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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과현장

 

지식의 정치와 새로운 인문학

‘공공’ 연구의 확장을 위하여

 

 

백영경 白英瓊

방송대 문화교양학과 교수, 문화인류학 및 과학기술학. 저서로 『프랑켄슈타인의 일상』(공저), 역서로 『유토피스틱스』 등이 있음. paix@knou.ac.kr

 

 

1. 새로운 인문학의 실험들과 ‘공공(公共)’의 의미

 

우리 사회의 인문학이 총체적 위기에 처해 있다는 논의는 이미 해묵어 진부하기조차 하다. 사실 인문학의 위기보다 더욱 주목해야 할 것은 최근 들어 대학 안팎에서 벌어지는 새로운 인문학의 실험들이다. 일반적으로 인문학 위기의 증거로 제시되는 성과주의의 위협이나 학생들의 외면, 학문적 재생산 기반의 붕괴 등은 기실 주로 대학 내의 제도화된 인문학 연구를 둘러싼 상황이며, 막상 대학을 벗어나면 인문학에 대한 사회적 수요가 적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하곤 한다.

지난 몇년 동안 성인학습자들을 대상으로 인문학을 가르치는 학과에 근무해온 필자 개인의 경험으로 보아도, 인문학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뜨겁다. 그간 시장만능주의적 흐름 속에서 비단 인문학뿐 아니라 성과지표로 바로 환산될 수 없는 모든 분야의 입지가 축소되어온 것이 일반 대학들의 현실이다. 하지만 역으로 경쟁과 효율성만 강조하는 바로 그 사회적 변화가 대중 속에서 인문학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갈증을 낳고 있다.1) 이러한 요구에 힘입어 대학 바깥에서 많은 대안적 인문학 교육공간이 만들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아직 대세라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실천인문학·평화인문학·사회인문학·통합인문학·시민인문학 등 대학 내에서도 새로운 흐름이 형성되는 중이다.

새로운 인문학의 실험들은 대학 틀 안에 제도화된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대응으로 나온 만큼 학계가 아닌 사회를 지향하며, 인문학이 학계에서 인정받기 위한 활동으로 국한되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한다. 학계 너머의 사회에 대한 책임과 공공성을 강조하는 이러한 흐름은 대체로 크게 둘로 구분할 수 있을 것 같다. 학계 바깥에 존재하는 일반 대중과의 소통을 강조하는 흐름과, 기존 학계의 관심사를 따르기보다 사회적 의제를 중시하거나 나아가 사회적 의제 자체를 학술적 의제로 삼고자 하는 흐름, 즉 사회적 실천을 강조하는 흐름이 그것이다. 물론 이 두 흐름이 언제나 선명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니며 상당한 공통점을 가지는 것도 사실이다.

우선 대중과의 소통을 강조하는 흐름으로는 거리의 인문학, 청소년을 위한 인문학, 시민을 위한 인문학, 노숙자나 재소자를 위한 인문학 등의 예를 들 수 있다. 이는 주로 대학을 떠나 실제로 인문학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삶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인문학 연구가 이바지해야 할 대상은 누구인가라는 차원에서 인문학의 공공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특히 이 흐름에서 중요한 것은 인문학의 주체를 전문적인 연구자에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것으로 보고, 인문학 하기를 통해서 인간다운 삶의 회복을 꾀한다는 점이라고 하겠다. 그에 비해 사회적 실천을 강조하는 흐름은 인문학 연구의 내용에서 무엇을 다룰 것인가에 더 방점을 두고 있다. 이들은 제도화된 인문학이 분과학문의 이해관계나 관행에 얽매여 공공의 삶에서 중요한 사회적 의제를 다루지 못하고 있다고 본다. 따라서 분과학문의 경계를 넘어 평화와 통일, 생태와 환경, 빈곤과 차별, 민주주의 등 공공의 삶과 관련된 문제를 다룸으로써 인문학의 공공성을 구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새로운 인문학의 흐름들이 각기 나름의 방식으로 공공() 혹은 공공성(公共性)에 대한 연구와 실천 방법을 실험하고 있다고 할 때, 과연 여기서 의미하는 공공 혹은 공공성은 무엇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사실 공공성이라는 용어는 일상적으로 듣는 말이기는 하지만, 그 의미를 확실하게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공공은 일반적으로 영어의 ‘public’의 말뜻을 따라 사사롭지 않은 것, 공동의 것, 열린 것 등의 의미를 지닌다고 이해된다. 그러나 “한자어권에서의 ‘공공’이란 공()과 공()의 합성어로서, 공()이 공()을 압도”하는 경향이 있으며, 특히 국가주의적 전통이 강한 동아시아에서는 “공()이 곧 관()으로 간주되는 사고”가 남아 있다는 지적도 있다.2) 이렇게 볼 때, ‘공공’이란 개념의 의미는 그야말로 맥락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편 신진욱(申晋旭)에 따르면 분석적인 차원에서 공공성 혹은 ‘공공적인 것’(publicness)은 다수 사회구성원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며, 모두의 필수 생활조건이자 많은 사람들의 공동 관심사인 한편, 만인에게 드러나야 바람직한 것이고, 세대를 넘어서는 영속성을 가진 문제이다. 이로부터 그는 책임성이나 민주적 통제, 연대와 정의, 공동체의식과 참여, 개방과 공개성, 세대간 연대와 책임 같은 규범적 가치를 이끌어내고 이를 지향하는 실천의 필요성을 제기한다.3) 그런데 이러한 논의는 공공성의 내용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사고하는 데 필요한 분석적 범주를 제공한다는 점에서는 큰 도움이 되지만, 연대와 정의 혹은 공동체 같은 범주들이 사회마다, 또 시기마다 그 의미가 달라지게 마련임을 분명히해주고 있지는 않다.

사실 공공성이란 단지 그 의미를 또렷이 정의하고 성심껏 추구하면 되는 목표가 아니다. 공공성이란 해당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의 공동 관심사가 어떻게 구성되고 있는지, 혹은 어떠한 공간에서 그러한 공적인 문제가 논의되는지, 그러한 논의에서 판단 기준은 무엇인지에 따라 사회마다 상당히 다른 양상을 띨 수밖에 없다. 실제로 사회적 갈등의 현장에서 공공성을 수호해야 한다는 구호는 쉽게 나오지만, 대부분의 경우 공익이나 공공성이라는 원칙에 동의한다고 해도 구체적으로 무엇이 공익이며 뭐가 공공성을 지키는 길인지 합의를 보기란 쉽지 않다.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사회에서 갈등은 대체로 공공의 이익이 무엇인지를 둘러싸고 일어나지 공공의 이익을 대놓고 부정하는 방식으로 이뤄지지 않으며, 각기 다른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나 자료, 통계, 지식 등의 객관성과 과학성에 대한 싸움이 되곤 한다. 그런데 논란의 대상인 지식이 ‘사회적’이라고 할 때는 입장이나 전제, 해석에 대해 따져보려는 노력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자연이나 기술의 영역이라고 생각되면 그저 사실과 허위로만 구분되는 경향이 심하다. 보편타당한 지식이라는 게 따로 있다는 이런 믿음 때문에 공공이나 공익을 주장하려는 입장일수록 자신은 주관적인 견해가 아니라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지식에 입각해 있음을 표방하려 한다. 그러나 공공이라는 것이 모두의 이해를 포괄하는 무엇이 아니듯 자연과학적인 지식이라고 해서 늘 보편적인 것도 아니다. 이렇게 본다면 공공성이란 철학적인 문제이기도 하지만 지식을 둘러싼 정치의 문제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이제까지 우리 사회에서 인문학의 공공성에 대한 모색과 새로운 실험이 이어졌음에도, 대중과의 소통이나 사회적인 실천을 넘어서 공공성이 이해되는 여러 방식이나 공공성과 관련하여 제기될 수밖에 없는 지식의 정치를 문제삼는 논의는 드물었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이에 따라 우선 공공인류학의 사례를 중심으로 공공을 표방하는 학문적 실천의 다양한 양상에 대해 살펴본 후, 공공에 대한 인문학적 연구에서 지식의 정치를 다루는 게 왜 중요한지로 넘어가려 한다.4)

 

 

2. ‘공공’과 인문학: 공공인류학을 중심으로

 

우리 사회의 인문학이 대중과의 소통과 사회적 실천을 꾸준히 추구해왔음에도 ‘공공’을 표방하면서 하나의 하위분야로 자리잡은 경우가 드문 데 비해, 영미 학계의 경우 인문학 전체의 공공성과 상관없이 거의 모든 학문 분야에서 ‘공공-학’이 존재한다. 상대적으로 널리 알려진 공공역사학(public history)이나 공공사회학(public sociology) 외에도 공공인류학(public anthropology), 공공철학(public philosophy), 공공민속학(public folklore) 등 많은 영역에서 공공을 표방하는 하위분야가 존재하는데, 여기서 눈여겨볼 점은 공공의 의미가 실로 다양하다는 것이다. 대학 바깥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사회적인 관심에 부응해야 한다는 정도가 공통점이라면, 각 분과마다 공공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방식이 매우 차이가 난다는 사실은 공공의 의미가 맥락에 따라 달라짐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우선 공공-인문학의 갈래들 가운데 가장 역사가 오래된 공공역사학의 예를 보자. 영국의 경우 국민국가가 발전한 18세기 이래로 크고작은 박물관과 사설 또는 공설 아카이브가 만들어지고 개인 소장품이 발달함과 동시에 많은 역사협회가 성장하면서 공공역사학에 대한 논의가 생겨났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5) 특히 1960년대 이래로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주장한 역사작업장 운동(History Workshop Movement)이 공공역사학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미국의 공공역사학은 민권운동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발전해왔다. 70년대 중반 이후 공공역사학을 위한 대학원 프로그램이 개설되기 시작한 것이 미국 대학 내에서 제도화되는 중요한 계기였다고 본다.

초기 공공역사학은 국가의 역사가 아닌 대중의 역사를 표방하는 일종의 사회운동의 형태를 띠었으나, 현재는 공동체운동이나 정치운동, 사회정의의 요구와 여전히 관계를 맺고 있다 하더라도 운동성은 크게 약화되었다. 방송 ‘히스토리 채널’이나 역사를 주제로 한 각종 테마파크, 박물관의 출현에서 볼 수 있듯이 역사는 하나의 산업이 되었고, 제도화된 공공역사학은 이 산업적 수요에 부응하는 구실을 하고 있다. 결국 여기서 ‘공공’이란 대학에서 일하면서 학술논문을 쓰는 전문 연구자의 양성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공공성’은 조상 찾기나 방송제작, 관광 진흥, 대중교육 등 대학 바깥에서 일반 대중의 필요에 따른다는 의미에 가깝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영미권의 공공역사학은 역사학이라는 분야 내에 특화된 하나의 하위분야라고 할 수 있으며, 그 역할은 전문성을 기반으로 한 대중과의 만남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와 달리 마이클 부라보이(Michael Burawoy)를 통해 주로 알려진 공공사회학(public sociology)은 상아탑에 갇히지 않는 사회적 실천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다른 종류의 공공성을 지향한다. 부라보이는 “공공사회학이란 더 많은 청중과 소통하기 위해 학계를 초월하고자 하는” 사회학이라고 하면서 “특정한 방법이나 이론, 혹은 일련의 정치적 가치라기보다는 아마도 사회학의 한가지 스타일로 이해하는 편이 가장 나을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6) 다시 말해 그는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사회학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학계를 넘어 사회를 개선하기 위한 학문으로서 공공사회학을 규정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공공사회학이라고 하면 부라보이’라는 인상을 각인시켰으며, 사회학이라는 학문의 성격을 둘러싸고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등 일정한 성취를 이뤄내기도 했지만, 공공사회학 논의가 사회학 일반에 영향을 주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한 점에서 공공사회학은 사회적 실천을 강조하는 사회학 내의 특정한 흐름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으며, 대중과의 소통에서 그 정체성을 찾고 있는 공공역사학과는 달리 기본적으로 학계 안의 대화였다고 할 수 있다.

한편 공공인류학은 1990년대말 로버트 보로프스키(Robert Borobsky)에 의해 시작된 캘리포니아대학 출판부의 ‘공공인류학 총서’와 함께 그 모습을 드러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7) 공공인류학은 역사학 내에서 하나의 하위분야로 자리잡은 공공역사학이나 사회학 내에서 하나의 관점으로 간주되는 공공사회학과 달리 “하나의 비전인 동시에 분야”임을 내세운다. 공공인류학은 인류학적 통찰을 동원하되 학계가 스스로 정한 학문적 범주에 구애받지 않고 인권이나 건강, 폭력, 정의, 거버넌스 같은 사회적 문제에 대해 대중과 폭넓게 소통하고 해결을 도모하는 것을 목표로 내세운다. 그러한 점에서, 공공인류학은 인류학의 한 분야이기도 하지만 또한 인류학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하나의 관점이기도 한 것이다. 또한 보로프스키는 인류학의 청중을 연구자들로 한정하면서 분과학문의 순수성을 추구하려는 경향과 거리를 두고자 했다. 그뿐 아니라 이론과 실천을 분리하려는 경향이나 끝없는 전공의 세분화 경향에도 반대했으며, 전문가나 권위에 의존하는 객관성 개념이 아니라 문제 당사자들과의 대화 속에서 만들어지는 과정으로서의 진실을 추구했다.8)

사실 공공인류학의 이러한 주장은 인류학 내에서 아주 새로운 것도 아니고 드문 문제제기도 아니다. 특히 응용인류학 영역에서 실천은 늘 강조되어왔으며, 또한 학계 바깥에서 인류학적 시각의 유용성을 발휘하려는 노력이 있어왔다. 물론 보로프스키는 응용인류학과 공공인류학이 상당부분 겹치는 점이 있기는 해도, 응용인류학이 대체로 이미 정의된 문제에 대한 해답을 추구하는 편인 데 비해 공공인류학은 공적인 토론과정에서 문제가 정의되고 지식이 구성되며 진실이 협상된다는 입장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응용인류학과 달리 공공인류학은 인류학과 다른 학문 사이의 구획을 어떻게 그어야 할지, 혹은 공공인류학은 무엇이고 응용인류학은 무엇인지 그 경계에 그리 신경쓰지 않는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고 지적한다. 그보다는 인류학이라는 분야 자체가 공공과 맺는 관계에서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긴다.

실제로 공공인류학이라는 용어에 익숙하지 않은 연구자에게도 공공인류학 총서의 일환으로 발간된 도서들은 낯설지 않다. 그 가운데 폴 파머(Paul Farmer)의 『권력의 병리학: 왜 질병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먼저 찾아오는가』(후마니타스 2009)가 국내에 번역 출간된 바 있는데, 현대사회의 전쟁과 난민, 질병과 폭력, 빈곤과 인권 등은 이 총서가 즐겨 다루는 주제다. 그중에서도 마거릿 락(Margaret Lock)의 『두번 죽다: 장기이식과 죽음의 재발명』(Twice Dead: Organ Transplants & the Reinvention of Death, 2001)은 의료인류학 분야의 고전이라 할 만한 저술이다. 이 책은 장기이식이라는 의료적 처치가 일반화되는 과정에서는 뇌사판정에 따라 장기를 제공하는 사람들의 존재가 필수적이었다고 지적하면서, 어떤 문화적·역사적·정치적·의료적 배경으로 미국에서는 뇌사라는 새로운 죽음의 범주가 쉽게 받아들여진 반면 일본에서는 오랫동안 그러지 못했으며, 이는 일본에서 장기이식술 시행을 어렵게 하는 결과를 낳았음을 보여준다. 락의 연구는 뇌사라는 새로운 죽음의 범주가 만들어지고, 수용되거나 혹은 거부되는 과정을 통해 현대사회에서 죽음이라는 사건이 자연적인 것만도 아니지만 과학적 지식과 기술의 문제만도 아님을 보여준다. 뇌사라는 현상에 문화적·의학적·법적·정치적 차원이 결합되어 있음을 사사하는 그의 연구 역시 의학과 법학, 사회과학의 좁은 경계에 갇혀 있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락의 연구는 분과학문의 경계를 넘어 사회적인 쟁점을 다루고자 하며, 연구과정에서 특정 분야 전문가의 견해에 의존하기보다는 과학적이고 객관적이라고 간주되는 지식 자체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연구대상으로 삼고 있다. 그뿐 아니라 현대의 일상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쟁점에 대해 인류학적인 개입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공공인류학의 좋은 사례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공공인류학에서 무엇보다 흥미로운 점은, 파머나 락의 연구가 제기하는 문제의식을 공공인류학이라는 이름으로 묶이지 않는 인류학자들 역시 공유하고 있으며, 이미 그러한 내용을 담은 연구성과를 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아마도 제국주의시대 이래로 연구자와 (연구대상이 되는) 공동체의 관계에서 파생되는 윤리적인 문제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인류학의 연구전통 때문일 것이다. 인류학적 연구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또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가, 인류학 연구가 궁극적으로 연구대상이 되는 공동체에 도움을 줄 수 있는가, 연구대상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객체화하는 것은 아닌가 같은 이슈는 인류학 전반을 관통하는 문제이지 공공인류학만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공공인류학의 사례는 새로운 인문학의 실험이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공공’의 문제를 하위분과의 문제로 간주하거나 대중과의 소통 문제로 국한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사실 시장중심적 가치가 지배하고 시민이 아닌 소비자가 권리의 주체가 되는 상황에서 사회적으로 의미있는 연구란 종종 시장논리에 지배받기 쉽고, 대중과의 소통은 홍보의 차원으로 전락하기 쉽다. 그러나 인문학 연구에서 ‘공공’의 문제는 연구자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학문적 본질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제도화된 인문학을 대체하려는 새로운 인문학이라면 결국 사회현실에 존재하는 권력관계의 문제, 연구를 지원하는 재원의 문제, 국가 내 혹은 국가 간의 권력 문제, 대학의 현실, 공공영역과 사적 영역 사이의 형평과 균형 문제, 지식의 유통이나 분석 단위의 문제 등을 외면해서는 안된다. 모두 한 사회에서 ‘공공’을 이해할 때 따져보지 않을 수 없는 중요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인문학의 공공성은 단순히 기존의 성과를 대중과 나누거나 익숙한 영역에서 익숙한 비판을 하는 것만으로는 찾을 수 없다. 사실 공공이란 주어진 것이 아니며 언제나 정당한 것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인문학이 추구해야 할 ‘공공’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구성되는가 같은 문제는 단지 사회적 실천에 관심이 있거나 대중적 소통을 추구하는 일부 연구자들만의 관심사가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3. ‘공공’과 지식의 정치

 

이제까지 새로운 인문학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단순히 대학 바깥에서 대중과 소통한다든가, 아니면 실천적인 지향을 밝히면서 공공성을 내세우는 것만으로는 공공이라는 이름에 값하기 어려우며, 따라서 ‘공공’ 자체를 인문학의 직접적인 탐구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공공에 대한 연구에서 필수적인 내용이지만 지금의 인문학 논의에서 거의 다루어지지 않는 것이 바로 지식의 정치, 그중에서도 자연과학을 포함하는 과학적 지식을 둘러싼 정치다.

지식의 정치에 대한 논의를 풀어가기 위해 앞서 언급한 마거릿 락의 연구를 다시 살펴보자. 죽음과 윤리는 인문학의 가장 고전적인 주제 가운데 하나라고 하겠으나 뇌사라는 범주가 생기면서 죽음은 전문가의 입회하에 의료적 기준과 법적인 절차에 의거해 판정되는 문제가 되었다. 이는 흔히 사회문화적으로만 접근되어온 현상을 이해하는 데 이른바 ‘자연과학’ 지식이 필수적이 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동시에 거꾸로 자연과학과 의료의 영역에서 이뤄지는 일들이 이제 공공의 관심이자 이해관계가 걸린 사안이 되었으며 따라서 인문학이 탐구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로 등장했음을 뜻하기도 한다.

그러나 락의 경우에도 과학적 지식의 문제를 다룬다고는 하나 지식의 정치를 명시적으로 문제삼고 있지는 않다. 이런 경우 독자들은 마치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접점이 생명공학이나 의료 등 특정한 영역에 국한되는 것으로 생각할 우려가 있다. 또는 지식은 객관적인데 사회적 영역에서만 쟁점을 만들어내는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학적으로 연구된 자연의 질서는 사회적 질서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어왔으며, 과학사가인 셰이핀(S. Shapin)과 셰퍼(S. Schaffer)가 지적하듯이 “지식의 문제란 결국 사회질서의 문제”9)였다는 점에서, 공공의 문제를 다룰 때 지식의 정치, 특히 객관적인 사실로 받아들여온 자연과학적 지식의 정치를 좀더 명시적으로 따져보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10)

하지만 과연 지식이 어떻게 생산되는지, 그 인식적 권위는 어떤 식으로 형성되는지, 그리고 그것이 사회에서 어떻게 실행되는지는 인문학의 주요 의제로 온전히 인정되지 못한 면이 있다. 이제까지 인문학은 근대적 의미의 객관성과 합리성을 문제삼을 때조차 자연이나 사회를 있는 그대로 반영하는 지식이 신뢰할 수 있는 지식이라는 통상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오히려 이러한 신뢰가 그 객관성과 합리성을 지탱해온 중요한 원천이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지식의 정치를 문제삼지 않는 인문학은 이를 비판할 때도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지식의 정치를 분석하는 경우에도 오용이냐 선용이냐, 진실이냐 왜곡이냐의 틀에 갇혀 지식과 사회질서의 공생산(共生産, co-production) 같은 문제는 연구대상에서 제외되곤 한다.

1970년대 중반에 시작되어 특히 1990년대 이후 빠르게 발전해온 과학기술학(Science and Technology Studies, STS)의 핵심 의제가 바로 이러한 통념에 문제제기하는 것이었다. 과학과 기술이라는 특수한 분야에 대한 연구라는 세간의 흔한 오해와는 달리, 과학기술학은 사회적 현상으로서의 지식 일반에 대한 연구이며, 지식이 의존하고 있는 범주와 경계의 구성, 인식적 권위의 문제 등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과학기술학에서는 그 초기부터 과학적 지식의 생산, 평가 및 활용이 인간 사회가 자연에 질서를 부여하는 방식이며, 그 자체로 사회·문화적 질서의 생산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해왔다.11) 다시 말해 과학기술 역시 사회과학의 대상이 될 수 있으며, 과학적 신뢰성은 어떻게 구축되며 과학이 어떻게 다른 영역과 구분되는 진리와 객관성의 영역으로 구성되는지, 또 그렇게 만들어진 과학의 객관성과 진리성에 대한 믿음은 어떻게 정치적 영향력으로 확장되어 문화적 권위를 행사하게 되는지 연구하는 것이다.

특히 1990년대 이후 과학기술학에서 중요하게 자리잡게 된 인류학적인 연구 흐름은 지식의 정치와 관련하여 지식생산에서 사용되는 범주나 분류의 문제, 국가와 통치성의 문제, 자연의 사회적 구성이나 지식생산을 둘러싼 권력 문제 등을 다루어왔다. 예를 들어 국내에도 번역된 제프리 보커(Geoffrey Bowker)와 수전 리 스타(Susan Leigh Starr)의 『사물의 분류』(주은우 옮김, 현실문화연구 2005)는 현대사회가 기초로 하고 있는 정보체제의 기반인 표준과 분류의 문제를 탐구한다. 정보에 기초한 사회에서 이 두가지는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의미를 띤다. 가령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에서는 피부색과 머릿결 등 신체적인 특징이 모두 계측되어 인종을 세분하는 데 이용되었는데, 이는 인종차별 문제뿐 아니라 분류 기준에 들어맞지 않는 많은 애매한 사람들의 고통을 불러왔다. 환자들의 주관적인 질병 경험뿐 아니라 질병의 자연적 발현과정 자체가 분류에 부합하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과학적 분류와 인종이나 질병에 대한 지식에 따라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흑인’이 누구를 지칭하는지가 달라질 수밖에 없으며, 폐결핵이라는 질병의 원인과 진행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이에 개입하는 공공의료의 모습도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이다.12)

또한 과학기술학을 연구하는 인류학자들은 과학과 기술의 진전을 통해 사람들이 국가나 사회 내에서 자신의 위치 및 소속감을 찾는 방식이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또 생명과학분야의 발전이 어떻게 사람들로 하여금 타인과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어주는지, 국가에 대해 어떤 새로운 요구를 할 수 있게 해주는지 등의 문제를 다루기도 했다. 그 한 예가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사고 이후의 우끄라이나를 연구한 과학기술학자 겸 인류학자인 아드리아나 뻬뜨리나(Adriana Petryna)의 연구다. 뻬뜨리나의 연구는 소련이 붕괴한 이후 복지체계라고 할 만한 것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신생국가 우끄라이나의 상황에서, 시민이라면 마땅히 누려야 할 의료와 복지 지원을 받을 길은 오로지 국가로부터 피폭자라는 사실이나 장애를 인정받는 길밖에 없어진 현실을 ‘생물학적 시민권’(biological citizenship)이라는 용어를 빌려 설명하고 있다. 이를 통해 뻬뜨리나는 시민들의 고통이 그 자체로는 인정되지 않고 통계를 통해 과학적으로 입증되어야 했으며, 체르노빌 사고 이후 이 지역이 서구 과학자들을 위해 방사능 피폭 데이터를 생산하는 실험실이 되었음을 보여준다.13) 물론 이 연구는 체르노빌의 특수한 상황을 대상으로 한다. 그러나 과학과 의료가 한편으로는 국가가 시민에게 제공하는 자원인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시민들의 고통받는 몸을 기반으로 통계자료를 축적하기도 하고 또 통계적 지식에 대한 해석을 둘러싼 경합을 벌이기도 한다는 사실은, 현대사회의 삶에서 지식의 정치가 지니는 중요성을 다시금 확인시켜준다.

지식의 정치가 공공을 새로이 구성하는 데 큰 중요성을 지니는 또 하나의 사례로는 기후변화를 들 수 있다.14) 지구가 직면한 환경위기에 적절하게 대처할 것을 촉구하는 입장에서는, 대체로 기후변화와 전지구적 위기를 누구나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객관적 사실로 간주한다. 기후변화라는 현상에 대한 과학적 불확실성을 문제삼는 경우, 마치 기후변화의 절박함을 무시하거나 이에 대응하는 노력 자체를 훼방하는 세력으로 몰리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에 의한 지구온난화의 가능성과 그 잠재적 위험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과학적 사실을 둘러싼 지식의 정치는 여전히 중요하다. 예를 들어 여러 종류의 온실가스가 지구의 온난화에 미치는 영향을 비교하기 위한 ‘지구온난화잠재력지수’(Global Warming Potential, GWP)는 쿄오또의정서(1997)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과학적 도구로 여겨져왔다. 그러나 온실가스는 종류별로 복사 특성 외에도 대기 중에 머무는 수명이 다르기 때문에 같은 물질이라 해도 시간범위(time horizon)를 어떻게 정하는가에 따라 GWP 값이 달라진다. 따라서 여기에 어떠한 시간범위를 적용할 것인가는 정책적 판단이 결부된 지식 정치의 장이 된다. 더구나 온실가스는 전지구적으로 작용할 뿐 아니라 지역에 따라 크게 다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하지만 기체별 영향을 평가하는 노력에 비해 지역적 지수를 산정하는 문제는 등한시되어왔다. 이는 기후변화가 전지구적인 문제로 전제되고 있기 때문인데, 지역마다 똑같은 영향을 받는 게 아니라면 자신의 지역에 필요한 지수를 산출해야 하며 그런 과학적 지식을 생산하는 과정에 관계하는 지식의 정치를 동원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공공의 개념을 새로 구성하는 데 지식의 정치가 필수적일 뿐 아니라, 그 반대로 지식 자체가 그 안에 이미 서로 다른 공공 개념을 전제한다고도 볼 수 있다.

현대의 삶에서 과학적 지식은 새로운 공공 개념의 출현을 가능하게도 하고, 공공을 구획하는 근거를 제공하기도 하며, 서로 다른 공공 개념이 다투는 경합의 장이 되기도 한다. 종종 자연과학적 지식 자체는 인문학과 거리가 먼 것으로 여겨지지만, 장애등급제를 둘러싼 투쟁을 벌이든 방사능 위험으로부터 아이들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하든, 인간다운 삶을 추구하고 공적인 장에서 목소리를 내는 과정에서 지식의 정치는 피할 수 없어 보인다. 그러한 의미에서 새로운 인문학을 구상하는 일에 지식의 정치는 필수적인 요소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4. 지식의 정치, 그리고 ‘공공’ 연구의 확장을 위하여

 

학문이 파편화되고 지식과 삶이 분리되는 현실에서 새로운 인문학의 실험들은 실천성·공공성과 함께 학문적 통합성을 추구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인문학적 훈련을 통해 비판적 사고와 상상력을 키우려는 노력들 중 적지 않은 경우가 현대적 분과학문의 경계 짓기를 극복하고 지식과 삶을 통합할 수 있는 방안으로서 전통적인 문()·사()·철()의 모형으로 회귀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또한 『논어』나 『노자』 등을 비롯한 고전 읽기 열풍에서 볼 수 있듯이, 고전을 통해 인생의 지혜를 얻고자 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는 물론 제도화된 인문학이 담아내지 못하는 더 나은 삶에 대한 열망의 발현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보면 누가 뭐래도 인간적인 삶의 일부라고 할 집합적 삶의 측면, 그 안에 존재하는 권력의 문제, 인간과 사회 및 자연에 대해 인류가 축적해온 지식의 문제를 배제할 우려가 크다는 측면에서 볼 때 삶의 총체성을 추구하는 인문학에는 못 미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새로운 인문학적 실험이 추구하는 인문학의 공공성은 단지 누구와 함께 혹은 누구를 위하여 인문학을 하는가라는 문제로 치환되어서는 안된다. 제도화된 인문학의 경우 비판정신을 상실하고 대학 내에 고립될 우려가 큰 것이 문제라면, 대학 바깥으로 나온 인문학은 그 취약한 물적 기반 때문에 대중성에 대한 유혹에 흔들리거나 아니면 비판하는 자와 비판 대상이라는 이분법이 주는 자기만족에 빠질 위험을 경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제까지 당연시했던 부분, 문제삼지 않았던 전제들을 끝없이 성찰의 대상으로 끌어들이는 노력이 필요하다. 필자는 인문학의 성찰에서 비껴 있었던 중요한 영역 가운데 하나가 바로 자연과학을 포함하는 과학적 지식의 정치라고 생각한다. 현대의 삶에서 과학적 지식과 이를 둘러싼 정치는 이미 고통, 인권, 성과 정체성, 생명과 죽음 등 인문학의 전통적인 주제를 다루기 위해서라도 피해갈 수 없는 영역이 되었다. 지식의 문제는 사회질서의 문제이자 무엇이 좋은 삶인가를 가르는 윤리의 문제가 된 것이다. 이제 우리 시대의 ‘공공’ 연구는 지식의 정치를 포괄하는 것으로 확장될 필요가 있으며, 이를 통해서만 새로운 인문학의 실험 역시 새로운 삶의 기획으로 한걸음 더 내디딜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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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물론 오늘날 인문학의 열기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CEO를 위한 인문학’ ‘글로벌 리더와 엘리트를 양성하기 위한 인문학’ 등이 인문학의 공공성 확대라는 흐름과 맥을 같이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인문학이 “애초에 특권을 향유한 계급의 교양”으로 출발했지만, “그러한 특권을 보다 넓은 범위의 사회계층으로까지 확대시키려 애쓰는 가운데 인문학의 이념과 제도가 오늘날까지 발전”해왔다는 사실에 역행한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백영서 「사회인문학의 지평을 열며」, 『사회인문학이란 무엇인가: 비판적 인문정신의 회복을 위하여』, 한길사 2011, 30~31면). 그러나 이 또한 인문학이 대학 바깥에서 대중화되는 과정의 일부인 것도 사실이다.

2) 백영서, 앞의 글 36면.

3) 신진욱 「공공성과 한국사회」,『시민과 세계』 11호(2007) 30~35면.

4) 본디 이 글은 2012년 9월 20일 한양대 비교역사연구소 초청을 받아 공공성을 추구하는 인문사회과학 연구의 한 사례로서 공공인류학에 대해 발표하게 된 것을 계기로 구상하게 되었다. 따라서 지금 한국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새로운 인문학의 실험들을 지식의 정치라는 차원에서 본격 점검하고 있지 못한 한계를 지닌다.

그러나 이 글이 사회인문학과 평화인문학 등 특히 ‘인문한국(HK)’ 사업 형태로 현재 대학제도 내부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시도들에 대해 다루기보다 공공인류학에서 시작하여 과학기술학의 논의를 검토하는 형태가 된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다. 새로운 인문학의 시도들이라 해도 자연과학으로 분류되는 지식의 정치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개별 연구자나 사업기획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인문학의 영역을 무엇으로 삼고 있는지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즉 자연과학을 포함하는 지식의 문제는 인문학의 영역이 아니라고 보거나 다루는 경우에도 그저 하위영역이라고 보는 경향의 문제 때문이며, 이는 사실 ‘공공’의 문제를 기껏해야 연구의 하위영역으로 보는 경향과도 일맥 통하는 것이다.

5) http://www.publichistory.org 참조.

6) 2004 American Sociological Association Presidential Address: For Public Sociology, American Sociological Review, 2005, Vol. 70, Issue 1, 4~28면.

7) 이 총서는 출판을 원하는 미래의 저자들에게 다음 다섯가지에 유의해줄 것을 주문하고 있다. 원고를 작성할 때는 학계 바깥의 독자들도 관심이 있을 만한 문제를 다루는 방향으로 할 것, 의식적으로 학계 바깥의 독자들을 염두에 둘 것, 책 자체가 하나의 “이야기”가 될 수 있게 할 것, 이론적인 입장이 지나치게 두드러지지 않도록 할 것, 그리고 너무 길지 않을 것.http://www.publicanthropology.org/books-book-series/california-book-series/series-overview/

8) Robert Borobsky, “Public Anthropology. Where To? What Next?” Anthropology News 41, 5:9-10, 2000. http://www.publicanthropology.org/public-anthropology/ 참조.

9) Steven Shapin & Simon Schaffer, Leviathan and the Air-Pump: Hobbes, Boyle, and the Experimental Life,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9, 283면.

10) 이 글에서는 주로 자연과학적 지식의 문제를 다루지만, 과학지식과 더불어 정치의 대상이 아닌 것으로 간주되곤 하는 ‘기술’을 정치의 문제로 다룬 글로는 실라 재써노프 「정치의 장소이자 대상인 기술」, 『창작과비평』 2010년 가을호 참조.

11) 지면의 한계로 과학기술학의 주요 저작을 소개하기는 어려우나, Sheila Jasanoff et al (eds), Handbook of Science and Technology Studies. rev. ed. London: Sage 2001 및 Mario Biagioli (ed), The Science Studies Reader, London: Routledge 1999, 그리고 Jan Golinski, Making Natural Knowledge: Constructivism and the History of Science, with a new Prefac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5 등이 과학기술학의 큰 그림을 보여주는 데 유용한 길잡이가 될 수 있다. 한국어로 번역된 책으로는 브뤼노 라뚜르(Bruno Latour)의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홍철기 옮김, 갈무리 2009)가 있다. 사회적 현상으로서의 지식 일반을 연구하는 학문인 과학기술학이라는 정의가 잘 정리된 문헌으로는 다음을 참조. Stephen Hilgartner, “Institutionalizing Science and Technology Studies in the Academy.” In Social Studies of Science and Technology: Looking Back Ahead, edited by B. Joerges and H. Nowotny, Dordrecht & Boston: Kluwer 2003, 201~10면.

12) 질병의 경우 흔히 그 원인으로 환경적・사회적 요인을 중시하는지, 아니면 생의학적으로 이해하는지에 따라 개입 방식이 달라진다는 생각에서 사회과학 대 의학의 구도를 상상하기 쉽지만, 사실 생의학적 입장 내에서도 차이가 크다. 예를 들어 최근 자궁경부암을 예방해준다는 백신이 관심을 끌고 있지만, 자궁경부암의 원인은 생의학적인 입장에서도 성접촉에 의한 바이러스로 볼 수도, 면역체계의 이상이나 이상세포들의 증식 문제로 볼 수도 있다. 이렇게 원인을 무엇으로 보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사회적 취약집단을 상정하게 되며, 그에 맞춰 공익과 공공성, 공중보건 정책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의학이나 과학은 사회과학의 관심이 아니라는 말은 통하기 어렵다.

13) Adriana Petryna, Life Exposed: Biological Citizens after Chernobyl,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2.

14) 기후변화와 관련한 입문서로는 마크 마슬린 『기후변화의 정치경제학: 지구온난화를 둘러싼 진실들』(조홍섭 옮김, 한겨레출판 2010) 및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기획, 이안 앵거스 엮음 『기후정의: 기후변화와 환경파괴에 맞선 반자본주의의 대안』(김현우 외 옮김, 이매진 2012)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