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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무라까미 하루끼 『1Q84』, 문학동네 2009

하루끼적 앙가주망

 

 

백지운 白池雲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연구교수, 중문학 jiwoon-b@hanmail.net

 

 

1Q84_01 1Q84_02또다시 불어오는 하루끼 바람이 예사롭지 않다. 일본 서점가에서 출간 전부터 예약이 쇄도하고 발매 이후 7주 연속 판매부수 1위를 차지했던 무라까미 하루끼(村上春樹)의 신작 『1Q84』 붐이 빠르게 번져가고 있다. 8월에 나온 한국어판에 이어 중국어 번체자판이 11월 발간 예정이며, 영어판 출간 시기도 2011년 가을로 발표되었다. 독자에 따라서는 이 소설이 하루끼가 그간의 작품들에서 선보여온 이미지들의 조합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있다. 내러티브에 감겨드는 음악, 도시 어딘가에서 살아가는 고독한 인물들과 그들이 소비하는 브랜드들, 그리고 판타지적 요소. 하루끼를 읽어온 독자들에겐 너무나 익숙한 이 이미지들은 어김없이‘하루끼적’이다.

그런데 『1Q84』는 뭔가 다르다. 한국어판으로 1200페이지가 넘는 분량에도 불구하고 독자를 강하게 흡인한다.‘리틀피플’이라는 괴기스러운 존재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그들이 누구인지, 끝내 드러나지 않는다. 선한지 악한지, 아니 실체가 있는지 없는지조차 알 수 없다. 사실, 이 소설의 키워드라 할‘리틀피플’이나‘두개의 달’은 어떤 면에서 독자들의 주의를 끌기 위한 트릭에 불과하다. 베일을 한겹 한겹 벗겨내는 흥미진진한 추리에 몰입하는 독자들에게 하루끼는 말한다, “이야기의 포인트는 달에 있는 게 아니”(2권 585면)라고.

이 소설을 독해하는 열쇠는 일련의 하루끼적 이미지들의 전복에 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이‘숲’이다. 『노르웨이의 숲』에서 『해변의 카프카』까지‘숲’은 하루끼 소설이 일관되게 다루어온 시간과 기억의 세계였다.‘숲’은 멈춰버린 시간, 현재의 몸 속 깊이 패인 늪이다. 나오꼬와 사에끼가 죽고 기억과 영원히 결별하는 시/공간인‘숲’에는 비틀즈와 밥 딜런의 음악이 흐른다. 그런데 『1Q84』의‘숲’에는 정체불명의 리틀피플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덴고와 아오마메가 어떤 원인 모를 힘에 이끌려 들어와버린‘1Q84’의 세계이기도 하다.

1Q84의 세계는 카프카가 들어갔던 숲과 다르다. 우선 음악부터 그렇다. 이 기괴한 세계로 아오마메를 인도한 음악은 야나체크(L. Janácek)의 신포니에타. 야나체크는 체코 동부 모라비아 지역의 구어적 음조(speech tune)를 음악으로 재현했던 체코 국민주의 음악가다. 비틀즈에서 야나체크로의 이동을 단순히 하루끼의 음악적 취향의 변화로 치부하기 어려운 이유는, 그것이 이 소설 전편에 기복(起伏)하는‘장소성’의 은유로 읽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하루끼 소설을 특징지어온‘무국적성’은 만주나 사할린 같은 구체적 장소와 사연을 지닌 인물들의 이야기 속으로 분해된다. 만주 개척단에 참여했다 NHK수금원이 된 아버지로부터 어린 시절을 박탈당한 덴고, 증인회 신자였던 부모로 인해‘이지메’를 당해야 했던 아오마메, 사할린의 조선인 입양아 다마루, 그리고 킬러 아오마메가 처단하는‘사회적 폭력’에 희생당하는 여인들까지. 이들 일본사회의 소수자들은 무언가에 의해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다. “러시아라는 거대한 국가의 환부”(1권 547면)인 사할린 섬처럼, 이들은 압도적인 무력감으로 자신을 삼켜버리는 일본사회의 환부이다. 어느새 환부가 자기 몸의 일부가 되어버린 것을 알았을 때, 덴고와 아오마메는 달이 두개 떠 있는 1Q84의 세계에 들어와 있었다.

형식 면에서 이 소설은 사이비 종교집단‘선구(先驅)’의 실체를 밝혀내는 과정으로 구성된다. 1960년대 전공투(全共鬪)를 이끌었던 학생운동 집단 선구가 사이비 종교집단으로 변질되는 계기를 하루끼는 리틀피플의 출현이라는 미스테리로 처리했다. 조지 오웰의‘빅 브라더’와 대조를 이루는 이 리틀피플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1995년 오옴진리교의 지하철 독가스 테러사건을 계기로 사이비 종교집단에 관심을 가졌던 하루끼는 어떤 신조가 정신을 가두는 담장으로 변할 때 발휘하게 될 가공할 힘에 대해 쓰려 했던 것 아닐까. 중요한 것은 그 힘이 절대악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선구의 리더를 살해하는 과정에서 아오마메는 그와 내밀하게 교감한다. 그리고 자신이 리틀피플의 세계에 발 들인 까닭을 차츰 알아나간다. 어쩌면 “광범위한 정의”(1권, 466면)를 위해 살인을 서슴지 않는 그녀 역시 또다른 광기에 휩싸인 리틀피플인지 모른다. 다른 한편에서 덴고는 리틀피플에 대항하는 항체를, 그들을 자신의 내부로 받아들이는‘공감’을 통해 키워나간다. 어릴 적 잡았던 아오마메의 손의 기억처럼, 그의 안에는 언제나 그들이 있었다.

1Q84는 결코 판타지의 세계가 아니다. 『해변의 카프카』에서 카프카는‘입구의 돌’이 닫히기 전에 현실로 되돌아올 수 있었지만, 아오마메는 1Q84의 세계 바깥으로 나가는 비상계단을 찾지 못했다. 출구는 막혀버린 것이다! 바로 여기서‘숲’의 세계가 전복된다. 1Q84년이 1984년의 “패럴렐 월드(parallel world) 같은 것”이냐는 아오마메의 질문에 리더는 “싸이언스 픽션을 너무 많이 읽은 모양”이라며 웃는다(2권 320~21면). 1Q84년으로 들어온 이상 1984년은 존재하지 않는다. 소설 첫장에서 수도고속도로에 난 비상계단으로 내려가는 아오마메의 등 뒤로 택시기사가 던진 말처럼, “현실은 언제든 단 하나밖에 없”(1권 23면)는 것이다.

말하자면 1Q84는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그 자체다. 현실에 숨어 있는 광기를 발견하는 순간, 레일 포인트가 바뀌고 세계는 다른 궤도로 진입한다. 그러나 정작 바뀐 것은 세계가 아니라 세계를 대하는 인간의 태도이다. 즉 1Q84는 우연히 들어선 낯선 세계가 아니라, 그것을 직시하려는 의지와 목적에 의해 포착되는 현실이다. 그것은 아오마메가 이름붙이고 덴고가 형상화한 세계로서, 두 사람을 연결하는 끈에 의해 윤곽이 드러난 리얼리티인 것이다. 따라서 그것이 어떤 세계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내가 어떻게 대처해나갈 것인가에 있다. 이것이 이야기의‘포인트’이다.

이 세계를 완성하기 위해 덴고는 자신의‘숲’으로 순례를 떠난다. 세상의 땅끝, 치바 바닷가의 지꾸라 요양원. “상실되어야 할 장소”(2권 198면)로 들어갔던 덴고가 오히려 아버지와 화해하고 나오는 이 장면은 하루끼 소설에서 그야말로 이례적이다. 카프카가 숲으로 들어간 상태 그대로 다시 나온 것과 대조적으로, 덴고는 자신과 아무런 혈연적·정서적 유대도 없는 아버지와‘관계’를 맺고 나온다. 서로의 공백을 메우는 방식으로. 공백에서 나온 덴고를 아버지가 메웠듯 아버지의 공백을 덴고가 메우는 것, 이것이 하루끼가 찾아낸 사회적 관계맺기의 방식이다. 그리고 스스로 죽음을 택해 덴고의‘상실’을 막아낸 아오마메는 덴고가 이 세계를 살아가기 위한 공백이 된다. 여기서 『1Q84』는 오웰의 『1984』를 뒤집는다. 우거진 밤나무 아래 나 그대를 팔고, 그대 나를 팔았다네…… 음울한 노래 속에 침잠하는 절망과 배반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인간을 구원할 힘이 아오마메가 남긴 온기에 담겨 있는 것이다.

『1Q84』가 보여주는 하루끼는 무국적적 감수성에 호소하는 청춘작가가 아니다. 어느새 그는 일본사회의 폐부 깊숙이 들어와 있다. 이런 변화가 노벨상을 의식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또다른 사회성을 향한 그의 모색은 정녕 흥미롭다. 하루끼적 앙가주망의 다음 행보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