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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재앙의 서사, 종말의 상상

근래 한국소설의 한 계열에 관한 검토

 

 

황정아 黃靜雅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묻혀버린 질문: ‘윤리’에 관한 비평과 외국이론 수용의 문제」 「인권의 보편성과 정치성」 등이 있음. jhwang612@hanmail.net

 

 

1. 불길하고 불안한 세계

 

강도는 높지만 또 그만큼 모호해서 어느 먼 디스토피아의 묘사에나 어울릴 듯 보였던 재앙, 파국, 종말 같은 단어들이 상당한 현실감을 갖게 된 지도 오래다. 세계가 끝날 수 있겠다거나 최소한 심각한 지경에 처했다고 진단할 근거를 누구라도 막힘없이 나열할 것이다. 환경과 핵, 쓰레기와 전염병을 비롯해 재앙 앞에 붙을 수 있는 수식어가 늘어났고 금융, 전쟁, 식량, 자원 등 위기의 종류도 다양해졌다. 얼마 전 개최된, 세계 ‘지도자급’ 모임이라는 세계경제포럼의 개막쎄션 주제가 ‘20세기 자본주의는 21세기 사회에서 실패한 것인가’였다고 하니, 이제 단순한 경제위기를 넘어 자본주의의 위기라는 표현도 거의 누구나 쓰기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돌이켜보면 자못 아쉬운 척 선언된 후꾸야마식 역사의 종말은 꽤나 가소로운 것이었음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사태의 비상함에 대한 실감이 이토록 깊어진 데는 세계적 규모의 비관적인 관측만 작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정도는 넘어왔다고 생각한 것들, 그래서 앞으로 다시는 마주치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것들이 버젓이 삶의 한가운데 있음을 새록새록 발견할 때도 재앙과 파국의 감각은 예민해진다. 이제는 삶의 질이 문제라고 말하고 싶은 순간, 그저 살아 있다는 데 감사하라는 듯 위태로운 고비들이 해고와 빈곤과 질병과 고립의 모습을 하고 일상의 길목마다 도사리고 있다. 지난 몇년간 우리 사회의 대다수 사람들을 극도로 시달리게 만든 민주주의의 야만적 후퇴 또한 위기의식을 가중시키는 데 한몫했다. 실상 ‘후퇴’라는 단어로도 모자란 상식의 진공상태와 그것이 야기하는 ‘무슨 짓이건 가능하다’는 분위기는 무언가 방어선이 무너진 느낌을 자아낸다.

그런데 세계가 이토록 불길함을 자아내고 따라서 도무지 안심하고 편승할 수 없기에 깊어지는 것이 불안과 혼란의 정서만은 아닐 것이다. 이면과 그늘을 포함하여 세계를 더 자세히 들여다보려는 노력, 바닥과 심연까지 놓치지 않고 문명의 진면목을 성찰하려는 의지도 함께 깊어졌을 것이다. 일차적으로 이런 변화는 유독 이면과 심연에 주목하는 시선으로 나타나고, 문학에서도 이같은 움직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현재의 체제를 이끌어가는 사람들마저 순순히 위기를 인정하는 오늘의 상황이 어딘지 수상쩍다는 느낌도 없지 않다. 지배적 서사의 일부로 보일 정도로 널리 유포되는 재앙이나 위기 담론의 ‘수행적 효과’는 무엇일까.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어떤 감수성을 훈련시키며 어떤 정서적 태도, 나아가 정치적 태도로 기울게 하는 것인지가 궁금해진다.

 

 

2. 재앙의 내재성

 

크리샨 쿠마르(K. Kumar)는 과거 천년왕국의 상상력에서 “낙관주의와 비관주의가 서로를 부양”했음을 지적하면서 여기에 재앙과 종말의 관념이 개입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천년왕국 혹은 좋은 사회가 출현하려면 반드시 엄청난 재앙이 선행한다는 믿음”에서 비롯된다고 설명한다.1) 그에 반해 오늘날 재앙과 종말에 관련된 상상은 포스트모더니즘적인 것으로서 “새로운 시작에 대한 기대 없이 마지막에 관해 강박적으로 고민하는 묵시의 한 형태”이다.2) 하지만 달리 본다면 이런 종류의 묵시는 더 나은 시작에 대한 욕망이나 기대와 무관하게 세상의 위기와 재앙을 직시하려는 태도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여기서 대개 재앙을 일으키고 종말을 재촉하는 것은 세계 바깥의 더 큰 권위가 내리는 심판이나 자연적 기제가 빚어낸 우연이 아니라 바로 세계 자체에 깊숙이 내재하는 원리이기 때문이다.

재앙과 파국의 ‘내재성’에 관한 직관과 통찰은 오늘날의 한국소설에서 하나의 계열을 형성한 주제라고 할 만하다. 여기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가는 아무래도 편혜영(片惠英)이다. 『아오이가든』(문학과지성사 2005)을 위시한 그의 작품들은 쓰레기를 양산한다기보다 쓰레기 자체인 세계를 보여줬고, 역병에 잠식당했다기보다 역병을 구현한 문명의 모습을 외면하고 싶도록 감각적으로 그려냈다. 『재와 빨강』(창비 2010) 또한 사실적 배경과 정황이 좀더 갖추어졌다는 차이가 있지만 마찬가지로 전염병과 쓰레기와 하수구라는 이면과 지하를 강렬하게 투시한다. 주인공의 동선을 따라가다보면, 여전히 유지는 되고 있는 방역의 세계와 하수구의 세계 사이의 경계, 그리고 일상과 범죄적 일탈 사이의 경계가 실질적으로 무의미함을 깨닫게 된다.

돌이켜보건대 『아오이가든』의 세계가 처음부터 이 정도의 실감으로 육박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오히려 작가 특유의 기질이나 취향으로 느껴지기도 했고, 그렇지 않더라도 지극히 예외적인 단면의 과장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불과 몇년 만에 이 작품의 세계에 현실성을 ‘소급 적용’하게 된 데는, 쓰레기와 하수구와 질병과 유혈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동시대에 실제로 존재한다는 발견들의 축적이 일차적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계기는, 이런 삶을 불운이나 일탈로 치부하지 못할 정도로 이 세계에 대해 알 만큼 알게 되었다는 것, 또 그로부터 나온 논리적 귀결로서 우리 자신도 그렇게 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음을 깨닫게 된 점이 아닐까 싶다. 이런 요소들은 서로를 강화하면서 이대로 가다가는 필경 세계 전체가 그렇게 되리라는 미래의 개연성으로 투사되기에 이르며, 그 개연성은 다시 현재에 내재한 속성으로서 소급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편혜영의 작품들이 축조한 재앙의 세계를 상징이라고만 보는 것은 일면적인 파악이다. 그것은 가장 참혹한 버전의 ‘현재’인 동시에 현재를 바라보는 불안한 시선을 포착한 사실적인 지향의 산물이다. 그의 작품에 흔히 나타나는 시공간의 모호함과 논리 연쇄의 단절은 재앙의 내재성을 강조하는 한편으로, 그런 내재성을 반영하면서 구성하는 무정형의 불안한 심리에 긴밀히 조응하기 때문이다.

재앙이 일상과 구분되지 않는 세계를 살아가는 개별 주체의 자리에서는 내재된 재앙이 어떤 트라우마로 실감될 수밖에 없다. 뾰족한 원인과 처방이 있을 리 없고 따라서 해석을 통한 의미부여가 지극히 어려운 재앙에 직면하여 주체는 방향감각을 상실하고 정체성을 의심하게 된다. 그처럼 위태롭게 희박해지는 주체의 상황을 탁월하게 형상화한 예로 황정은(黃貞殷)의 『의 그림자』(민음사 2010) 같은 작품을 꼽을 수 있다. 이 소설에서 철거와 빈곤 등의 사회적 재앙과 ‘일어서는 그림자’라는 비현실적 설정 사이의 간극은 사건과 그 사건을 트라우마로 경험하는 방식 사이의 거리를 지시한다. 역설적일 만큼 매혹적인 장치인 그림자는 주체에게 재앙의 체험이 띠는 무의미의 형식이면서 또한 주체의 소멸이 취하는 무의미의 형식이다. 그림자가 무섭기도 하고 애처롭기도 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강영숙(姜英淑)의 『아령 하는 밤』(창비 2011)에서도 몇몇 작품이 명시적으로 재앙의 주제를 다룬다. 여기서는 재앙이 구제역이나 허리케인 카트리나 등 상당히 구체적으로 등장하는데, 그를 통해 확인되는 삶과 세계의 불안에 초점을 둔다는 점은 마찬가지다. 조류독감과 구제역을 소재로 한 「문래에서」는 큰 새들이 새까맣게 죽어 떨어지고 계곡에 돼지 핏물이 흐르는 죽음과 살육의 공간을 그린다. 방역이나 매장 같은 조치로는 지워지지 않는 압도적인 피냄새는 창틈에 낀 깃털과 아파트 옥외 수도에서 쏟아지는 핏빛 수돗물과 처분 작업에 동원된 남편을 통해 화자의 일상으로 곧장 스며든다. 이 재앙의 세계는 단편적인 장면과 인상을 조합한 상당히 거친 질감의 묘사를 통해 현실감각을 초과하는 이물감을 배가한다.

표면적으로 이 작품은 거기서만큼은 삶이 “그럭저럭 괜찮았다”(11면)고 회상되는 문래와 재앙의 근접지인 변두리 Y지역으로 공간이 이분되어 있다. 문래는 화자에게 “늘 움직이는 생기 있는 몸놀림”(14면)으로 눈길을 사로잡고 “이상하게 그애를 보면 아랫배가 따뜻해”지는(15면) 예술가가 있었던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화자는 “구덩이 위로 흐르는 살육의 공기가 문래까지는 가지 않기를 바”라고 “구덩이 아래 땅으로 흐르는 피가 도시의 그 여자애에게까지는 닿지 않기를 바”라는(28면) 것이지만, 이런 바람과 무관하게 두 공간은 이미 알게 모르게 이어져 있다. 문래에서의 마지막 날 예술가의 작업실에서 화자는 “커다란 눈동자 하나가 가로놓인 몸뚱이는 머리도 다리도 없”는 무시무시한 그림들을 보지만 “왠지 악몽을 꾸지 않았”(16면)던 반면, 피냄새가 진동하는 Y지역에서는 “밤새 문래의 그 여자애 그림 속을 드나든 것”처럼(21면) 악몽에 시달렸다는 대목이 그런 연결점의 하나이다. 그런데 이렇듯 악몽을 부르지 않는 재앙의 형상화와 악몽을 부르는 재앙의 현실 사이에 뚜렷이 감지되는 비대칭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급기야 매장과 살육의 현장에서 화자는 그 여자애를 본다. “그 여자애는 돼지들의 구덩이 위를 긴 머리를 나풀거리며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림을 그리듯이, 작은 벌레가 춤추듯이 계속해서 뛰어다녔다. 나는 발을 동동 구르며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28면). 이 재앙이 그애에게만큼은 닿지 않기를 바라는, 그리고 행여 이미 그렇게 되었을까 안타까워하는 화자의 생각과는 별개로, 악몽 같은 현실 위를 ‘그림을 그리듯’ 뛰어다니는 예술가의 이미지는 재앙을 매개로 이어진 예술과 현실 사이의 어떤 착종 혹은 과잉 향유의 아이러니를 암시한다. 이를 재앙의 서사에 존재하는 위험으로 읽어볼 수 있지 않을까.

 

 

3. 재앙 서사의 정치성과 종말의 상상

 

랑씨에르(J. Rancière)는 오늘날의 미학과 정치에 강력한 영향을 미친 요인으로 ‘윤리로의 전환’(ethical turn)을 이야기한다. 이름으로 미루어 그것을 정치와 예술을 도덕적 판단에 종속시키는 경향이라고 짐작하기 쉽지만, 중요한 핵심은 도덕의 근간을 형성하는 사실과 법 사이의 구별, 존재하는 것과 존재해야 마땅한 것 사이의 구별을 해소하는 데 있다. 랑씨에르에 따르면 ‘윤리로의 전환’은 “규범이 사실로 해소”되는, 다시 말해 사실이 규범을 대체하는 사태를 전제로 한다.3) 한편에서는 판단력이라는 심급이 법의 강력한 권력 앞에 움츠러들고, 다른 한편에서는 법이 어떤 대안도 남기지 않고 사물의 질서가 부과하는 제약과 동일해지는 현상이다. 그렇다면 윤리의 실종이라 해야 마땅할 사태로 보이는데 이를 ‘윤리로의’ 전환으로 이름 붙인 까닭은, 사실이 규범의 자리에 들어서면서 윤리는 그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오히려 절대화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어떤 무한한 악을 경계하는 무한한 의무로 설정되는 것이다. 그럴 때 미학과 정치가 갖는 본연의 특정성이 들어설 입지는 현저히 줄어들 수밖에 없다.

재앙의 서사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점은 랑씨에르가 윤리로의 전환의 주된 특징으로 지목한 “시간 흐름의 역전”4)이다. 역전된 시간은 진보든 해방이든 장차 달성해야 할 목표가 아니라 지나온 과거의 재앙을 향하며 재앙의 형태 사이의 차별은 무화된다. 재앙의 상황이 존재론적 운명이 되어 정치적 불화의 가능성이나 미래 구원의 희망이 소거되는 것이다. 랑씨에르는 윤리로의 전환이 “어제까지만 해도 급진적인 정치적·미학적 변화의 촉발을 목표로 삼던 사유형식과 태도형식 들의 코드를 바꾸고 반전시킬 능력”5)을 가졌다고 우려하는데, 예술에서 이 전환은, 한편에서는 (재현불가능성에 초점을 맞추면서) 끊임없이 재앙을 증언하는 일을 윤리적 의무로 삼는 경향으로, 다른 한편에서는 (그런 재앙을 암암리의 배경으로 삼아) 사회적 유대의 균열을 수선하고 모호한 윤리적 일체감을 고취하는 경향으로 표현된다고 설명한다.

재앙이 트라우마로 경험되는 사태를 그린 작품들이 세계에 내재한 재앙을 가차없이 드러내고 재앙을 감당하는 주체의 불안을 실감나게 전달하고 있음을 앞서 지적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의 재앙 서사가 랑씨에르가 말한 윤리로의 전환과 무관하다고 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재앙의 서로 다른 연원과 맥락과 결과에서 비롯하는 차이가 무화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재앙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든 그것이 피할 수 없이 거기 있고 우리의 실존 자체를 위협할 만큼 강력하다는 사실만이 도드라진다. 재앙의 증언에 몰입하는 윤리란 존재하는 사실에 대한 굴복을 전제한다는 랑씨에르의 비판은 바로 이런 의미이다. 그리고 사실에 대한 굴복과 재앙에 대한 (외설적) 몰입 사이의 거리가 생각보다 훨씬 가까울지 모른다는 것이 재앙 서사가 갖는 또 하나의 위험이다.

하지만 그래서 어떻다는 것인가. 재앙 하나하나를 깨알 같은 사실주의적 맥락에서 재현하거나, 재앙을 넘어서는 영웅적 의지와 대안적 실천이라도 그려야 한다는 이야기가 되는가. 그런 상투적 논리를 끌어오며 랑씨에르의 논의가 결국 낯익은 단순함에서 출발했다고 비판하기 전에, 먼저 재앙의 내재성과 그것의 영속성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재앙을 다룬 이야기에 구현된 내재성이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와 문명의 작동원리가 곧 재앙을 함축한다는 의미지만 동시에 주어진 사태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가리킨다. 지속 가능성의 위기이되 지속하는 위기이며 파국적인 재앙이되 파국에 이르지는 않는 재앙이다. 애초에 ‘새로운 시작에 대한 기대’가 섣불리 끼어들 수 없는 이같은 재앙의 서사에 정작 부재하는 것은 ‘마지막에 관한 고민’, 다시 말해 종말의 상상이다.

이런 논리를 좀더 밀고 나간다면 자본주의의 위기를 공개적으로 운위하는 자본주의체제의 ‘대표자’들에 대해서도 혐의를 제기할 수 있다. 천년왕국의 관념이 엄청난 재앙을 거치지만 그 끝에 출현할 좋은 사회를 기대했다면, 이들의 위기담론은 좋은 사회에 대한 기대란 엄청난 재앙을 수반할 뿐이라는 경고일 수 있다. 그러니 차라리 지속하는 위기를 받아들이며 꾸준히 악화되는 삶에 익숙해질 일이지 변화 따위는 생각하지 말라는 새로운 규율 프로그램 같은 것 말이다. 더욱이 “현존하는 지구적 체제가 무기한 스스로를 재생산할 수 있다는 믿음”이야말로 “진짜 유토피아”이고 “진정으로 현실적이 되는 유일한 길은 이 체제의 좌표 내에서 불가능하다고밖에 보이지 않는 것을 생각하기”6)라는 입장에서 본다면, 위기와 재앙의 지속이란 뜻밖에도 냉엄한 현실주의보다는 유토피아의 영역에 속하는지도 모른다. 체제의 좌표는 ‘규범이 된 사실’의 다른 이름이므로, 이 좌표에서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생각한다는 건 곧 사실이 규범으로 행세하는 현상에 저항하는 일을 말한다. 사실이 규범으로, 나아가 운명으로 가공되는 과정에서 배제되는 것은 다른 좌표들이며 그런 좌표들이 비로소 선명하게 기록해줄 잠재된 대안들의 차원이다.

불가능한 것은 물론이며 생뚱맞기까지 한 종말의 상상이라면 박민규(朴玟奎)의 『핑퐁』(창비 2006)이 있었다. 외계인과의 탁구경기를 통해 인류라는 존재의 ‘인스톨’ 유지 여부를 결정한다는 발상은 드러내놓고 비현실적인 설정인데, 실은 그에 앞서 학교폭력과 인류의 운명을 결부시키는 구도에 이미 과격한 비약이 개입되어 있다. 불행히도 학교폭력은 인류의 어린 구성원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심각한 사안임이 거듭 입증되고 있지만, 이 작품의 못과 모아이는 그 정도의 절박한 상황은 일단 모면해가는 추세인 것도 같고 더욱이 인류의 운명이 걸릴 만큼 대표적인 케이스라고 하기엔 무리가 아닌가. 하지만 바로 그런 식의 대표 운운하는 논리를 정면으로 부인하는 것이 이 작품의 주요한 의제이다.

화자는 그저 왕따 당하지 않는 평범한 삶을 생각해보지만 그렇듯 평범한 ‘인류’에 속한다는 것이 실은 다수인 척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삶일 뿐이며, 나아가 왕따라는 일면 지엽적인 현상의 토대가 인류로부터의 배제라는 또다른 폭력 구조임을 절감한다. 그런 점에서 “인류가 깜박해버린 것과 절대 깜박하지 않을 것 간의 전쟁”(219면)이란 누가 더 대표적이며 그래서 얼마만큼의 몫을 더 얻어내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몫이 없는 자’로서 몫을 주지 않는 세계를 인정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다. 이를테면 “새장에 갇힌 한마리 울새가 온 하늘을 분노케 하는”7) 이치가 바로 이와 같을 것이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인류는 과연 ‘언인스톨’될 정도의 치명적 오류를 보여주었는가 하는 것도 초점을 벗어난 질문이 된다. 하나하나의 대차대조를 꼽아보는 식으로 접근한다면, “이 세계는 그래서 좋다고도, 나쁘다고도 할 수 없는 곳”(118면)이 되고 그리하여 지루한 ‘듀스 포인트’로 지속될 뿐이다. 따지고 보면 듀스 포인트란 원래 승부가 걸린 위기의 순간이지만 한없이 이어지는 듀스 포인트는 오히려 승부를 억압하며 지속되는 위기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여기서는 ‘한판 승부’를 기어코 벌이는 시도 자체가 중요하다. “존재의 질서 내부에서는 결코 그 너머로 사건(Event)의 다른 질서가 시작되는 경계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라서 거기에 “추가적인 비틀림(torsion)을 도입하는 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8)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의 남다른 매력은 탁구경기라는 난데없는 ‘비틀림’을 매우 ‘추가적’으로 도입함으로써 지금의 세계가 우리의 유일한 지평이 아니라는 사실을 비로소 성립시킨 점인데, 그 정점은 마지막에 언인스톨을 선택한다는 데 있다. 언인스톨이라는 ‘경계’까지 확인하지 않는다면 ‘추가적인 비틀림’은 존재하는 세계의 지속을 또 한번 추인해주는 데 그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핑퐁』이 그리는 종말은 ‘존재의 질서’가 작동(혹은 오작동)한 결과가 아니라 ‘비틀림’을 통해 근본적인 차이를 도입한 결과이며, 『핑퐁』이 구현하는 종말의 상상 역시 ‘존재의 질서’에 대한 충실한 재현이 아니라 그 질서가 깜빡한 차원에 접속하려는 노력으로 이루어진다. 여기서의 이질성은 어떤 낯선 ‘좋은 사회’가 아님은 물론이고, 재앙의 내재성에 집중하는 서사들이 중점적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세계 내부의 낯선 ‘섬뜩함’과도 다른 의미이다. 세계의 이면을 응시하여 발견한 것이 역시 세계의 이면일 뿐이고 세계의 바닥을 들어가 닿는 곳이 대개 끝 모를 심연인 반면, 핑퐁의 서사는 서로 다른 층위를 포개거나 잇대어 단절의 틈을 만들고 그 틈으로 세계의 경계를 가늠한다.

 

 

4. 종말의 정치적 주체

 

재앙의 현실을 살아가는 주체가 트라우마에 따른 존재상실의 위험을 겪거나 그런 위험의 공유를 토대로 일말의 연대를 형성한다면,9) 제아무리 파국적인 재앙을 내포하더라도 주어진 현실이 스스로 종결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종말의 주체는 (윤리적 혹은 종교적 주체이기보다) 종말을 감행하는 엄밀히 정치적인 주체가 되어야 한다. 문제는 어떤 행위가 종말의 ‘감행’이 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박민규의 『더블』(side AB, 창비 2010)에는 종말의 행위라는 좌표를 기준으로 가까이 혹은 멀리 놓인 주체들의 위치를 다양하게 보여준다. 예컨대 단편 「끝까지 이럴래」에는 문자 그대로의 세계종말, 곧 인류 마지막 날의 상황에서조차 끝내 종말을 상상하지 못하는 주체가 그려진다.

이 작품은 세상이 종말을 맞을 수 있는 갖가지 개연성있는 방식 가운데 혜성 충돌을 장치로 배치하고 애덤스니 에드워드 창이니 하는 영문 이름까지 동원하여 대놓고 헐리웃 재난영화를 떠올릴 것을 요청한다. 이런 노골적인 환기는 물론 ‘낯설게 하기’를 노린 배경 설정이다. 일종의 뒤집힌 드라마틱 아이러니, 다시 말해 등장인물들은 세상이 끝날 것을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하고) 독자는 모르(면서 그렇게 받아들이)는 상황으로 시작한 이 작품은 층간소음을 내세워 극히 일상적인 세계를 다룰 듯한 인상을 주다가 느닷없이 인류종말의 맥락을 공개함으로써 극적 대조를 만들어낸다. 그리하여 두 이웃 간의 대립 따위는 인류사의 엄청난 사건 앞에 당연히 무화되어, 이제 대립구도는 “끝끝내 이성(理)을 잃지 않”(side A, 149면)고 “신이 원했던 인간의 예의를 잃지 않”는(168면) 존재를 자처하는 두 이웃과 저 불타는 거리에서 날뛰는 “파산자들”(148면) 사이에 그어지는 듯하다. 하지만 그런 예상을 다시 한번 뒤집어놓는 것이 이 단편의 전략이다.

힘든 시간을 묵묵히 견딘다는 식으로 짐짓 헤밍웨이적 코드 히어로 역할을 연기하는 두사람의 묘사는 시종일관 아이러니를 보여주고 있는데, 그 효과는 이들이 하나같이 그럴싸하면서도 근본적으로 너무 상투적인 대사와 태도를 충실히 재연하기 때문에 오히려 극대화된다. 인류종말 같은 사안에 호들갑 떨지 않는 이 ‘대인배’들의 갖가지 진부한 수작과 농담과 주정은 그 자체로 한편의 드라마로서, 여러 단계를 거치는 이 모든 대화와 행동에도 불구하고 두사람이 어떻게 한걸음도 가까워질 수 없는가 하는 점을 흥미진진하게 보여준다. 무엇보다 이 드라마에 인류종말 못지않은 팽팽한 긴장감을 부여하는 것은 강력히 잠재되어 있는 폭력성이다. 폭력의 잠재성은 약간 소심하고 평범한 창의 뒷주머니에 꽂힌 38구경 권총과, (결국 변태 살인자로 밝혀지는) 애덤스가 사람좋은 이웃이자 성실한 시민 연기에 도취하여 간혹 흥분상태에 빠지는 데서 뚜렷이 감지된다.

(변형) 재난물과 (변형) 범죄물이라는 강렬한 두 요소가 버무려진 탓에 층간소음이 갖는 중요성은 더욱 강조된다. 정말이지 세계의 종말이 오더라도 참을 수 없는 것이 내 이웃의 소음인 것이다. 그러나 이를 두고 이익을 위해 언제든 나를 해칠 괴물 혹은 죽음의 공포 때문에 문화적 장치에 매달리는 ‘이웃’이라는 “오래된 외상”을 다루고 있다거나, 인류종말이 목전이지만 “내 집 문을 두드리는 이웃의 두 얼굴은 여전히 낯설고 두렵다”는 식으로 읽는 데는10) 동의하기 힘들다. 여기서 층간소음은 (이웃이라는) 친숙한 형태에 내재하는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을 나타낸다기보다 차마 외면할 수 없는 (인류종말의) 현실조차 묵살할 수 있는 일상적 무감각을 가리킨다. 저쪽 ‘파산자’들의 세계를 중심에 놓고 극한의 상황에 직면하여 변모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리는 통상적 재난물과 달리, 이 작품은 버젓이 ‘이성’을 유지한 인간들로 초점을 옮겨와 종말이 다가온들 인간은 제목 그대로 ‘끝까지 이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그럼으로써 종말적 상황 자체가 종말의 주체를 만들어내지 않음을 방증해준다.

그렇다면 일상을 침범하여 종말적 악몽을 만들어내는 쪽은 어떨까? 「루디」에 등장하는 사이코패스 루디가 바로 그런 존재이다. 사이코패스 킬러 영화를 차용한 이 작품 역시 그같은 장르적 장치를 슬그머니 ‘타고 넘는’ 경로를 밟아나간다. 통속적인 구도라면 이런 범죄자를 어찌어찌 제압하고 끝을 내거나, 좀더 진지한 경우 낯선 ‘타자’와의 조우라는 공식을 따라 진행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루디는 단순 범죄자가 물론 아니지만 그렇다고 자아의 괴물성이 투사된 이면의 존재나 설명할 수 없는 타자도 결국 아니다. 프랑켄슈타인에까지 이어진 저 유구한 전통에서 말하는 ‘우리가 만든 괴물’ 혹은 ‘저것을 만든 우리가 괴물’이라는 구도, 혹은 어떤 설명도 비껴가는 불가해한 타자 위치에 딱히 들어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똥과 피와 가래를 다량 동반한 폭력으로 채워진 이 단편을 읽다보면 루디가 가하는 폭력의 의미에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사이코패스 킬러물에서 강도 높은 쪽은 대개 뚜렷한 이유를 선뜻 제시하지 않음으로써 공포감을 상승시키고 타협을 시도하는 희생자를 좌절시킨다. 하지만 이 장르 대부분은 폭력중독이나 통제불능 같은 개인의 심리적 요인이나 소외를 비롯한 간접적인 사회적 요인을 암시하는 것으로 귀결되기 십상이고,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목적 없음과 이유 없음을 전면에 내세워 일종의 상징적(혹은 도덕적) 진공상태를 구성하는 데 골몰한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루디는 “갈 길이 멀”고 “세상을 끌고 가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함께 가주겠다는 거”(side B, 59면)라며 진작부터 목적을 밝힌다. 루디가 보그먼을 끌고 함께 길을 가는 행위는 곧 세상을 끌고 가는 행위와 다르지 않고, 따라서 어차피 할 일을 더 어렵게 하지 말자며 루디가 구사하는 폭력은 ‘세상의 길’이 만든 폭력을 순수하고 적나라하게 재연한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이 점은 사태가 진행됨에 따라 “기름은 늘 이런 식으로 얻어온 건데”(68면)라거나 “약하니까... 늘 그래왔잖아?”(75면), “잘못을 했다기보다는, (…) 월급을 줬지”(79면), “누군들... 뾰족한 이유가 있겠는가 (…) 너도 평등하게 우릴 괴롭혀왔으니까”(81면)라는 발언들로 뒷받침된다.

그런 의미에서 루디의 폭력은 극히 활동적이지만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만드는, 그래서 체제를 부정하면서도 실은 거기에 기생하는 “공격적 수동성”에 그치지는 않는다.11) 적어도 그의 행위는 폭력이라는 과잉을 통해 주어진 체제의 본질적 과잉을 드러내주며, 변칙이나 오류가 아니라 ‘세상을 끌고 가는 길’ 그 자체라고 스스로 밝힘으로써 보그먼에게 타협이나 동정을 비롯한 부질없는 ‘가짜 행위’의 빌미를 박탈한다. 더욱이 체제가 지닌 폭력성만이 아니라 이런 폭력성이 보그먼과 자신을 가른 구조적 적대를 통해 실현되어왔음을 강조한 점이 루디라는 주체의 독특함을 구성한다. 미시적 해부와 포괄적 비판을 오락가락하면서 실은 적대의 전선 그 자체, 그 구조적 성격을 망각하는 것 또한 현재의 전형적인 가짜 행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루디」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루디와 보그먼이 이미 서로를 훼손할 만큼 훼손하고 급기야 막다른 절벽에 다다른 시점에서도 그들이 달리는 길이 계속된다는 점이다. “끝이... 안 나니까”(82면)라는 루디 자신의 고백이 함축하듯이 모든 시도의 실패가 드러나고 모든 진상이 폭로되어도 길은 끝나지 않는다. 루디가 결국 좀비인 것도 그런 이유인데 그보다 더 섬뜩한 대목은 보그먼도 좀비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자신들의 죽은 모습인 좀비로서 이 둘은 영원히 그 길을 갈 것이며, 이 길은 살아 있는 인간의 기대나 욕망이나 향유 따위가 없어도 지속될 수 있는 것이다.

 

 

5. 종말을 기억하기

 

종말의 주체라는 자리가 좀체 도달하기 어려운 좌표라 하더라도 그 어려움을 ‘충분한 위기’의 부족으로 돌릴 수 없다는 점은 재앙의 서사들이 입증한다. 재앙이라는 세계의 위기가 늘 주체의 위기를 동반하지만 주체의 ‘죽음’조차 세계의 종말을 지시하지 않는다는 데 문제가 있다. 재앙과 그것이 야기하는 주체의 불안은 오히려 세계가 위기 속에서 지속성을 확보하는 또 하나의 용이한 형식일 수 있다. ‘존재의 질서’의 불길한 이면에 대한 인식과 실감이 이 질서를 종말로 추동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 점은 거꾸로 종말의 상상이 반드시 재앙을 필요로 하지는 않으며 종말의 주체가 반드시 불안과 위기를 속성으로 삼지는 않는다는 이야기도 된다.

종말의 상상이 존재의 질서에 비틀림을 도입하고 그리하여 이 질서가 마지못해 경계를 노출하도록 몰아가는 일이라면, 종말의 주체 또한 어떤 “과잉의 참여”(excessive engagement)12)라는 차원과 관련되리라 짐작해볼 수 있다. 출구 없는 재앙을 불안으로 되새기는 것이나 점점 줄어드는 협상의 입지를 수긍하며 작은 위안을 구하는 것이 과잉이랄 수는 없다. 주어진 객관성을 초과하는 참여의 가장 여실한 사례는 다른 종류의 객관성, 다시 말해 현실에 잠재하는 다른 좌표들을 작동시키는 실천일 것이다. 따라서 이런 실천이 담긴 작품들을 검토하고 그 각각이 ‘과잉’인지 ‘미달’인지 밝히는 일도 종말의 주제가 요구하는 작업이지만, 이 글에서는 재앙과 종말이 비교적 직접적으로 다루어진 작품에 논의를 한정했다. 다만 종말을 기억하고 그 최종성에 충실하려는 태도가 과잉 참여를 촉발하는 작은 단초가 될 수 있음을 지적하면서 끝맺고자 한다.

『더블』의 또다른 단편 「아치」에는 삶에서 이리저리 밀려난 끝에 한강다리 아치에 오른 사내를 윽박지르고 구슬리는 경찰이 등장한다. 갖가지 설득의 수단을 동원한 끝에 사내를 끌어내리는 데 성공하지만 정작 자신은 그 모든 실용적 타협의 허망함과 마주하며 “사내가 앉았던 그 자리에” 녹아 있는 “커다란 눈사람 같은 것”에 진심으로 미안함을 느낀다(270면). 이 미안함은 차라리 죽게 두는 편이 나을 수 있다는 후회 같은 것이 아니다. 아치까지 올라서야 했던 절박함을 존중하기 위해서라도 진심으로 미안해해야 할 대상은 ‘내려온 사내’가 아니라 ‘거기 남아 녹고 있는 눈사람’인 게 맞다. 쉽게 떨어져서도 안되고 또 쉽게 내려와서도 안되는 그 자리가 곧 종말의 주체가 시작되는 자리임을 기억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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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크리샨 쿠마르 「오늘날의 묵시, 천년왕국 그리고 유토피아」, 맬컴 불 엮음 『종말론: 최후의 날에 관한 12편의 에세이』, 이운경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1, 263면.

2) 크리샨 쿠마르, 같은 글 266면.

3) Jacques Rancière, Aesthetics and Its Discontents, trans. Steven Corcoran, Polity 2009, 110면.

4) 같은 글 119면.

5) 같은 글 131면.

6) Slavoj Žižek, Living in the End Times, Verso 2010, 363면.

7) “한알의 모래에서 세계를 보라”는 구절로 유명한 영국시인 윌리엄 블레이크(W. Blake)의 시 「순수의 전조」(Auguries of Innocence)에 나오는 대목이다.

8) Žižek, 앞의 책 201면.

9) 이런 연대가 랑씨에르가 비판한 균열의 봉합이나 모호한 일체감에 꼭 그치는가 하는 문제는 개별 작품을 두고 평가할 문제다. 나아가 모호하나마 일체감을 형성하는 일이 반드시 균열의 봉합으로 연결되는가 하는 점도 따져볼 일이다.

10) 이소연 「누가 ‘저것’을, 뜬눈으로 보겠는가」, 『현대문학』 2010년 11월호, 260~62면.

11) Slavoj Žižek, The Parallax View, The MIT Press 2006, 342면. 지젝은 이같은 공격적 수동성에 대비하여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에 나오는 바틀비의 제스처를 ‘수동적 공격성’으로 정의하면서 그런 것이야말로 진정한 행위의 공간을 열어주는 급진적인 정치적 제스처라고 평가한다. 바틀비가 순수한 물러남의 제스처를 통해 거부를 ‘폭력’적으로 행사하고 있다는 것이다(381면).

12) Slavoj Žižek, Living in the End Times, Verso 2010, 125면. 지젝은 이를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을 내밀라’는 마태복음을 인용하며 대칭적 상호성의 초과로 설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