상의 계보를 새롭게 그려내는데, 이들을 묶어주는 것은, 우리의 일상적 사고를 지배하는 자유민주주의의 제도적 규칙과 그것의 운영을 지칭하는 말인‘정치’(politics)가 아니라 그 정치의 근원에 있는‘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을 해명하려는 이들의 의지이다.

저자 김항(金杭)에 따르면 이 정치철학적 작업의 핵심은 자연상태로부터 사회상태로의 이행(홉스적인 의미에서 늑대로부터 인간/시민으로의 이행)을 진화적으로 사고하는 태도와 결별하는 것이며, 이 결별은 우리에게 세가지 통찰을 열어준다. 우선, 사회상태 이전에 자연상태가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법-권리-국가의 존재가 자연상태를 소급적으로 구성한다는 점이다. 자연상태는 사회상태를 수립하는 계약에 의해‘전제’되는 동시에‘정립’되며, “‘정치적인 것’이란 바로 이 전도를 산출하는 분할과 결정이라는 폭력에 다름 아니다.”(14면)

다음으로, 이 분할과 결정의 원(原)-폭력은 단 한번 존재한 후 사라지는 매개자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일상적 의미에서 정치의 존재는 이 분할과 결정이라는 원-폭력의 반복에 의존한다. 계약에 의해 형성된 법-권리-국가가 전쟁상태를 잔재 없이 지양할 수 없기 때문이다.

끝으로, 그렇기 때문에 사회상태는 법을 유지하는 폭력에 의존하는 동시에 법을 정립하는 폭력이라는 예외상태에 주기적으로 직면한다. 이 예외는 결정을 요청하는데, 이 예외상태를 결정하는 자가 법의 안에 있는 동시에 그 바깥에 존재하는 주권자이며, 따라서 주권이야말로 정치철학의 중심문제인 것이다.

김항은 세가지 통찰이 지닌 가치를 입증하기 위해 프랜씨스 푸쿠야마의‘역사의 종언’테제를 슈미트와 벤야민을 통해서 비판하고(2장), 국가와 전쟁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시도하고(3장),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와 폭력 비판의 내적 연관을 해명하고(4장), 후썰의 의미론에 대한 데리다의 비판을 벤야민의 폭력 비판과 연결한다(5장). 현란한 매력을 가진 김항의 논술의 힘에 이끌려 책을 읽고 나면 저만큼 낯설던, 홉스에서 발원하여 슈미트와 벤야민을 거쳐 아감벤에 이르는 정치철학에 대한 친밀함과 더불어 그 사유의 결을 따라가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하지만 한가지 의문과 몇가지 불만이 남는다. 우선 홉스에서 아감벤이 이르는 정치철학이 시간의 거리를 메우고 어떻게 동일 평면에서 별자리를 형성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 의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범속하다고 해도 지식사회학으로 정치철학을 보충할 필요가 있다. 17세기의 홉스, 1920,30년대의 슈미트와 벤야민, 그리고 지금의 아감벤은 모두 세계체제의 헤게모니 변동기의 사상을 대변한다. 이들은 각각 네덜란드-스페인간의 헤게모니 전쟁기, 독일-미국간의 헤게모니 경쟁기, 미국 헤게모니의 몰락기를 배경으로 한다. 월러스틴이 지적하듯이 헤게모니 안정기의 지배적 사상인 자유주의는 이 위기의 시대에 지도력을 상실하게 되는데, 그것이 주권과 예외상태에 대한 이론이 정치철학의 중심으로 회귀하는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세계체제론을 김항의 논의에 대입한다면, 그의 논의에서 만족스럽지 못한 점이 드러난다. 근대 세계체제의 특유성은 국가-자본의 융합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국가와 지배를 중심으로 하는 주권이론은 자본에 대한 이론과 매개되어야 한다. 이미 벤야민은 슈미트의 주권이론을 수용하면서도 자본주의를‘항구적인 예외상태’라는 개념 속에서 포착하고자 했다. 김항은 이 점을 의식하고 있지만 충분하게 논의하고 있지는 못하다.

또 하나의 불만은 정치적인 것의 근본으로 파고들려는 주권이론이 정작 인민주권 개념을 우회한다는 점이다. 근대 자유민주주의가 법치, 인권보장, 개인적 자유 존중에 초점을 맞추는 자유주의 원리와 주권자인 인민의 자치라는 민주주의 원리 사이의 내적 긴장으로 가득 차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주권이론이 자유주의 비판과 더불어 인민주권의 문제를 우회하고 있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책을 읽으며 내내 불편했던 점은 서론에 등장하는 다음과 같은 말이다. “이 책에서 시도하는 것은 (…) 현재의 법-권리-국가를 투명하고 완결한 것으로 상상하려 한 근대의 인간학을 뒤집어보는 일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 뒤집기에는 국적이 있을 수 없다.”(16면) 맞는 말이다. 김항이 마루야마 마사오에 대한 빛나는 논의를 전개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의식 덕분일 것이다. 하지만 얽매일 필요가 없을지라도 그것이 우리의 경험을 천착하지 않을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니다. 6·25나 4·19, 혹은 5·18이나 6·10 또는 촛불항쟁 같은 몇가지 사건을 거명하기만 해도 우리의 경험이야말로 유례없이‘풍요로운’정치철학적 사유의 소재임이 드러난다. 예컨대 80년 5월에 광주 시민군의 폭력은 법보존적 폭력으로 분식된 법정립적 폭력에 대항하여 국가-법을 파괴하려고 한 (벤야민적 의미에서)‘신적 폭력’이었던 것은 아닐까? 지난해 정부가 검역주권을 포기한 것은‘국민 전체’가 법으로부터 버림받아(abandoned), 생명과 법의 구분이 불가능한 비식별역에 노출되고 영토 안에서 난민이 된 유례없는 사태였던 것은 아닐까? 아마도 이런 질문은 긴 목록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런 불만들이 김항의 다음 책을 통해 해소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이 기대는 막연한 것이 아니라 근거있는 것이다. 책의 마지막 장 「국가의 적이란 무엇인가: 광주의 기억과 에티카」는 그가 로도스섬에서의 도약을 지금 여기서 반복할 것을 약속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