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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바오 닌 장편소설 『전쟁의 슬픔』, 아시아 2012

정의가 승리했고, 폭력도 승리했다

 

 

고영직 高永直

문학평론가 gohyj@hanmail.net

 

 

7109‘이것이 같은 작품이었던가.’ 베트남문학을 공부한 하재홍씨가 원어에서 직접 번역한 바오 닌(Bo Ninh)의 장편소설 『전쟁의 슬픔』(Ni bun chiến tranh)의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이런 의문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십여년 전에 같은 제목으로 국내에 출간된 바 있는 『전쟁의 슬픔』(예담 1999)의 경우 영역본을 중역(重譯)한 책이었기 때문이다.

이번 참에 두 판본을 모두 읽어본 결과, 베트남전쟁을 다룬 ‘같은 듯 전혀 다른’ 책이라는 점을 실감하게 되었다. 이러한 나의 독서경험은 역시나 새 번역본에서 원작자의 육성을 바로 옆에서 듣는 듯한 강렬한 체험을 한 것과 무관하지는 않으리라.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런 경험은 수년 전에도 있었다. 1980년대 운동권 대학생들의 필독서였던 응우옌 반 봉의 소설 『사이공의 흰옷』(친구 1986)의 경우가 그러했다. 국내 출간 20주년을 맞아 배양수 부산외대 교수의 베트남어 번역으로 재출간된 『하얀 아오자이』(동녘 2006)를 보면서도 이와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베트남문학에 관한 한, 일종의 문화적 직거래를 하는 방식보다는 영어・프랑스어 같은 서구어를 매개로 하는 교류방식을 더 선호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나라에 베트남문학을 전공한 전문번역자가 많지 않은 이유도 한몫했을 것이다. 그러나 1992년 국교 수립 이후 스무해가 지나는 동안 두 나라를 오가는 사람과 물자는 유례없이 급증했음에도 베트남문학을 수용하고 베트남문화와 교류하려는 우리의 시선과 태도는 여전히 이른바 제국주의적 무의식에 가까운 방식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 베트남 하면 동남아의 새로운 한류시장 혹은 관광지, 심지어는 ‘신부 수출국’이라는 왜곡된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은 그 방증이 아닐까. 베트남에 관한 우리의 왜곡된 시선을 바꿔내고 새로운 미래의 문화적 파트너십을 형성하고 강화하기 위해서는 『전쟁의 슬픔』 같은 수준 높은 문학작품의 소개가 더없이 중요하다. 물류 중심의 경제교역을 넘어, 두 나라 독서대중 간에 참다운 내면의 교류를 경험할 수 있는 ‘다리’를 놓는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전쟁의 슬픔』은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전중(戰中)세대 작가가 쓴 일종의 진혼곡이다. 196917세의 나이로 베트남 인민군에 자원입대한 바오 닌은 K47 소총수로 싸이공 진공작전을 비롯한 무수한 전투에 참여하던 중 1975430일 종전을 맞았다. 종전 후에는 전사자 유해발굴단에서 8개월간 활동하고 1976년에 전역했다. 그리고 1991년 ‘사랑의 숙명’이라는 제목으로 이 소설을 출간했다. 이런 이력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전쟁의 슬픔』의 묘미는 옛 전우들을 비롯한 무수한 전쟁 희생자를 위무하고 애도하는 진혼의 형식에 있다. 옛 전장을 누비며 전우들의 유해를 발굴하는 과정을 묘사하는 1장의 문장들을 보시라. 여기서 바오 닌은 이른바 의식의 흐름 기법을 연상시키는 붓질로 독자들을 전장의 밀림 속에서 좀처럼 빠져나오지 못하게 한다. 일상과 비일상이 완벽히 전도되는 참화를 겪은 주인공 끼엔이 “인생이 썩어가고 있었다”(26면)라고 뇌까리는 대목은 충격적이다. 베트남전쟁에 관한 바오 닌의 이러한 인식과 서술태도는 “우리들 개개인은 전쟁에 의해 각자의 방식으로 파멸되었다”(324면)라는 작품 말미의 문장에 이르기까지 이 소설의 밑바탕을 이루고 있다.

이처럼 바오 닌은 『전쟁의 슬픔』에서 전쟁이 낳은 야만적인 욕망과 잔인한 폭력 그리고 철저히 짓밟힌 사랑의 문제를 다룬다. 바오 닌은 처음부터 베트남의 민족현실에 대한 각성과 해방전사들의 영웅적 투쟁행위를 중심으로 하는, 이른바 베트남판 ‘건국 서사문학’을 구현하려는 일체의 작가적 욕망을 드러내지 않는다.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에 『전쟁의 슬픔』은 1991년 첫 출간된 이래 20여년간 베트남에서 판금조치와 재출간을 되풀이하는 수난의 운명을 감수해야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작품에 관한 논전(論)은 더이상 무의미해졌고, 결국 『전쟁의 슬픔』이 승리했다! 이 점은 2011년 베트남교육연구원이 주관한 ‘2011년 가장 좋은 책’에 『전쟁의 슬픔』이 선정된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결국 베트남 독자들은 선악의 이분법으로 전쟁을 그리지 않고, 오히려 전쟁 자체의 ‘슬픈 본질’을 철저히 다룬 이 작품의 진가를 인정한 셈이랄까. 그 진가는 다음의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으리라. “정의가 승리했고, 인간애가 승리했다. 그러나 악과 죽음과 비인간적인 폭력도 승리했다.”(266면)

이 작품의 기본 플롯은 끼엔과 프엉의 사랑 그리고 전후의 결별 과정을 다룬 ‘연애소설’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십대 소년・소녀 끼엔과 프엉의 풋사랑이 전쟁의 참화 속에서 환멸과 증오 그리고 결별의 수순으로 거침없이 치닫는 것을 보노라면 전쟁이 빚어낸 처연하기 짝이 없는 운명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이 작품은 연애 모티프를 근간으로 하는 사랑의 애가(elegy)라고 단언할 수 있다. 이번 재출간이 갖는 문화적 의미는 바로 이 연애의 플롯을 더 생생히 드러낸 데서도 찾을 수 있으리라고 본다. 이 점은 바오 닌이 산문 「오토바이의 시대」(『아시아』 2009년 가을호)에서 모든 것을 돈으로 살 수 있는 물건 취급하는 젊은 세대와 달리 자신이 속한 전중세대는 ‘피와 뼈의 가치’를 중시한다고 말한 것과 관련이 있다. 즉 세상에는 연애, 사랑, 우정처럼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있는 법이다.

또 하나 이 작품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주인공 끼엔이 격렬한 ‘글쓰기’에 몰두한다는 점이다. 끼엔의 글쓰기는 글의 맥락이 수시로 끊기고, 우연한 문장 배열을 구사하며,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줄거리로 이어지지 않는다. 끼엔의 광기어린 글쓰기에서 바오 닌이 전쟁 중에 겪어야 했던 상실의 크기와 슬픔의 깊이를 미루어 짐작하게 된다. 그리고 글을 ‘쓰는 (혹은 말하는)’ 행위를 통해서만 치유될 수 있는 전쟁의 상흔과 도저한 슬픔의 알갱이를 확인하게 되는 것 아니겠는가. 바오 닌은 끼엔의 입을 통해 작가로서 자신의 운명을 직감하고 기꺼이 수락하고자 한다. “희생자들을 위한 글쟁이로, 과거를 돌아보고 앞을 얘기하는, 지나간 세월이 낳은 미래의 예언자로 살게 했다.”(266면) 종전이 되었지만, 바오 닌이 총 대신 펜을 잡고 혼자만의 고독한 내전을 격렬히 치른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전쟁의 슬픔』은 베트남전쟁을 다룬 또 하나의 작품이 아니라,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바오 닌만의 전쟁소설이 될 수 있었으리라. 그렇듯 바오 닌이 홀로 치러낸 글쓰기의 전투는 가혹했으나, 전쟁을 묘사하는 찬란한 슬픔의 문장을 통해 세계 독자들의 가슴을 치는 감동을 선사했다고 단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