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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조명 | 황병승 시집 『육체쇼와 전집』
 

이 쓸쓸한 육체쇼의 무대

 

왼쪽 황병승, 오른쪽 이장욱ⓒ 송곳

왼쪽 황병승, 오른쪽 이장욱ⓒ 송곳

 

이장욱 李章旭

1968년 서울 출생. 199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내 잠 속의 모래산』 『정오의 희망곡』 『생년월일』, 장편소설 『칼로의 유쾌한 악마들』, 소설집 『고백의 제왕』 등이 있음.

 

황병승 黃炳承

1970년 서울 출생. 2003년 『파라21』로 등단. 시집 『여장남자 시코쿠』 『트랙과 들판의 별』 『육체쇼와 전집』이 있음.

 

  

 

힘센 책들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의 정치적 급진주의에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많지만,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의 성실한 독자이다. 현란한 지적 포즈라거나 정치철학적 유행이라는 평은 이상하게도 귀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나는 그의 신간들을 손 닿는 대로 읽어왔으며, 앞으로도 이 논쟁적 독서를 포기하지 않을 것 같다. 그저 상상일 뿐이지만, 그의 급진적 사유가 ‘현실적으로’ 변한다면 아마도 나는 적지 않은 실망감을 느낄 듯하다.

맥락이 다르면서도 비슷한 말을 시인 황병승에 대해서도 할 수 있다. 그의 시가 보여주는 세계에 대부분 깊은 이질감을 느끼지만,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의 성실한 독자이다. 난해한 개인방언이라거나 시적 유행에 불과하다는 평은 이상하게도 귀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나는 그의 시들을 손에 닿는 대로 읽어왔으며, 앞으로도 어둡고 매혹적인 이 시-드라마에 이끌릴 것 같다. 그저 상상일 뿐이지만, 황병승이 ‘성숙한’ 시를 쓴다면 아마도 나는 적지 않은 실망감을 느낄 듯하다.

드물지만, 그런 힘센 텍스트들이 있다. 모든 면에서 나와 다른데, 다르기 때문에, 읽지 않을 수 없는 책들이. 그런 책들은 정보량이 많다거나, 신선한 관점을 보여준다거나, 공감을 자아낸다거나, 그런 식으로 설명할 수가 없다. 단지 ‘격렬한’ 독서만이 가능할 뿐이다. 그런 책들을 좋아한다. 그 책들과 나 사이의 거리를 좋아한다. 그 거리가 나를 깊은 곳에서 움직이고 꿈틀거리게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것은 그런 종류의 움직임과 꿈틀거림이다.

황병승의 세번째 시집 『육체쇼와 전집』(문학과지성사 2013)이 나온 것은 얼마 전이다. 누구나 인정하듯이, 『여장남자 시코쿠』(랜덤하우스코리아 2005)와 『트랙과 들판의 별』(문학과지성사 2007)을 통해 그는 2000년대 이후의 시사(詩史)가 지울 수 없는 이름이 되었다. 시인 황병승을 둘러싼 풍문은 다양하고 풍부하지만, 실제로 내가 그에 대해 아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인터뷰 직전에야 깨달았다. 술 취한 새벽에 몇번 그와 통화한 적이 있지만, 시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거의 없었다.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인터뷰에서 던질 몇개의 질문을 준비했는데, 그 가운데 일부는 사사로운 호기심에 가까운 것이기도 했다.

 

 

더 잘 읽히는 책, 그러나 더 아픈 책

 

이장욱 연락이 안돼서 인터뷰가 무산될 뻔했는데, 어떻게 지내시는지 궁금해요.

 

황병승 몸이 안 좋아서 시집이 나오고 한동안 병원에 있었어요. 요즘은 산문집 준비하고 있고요. 제가 다양한 형식의 짧은 글을 쓰고 성기완(成耆完) 형이 그림을 그리고. 올가을쯤 출간 예정이었는데, 원고가 늦어져서 좀 미뤄질 것 같네요.

 

이장욱 건강이 안 좋으셨군요. 지금은 어떠신지…… 술도 줄이셨겠어요.

 

황병승 건강과 무관한 시간을 보내왔고 여전히 저질체력이에요.(웃음) 전보다 술 마시는 횟수도 주량도 줄었어요. 시를 쓰기 시작하면서 폭음하는 습관이 생겼죠. 시가 잘 써지면 잘 써지는 대로 마시고, 안 써지면 안 써지는 대로, 글을 쓰고 나서의 과열된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마시고.

 

이장욱 쓸 때도 드시나봐요.

 

황병승 술이 때때로 시적 영감을 줄 때도 있지만, 시를 써나갈 때는 거의 마시지 않아요. 술이 들어가면 집중된 생각들이 흩어져버려서.

 

이장욱 대학 시절이나 습작기 때 얘기를 듣고 싶어요.

 

황병승 시 스터디를 만들어서 열명 남짓 되는 친구들과 어울려 다녔어요. 다작을 하던 시기였고, 시 묶음을 들고 시도 때도 없이 선생님들을 찾아가 피곤하게 만들었죠. 그때 같이 공부했던 동기들 중에 곽은영 시인을 비롯해 등단한 친구들도 몇몇 있고요.

 

이장욱 이번 시집에도 대학 시절과 관련된 시들이 있더군요.

 

황병승 대부분의 시들이 그렇지만, 만들어낸 이야기예요. 아주 예전에 작은 잡지사에서 자전에세이를 청탁받고 불행한 가족사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는데, 물론 픽션이었죠. 그걸 읽은 몇몇 사람들이 술자리에서 위로를 해주더라고요. 사실이 아니라고 얘기했지만 마치 다 알고 있다는 표정으로.(웃음)

 

이장욱 2005년에 첫 시집이 나왔고, 2007년에 두번째 시집, 그리고 6년 만에 세번째 시집이 나왔습니다. 시집 낼 때마다 느낌이 많이 다를 텐데, 이번에는 어떠셨나요?

 

황병승 첫 시집은 에너지를 모두 쏟아부은 시집이어서 책이 나왔을 때 미련도 아쉬움도 없었어요. 두번째 시집은 첫 시집에 무수히 등장하는 개인적인 상징들과 그것들을 연결하기 위한 시적 장치들을 덜어내고 즐기면서 썼던 시들이 대부분이에요. 그래서 책이 나왔을 때 시가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나름대로 만족스러웠던 시집이고요. 그에 비해 세번째 시집은 출간됐다는 게 신기할 정도예요. 시집을 준비하는 동안 개인적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고, 힘들게 썼던 시들이 대부분이어서, 표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무거워지는 시집이에요. 이전 시집들과 차이가 있다면, 시점이 3인칭에서 1인칭 화자로 바뀌었다는 점을 들 수 있겠네요. 그동안 3인칭 화자로만 쓰는 데 싫증이 나기도 했고, 좀더 내밀한 자기고백이 하고 싶기도 했어요. 결과적으로 내밀함의 정도에서 차이가 크게 느껴지진 않지만.

 

이장욱 고백적인 시점과도 관련이 있을 텐데, 한편으로는 이번 시집이 황병승의 과거 두권의 시집보다는 상대적으로 편하게 읽힌다, 말 그대로의 의미에서 퀴어적인(‘이상한’) 요소가 줄었다, 과거에 비해서 많이 부드러워졌다는 평을 하는 분들도 있어요.

 

황병승 첫번째, 두번째 시집을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변화한 결과이고, 퀴어적인 요소를 포함해 자주 사용하던 소재들로부터 벗어나려고 의도하기도 했어요. 일상적인 이야기들이 많아서 편하게 읽히고 부드러워졌다는 말에 어느정도 동감합니다.

 

어둠에서 어둠으로, 불안에서 불안으로

 

첫 시집 이후의 변화를 설명할 때 그의 어조는 담담하면서 명료했다. 자신의 시적 변화를 예민하게 감지하고 있는 시인 특유의 표정이었다. 세번째 시집에 대해 그는 자신이 보기에도 시가 부드러워졌다고 말했다. 확실히 그런 것 같다. 소재 차원에서 ‘퀴어적’ 요소가 줄었을 뿐 아니라, 개인상징이나 낯선 조어, 기이한 고유명사가 줄어든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하지만 잘 읽힌다고 해서 읽기에 더 편해진 것은 아니다. 표면적으로 낯설고 이상한 요소는 줄었지만, 독자들을 힘겹고 불편하게 하는 힘은 여전하거나 오히려 강해졌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이 이번 시집의 깊은 곳에 배어 있는 지극한 절망과 비관, 또는 어둠의 힘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이장욱 하지만 어떻게 보면 예전보다 더 우울한 분위기이고, 비관적인 느낌도 강해진 듯해요. 독자들도 거기에 감염되고요.

 

황병승 시와 생활에 대한 불안과 고민이 이번 시집의 주를 이루고 있어요. 시집에 들어갈 시를 쓰는 동안의 어둡고 우울한 감정들, 그 면면을 들여다보고 좀더 밀착해서 써나가고 싶었죠.

 

이장욱 시집에 보면 「Cul de Sac(변역하면 ‘막다른 골목’), 「목마른말로(末路)」 같은 제목도 있고, 「보람 없는 날들」이라는 시에 보면 이런 구절도 있어요. “저자라는 자식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말하지//어이 이봐, 왜 그러고 있어, 내 글이 그렇게 감동적인가. 세상이 잠깐 다르게 보이겠지, 하지만 이봐, 잠깐뿐이라고, 아마도 너는 죽을 때까지 텅 빈 페이지들을 넘겨야 할 거다” 이런 구절들을 읽고 있으면 독자로서 마음이 어둡게 가라앉더군요.

 

황병승 시도 생활도 ‘제로’라는 생각 속에서 그동안 제가 읽고 보고 들었던 책과 영화와 음악에 대해, 그동안 써왔던 시와 생활에 대해 회의가 들었고, 그 정서들이 이번 시집에 고스란히 담겨 있어요. 황현산(黃鉉産) 선생님이 해설에서 실패라는 말씀을 하셨듯이, 희망 없는 시간의 연속이었죠.

 

이장욱 말씀을 들으니 『육체쇼와 전집』이라는 제목 얘기를 해봐야 할 듯해요. 제가 얼핏 느끼기에 ‘전집’(시 속에서는 ‘전집이 없습니다’라고 나오지만)은 황병승의 모든 것, 글과 시와 삶을 포함하는 것이 아닐까 싶은데, ‘육체쇼’가 흥미로워요.

 

황병승 자신의 무기력하고 병든 육체를 마치 타인의 것처럼 바라보는 기분이었어요. 어린 시절에 대해, 우정과 배신에 대해, 기타 등등에 대해 끊임없이 중얼거리는 화자를 통해 당시의 나를 사로잡고 있던 감정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 싶었어요.

 

육체쇼와 전집

 

黃炳承 1970년 서울 출생. 2003년 『파라 21』로 등단. 시집 『여장남자 시코쿠』 『트랙과 들판의 별』 『육체쇼와 전집』 이 있음.

黃炳承 1970년 서울 출생. 2003년 『파라21』로 등단. 시집 『여장남자 시코쿠』 『트랙과 들판의 별』 『육체쇼와 전집』 이 있음.

60년대에 김수영(金洙映)이 ‘온몸’이라고 말했을 때, 그 ‘온몸’은 머리(이성)도 가슴(열정)도 아니었다. 그것은 ‘몸’에 육화된 모든 것, 의식과 무의식, 사유와 감각, 내용과 형식의 통일체였다. 황병승의 ‘육체’는 비슷하면서도 다르게 느껴진다. 이상하게도 내게 이 ‘육체’는 이성이나 열정은 물론 의식이나 무의식 같은 차원으로도 잘 수렴되지 않는다. 그것은 감정의 신경관들로 포화된 육체 같아서, 마치 ‘인체의 신비전()’에서 볼 수 있는 그 붉고 적나라한 육체를 떠오르게 만든다. 정신보다 먼저 움직이는 물질로서의 몸, 인간의 감정이 닿을 수 있는 어떤 끝을 향하고 있는 몸 자체 말이다. 그 몸은 필경 슬픈 몸이다. 게다가 여기에는 ‘쇼’라는 단어가 덧붙어 있지 않은가. 나는 이 단어에서 기원을 알 수 없는 쓸쓸함을 느꼈다.

이 지점에서 이 ‘육체쇼’가 보여주는 또다른 얼굴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위악’이다. “태어나는 것처럼 나쁜 짓은 없다 친밀감 그것은 변장한 악에 불과하다 나는 아가들을 악질이라 부른다”(「회전목마가 돌아간다 Sick Fuck Sick Fuck」, 『트랙과 들판의 별』) 같은 구절이 대변하는 정서는 이번 시집에서도 「오징어 자수」 등 여러편에서 볼 수 있다. 그는 처음부터 쓸쓸한 악동의 기질을 타고난 시인이었으니까.

 

이장욱 황병승 시에는 특유의 위악적 정서가 있잖아요. 시적 기원 같은 게 있을 것 같은데요. 어떻게 생각하면 그냥 삶 자체에서 비롯했을 것 같기도 하고, 황병승이라는 시인이 세계를 대하는 자세인 것도 같고.

 

황병승 자유롭게 살고 싶었고, 제도적인 것들, 평범하고 안정적인 삶에 대한 거부감도 있었어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여러 직장을 전전했지만, 사회에 편입하는 일이 쉽지 않았어요. 한때는 사회부적응자, 의지박약이 아닐까,라는 강박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결국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내가 어떤 성향, 어떤 기질의 인간인지를 알아가는 과정이었던 셈이죠.

 

李章旭 1968년 서울 출생. 199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내 잠 속의 모래산』 『정오의 희망곡』 『생년월일』, 장 편소설 『칼로의 유쾌한 악마들』, 소설집 『고백의 제왕』 등이 있음.

李章旭 1968년 서울 출생. 199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내 잠 속의 모래산』 『정오의 희망곡』 『생년월일』, 장편소설 『칼로의 유쾌한 악마들』, 소설집 『고백의 제왕』 등이 있음.

이장욱 시에 나오는 주변부적인 인물이나 화자들도 세상에 대해 적대적이잖아요. 이 인물들은 “식품점의 계산원이었고/카센터의 심부름꾼이었으며/접착제를 마시다 쫓겨난 구두 공장의 어린 공원”(「신scene과 함께 여기까지 왔다」)이에요. 하층계급에 속해 있으면서 스스로 괴물이 되어가는 인물들이랄까요.

 

황병승 주변부적인 삶을 강요하고 억압하는 사회구조에 대한 반항의 한 방식이겠죠. 강요와 억압의 강도가 세질수록, 공포와 불안이 극에 달할수록, 시의 화자들은 과도한 에너지를 분출하면서 괴물이 되는 거죠. 그렇게 돌파를 시도하거나, 자폭하거나, 새로운 반항의 방식들을 만들어내요. 조용히 순응하며 살아가는 인물은 제 내면에 없어요. 이런 생각들이 유년기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고, 혹은 제가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 속에서 형성된 것일 수도 있고, 다분히 기질적인 것일 수도 있겠죠.

 

이장욱 기질이라는 표현이 인상적인데, 그런 시들 속에 ‘따뜻한’ 느낌의 시도 더러 있었어요. 예컨대 「소행성을 지나는 늙은 선로공」 같은 짧은 시도 그랬고, 「쥐가 있던 피크닉 자리」에서도 “힘내, 사랑하니까//꽃 덤불이 그려진 빨간 카드에 처음으로 한 줄을 적었다” 같은 구절이 있는데, 이 구절들은 아이러니적으로 읽고 싶지 않았어요. 그냥 “힘내, 사랑하니까”라는 단순하고 따뜻한 말을 들은 느낌이랄까.

 

황병승 쉬어가는 느낌으로 배치한 시들이에요. 오래전에 썼던 시들이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괴물이면 얼마나 피곤하겠어요, 읽는 사람도 그렇고.(웃음) 어둡고 무겁고 기괴한 감정들의 뒤죽박죽에서 벗어나 썼던 시들이죠. 「소행성을 지나는 늙은 선로공」은 학교 다닐 때 썼던 시이고, 「쥐가 있던 피크닉 자리」도 두번째 시집이 나올 때쯤 썼던 시에요. 그러고 보니 최근에 썼던 시들 중엔 따뜻한 시가 없네요.

 

따뜻한 위악, 뜨거운 윤리

 

많은 경우 시인들은 적의와 냉소, 절망 등의 부정적 언어에서 포용과 조화, 따뜻함 등 포용의 언어로 이행한다. 시인 황병승은 거꾸로 가고 있는 것일까? 따뜻한 감성에서 멀어져 더 위악적이며 더 어두운 세계로 나아가려는 것일까?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앞서 말했듯 그는 첫 시집에서부터 특유의 위악적이며 파괴적인 정서를 통해 독자들에게 기이한 열기를 전해왔다. 그것을 위태로운 열정, 뜨거운 불안이라고 말해도 좋겠지만, 내게는 좀 다른 측면이 느껴지기도 했다. 파괴적이고 폭력적이며 위악적인데도, 이것은 깊은 곳에서 따뜻하고 심지어 ‘윤리적’이다……라는 느낌.

‘윤리’라니. 이제는 거의 상투어구가 된 이 어휘를 쓸 때, 나는 머뭇거린다. 하지만 황병승의 인물들에 대해 말할 때 이 어휘는 특별한 각도를 지니게 되는 것 같다. 시인에겐 자연스러운 일이었겠지만, 그의 인물들은 ‘선’의 자리에서 말하려 하지 않는다. 차라리 그는 자신의 인물들을 ‘악’의 자리에 버려두는 쪽을 택한다. 그리고 끝까지 밀어붙인다. 그들은 마치 사변이 거세된 도스또옙스끼의 주인공들처럼 위악적 광기를 따라 행동한다. 그것이 추하고 억압적인 세계와 그 안에 포함된 자기 자신을 대하는 유일하고 불가피한 ‘명령’이라도 되는 듯이 말이다. 그들은 이 세계에 대한 감출 수 없는 적의나 폭력적인 사랑에, 때로는 위악적 절망이거나 차가운 무심의 언어에 스스로를 내맡긴다. 그것이 ‘올바른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단지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라는 듯이. 어쩌면 이것을 ‘심층의 윤리’에 근접하는 황병승의 방식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장욱 이미 많이 나온 얘기지만, 병승형의 시들은 ‘영원한 소년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듯해요. 사회의 권력체계나 소위 ‘성숙’에서 스스로 배제된 존재들이라는 점에서, 미성년이 아닌 ‘비()성년’이라는 표현에 가장 적합한 시가 아닐까 해요. 그런 면에서 세대라든가 시간, 세월 같은 단어를 들으면 어떤 느낌이세요?

 

황병승 사실 세대에서도 벗어나 있는 느낌이에요. 우리 세대의 특징을 규정지을 수는 있겠지만, 개인차가 크겠고. 시간, 세월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생각이에요. 사회의 중심권력에 대한 생각도 크게 변하지 않았고. 성숙에 대한 관점의 차이는 있겠지만, 일반적인 관점에서의 성숙과는 관계없는 화자들이고. 각자의 공동체 혹은 각자의 국가 안에서 시간이 흐르고 늙어가고 있는 느낌이에요.

 

이장욱 「모터와 사이클」을 보면 “우리는 어느덧 백발의 소년들”이라는 시구도 있어요.

 

황병승 시인으로서의 삶에 대한 통찰과 생활인으로서의 통찰은 다르고, 백발이 될 때까지 제로의 생활 속에서 소년 혹은 비성년으로 늙어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쓰여진 구절이에요.

 

이장욱 좀 가벼운 질문인데, 이번 시집에서 ‘시 쓰기에 대한 시’랄까 그런 게 예전보다 좀 늘었다는 느낌이 있는데, 시 쓰는 습관이 궁금했어요. 보통 언제 쓰고 어떤 방식으로 작업하시는지?

 

황병승 시간을 정해두고 쓰는 건 아니고요. 주로 영화나 음악이나 미술작품을 보고 들으면서 영화적인, 음악적인, 미술적인 구성과 요소들을 어떻게 시에 가져올 수 있을까를 생각해요. 시를 습작하던 시기에는 미술이론서를 주로 읽으면서 자극을 많이 받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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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욱 미술이론서라니 좀 뜻밖인데……

 

황병승 시가 어느정도 완성도를 갖춰가던 시기에 스타일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그때 우연히 제 손에 들어온 게 미술에 관한 책들이었고 그걸 읽으면서 어떻게 스타일을 만들어가야 할지 조금씩 갈피를 잡기 시작했죠. 특히 마그리뜨(R. Magritte)에 관한 책들이 처음의 시 스타일을 만드는 데 도움이 많이 됐어요.

 

이장욱 미술도 미술이지만, 언더그라운드 음악이라든가 마니아 취향의 영화 등도 시에 등장하는데, 병승형 시에 가장 가까운 장르를 꼽으라면 무엇일까요?

 

황병승 특정한 한 장르를 꼽을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장시들이 많고, 장시들 안에 여러 장르의 작품들이 가진 특징적인 요소들을 담고 싶었고, 담으려고 노력했어요. 특정 장르보다는 영화든 음악이든 자본으로부터 독립적이고 자유롭고 독창적인 작품들에 끌려요.

 

장르, 미술 그리고 연극성

 

다른 장르 이야기를 하면서 그는 몇권의 미술서들에 대해 말했다. 그의 시가 얼터너티브 음악에 상대적으로 가깝다고 생각해온 내게는 다소 뜻밖이었지만, 그의 말을 들으면서 고개가 끄덕여졌다. 사실 20세기 미술은 다른 어떤 분야보다 역동적이었다. 다다에서 그래피티와 플럭서스는 물론 행위, 설치, 개념미술에 이르기까지, 미술은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지우면서 나아갔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20세기 이후의 미술은 너무 빨리 자신의 끝에 도달한 것처럼 보일 정도다.

오늘의 시가 적극적으로 교섭하고 있는 또다른 이질적 분야는 서사성과 연극성이다. 드라마적 요소들을 끌어들이고 화자를 ‘캐릭터’로 대체하는 장시들은 최근 들어 눈에 띄게 늘어가고 있다. 황병승의 시집이 그 촉매들 가운데 하나임은 물론이다. 시를 쓰는 과정에 대한 답변에서, 그는 시를 수정할 때 대사를 발성하고 직접 연기한다고 말했다. 이건 그의 시가 지닌 비밀을 이해하는 키워드 중 하나일 것 같다.

 

이장욱 시를 쓰고 나서 수정작업은 많이 하시는 편인가요?

 

황병승 시간을 들여 수정을 하게 되는 시들도 있고 그렇지 않은 시들도 있어요. 주로 발성으로, 읽어나가면서 퇴고를 하는 편이에요. 등장인물과 대사가 자주 나오니까. 그 인물들의 감정을 발성을 통해 직접 연기하죠.

 

이장욱 혼자 대사를 치는 황병승은 상상해보지 못했는데 흥미롭네요. 시를 쓸 때 출발점도 그것과 관련이 있겠어요. 서사적인 구성의 시들이 많은데, 물론 시마다 다르겠지만, 대개 이야기나 캐릭터, 연극성에서 시작되나요, 아니면 어떤 구절로부터 출발하나요, 아니면 분위기라든가……

 

황병승 분위기나 이미지, 구절에서 시작할 때도 있고, 대개는 아웃라인을 잡고 시작하는 편이에요. 등장인물을 배치하고 대사를 집어넣고. 장시를 써내려가려면 중간중간 시를 다채롭게 만들어줄 수 있는 요소들도 필요하고. 연극적인 대사나 고다르(J. Godard)의 점프컷처럼 돌발적인 이미지 혹은 이야기를 배치한다거나 하는.

 

이장욱 인물들이 참 다양하잖아요. 웨이트리스부터 살인자, 심지어 ‘황소’에 이르기까지, 그런 캐릭터들이 황병승이라는 커다란 서정적 파토스 안으로 들어와 격렬하게 분화되는 느낌이에요.

 

황병승 내면의 여러 자아들일 텐데, 그들은 각자의 목소리의 톤이나 감정을 지니고 있죠. 그들이 각자의 역할에 충실할 수 있도록 그들을 연기하다보면, 그들 스스로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그들 스스로 자기 목소리의 주인이 되었을 때, 나는 사라지고 인물은 완성되죠.

 

이장욱 역시 캐릭터들의 고유성이 중요하군요. 첫 시집부터 황병승 시의 특징 중 하나가 특이한 이름들이잖아요. 상상하기 어려운 인물명, 지명, 작품명이 나와요. 실존하는 것도 있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도 있고요.

 

황병승 기본적으로 인용하는 걸 싫어해요. 문장이나 대사나 고유명사 등등, 만들어 쓰는 걸 좋아하죠. 등장인물의 이름이나 없는 책의 제목, 없는 저자, 없는 식물의 이름을 만들고 그것이 정말 있는 것처럼 정황을 구성해나갈 때 나름대로 재미를 느껴요.

 

이장욱 저한테 ‘니노셋게르미타바샤 제르니고코티카’(『여장남자 시코쿠』)가 누구냐고 물어본 독자도 있었어요.(웃음) 이건 황병승의 창안물이니까 시의 텍스트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 정도의 궁색한 답변밖에 못하겠더라고요. 이번 시집에 나오는 “좀길앞잡이”(「병 속의 좀길앞잡이」)도 만들어낸 곤충인 줄 알았어요.

 

황병승 그건 진짜 있어요.(웃음) 아베 코오보오(安部公房)의 『모래의 여자』를 읽다가 이름이 하도 특이해서 가져온 거죠. 첫 시집을 준비할 때 등장인물들의 이름 짓는 재미에 빠져있었어요. ‘니노셋게르미타바샤 제르니고코티카’ 같은 경우도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이름을 지어주자는 생각에서 나온 이름이고. 물론 그렇지 않은 이름들도 있지만.

 

이장욱 그런 캐릭터들을 등장시켰을 때, 아까 점프컷을 말씀하시기도 했는데, 황병승 시의 서사적 특성과 연결할 수 있을 듯해요. 일반적인 내러티브가 기승전결의 인과적 연속성에 따른다면 병승형 시의 서사성은 우선 단절적이잖아요.

 

황병승 전형적인 구성의 영화나 음악을 싫어해요. 파편적이고 의외적인 구성으로 전개되는 작품들을 좋아하고, 시도 그렇게 쓰고 싶었어요. 중간중간 노래 가사나 돌발적인 이미지, 대사가 기승전결의 흐름을 끊어놓는. 일반적인 서사의 흐름에서 벗어나서 시 안에 담을 수 있는 것들을 최대한 담아내려고 했죠.

 

이장욱 소설 쪽에서는 누구를 즐겨 읽으셨어요? 혹시 써보신 적은?

 

황병승 처음부터 시를 쓰지는 않았어요. 소설에 더 관심이 많았고, 한동안 소설 습작을 하던 시기가 있었죠. 그때부터 소설을 즐겨 읽었어요. 좋아하는 작가가 따로 있는 건 아니고. 카프카는 카프카대로의 매력이 있고, 케루악은 케루악대로, 또 끼냐르는 끼냐르대로.

 

이장욱 시적인 매력이 있는 소설들이군요. 이건 쉬울 수도 있고 어려울 수도 있는 질문인데, 황병승에게 독자는 누군가요?

 

황병승 글쎄요, 없는 존재 같기도 하고 유령 같기도 하고. 시를 쓰거나 시집을 묶는 동안에 독자를 염두에 두지는 않으니까요. 그 과정 속에서는 없는 존재와 다름없지만, 책이 나오면 또 스르르 유령처럼 나타나기도 하는.

 

이장욱 독자 중에는 비평가도 포함되잖아요. 황병승이라는 이름은 2000년대 이후 비평의 핵심에 있었다고 할 수 있는데, 평론과 평론가에 대해서는 어떤 느낌이신지.

 

황병승 우리가 동시대 시인들의 시를 읽어나가듯이, 시인의 입장에서 시를 읽는 평론가가 있고, 아닌 쪽도 있죠. 내가 의도한 것 혹은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부분에 대해서도 적확하게 진단해내고 시인에게 시적 자극을 주는 평론들이 있어요. 그런 글들을 읽으면 위안이 되고 힘이 되죠.

 

이장욱 앞으로의 계획은 어떠세요?

 

황병승 우선 산문집 원고를 마무리 지어야 하고…… 그 이후의 계획은 또 그때 가서……

 

타오르는 해바라기 씨앗을 위하여

 

그는 대체로 짧고 간명하게 답했고, 어리숙한 인터뷰어는 다음 질문을 던지기에 바빴다. 인터뷰는 한시간을 넘기지 않았다. 우리는 그게 좋았다. 인터뷰가 끝난 뒤의 술자리에서 나는 그의 근황과 옛이야기들을 단편적으로 얻어들을 수 있었다. 취한 귀로 들은 탓에 옮겨 적기는 어렵지만, 나는 그가 지나온 아련한 유년에 대해서, 남들이 쉽게 상상하기 어려운 물리적 괴로움들에 대해서, 조금씩 떠올리게 될 듯하다. 특히 이번 시집이 나오는 와중에는 술과 우울이 그의 친구였다고 하는데, 이 친구들이 참으로 독하고 질겼던 것 같다. 그의 육체를 훼손할 만큼 말이다. 『육체쇼와 전집』의 뒷표지에는 황병승답게 단 두줄의 짧은 문장이 적혀 있다.

 

“해바라기 꽃잎은 저토록 불타는데/해바라기 씨앗은 타버린 잿빛”

 

가만히 다시 읽어본다. 안타까운 문장이다. 꽃잎을 시로, 씨앗을 시인으로 읽는다면 더욱 그렇다. 나는 그도, 그의 시도 “타버린 잿빛”에 도달하지 않기를 바란다. 속된 말로 ‘벽에 똥칠할 때까지’ 시 쓰기를 바란다. 진심이다. 그래서 뭐할 거냐고? 뭘 할 수 있다 없다 하는 건 아직 삶에 여유가 있는 사람들의 것이다. 언제나 시보다 긴급한 것은 삶 자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