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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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낙타의 전속력으로, 느릿느릿

신경림 시집 『낙타』

 

 

김수이 金壽伊

문학평론가, 경희대 교수. 평론집 『환각의 칼날』 『풍경 속의 빈 곳』 『서정은 진화한다』 등이 있음. whitesnow1@hanmail.net

 

 

내 몸이 이 세상에 머물기를 끝내는 날

나는 전속력으로 달려나갈 테다

나를 가두고 있던 내 몸으로부터

어둡고 갑갑한 감옥으로부터

-「눈」 부분

 

신경림(申庚林)의 시집 『낙타』(창비 2008)는 다른 세상을 향한 전속력의 질주를 계획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계획의 주체는‘내 몸의 감옥’에 갇혀 있는‘나’이고, 질주의 주체는‘내 몸’에서 벗어나게 될‘나’이다. 이 전속력은 단 한번 일어날 존재적 사건이자, 한 인간으로서 삶을 완결짓는 최선의 자세를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저 멀리 1956년에 명편 「갈대」와 함께 시작된 신경림 시의 역사는 이 무한한 질주의 계획 앞에 홀연 무거워지고 또 무량(無量)히 가벼워진다. 전통과 근대, 현실과 이념, 정착과 유목의 격전지였던 20세기 중·후반의 한국 현대사는 한 존재의 내력과 실존의 무게를 압도해왔으나, 이제는 그것을 설명하는 확고한 근거가 되지 못한다. “평생을 두고 해온 일 문득 부질없어/그 허전함 메우”(「초원의 별」)려 하는 이에게 그가 관여했던 인간사의 모든 것은 돌연‘버리고 싶은 유산’이 된다. 그리하여 신경림은 “문득” 폭력의 역사에 맞섰던 “60년대, 70년대의 내 핏발선 눈”“80년대의 내 새된 목소리” 등과 같은 “나의 이 소도구들이 싫어진다”(「버리고 싶은 유산」)고 털어놓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 고백에서 부각되는 것은 허망한 인위적 가치들과 결별하고 싶어하는 노시인의 솔직하고 담담한 육성(肉聲) 자체이다. 신경림이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1998) 이후 명확하게 잡게 되었다는 시의 길, “남이 못하는 것을 보고 듣고 만지기 위해, 생각 속에서 현실 속에서 힘껏 내달려, 그것을 남들이 가지지 못한 목소리로 노래하는 것”(산문 「나는 왜 시를 쓰는가」)의 길은 이 육성을 통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내친 김에 신경림은 아버지의 건넌방, 할머니의 국수틀, 어머니의 재봉틀로 압축되는 유년의 추억과 내면세계까지도 자신의 삶을 규정하는 답답한‘틀’(「즐거운 나의 집」)이라고 토로하기에 이른다. 카트리나가 미국 남부를 휩쓸었을 때, “안된 얘기지만 나는 후련했다”“너희들도 당할 때도 있어야 한다”(「아, 막달라 마리아조차!」)고 일갈하는 장면에서도 신경림의 육성은 어린아이 같은 음색으로 오롯이 울려퍼진다.

순연하고 꾸밈없는 육성으로, 신경림은 생의 바깥을 향한 전속력의 질주의 동반자로‘낙타’를 지목한다. “낙타를 타고 가리라, 저승길은/별과 달과 해와/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것도 못 본 체/손 저어 대답하면서,/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낙타」) “진탕도 있고 먼지도 이는 길을/이 세상에서처럼 터덜터덜 걸어가겠지”(「먹다 남은 배낭 속 반병 술까지도」). 신경림이 선언한 전속력이 서두를 것 없이 느릿느릿 걸어가는 낙타의 전속력이었음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낙타는 저승길의 낯선 동반자가 아니라, 신경림이 이 세상에서 오래 동행해온 그의 분신과 같은 시적 대상이다. 저승에서도 이승에서처럼 “진탕도 있고 먼지는 이는 길”이 펼쳐질 것이라는 예감은 두 세계를 같은 질서로 이해하는 신경림의 세계상을 보여준다. 이런 맥락에서 신경림의 질주는 장밋빛 세계를 향한 육탈(肉脫)의 탈출이 아니라, 가야 할 불가해한 세계를 향한 혼신의 이행(移行)을 의미한다. 변화하는 것은 세상이 아니라, 세상의 또다른 시공간을 걸어가게 될‘나’의 질료와 형상이다.‘나’의 질료와 형상을 변화시키는 일은 그래서 동일한 질서로 이루어진 두개의 다른 세상을 연결하는 존재론적 꿈이 된다. 가령, “낡은 내 몸에서 시원스레 빠져나와”(「새벽이슬에 떠는 그 꽃들」) “끝내는 스스로 제 가슴 속의 별이 되”(「그녀의 삶」)고자 하는 꿈은‘나’를 포함한 세상의 모든 존재들에게 열려 있는 것이 된다. 이 이행을 일러 죽음이 아닌, 존재의 자연적이며 미학적인 변신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 변신의 풍경에 관해 신경림은 이렇게 적어두고 있다. “나는 슬퍼하지 않으리/내가 돌아가 들어앉을 몸이 어느새/지상에서 사라져 없다 하더라도./새벽이슬에 떠는 그 꽃들 이미/아름다운 내 집이 되어 있으리.”(「새벽이슬에 떠는 그 꽃들」)

스스로 제 가슴속의 별이 되거나, 새벽이슬에 떠는 꽃들이 아름다운 내 집이 되어 있기를 소망하는 시인의 삶은 이제 그 정점을 향한 축적과 비워냄의 시간이 된다. 이 축적과 비워냄의 가운데 『낙타』의 세계는 수런거리면서도 적막하다. 매연과 소음, 착취와 학살, 여중생 미군장갑차 사고와 팔레스타인 해방 등 현실의 사건들로 웅성거리면서도, 그러한 세상에서의 삶과 존재의 운명을 통찰하는 온유한 시선으로 고즈넉하다. 그 다양한 현실의 풍경을 신경림의 어법으로 요약하자면, 혹을 제 등으로 삼은 곱사등이 낙타는 “자본주의의 악취 사이를”(「조랑말」) 힘겹게 걸어가는 중에 있다. 자신의 몸을‘어둡고 답답한 감옥’으로 인식하는 신경림의 의식의 바탕에는 이 악취에 대한 슬픔과 저항이 배어 있다. 그가 안나푸르나와 꼴롬비아와 터키 등 세계 곳곳을 여행하면서‘기행’보다는‘르뽀’에 가까운 시를 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파장」, 『농무』, 창작과비평사 1973)고 신경림은 일찍이 노래한 바 있다. 우리네‘못난’사람들의‘흥겨운’삶의 이야기를 신경림은 반세기를 넘게 대표 집필해왔고, 그 이야기를 노래가 되어 흐르게 했다. 신경림의 시가 우리 시사의 한 축을 형성해온 것은 그 대표 집필의 적확성과 진정성에 힘입은 바 컸다. 터덜터덜 느릿느릿 걸으며 이 땅이 경험한 근대의 절반을 통과해온 한마리 낙타는 지금 이 순간도 쉼없이 이 세상의 사막과 도시와 들판을 지나가고 있다. 그 낙타의 발자국을 따라 우리 시의 넉넉한 길 하나가 오늘 이 자리에 이르고 있음을 목도하게 하면서.

김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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