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대화

 

2012년과 2013년

 

 

김용 金龍龜

미래경영개발연구원장. 저서로 『한국 기업지배구조의 현재와 미래』(공저), 보고서로 「정부인사의 새로운 패러다임과 비전」 「학습국가와 국가비전전략」 등이 있음.

 

백낙 白樂晴

서울대 명예교수, 『창작과비평』 편집인. 최근 저서로 『어디가 중도며 어째서 변혁인가』 『문학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일』 『2013년체제 만들기』 등이 있음.

 

이상 李相敦

중앙대 법대 교수. 2011~12년 한나라당 비대위원, 새누리당 정치쇄신특별위원 역임. 저서로 『미국의 헌법과 대통령제』 『조용한 혁명』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 등이 있음.

 

이일영 李日榮

한신대 글로벌협력대학 교수, 경제학. 저서로 『한국형 네트워크 국가의 모색』 『새로운 진보의 대안, 한반도 경제』 『중국의 농촌개혁과 경제발전』 등이 있음.

 

 

ⓒ이영균

ⓒ이영균

 

 

이일영(사회)  오늘 대화에서는 2012년과 2013년의 의미와 성격을 짚어보면서, 요즘 시대교체라는 말이 회자되듯이 새로운 시대가 어떤 것이며 한국사회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또 18대 대선이 끝나고 2013년이 됐는데 분위기가 13대 대선 직후인 1988년초와 비슷하지 않나 싶습니다. 한쪽에서는 안도하고 있고 다른 쪽에서는 퍽 실망한 것 같습니다. 시구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에 빗대어, 2013년이 왔는데 오지 않은 것 같다고 표현하는 사람도 있더라고요. 또 청소년들이 만들어내 유행시킨 ‘멘붕’(멘mental 붕괴) 같은 말이 정치・사회 분야에서도 널리 퍼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여권 지지층도 선거 승리는 했지만 그렇게 흔쾌한 심정은 아닌 것 같습니다. 최근 경제가 아주 어렵다고 하고, 대기업이나 금융권에 구조조정이 임박했다는 걱정도 많습니다. 그런 점에서 2012년에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하는 것이 2013년을 헤쳐나가고 희망을 만들어가는 출발점이라고 하겠습니다. 세분 선생님을 모시고 여기에 대해 의미있는 말씀을 나누는 자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다들 유명하시기 때문에 제가 따로 소개할 필요는 없을 것 같고 돌아가면서 작년의 경험을 말씀해주시고 자기소개도 곁들여주시면 좋겠습니다.

 

백낙청  이일영 선생부터 커밍아웃하시지요.(웃음)

 

 

2012년 총선과 대선은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李日榮 한신대 글로벌협력대학 교수, 경제학. 저서로 『한국형 네트워크 국가의 모색』 『새로운 진보의 대안, 한반도 경제』 『중국의 농촌개혁과 경제발전』 등이 있음.

이일영

이일영  제 소개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2012년 제 상황이 조금 복잡해서요. 오래전 이야기부터 드리면, 1987년말 88년초 대선을 치른 시점에 제가 대학원생이었는데요, 그 당시 민주화의 열망이 높았지만 대선 결과를 보며 실패했다는 생각이 퍼져 있었고, 그래서 젊은 연구자들끼리 좀더 과학적인 태도가 필요하다고 해서 연구회도 만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부터 경제학 전공자로서 지금까지 정책연구를 해왔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작년 4월 총선에서 갑자기 충격을 받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제가 평소에 87년체제를 넘어 새로운 질서로 나아가야 한국경제가 활로를 개척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편이었는데, 4월 총선을 보고 나니 기존 야당의 역량으로는 문제가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새로운 세력에 의한 경제혁신이나 정치혁신이 필요하다는 논의가 널리 있었고 그 열망이 안철수(安哲秀)현상으로 나타났던 것 같아요. 경제학 용어로 말하자면, ‘듀오폴리’(duopoly, 복수독점 내지 양자독점)라는 독점체제, 즉 양자가 기득권질서를 이루면서 끊임없는 정치적 불안정이 나타나고, 이런 것들이 경제를 개혁하고 혁신적인 성장모델을 만들어내는 데 걸림돌이 된다는 생각이었고요. 마침 안철수현상이 나타났고, 그 기대가 특정한 지도자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열망으로 이어졌죠. 물론 불안감도 있었죠. 시스템이 갖춰져 있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그런 것들을 안정화하는 데 일조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정무적인 개입은 한 적이 없지만, 안철수 캠프의 정책을 만드는 데 참여해서 보탬이 되려고 노력했습니다. 나름 노력했지만 어떤 분들께는 너무 쉽게 생각하고 덤벼든 게 아니냐는 질책도 받았습니다. 그래서 사실 저도 자기성찰을 해야 합니다.(웃음) 이 정도로 말씀드리겠습니다.

 

金龍龜 미래경영개발연구원장. 저서로 『한국 기업지배구조의 현재와 미래』(공저), 보고서로 「정부인사의 새로운 패러다임과 비전」 「학습국가와 국가비전전략」 등이 있음.

김용구

김용구  저에게는 국가경영 관점에서 2012년이 좀 특별한 해였습니다. 그동안 이명박(李明博)정부의 한계가 명백하게 드러나고 무엇보다 공공성 가치가 허물어지는 상황에서도 한나라당 지지율이 계속 야당보다 높았죠. 이런 현상이 잘 이해되지 않다가 20121월이 되면서, 제가 보기에는 책임정치 차원에서 정상적인 국면, 즉 야당 지지율이 모처럼 올라가는 걸 보면서, 총선과 대선이 국민 입장에서는 올바른 것을 올바르게 보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보는 선거가 될 수 있겠다고 기대했어요. 그런데 4·11총선 결과는 전혀 다르게 나타났죠. 그래서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났는지 분석하면서, 이것이 12월 대선에는 어떤 영향을 줄지 숙고했지요. 일반 기업이나 국가 공공조직은 대형 행사를 치르거나 어떤 문제가 생기면 당연히 그에 대한 평가를 담은 보고를 하게 되는데, 당시 1월까지 높은 지지율을 얻었던 민주당이 4·11총선에서 실패했음에도 제대로 된 보고서가 나오지 않고 시간만 흘러가는 걸 보면서, 정말 문제가 많구나 싶었습니다. 야당이 문제가 많으면 여당도 영향을 받는다는 점에서, 전반적으로 이번 대선이 책임정치 차원에서 순탄하지 않겠다고 짐작했죠. 그런 관점에서 대선 진행과정에 주목하다가, 제가 예전에 정당의 비전 수립과 조직설계를 컨설팅해준 경험도 있고 해서, 이번 대선에서 성공할 수 있는 요소가 무엇일지를 한번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첫째로 이번 대선의 핵심은 후보의 학습역량이라고 생각했어요. 둘째로는 후보를 둘러싸고 있는 참모진의 능력이죠. 그 능력이란 전문성, 개방성, 확장성이에요. 아무튼 본인의 학습능력이 높고 휘하에 역량있는 참모진을 둔 후보가 여야를 막론하고 당선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을 2012년 중반에 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민주당을 지켜보면 후보가 결정되는 과정에서 열정적인 비전이나 몰입이 나오지 않았지요. 후보가 결정된 후에도, 대통령 후보라면 당에 대한 전권을 갖기 때문에 지난 총선에 대한 평가를 포함해 당의 혁신방향이 나올까 했더니 결국 안 나왔죠. 그런 흐름을 보면서 안타까웠어요. 반면 한나라당에서 이름을 바꾼 새누리당을 보면, 어쨌든 아까 말씀드린 학습능력이 선거과정에 상당히 반영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많은 정치평론가들이 말하는 것처럼, 박근혜(朴槿惠) 후보가 야당의 주장을 대폭 섭취하고 많은 아젠다를 본인의 것으로 만들어낸 것이 바로 학습능력을 보여준 사례죠. 선거 흐름을 보면 본인의 말에 대해 고객인 국민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또 야당의 주장을 국민이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하루에 몇번씩 점검하지 않았나 할 정도로 민첩한 대응을 한다고 느꼈습니다. 야당 지지자 입장에서는 이명박정부가 민주공화국의 기본을 무너뜨리고 공공성 차원에서 너무 많은 실책을 했기 때문에 당연히 권력이 야당으로 넘어올 거라고 단정했던 건데, 그게 안 됐죠. 저는 이번 선거를 계기로 특히 야당이 새롭게 학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학습하는 방법 자체를 학습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일영  김원장님께서 계시는 미래경영개발연구원에서는 대선후보나 정당의 역량을 평가하는 일도 하는지요?

 

김용구  국가경영의 성공 차원에서 기업이나 공공조직뿐 아니라 여야를 막론하고 후보나 정당의 성공요인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이번 선거에는 관여하지 않았습니다만, 20082월 민주당의 비전 수립을 컨설팅한 적이 있었고, 그전에 중앙당 조직설계에 대해 자문한 적도 있었지요.

 

이일영  그러면 이상돈 교수님, 워낙 언론에 많이 노출되셔서 잘 알려져 있으신데요. 말씀해주시죠.

 

 

여권의 신승과 야권의 좌절, 그 원인은

 

李相敦 중앙대 법대 교수. 2011~ 12년 한나라당 비대위원, 새누리당 정치쇄신특별위원 역임. 저서로 『미국의 헌법과 대통령제』 『조용한 혁명』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 등이 있음.

이상돈

이상돈  2012년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지 않습니까? 2007년 대선과 2008년 총선에서도 이른바 진보진영이 상당히 좌절했던 거 아닌가요? 어쩌면 지금보다 더 무력했다고 봅니다. 대선만 뺏긴 게 아니라 총선에서 의석을 그렇게 빼앗겼으니 대단히 무력감을 느꼈겠죠. 이명박 대통령이 보수의 힘을 타고 된 것은 아니잖아요. 중도실용을 표방했는데 집권 초기에 그야말로 곤경에 빠지니까 보수의 힘을 내세워서 극복하려고 하는 바람에 우리 사회에서 진영논리가 강화돼버렸죠. 당시 여권의 유력 정치인이었던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와 이명박정권의 관계는 한국정당사에 별로 없었던 사례였어요. 제가 알려지게 된 것도 전통적인 야권 인사가 아니면서 정부비판을 했기 때문이죠. 그런 사람이 김종인(金鍾仁), 윤여준(尹汝雋), 저 이렇게 셋 정도였어요. 따지고 보면 한나라당이 이명박정권의 실패로 겨우 버텨왔지만, 거기에 참여하지 않은 플레이어가 있었고 그것이 씨앗이 돼서 지금 이렇게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또 오세훈(吳世勳) 전 서울시장의 어리석은 행동도 작용했지요. 사실 오세훈이 당을 구한 거죠. 일등공신이에요.(웃음) 박근혜 전 대표가 김종인 박사와 저를 비상대책위원으로 발탁해서 전에 없는 시도를 했던 것이 20121년간 유효했던 게 아닌가 합니다. 한나라당이 최저점을 찍었던 게 1월초였던 걸로 기억해요. 그 이후 내부갈등에도 불구하고 쇄신을 통해서 다시 태어나서 호응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반대세력도 많았어요. 새누리당 재창당 과정에서 극복할 건 극복하고 타협할 건 타협했죠. 정치란 이상만 추구하는 게 아니니까요. 이런 과정을 거쳐서 4·11총선에서 선전했고, 선거 막판에는 운도 따랐죠. 정통민주당이 튀어나와서 몇군데서 도움을 줬고, 김용민(金容敏) 막말파문도 있었고요.(웃음) 대선도 결국 그 연장선상에 있었다고 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번 선거가 진보 대 보수의 대격돌이고 보수가 거기서 승리했다고 하지만, 저는 TV토론 같은 데서 여기에 이의를 제기한 바 있어요. 그 논리대로 하자면 이쪽에서 아무나 나와도 다 이겼어야 하는데, 제가 보기에 다른 후보였으면 백전백패했을 거예요. 박근혜라는 사람이 박정희(朴正熙)의 딸이라는 점도 있지만, 이명박정권과의 거리두기와 전에 없었던 비상대책위원회로 안팎의 고비를 극복해서 신승(辛勝)했다고 봅니다. 2012년은 단순히 정당 대 정당, 진영 대 진영으로만 볼 수 없는 요소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1년은 저한테도 일생일대의 경험이었고요.

 

이일영  작년 1월 한나라당이 저점을 찍고 나서 정당의 쇄신과 조직혁신이라는 과감한 시도를 한 반면, 민주당은 구태의연했다는 생각을 저도 신문 칼럼에서 피력한 적이 있는데요. 한나라당에서는 이교수님께서 그 핵심 역할을 하신 것 같습니다. 이제 백낙청 선생님께서 말씀해주실 차롄데요. 오늘 대화를 준비하며 인터넷을 검색해봤더니 백선생님에 대한 언급이 아주 많더라고요. 유력 일간지 사설에 이렇게 썼어요. 엉터리 정치컨설팅을 했다, 차라리 이젠 내놓고 해라,(조선일보 2012.8.24) 그렇게 말이죠.(좌중 웃음)

 

이상돈  그 사람들은 얼마나 똑똑하기에 그런 얘기를 하는지, 그쪽 말 들었으면 저흰 망했어요.(웃음)

 

白樂晴 서울대 명예교수, 『창작과비평』 편집인. 최근 저서로 『어디가 중도며 어째서 변혁인가』 『문학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일』 『2013년체제 만들기』 등이 있음.

백낙청

백낙청  어디까지가 컨설팅인지 모르겠는데, 컨설팅을 했다면 실패한 컨설팅을 한 건 확실합니다. 간단히 제가 했던 역할에 대해 말씀드리죠. 저는 야권의 선거 승리를 희망했고 저 나름대로 기여하려고 애쓰긴 했습니다만, 어느 특정 후보나 진영에 가담해서 일한 적은 없습니다. 막판에 야권 후보가 문재인(文在寅)으로 단일화되고 ‘정권교체-새정치 국민연대’가 그를 국민후보로 추대하고 나서야 당시 제가 속해 있던 ‘희망2013・승리2012 원탁회의’가 분명하게 문후보 지지를 밝혔는데—물론 단일화된 시점부터 줄곧 지지하고는 있었지만요—그러고도 저 자신은 국민연대에 들어가진 않았어요. 저를 포함한 시민사회의 몇몇 인사는 2009년 말부터 ‘희망과대안’이라는 조직을 중심으로 새로운 유형의 시민정치를 시도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외국에는 시민정치의 여러 사례가 있지만, 국내에서는 시민운동이라고 하면 엄격하게 정치적인 중립을, 여야 간에도 거의 기계적으로 중립을 지키면서 시민단체로서 자기 할 일만 하는 운동이 있고, 그밖에 시민운동을 하다가 현실정치로 들어가는 쪽, 둘 중 하나였는데, ‘희망과대안’은 여야 간에는 야 쪽을 지지하는 당파성이 분명하지만 야권의 여러 정파 어느 쪽에도 기울지 않고 우리 자신이 현실정치에 들어가지도 않는 그런 시민정치를 시도했어요. 나중에 개별적으로 그 노선에서 벗어난 분들도 있습니다만. 그것이 20117월에 이른바 ‘희망2013・승리2012 원탁회의’ 결성으로 이어졌고, 작년 선거기간에 저는 주로 이 원탁회의를 중심으로 행동한 셈입니다.

그것과 별도로 한 사람의 지식인으로서 또는 논객으로서는 2013년체제론이라는 걸 제기하면서 담론을 통해 개입한 것이 있습니다. 20113월이었을 거예요. ‘평화와 통일을 위한 시민활동가대회’라는 곳에 가서 처음 발표했고, 그해 『실천문학』 여름호에 글로 새로 정리했고요(「‘2013년체제’를 준비하자」). 2012년 새해 들어 총선거를 앞두고는 좀더 영향을 미쳐볼까 해서 『2013년체제 만들기』(창비 2012)라는 저서를 냈습니다. 그 취지는 2013년에 어차피 정부가 바뀌고 새로운 대통령이 취임하는데 이것을 단순히 대통령의 교체라든가 정권교체로 끝낼 것이 아니라 정말 제대로 된 새 시대를 출범시키자는 거였지요. 그게 제 구상대로는 안 됐습니다만, 2013년에 새 시대를 열어보자는 데는 대선국면에서 여야 후보가 다 동의를 한 셈이에요. 문재인 후보는 2TV토론에서 87년체제를 마감하고 2013년체제를 열겠다고 명시적으로 얘기했고, 박근혜 후보는 단순한 정권교체를 넘어서 시대교체를 하겠노라고 했으니까, 그런 면에서는 두분이 다 동의를 하신 셈이에요.

그러나 저는 막연히 2013년에 새롭게 잘해보자는 얘기가 아니고 저 나름대로의 프로그램이랄까 로드맵이 있었던 건데 총선 패배로 1차 어긋났어요. 2013년체제를 만들기 위해 첫째는 우리가 2013년 이후의 시대에 대해서 제대로 된 구상과 경륜을 갖고 실질적인 준비를 할 때만 2012년 선거에도 승리할 수 있다는 취지였지만, 어쨌든 2012년 선거를 이겨야 한다고 봤죠. 원래 저의 주장은 총선을 이겨야지 대선도 이긴다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총선에서 졌거든요. 그러면 포기할 건가 하는 기로에 봉착했는데, 저 나름대로는 수습을 해서, 2012년 대선 승리가 더 어려워졌지만 불가능하지 않다는 논지를 폈고 12월의 대선 승리를 염원했는데, 그것마저 안 됐습니다. 그러면 2013년체제는 어떻게 되느냐. 이 대목에 대해 저 나름대로 그사이에 생각한 것도 있습니다만 오늘 귀한 분들 모셨으니까 말씀 들으면서 새롭게 정리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이일영  선거 국면에서 행동으로 개입하신 게 있고 담론 차원에서 개입하신 게 있는데, 담론 차원은 조금 후에 얘기 나누기로 하고요. 그전에 사실확인 차원에서 여쭤보면, 보수언론에서는 백선생님께서 주도해서 민주당을 압박해 통합진보당과 손잡게 했고, 후보단일화 과정에도 구체적으로 관여를 하셨다고 하는데 그 부분은 어떤가요?

 

백낙청  4월 총선 때 민주당과 통진당이 선거연대를 하지 않았습니까? 그건 양쪽에서 하겠다고 한 거였는데 쉽지 않았죠. 그럴 때 원탁회의를 포함한 시민사회, 소위 야권 성향의 시민사회 인사나 단체들이 단일화를 압박한 건 사실이죠. 저는 거기까지는 당연했다고 봐요. 단일화조차 안 했으면 더 크게 패배했을 게 분명하니까요. 그런데 이른바 통진당 사태라는 게 선거 후에 터졌잖아요. 통진당 측에서 단일화 과정에서 자기 몫을 더 챙기려고 애쓴 것이 꼭 진보정치의 영역을 늘리려고 한 것만이 아니고 통진당 내 특정 계파, 나중에 당권파라고 불린 그 계파의 몫을 늘리기 위해서 더 악착같이 했던 면이 있어요. 그런 것에 대해 우리가 더 냉정하게 파악하고 비판도 하고 그러지 못한 게 부족했던 점이지요.

 

이일영  야권연대를 통해서 통진당 당권파가 가장 이익을 본 셈이고 결국 그게 문제를 불러일으킨 상황이 됐는데, 애초에 그런 점에 대해 뚜렷하게 파악하고 계신 건 아니었죠?

 

백낙청  통진당의 조직문화에 문제가 많다는 것, 또 일반적으로 소위 NL(민족해방) 운동권의 교조적인 분파와 그 문제점에 대해 대충은 파악하고 있었지만, 통진당 내부 사정이 그 정도일 줄은 몰랐죠.

 

이일영  저희 다 마찬가집니다만, 그 대목에서 조금 인식상의 실수를 하신 거네요.

 

백낙청  그렇지요.

 

 

2013년체제론은 여전히 유효한 비전인가

 

이일영  2013년체제론, 저는 여기에 두가지 차원이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먼저 아까 말씀하신 대로 무슨 일을 하려면 구상과 준비와 비전이 있어야 하죠. 새로운 체제와 시대를 만들기 위한 기본 조건이나 요소가 무엇이냐는 문제가 있겠습니다. 다음으로는 거기로 가기 위해 어떤 경로를 밟을 것이냐의 문제가 있는데, 그 핵심은 ‘연합정치’로 요약될 수 있겠고요. 이 두가지 차원에서 논의해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2013년체제론의 이런 문제의식에 대해 어떤 의견을 갖고 계신지, 김원장님과 이교수님께서 말씀해주시죠.

 

김용구  백선생님께서 2013년체제를 꺼내신 것은 시의적절했다고 생각합니다. 평소에 선생님께서 강조하셨던 남북관계・평화공존의 측면에서 본다면, 지난 5년 사이에 남북관계가 더는 가라앉을 수 없을 만큼 침몰했죠. 또 복지 이슈가 여야를 막론하고 대두되었고, 한국사회의 공정·공평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죠. 평화체제와 복지, 공정·공평의 문제를 하나의 시스템으로 해설하는 비전을 정치권 전체에 던졌다는 점에서 2013년체제라는 화두는 매우 설득력 있었다고 생각해요. 물론 1987년에 헌법이 바뀌었기 때문에 87년체제라는 표현에 문제가 없는 반면, 2013년에는 아직까지 그런 일이 없었으니 체제라는 말을 붙이는 것에 용어상의 문제가 있을 수 있겠지만, 우리가 당면한 문제의 질적 수준이나 심각성을 감안할 때 그렇게 불러도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했어요. 선생님 글을 보면 2013년체제는 남북한 평화체제, 복지, 공정·공평한 국가에 더하여 상식과 교양, 민주주의까지 회복되어야 하는 시대인데, 이명박정부 5년간 잃어버린 모든 것이 한꺼번에 회복되기를 원하는, 어찌 보면 너무 광범위한 구상을 담으신 것이 아닌가요? 이렇게 광범한 2013년체제를 강조하다보면 야권 입장에서는 그걸 지나치게 숙명적으로 받아들이게끔 한 것은 아니었나 싶어요. 이 숙명론이 자기학습을 방해할 수도 있었고요. 하지만 큰 틀에서는 2013년체제라는 화두를 던져줌으로써 여야를 막론하고 새로운 국가 비전의 방향성에 대한 논의가 가능했던 것 같아요. 저는 박근혜 후보가 유세에서 시대교체 이야기를 하는 걸 보고, 원래 이 화두는 2013년체제론에서 백선생님이 강조하신 것인데, 결국 지금 여야 모두 2013년체제의 비전을 수행하려는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이일영  이교수님께선 2013년체제 논의에 비판적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이상돈  몇년 전부터 야권의 조국(曺國) 교수나 김호기(金皓起) 교수 등도 야권의 통합과 연대를 많이 강조했죠. 비슷한 맥락에서 통합을 말했던 보수 쪽의 박세일(朴世一) 교수도 있어요. 그런데 저는 솔직히 다 모아서 통합만 하면 정치가 되겠는가 싶어요. 박교수의 입장에는 내용이 없다고 보고, 조국 교수 같은 견해에 대해선 속으로 잘 안 될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2013년체제론은 내용을 떠나서 그 자체로 전통 보수세력에게는 아주 위협적으로 들렸어요.

 

이일영  어떤 면에서 그렇죠?

 

이상돈  세상을 확 바꾸자는 거잖아요.

 

이일영  제대로 준비를 하자, 그런 차원이 아니고요?

 

이상돈  그렇게 보이진 않아요. 똑같은 새 시대라도 박근혜 대표가 시대교체하자는 것하고 백낙청 선생님이 2013년체제 만들자는 것은 다르죠. 왜냐면 박근혜 당선인 입장에서는 아무리 중도로 간다고 해도 고정층은 신경 안 써도 되거든요. 총선 결과를 보면 야권연대의 힘은 상당히 있었다고 봐요. 광주 서구을에 출마한 새누리당 이정현(李貞鉉) 후보의 경우도 민주당 후보가 나왔으면 안 되겠지만 통진당 후보를 상대로는 그래도 해볼 만하다 싶었는데 역시 안 되더군요. 그런데 민주당 비례대표 명단을 보면 난데없이 엄한 사람들이 많이 나왔잖아요. 그게 영향이 컸다고 봐요. 분노해서 심판하러 투표장에 가는 사람도 있지만 위기의식 때문에 나오는 사람도 있죠. 저는 기본적으로 세상이 선거로 확 바뀐다고 생각하지 않고, 점차 진화해간다고 봅니다. 박근혜정권이 들어선 것도 하나의 진화하는 과정이고요. 그런 과정을 통해서 발전하는 게 아닌가요?

 

이일영  저도 2013년체제를 준비하자는 데 퍽 공감하고 글도 쓰고 했는데, 이교수님 말씀 들어보니까 총선 때 야권 비례대표 명단이 2013년체제라는 용어를 위험하게 보이게 했다는 것 같아요. 저 역시 한해 선거를 통해 새로운 시스템으로 전면 전환하는 것은 쉽지 않다고 봅니다. 백선생님도 그런 표현을 하신 걸로 아는데, 세가지 혁신, 먼저 남북관계에서 한반도의 안전과 평화를 위한 시스템이 필요하고, 사실상 답보상태에 있는 87년체제의 정치와 경제, 이 세가지 차원에서 조정이나 혁신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게 2013년에 나타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교수님 말씀대로 그것이 2012년 선거를 통해서 이뤄질 수 있는 일이냐, 다시 말하면 2012년 선거가 그 정도로 중요한 계기인가는 토론해볼 수 있겠습니다. 저로서는 이러한 내용이 아주 위험한 담론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데 다른 시각에서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네요. 아무튼 지금 제일 쟁점이 되고 있는 게 연합 또는 통합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2013년체제론의 중요한 요소로 연합정치, 야권통합, 후보 단일화 등이 있는데, 좌파·우파 양쪽 모두에서 이걸 공격하는 것 같아요. 좌파에서는 과거 1987년의 ‘비판적 지지론’의 재판(再版)이라고 비판합니다. 가치와 노선을 막론하고 통합해서 어쨌든 선거에 이기자는 입장과 뭐가 다르냐는 것이죠. 우파 쪽에서는 이런 표현을 쓰더군요. 눈앞의 이익에 눈이 멀어서, 총선・대선의 이익에 눈이 멀어서 종북주의자들과 연대를 했다, 그렇게 세상 쉽게 살려고 하느냐. 이런 얘기들을 했는데, 이에 대해서 말씀을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백낙청  우선 연합과 통합은 구별해서 말할 필요가 있어요. 물론 연합을 넓게 해석하면 그중에 통합도 들어가고 통합이 아닌 연대도 포함되지만 2012년의 주된 연합정치는 통합이 아닌 연대로서의 연합이었죠. 그런데 이게 안철수와 문재인 사이에서도 삐걱거렸고, 진보정의당과는 한결 순조로웠지만 통합은 아니었지요. 통진당은 아예 배제되었고요. 어쨌든 연합정치는 2013년체제론의 실행방안과 관련된 일부에 불과하고, 2013년체제의 가능성에 관련해서는 참여정부 시절에 정책실장을 지낸 김병준(金秉準) 교수가 대선에서 승리해도 2013년체제는 안 올 것이라는 얘기를 분명하게 한 것이 저로서는 주목할 만한 비판이었어요. 선거 지고 나서 ‘어차피 안 될 거였는데’ 하는 얘기가 아니라 선거를 앞두고, ‘백아무개 선생이 2013년체제를 이야기하지만 2013년체제는 결코 오지 않는다’고 단언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나라 정치가 이렇게 한심하고, 그분이 행정학자잖아요, 행정체계가 이렇게 엉망인데 야당이 승리한들 어떻게 새로운 체제를 만들겠느냐는 거지요. 상당히 날카로운 비판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렇다고 그분 주장처럼 지금부터 잘해서 ‘2018년체제’를 만들자는 것도 좀 막연한 얘기 같았습니다.

그런데 2013년체제론이라는 게, 2012년에 선거에 이기고 13년에 새 정부 출범시키면서 확 다 바뀐다는 논리는 아니었어요. 체제라는 말이 붙은 것은 2013년의 새 출발을 계기로 여러해에 걸쳐서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간다는 뜻인데, 제가 처음 발표할 때부터 이 명칭은 나중에 다른 게 될지도 모르겠다, 만들어가면서 다른 이름이 더 적절하다고 판단할 수도 있겠다고 말한 바 있어요. 2012년 선거마저 지고 난 지금 보면 2013년체제라는 명칭은 안 맞는 것 같아요. 2013년체제보다 더 넓은 의미의 ‘희망2013’은 방식을 달리해서라도 계속 추구해야겠지만, 2013년체제라는 명칭은 포기할 용의가 있습니다.(웃음)

다른 한편으로 순전히 평론가적인 입장에서는 2013체제론에 대해 그렇게 부끄러워할 게 없어요. 순전히 하나의 논리로만 본다면, 2013년 이후에 대한 비전과 준비가 부족하면 2012년 선거조차 못 이긴다, 2012년 총선에 지면 대선도 진다고 한 거였거든요. 그 말대로 됐지요. 하지만 저는 평론가적인 입장이 아니라 2013년체제 ‘만들기’를 목표로 논의를 펼친 것이고 총선을 못 이겼으면 대선이라도 이기자고 중간에 수정까지 했던 건데, 완전히 틀린 얘기가 됐어요. ‘완전히’라고는 안 해도 하여간 2013년체제라는 용어를 쓰기가 난감할 정도로 어긋나버렸고, 그 과정에서는 김병준 교수가 지적한 몇가지 부분이라든가 방금 이상돈 교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일부 대중이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대한 고려가 부족했다든가, 성찰할 지점이 많다고 봅니다.

 

이일영  평론가적 입장에서는 틀린 얘기가 아니지만 현실의 목표가 어긋난 것이니 이제 2012년체제론도 수정하셔야 되겠군요.

 

 

새 시대를 향한 바람이 꺾인 선거는 아니었다

 

백낙청  그런데 그 명칭을 안 쓰는 것과 새로운 시대에 대한 구상이나 시도를 포기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제가 대선 앞두고 이런 주장도 했잖아요. 이번 대선이 1987년 대선보다 더 중요하다, 왜냐하면 198712월에는 6월항쟁의 성취가 이미 있었고 7·8월 노동자 대투쟁이 있었고 제6공화국 헌법을 만들어놓고 대선을 치른 거란 말입니다. 87년체제의 기틀이 잡힌 상태에서 그 첫 대통령을 어느 쪽에서 내느냐 가지고 다투다가 민주화세력이 분열해서 졌지 않습니까. 민주화세력에는 굉장한 좌절이고 패배였지만 87년체제의 기틀은 이미 잡힌 상태였습니다. 그에 반해서 2013체제론의 관점에서 보면 2013년체제를 제대로 출범시키느냐 못 시키느냐 하는 그런 관건적인 선거가 2012년 대선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고 나서 자기위안인지는 몰라도 저의 그 말이 오히려 좀 과장된 게 아니었는가 싶습니다. 왜냐하면 아까 이상돈 교수께서도 말씀하셨듯이 박근혜 후보의 승리가 한마디로 보수의 승리라고 보기 힘든 면도 있거든요. 2007년 선거는 비록 이명박 후보가 중도실용주의를 내세웠지만 수구세력이 압승한 선거였는데, 이번에는 박근혜 후보의 공약이 사실 기존의 한나라당 노선과는 어긋나는 게 많았잖아요. 중도나 진보의 의제를 많이 가져갔고 또 문재인 후보가 48퍼센트 득표를 했기 때문에, 새 시대를 향한 우리 사회의 바람이 결정적으로 꺾인 선거는 아니었다고 볼 수 있어요.

다시 1987년 대선과 비교해본다면 그때 이미 87년체제의 틀이 잡혀 있었듯이, 이번에도 2008년 이래로 국내에서는 촛불시위 등을 통한 시민의 각성이 있었고 전세계적으로는 금융위기, 경제위기가 오면서 신자유주의의 신화랄까 이런 게 무너졌고, 또 이명박정부 아래에서 국민이 너무나 많은 걸 깨닫고 배워서, 2012년 대선 즈음에는 우리 사회의 체질 자체에 상당한 변화가 일어났지 않았는가 합니다. 그래서 이 변화를 수용하고 추동하는 역할을 누가 맡을 건가를 다투는 선거였다고 볼 소지가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히려 1987년 대선과 비슷한 성격이지 87년보다 더 비참한 패배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생각이에요.

그렇다면 딱히 ‘2013년체제’라 부르지 않더라도 2013년부터 새 시대를 열려는 노력을 우리가 한층 본격적으로 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중 어떤 대목은 다음 대통령이 자기 공약을 이행하는 방식으로 실현될 것이고 어떤 것은 야당이 정신을 차려서, 빨리 정신을 차리기를 바랍니다만, 국민의 뜻을 반영하여 정부를 압박하고 견제하면서 이루는 것도 있을 것이고, 어떤 것은 국민 대중이 더 깨어나고 노력해서 손수 만들어내는 것도 있겠지요. 그래서 어떻게 보면 더 복잡하고 다소 구질구질한 형태로 새 시대의 건설이 진행될 수 있지 않겠나 하는 것입니다.

 

이일영  2012년 선거의 의미를 다시 돌아보게 해주신 것 같습니다. 1987년 선거와 2012년 선거를 비교해서 말씀해주셨는데, 이에 대해서 백가쟁명식의 논의가 있는 것 같아요. 아까 김원장님께서는 4월 총선 후에 민주당이 평가도 안 하고 지나갔다고 말씀하셨는데요.

 

백낙청  평가서가 작성됐는데 공개를 안 했다고 하죠. 회람도 안 했으니까.

 

김용구  결국 안 한 거나 진배없죠.

 

이일영  공유를 안 한 것이니 평가를 안 했다고 봐야 될 것 같고요. 지금 많은 얘기가 나오고 있는데, 거시적인 분석이나 구조적인 문제, 예를 들면 50대 세대론이나 비례대표제, 결선투표제 같은 제도에 대한 논의가 있죠. 또 지역주의라든가 세대주의 같은 고질적인 사안이 있어요. 그 다음에 각 세력의 전략이나 캠페인 차원이 있겠는데, 2012년만 보면 확실히 새누리당이 더 혁신적이었다는 판단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백선생님 말씀처럼 큰 흐름에서는 변화하고 진전하는데 누가 이것을 담보할 수 있을 것이냐, 그런 의미에서 민주화운동 진영에 대한 심각한 성찰이 필요한 시점에 와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2012년 선거 보시면서 중요한 포인트라든지 각 세력에 대한 평가를 해주신다면요.

 

이상돈  제가 보기에 특이한 현상이 있는데요. 민주당은 정당으로서 정치행위자면서도, 외곽에서 훈수를 둔달까, 이런 분들이 많아요. 반대로 여권은 2011년 전후로 자포자기하는 분위기가 팽배했잖아요. 다 끝났다고 말하던 사람들도 있고, 상당한 위기였죠. 야권은 큰 진영이기 때문에 중지를 모을 필요도 있고, 의사결정도 오래 걸리고, 실패했을 때 한 사람이 책임지는 구조가 아니잖아요. 보통 ‘보수’라고 하면 거대한 음모세력이 뒤에 있다고들 생각하는데, 지금 보면 오히려 그 반대가 아니었나 싶어요. 지난 1년간 보수진영에서는 거의 박근혜 당선인 쪽에서 앞서나갔고 외곽에서 방향을 제시하거나 이런 게 별로 없었다고 봅니다. 보수신문의 사설이나 칼럼 같은 건 거의 영향이 없었다고 봐요. 제가 농담으로, 대선후보 토론회에서 간질환 같은 문제로 토론하는 걸 다른 나라에서 본 적이 있느냐고 했어요(2차 토론 당시 문, 박 후보의 건강보험 보장성 논편집자). 공약이 똑같으니까.(웃음) 공약만 보면 투표장 가는 의미가 없었는데도 이것이 대립으로 귀결된 것은 후보보다도 논평하는 사람들이 그런 사고에 묶여서가 아닌가 생각도 들어요. 이번 대선은 원천적으로 불공정한 경쟁이었다고 봐요. 35퍼센트를 이미 가지고 있는 쪽하고 경쟁하는 것이었으니까요. 그 점을 말하지 않고서는 설명하기 어려운 것 같아요. 지난 총선과 대선을 진영논리로 보면 놓치는 게 많다고 봅니다.

 

이일영  보수언론이 박근혜정권에 별로 영향을 못 미쳤거나 못 미칠 거라고 보시는 것 같은데, 선거 끝나고 나서 바로 ‘조갑제닷컴’에서 ‘민주당은 왜 김종인, 이상돈을 감쌀까’라는 얘기를 하더라고요.(좌중 웃음) 그리고 이번 선거 결과를 분석했을 때 안보·이념·헌법을 기준으로 선거판을 좌우로 가르면 반드시 이긴다는 우파 지식인들이 예언한 대로다, 이렇게 얘기하던데요. 정말 그렇게 해서 이긴 겁니까?

 

이상돈  그쪽에서는 총선 당시에도 다 여권이 망한다고 했어요. 그런데 틀렸잖아요. 박근혜 비대위원장이 아닌 다른 사람이 이끌었으면 이겼겠어요? 이명박정부가 들어서고 나서 어떤 방향으로 가느냐에 대한 투쟁이 있었는데 똑같은 현상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 거죠.

 

김용구  그 말씀에 공감합니다. 백선생님은 애초에 2013년체제론을 제기하면서, 총선에서 야권이 지면 박근혜 대표가 대선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씀하셨는데요. 박근혜 대표로 표상되는 원칙, 신뢰, 감각, 품위, 그리고 특히 복지 이슈를 정치권에서 가장 먼저 화두로 던진 것, 그러한 정치적 자산을 봤을 때 총선에 실패한 민주당보다 오히려 2013년체제의 핵심을 실현할 가능성이 있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이번 선거가 좌우 대립을 넘어서 어느 그룹이 2013년체제라는 역사적 과제를 실천할 힘이 있는지, 안정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지 테스트한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곧 출범할 박근혜정부를 보는 국민의 시각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백선생님께서 2013년체제론을 철회하지 않으셔도 될 듯싶습니다.

 

백낙청  명칭도요?(웃음)

 

김용구  네, 그건 누가 당선돼도 하는 거니까요. 저는 박근혜 후보가 ‘시대교체를 하겠습니다’라고 한 것이 범상치 않게 들렸습니다. 그게 국민에게 먹혔단 말이에요. 아니었으면 선거에서 못 이겼다고 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시대교체라는 화두를 던진 것이 백선생님의 2013년체제론의 공헌이라고 볼 수 있지요. 다만 그 약속의 실천여부에서 진정성이 확인되는 것이지요.

 

이상돈  이명박정부 초기에 박근혜 당시 전 대표한테 국무총리나 당대표를 맡으라는 주장이 있었어요. 박근혜 역할론을 둘러싸고 노선투쟁 같은 것이 있었는데 그때 이명박정권을 도우라고 했던 쪽이 조선일보나 동아일보 같은 매체예요. 그렇게 했으면 100퍼센트 실패했죠. 그리고 제가 보기에는 범보수진영이 51퍼센트를 얻었다고 하지만 15~17퍼센트 정도는 언제든 떨어져나갈 수 있는 표라고 봅니다. 이런 현상이 바로 지난 지방선거와 재・보궐 선거에서 나왔죠. 선거라는 게 마지막에 5~10퍼센트가 좌우하지 않습니까. 그런 점을 박근혜 당선인이 간파했기 때문에 승리했지요.

 

 

민주화운동 세대의 퇴보와 여전한 수구・보수 헤게모니

 

이일영  통상적으로는 정권을 계승한 정당이 다시 집권하기 어려움에도 결과가 이렇게 나온 것은 이른바 민주화운동 세력이 성찰하지 않는, 관성적인 집단으로 평가받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미국 경제학자 킨들버거(C. P. Kindleberger)는 한 사회에서 경제의 흥망을 좌우하는 게 생명력(vitality)인데, 정치세력에도 그런 게 있다고 얘기하더라고요. 그런 점에서 본다면 지금 민주화운동 세대가 퇴보·부패하고 있다는 진단도 가능하죠. 학연이라든지 집단에 매몰되어 혁신하지 못한다는 평가도 하고요. 그래서 대선 막판에 민주당 안팎에서, 여기에 백선생님도 거론되던데요, ‘백의종군 선언’을 하라는 요구가 빗발쳤다고 하더군요.(한겨레 2013.1.14) 문후보는 의원직을 사퇴하고 노무현(武鉉)정부 때 고위직에 있었던 사람들은 임명직을 안 맡겠다고 선언하라는 요청이 당 안팎에서 빗발쳤다는 겁니다. 그러나 후보를 둘러싼 주류세력은 이긴다고 생각했는지, 그 인식 자체도 문제지만, 끝내 외면했다고 하더라고요. 폐쇄적인 문화가 형성돼 있는 것은 아닌지, 어떤 이는 이른바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1987~93) 문화, 서클 문화, 운동권 문화, 형님아우 하는 연고주의 때문에 판단과 행동에서 진보적이고 혁신적인 기풍이 막혀 있다고까지 지적하더군요. 이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백낙청  사실관계를 먼저 말씀드리면 저는 문후보나 민주당에 그런 요구를 한 적이 없어요. 그런 식으로 감 놔라 배 놔라 하려면 평소에 그쪽 부탁을 잘 들어줬어야 하는데 그런 관계가 아니었거든요. 다만 안철수 진영에서 그런 요구를 했고, 김덕룡(德龍) 민화협(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대표상임의장이 합류하면서도 그런 요구를 했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둘 다 안 받아들여졌다고 하는데, 사실여부를 확인은 못 했지만 민주당이 실제로 그랬을 것 같아요. 안 받아주고도 이긴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 같고요. 아무튼 지금 민주당과 야권 전체에 폐쇄적인 문화가 팽배해 있는 건 사실인데 그걸 어떻게 쇄신할 건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러나 이런 식으로 10년, 20년 가리라는 주장이나 우리 사회에 수구·보수세력의 헤게모니가 확립된 것처럼 얘기하는 것에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어찌 보면 굉장히 강력한 헤게모니지만 다른 한편으로 몹시 취약하기도 해요. 아까 이상돈 교수님께서 35퍼센트를 미리 갖고 들어가는 사람과 경쟁하니까 불공정하다고 하신 건 그만큼 강력하다는 말씀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호적인 외곽세력이 없었다는 얘기도 하셨잖아요. 물론 우호적인 외곽세력이 없는 건 아니죠. 오히려 선거에 임하면 엄청난 자산으로 활용되는 관변단체들이나 지연·혈연·학연 등으로 얽힌 우호세력은 많은데, 말씀하신 건 박후보가 뭘 잘하려고 할 때 또는 박당선인이 정치를 제대로 하고 대통령을 제대로 하려고 할 때 그것을 도와줄 수 있는 우호적인 시민사회단체 같은 세력은 민주당에 비해서 오히려 적은 편이다, 그런 말씀이셨죠? 그만큼 새누리당이나 그쪽 세력의 헤게모니가 취약하다는 얘기죠. 이상돈 교수님께서 어느 신문엔가 인터뷰하시면서, 합리적인 보수층과 시민단체 인사들이 앞으로 많이 늘어나야겠고, 그러기 위해서는 한번 더 집권을 해야겠다고 말씀하셨던데, 제가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건가요?

 

이상돈  희망사항을 얘기한 거죠. 사실 제가 생각하는 개혁과 쇄신을 지지해주는 기존 세력은 별로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습니다.

 

백낙청  우리 사회에 합리적 보수 인사들이 수적으로도 적지만 가장 큰 문제는 일부 예외적인 분들을 빼면 수구세력이 주도하는 수구・보수동맹에 포섭되어 있는 거라고 봐요. 새누리당 안에도 개인적으로는 혁신적이고 합리적인 분들이 있더라도 당 전체로서는 합리적인 길을 못 가고 있고, 적어도 이명박정부에서는 다들 그대로 따라갔단 말입니다. 선거 임박해서 이탈한 경우는 있지만요. 그래서 그런 분들을 더 북돋우고 키우는 방법은 새누리당의 재집권이 아니라 패배가 필요하다고 저는 생각했거든요. 진보의 승리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합리적인 보수가 더 각성해서 독자성을 발휘하고, 그래서 중도의 폭이 넓어지려면 다소의 혼란을 감수하더라도 야권 승리가 맞다고 생각했던 거죠.

 

이상돈  비슷한 얘기로 지난번 총선에서 새누리당이 152석을 하리라고 생각했던 사람은 박근혜 당선인을 포함해 어느 누구도 없었어요. 그런데 오히려 더 좋은 결과가 나왔죠. 지나간 얘기지만 140석 정도만 되면 대선에서 유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문제는 앞으론데, 제가 보기에는 35퍼센트에 15퍼센트 정도가 더해진 상황에서 35퍼센트에만 치중하는 정책을 펴면 좌초한다고 봅니다. 당선인이 선거를 많이 해본 사람이라서 그런 걸 모르지 않기 때문에, 저는 희망적 기대를 갖고 있습니다. 지난번 총선 때 우리가 당 내의 사람들을 확 바꾸었느냐 하면 그렇지 않았죠. 선거에는 한계가 있으니까요. 곧 발표가 되겠지만 박근혜 당선인이 어떤 사람을 통해 이끌어가느냐, 자기가 내세웠던 약속을 얼마나 무겁게 시행하느냐, 이런 것이 중요하죠. 민주당에 대해 제가 이런저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좀 그런데, 영국 노동당이 새처(M. Thatcher)의 보수당한테 계속 패배했던 길을 가지 않으려면 민주당 역시 토니 블레어(Tony Blair)나 고든 브라운(Gordon Brown) 같은 새로운 지도자를 키워나가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요. 박근혜 비대위의 쇄신, 경제민주화, 복지 같은 것도 사실 ‘박근혜판 제3의 길’이라고 부를 수 있잖아요. 어쨌든 기존 보수는 가져가고 거기다가 15퍼센트를 얹기 위해서는 시대가 요구하는 길을 가야 하지 않겠나 싶어요. 그렇게 가면 고정 지지층을 잃어버릴 위험성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그렇게 한다고 해도 선거에서는 위험성이 그다지 크지 않단 말이죠. 여야가 이런 식으로 접근해야 극단적인 대립과 진영논리를 탈피할 수 있다고 봅니다.

 

김용구  요즘 기업에서는 ‘빅 데이터’(big data)라는 걸 가지고 전술이나 전략을 입안하는데요. 2012년 민주당의 행태를 보면, 고객이 국민인데 고객에 대한 분석을 잘하고 있는지, 과연 하고는 있는지 의문입니다. 경선과정을 봐도, 경선에 출마한 핵심인물들 대부분 자신의 캠프 내에서 물건을 내놓으면 국민은 그저 그것을 구입하리라 가정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원래 경선이란 게 국민과 끊임없이 소통하면서 주변을 확장해나가는 과정이죠. 그런데 경선이 끝나고 나서도 국민과의 소통이 더 활발해졌다거나 확장되는 모습을 볼 수가 없었거든요. 저는 그 원인을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운동권의 사고에서 찾기도 하는데요. 예를 들면 이런 거죠. 한국사회에서 1988년 올림픽은 굉장히 중요한 국가적 행사였는데, 현재 야권에 계신 분들 중 일부는 당시에 올림픽을 많이 반대하셨거든요. 그 당시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죠. 그러나 한국이 세계로 뻗어나가고 세계적인 이념전쟁이 끝나는 데 서울올림픽이 기여한 바를 생각하면 교정되어야 할 생각이죠. 혹시 야권 일부 정치인들의 인지구조에 그때와 비슷한 자기확신의 오류가 그대로 있지는 않나 해요. 인식의 오류라는 차원에서 역사학습을 제대로 하고 있는 건지, 지금까지 했었는지 확인해보고 싶어요.

한편 민주당의 활로는 굉장히 많다고 봅니다. 지난 2011~12년을 돌이켜보면 민주당의 지지율이 계속 한나라당보다 낮다가도 어느 틈에 한번씩 위로 올라오는 형국이 있었거든요. 국민은 민주당이 잘해서라기보다는 마치 어른이 아이의 등을 두드려주듯이 이렇게 한번씩 올려주는 거예요. 국민 입장에서는 민주당에 대해 여러 경로로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데도 민주당은 여전히 학습을 못 하는 게 아닌가. 지금 민주당은 학습기제가 멈춰 있는 조직이라는 판단이에요. 어디에서 학습이 중단되었는지, 그때 왜 그런 생각을 했었는지, 그런 생각을 했던 자신의 인지구조가 어땠는지, 누구에게 정보를 얻고 어떤 판단 근거로 그런 의사결정을 했는지를 객관적으로 돌아보는 역사학습을 권유해보고 싶어요.

저는 이번 선거를 보면서 박근혜 당선인이 여전히 아버지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느꼈어요. 박당선인이 이번에 50대로부터 결정적인 지지를 얻었죠. 저도 50대인데 저희가 대학에 입학할 당시에는 대학 정원이 적어서 진학률이 20퍼센트를 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니 50대라고 하면 대부분 서민들이죠. 현재 40대 이하와는 대학진학률에서 엄청난 차이가 나요. 그리고 지금의 50대는 성장기에 교련 같은 과목을 통해서 유신교육을 많이 받았어요. 그래서 이들에게 박정희시대란 곧 자기가 훈육된 시절, 그 속에서 자기 질서를 찾았던 시대이거든요. 그러니까 2002년 대선 때도 그 당시 40대였던 지금의 50대는 노무현 후보와 이회창(李會昌) 후보를 거의 반반씩 지지해 큰 차이가 없었죠. 어떻게 보면 그 당시 40대는 노무현 후보를 더 지지했을 성싶은 상황이었지만 그때도 거의 비슷했거든요. 대략 그중에서 13~14퍼센트 정도가 10년이 지난 이번 선거에서 지지 그룹을 변경했죠. 2002년 당시에도 그들의 투표율은 82~83퍼센트였으니 89퍼센트가 놀라울 정도로 높은 수치는 아니고 전체 투표율의 증가를 고려하면 조금 올라간 것에 불과해요. 이들은 유신체제에서 자기 삶의 주요 부분을 형성했어요. 이들은 부동산, 건강, 기타 사회문제 등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발생하는 여러 고충을 해결해줄 능력이 박근혜 당선인에게 더 많다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특히 새누리당이 부동산이나 가계부채를 화두로 잡았던 게 상당히 유효했던 선거전략이었다고 봐요. 그런데 과연 50대가 봉착해 있는 경제나 가계 문제를 박당선인이 풀 수 있느냐. 그러려면 본인이 내건 재벌문제에 손댈 수밖에 없어요. 전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세습재벌이 곳간을 풀고 중소기업과 함께 가겠다, 중소기업을 중견기업으로 육성하고 박당선인이 말했던 대로 창조경제의 재건에 동참하겠다는 쪽으로 가지 못하면 무척 실망하겠죠. 박근혜 당선인 입장에서는 부친을 역사적으로 명예롭게 만들려는 욕구가 클 텐데, 여기에서 성공하지 못하면 한꺼번에 몰락할 가능성이 높아요.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박근혜정부에 굉장히 어려운 상황이 올 겁니다.

그런데 재벌문제 하나만으로는 안 되고 백선생님이 강조하는 남북 평화체제를 만드는 것 역시 중요해요. 어차피 2008년 이후로 세계 자본주의경제는 이미 붕괴상태이지 않습니까? 1991년 사회주의 붕괴, 2008년 자본주의 붕괴 이렇게 보는 게 일반적입니다. 이제 자본주의는 새로운 자본주의로 재탄생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북 증오시대를 끝내고 경제적인 차원에서 새로운 한민족 경제공동체를 만들어내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합니다. 박당선인이 이걸 이루려면 이상돈 교수께서 말씀하신 새로운 지원세력이 있어야겠죠. 그런 조건이 잘 갖춰진다면 저는 박당선인이 백선생님의 2013년체제를 실현할 수 있는 대통령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박근혜정부의 ‘시대교체’는 과연 성공할까

 

백낙청  제가 2012년 대선과 1987년 대선에 관한 저의 원래 발언을 수정해서, 둘 사이에 오히려 비슷한 점을 말씀드렸는데, 그 얘기를 좀 발전시켜보지요. 87년 대선 결과로 당시의 민주화세력이 멘붕 상태에 빠졌지만, 크게 보면 노태우(泰愚)정권 역시 87년체제의 건설을 진전시켰어요. 공안정국이 있었고, 탄압사례가 많았고, 또 하나회 같은 것이 엄존해서 문민정부에 미달했지만, 아까 이일영 교수가 말한 세가지, 87년체제의 정치·경제와 남북관계 면에서 다 진전을 이뤘다고 봅니다. 특히 남북관계 발전에서 저는 역대 대통령 중 가장 큰 기여를 한 사람 둘을 꼽으라면 김대중(大中) 대통령과 노태우 대통령을 꼽겠어요. 물론 노무현 대통령도 공적이 크지만요. 정치적으로는 탄압하기도 했지만 어쨌든 군사정권으로, 전두환(全斗煥) 식의 폭정으로 복귀하는 건 막았거든요. 국민이 막은 거지만 노태우 대통령도 기여를 했다고 봅니다. 경제의 경우는 지금과는 반대로 그때는 경제적 주체들에게 자유를 주는 게 당면과제였어요. 박정희, 전두환 시대에 국가가 통제하고 있던 걸 자유화하는 게 과제였고 여기에는 노동운동의 자유도 포함되었는데, 결과적으로 거대 경제주체들이 너무 자유로워져서 재벌을 어떻게 규제하고 균형을 잡느냐가 오늘의 과제가 되긴 했지만, 당시로서는 경제적 자유화를 포함해서 세 분야에서 다 업적이 있었다고 봅니다.

그런데 박근혜정권이 적어도 노태우정권 수준으로 시대의 큰 흐름을 수용해서 나아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을 그 세가지 지점에서 점검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경제의 경우는 방금 말씀드렸듯이 과제가 달라져서 이제는 경제민주화, 재벌규제 등을 얼마나 해내느냐가 지켜볼 문제인데, 인수위에서 그걸 챙길 인사가 없다는 말이 들리는 등 결코 낙관할 수 없습니다. 정치의 경우는 야당이 승리했을 때처럼 ‘민주주의 2.0’이랄까 그런 대대적인 시민참여를 실현하기는 어렵겠지만 최소한 이명박정부 아래 퇴행했던 걸 되돌려놓고 민주정부 시절의 인권과 민주주의 수준이나마 유지할지가 관심사인데, 이것도 간단치 않을 것 같아요. 당선인 자신이 민주주의에 대해 투철한 신념이 있는 정치인 같지 않은데다, 더 중요한 것은 지지세력 중에 이번 승리에 절대적으로 기여했다고 자부하고 새 정부 출범을 계기로 이른바 종북좌파들을 영원히 척결하겠다고 기세등등한 사람들이 워낙 많아서, 노태우 대통령이 군부에 기반을 두면서도 군부가 지나치게 정치에 개입하거나 복귀하는 것을 견제했을 정도로 박근혜 대통령이 해낼 수 있겠는가, 이건 지켜볼 문제예요. 다음으로 남북관계입니다. 김병준 교수가 2013년에는 어렵다며 2018년을 얘기할 때 좀 막연한 이야기라고 제가 느낀 것은, 너무 남한 위주의 시각이기 때문이에요. 남한에서도 정치나 행정에 너무 집중된 시각이기도 하고요. 한반도 전체의 사정을 보고, 더군다나 동북아나 세계가 변화하는 정세를 보면, 2018년까지 가기 전에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지 않고서는 대한민국 전체가 많은 면에서 어려워진다고 봅니다. 그런데 박근혜 후보가 남북관계 개선을 공약했지만 평화협정에 대해서는 얘기를 안 하고 있잖아요. 신뢰 프로세스를 만들어가겠다고 하는데 과연 거기까지 진전시킬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당선인이 적극적으로 남북대결을 조장하는 세력의 편을 들지만 않는다면, 우리 시민들이 나서서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는 방향으로 상당한 성과를 낼 수 있을지 모릅니다. 큰 흐름이 있으니까, 박근혜정권 아래서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봐요. 하지만 과연 해낼 수 있을지 그것도 장담을 못 할 것 같아요. 만약 이런 것들이 다 이뤄진다면 좀 미흡하더라도 상당한 정도로 시대교체를 했다고 평가받을 수 있겠죠.

 

이일영  이교수님께서 제일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계시겠지만 말씀하기 거북하실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드는데요. 지금 인수위 인사를 보면 상당히 절제한다는 인상이에요. 이런 점에서 보면 기대감도 없지 않은 듯한데, 한편으로 경제 면에선 경제민주화 공약을 소화하는 데 상당히 뱃심이 필요해 보이고, 재계나 관료 쪽에서 당장은 긴장하고 있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만만하게 느낀다는 얘기도 들려요. 통일·외교 면에서도 어제 한분이 사퇴한(2013.1.12 최대석 외교·방·통일분과 위원의 사편집자) 정황에 대해 추측이 난무하고요. 기대와 우려가 교차하는 시점 아닌가 합니다.

 

이상돈  앞으로 총리와 청와대 인사부터 있을 텐데, 가장 관심을 끄는 건 어떤 박근혜정권이냐 하는 거죠. 과거 같으면 대개 예측을 했는데, 이번에는 사실 당선인 본인의 공이 제일 컸잖아요. 그러니까 그만큼 자유로운 면도 있고 선택지가 많다는 거지요. 유권자가 현명하지 않습니까. 20106·2지방선거와 지난 4·11총선은 거의 비슷한 투표율을 보였지만 결과는 달랐잖아요. 지난번 대선과 같이 진행된 서울시 교육감과 경남도지사 선거에서는 우리 후보가 좋지 않았는데 야권 후보는 더 나쁘더라고요.(웃음) 캐스팅 보트를 쥐고 있는 중도층 유권자에게 이제 과거 민주노동당 출신 후보가 식상한 게 확실해요. 대표주자들이 다 져버렸잖아요. 이를 보수의 승리로 보면 안 되죠. 매사를 진보와 보수의 틀로 보는데 사실 이명박정권이 불신임 받게 된 게 보수정책을 취해서가 아니잖아요. 민주주의 법칙을 묵살하고 재정을 파탄내서 심판받은 거 아닙니까. 50대가 박근혜 후보를 많이 찍은 것은 공약 때문이라기보다는 야권이 문화적으로 그 세대에 안 맞기 때문이죠. 사실 노년층에게 문재인 후보 공약이 더 좋은 게 많았잖아요. 1년에 100만원 이상 무상의료 같은 거요. 민주당은 20~30대에 지나치게 의존했죠.

박근혜정권이 성공하느냐 마느냐는 과거의 교훈을 되새기는 것에 달렸다고 봐요.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 정책 중에서 지지율이 제일 높았던 것이 김영삼(金泳三) 대통령 때 금융실명제 실시하고, 하나회 해체하고, 전두환·노태우 재판한 것이었어요. 대통령 지지율은 정권이 정의와 진실 편에 섰을 때 확실하게 오르는 겁니다. 박근혜 당선인이 그런 것을 교훈 삼아서 정국을 운영해야 1년 반 후 지방선거와 2016년 총선이라는 두번의 중간평가에서 지지받을 수 있다고 봅니다. 제가 민주당이나 야권에 계신 분들하고 좀 다른 것이, 남북관계도 반드시 어떻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보지 않아요. 언제까지 뭐가 안 되면 안 된다, 저는 역사에 그런 것은 없다고 봐요. 시대가 요구하는 시점에서 자연스럽게 해나가는 것이죠. 박근혜 당선인이 말한 평화 프로세스라는 것도 ‘내 임기 중에 무엇을 반드시 하겠다’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과정에 비중을 두고 점진적인 접근을 해갈 것으로 봐요. 재벌개혁도 마찬가지예요. 야권이 하게 되면 아무래도 급격한 변화가 있을 테니, 중간층에 있는 유권자들은 그보다는 믿을 만하고 안정적인 개혁을 택한 게 아닌가 싶어요. 정권 초기에 해묵은 과제를 해결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봅니다. 취임도 하기 전에 지난 몇년 동안 터부처럼 되어 있던 4대강 문제도 나오잖아요. 박근혜정권이 이른바 수구세력에 그냥 묶여갈 것이라고는 보지 않습니다. 당선인은 선거를 많이 겪어본 정치인이기 때문이죠.

 

 

안철수현상에서 무엇을 배울까

 

이일영  지금껏 시대교체의 의미와 박근혜정부의 앞날까지 다뤄봤습니다. 2012년에 있었던 일들 중에서 특이한 것이 안철수현상이었죠. 새로운 정치를 바라는 국민의 열망과 움직임을 평가하고 정리해봤으면 합니다. 안철수현상을 저는 이렇게 봤습니다. 현재 한국사회는 굉장히 격동하는 환경 속에 있지만 기성체제는 상당히 완고해서 변화하지 않으려고 하죠. 비유하자면 지금 국면은 중국의 명・청 교체기 비슷하지 않나 싶어요. 당시 동아시아 7년 전쟁, 즉 임진왜란이 일어나잖아요. 국내정치는 동인과 서인의 양당독점체제인데 변화와 위기에 대응을 못 하고 말았어요. 대내외적으로 불안했는데 지금도 커다란 시대변화 속에서 불안요소가 크다는 점에서 비슷한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아까 50대 얘기를 하셨습니다만, 50대가 가장으로서 불안을 많이 느낀다고 하고 전체적으로 청장년층도 불안감과 좌절감이 큽니다. 결국 국정을 어디에 맡길 것이냐는 문제에서 더 많은 수가 안정감 있는 쪽에 맡기겠다고 결정한 것인데, 2011~12년 상황에서는 불안이라든지 분노가 매우 컸어요. 기성체제와 관군이 위기와 불안에 대응을 못 하면 결국은 의병이 나올 수밖에 없지요. 그런 식으로 의병으로 끌려나온 사람이 안철수 후보인 것 같아요. 본인도 그렇게 이야기하잖아요. 자신이 국민의 뜨거운 열망을 받아들일 만한 능력이 있을지 고민돼서 그렇게 오래 생각했다는 거 아닙니까. 그 장고(長考)가 실패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만. 이렇게 기성질서가 대중의 열망을 담아내지 못하는 현상이 자꾸 분출할 것이고, 기존 정당들이 제 역할을 못 한다면 계속해서 시민항쟁의 형태로 시스템의 불안이 나타나는 거 아니냐는 전망도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에너지를 어떻게 사회발전의 계기로 삼을 것이냐도 과제겠습니다.

 

김용구  제가 참여정부 때 열린우리당 대표가 몇번 바뀌었는가를 살펴봤더니 대략 열두어명쯤이더라고요. 1인당 임기가 고작 몇개월 뿐이에요. 정치활동은 예측성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 예측성 속에서 리더십이 만들어지는 것이고, 리더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리더가 만드는 비전이라고 봅니다. 누군가 비전을 제창하면 사람들이 그것을 이해하고, 양자 사이에 일체감이 만들어질 때 리더십이 형성되는 것이죠. 현재 민주당의 정당조직 운영은 서로를 죽이는 구조예요. 예를 들어 집단지도체제에서는 리더십이 안 나옵니다. 안철수 교수가 정치를 안 하려고 하는데 국민이 떠밀어서 나왔다는 것처럼 비극적인 게 없어요. 역사에 책임지는 자세로 비전을 강하게 내걸고 몸을 던졌을 때 양질의 리더십이 생기는 건데, 떠밀려서 나오는 리더십은 더이상 안 된다고 봅니다. 리더는 자기가 원해서 해야 하는 것이고, 그중에서 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 기회를 주는 정당조직이 만들어져야 된다고 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안철수현상을 한국사회의 역사적인 자산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물론 처음에 말씀드렸다시피 중요한 것은 학습이니까, 안철수 교수가 새롭게 학습하고 새로운 비전을 만들어 정치에 투신한다면 또다른 리더로서 야권에서 제 역할을 할 수 있겠죠.

 

이상돈  이번 대선을 두고 야권이 매우 좌절하고 있는데, 사실 투표결과를 보면 30대와 40대의 교육을 잘 받은 계층은 야권을 많이 찍었잖아요. 이게 의미가 대단한 거 아닙니까. 저희 쪽에서 이런 점을 무겁게 받아들여야 된다고 봅니다. 제가 작년초 여의도에 아침 일찍 나올 일이 많았는데, 거기 출근하는 직장인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 속에서 “아, 여기서 우리 찍을 사람이 몇명이나 있을까” 하며 좌절했었죠.(웃음) 그리고 총선 때의 경험인데, 중앙에서 지역구를 보면 뻔해요. 아주 부유한 지역이나 농촌은 우리가 1위고, 아침에 출근하는 사람이 많이 사는 동네는 싹쓸이로 지게 되더군요. 베드타운에선 우리가 다 졌잖아요. 사실 한국의 미래는 연금 타는 세대가 아니라 그 사람들에게 있어요. 앞으로 박근혜 당선인과 새누리당에서 이 점을 새겨야 합니다. 그래도 제가 희망을 보는 것은 새누리당에서 과두체제가 없어졌다는 거죠. 또 박근혜 이후를 생각했을 때도 유망주가 있어요. 안철수현상 같은 것을 수용할 수 있는 잠재적인 리더가 새누리당에서 클 가능성이 많다고 봅니다. 이번 선거에서 패했으면 상당히 어려워졌겠고, 과두체제가 다시 생길 뻔했죠.

 

이일영  정치평론가들은 일반적으로 안철수현상의 핵심 지지층이 중도혁신층·호남·20대·30대라고 얘기하더군요. 조직과 세력의 절대 열세에도 불구하고 1년 이상 지속돼온 이런 현상은 상당히 특이한 것이라 다른 나라에서도 찾기가 쉽지 않다고도 하고요. 하지만 결국 노선, 조직, 리더십, 전략이 전반적으로 부족해서 졌다는 평가입니다.

 

백낙청  실증적인 자료는 없는데, 안후보 자신도 문후보와의 TV토론에서 어떤 노인이 자기 손을 꼭 잡으면서 이번에는 좀 달라졌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하더라고 말했는데, 저는 이일영 교수가 열거하신 집단들 외에 한국에 제대로 된 진보정당이 있었으면 거기로 갔을 사람들도 안철수현상을 만드는 데 일조하지 않았나 합니다. 무당파층이라고 하는 젊은이들 말고, 나이와 상관없이 한나라당과 민주당을 포함해 기성정치에서 아무런 혜택을 못 받고 철저히 외면당했다가 안철수라는 사람이 나와서 새바람을 일으킨다고 하니까 거기에 막연하게나마 기대를 품은 사람들도 많았지 않나 싶어요. 그게 사실이라면 안철수 후보가 그들의 욕구에 과연 부응했는지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후보 자신의 체질이나 감각, 또 캠프 주요인사들의 감수성에 비춰볼 때, 캠프의 시각은 원래 안철수현상의 진원지인 2030세대와 소통하고 공감하는 쪽에 계속 초점이 맞춰져 있었지, 앞서 말씀드린 바닥의 서민들과 소통하는 데는 매우 미흡했던 것 같아요. 어쨌든 안후보가 준비가 없고 조직이 미비해서 그런 것도 있지만, 서민들의 고단하고 억울한 삶에 대한 인식이나 감수성이 부족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시대교체 문제와 관련해서는, 저는 정권교체와 시대교체는 구별해서 점검할 필요가 있다고 봐요. 통상적으로 같은 당에서 대통령이 나오면 그건 선수교대지 정권교체가 아니지만, 정권교체에 준하는 결과가 나올 수는 있습니다. 4대강 얘기도 하셨지만 이명박정부의 여러 실정과 비리, 진실왜곡 등에 대해 민주당 정권이 들어섰을 경우 못지않게 철저히 조사하고 시정조치를 취한다면, 그건 선수교대인 동시에 정권교체와 맞먹는다고 할 수 있을 거예요. 다른 한편 시대교체라고 하면, 이일영 교수가 얘기하신 대로 2013년체제론은 87년체제가 교착상태 내지 말기적 혼란상태에 빠져 있는 것을 청산하고 새로운 체제를 출발시키자는 취지였는데요. 87년체제가 혼란에 빠진 중요한 이유로는, 하나는 경제 면에서 박정희시대 이래 재벌 위주의 경제체제가 거의 통제불능 상태로 들어간 것이고, 또 하나는 한국 수구세력의 법적·제도적인 토대를 이루는 정전(停戰)체제예요. 정전체제라는 것은 국제적으로 공인된 국경이 없는 상황이죠. 그렇기 때문에 항상 안보불안이 실제로 존재하고, 그러다보니 이걸 악용해서 부당한 기득권을 지키고 키우려는 세력이 번창할 객관적인 토대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걸 평화협정으로 바꾸는 일은 단순히 남북관계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의 정치개혁이나 경제개혁, 시민사회의 건전한 발전에도 관건적인 요소입니다. 유독 남북문제가 국내문제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에 정전협정 문제에 집착하는 게 아니고, 또 이게 언제까지 안 바뀌면 아무것도 못한다는 건 아니지만, 이 문제를 박근혜정권이 제대로 못 풀면 결국은 새누리당 안에서 수구세력을 제압하기도 어려워진다는 것이죠. 일이 순탄하게 풀릴 때는 좋은데 어떤 장벽에 부딪혔을 때 결국은 집토끼들하고 같이 갈 수밖에 없게 되는 상황이 올 우려가 있습니다.

 

이상돈  저는 약간 다르게 생각하는데요. 우리나라 유권자 중에서 정전협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아요.

 

백낙청  맞습니다. 이번 선거에서도 그게 중요한 이슈가 아니지 않았습니까. 국민이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이슈라서 중시하는 게 아니고 국민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경제민주화라든가 복지사회, 민주주의, 사회의 공정성과 도덕성 회복 같은 문제를 푸는 데 이게 숨겨진 고리가 아닐까 해서 말씀드린 거죠.

 

이상돈  흔히 하는 얘기지만, 부전(不戰)협정이나 평화협정 이후에는 항상 더 큰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냐는 거죠. 빠리협정(1973)과 베트남 사례가 그렇지요. 역으로 이런 것을 너무 강조하면 이른바 수구세력을 더 도와주게 되지 않나 합니다. 외교와 국내정치는 별개가 아닌가 해요. 국내 개혁도 별개라고 생각합니다. 정치인 중에서도 외교와 내정의 방향이 상당히 달랐던 경우도 많이 있잖아요. 예를 들면 50년대에 조병옥(趙炳玉) 박사 같은 분도 국내정치에서는 이승만(李承晩) 박사보다 민주적이었지만 남북관계에 대해서는 이박사보다 더 냉전적이지 않았습니까.

 

이일영  2013년 시점에서 중요한 과제로 백선생님께서는 경제와 복지의 재편과 평화체제가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시고, 이상돈 교수님께서는 각자 고유의 영역이 있으니 시대교체의 의미라 한다면 법치와 민주주의 문제에 더 역점을 두어야 한다고 보시는군요.

 

 

진정한 시대교체의 요건과 핵심 과제

 

김용구  제가 하나 덧붙이면, 이명박정부에서 크게 파괴된 게 사회적 자본인데, 그 속에는 공공성 가치나 신뢰자본 등이 포함되죠. 박근혜 당선인이 본인이 가지고 있는 신뢰와 안정이라는 장점을 잘 활용해서 잃어버렸던 공공성 가치를 회복했으면 합니다. 제가 가장 황당했던 건 이명박정부가 2008년 세계경제 위기에도 불구하고 그 전해 대선 캠프에서 만들어놨던 경제정책을 그대로 집행한 것입니다. 경제학자 중에는 2008년 이후 수년간의 고환율만으로도 내수경제 차원에서 가계경제의 손실이 150~60조에 달한다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어요. 바로 그 합계가 가계부채라든지 소비저하로 이어진다는 것이지요. 경제운영에서 확실한 구조적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른바 낙수효과(trickle-down effect)를 기대하거나, 수출 만능의 국가경제를 운영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죠. 예전처럼 성장 중심으로 몰고 가려고 하는 세력이 있는데, 당선자 본인은 지지율 경쟁이 팽팽하게 유지될 때 그건 아니라고 분명히 밝혔어요. 또한 문민정부 때부터 시작된 세계화의 역기능, 신자유주의에서 파생된 물신숭배적 성격구조가 이미 우리 안에 깊숙이 침투해 있는 게 큰 문제라고 봐요. 이제 신뢰자본이 쌓이고 인성이 회복되는 체제가 만들어지면 좋겠습니다. 그러려면 요즘 다시 논의되는 공기업 민영화는 심사숙고하고 삼가는 게 좋다고 봅니다. 민영화(民營化)라고 하지만 결국 사영화(私營化)고 재벌체제로의 편입이거든요. 외국에서는 공기업들을 이러저러하게 시장화한다고 주장하는 경제학자들이 있지만, 그 외국경제는 이미 2008년 이래로 한계가 분명히 드러났지요. 새로운 경제모델을 만들어서 더 많은 공공성 가치와 공적자산을 회복하고 신뢰자본을 굳건히 세우는 경제운영을 했으면 좋겠어요.

마지막으로 국민통합에 대해 말씀드리면, 호남의 89퍼센트 내외가 문재인 후보를 지지했고, 여권 후보로는 처음으로 박근혜 당선자에게도 두자리 수 득표율인 10퍼센트 이상의 호남인이 투표했어요. 이번에 호남인들이 실망했다고 하지만 이교수님 말씀대로 20~40대 미래 세대와 함께하는 투표였기 때문에 그렇게 낙심하거나 소외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이일영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 마무리로 한말씀씩 해주시지요.

 

백낙청  정부의 몫이 크니까 거기에 관심을 갖고 비판하고 지켜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각자 처한 위치에서 우리가 스스로 사회의 기초체력을 키워나가는 데 더 힘써야 될 것 같아요. 공공성을 포함해서 시민사회의 역량을 강화하는 것도 그 일부지요. 또 전문성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자신의 전문성을 강화하는 동시에 전문가로서의 긍지와 자존심을 지키는 것이 중요한데, 저는 이것도 이명박시대에 무참하게 깨진 것 중의 하나라고 봅니다. 이런 것들을 일반화해서 말할 수는 없고 각 분야에서 시민들이 알아서 할 일이겠죠. 그런 의미에서,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는 일이 중요하다 해서 모든 사람이 평화협정 체결운동에 나설 필요는 없고, 당연히 국정운영에 있어서도 이상돈 교수님 말씀대로 개별 분야의 특성과 독자성을 존중하면서 차근차근 해나가야 합니다.

다만 제가 마지막으로 한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국정의 큰 그림을 그리는 입장이라든가 사회현실을 분석하는 학자의 입장에서는 역시 우리의 국내문제라는 것이 남북관계와 어떻게 심층적으로 연결되어 있는지, 표면에 얼핏 안 드러나더라도 얼마나 깊이 연관되어 있는지를 통찰하는 게 긴요하지 않은가 합니다. 가령 87년체제의 한계를 말할 때도 한국이 분단사회이고 특히 1953년 이후 전쟁이 어정쩡하게 끝난 상태가 굳어짐으로써, 저는 그걸 분단체제라고 부릅니다만, 온갖 반민주적이고 비자주적인 요소가 주도하는 일종의 체제가 성립했다는 인식이 필요한 것 같아요. 87년 민주화와 세계적인 동서냉전의 종식으로 인해 그러한 분단체제가 흔들리긴 했지만 오늘도 여전히 엄존하고, 이번 선거를 거치면서 분단체제가 참 힘이 세다는 것을 다시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변혁적 중도주의라는 것도 주장해왔는데 그 이야기까지 자세히 할 시간은 없지만, 쉽게 말해 분단체제가 뭔지 아는 중도주의가 변혁적 중도주의라고 할 수 있어요. 분단체제가 어떤 것이고 얼마나 힘이 세며, 그럼에도 어떤 부분에서는 취약하고 극복의 길이 있는가 하는 것을 알고 그 약점을 정확하게 짚을 수 있는 중도노선, 그게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아까 섣불리 평화협정 얘기하는 것이 수구세력에 힘을 더 키워줄 수도 있다고 하셨는데, 사실 우리 사회에서 진보를 지향한다는 사람들이 그런 역작용을 하기도 해요. 본인의 의도와 관계없이 분단체제를 더 굳히는 일을 하는데, 그래서 분단체제를 극복하는 데는 중도가 더 힘이 세다고 보는 거죠.

 

이상돈  박근혜정권의 성립을 분단세력의 승리라고 말씀하시는 건지도 모르겠네요.(웃음) 이번 선거는 후보 본인의 부정이 없었고, 현 정부가 도와주기보다는 방해만 안 하면 다행인 그런 상황이었다는 점에서 정치사에서 특이한 선거였다고 생각합니다. 거기에 담긴 유권자의 뜻을 박근혜정권이 앞으로 담아내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안정적인 개혁과 쇄신을 통해 우리 사회를 바꿔야 한다고 봅니다. 야권에 계신 분들도 동의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힘을 실어주셨으면 하고요.

 

김용구  저는 박근혜 당선인이 꼭 성공했으면 좋겠어요. 이번 대선에서 본인이 활용했던 현장학습 능력, 즉 고객인 유권자 요구를 파악하려고 애썼던 것을 끝까지 유지하면서 국민이 뭘 원하는지 임기 끝까지 놓치지 말았으면 합니다. 또 민주당을 비롯한 야권은 2012년 두번의 좋은 기회를 놓친 것을 국민이 주는 마지막 학습기회라고 여기길 바랍니다. 사실 야당이 건강하고 제대로 운영돼야 박근혜정부도 제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에, 2012년의 경험을 바탕으로 야당도 건강해지고 올바른 리더십을 키우는 것이 박근혜정부를 도와주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반대로 박근혜정부의 성공이 야당을 하나의 비전을 바탕으로 하는 충실하고 도전적인 정당으로 만들 것이고, 이후 야당의 집권 가능성과 그 이후의 성공 가능성 역시 높여줄 것이라는 자신감을 가졌으면 하지요. 기회는 항상 뒷모습만 보인다는데, 이런 교훈을 야당이든 여당이든 잊지 말아야죠. 특히 민주당은 스스로 무엇을 모르는지를 깨닫는 무지의 학습부터 제대로 시작한다면 전화위복의 기회를 잡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20~40대가 이렇게 높은 지지율을 보이는 것은 세계적으로도 흔치 않은 미래의 자산이거든요. 저는 경제적 실리만이 아니라 가치에 기반을 둔 열정을 품은 이들 청·중년 세대의 국가경영에 대한 높은 안목이 우리의 미래를 어떻게든 견인해나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일영  하나만 덧붙이겠습니다. 박근혜 당선자가 선거 결과가 나온 뒤에 지지자들에게 이렇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번 선거에서 저를 지지해주시고 바쁘신 중에도 투표해주신 그 뜻, 잘 알고 있습니다. 민생의 고달픔, 갈등과 분열의 정치, 제가 단번에 끝낼 수는 없더라도 조금이라도 완화하고 개선하면서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만들어가겠습니다. 저를 지지하지 않으신 분들의 뜻도 겸허히 받들고 야당을 진정 국정의 파트너로 생각하겠습니다.” 이렇게만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런 기대를 하면서 토론을 마치겠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2013.1.15 세교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