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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 제15회 창비신인소설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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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화 崔正和

1979년 인천 출생. 경희대 국문과 졸업. daysmare@hanmail.net

 

 

 

팜비치

 

 

그는 텐트 안에서 반소매 티와 칠부 카고팬츠를 차례대로 벗고 이월상품이라 인터넷에서 육십퍼센트 할인가격으로 구매한 야외용 수영팬츠를 입었다. 수영팬츠에는 주먹만한 크기의 기하학적 무늬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형광색으로 프린트되어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그건 해골 모양이었다. 아내가 어째서 그런 디자인을 선택한 건지 의아했지만 그는 옷의 스타일에 그리 민감한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촌스러운 무늬에 대해서는 금세 잊어버렸다. 해변에서의 수영은 어린 시절 이후 처음이었기 때문에 그는 수영복 차림이 낯설었다. 그는 속옷을 입은 채로 수영팬츠를 입었다가 잠시 망설였다. 속옷을 입고 수영복을 입어야 할지 속옷을 벗고 입어야 할지를 고민하다가 그는 결국 수영팬츠를 벗고 속옷을 벗은 뒤 다시 수영팬츠를 입었다. 발가벗은 기분은 그리 좋지 않았다. 어렸을 때 어머니는 그가 잘못을 저지르면 발가벗겨 마당에 세워놓았고 동네 친구들이 그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 그는 끔찍이도 두려웠다. 이후로 그는 아이를 훈육할 때 절대 수치심을 느끼게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해왔고 불가피하게 체벌을 해야 할 경우는 회초리를 사용했으며 매질을 할 때 감정이 실리지 않도록 엄격히 자제했다.

그는 삼십대 중반이었지만 또래에 비해 나이가 들어 보이는 인상이었다. 엉덩이는 탄력을 잃었고 허리를 굽히지 않으면 선 채로는 자기 발가락을 볼 수 없었다. 그는 일어서서 양말을 벗다가 비틀거렸다. 제기랄. 그는 자신의 균형감각에 대해 의심하기보다는 비좁은 텐트를 탓하는 쪽을 택했다. 양손으로 양말을 쥔 채 두어번 자세를 바꾸다가 포기하고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텐트 바닥 밑으로 불룩하게 튀어나온 딱딱한 자갈이 엉덩이에 배겼으나 그는 자리를 옮기지 않고 묵묵히 양말을 벗어 두개를 반듯이 포갠 뒤 목 부분을 한꺼번에 접어 짝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했다. 이어 오른쪽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를 풀었다. 백금으로 도금한 그 시계는 처남이 선물한 스위스제 워터 프루프였지만 설명서에는 그걸 끼고 헤엄을 쳐도 된다는 내용이 없었기 때문에 찜찜했다. 그는 시계를 들고 머뭇거리다가 바지주머니에 넣었고 그걸로는 안심할 수 없었는지 바지를 둘둘 말아 셔츠 밑에 두었다. 텐트 안에 있으니 자신이 지나치게 둔하다고 느껴졌다. 너무 뚱뚱해서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당했던 초등학교 동창이 떠올랐다. 그애는 입학할 때 체구가 이미 졸업반 선배들과 비슷했고 졸업할 때 몸무게는 교장선생님을 앞질렀다. 그 뚱보에게서는 항상 오래된 액체풀 냄새가 났는데, 그는 어디선가—어쩌면 자신의 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그 비슷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콧구멍을 두어번 벌름거렸다. 동창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리고자 그는 서둘러 텐트 밖으로 나왔다.

아내는 썬글라스에 챙이 넓은 짚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 짚모자는 자그만치 이십오만원짜리였다. 가격표를 잘못 읽은 그는 모자의 가격이 이만오천원이라고 생각하고 모자가 아내에게 아주 잘 어울린다고 칭찬했다. 아내는 벌써 스무개째 모자를 쓰고 거울을 들여다보는 중이었는데 그의 눈으로는 그 스무개의 모자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나같이 둥그런 모양에 짙은 누런색이었고 한가운데 리본이 달려 있었다. 그는 아내가 대체 무얼 망설이고 있는지 몰랐고 직접 계산을 하러 카운터로 갔다. 직원이 일시불로 할 건지 할부로 할 건지 물었을 때 그는 자기가 동그라미 하나를 놓쳤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나 아내의 들뜬 얼굴을 보고 사태를 되돌리기에 좀 늦었다는 걸 알았다. “3개월로요.” 그는 공들여 천천히 서명했고 낮은 기계음과 함께 기다란 영수증이 나오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지갑을 열고 영수증을 쑤셔넣었다. 지갑 속은 이달 말까지 그가 처리해야 할 영수증들로 불룩했고 그는 거기에 한장을 더 추가하면서 해결해야 할 일들이 이처럼 정확히 수치화된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그러나 잠시 무력감을 느꼈을 뿐이고 깊이 생각하는 것은 건강에 좋지 않다는 신조를 떠올렸다. 그는 아무도 못 알아들을 만큼 작은 소리로 뭐라고 중얼거린 뒤 재킷 안주머니에 지갑을 넣고 아내를 바라보았다. 모자가 든 커다란 쇼핑백을 든 아내는 이번에는 왕골 비치백에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당신이 사준 이 모자랑 너무 잘 어울리지 않아?” 아내는 ‘당신이 사준 모자’라고 또박또박 발음하면서, 비치백과 모자는 엄연한 한쌍인데 그가 자기를 한쪽 신발만 신어야 하는 우스꽝스러운 처지에 빠뜨렸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정확히 십분 후에 그는 또 하나의 기다란 영수증을 지갑 속에 쑤셔넣고 있었다.

 

“텐트가 너무 오래된 것 같아.”

아내가 모자를 고쳐쓰며 말했다. 하지만 어쩐지 아내의 불평이 자신을 향한 것으로 들렸다. 그는 너무 오래되었다, 그들 사이는 너무 오래되었다고 말이다. 아내의 허리에 팔을 두르려다 그냥 딸애의 손을 잡았다. 정오의 햇살이 정수리를 향해 뜨겁게 쏟아져내렸다. 아내가 비치백에서 모자를 꺼냈다. 대학 오리엔테이션에서 받은 카키색 야구모자였다.

“당신도 모자를 살걸 그랬어.”

“이거면 충분해.”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그는 발걸음을 좀 빨리해서 아내와의 간격을 벌렸다. 슬리퍼 안으로 모래알갱이가 들어왔다가 빠져나갔다. 모래는 직사광선에 달구어져 뜨거웠다. 딸의 발치를 내려다보았다. 한걸음씩 디딜 때마다 샌들을 신은 작은 발이 모래 속에 파묻혔다. “뜨겁지 않니?” 딸애는 대답 대신 깔깔댔다. 딸은 네살인데 아직 말을 잘 못했다. 그는 딸의 겨드랑이에 손을 끼워넣고 번쩍 들어올려 목말을 태웠다. “무서우면 말해.” 그는 모래사장을 한창 달릴 판이었다. 딸의 양손을 꼭 쥐고 준비자세를 취했다. 딸애가 다시 까르르 웃었다. 그는 딸에게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할 거라고 이른 뒤 달리기 시작했다. “넘어지니까 조심해.” 뒤에서 아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더 빨리, 빨리.” 딸애가 주문했다. 그는 보폭을 넓히고 속도를 냈다. 저기 보이는 바다까지 냅다 뛰어가서, 파도가 막 쓸고 지나가 아직 거품이 빠지지 않은 축축한 모래사장 위에 아이를 내려놓을 셈이었다. “달려, 아빠, 달려!” 딸애는 흥분해서 몸을 흔들었다.

아직 반밖에 안 왔는데 숨이 차고 발이 무거웠다. 벌써 두번이나 넘어질 뻔했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아내가 뒤에서 보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어깨 위에 올라탄 딸이 실망할까 두렵기도 했다. 어쨌거나 그는 얼굴이 시뻘게져서 있는 힘을 다했다. 다섯 발쯤 더 앞으로 나아갔을 때 왼쪽 가슴 갈빗대 쪽에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는 가슴을 움츠리고 절뚝거리며 속도를 늦추었다. “뛰어. 뛰어라, 말아!” 딸의 작은 엉덩이가 그의 어깨 위에서 들썩거렸다. 그앤 백마를 탄 공주였고 그 세계를 지켜야 할 의무가 그에게 있었다. 천진난만하고 앙증맞은 주문에 그는 정신을 가다듬고 허리를 쭉 폈다. 가슴께의 통증은 잊고 다시 냅다 뛰었다. 다행히도 호흡곤란이 오기 직전에 결승선에 도달할 수 있었으나 딸을 내려놓으려고 허리를 구부렸을 때 그는 아찔함을 느끼며 모래사장 위로 고꾸라졌다.

아이는 그게 목말 장난의 연속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래사장 위에 벌러덩 누워 깔깔댔다. 그애는 해변에서 가장 목청이 좋은 아이 같았다. 아내가 달려와 그를 마주보고 섰다. 그녀는 쌍커풀이 진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는 아내에게 뭐라고 변명해야 할지 몰라 되도록 천천히 일어났다. 아내가 쓸데없이 걱정에 빠지지 않도록 적당히 둘러대야 했다. “왼발이 접질린……”

하지만 그에게는 준비한 대사를 미처 끝까지 읊을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아내는 모래알갱이에 긁혀 붉게 달아오른 그의 무릎을 살피는 대신에 왕골 비치백에 거의 얼굴을 박고 뭔가를 열심히 뒤적이고 있었다. 그녀는 오른팔을 백에서 끄집어내지 않은 채 고개를 들었다.

“튜브를 깜빡했어!”

그는 허리를 숙이고 무릎을 털었다. 살에 박혀 있던 모래알갱이들이 떨어져나갔다. 그는 엉덩이를 내민 엉거주춤한 자세로 울퉁불퉁해진 무릎을 쓰다듬었다. 바람이 한번 세게 불고 지나갔다.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상어튜브를 호텔에 두고 나왔다구.”

아내가 왼손으로 모자챙을 잡고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그 순간 파도가 밀려와 그들의 발을 적셨다. 아내는 나머지 손으로 치맛자락을 움켜잡았다.

그녀는 야생화가 프린트된 화려한 비비드 컬러의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어깨 부분은 끈으로 묶게 되어 있고 치맛단은 발목까지 내려왔다. 오른쪽 옆선에 트임이 있어 바람이 불 때마다 날씬한 다리가 훤히 드러났다가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그런 차림으로 그녀가 해변에서 무얼 할 수 있을지 그는 의아했다. 아내의 차림은 피서지가 아니라 피서지 그림이 걸린 레스토랑에 더 어울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 상어튜브라니. 그는 아내가 뭔가 잘못 발음한 것이 아닐까 의심했다.

“침 뱉어, 침.”

딸아이가 양발을 구르며 소리치고 있다. 그앤 잔뜩 흥분해서 파도가 쓸려나간 자리에 남아 있는 물거품에 침을 뱉고 있었다. 그가 딸을 향해 겅중겅중 뛰어가 뒤쪽에서 아이를 안아올렸다. “아빠도 침 뱉어.” 바다 저편에서 다시 한번 파도가 밀려왔다. 아이가 입을 벌리고 그쪽을 바라봤다. 엄청난 침방울들이 그애를 향해 돌진해오고 있었다. 그는 아이를 파도를 향해 던질 것처럼 높이 들어올렸다가 다시 품에 안았다. 아이가 깔깔대며 그의 가슴을 밀었다. 그는 꿈쩍도 하지 않고 아이를 더 세게 안았다. 아이가 그의 가슴에 침을 흘렸다. 일부러 그런 건지 웃다가 침을 삼킬 틈을 놓친 건지는 몰랐다. “에이, 더러워! 이제 진짜 던져버려야겠다.” 아이는 안된다고 고개를 저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지만, 꼭 쥔 두 주먹을 보면 바다에 내던져질 기분을 잔뜩 기대하고 있다는 걸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다음번 파도가 밀려왔을 때 그는 아이를 바다에 놓아주고 한손으로 허리를 밭쳤다. 조금 숨이 찼다. 그가 살짝 눈살을 찌푸린 이유는 햇빛에 눈이 부셨기 때문이 아니었다.

“지금 얼른 호텔로 갔다 와.”

아내는 아직도 상어튜브 타령이었다. 그는 모래사장으로 걸어나가 축축한 모래 위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상어튜브가 꼭 필요한 상황은 아닌 것 같은데.”

“지금이 아니라면 대체 상어튜브가 언제 필요하다는 거야?”

아내는 정말로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는 아내에게서 호텔 방열쇠를 받아들고 엉덩이를 털고 일어섰다. 아내는 최근 들어 점점 더 고집스러워지고 있는 것 같다. 지지난주에 아내는 그가 원래 쓰던 샴푸를 다 쓰지 않은 채 새것을 사용했다고 불만을 털어놓다가 울었다. 지난주에는 아이가 얼굴에 코를 그리지 않자 스케치북을 빼앗아 들고 울퉁불퉁한 동그라미의 정중앙에 세모난 코를 일일이 그려 넣었다. 그는 아내가 미술심리치료와 관련한 책을 읽지 않는 편이 좋겠다고 조언했다. 그 책에 의하면 그림에서 뭔가가 없으면 없어서 문제였고 그리면 그려서 문제였다. 다음날 아내는 동생과 통화 중 싸웠고, 겨우 한살 아래인 동생더러 자기에게 존댓말을 하라고 했다. 그는 아내와 이야기하다 무언가 치밀어오르는 일이 잦아졌고 그럴 때마다 자기가 더 잘해야 한다고, 아내는 어딘가 아픈 게 분명하고 배려가 필요하다고 주문을 외우며 마음을 추슬렀다.

그는 궁둥이를 씰룩거리며 끝도 없이 펼쳐진 해변을 따라 걸었다. 그런 일이라면 자신이 있었다. 의심 없이 그저 하던 대로 쭉 하는 것 말이다. 그런 성격은 그의 직업과 잘 맞았고 입사 삼년 차에 그는 동기 중 최고속 승진을 했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 들어서 그의 직책이 위기상황 대처능력이라든가 융통성 같은 덕목을 필요로 했을 때 그는 식은땀을 흘렸고 그를 바라보는 상사의 눈초리는 탐탁지 않았다. 그는 오년째 승진에서 쓴 물을 마셨다. 하지만 그는 동료들처럼 퇴직 이후의 삶을 걱정하지는 않았다. 그건 그의 장점이라면 장점이랄 수도 있었다.

박과장은 퇴직금을 계산해서 그걸로 치킨집 말고 뭘 할 수 있을지에 대해 매일 생각했다. 박은 거리를 걸을 때, 특히 퇴근길에 상점가에 들어서면 간판 하나하나를 유심히 보며 매달 매출이 얼마나 될지를 예상했다. 박의 옆에서 킁킁대며 따라 걷던 그는 가끔 뭔가 중요한 생각이 났다는 듯 걸음걸이가 느려지곤 했는데 그건 그를 사로잡는 음식 냄새 때문이었다. “자네 축농증인가?” 박이 묻자 그는 양복바지 뒷주머니에 양손을 찔러넣고 하늘을 향해 고개를 젖혔다. 그는 자리에 멈춰서서 마음껏 킁킁거린 뒤 말했다. “냄새야말로 정말 공평해. 돈을 내지 않고도 이렇게 잔뜩 맡을 수 있다니 말이야.” 두어달 뒤 박은 승진해서 서초점으로 발령을 받았고 그는 이제 그 거리를 혼자 걸었다. 퇴근길은 박과 함께였을 때보다 십여분 더 걸렸다. 혼자가 된 그는 아무 눈치 볼 것 없이 천천히 걸으며 콧속 더 깊숙한 곳으로 냄새를 끌어넣었다.

그는 가슴을 펴고 심호흡을 가다듬었다. 파도가 칠 때마다 물비린내가 확 끼쳤다가 다시 물러났다. 그는 바닷물에 발목까지 담가 슬리퍼 안으로 들어온 모래알갱이를 떨구어내었다. 엄지발가락을 세워 슬리퍼가 벗겨지지 않게 한 뒤 좌우로 흔들었다. 한낮의 태양 때문에 물은 미적지근했지만 살갗에 달라붙었던 껄끄러운 이물질이 떨어져나가자 기분이 좋았다. 그는 한동안 걷다가 바닷물에 발을 담갔고 다시 오래 걷다가 멈춰섰다. 저만치 호텔의 윤곽이 보이기 시작할 때쯤 그는 물속에서 슬리퍼를 오래 흔들다가 그만 바다로 떠내려보내고 말았다. 파도가 슬리퍼를 떠안고 사라지자 그는 허공으로 손을 내뻗으며 앗 하고 들릴락 말락한 탄식을 내질렀을 뿐 표정의 변화는 없었다. 그는 한쪽 슬리퍼만 신은 채로 절뚝이며 걸었다. 샌들을 모아 한손에 쥔 어떤 여자가 그를 지나치기 전까지 말이다. 그녀의 맨발을 유심히 쳐다보던 그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나머지 슬리퍼를 벗어 바다 저쪽으로 던져버렸다. 모래사장은 축축했고 가끔 자갈이나 조개를 밟을 때는 지압이라도 하듯 강한 통증이 느껴졌다. 까끌까끌한 알갱이들이 햇볕에 후끈 달아올라 있었다. 발바닥을 디뎌 체중을 옮길 때마다 어깨가 움찔하며 약간 위로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그러나 곧 열기에 익숙해졌고 그는 걷는 데 아무런 지장을 느끼지 않았다. 그는 구구단을 외우는 성실한 초등학생처럼 묵묵히 발걸음을 옮겼고 하마터면 호텔을 지나칠 뻔했다. 호텔 앞에서 조촐한 음악회가 열리고 있지 않았다면 그는 시 경계선에 있는 항구에 도착했을지도 모른다.

호텔 정원의 한가운데에는 대형분수가 있었고 그 안에 다비드 상의 모조품이 있었다. 그는 미켈란젤로의 그 작품을 중학교 미술책에서 분명히 본 적이 있었지만 다비드 상의 양 어깨 위로 쏟아져내리는 물줄기 때문이었을까 고수머리와 어울리는 잘 여문 성기 때문이었을까 ‘오줌싸개’라는 단어만이 맴돌 뿐 다비드의 이름을 기억해낼 수 없었다. 어쨌거나 그는 그 동상을 중심으로 오케스트라가 빙 둘러싸고 있는 것을 보았다. 초록색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벌린 다리 사이로 첼로를 세우고 있었다. 바이올린 연주자는 세명이었는데 모두 비슷하게 생겨서 멀리서 보면 세 쌍둥이 같았다. 무대를 둘러싸고 간이의자들이 삼십여개쯤 배치되어 있었지만 관객은—아직 입구에 서 있는 그를 제외하고—어떤 부부 한쌍뿐이었다. 그는 자기가 호텔에 온 목적을 잊었고, 상어튜브를 생각하며 뜨거운 모래사장을 걸었던 것과 똑같은 성실하고 우직한 걸음걸이로 걸어가 의자에 앉았다.

‘팜비치 가족을 위한 한낮의 해변 콘서트’

축축하게 습기를 머금은 강한 바람에 플래카드가 흔들렸다. 세로로 길게 세워놓은 플래카드는 은색 재질로 된 받침대가 지지하고 있었는데 그 받침대는 금속 흉내를 낸 플라스틱으로 바람이 불 때마다 좌우로 삼사센티미터씩 기우뚱거렸다. 플래카드가 그의 자리에서 일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플라스틱 받침대가 몸을 뒤챌 때마다 아슬아슬한 기분이 들었다. 다시 한번 바람이 불었고—바람이 플래카드 천을 훑고 지나가며 꽤 큰 소리를 냈는데 그는 자신의 고물 자동차가 출발할 때 나는 소리랑 비슷하다고 생각했다—마침내 플래카드가 그를 향해 거꾸러졌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그것을 움켜잡았다. 그는 주먹으로 그리고 팔뚝으로 결국에는 몸 전체로 둑방의 구멍을 막아 수해로부터 마을을 구해낸 소년의 이야기를 생각하며 미소 지었다. 그는 쓰러져내린 플래카드를 세우고 부실한 받침대가 균형을 잡을 수 있도록 붙잡았다. “이봐, 구멍을 뚫어.” 무대를 손 보고 있던 인부 한명이 그에게 말했다. “뭐라고요?” “천에 구멍을 뚫으면 바람이 불어도 끄떡없다구.”

둑에 난 구멍을 밤새 막아 마을을 구했다는 한스—그는 그 네덜란드 소년의 이름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를 떠올리지만 않았더라도 그는 자기는 그저 관객일 뿐 플래카드에 대한 아무런 책임이 없노라 말하고 자리로 되돌아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이제 한스였다. 주먹이 아니라 팔뚝을 내밀 차례였다. 그는 인부 무리에게로 가서 가위를 빌렸고 플래카드의 ‘치’와 ‘가’ 사이에, ‘위한’에서 ‘ㅎ’의 동그라미 안에, 그리고 ‘변’과 ‘콘’ 사이에 구멍을 뚫었다. 가위를 돌려주고 자리에 앉았을 때 그는 흘끔흘끔 플래카드를 바라보며 내심 다시 바람이 불어오기를 기다렸다. 리허설이 시작되고 몇분 지나지 않아 첼리스트의 초록색 드레스 자락이 펄럭이기 시작했다. 그는 기대에 찬 눈으로 플래카드를 바라보았다. 플래카드는 팽팽하게 앞쪽으로 쏠렸다가 다시 반대쪽으로 휘어졌다. 그러나 조금도 비틀거리지 않았다. 동그란 세개의 구멍으로 바람이 빠져나가는 것이 그의 눈에는 보이는 것 같았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노부부 한쌍, 아이 셋을 데려온 젊은 커플, 그리고 중년부인 한명이 앉아 있었다. 그는 그들이 언제 왔는지 궁금했다. 그들은 휘청이는 플래카드를 멋지게 잡아채고 매우 적절한 위치에 구멍을 뚫는 그의 모습을 죄다 지켜보고 있었을까?

오케스트라가 한스를 위한(!) 연주를 시작했다. 바이올린을 주제로 한 실내악이었다. 제1바이올린이 활대를 잡고 현을 그어올렸을 때, 정확히 그 첫 음에 그는 아찔함을 느꼈다. 왼쪽 발바닥 밑에서 무언가 화끈거리기 시작했고 그 열기가 발등에서 발목으로, 다시 종아리로 허벅지를 타고 올라와 심장을 건드렸다. 열기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정수리까지 단번에 치밀고 올라왔다. 난생처음 느껴보는 기분이었다. 심지어 그는 아픈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황홀했다. 그는 신음하고 싶었다. 날카로운 무언가가 그를 해친 것 같았지만 거부할 생각도 없이 감사하게 그것의 침범을 받아들였다. 연주는 달변가의 괴변과도 같아서 그는 믿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발바닥 밑에서는 계속해서 간질간질하면서도 타오를 것 같은 열기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는 자기의 발에 심장 하나를 더 갖게 되었다고 믿었다.

연주가 끝났을 때 그는 꼼짝도 않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는 석고상처럼 굳어져 숨만 겨우 쉬었다. 힘을 풀면 자기 몸이 마음대로 움직일 것 같아 어깨를 움츠렸다. 그는 엉덩이에 힘을 주고 천천히 일어나 콘서트장을 떠났다. 무대를 향해 걸어왔을 때 그의 걸음걸이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그가 방금 전의 사람과 동일인물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힘겹게 한발을 내밀고 나서는 사람들이 기억나지 않는 단어를 기억해내려고 애쓸 때처럼 모든 기력을 동원해 또 한발을 내밀었다. 왼쪽 발바닥이 지면에 닿을 때면 끔찍한 진실이라도 알게 된 것처럼 소스라치듯 놀랐다. 그는 그렇게 절뚝이며 걸어나갔다. 그는 마치 세상에 저 홀로 이단의 신앙을 가지게 된 자처럼 외로웠다.

“좀 도와드릴까요?”

콘서트장에서 손을 잡고 나란히 앉아 있던 노부부 중 아내 쪽에서 걱정스럽다는 듯 말을 걸었다. 여인은 사려있어 보이는 깊고 검은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괜찮습니다.”

“부축이 필요하면 남편에게 부탁할게요.”

“아니에요.”

그는 얼굴 근육을 움직여 부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여인은 남편에게로 돌아갔다. “어서 돌아가 발을 씻어요.” 여인은 앞서 걷다가 천천히 뒤를 돌더니 그 말을 남기고 다시 남편의 팔짱을 꼈다. 무슨 뜻이었을까. 그녀 역시 연주의 세례를 받은 이단교도인가. 그는 계속 절뚝이며 호텔의 회전문을 지나 로비에 도착했다.

한쌍의 커플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자는 아내의 것과 같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녀는 꽤나 미인이어서 로비를 지나는 이들의 눈길을 받고 있었다. 글래머러스한 여자에 비해 남자는 왜소해 보였고 그녀와 서너걸음쯤 떨어져 서 있었다. 둘 다 나이가 꽤 있는 것 같았는데도 아이가 안 보였다. 그는 그들의 옆에 섰다. 그가 다가가자 여자가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남자가 여자 쪽으로 붙어섰다. 그는 좀 멋쩍어져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흰 머릿수건과 앞치마를 두른 여직원이 그가 걸어온 길을 따라 물걸레질을 하고 있었다. 이제 막 도착한 두 여자가 카운터에 몸을 기대고 지갑을 열었다. 그녀들은 말끝마다 실실댔다. 썬글라스를 쓰고 있었지만 진을 입은 뒷모습만 봐도 아직 이십대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두 여자의 뒷모습을 감상하다가 카운터 안쪽 벽의 한가운데 걸린 대형 전광판 시계를 보았을 때 그는 깜짝 놀랐다. 한여름이었기 때문에 아직 한낮처럼 볕이 충만했지만 이미 초저녁이었다.

그는 시간을 확인한 순간부터 한스를 잊고 이단교도를 버리고 본래 그의 위치로 돌아갔다. 그에게는 다시 상어튜브라는 단 하나의 목적이 주어졌고 잠시나마 또렷하게 날선 눈빛은 이제 경계심을 풀고 부드러워졌다. 그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아내에게 건네받은 열쇠를 만지작거렸다. 모래사장 한가운데 아내의 꽃무늬 원피스가 바람에 휘날리는 모습이 떠올랐다. 아름다운 아내의 얼굴은 참담하게 일그러졌고 두 주먹을 너무 꽉 쥔 나머지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파이고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하고 있다. 딸애는 바다 쪽에 가까운, 아내와 좀 떨어진 곳에서 혼자 놀고 있다. 그애는 워낙 씩씩한 성격이기 때문에 아빠가 없고 성난 엄마가 자기랑 놀아주지 않는다고 해서 울거나 보채지는 않는 것이다. 그애는 오히려 누구의 방해도 간섭도 받지 않고 놀이 속으로, 바다가 침이 잔뜩 고인 입을 벌리고 모래사장 깊은 곳에서 벌을 받고 있는 마녀가 손가락을 내미는 자기만의 상상 속으로 완전히 빠져든다. 쌕쌕거리는 숨소리를 내며, 간혹 아이의 소리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크게 재채기를 하며, 그애는 생애 최초로 널따랗게 펼쳐진 모래사장을 마음껏 뒹굴며 탐색할 것이다. 그는 바닷물에 손을 한번 헹군 뒤 딸애의 코끝에 매달린 맑은 콧물을 닦아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이가 숨을 들이쉬자 한뼘밖에 되지 않는 연약한 가슴이 부풀어오르고 크르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반짝거리는 콧물이 다시 작은 콧구멍 속으로 들어가는 장면을 상상했다. 아이는 아무 망설임 없이 단번에 콧물을 삼키고 자랑스럽다는 듯 그의 얼굴을 바라본다. 모래알갱이가 묻은 작은 입술이 달싹거린다. “아빠 어디 갔다 왔어?”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 지방의 호텔이나 전전하며 연주하는 아마추어 악단의 음악을 감상하고 있었다고? 자기랑은 아무 상관이 없는 이들을 위해 빌린 가위로 천쪼가리 위에 구멍을 세개나 뚫고 있었다고?

엘리베이터가 도착했음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고 마찰음도 없이 매끄럽게 문이 열렸다. 그는 급한 마음에 제일 먼저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그들은 공교롭게도 같은 층에 묵고 있었다. 여자는 마치 그가 자기네를 일부러 따라다닌다는 듯 경계하는 눈빛을 보내더니 역시 아까처럼 한걸음 더 떨어졌다. 하지만 그는 더이상 상관하지 않았다. 이제 상어튜브 생각뿐이었으니까. 내릴 때도 그는 제일 먼저였다. 재빠른 걸음걸이로 417호로 가 열쇠구멍에 열쇠를 꽂고 문고리를 돌렸다. 서두르자. 어서 튜브를 찾아내 씩씩한 공주와 신경쇠약에 걸린 왕비를 구해내자. 아름다운 그녀들에게 상어를 잡아 바치자!

문이 열리고 그는 파도에 몸을 던지듯 용감하게 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서랍장을 칸칸이 다 뒤졌고 옷장문을 서너번은 여닫았다. 여행가방 속에 있는 것들을 모두 끄집어내어 바닥에 늘어놓았고 나중에는 침대보까지 들추어보았다. 그러나 상어튜브는 없었다. 그는 사기를 잃고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았다.

“남편을 사랑하지 않아. 그 사람이 어떻게 되든 난 신경 안 쓴다고!”

옆방에서 나는 소리였다. “하지만 애들 문제는 달라. 난 걔네들의 엄마야. 당신은 그걸 이해 못 하지. 아이를 길러본 적이 없으니까. 낳아본 적이 없으니까 몰라.” 여자의 목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그는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요즘 여자들이 남편 말고 정부를 하나씩 데리고 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있었지만 그걸 이런 데 와서 확인하고 싶지는 않았다. 남편이란 잘못하면 아내 데이트 비용을 대주는 우스운 꼴로 전락할 수 있다는 김대리의 충고가 생각났다. 김대리는 아직 총각이었는데 자기보다 세살 위의 유부녀와 만나고 있었다. “아이 둘을 낳은 몸매치곤 훌륭해.” 김대리가 집게손가락으로 허공에 유선형을 그리며 입술에 침을 적셨다. 그는 고개를 흔들어 김대리의 얼굴을 뭉그러뜨렸다.

방 안에 상어튜브가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차를 어디에 세웠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A구역에서 F구역까지를 전부 확인해야 했다. B-10이라고 쓰인 기둥을 지날 때 그는 어디선가 낯익은 웃음소리를 들었다.

“왜 친한 척이야? 우린 오늘 처음 만난 사이야.”

말끝마다 웃음을 흘리는 저 목소리의 주인공은 블루진, 카운터에서 실실대던 그 여자였다.

“우리 엄마랑 아버지도 옛날엔 처음 만난 사이였어. 알아?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처음 만났던 상대랑 사귀게 되거든.”

여자는 웃음을 참고 몸을 뒤로 살짝 젖혀 긴 머리를 찰랑거리게 했다. 남자애가 여자 쪽으로 몸을 가까이하며 숨을 들이쉬었다.

“너 엘라스틴 쓰지?”

“어떻게 알았어?”

여자애가 남자의 가슴 쪽에 주먹을 잠깐 갖다댔다. “여자들 반은 엘라스틴이고 반은 펜틴이거든.” 남자는 여유가 생겼는지 담배를 꺼내 물었다. “확률은 반반.”

“사기꾼.”

그렇게 말하지만 여자는 싫지 않은 눈치다. 남자의 손이 여자애의 허리에 가 있는데 가만히 있다. 이미 끝난 게임이다. 여자애는 머리칼을 제 손으로 자꾸만 쓸어내리고 있다. 저 손이 남자의 손으로 바뀌는 건 시간문제다.

“이따 열시에 교대니까 해변에서 놀다가 라운지로 와. 바비큐 요리 좋아해?”

저 남자 어딘가 낯익다 했더니 카운터 보이 아닌가. 여자애는 대답을 하지 않고 뒤돌아 걷는다. 또각또각 구두굽 소리가 도도하게 지하주차장을 울렸지만 여자가 열시에 라운지에 나타날 것은 불 보듯 뻔하다. 그는 걸을 때마다 흔들리는 풍만한 엉덩이를 바라보며 언젠가 자신의 딸도 저런 큰 엉덩이를 가지게 되고 기도 안 차는 놈팽이와 이런 지하에서 낄낄거릴지 모른다는 생각에 소름이 끼쳤다.

기운이 빠져 그는 터덜터덜 걸었다. 호텔 보이와 마주쳤을 때, 그는 그 놈팽이가 근무시간에 근무지를 이탈하여 허튼짓을 했다는 것을 목격했지만 그에 관해 훈계할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옆으로 비켜섰다. 그러나 보이 쪽에서 그를 불러 세웠다.

“죄송하지만, 손님.”

그는 대꾸 없이 멈춰섰다.

“지금 신고 계신 슬리퍼는 호텔 소유의 실내용이네요.”

“그래서요?”

“여기는 주차장이고, 외부에서는 개인용 실외화를 신으셔야……”

“내 딸을 건드릴 생각일랑 집어치우는 게 좋아.”

“네?”

“엘라스틴을 쓰는 여자 말이야.”

그는 엘라스틴을 쓰는 여자를 딸로 두기에는 너무 젊은 것처럼 보였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고 보이야 어떻게 생각하든 말든 저벅저벅 걸어 B구역에서 C구역으로 넘어갔다. 환풍기가 돌아가고 있었지만 지하의 공기에선 쾌쾌한 냄새가 났다. 습도가 높아 피부는 끈적해졌고 숨이 턱턱 막혀왔다. 그는 이십분 정도 더 헤맨 끝에 칠년 동안 운전한 구형 소나타를 찾아낼 수 있었다. 차를 발견한 순간 그는 중년의 여자들이 바람을 피우고 딸들은 시시껄렁한 연애를 하는 이 불량한 세계로부터 탈출할 수 있을 것 같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상어튜브는 차 안에 얌전히 모셔져 있었다. 아이가 탔던 뒷자리 쪽에서 들쭉날쭉한 이빨을 드러낸 채 얌전히 누워 있었다. 그는 튜브를 꺼내—딸애가 사분의 일 정도 바람을 불어넣어 흐물거렸다—어깨에 둘러메고 황급히 지하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다시 해변을 가로질러 텐트촌을 향해 걷고 또 걸었다. 돌아올 때 그는 자기가 벗어던진 슬리퍼 한짝이 해초에 엉킨 채 바위에 걸려 있는 것을 보았다. 만약 그 장면을 아내가 봤다면 꼼짝없이 그가 파도에 떠밀려갔다고 생각했겠지. 튜브를 찾으러 간 남편이 두세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고 그의 발에 끼워져 있어야 할 슬리퍼가 먼 바다에서부터 흘러들어온다. 그의 눈에는 슬리퍼가 분명 시체의 유품처럼 보였고 스스로가 유령이 된 기분이었다. 상어를 아내에게 넘기는 순간 그는 생명을 되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는 전속력으로 달리고 싶었다. 딸이 보고 싶었고 아내에게 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기운이 없었다. 점심을 먹지 못한데다 음악을 듣는 데 너무 집중한 탓인지 배가 더 고픈 것 같았다. 그는 최대한 보폭을 넓게 해서 걷고 또 걸었다.

튜브에 바람을 넣은 뒤 그는 텐트촌 근처에서 서성거렸다. 사람이 갑자기 너무 많아졌기 때문에 제자리를 찾기가 어려웠다. 팽팽하게 바람을 넣은 튜브는 어깨에 둘러멜 수 없어서 양팔로 안아야 했는데 크기가 성인의 키만해서 걸을 때마다 그의 시야를 가렸다. 그는 텐트를 겨우 찾아냈지만 텐트 근처에 있던 사랑스러운 두 여자를 찾을 수 없었다. 아내의 원피스는 그해 유행인가 보았다. 그는 똑같은 원피스를 입은 여자를 세명이나 만났다. 체격과 헤어스타일이 워낙 달랐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뒤에서 그녀들을 안아버렸을지도 모른다. 어디선가 딸애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뒤를 돌아보면 다시 뒤편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는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았다.

“여보!”

아내가 먼저 그를 발견했다. 아내는 파라솔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파라솔을 가져오지 않았기 때문에, 아내의 비치백에 든 건 분명 은박 돗자리였기 때문에 그는 도처에 널린 파라솔을 무심히 지나쳤던 것이다. 그런데 아내는 파라솔 아래에 웬 남자와—마치 그의 마누라라도 되듯이—마주 앉아 있었다.

“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당신을 찾고 있었지.”

“자리에서 뱅뱅 돌면서 말이야?”

그는 아내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려다가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그는 아내에게 상어를 안겨주고 칭찬을 듣고 싶었다. 그러나 상어튜브 없이는 피서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던 몇시간 전과는 아내가 사뭇 달라보였기에 상어를 조용히 바닥에 내려놓고 발끝을 내려다보았다.

“미안해.”

그는 아내의 원망이 쏟아질 것을 준비하며 심호흡을 했다. 마음속으로 귓구멍에 자동문을 설치하고 아내의 말소리가 시작될 때 그것을 작동시키면 되었다.

“그래. 다 내 잘못이야. 잘 알고 있다고.”

그는 자동문 스위치에 손가락을 갖다댄 채 얌전히 기다렸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아내는 말이 없었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 아내는 파라솔 주인—매부리코에 사각턱을 하고 썬글라스를 낀 느끼한 녀석—을 바라보며 그가 예전에 한번도 본 적이 없는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이이는 늘 이런 식이에요. 정말 엉뚱하죠?”

남자가 자기 뒷목을 긁었다. 그는 남자가 자기 아내를 만지고 싶어한다고, 그래서 저렇게 쉼 없이 손을 움직이고 있는 거라고 느꼈다.

“아직 소개를 안했지? 자기 애들이 바다에서 노는 동안 나더러 파라솔을 잠깐 써도 좋다고 하셨어. 이분은 가족과 함께 팜비치에 사신대. 여보, 진짜 팜비치 말이야.”

아내는 ‘진짜 팜비치’라고 말할 때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게 무슨 대단한 비밀이라고! 건방진 매부리코는 이제 팔짱을 낀 채 자기 팔뚝에 대고 손가락으로 피아노 치는 흉내를 내고 있었다. 쉴 새 없이 두리번거리고 있었지만 뭔가 궁금하다기보다는 건성으로 그러는 것 같았다. 뒤를 돌아 그를 힐끗 바라보는 아내의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아내는 그가 튜브를 가져오느라 오랜 시간을 지체한 이유에 대해 묻는 대신 손가락으로 대여섯걸음 떨어진 해변가를 가리켰다.

딸애가 매부리코의 아이들과 파도타기 놀이를 하고 있었다. 매부리코와 아내가 멀찌감찌서 지켜보는 가운데 아이들은 사이좋게 스티로폼 위에 올라가 파도를 기다렸다. 딸애를 포함해 모두 다섯명의 공주님들이었다. 저만치서 파도가 밀려오면 아이들은 한목소리로 비명을 질렀고 어느 순간 파도에 쓸린 스티로폼이 뒤집어지면서 바닷속으로 잠수했다. 다시 물 밖으로 머리를 내민 아이들은 서로의 얼굴에 대고 입속의 물을 내뿜고는 괴성에 가까운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아이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딸의 손목을 잡았다.

딸애가 그의 눈을 바라보자 그는 “상어다!”라고 외치며 튜브를 내밀었다. 아이의 눈동자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난 파도 탈거야. 아빠, 파도 탈거야.” 그는 상어를 다리 사이에 끼우고 시범을 보였다. “이제 상어 위에서 타는 거야. 이렇게, 이렇게.” 그는 한걸음씩 물속으로 걸어들어가며 팔을 휘저었다. 딸은 고개를 흔들었다. “스티로폼 위에서. 스티로폼 줘.” 딸은 물위에 둥둥 떠 있는 스티로폼 조각을 꼭 붙잡았다. “지지야, 이건 더러워.” 그는 아이의 손에서 스티로폼을 떼어내고 다리 사이에서 끄집어낸 상어 위에 아이를 앉혔다. 그리고 바다를 향해 힘껏 밀었다.

몰라서 그렇지 막상 상어를 타게 되면 딸애가 즐거워할 거라는 그의 생각은 예상을 빗나갔다. 생전 울지 않던 이 여장부는 울음을 터뜨렸고 그 우렁찬 목청에 매부리코가—아내가 아니라—달려왔다. 그는 미소를 띠며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해주는 게 최선이라고 조언했다. “그게 제가 아이 넷을 키우면서 적용하는 단 하나의 원칙이랍니다.” 육아방송에라도 출연한 듯 우아한 말투였다. 매부리코는 딸에게 다시 스티로폼을 쥐여줬고 자기 아이들과 함께 놀도록 이끌었다.

그는 상어꼬리를 붙잡아 끌고 텐트를 향해 걸었다. 몹시 피곤해서 좀 누워 있고 싶었다. 배도 고팠지만 뭘 먹을 기분은 아니었다. 상어튜브를 텐트 못에 묶어두고 안으로 들어갔다. 바닥에 앉았을 때 또다시 엉덩이에 자갈이 배겼다. 그는 옆으로 좀 비켜앉았다. 엉덩이를 들 때 고개를 숙이다가 그는 발바닥에서 뭔가 발견하고 유심히 살펴보았다. 반짝이는 작은 유리조각이 살 안쪽에 깊이 파고들어 있었다. 텐트 밖에서는 상어의 머리가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는 상어의 이빨을, 그리고 다시 발바닥의 상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삼각형 모양으로 살점이 떨어져나간 상처는 마치 날카로운 이빨이 박혔던 자국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