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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동아시아 지역문학은 가능한가

 

대만 ‘향토문학’의 동아시아적 맥락 *

 

 

백지운 白池雲

문학평론가. 연세대 국학연구원 연구교수, 중문학. 역서로 『위미』 『열렬한 책읽기』 『시간』 등이 있음. jiwoon-b@hanmail.net

 

 

1. ‘제3세계’라는 교량

 

한국에서 대만문화는 대중적 관심을 받은 적이 거의 없다. 냉전기 동아시아 역내 사회주의 세력의 방어기지로 수립된 양국의 우호관계가 탈냉전시대에 이르러 단교(1992)로 종결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물론 단교 이전이라 해서 양국이 상호이해에 기반한 참다운 우호국이었다고 하긴 어렵다. ‘자유중국’이라는 이름으로 더 친숙했던 대만은 중공(中共)에 빼앗긴 중국의 대리자(surrogate China)일 뿐, 그들의 삶 자체가 우리의 시야에 진지하게 들어오지는 못했다. 그러나 ‘역설적’ 의미에서 대만‘열()’이 한국문화계에 의미심장하게 일었던 때가 있다. 대체로 1980년대 초에서 후반 사이, 어떤 특정한 지적・문화적 분위기 속에서 대만과 한국은 잠시 만났다 결별했다. 짧은 해후는 그후 시나브로 잊혀져갔지만, 그대로 망각에 방치할 일은 아니다.

‘열’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비자각적이었던 이 문화현상의 발단은 1983년 창작과비평사에서 출간된 황 춘밍(黃春明)의 중단편집 『사요나라, 짜이젠』이었다. 1970년대 당시 대만문단의 주류였던 모더니즘의 강력한 비판자로 등장한 ‘향토문학’ 작가 황 춘밍의 작품집이 소설가 이호철(李浩哲)과 소장 중문학자이자 평론가인 성민엽(成民燁)의 뛰어난 번역으로 한국 독서계에 소개되었다. 대만문학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던 한국문단에 민중적이고 토속적인 언어로 대만사회의 모순을 예리하게 파헤친 이 소설집이 전달한 파장은 작지 않았던 듯하다. 그 단적인 예가, 이 책에 수록된 단편 「두 페인트공(兩個油漆匠)」이 1980년대 한국의 대표적 민중극단 ‘연우무대’에서 상연된 사실이다. 서울대 연극반 출신 오종우에 의해 「칠수와 만수」로 각색된 이 연극은 초연(1986) 당시 평단과 관객 양측에서 호평을 받으며 서울에서만 397회 공연에 무려 5만의 관객을 불러모으는 등 공전의 히트를 쳤고, 문성근과 강신일이라는 대스타를 배출했다. 이어, 80년대 ‘코리안 뉴웨이브’를 이끈 박광수 감독의 데뷔작으로 영화화되었고(동아수출공사 1988), 당대 최고의 배우 안성기가 주연을 맡았다. 대종상 신인감독상・각색상, 로카르노 국제영화제 청년비평가상(3위) 등을 휩쓸었으며 제39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 출품되기도 했다.

40대 이상의 한국인이라면 대다수가 「칠수와 만수」를 보았거나 최소한 들어 알고 있겠지만, 그 원작이 대만소설임을 아는 사람은 의외로 드물다.1) 대만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이 주 원인이겠지만, 이 작품이 당시 한국사회의 모순과 소외층의 울분을 생생하게 표현하는, 너무나 한국적인 텍스트로 재탄생한 것 또한 주요한 이유가 아닐까.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우선 1970~80년대 한국과 대만 사회의 구조적 유사성 때문이었다. 1970~80년대 대만과 한국은 안으로는 군부독재, 밖으로는 대미・대일 종속외교를 발판으로 삼아 눈부신 성장신화를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대만 원작과 한국 연극 속의 주인공들은 이 떠들썩한 잔치에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었다. 약간의 변형도 있었다. 대만 동부산간 출신의 가난한 원주민 ‘아리’와 ‘원숭이’는 한국으로 건너와 기지촌 양공주 누이를 둔 ‘칠수’와 비전향 장기수의 아들 ‘만수’가 되었다. 순박한 시골 잡역부를 한순간에 죽음으로 몰아가는 매체의 비정함을 통해 자본주의의 탐욕적 속도를 고발했던 원작에서 나아가, 「칠수와 만수」는 분단과 냉전의 아픔까지 아로새긴 한층 정치적인 텍스트로 재탄생한 것이다.

그런데 황 춘밍의 한국 도래 이면에는 또다른 문맥이 있었으니 바로 1970년대 지식계에 불었던 제3세계열이었다.2) 먼저 『사요나라, 짜이젠』이 당시 창작과비평사가 기획・간행한 ‘제3세계총서’의 일환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알렉스 헤일리, 가싼 카나파니, 하림 바라카트, 응구기 와 시옹고 등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중동 작품을 망라한 이 총서는 1976년부터 1988년까지 총 16권이 간행되었고, 『사요나라, 짜이젠』은 그중 제6권이었다. “대만문학이 황 춘밍에 이르러 제3세계문학으로서의 보편성을 획득”했음을 천명한 표지 문구나 “뚜렷한 작가의식에 기초한 제3세계적 특색”이 “분신과도 같은” 한국문학에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옮긴이의 말은, 당시 ‘제3세계’가 황 춘밍을 읽는 중요한 코드였음을 보여준다. 식민지와 냉전, 군사독재, 외세의존적 경제발전 등 근대 이래 동아시아가 겪은 굴곡의 심층을 유사한 행보로 지나왔음에도 이상할 만큼 서로를 돌아보지 않았던 한국과 대만에 있어서, 『사요나라, 짜이젠』의 출현은 보이지 않는 끈을 가시화하는 귀중한 찰나였다.

그런가 하면, 황 춘밍의 소설집이 한국으로 오는 과정에서 일본 지식인이 했던 매개적 역할 또한 간과할 수 없다. 한국어판 『사요나라, 짜이젠』이 저본으로 삼았던 『さよなら・再見(田中福田桂二 , 1979)은 일본에서 최초로 번역된 대만현대소설집이었다. 이 책의 출간을 주도했던 타나까 히로시(田中宏)는 일본-아시아 관계사 연구자이자 제3세계, 그중에서도 재일코리언, 재일중국인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 연대에 정력적인 활동을 펼친 인물이었다. 추측컨대, 한국어판 『사요나라, 짜이젠』이 출간된 구체적 계기는 1981년 일본 카와사끼(川崎)에서 열린 제1회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AALA)문화회의였던 듯하다. 여기에는 황 춘밍은 물론 타나까도 참여했는데, 그 회의기록이 1983년 창비 ‘제3세계총서’ 제11권 『民衆文化3世界』로 출간되었다. 『사요나라, 짜이젠』 「역자해설」에서 이호철이 황 춘밍의 발언을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3) AALA문화회의가 황 춘밍의 존재를 한국에 인지시키는 한 계기였음은 분명해 보인다.

1AALA문화회의가 왜 일본에서 개최되었는지, 그 구체적 배경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적다. 자본주의진영과 사회주의진영을 각각 제1세계와 제2세계로 보는 서구식 제3세계론이나, 미·소를 제1세계로 보고 나머지 부국(富國)을 제2세계로 보는 마오 쩌뚱(毛澤東)의 ‘삼개세계론(三個世界論)’ 어느 쪽도 일본을 제3세계로 분류한 경우는 없었다. 다만, AALA문화회의의 전신인 AA작가회의에 일본이 상임이사국으로 참여했던 점을 보아 당시 비동맹진영 내부의 복잡한 힘관계를 예측할 수 있거니와,4) 김지하, 김대중 구출운동 등 1970~80년대 일본 기층의 광범위한 제3세계 민중연대 활동5)이 일본에서 AALA회의가 부활하는 기틀을 닦았을 것이라 생각된다. 기조발표에서 하리우 이찌로오(針生一郞)가 민중문화운동을 통한 일본과 제3세계의 관계 회복을 강조했던 것6)이나, 이 회의에 이르러 한국이 비동맹운동 관련 회의에 처음으로 초대받은 것 또한 이런 배경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상의 문맥에서 보건대, 「두 페인트공」이 「칠수와 만수」가 되어 1980년대 한국 민중문화의 상징으로 떠오른 것은 결코 우연한 현상이 아니었다. 크게는 반둥회의(1955)의 문화적 산물이라 할 AA작가회의의 후신 AALA문화회의로 표상되는 제3세계 운동의 흐름 속에서, 작게는 식민지시기 아시아에 지은 죄를 제3세계 민중연대로 대속하려는 일본 지식인들의 손을 거쳐, 1980년대 때마침 성숙기에 오른 한국 민족・민중문화의 토양 위로 결실을 맺은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동아시아에 가득한 민중문화의 열기 속에 한국과 조우했던 대만문학은 애석하게도 원작자의 실종으로 인해 합당한 이름을 얻지 못한 채 잊혀져갔다. 역설적으로 양국에서 독재정권이 물러나고 민주화가 시작된 1987년을 기점으로 양국 관계는 더 멀어져, 마침내 1992년 한중수교 직후 단교에 이른다.

 

 

2. 동아시아 교차선상의 ‘향토문학’

 

대만문학이 한국과 만나는 접점으로 가는 길목에 또 하나의 주목할 만한 선집이 있다. 한중수교를 앞둔 1989년 ‘중국현대문학전집’이 중앙일보사에서 출간되었다. 허세욱·김시준·유중하·성민엽 등 중국현대문학계의 원로와 소장으로 구성된 편집진의 기획 아래 총20권으로 구성된 이 전집 중 제16권과 17권이 대만문학에 할애되었다. 16권에는 바이 셴용(白先勇)의 「대북 사람들(臺北人)」이 홍콩소설 「반하류사회(半下流社會)(趙滋蕃)와 함께 수록됐고, 17권에는 천 잉전(陳映眞)의 「야행화차(夜行火車)」를 비록하여 작가 11명의 단편이 실렸다. 무엇보다 이 선집은 당시 대만문학의 상반된 두 흐름을 보여주고 있어 흥미롭다. 초창기 대만유학파이자 중문학계의 원로인 허세욱(許世旭)이 모더니즘 문학의 거두 바이 셴용을 택한 데 반해, 소장파 연구자 유중하(柳中夏)는 대만 모더니즘의 맹목적 서구추종을 비판하며 현실참여적 문학을 주장했던 ‘향토문학’ 계열로 선집을 구성했던 것이다.

먼저 짚어두고 싶은 것은, 제17권 『야행화차』의 한국 출간이 1977년에서 78년 사이 고조에 올랐던 ‘향토문학 논쟁’을 통해 대만문학이 동아시아 지식계의 시야에 진입했던 상황과 긴밀하게 연관되어있다는 사실이다. 『야행화차』의 수록작을 선별하는 과정에는 대륙에서 나온 『대만소설선』(전3권, 人民文學出版社 1979, 1981, 1987)과 일본의 ‘대만현대소설선’ 씨리즈(전3권, 硏文出版社 1984~5)가 참고가 되었다. 대륙판 『대만소설선』은 바이 셴용 등 한둘을 제하면 대부분 향토문학 계열의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다. 문혁 종결 직후 대만정책이 전향적으로 바뀌던 대륙의 정치적 분위기 속에 출간된 이 선집은, 대만문학이 과거의 서양숭배적 문화풍토를 반성하고 “향토로 회귀”하고 있음을 칭찬하면서 사실상 대만문학을 대륙 현실주의 문학전통 안으로 편입시키고 있었다.7) 일본 켄분(硏文)출판사판 ‘대만현대소설선’의 편자 마쯔나가 마사요시(松永正義)의 회고에 따르면, 대륙판 『대만소설선』의 실제 편자 우 즈춘(武治純)에게 직접 들은 바, 당시 대륙은 향토문학 논쟁을 통해 대만문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이 선집 이후 대만문학에 대한 연구도 활발해졌다. 이런 동향이 일본 중문학계에 전달된 덕도 있지만, 일본이 대만 현대문학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 역시 1977~78년 사이 절정에 오른 ‘향토문학논쟁’이었다.8)

일본이 대만 향토문학에 주목하기 시작한 사회적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 마쯔나가의 회고를 좀더 들어보자. 그에 따르면 일본에서 대만연구는 1970년대 들어 독립된 학문영역으로서 전기를 맞게 된다. 여기에는 우선 당시 전세계적으로 흥성했던 ‘소수자 복권운동’의 영향이 컸다. 그런 가운데 재일조선인, 재일중국인, 홋까이도오의 에미시인(蝦夷人), 오끼나와인 등의 권익 문제가 제출되었고, 또 일본의 대아시아 경제침략에 대한 아시아 각지의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다시 한번 식민통치의 과거청산 문제가 사회적으로 이슈화되었던 것이다. 또한 1970년대 이후 민주화운동을 통해 대만사회가 안으로부터 변하기 시작한 것도 중요한 요소였다.9) 앞서, 일본에서 최초로 번역된 대만소설집 『さよなら・再見』의 편자 타나까 히로시 또한 일본사회에서 아시아 연대운동을 주도한 인물이었음을 상기한다면, 이 시기 일본의 대만 논의는 단순한 학술연구 차원을 넘어 운동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일본 내 반성적 지식인들의 아시아 민중연대가 1970년대 대만의 민주화운동과 교차하던 중, 1977~78년의 향토문학 논쟁이 일본 중문학계의 시야에 포착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한국의 상황은 어땠을까. 199210월 한국중국현대문학학회 주최로 열린 ‘대만현대문학’ 국제회의에서 김시준(金時俊)은 이렇게 기조발제를 시작했다.

 

‘대만현대문학’은 중국현대문학을 연구하는 우리에게조차 매우 낯선 문학으로 알려져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에 대만에서 ‘향토문학 논쟁’이 발생하고 그 내용이 우리에게 알려지면서 대만문학을 새롭게 인식하기 시작하였고, 이것은 우리나라에서 1960년대 있었던 제3세계문학의 민족문학 논쟁과 또 1980년대 중반부터 일기 시작한 중국대륙에서의 제3세계문학 논의와 연관되어 우리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10)

 

위 구절은 한국이 대만 향토문학에 주목하게 된 데 중국, 일본과 유사하면서도 다른 계기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바로 1970년을 전후하여 한국문단의 이론과 창작의 중요한 쟁점으로 떠올랐던 ‘민족문학론’이다. 원고로 남아 있지 않지만 이 회의에 제출된 유중하의 발표문 제목 ‘60년대 문학의 지형: 한국 민족문학론과 대만 향토문학론의 교차대비’11) 또한 이 점을 짐작케 해준다. 이후 2000년의 어느 글에서 유중하는 월러스틴(I. Wallerstein)의 ‘세계체제론’과 백낙청()의 ‘분단체제론’ 사이를 매개하는 중간항으로서의 ‘동아시아론’이라는 구조로 90년대 창비 담론지형을 정리하면서, 그 중간항의 구체적 고리의 부재를 일갈한 바 있다. 거기서 그가 제시했던 것이 ‘분단된 남북문학과 양안(兩)문학’이었다. 1960년대 대만문단을 횡행한 모더니즘과의 대결 속에서 1970년대 향토문학이 부상하는 과정은 순수-참여 논쟁으로부터 민족문학론이 부상하는 한국의 맥락과 매우 흡사하다.12) 양자의 유사한 구조와 맥락에 대해서는 더 진전된 연구가 있어야겠지만, 여기서는 1970년을 전후하여 한국과 대만의 유사한 사회구조가 문학장에서도 재생산되고 있었음을 확인하는 정도로 정리해둔다.

 

 

3. 리얼리즘과 모더니즘

 

1980년대 대만문학이 동아시아와 만나는 상황의 특수성은, 1990년대 초반 미국에서 나온 두 연구와 비교할 때 한층 도드라진다. ‘리얼리즘’ ‘제3세계’ ‘민족문학’ ‘민중운동’ 들이 향토문학을 받아들이는 전자의 주요 키워드였다면, 후자는 그것을 모더니즘으로 읽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대만계 미 중문학자 이본느 창(Sung-sheng Yvonne Chang)은 향토문학을 모더니즘과의 대결구도 속에서 파악해온 그간의 연구경향이 “모더니즘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 주장했다. 그녀에 따르면 향토문학의 발원지라 할 『원쉬애지칸(文學季刊)(1966년 창간)의 창간 멤버 천 잉전(陳映眞)과 이 잡지가 발굴한 당대의 스타작가 황 춘밍은 사실 1960년대 대만사회를 풍미했던 모더니즘의 기운 속에서 태어난 인물이다. 그런 만큼 의식했든 아니든 ‘향토문학’ 작가들이 모더니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13) 이에, 창은 황 춘밍 문학의 모태인 ‘향토성’을 모더니즘으로 재구축하기에 이른다.

 

그런 방식(「익사한 고양이인용자)은 근대성에 대한 준비된 환멸을 반영하는데, 이는 대부분의 황 춘밍 평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리얼리즘적’인 것이 아니다. 향토문학론자들의 믿음과 달리, 이는 향토문학만의 배타적인 특징이 아니라 (왕 원싱王文興에게서도 발견되는) 모더니스트의 핵심적 관점인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그의 작품들이 사회주의적 메씨지가 아닌, 무엇보다 휴머니즘적 메씨지를 전달하고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테크놀로지와 민주주의를 비롯한 근대문명을 인간성의 기본 가치를 위협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 황 춘밍의 초기 작품들은 개인의 내면의 경험을 정교하게, 고도로 섬세하게 다루었으며 인간성의 종국적 확신을 위한 수단으로서 비극적 초월이라는 낭만적 관념을 자주 운용했다.14)

 

「익사한 고양이(溺死一隻老猫)(1967)는 칭취앤촌(淸泉村)에 수영장 시설이 들어오는 것에 반대했던 아성(阿盛) 노인이 완공식날 풀(pool)에 뛰어들어 죽는다는 내용의 단편이다. 1960년대 최고조에 오른 경제개발에 유린당하는 향촌의 풍경을 풍자적으로 고발한 이 작품은 오랫동안 향토문학의 대표적 성취로 간주되어왔다. 그런데 창은 아성의 죽음을 “정체성 상실에 대한 실존주의적 공포”15)로 재해석함으로써 이 작품을 모더니즘으로 끌어온 것이다. 이런 해석은 향토문학진영의 리더 천 잉전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다. 「시골 선생님(鄕村的敎師)(1960) 등 천 잉전의 초기작에 빈번히 등장하는 ‘고뇌하는 지식인’의 역사와 현실에 대한 개입 의지는 언제나 실존적 비관 속에 잠식당하고 마는 것으로 해석되었다.16)

제프리 킨클리(Jeffrey C. Kinkley) 역시 ‘향토문학’에 관한 유사한 시각을 제기했다. 천 잉전의 소설을 리얼리즘이 아닌 모더니즘으로 볼 것을 주장한 이 글은 사실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의 ‘제3세계문학론’을 은근히 겨냥한 것이다.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근본적인 단절”(a radical split between the private and the public)로 대표되는 1세계 문학과 달리, 개인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간의 긴밀한 관련성을 3세계문학의 특징으로 부각했던 제임슨에 대해,17) 킨클리는 천 잉전의 작품이 3세계가 아닌 1세계의 문학전통에 부합한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천 잉전의 인물이 겪는 내면적 고투는 사회적 억압이라는 보이는 적이 아닌, 존재를 위협하는 형이상학적 적과 싸우는 실존적 싸움이다.18) 특히 흥미로운 대목은 「야행화차」(1978)의 결말에 대한 다음과 같은 해석이다.

 

인정하건대 이는 분명 ‘세계체제에 대한’ 성공적인 ‘저항’이며, 행복한, 그리고 다소 정치적인 결말이다. 그러나 남쪽으로 가자는 말에서 연상되는 이미지, 즉 광활한 사막으로의 항해, 한밤중에 덜컹거리며 타이베이에서 남하하는 화물차 들은 그런 ‘메씨지’에 어딘가 모호한 색조를 덧입힌다. 그 기원으로 볼 때 화물열차는 에일리언 같은 외계인 침입자에 대한 오싹한 상징이 되기 쉽다. 아마도 천 잉전의 가장 흥미진진한 수완은 대만 본성인(本省人) 주인공을 사회 부적격자로 주조하고 또 대륙인 여인과 대만인 남자의 상호구제적 결혼을 가장 불건전한 구애를 통해 성사시킨 데 있을 것이다. 이런 모티프들은 천 잉전의 초기 소설에서 비롯한다.19)

 

중편 「야행화차」는 앞서 언급한 중앙일보사판 대만문학선집 『야행화차』의 표제작이기도 하다. 다국적기업의 권력구조와 그 속에 빌붙어 살아가는 대만인의 굴욕적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줌으로써 대만사회의 대미 종속성을 비판한 이 작품은, 마침내 미국인 사장의 면전에 사표를 내던진 주인공이 미국으로 떠나려던 애인의 손을 부여잡고 고향행 남행열차에 올라타는 장면으로 끝난다. 미국의 허상을 깨고 현실회귀의 다짐을 재확인함으로써 향토문학의 기치를 선명하게 드러낸 이 소설에 대해, 한국어판 선집의 편자는 “제3세계 민족해방 문제”와 관련하여 “향후 대만의 방향을 강력하게 시사”했다고 말한 바 있다.20)

반면, 같은 결말로부터 모종의 ‘불길함’을 읽어내어 이 작품에 ‘1세계성’을 부여하려는 킨클리의 시도는 어딘가 반어적이다. 사실, 킨클리가 천 잉전의 ‘1세계성’을 강조한 데는 그의 작품이 도덕적·이데올로기적 중압으로 인해 문학적 성숙도가 떨어진다는 그간의 평에 대한 반발이 작용하고 있었다. 천 잉전의 소설에 사회적・정치적 분석의 요소가 들어 있긴 하지만 언제나 모호하게 처리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이데올로기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21) 이런 자상한 독해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가 느껴지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의문 때문이다. 즉 사회와 정치에 대한 투신(投身)이 이데올로기로 환원되지 않는 작품의 예술성에 대한 찬사가 왜 “1세계적, 즉 서구 주류문학의 전통”22)으로 귀결되어야 하는가.

먼저 살펴봐야 할 것은 킨클리의 반박에 전제되어 있는 제임슨의 ‘제3세계론’에 대한 모종의 곡해이다. 제임슨이 개인적 리비도를 다루는 사적인 텍스트 안에 알레고리적으로 투사된 “정치적 심급”(a political dimension)을 ‘제3세계문학’의 특징으로 강조한 데는,23) 양자 사이에 깊이 파인 심연으로 인해 “‘지식인’이라는 단어가 멸종된 종()처럼 시들어버린” 서구 지식계를 향한 비판이 담겨 있었다. 루 쉰의 「광인일기」에 대한 분석이 “맑시즘적 전통으로부터 ‘문화대혁명’의 의미를 되살리자”는 제언으로 연결된 것도 그런 맥락에서이다. 그가 볼 때 문화대혁명의 핵심은 ‘문화’를 주관적·추상적인 것으로부터 객관적·집단적 정신의 영역으로 되돌리려는 데 있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문학적 실천이 곧 정치적인 것임을 의식하지 못한 채 좁은 전공영역에 갇혀 있는 서구의 지식인이야말로 루 쉰이 절망했던 ‘철방(iron room)에 갇힌 자들’이었던 것이다.24)

반면, 킨클리는 제임슨이 ‘제3세계론’에 투사한 저항적 가치를 생략한 채, 1세계와 3세계를 예술적 우열의 관계로 도치시켰다. 천 잉전을 ‘성숙한 예술성을 갖춘 1세계적’ 작품으로 읽어주려는 그의 선의가 미심쩍게 여겨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여기에는 암암리에 리얼리즘에 대한 모더니즘의 우위가 전제되어 있다. 그는 ‘사회적인 것’을 거절하고 ‘개인의 실존’을 배타적으로 고수하는 것으로 모더니즘을 한정하고 그것을 다시 “서구 주류적 문학”으로 연결시켰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킨클리는 제임슨이 개탄했던 1세계문학의 현실—공과 사의 분열(the public-private split)25)—을 문학작품의 예술성을 가늠하는 척도로 다시 불러내어 그것으로 3세계문학의 가치를 증명하려고 했다. 그러나 뒤집어보면 역사적인 주제를 개인의 실존적 문제로 모호하고 복잡하게 그려냈다는 그와 이본느 창의 해석은 비서구 문학텍스트에 개인적 리비도와 사회적 경험이 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제임슨의 주장을 반복하고 있는 것 아닌가.26)

이런 문제점들이 남지만, 킨클리와 창이 향토문학을 보는 새로운 창()을 열어준 것만큼은 분명하다. 이들의 말처럼 향토문학이 자신의 탯줄인 모더니즘으로부터 전적으로 벗어나기란 불가능했을 것이다. 또한 천 잉전과 황 춘밍 작품의 ‘모던 필’(modern feel)은 이들을 운동적 차원뿐 아니라 예술적으로도 높이 평가하는 중요한 근거이며, 향토문학진영에서 그것을 이론적으로 충분히 밝혀내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아울러 향토문학이 50년대 반공이념에 기반한 순수문학과 70년대 새로운 국면에 도달한 모더니즘을 통째로 부정함으로써, 바이 셴용이나 왕 원싱 같은 성숙한 모더니즘에 대한 합당한 평가를 방기했다는 지적도27) 경청할 대목이다. 여기에 1968년을 전후하여 대만에서 좌와 우, 마오()와 코카콜라, 천 잉전과 장 아이링(張愛玲), 혁명과 로큰롤이 사실 하나의 코드, 즉 큰 틀에서 국민당의 보수적 독재에 대한 저항의 아이콘으로 받아들여진 사회문화적 상황28)을 고려할 때, 모더니즘의 이중성을 충분히 양지하면서 60년대 시대상을 반영하는 산물로서 역사적 의미와 한계를 균형있게 평가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를 테면, 바이 셴용과 함께 모더니즘의 양대 거두로 꼽히는 왕 원싱의 『집안의 변고(家變)(1972)가 왜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도 대만문학의 정전으로 자리잡고 있는지, 그것이 그려낸 ‘분노하는 청년’의 상이 왜 그토록 대만의 젊은층을 열광시켰는지에 대해 향토문학은 정면대결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1980년대 들어 향토문학을 문단의 중심에서 거세게 몰아낸 포스트모더니즘과 ‘대만 본토주의 문학’의 물결은 향토문학이 당시 제대로 승부하지 못했던 모더니즘의 대반격인 셈이다.

 

 

4. 민족문학과 향토문학

 

향토문학과 모더니즘의 관계는 분명 우리에게 어떤 기시감을 준다. 419혁명을 계기로 기성 반공(순수)문학에 대한 반발로부터 순수-참여 논쟁이 벌어졌고, 김수영과 신동엽이라는 다른 경향의 두 시인을 통해 이룩된 ‘참여문학’의 이론적 성숙 속에서 1970년대 민족문학론이 발진했다. 50,60년대 권위주의 체제에 저항하여 문학의 사회적 책임을 제기했다는 점, 창작방법으로서 (‘사실주의’가 아닌) ‘현실주의’를 내세우고 이념적으로 ‘민족’ ‘민중’ ‘제3세계’를 강조했다는 점, 식민지시대 좌익문학의 맥을 계승하고 모더니즘과의 대결 속에서 성장해나왔다는 점 등에서 민족문학과 향토문학은 분명 예사롭지 않은 유사성을 보인다. 그러나 한국의 민족문학이 90년대까지 지속되었던 데 반해, 향토문학은 1977~78년 향토문학 논쟁을 정점으로 빠르게 쇠락해갔다. 훗날 어느 글에서 천 잉전은 향토문학이 단명했던 주 원인으로 이론적 정교화와 창작 실천의 부족을 들었다. 안으로는 ‘향토’ ‘민족’ ‘민중’ 같은 개념들이 명료하게 정리되지 못했고 밖으로는 ‘모더니즘’에 대한 비판과 분석이 빈약했기에, 또다시 밀려오는 서양의 박래품(舶來品) 포스트모더니즘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29)

한국의 민족문학론이 80년대 민중문학진영과의 치열한 논쟁을 거쳐 ‘리얼리즘론’으로 정립되고, 90년대 포스트모더니즘의 조류에 맞서 “모더니즘과의 대결이라는 과제”30)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이론적 정립단계를 맞은 것에 비한다면, 대만의 향토문학은 한순간에 맥없이 사라진 것이 사실이다. 물론 거기에는 대만의 특수한 정치적·문화적 상황이 있었다. 1979년 까오슝(高雄) 사건으로 대다수 좌파 계열의 작가들이 투옥되면서 향토문학은 진영 자체가 와해되었다. 게다가 근 40년에 달하는 계엄의 종결과 함께 찾아온 ‘민주화의 봄’은 아이러니하게도 ‘반중(反中)’ 콤플렉스와 뒤얽힌 ‘대만민족주의’를 길러냈다. 90년대 대만의 문화계는 ‘탈중국성’으로 변환된 대만판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문학생애 전반을 통해 일관되게 ‘조국통일’을 주장했던 천 잉전의 입지는 가파르게 줄어들었던 것이다.

천 잉전 문학의 ‘제3세계성’을 반추하는 최근의 어느 글에서, 대만학자 천 꽝싱(陳光興)은 황석영(黃晳暎)의 『오래된 정원』(창작과비평사 2000)을 그의 앞에 마주세운다. 오랜 장기수 생활을 마치고 나온 현우가 윤희와의 추억이 담긴 옛 은신처를 찾아가는 장면에서, 천 꽝싱의 가슴은 형언할 수 없는 감격으로 먹먹해진다. 그것은 그에게 마치 이렇게 말해주는 듯하다.

 

우리는 졌다. 그러나 최선을 다했음에, 우리는 자부한다. 우리 사회가 마침내 압제의 사슬에서 벗어났다는 데, 저항으로써 ‘체제순응’이란 죄의식을 떨쳐냈다는 데, 우리는 자부한다. 우리가 이룬 것은 많지 않고, 민주의 길은 아직 멀다. 그러나 우리의 참여와 창조는 오늘날 사회 곳곳에 민간의 활력을 발산시켰다.31)

 

분단과 독재가 한국 현대사에 남긴 상처가 대만이라는 컨텍스트로 옮겨가서도 아련한 아픔을 전달하는 이 상황은, 양국간 깊은 곳에 숨겨진 유대를 새삼 감지케 한다. 담론으로서 향토문학은 사라졌지만 그것이 제기한 문제는 아직도 유효하다. 대만의 해방이 전 중국의 해방, 나아가 전 인류의 해방 속에서 가능하다는 천 잉전의 믿음은, 중국과의 오랜 대결구조 속에 파인 종족갈등과 사회분열의 소용돌이로부터 좀처럼 헤어나지 못하는 오늘의 대만사회가 되새겨야 할 금언이다. 근래의 대만문학이 이런 문제를 어떻게 풀어가고 있는지는 따로 검토할 일이지만, 「귀향」(1999) 「밤안개」(2000) 「충효공원」(2001)32) 등 식민과 분단, 냉전을 아우르는 거시적 시야로 대만의 과거와 현재를 조망한 천 잉전의 중단편들은 그중 주목할 만한 성과임에 틀림없다. 특히 국공내전 중 대륙에 남겨져 노년이 되어서야 고향을 찾지만 형제들의 냉대 속에 돌아서고 마는 「귀향」의 주인공이나, 계엄시기 수많은 탄압과 학살에 가담했던 과거에 짓눌려 신경쇠약으로 죽어가는 「밤안개」의 인물에는, 황석영의 『손님』(창작과비평사 2001)의 주인공 류요한의 형상이 편린처럼 흩어져 있다. 오랜 공백을 건너, 어느새 대만문학과 한국문학이 또다시 서로를 향하고 있는 것이다.

향토문학과 민족문학은 분명 역사의 지나간 자취이다. 그러나 문학이 어떻게 현실에 개입하여 궁극적으로 인간해방의 과제에 기여할 것인지를 묻는 진지한 탐색은 바뀐 시대와 조류 속에서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얼마 전 우리 평단의 쟁점으로 떠올랐던 ‘시와 정치’ 논의는 미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관계를 새로운 세대의 감성지도 안에 재배치하는 시도라 할 수 있다. 즉자적 정치성을 넘어서면서도 현실 개입의 의지를 놓지 않으려는 젊은 비평가들의 고민은 필경 민족문학과 90년대 ‘리얼리즘’의 유산 위에 있다. 문단은 아니지만, 최근 대만은 천 잉전의 문학과 사상을 재평가하는 일련의 작업이 진행중이다.33) 특히 ‘제3세계론’을 비롯하여 중국과 일본, 한국과의 관계 속에서 천 잉전을 새로 읽으려는 대만 지식계의 시도에 대해 우리도 마땅히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민족문학론 또한 대만을 비롯한 주변 지역의 문화지형과 횡적으로 연계할 때, 과거에 보지 못한 새로운 맥락과 의미를 찾게 될지 모른다. 민족문학과 향토문학을 출발점으로 삼아 20세기 후반 동아시아를 가로질러 존재했던 특정한 문화유산의 흔적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동아시아문학’이라는 새로운 논의의 장이 열리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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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중국현대문학』 제58호(2011.9)에 발표한 논문 「동아시아 속의 향토문학」을 개고한 것이다.

1) 2007년 연우무대 30주년을 기해 「칠수와 만수」 재공연을 알리는 연합뉴스(2007.3.29.)의 기사는 「칠수와 만수」가 “자타가 공인하는 1980년대 한국 최고의 창작극”이라 전하고 있다.

2) 『창작과비평』 1979년 가을호 ‘제3세계특집’은 이런 지적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이 특집의 기조논문 「제3세계와 민중문학」에서 백낙청은 4・19 이후의 참여문학론이 민족문학론으로 심화되는 과정에 ‘제3세계문학’이 결락되었음을 반성적으로 자각하면서, 제3세계 민중의 관점에서 외국문학을 주체적으로 수용할 때 당면한 리얼리즘론-민족문학론을 보완할 수 있다고 말했다.

3) 여기서는 “1982년 토오꾜오에서 열린 심포지움”이라 되어있는데, ‘카와사끼’에 대한 오기(誤記)이다. 黃春明 『사요나라, 짜이젠』, 이호철 옮김, 창작과비평사 1983, 281~82면; 일본 아시아·아프리카(AA)작가회의 편 『民衆文化와 第3世界』, 신경림 옮김, 창작과비평사 1983, 227~29면 참조.

4) 비동맹운동이 AA작가회의 그리고 AALA문화회의로 이어지는 과정의 속사정에 대해서는 최원식 「다시 살아난 불씨: 제2회 인천 AALA문학포럼에 부쳐」 (제2회 인천 AALA문학포럼 기조발제문 2011.4.28) 참조.

5) 이께가미 요시히꼬(池上善彦)는 당시 토오꾜오가 아시아의 주요한 인물과 문화정보가 교류하는 창구로서 일종의 ‘피난도시’적 기능을 지니고 있었다고 말한다.「後日本の左派におけるアジア連帶」 (亞洲現代思想計討論會 발표문. 2010.11) 참조.

6) 針生一郞 「민중의 문화가 세계를 바꾸기 위하여」, 일본 AA작가회의 편, 같은 책 13~19면

7) 臺灣小說選編輯委員會,『臺灣小說選 2』(中國人民文學出版社 1981) 540~42면 「編輯後記」 참조.

8) 松永正義 「關于日本的臺灣文學硏究」, 『중국현대문학』 제7호 1993, 245면.

9) 松永正義, 같은 글 243~44면 참조.

10) 김시준 「臺灣現代文學의 歷史와 動向」, 『중국현대문학』 제7호(1993) 1면.

11) 『중국현대문학』 제7호(1993), 「휘보」 279면.

12) 유중하 「세계문학, 민족문학 그리고 동아시아문학」, 『황해문화』 제27호(2000년 여름) 52~57면 참조.

13) Sung-sheng Yvonne Chang, Modernism and the Nativist Resistance (Durham & London: Duke University Press, 1993), 151면.

14) 같은 책 155면.

15) 같은 책 156면.

16) 같은 책 165~66면.

17) Fredric Jameson, “Third-world Literature in the Era of Multinational Capitalism,” Social Text, No. 15 (Fall, 1986), 69면.

18) Jeffrey C. Kinkley, “From Oppression to Dependency: Two Stages in the Fiction of Chen Yingzhen,” Modern China, Vol. 16, No. 3 (Jul., 1990), 251~52면.

19) 같은 글 257면.

20) 유중하 편역 『야행화차 외』, 중앙일보사 1989, 370면.

21) Jeffrey C. Kinkley, 앞의 글 244~45면.

22)같은 글 251면.

23) Frederic Jameson, 앞의 글 69면.

24) 같은 글 74~77면. ‘철방의 외침’이라는 루 쉰의 비유를 제임슨이 활용한 것이다. 「광인일기」를 쓰기 직전, 루 쉰은 어느 친구에게 지금 중국인은 철방 안에 갇혀 질식해 죽어가지만 잠들었기 때문에 자신의 죽음을 모른다고 말했다.

25) 같은 글 71면.

26) ‘제3세계문학’을 개념화하려는 제임슨의 시도 자체에 대해서는 물론 비판의 여지가 있다. 아이자즈 아흐마드는, 세계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지구적 확산과 그에 대한 저항이라는 단일한 원리로 이루어져 있을 뿐이며, ‘제3세계’를 특징화하는 것은 동질성(homogeneity)에 기반하여 비서구를 타자화하는 서구주의라 비판한다. 정통 맑스주의에 기반하여 그는 ‘제3세계문학론’이든 ‘제3세계론’이든 모두 자본주의와 타협한 부르주아 이론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Aijaz Ahmad, In Theory: Classes, Nations, Literatures, (London & New York: Verso, 1992) 제1장, 3장, 8장 참조. 그러나 마오 쩌뚱의 ‘삼개세계론’의 문제성을 염두에 둔다 하더라도, ‘제3세계(문학)론’이 특정 시기 동아시아 지식계에서 담당한 진보적 역할 자체를 부정하긴 어렵다. ‘제3세계(문학)론’이 서구와 동아시아 지식계에 남긴 공과에 대해서는 별도의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

27) Sung-sheng Yvonne Chang, 앞의 책 162~69면.

28) 鄭鴻生 「臺灣的文藝復興年代: 七十年代初期的思想狀況」, 『思想』 第4期(2007.1) 81~102면.

29) 陳映眞 「回顧鄕土文學論戰」, 薛毅 編 『陳映眞文選』(三聯書店 2009) 136면.

30) 백낙청 「리얼리즘에 관하여」,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2』 (창작과비평 1985) 360면.

31) 陳光興 「陳映眞的第三世界」, 『臺灣社會硏究』第84期(2011.9) 142면.

32) 陳映眞 『충효공원』, 주재희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1.

33) 『臺灣社會硏究』 第78期, 第84期가 ‘천 잉전 특집호’로 꾸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