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책머리에

 

대세에 어울릴 새로운 스토리를 기대하며

 

 

파이를 키우기만 하면 결국 각자의 몫도 커지게 되어 있다는, 물이 위쪽에 가득 차면 결국 아래로 똑똑 흘러 떨어지게 되어 있다는 가설이 힘을 얻었던 시대가 있었다. 그러니 더 키우고 더 채우는 데 몰두할 것이며 그렇게 해서 더 잘살게 될 미래를 위해 오늘을 유보하고 외면하라는 것이 궁극적인 교훈이었다. 그런 ‘닥치고 성장’ 스토리에는 파이가 커지는 일이란 누군가 정당한 몫을 받지 않아야 가능하고 아래에서 누릴 수 있는 무언가는 위로부터 떨어져내리기 마련이라는 암시가 일종의 이면계약으로 포함되어 있었다.

이 스토리가 내세우듯이 파이가 커지고 몫도 커졌으며 위쪽은 넘치고 아래쪽도 나아졌다고 대체로는 말할 수 있는 세월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가장 큰 역설은 이 스토리에 단호히 반대했던 사람들 덕분에 그것이 그나마 얼마간의 정당성을 갖게 되었다는 점이다. 파이를 키우는 데 기여한 숱한 사람들의 노고야 말할 필요도 없지만, 파이가 커지고 몫도 커진 것은 몫이 적어야 파이가 커진다는 잘못된 인과관계에 부단히 저항해온 사람들 덕인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런 아전인수식 성장 스토리가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시대가 시작되었다. 지금까지 해오던 방식의 성장이 무리수를 넘어 파국의 가능성이 된 세계는 자연스럽게 성장과 더 나은 삶의 관계를 재검토하게 만든다. 개인의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다. 죽어라 ‘스펙’을 키우고 밤낮으로 애를 써도 잘된다는 보장은 없고 미래는 모호한 불안에서 좀체 벗어나지 않는다. 많은 이들이 오늘 맘껏 행복해야 내일도 행복할 수 있고 오늘 바로잡아야 내일도 바로 갈 수 있는 법임을 깨닫는 중이다. 요컨대 이제 우리에게는 다른 스토리가 필요한 것이다. 이면에 어떤 유보조항도 숨기지 않고 떳떳하고 대담하게 사람들을 사로잡을 새로운 스토리 말이다.

올 연말 대선에 앞서 형성된 쟁점구도를 보면 이같은 시대적 변화를 새삼 실감할 수 있다. 7% 성장이냐 5% 성장이냐가 아니라 경제민주화와 복지와 정의 같은 이슈가 중심을 형성한 상황이다. 성장 스토리의 후광에 힘입어 등장한 박근혜 후보마저 이런 문제를 두고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거스를 수 없는 대세라는 표현은 바로 이런 변화에 붙여져야 마땅하다.

실상 한 나라를 이끌어가는 사람에게 변화를 거스른 시대착오란 범죄에 다름아님을 우리는 지난 5년간 뼈저리게 느꼈다. 돈 되는 것은 모조리 팔아치우고 말아먹는다는 이명박정권의 막장드라마는 결말에 다다르자 급기야 사람 패는 것도 돈이 된다는 것을 알아차린 모양이다. 용역업체 컨택터스가 SJM 노조원을 상대로 자행한 폭력은 용산참사를 단번에 연상시키면서 우리가 이 시대착오에 결코 익숙해질 수 없고 익숙해져서도 안된다는 사실을 다시금 섬뜩하게 입증해준다.

그러나 노골적인 후진(後進)도 시대착오지만 감당할 진심도 능력도 없이 새로운 스토리의 주역을 자처하는 일 또한 시대착오가 아닐 수 없다. 박근혜 후보는 MB정권과의 차별성을 내세우면서도 여당의 유력 대선후보로서 지닌 권력을 MB정권의 패악적 민중탄압과 언론탄압을 막는 데 단 한번도 사용한 적이 없다. 원성이 자자한 현병철 국가인권위원장과 김재철 MBC 사장 사퇴 요구에 그녀가 보여준 묵묵부답이 단적인 예이다. 그같은 ‘비판적 지지’의 대가로 MB정권은 자신의 어둠으로 상대의 어둠을 가려주는 ‘흑마법(黑魔法)’을 베풀어주었는데, 이것이 결정적 도움이 된 이유는 ‘공주’로 지칭되는 정치인 박근혜의 권위란 본질상 신비주의로 유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516 발언 파동이 예시하듯이 대선이 가까워올수록 그녀는 전면으로 나올 수밖에 없고 또 그럴수록 진면목은 노출되기 마련이다. 그녀가 내세운 정치개혁의 실상이 불통과 부정의 독선이라면 기득권을 건드리지 않는 경제민주화란 ‘줄푸세’의 장식품에 불과함이 점차 분명해지고 있다. 오늘 터져나온 박후보의 돈공천 파문이 내일로 예정된 MB의 행패로 덮어지는 ‘멘붕’ 유발 전술이 언제까지 통할 리는 만무하다. 박근혜 대세론은 그렇게 스스로를 잠식하는 중이다.

새로운 스토리가 떳떳하고 대담한 꿈을 그려나가는 플롯일진대 그에 걸맞은 떳떳하고 대담한 대통령을 뽑는 일이 누가 덜 나쁘냐를 고르는 선택일 수는 없다. 그런 관점으로 볼 때 박근혜 후보는 논외가 되어 마땅하겠지만, 진보개혁세력 역시 신뢰를 회복하기에 여전히 갈 길이 멀어 보인다. 이런 쟁점구도를 가지고도 이 정도의 성취도에 머문다면 이름값을 못한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일정한 우여곡절과 변수를 떠안을 수밖에 없는 사정이지만 그런 혼란마저 생산적으로 전환하는 모습을 촉구한다. 안철수 교수의 전면 등장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이 구도를 유지하면서 심도있는 정책 경쟁으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리라 믿는다. ‘2013년체제’라는 표현이 요약한바 ‘체제적 변화’에 값하는 새로운 희망의 스토리가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펼쳐지기를 기대한다.

 

이번호 특집은 ‘2012년 대선과 민주개혁의 과제들’이라는 제목을 걸고 대선과 그 이후를 아울러 한국사회의 질적 변화를 이루는 데 필요한 민주개혁의 과제와 방안을 짚어본다. 백낙청은 총선 이후 상황에 대한 성찰을 토대로 삼아 ‘변혁적 중도주의’를 중심으로 2013년체제론을 정비한다. 변혁적 중도주의는 ‘우리 안의 괴물’이라 할 자본주의적 심성을 극복하는 수행원리이자 개혁정책의 구체적인 검증 기준으로 제시된다. 최근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는 안철수의 책에 관한 간략한 평가도 덧붙여진다. 이철희와 정대영의 글은 정치와 경제 부문의 혁신과 개혁에 각각 초점을 맞춘다. 먼저 이철희는 연합정치와 시민정치의 상호협력 관계가 여전히 절실함을 강조하고 혁신의 내용을 갖춘 연합과 아젠다 리더십을 놓지 않는 시민정치를 주문한다. 정대영은 한국경제를 바라보는 서로 다른 관점들을 점검하며 경제개혁의 핵심과제를 진단한 다음, 성장과 수출 중심에서 일자리 창출과 양극화 해소에 주력하는 정책기조 전환과 구조개선 방안을 세부적으로 명시한다. 이어 서재정과 남태현은 87년체제를 통해 이룩한 민주주의의 성장과 한계를 보여주는 시금석이자 분단상황이 민주주의 발전에 미치는 영향력을 실증하는 사례로서 천안함사건을 분석한다.

대화에서는 상반기의 대규모 언론파업에 참가한 젊은 언론인들을 초청하여 파업 동기와 진행과정을 생생한 육성으로 들어보고 대선 국면의 공정보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어려운 싸움을 끝낸 후 오히려 더 큰 에너지로 충전된 이들의 발언을 통해 팟캐스트 등 뉴미디어의 약진 속에서도 여전히 중요한 ‘올드미디어’ 종사자로서의 사명감, 그리고 새로운 언론지형을 만들어내려는 패기를 느낄 수 있다.

이번호 논단과 현장의 글들은 다양한 주제를 다루면서 한국사회뿐 아니라 동아시아의 변화를 성찰할 기회를 제공한다. 이승환은 이 정권의 대결적 대북정책의 역설적 결과로 최근 쏟아져나온 대북정책 담론들을 살펴보면서 포용정책 업그레이드와 남북연합론 재구성을 논의한다. 김명환과 윤지관은 개혁과제 중에서도 난제에 해당하는 교육문제를 다룬다. 김명환은 이기정의 중등교육 개혁안(본지 2012년 봄호)을 토대로 대학개혁을 구상하면서 진정한 다양화로서의 전형제도 단순화와 서울대를 포함한 국립대학 연합체제안을 제시한다. 윤지관은 퇴행양상이 특히 뚜렷한 사립대학 문제의 현황과 그 원인을 점검하고 교육의 공공성을 중심에 두는 사학개혁 방안을 모색한다. 윤주성은 광주·전남지역을 대상으로 삼아 지역언론이 비판기능을 상실하고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요인으로서 지방정부의 권력독점과 언론통제 양상을 폭로한다. 더불어 온갖 종류의 ‘푸어(poor)’ 시리즈로 요약되는 한국사회의 고단하고 불안한 삶을 다양한 측면에서 촘촘히 고찰한 제2회 사회인문학평론상 수상자 정지은의 글도 흥미롭다.

한편 나라 밖을 다룬 두편의 글도 중요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한중수교 20주년에 즈음한 이남주의 글은 중국의 변화를 두고 불확실한 단정에 몰두하는 대신, 대안적 사유체계 모색의 일환으로서의 비판적 중국연구 전통을 계승하고 혁신할 필요성을 강조한다. 지난 6월말 열린 본지 주최의 국제심포지엄 ‘동아시아 비판적 잡지회의’에서 발표된 바 있는 오까모또 아쯔시의 글은 일본에 국한되지 않은 동아시아적 사건으로서의 311 대지진이 동아시아인의 사유와 실천에 제기하는 공통의 과제를 짚어준다.

이번호의 소설란은 두편의 장편연재로 풍성하다. 2회를 맞는 정이현의 작품은 지난호의 산뜻한 출발에 이어 갈수록 흥미를 더한다. 더불어 새롭게 연재를 시작하는 황정은의 작품 또한 평단의 주목을 한몸에 받는 작가답게 단번에 시선을 끈다. 김형수와 조해진의 단편도 품격과 개성을 한껏 발산한다. 시란에서는 열두분의 다채로운 시세계도 만날 수 있다.

작가조명에서는 신작 장편 『태연한 인생』을 출간한 은희경 작가를 초대하여 지적인 감각과 날카로운 문체로 많은 독자를 매료하고 있는 이 작품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다. 평론가 정홍수의 심층적인 분석과 질문을 통해 등장인물들의 고독과 상실을 둘러싼 작가의 사유가 오롯이 드러난다. 문학평론란에 실린 두 평문은 각각 다른 방식으로 문학과 현실의 관계를 논한다. 먼저 황현산은 새로운 언어란 여러 층위와 접점에 걸친 현실과의 만남을 끈질기게 탐구함으로써 구성된다는 관점에서 젊은 시인 하재연과 김중일의 작품에 나타난 언어의 전위적 모험을 독해한다. 이경재는 지난 여름호 특집 ‘다시 장편소설을 말한다’의 논의를 검토하면서 김사과의 소설을 중심으로 시대현실과의 연관성 회복이라는 장편소설의 과제를 가늠한다. 그밖에 일일이 소개하지 못했으나 깊이있는 시선으로 다양한 내용을 다루어준 문학초점, 촌평, 문화평 필자들께도 감사를 드린다.

올해 만해문학상의 영예는 이시영 시인에게 돌아갔다. 첨예한 시대현실과 밀도 높은 서정이 다양한 형식 속에 어우러지는 작품세계를 선보여온 시인에게 축하인사를 전한다. 더불어 신동엽문학상 수상자로 김중일 시인, 황정은 소설가가 선정되었다. 30회를 맞아 ‘창작상’에서 ‘문학상’으로 변화를 꾀한 만큼 더 뜻깊은 격려가 되기를 바란다.

긴 폭염으로 유난히 힘든 여름을 보낸 독자들과 함께 결실의 계절을 맞이한다. 이 계절, 새로운 희망의 스토리를 만드는 길에 동행하는 더 많은 독자들을 기다린다.

黃靜雅

황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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