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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과 현장

 

중국의 변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한중수교 20주년을 맞이하며

 

 

이남주 李南周

성공회대 중국학과 교수, 정치학. 저서로 『중국 시민사회의 형성과 특징』 『동아시아의 지역질서』(공저) 『이중과제론』(편서) 등이 있음. lee87@skhu.ac.kr

 

 

1. 중국의 개혁개방과 비판적 중국연구의 곤경

 

8월로 한중수교 20주년을 맞이했다. 한국전쟁 이후 40여년간 적대관계를 지속했던 양국은 1992년 수교 이후 놀라운 속도로 가까워졌다. 특히 경제교류가 빠르게 증가해 2011년 한・중의 무역규모는 2206억달러로 미국 및 일본과의 무역량(각각 1108억달러, 1180억달러)을 합친 것보다 많다. 인적 교류의 규모도 600만명을 넘어섰다. 중국 관련 정보도 홍수처럼 쏟아지고 있다. 그럼에도 중국의 변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질문에 아직 뾰족한 답이 나오지는 못하고 있다. 독자적인 문명 전통과 엄청난 인구를 보유한 중국의 부상을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거나, 아니면 중국이 결국 서구적 가치를 수용하는 방식으로 세계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고 막연히 기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는 비단 우리의 경우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고 세계 모든 곳에서 유사한 반응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현재 필요한 것은 중국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어떤 단정적인, 특히 정치적 이해관계가 개입된 결론을 성급하게 내리는 것이 아니라 중국의 진행 중인 변화를 장기적인 안목에서 파악할 수 있는 사유체계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냉전시기 중국연구의 한 흐름을 형성했던 비판적 전통을 계승하고 혁신하는 것이 필요하다. 비판적 중국연구란 주류적 사유체계를 중국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을 문제시하고, 이를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지구적 차원, 지역적 차원, 일국적 차원)에 대한 인식을 재구성하는 계기로 삼는 접근법이다. 과거 중국혁명의 역사, 중화인민공화국 건립의 이른바 ‘연안(延安)의 길’과 사회주의 시기의 문화대혁명을 포함한 지속적인 내부혁명은 대안적 사유체계와 사회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전세계 다른 지역의 시도들을 자극해왔다. 한국에서는 1970년대 리영희(李泳禧)의 작업이 ‘비판적’ 중국연구의 출발점이었다고 할 수 있다.1) 그의 연구가 갖는 한계에 대해서는 여러 문제를 제기할 수 있지만, 그가 냉전적 사유에서 벗어나 중국을 이해하려 했고 이를 통해 한국을 지배하던 냉전적 사유에 도전했던 것은 지금도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1990년대까지 현대 중국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이른바 공산권 연구라는 정책적 필요에 의해 진행된 것을 제외하면 이러한 비판적 관점에 의해 자극받은 바가 많다.

이러한 비판적 중국연구의 전통은 1990년대 이후 심각한 도전에 직면했다.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 붕괴로 ‘비판성’의 자원이 사라진 것이다. 프랜씨스 후꾸야마가 주장한 ‘역사의 종언’은 비판성이 직면한 위기를 극적으로 보여주었다. 즉 냉전의 해체와 함께 “이념적 진화의 종착점에 도달하고 서구의 ‘자유민주주의’가 통치의 최종적 모델이 되었다”는 의미에서 역사가 종결되었다는 대담한 선언 앞에 비판성이 설 자리를 찾기 어려워졌다.2) 그리고 이처럼 좁은 의미로 정의된 민주주의, 인권, 시장 등은 도전을 허용하지 않는 사유체계의 근간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물론 냉전 이후 세계가 테러와 폭력으로 얼룩지면서 그의 주장에 많은 비판이 제기되었지만, 이를 전복할 만한 도전은 아직 출현하지 않았다.3) 비판적 중국연구가 직면한 위기는 이에 그치지 않는다. 중국에서 진행된 변화는 비판적 중국연구의 토대를 결정적으로 약화시켰다. 1980년대부터 시작된 개혁개방은 중국 내에서도 세계문명, 즉 서구가 주도적으로 발전시킨 근대문명과의 ‘궤도일치接軌’를 새로운 사유의 주요 과제로 만들었다. 1980년대 한때 개혁파가 중국이 ‘지구적球籍’을 박탈당한 위기에 처해 있고, 이러한 사태를 피하기 위해 개혁개방, 특히 세계문명의 적극적 수용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것은 중국 담론지형의 급진적인 변화를 잘 보여준 사례다.4) 중국이 1992년 사회주의 시장경제론의 채택 이후 빠르게 추진한 시장화와 대외개방은 자본주의 세계체제에 대한 비판성을 뒷받침하는 자원이라기보다 이러한 비판성의 토대를 무너뜨리고 심지어는 역사의 종언을 증명하는 사례처럼 보였다.

이러한 변화에 따라 비판적 중국연구는 서구의 자유주의 담론에 의해 전유되었다. 연구의 초점이 경제적 시장화와 정치적 권위주의 사이의 불균형에 맞춰지게 된 것이다. 여기에는 물론 시장화와 개방화가 필연적으로 서구식 자유민주주의체제로의 변화를 촉진할 것이라는 전제가 작용한다. 냉전 이후 담론영역에서 패권적 지위를 차지한 민주주의, 인권, 시장 등이 중국에 대한 비판적 접근을 위한 무기가 되었다. 물론 제도의 자율성에 주목하는 제도주의적 설명에 따르면, 국가가 시장의 확대와 경제발전에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으며 시장화와 권위주의의 동반관계가 시기에 따라서는 효과적으로 공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도 최종 모델로 자유민주주의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기존 사유체제를 넘어서는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러한 설명을 따라간다면 중국의 변화를 이해하려는 시도는 결국 근대시기에 서구의 주도로 만들어지고 냉전해체 이후 인류사회의 최종적인 모델로 확인된 정치모델과 경제모델을 중국이 수용할 것인가 아닌가라는 단일한 차원의 질문으로 귀결된다. 전자는 성공의 길이고 후자는 실패의 길로 간주된다. 핵심 문제는 그러한 성패를 당연한 결과로 수용할 것인지, 아니면 중국의 변화 속에서 새로운 사유체계와 세계의 가능성을 찾아가는 탐색을 재개할 것인지에 있다. 중국 내에서는 이미 1990년대 초부터 비판적 중국연구의 복원을 위한 시도가 꾸준히 이루어졌다.5) 이러한 흐름을 주도한 학자들은 ‘신좌파’로 불리기도 했는데 주로 인문학적 성찰에 머물렀기 때문에 1990년대까지는 사회변화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런데 최근 중국모델론을 둘러싼 토론을 전후로 이들의 논의가 인문학적・사상적 성찰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현실 정책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요인으로 등장했다.6) 아래에서는 이러한 흐름이 비판적 중국연구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가, 우리의 중국이해에 어떤 시사점을 제공하는가에 초점을 맞추어 논의를 전개할 것이다.

 

 

2. 신좌파의 중국모델론, 비판적 사유의 복원?

 

중국이 서구의 발전모델을 대체하는 새로운 발전모델을 만들어낼 가능성은 무엇보다도 빠른 경제발전에 의해 주목받기 시작했다. 중국의 경제발전이 기존 이론에 의해 예측된 것이었다면 중국모델론 같은 별도의 논의가 진행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우선 공산주의 실현을 지향하는 중국공산당의 주도하에 시장화개혁과 경제성장이 추진되고 있다는 점이 새로운 설명을 요구하는 현상이다. 게다가 21세기 들어 중국공산당은 ‘화해사회’(和諧社會, 조화사회)와 ‘과학발전관(科學發展觀)’을 내세워 성장과 효율 중시의 발전노선을 극복할 필요성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과학발전관은 올 가을에 개최될 중국공산당 제18차 전국대표대회에서 후 진타오(胡錦濤)를 중심으로 하는 제4세대 지도부의 주요 업적으로 당장(黨章)에 반영될 가능성이 높다.7) 이러한 변화는 1980년대 이후 경제영역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해온 워싱턴 컨센서스와 대비되는 것이었고 이에 따라 중국의 독특한 경험을 설명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던 것이다.8)

그렇지만 역사적으로 출현한 자본주의의 다양한 유형을 고려하면 중국의 경험이 새로운 것만은 아니다. 독일, 일본은 물론이고 남한, 대만 등 권위주의적 체제하에서 경제발전에 성공한 사례는 적지 않았다. 중국의 경제발전은 이러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동아시아발전모델이나 발전국가모델로도 상당부분 해명 가능하다. 즉 중국의 발전방식은 자본주의적 발전방식의 하위유형에 불과할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이러한 논의를 새삼스레 중국모델론이라는 이름으로 진행하는 것은 중국의 현실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 기대를 확산시킬 공산이 크고 새로운 의미를 찾기 어렵다.

현재 중국의 변화가 성공적인 면도 있지만 문제도 많은 과도기적 상황이라는 점에서, 중국의 경험을 다른 행위자들의 본보기 모델로 구성하려는 작업이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는 것은 중국모델론이 가진 또다른 문제점이다. 현재 중국 내에서는 좌우 모두 개혁개방노선에 불만을 감추지 않고 있다. 우선 1980년대와 달리 개혁개방에 대해 비판적인 목소리가 크게 증가했다. 예를 들어 2005년 한 지식인은, 개혁개방에 대한 컨센서스가 무너졌고 중대한 개혁조치는 잠시 중단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9) 이 시기를 전후로 중국 내에서는 개혁개방이 초래한 빈부격차, 부패 같은 문제에 비판적인 목소리가 뚜렷이 증가했다.10) 다른 한편 시장화개혁을 지지하는 입장에서도 정치개혁의 지체 등에 불만이 누적되어왔고 최근에는 산업과 금융 부문에서 국유기업의 통제력이 다시 강화되는 것이 개혁의 후퇴로 간주되고 있다.11) 중국공산당은 최고지도부가 대폭 교체될 제18차 전국대표대회를 앞두고 후 진타오 주석과 원 자바오(溫家寶) 총리가 집권했던 지난 10년을 ‘빛나는 10輝煌十年’이라고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있지만 내부의 균열을 완전히 감추지는 못하고 있다.

따라서 중국모델론에 대한 논의에서 신좌파 지식인을 포함한 중국 내의 논자들은, 중국의 독특한 경험을 이야기하고 정리하는 것은 의미가 있지만 다른 나라들이 따라야 할 모델을 내세우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한다. 이에 따라 이들은 중국모델 대신 ‘중국의 경험’ ‘중국의 길’ 같은 개념으로 중국의 독특한 발전과정을 설명한다. 이러한 조심스러운 태도를 전제로 한다면 지금까지 중국모델론에 대한 논의에서 비판적 중국연구의 발전을 위한 단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신좌파들의 논의에서 자본주의적 발전과정이 중국에서 복제 가능한가라는 물음이 제기된 것이 가장 중요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즉 중국의 경험은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지속성에 의문이 제기되는 한계적 상황과 새로운 경로의 가능성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는데 이와 관련한 적극적인 사유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중국모델에 관련한 논의가 ‘서구적 근대’의 보편성과 유효성에 대한 발본적 질문으로 심화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12)

예를 들어 신좌파 지식인 중 한 사람인 황 핑(黃平)은, 중국의 공업화・도시화・현대화는 환경과 자원의 제약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우며 대외적인 식민화와 대내적인 수탈이 함께 진행되었던 서구의 그것과는 달랐고 또 다를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이를 해석할 수 있는 분석적 개념의 필요성을 제기한 바 있다.13) 이러한 문제의식을 적극적으로 발전시킨 대표적인 이는 조반니 아리기(Giovanni Arrighi)다. 그는 역사적 자본주의의 순환을 벗어나 새로운 세계질서로 나아갈 가능성을 중국의 변화에서 찾는다. 그는 특히 자본가계급이 중국경제와 사회의 관제고지(管制高地)를 장악하는 데 성공하지 못하고 정부가 모든 자본(외국자본, 공공자본, 민간자본)들의 경쟁을 적극 장려하며 시장을 지배의 도구로 삼고 있다는 점을 주목하며 중국의 시장경제를 여전히 ‘비자본주의적’이라고 규정한다.14) 나아가 사회주의적 시장경제의 발전이 계속된다면 중국은 문화적 차이를 진정으로 존중하는 문명연방의 출현에 결정적으로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15)

이러한 문제의식이 일국적 차원의 것은 아니다. 중국에서 서구식 발전노선이 복제 불가능하다는 것은, 지구적 차원에서 발전의 환경과 자원이 점점 제약되고 있고 대외적인 식민주의로 내부의 모순을 전가하고 자본주의적 발전을 지속시키려는 시도 역시 한계에 직면한 세계체제의 위기적 상황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중국이 근대적 발전을 일찍 시작했다면 서구식 경로를 추구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지금도 중국이 축적위기에 직면한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돌파구를 제공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16) 그러나 현재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붕괴위기는 아니더라도 어떤 변곡점에 직면했다는 징후는 속속 나타나고 있다. 자원과 생태 위기 외에도 미국의 쌍둥이적자(무역적자와 재정적자)가 계속 증가하고 기축통화인 달러의 지위가 불안정해지는 등 구조적 문제가 심화되고 있다. 그리고 경제적으로 세계체제에 적극 동참하고 있는 중국이 이러한 위기구조를 생산하는 가장 중요한 내재적 요인이기도 하다. 즉 중국의 변화는 일국적 차원을 넘어 세계체제의 변화에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 이러한 차원에서 접근한다면 비판적 중국연구는 단지 중국을 이해하는 것뿐 아니라 세계체제의 위기를 인식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는 노력과 연결되어야 한다.

 

 

3. 중국공산당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이중적 비판의 과제

 

그렇지만 지금의 중국모델론 논의가 중국의 복잡한 현실을 설명하고 당면한 과제를 해결하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제기된다. 가장 큰 문제는 신좌파 등의 논의가 중국공산당의 통치 정당성과 중국 현실을 옹호하는 논리로 전락할 위험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이러한 문제점을 잘 보여주는 사례 중의 하나가 판 웨이(潘維)의 중국모델론이다. 그는 이미 ‘법치’와 ‘민주’를 구분하고 중국에 필요한 것은 민주가 아니라 법치라는 독특한 주장으로 서구식 민주주의 도입의 필요성을 반박하고 중국식 정치모델을 정당화한 바 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서구에서 상당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최근 중국모델론과 관련한 논의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했는데, 중국모델을 ‘국민경제’ ‘민본(民本)정치’ ‘사직(社稷)체제’로 구성되는 삼위일체 모델인 ‘당대중화체제(當代中華體制)’로 종합해 제시했다.17) 그렇지만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중국을 이처럼 정형화된 경제모델・정치모델・사회모델로 설명하는 것, 그리고 당대중화체제라는 용어가 보여주는 것처럼 중국의 오천년 역사와 전통을 하나의 모델로 통합하려는 시도는 현실과 동떨어진 일반화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다. 중국의 변화를 역사적 과정의 산물로 해석하려는 시도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그 변화 내의 여러 요소 간의 긴장관계를 포착하고 이들의 상호작용을 살피는 것이 아니라 매끈한 하나의 종합적 개념으로 역사를 설명하는 것은 현실의 복잡한 문제들을 간과하게 만든다.

이러한 문제점은 신좌파 지식인 중 하나인 간 양(甘陽)에게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유교전통, 마오 쩌둥 시기 자리잡은 평등과 참여의 전통, 개혁개방 이후 형성된 시장경제에 대한 신념과 자유의 추구라는 세가지 문명의 공존에서 중화문명의 새로운 발전을 모색해야 한다는 소위 ‘통삼통’(通三統, 세가지 전통을 통일함)론을 제기했다.18) 신좌파 지식인들은 이 중에서도 개혁개방 이전 사회주의 유산의 긍정적 측면을 부각하는 것에 주력해왔다.19) 이는 그동안 개혁개방 이후의 역사를 개혁개방 이전의 역사와 대립시켰던 중국현대사에 대한 이해방식을 재검토하고 그 내부의 연속성을 발견하는 계기를 제공해주었다. 예를 들면 중국을 더 낙후시켰다고 간주되었던 마오 쩌둥 시기에 자립적인 공업체계를 건설하고 독립적 주권을 확보하며 보건 및 위생을 획기적으로 개선하는 등, 개혁개방 이후 경제성장의 기반이 이 시기에 구축되었다는 점이 강조되었다. 이러한 설명은 상당히 타당성이 있다. 즉 중화인민공화국의 역사에서 개혁개방 이전과 그 이후 사이에는 단절로만 이해될 수 없는 내적 연관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상호간에 상당한 균열과 긴장이 존재하는 문명적 자원을 성급하게 화해시키고 종합하려는 것은 또다른 편향에 빠질 확률이 높다. ‘G2’라는 조어가 등장할 정도로 중국의 경제적 실력이 커지고 중국의 길이 성공하고 있다는 자신감이 강화된 것, 2002년 출범한 공산당 지도부가 적어도 수사적 측면에서는 새로운 발전관을 강조한 것 등이 중국의 경험을 새로운 문명의 형성 가능성과 연결시키려는 성급한 시도를 초래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중국이 서구식 근대를 복제할 수 있는지, 혹은 서구의 자본주의적 근대와는 다른 발전경로를 따라야 하는 것 아닌지 같은 문제의식이 곧장 중국에서 대안적 발전의 길이 현실화되고 있다는 주장으로 이어지는 것은 비판적 중국연구와는 거리가 멀다. 이는 지구적 차원의 자본주의 세계체제에 대한 비판적 의식이 중국의 현실 앞에서는 정지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20) 빈부격차의 증대, 빈발하는 대중시위, 서민층과 공권력 사이의 충돌, 정치적 부패 등의 현실 앞에서 판 웨이의 중국모델론이나 간 양의 통삼통론이 생명력을 갖기는 어렵다. 비판적 중국연구는 중국 내에서 서구식 근대성의 현상적인 대항물을 찾아내고 이를 대안적 길로 승인하는 것이 아니라, 지구화에 내재하는 근대성에 대한 성찰과 함께 중국공산당에 대해서도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는 이중적 비판의 과제를 감당해야 한다.

왕 후이의 최근 논의는 이러한 점에서 앞의 흐름과 차별성을 갖는다. 그는 자유주의적 헤게모니를 극복할 수 있는 사유체계의 가능성을 지속적으로 모색해왔지만, 그러한 가능성이 중국에서 이미 현실화되고 있다고 판단하는 식으로 현실에 존재하는 복잡한 모순을 외면하지 않는다. 최근 ‘탈정치’에 대한 그의 논의가 이를 잘 보여준다.21) 여기서 그는 문화대혁명에 대한 개혁개방 이후의 평가를 문제 삼는다. 개혁개방 이후 중국공산당은 문화대혁명을 ‘전면부정’하고 이와 관련한 논의를 사실상 금기시해왔다. 왕 후이도 대중운동 내의 파벌투쟁과 여기서 비롯된 폭력 등으로 인해 문화대혁명이 실패하고 오히려 정치에 대한 환멸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은 인정한다. 그렇지만 이 시기에 관료주의적 당국체제를 극복하고 참여형 민주주의를 만들기 위한 ‘아래로부터의 시도’가 있었음을 간단하게 부정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으며 그 경험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특히 그는 문화대혁명의 역사에 대한 이러한 손쉬운 처리방식이 개혁개방 시기에 아래로부터의 정치를 배제해 정치를 소멸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점에 주목하며, 개혁개방에 따른 많은 문제도 이와 연관된 것으로 본다.22) 특히 탈정치가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위한 정치환경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이 그가 가장 우려하는 현상이다. 따라서 개혁개방이 초래한 문제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탈정치에 대한 반성이 우선 필요하다는 것이 그의 핵심적인 주장이다.

이러한 논의 속에는 중국공산당에 대한 비판적 접근의 계기가 존재한다. 그가 보기에 중국이 직면한 가장 큰 도전은 지구적 자본주의 시장경제하에서 정당과 국가가 경제구조와 동일화되어 견제능력을 상실하고 국가 자신의 자주성과 독립성을 위협받는 것이다. 최근에는 정당(중국공산당)의 국가화(시장경제의 각종 이익과 긴밀하게 연결될 수밖에 없는 국가)가 이러한 경향을 가속화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중국공산당이 자본과 시장으로부터 정치적 독립성을 유지하는 것이 관건이라는 점을 강조한다.23) 그가 보기에 중국공산당이 사회주의적 가치를 지향하고 사회주의혁명을 통해 건설되었다는 점에서 자본주의 세계체제와 신자유주의를 극복해가는 데 필요한 사상적・역사적 자원을 갖고 있는 것도 분명하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탈정치화로 대중의 참여와 감시가 배제된 상태에서 중국공산당이 신자유주의적 시장화의 포로가 될 가능성도 적지 않다고 우려하고 있다.

이처럼 그는 중국공산당의 건설적 역할에 대한 인정과 그에 대한 비판성의 견지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려 하나 그것이 성공적이라고 보기 어렵다. 균형이라기보다는 둘 사이에서 동요하는 모습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우선 왕 후이는 중국모델과 관련한 논의에 개입하는 과정에서 전자의 가능성을 더 적극적으로 평가했다. 그는 중국모델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주권의 독립성을 확보・유지한 것과 그 독립성이 정당(중국공산당)을 통해 완성된 것이 핵심적 특징이라고 주장했다.24) 그는 중국공산당이 사전에 존재하는 모델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내부의 이론투쟁, 정치투쟁, 사회실천을 통해 새로운 길을 만들어왔고 이 과정에서 당내에 ‘자기교정 메커니즘自我糾錯機制’이 존재했음을 보여주었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최근 중국의 변화, 특히 냉전체제의 해체 이후에도 정치안정과 경제발전을 유지하는 것에서 그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그가 중국공산당의 통치를 세련되게 정당화하는 어용학자로 변해가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심을 사기도 했다. 이에 따라 1990년대 비판적 연구자라고 호명해줄 것을 요구했던 장본인이 스스로 비판성의 토대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닌가하는 우려도 제기되었다.25)

그러나 올해 보 시라이(薄熙來) 사건이 발생한 이후 그의 입장에 큰 변화가 있었다.26) 그는 이 사건이 이제 직접적인 발단과는 관계없이, 중국공산당의 밀실정치가 지방과 군중이 주도하여 개혁개방이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려는 자발적인 노력(충칭모델 혹은 충칭실험)을 부정하고 신자유주의적 변화를 위한 제반 환경을 조성해가는 정치적 사건의 성격을 강하게 띠게 되었다고 주장했다.27) 이러한 상황 전개는 중국공산당의 자기교정 메커니즘에만 희망을 걸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하고, 여기서 왕 후이는 인민의 정치를 복원할 수 있는 정치개혁을 적극적으로 주장하고 나섰다. 물론 그가 주장하는 것은 사유화와 자본패권을 기초로 하는 다당제(多黨制)와는 다른, 인민의 적극적인 참여와 인민의 이익에 유리한 사회개혁을 결합시키는 사회주의적 정치개혁이다. 특히 밀실정치의 반대 의미로 자발적인 정치행동의 자유를 보장하는 ‘공개정치’를 강조한다.28) 이처럼 왕 후이의 시선은 인민, 즉 아래로부터의 동력을 더 주목하는 방향으로 이동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아래로부터의 정치’에 과연 실체가 있는지, 그것이 어떤 경로로 실현될 수 있는지 등의 물음에 분명한 답은 내놓지 못하고 있다. 왕 후이를 포함한 신좌파가 중국공산당과 거리를 유지할 수 있는 객관적 토대, 가령 대중운동과의 연계 등이 결여된 것은 왕 후이의 비판을 다소 공허하게 들리게 한다.

 

 

4. 한국에서의 비판적 중국연구의 길

 

한국에서의 중국연구는 중국학자들에 비해 중국의 현실이나 중국공산당이라는 정치적 실체와 거리를 유지하기가 쉬울 것이다. 그렇다고 앞에서 살펴본 중국 내의 비판적 연구가 직면한 곤경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특히 중국의 부상이 빠르게 진행될수록 우리 역시 대립적인 두개의 항이 끌어당기는 힘에 의해 비판성은 상실하고 이항대립 구도에 편입되기 쉬워진다. 한편에서는 중국의 부상을 견제하려는 힘이 더 강하게 작동되고, 이는 세계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중국에서 찾으려는 노력을 부정할 것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중국에서 근대 자유주의 헤게모니에 대한 도전이 거세지고, 이는 중국에서 우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찾고자 하는 움직임을 북돋을 것이다. 앞으로 중국의 민주주의와 인권, 경제발전 모델, 중국의 부상 이후 달라진 동북아질서 등의 문제와 관련해 양자는 대립하는 해석과 전망을 제시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중국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이러한 두 방향으로 균열된다면 새로운 사유의 가능성을 상실하는 것은 물론이고, 중국의 부상이 초래하는 도전에 제대로 대응할 수도 없다.

이러한 시점에서 우리가 중국의 변화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국연구의 기반이 되는 사유체계를 끊임없이 문제화하는 동시에 중국의 현실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러한 노력이 성과를 내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중국에서 곧 급진적인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나 인류사회가 자본주의적 모순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에 중국이 들어서고 있다는 기대는 모두 희망적 사고에서 나온 것이다. 전자의 경우는 이미 많은 예측이 있었지만 모두 빗나갔다. 그리고 중국에 어떤 가능성이 있다면 그것은 중국 내에서 이미 실현의 단서가 나타났다기보다는 중국이 근대시기의 발전노선을 그대로 복제할 수 있는지, 그렇다면 어떤 문제가 발생할 것인지, 중국이 새로운 길을 갈 수 있는 어떤 자원을 갖고 있는지 등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찾게 될 미래의 현실이다.

중국의 부상은 이미 세계경제의 심각한 불균형을 가져오고 자원과 환경의 제약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동시에 진행되고 있는 인도, 브라질, 러시아 등의 전면적인 공업화까지 생각해보면 이는 자본주의 역사에서 전례가 없는 도전이다. 이러한 도전이 역사적 자본주의 내에 존재했던, 그리고 성공적으로 작동했던 발전방식들에 의해 해결될 수 있는지에 대해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이 점에서 중국은 우리에게 비판적 사유를 강화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렇다고 중국에서 이러한 도전을 극복할 사유체계가 이미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중국은 아직 문제의 한 부분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기 때문에 중국의 현실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계속 견지할 필요가 있다. ‘알고 싶은 곳’에 의해서만 인도되는 중국 이해는 현실과 멀어질 가능성이 높다. 중국연구에 어떤 지향은 필요하지만 이는 ‘알고 있는 것’과의 균형을 유지해야 하고 그 간격에서 비판적 중국연구의 가능성이 만들어지는 것이다.29) 그리고 우리의 비판적 사유는 중국에 존재하는 어떤 사유체계의 수입이 아니라 새로운 사유를 만들어가는 공동의 노력을 촉진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필자는 중국 학자들과의 교류과정에서 근대시기 우리의 경험과 그 과정에서 축적된 사유의 힘이 비판적 중국연구의 발전에 크게 기여할 수 있음을 발견했다.30) 특히 자본주의 세계체제로부터 막연한 탈주를 꿈꾸는 것이 아니라 그 압력을 견디는 동시에 새로운 길을 모색하려는 지속적인 노력과 실천이, 동시대적 모순을 공유하는 한국과 중국 지식인들의 거리를 좁히고 중국의 변화, 그리고 그 변화가 세계에 미치는 영향을 이해하기 위한 공동의 기반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한중수교 20년을 맞아 우리의 중국연구가 이제 중국을 대상으로 삼는 지식생산을 넘어 한국과 중국이 함께 새로운 사유체계를 만들어가는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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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러한 유산은 우리보다 일본에서 더욱 많이 발견할 수 있다. 탈아입구(脫亞入歐)론에서 시작해 중일전쟁까지 치른 일본의 처지에서 중국연구는 자신의 문제와 긴밀하게 연결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문제를 토대로 중국을 분석하는 작업을 통해, 지식과 과학이라는 의심스러운 명목으로 정신활동을 억누르는 일본의 근대지식계의 한계를 극복하고 학술적 주체성을 세우려고 시도한 타께우찌 요시미(竹內好)가 대표적이다. 그는 1960년대 안보투쟁 시기에 ‘중국’을 평등의식 수립(‘강자를 도와 약자를 괴롭히는’ 사상적 경향을 솎아내기)을 위한 매개로 삼았다고 명확하게 밝혔다. 쑨 꺼 『다케우치 요시미라는 물음』, 윤여일 옮김, 그린비 2007, 87~88면과 269면. 이러한 문제의식은 미조구찌 유우조오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다. 溝口雄陳光孫歌面對史的敬畏之念-溝口雄三敎授東京放談」, 陳光・劉雅芳重新思考中國革命』, 臺灣社會硏究雜誌社 2010.

2) Francis Fukuyama, The End of History and the Last Man, The Free Press 1992.

3) 후꾸야마는 최근 중국 권위주의체제가 일정한 효율성을 지니고 있고(특히 이란, 러시아와 비교할 때) 정치적으로 민주주의체제로 분류되는 인도보다 효율적이라는 점을 인정하기도 했으나, 자유민주주의체제가 우월하다는 신념을 견지하고 있으며 자유민주주의로의 전환 없이는 중국도 심각한 도전에 직면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Francis Fukuyama, “US Democracy Has Little to Teach China”, Financial Times, January 17, 2011.

4) ‘지구적〔球籍〕’이라는 표현은 제국주의 열강에 의해 망국의 상황에 처할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을 갖게 된 청말부터 ‘지구에서 호적이 없어질 것’이란 맥락에서 쓰여왔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에는 마오 쩌둥(毛澤東)이 1956년 8월의 한 연설에서, 중국이 이처럼 방대한 국토, 인구, 자원, 그리고 사회주의라는 우월한 제도를 가지고도 50~60년 내에 미국을 초월하지 못하면 “지구적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라며 국가건설을 독려했다. 1980년대 이후에는 개혁개방의 절박성을 뒷받침하는 표현으로 쓰여왔다. 예를 들어 개혁개방 30주년을 기념하는 『인민일보』의 논평에서도 “개혁개방을 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지구적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라고 개혁개방의 정당성을 강조한 바 있다. 「不改革開放總有一天會被開除球籍」, 『人民日報』 2008.12.4.

5) 왕 후이(汪暉)가 1994년 발표한 「중국사회주의와 근대성 문제(中國的社會主義與現代性問題)」가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돌이켜 생각하면 이 글이 중국보다 한국에서 먼저 발표된 것 자체가 양국간 지식교류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기도 하다. 왕 후이 「중국사회주의와 근대성 문제」, 『창작과비평』 1994년 겨울호.

6) 1990년대 후반 원 톄쥔(溫鐵軍) 등이 촉발한 삼농문제(개혁개방 이후 도농격차의 심화에 따라 농업・농촌・농민의 영역에서 출현한 문제를 총칭하는 표현)에 대한 토론과 이에 대한 정부의 적극적인 수용은 신좌파 지식인들이 현실 정책에 영향을 미친 최초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7) 현재 당장(2007년 10월 21일 통과)에서는 “중국공산당은 맑스레닌주의, 마오 쩌둥 사상, 덩 샤오핑 이론과 3개 대표의 주요 사상을 자신의 행동방향으로 삼는다”라고 중국공산당의 지도이념을 설명하고 있는데 여기에 ‘과학발전관’이 추가될 가능성이 높다.

8) 이 시기 중국모델론에 대한 논의는 전성흥 「중국모델의 등장과 의미」, 전성흥 엮음 『중국모델론』, 부키 2008 참고.

9) 孫立平 「1990年代以來改革比休克療法更激進: 改革共識基本破裂, 人民需休養生息」, 『經濟觀察報』 2005.9.20.

10) 사상계의 주목할 만한 변화 중의 하나는 마오 쩌둥 후기사상(사회주의체제 내에서도 자본주의의 부활 가능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지속적인 계급투쟁이 여전히 당의 핵심사업이 되어야 한다는 내용으로 문화대혁명을 발동한 근거가 되었음)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이른바 마오파(毛派) 세력의 등장이다. 자본가계급이 소멸한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가 부활한다는 것은 마오의 과도한 우려라고 평가되었으나 이들은 개혁개방 이후 중국의 현실이 마오사상의 정당성을 입증한다고 보고 있으며 중국공산당의 개혁개방노선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올 2월 보 시라이 사건 발생 이후 당과 정부에 비판적인 매체에 대한 통제를 강화할 때 이들이 운영하는 웹싸이트가 주요 대상이 되었다.

11) 이러한 현상은 ‘국진민퇴’(國進民退, 국유기업은 전진하고 민영기업은 후퇴한다)라고 불리며 중국사회에서 큰 논란이 되었다. 필자가 2012년 5월에 만난 저명한 개혁파 원로 경제학자는 “지난 10년 동안 중국의 개혁은 지체되었다”고 단언했다.

12) 성근제 「원 티에쥔의 중국경험론: 중국의 진정한 비교우위는 어디에 있는가?」, 『동아시아브리프』 6권 2호 85면.

13) 黃平 「‘北京公識還是中國經驗’」, 崔之元中國與全球化:華盛頓還是北京公識』, 社會科學文獻出版社 2005, 8~9, 14면.

14) 조반니 아리기 『베이징의 애덤 스미스: 21세기의 계보』, 강진아 옮김, 길 2009, 458, 507면.

15) 같은 책 535면.

16) 데이비드 하비 『신자유주의: 간략한 역사』, 최병두 옮김, 한울아카데미 2007, 306면.

17) 판 웨이 중국이라는 새로운 국가모델론, 에버리치홀딩스 2010.

18) 甘陽三種傳統的融會與中華文明複興」, 『21世紀經濟報道』 2004.12.29.

19) 韓毓海我們的時代-現實中國從哪里來,往哪里去?』, 中央編譯出版社 2006.

20) 서구의 좌파 내에서는 아리기처럼 중국의 변화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 경우도 있지만 이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입장도 존재한다.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은 서구에서 중국을 자본주의의 왜곡된 버전이라고 보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은 유럽의 자본주의 발전의 역사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중국식의 권위주의적 자본주의야말로 과거의 잔재가 아니라 미래의 징후”라고 주장했다. 슬라보예 지젝 「민주주의에서 신의 폭력으로」, 알랭 바디우 외 『민주주의는 죽었는가』, 김상훈・양창렬・홍철기 옮김, 난장 2010. 데이비드 하비(David Harvey)도 “중국은 ‘중국식’ 특성을 갖지만, 틀림없이 신자유주의화와 계급권력을 재구성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고 단언했다. 데이비드 하비, 앞의 책 306면. 서구 좌파 내의 이러한 입장 차이는 중국의 변화를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큰 도전인지를 다시 확인시켜주기도 한다.

21) 汪暉去政治化的政治, 覇權的多重構成與十年代的消逝」, 『開放時代』 2007년 2호.

22) 예를 들어 개혁개방 시기 새로 만들어진 ‘82년헌법’에서 문혁 시기 만들어진 ‘75년헌법’에 포함되었던 대명(大鳴,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함), 대방(大放, 말하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말함, 일반적으로 둘을 합쳐 ‘大鳴大放’으로 표현함), 대변론(大辯論), 대자보(大字報) 등 네가지 자유를 보장한다는 조항을 삭제한 것을 권위주의체제로의 전환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든다.

23) 이에 대해서 汪暉中國崛起的經驗及其面臨的挑戰」, 『文化縱橫』 2010년 2호에서 더 상세히 논의한다.

24) 왕 후이의 중국모델에 대한 최근 설명은 「中國道路的獨特性與普遍性」(http://www.chinadaily.com.cn/zgrbjx/2011-04/27/content_12408422.htm) 참고. 이 글은 ‘百年清華, 中國模式’의 강연을 정리한 것이다.

25) 백승욱 「중국 지식인의 시야 속의 ‘중국의 굴기’: 왕 후이의 “중국굴기의 경험과 직면한 도전”에 부쳐」,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주최 토론회 ‘차이메리카 G2시대를 가는 법’(2011.4.27) 토론문.

26) 이러한 전환에는 2012년 들어 중국 내부와 해외에서 국유기업의 민영화개혁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커진 것이 중요한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다. 미국 전 국무부 차관 졸릭(R. Zoellick)이 총재로 있는 세계은행(World Bank)에서 발표한 ‘China 2030’이 민영화개혁을 권고하고 있고, 이에 호응해 중국 내 개혁론자들도 정부와 공산당에 탑다운(top-down)식으로 이러한 개혁을 추진할 것을 요구했다. 왕 후이에게는 보 시라이 사건에 대한 처리가 아래로부터의 정치가 활성화되는 것을 차단함으로써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개혁의 가속화를 위한 정치적 조건을 만들어가는 작업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중국공산당이 국유기업의 민영화 추진 등 시장화개혁을 가속화하려는 조짐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27) 왕 후이 「충칭사건: 밀실정치와 신자유주의의 권토중래」, 성근제 옮김, 『역사비평』 2012년 여름호 170~72면.

28) 같은 글 180~82면.

29) 백영서 「중국, 아는 만큼 보고 있는가」, 『서남통신』 2012.4.25.

30) 중국에서는 1990년대의 ‘신좌파 대 자유주의 논쟁’에서 최근의 ‘좌우논쟁〔左右之爭〕’에 이르기까지 지식인들 내에서 서구식 자유지상주의와 평등이라는 가치가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양상이 나타나면서 양자 사이의 긴장된 공존이 어려운 상황이다. 이것이 중국 지식인사회 내의 논쟁이 극단적인 대립으로 치닫고 현실에 영향을 미치기 어렵게 만든 요인 중 하나다. 이에 반해 한국에서는 지식인들이 자유, 평등, 평화 등의 복합적인 과제와 겨루어왔고, 이들 사이의 팽팽한 긴장을 견디며 한반도와 동아시아 차원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해왔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러한 우리의 경험이 중국 지식인들에게도 자신의 사유를 재평가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