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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이 계절에 주목할 신간들

 

 

강경석 姜敬錫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모든 것의 석양 앞에서: 지금, 한국소설과 ‘현실의 귀환’」 등이 있음. netka@hanmail.net

 

송종원 宋鐘元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사실, 역사, 그리고 시」 「텅 빈 자리의 주위에서」 등이 있음. renton13@hanmail.net

 

조해진 趙海珍

소설가. 소설집 『천사들의 도시』 『목요일에 만나요』와 장편소설 『한없이 멋진 꿈에』 『로기완을 만났다』 『아무도 보지 못한 숲』이 있음. glala95@hanmail.net

 

 

강경석 안녕하세요. 겨울호에서는 초대손님으로 특별히 젊은 여성 소설가 한분을 모셨는데요, 올봄 소설집 『목요일에 만나요』(문학동네 2014)를 출간하신 조해진 작가와 함께 올해의 마지막 좌담 진행하겠습니다. 조선생님은 2004년에 등단해 장편소설 3권, 소설집 2권을 펴냈고 젊은작가상, 신동엽문학상을 수상 바 있습니다. 우선 어려운 걸음 감사드리고요. 그동안 봐오신 ‘문학초점’에 대한 인상기를 포함해서 간단한 인사말씀 부탁드립니다.

 

조해진 올해 개편한 ‘문학초점’에서 딱딱한 형식을 벗어나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듯 작품을 소개해주시니까 잘 읽혔던 것 같아요. 이 자리에 대한 느낌이라면…… 부담스럽다는 것이겠죠.(웃음) 저는 비평과는 상관없는 창작자기 때문에 부담감이 더 큰 것 같습니다. 작품을 평가하는 눈이 아니라 작가, 그리고 독자로서 배우는 입장에서 이번 좌담을 준비했습니다.

 

강경석 감사합니다. 오늘 다룰 작품들은 올 7~10월 출간작 중에서 골라봤습니다. 늘 그렇듯 작품의 성취를 우선적으로 고려하지만, 잡지좌담의 특성상 최근의 경향이나 쟁점을 다양하게 반영하려다보니 미처 다루지 못하는 좋은 작품들이 많이 생깁니다. 고심 끝에 이기호(李起昊) 장편 『차남들의 세계사』(민음사 2014), 천명관(千明官) 소설집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창비 2014), 김솔 소설집 『암스테르담 가라지세일 두번째』(문학과지성사 2014), 신미나(申美奈) 시집 『싱고,라고 불렀다』(창비 2014), 김현(金) 시집 『글로리홀』(문학과지성사 2014), 김행숙(金杏淑) 시집 『에코의 초상』(문학과지성사 2014) 이렇게 여섯권을 선정했습니다. 처음으로 다뤄볼 『차남들의 세계사』는 오늘 다룰 작품들 중에서 유일한 장편인데요. 조선생님께선 어떻게 읽으셨는지요?

  

이기호 장편 『차남들의 세계사』

  

166-차남들의세계사_fmt조해진 『차남들의 세계사』는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자의인 동시에 자의가 아닌 아이러니한 상황에서 떠밀려들어간 어수룩한 인물 나복만의 일대기인데요. 기존의 이기호 소설이 갖고 있는 익살과 유머가 유지되다가 2부에 이르면서는 오히려 비극이 증폭되는 구조였던 것 같아요. 3부는 서사를 정리하는 역할을 하고요. 작가의 직전 소설집 『김 박사는 누구인가?』(문학과지성사 2013)에 수록된 「화라지송침」이나 「밀수록 다시 가까워지는」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는데, 인물의 과거와 맞물려진 역사에 대한 작가의 관심이 최근 높아진 것 같다는 유추도 해볼 수 있었어요. 특이한 것은 서술자의 태도였어요. 절대적인 위치에 있으면서 교훈적이고 유머까지 있는 서술자가 등장하는 게 재미있었어요. 사실 글을 쓰는 사람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위험하고 부담스런 유형의 서술자인데요. 저는 이런 서술자를 내세워 소설을 쓰라고 한다면 못 쓸 것 같아요. 자칫 교훈적이 되거나 너무 뻔한 얘기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기호 소설에서 이런 서술자는 단점이 아니라 장점으로 작용한 것 같아요. 유머러스하고 상황을 재단해서 보여주는 서술자가 소설을 느슨하게 만들 수도 있었을 텐데, 사건이 구조적으로 잘 연결되어서 끝까지 긴장감이 떨어지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강경석 서술자에 대한 말씀이 흥미로운데요, 송종원 형은 어떻게 읽으셨나요?

 

송종원 이기호 특유의 위트과 유머가 잘 살아있는 작품인 것은 확실해요. 하지만 한편으로 다 읽고 난 뒤 허전한 느낌이 없지 않았어요. 매카시즘을 동원한 80년대 공안정권의 어처구니없는 간첩조작 사건에 대한 조롱이라가 부조리한 정황의 한복판에 놓인 한 인물의 수난사에 그치는 게 아니라면 무언가 더 있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국가로부터 배제된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는 나복만과, 자신의 생존을 위해 그의 수난에 동조하거나 또는 그의 수난에 소극적으로 대처함으로써 죄책감을 가진 사람들, 다시 말해 극히 평범하면서도 리얼한 ‘차남들’의 삶을 형상화했다는 의의도 있겠지만, 앞서 말씀하신 대로 서술자의 위상이 꽤나 큰 화법을 채택한 것에 비해 풀어놓은 이야기의 규모는 좀 작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계속 들어요.

 

강경석 두 분 말씀이 상반되면서도 다 일리있는 말씀이네요. ‘차남’은 잘 드러나지 않는 존재잖아요. 그래서 자기만의 이야기를 따로 갖고 겉돌기 마련인데 이런 인물들을 다루면서 서술자의 위치를 멀리 잡으니까 역사나 개인의 삶이 희극적으로 그려지는 거죠. 인생이라는 게 멀리서 보면 다 희극이라고 하잖아요. 다만 이런 서술자의 위치로 인해 얻은 것과 잃은 것이 있을 겁니다. 어수룩한 주인공을 내세웠음에도 이만한 서사를 감당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된 반면 개별사건들에 대한 분석의 밀도는 조금 떨어지게 된 게 아닌가 싶어요. 이야기의 규모가 아쉽다는 지적을 저는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어쨌든 전지적 서술자가 단순한 교훈의 전달자가 되는 것을 저지하면서 끝까지 긴장을 유지한 것은 퍽 인상적이었어요.

 

송종원 작품 중간중간 서사를 이끄는 서술자의 추임새 같은 것이 등장할 때 작가가 꽤 고투하며 이야기를 이끌고 있다는 인상도 들기도 했지만, 동시에 서술자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이야기에 개입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면 색다른 분위기의 많은 화소(話素)들을 적극적으로 작품에 배치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어요. 저는 이 소설이 바탕에 깔아놓은 웃음의 톤이 무너지는 지점들이 좋았거든요. 가령 안기부 요원 정남운이 선배로부터 조언을 듣는 장면이 있잖아요. 간첩 조작사건 속에 활용하기 쉬운 이들로 고아를 지목하면서, 한국전쟁을 통해 고아가 된 이들이야말로 조작사건의 주요인물로 적절하다고 일러주는 부분은 모골이 송연해지더라고요. 80년대의 부조리함에는 더 큰 역사적 틀에서 보자면 분단체제에서 비롯된 맥락이 있다는 것을 짚어주는 화소로서 적절한 기능을 한다고 봤어요.

또 하나 흥미롭기도 하면서 아쉬웠던 부분은 나복만의 아버지 나성국과 관련한 에피소드입니다. 나성국은 월북을 했다가 북의 체제에도 만족을 못하고 다시 우즈베키스탄으로 이주해서 살고 있는 인물이잖아요. 남한에 두고 온 아들의 간첩혐의에 관한 소식을 접하고는 국가의 법과 친족의 도덕 사이의 갈등을 겪을 상황에 놓이는데, 이 인물의 갈등이 너무 쉽게 봉합된 측면이 없지 않습니다.

또한 나성국이 극작가로서 자신이 속한 국가의 이념과 어긋난 작품을 발표하고 곤란에 처한 상황 등도 재미있는 부분이었어요. 나성국의 희곡이 비판받는 지점, 그러니까 ‘세계관도 불분명하고 무사상적인 인물들이 나온다’는 지적은 『차남들의 세계사』의 성격을 연상시키기도 해서 흥미로웠고요.

 

조해진 창작자의 입장에서는 나성국 서사가 작품 속 세계를 확장하고자 하는 작가의 욕망이 반영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었어요. 결국 진정한 낙원은 없다는 것을 새삼 일깨워준 에피소드였던 것 같습니다. 한때는 일본에 유학까지 다녀온 엘리트였고, 맑스주의자이 자유연애를 추구했던 홍세연과의 파란만장한 연애담을 품고 있는 나성국이지만, 이제는 후배 평론가의 눈치를 보는가 하면 연금밖에 믿을 게 없다고 자조하는 모습이 씁쓸했습니다. 홍세연을 좇아 남과 북을 오가다가 결국 우즈베키스탄에까지 흘러들어간 과정이 좀더 세밀하게 서술되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은 저도 느껴요. 하지만 작가는 아마도 나성국의 에피소드를 통해 아버지가 월북했다는 이유로 간첩이 되어가던 나복만의 고난이 얼마나 비합리적이고 부질없었는지를 보여주려 했던 게 아닐까, 결국 나복만에게 초점을 맞추기 위해 이 부분을 일부러 짧게 쓴 게 아닌가, 그런 생각도 듭니다.

 

강경석 저는 사실 좀 뜬금없었어요. 어리숙한 고아 나복만에게 월북한 극작가 아버지를 배치해서 그런 방식으로 연결하는 것이 썩 자연스럽게 와 닿는 느낌은 아니었거든요. 나복만을 둘러싼 주변 인물들의 관계가 옥신각신 이어진 데에 비해서 실감이 덜한 느낌이었어요. 월북했다가 우즈베키스탄으로 넘어간 아버지의 여정이나 그가 거기서 살고 있는 삶의 모습이 너무 평면적이지 않나 싶었습니다. 남한사회를 서술할 때는 이념이나 거대서사를 조롱하고 인간들의 소박한 욕망들이 어우러지는 이야기를 쓰면서, 왜 그쪽으로 넘어가면 갑자기 모든 걸 이데올로기 문제로 갈음하나 하는 생각도 들고요.

 

송종원 저는 오히려 80년대적 상황이 더 리얼하게 드러나려면 나성국의 서사에서 이념적인 고민의 요소가 더 심각하게 처리됐어야 하지 않았나 싶어요. 현재적 시점의 서술자가 그 부분을 너무 쉽게 처리한 채 유머러스한 분위기로 마무리 짓더라고요. 자식이 남에서 간첩혐의로 곤혹을 치르고 있는 상황에서 자신이 월북하기 전에 아이를 만든 일이 있었는지, 또 그 아이의 현재 상황이 어떨까를 고민하다 이내 ‘에이, 지금 내게 중요한 건 연금인데, 연금밖에 없는데’ 하고 고민을 마무리하는 부분은 좀 아쉬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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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송종원, 조해진, 강경석 © 송곳

 

조해진 작품 전체에 단순히 유머만 있는 건 아니에요. 나복만이 자기 발로 경찰서에 찾아가는 장면이나 좌회전을 하다가 낸 작은 접촉사고를 너무나 큰 죄로 받아들이는 모습, 문맹을 마치 원죄처럼 여기면서 필기시험 부정합격이 밝혀지는 것을 필사적으로 은폐하는 대목 등엔 유머와 함께 비극적인 요소도 내재되어 있습니다. 사고를 죄로 받아들이고 그 죄 때문에 안절부절못하는 인물은 이기호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듯한데, 나복만이 엄혹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문맹임을 밝히지 못하는 것도 그것이 수치가 아니라 원죄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김순희가 과도하게 종교에 집착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신념 혹은 반성 없는 도덕주의에 대한 저항이랄까요. 이런 점에서 베른하르트 슐링크(Bernhard Schlink)의 『책 읽어주는 남자』가 연상되기도 합니다. 『책 읽어주는 남자』에서 주인공 한나가 문맹을 감추기 위해 오해와 형벌을 택하듯 나복만 역시 자술서를 쓸 수 없는 사정을 숨긴 채 점점 더 가혹해지는 고문을 견디죠. 차이가 있다면 한나는 문맹에서 벗어나면서 죽음에 가까워졌다면, 나복만은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문맹을 밝힌 뒤 모든 상황을 뒤집으며 자유의 몸이 된다는 것이겠죠.

 

송종원 나복만 자신이 문맹인 상황을 원죄처럼 받아들인다는 것은 과장된 해석이 아닐까요? 저는 나복만이 고문을 당하는 과정 속에서도 자신이 문맹이라는 것을 끝까지 밝히지 못하는 서사에 사실 납득되지 않는 면이 있거든요. 나복만 자신의 문맹은, 그 자체로 풍부한 맥락이 있다기보다는, 문자를 알기에 그것을 이용해 기억을 조작하고 진실을 은폐하는 사람들을, 그러니까 문자가 곧 권력이라는 것을 부각시키는 데 그친 게 아닐까 싶어요. 구성상 또 하나 아쉬웠던 점은 결말이었어요. 나복만의 공포/분노의 감정은 모두 거세된 채로 그가 자신을 수난에 빠뜨렸던 인물과 무덤덤하게 마주치는 장면이나, 몽타주를 그리던 경험의 연장선상에서 초상화를 그리며 살아간다는 설정은 다소 작위적인데다가, 유머를 포기하지 않는 작가의 고집이 만들어낸 결과로 보여요.

 

조해진 결말에서 나복만이 공포를 느낄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저는 나복만이 고문을 통해서 마치 『데미안』의 한 대목처럼 자기 세계를 깨트리고 원죄의식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원주 안가에서 나오면서 사고를 칠 수 있었고, 결말에서 최형사와도 공포 없이 대면할 수 있었던 거죠. 물론 이런 결말이 어떤 입장에선 뻔하게 읽혔을 수도 있지만, 저는 나복만이 패배도 승리도 아닌 절묘한 위치를 선택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생각했어요.

 

강경석 송형의 지적도 일리는 있지만 저는 조해진 작가의 입장에 더 가깝네요. 결말은 유머라기보다는 아이러니에 가까운 방식인데, 저는 오히려 벌려놓은 이야기들을 지혜롭게 잘 정리한 게 아닌가 싶었어요. 나복만이 변모를 겪었는지 아닌지 명확히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소설을 매듭지은 거죠. 교통사고 이후 마지막에 최형사에게 발견되기까지 나복만이 어떤 의식적인 변모를 겪고 거듭나게 되었는지에 대해선 정보가 거의 제공되어 있지 않거든요. 그 부분은 독자들의 상상에 맡겨둔 것인데, 그 때문에 이 소설이 펼쳐놓은 역사적 규모에 비해 결말이 단편이나 중편처럼 지나치게 암시적으로 마무리된 것은 아닌지 문제를 제기할 순 있겠죠. 처음부터 유머러스한 톤이 잘 유지되고 있는 게 오히려 장편에선 좀 밋밋하단 느낌을 주는 것 같고요. 어쨌든 이 인물은 승리와 패배를 갈라서 볼 수 없는 상태에 놓인 듯하고 나머진 독자들한테 현재적 과제로 주어져 있는 것 같습니다. 이쯤에서 천명관의 새 소설집으로 넘어가보기로 하죠.

  

천명관 소설집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

 

166-칠면조와달리는_fmt송종원 인물들이 계속해서 흡연을 하고 있어서 그런 걸까요. 천명관의 소설은 담배를 태우고 싶게 만드는 데가 있어요.(웃음) 대부분의 인물이 어딘가에 취해 있어요. 가령 담배 혹은 술에, 또는 불행 같은 것에 말이죠.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그런 인물들이 또한 어딘가 건강해 보이는 면모가 있다는 거예요. 비루하고 누추한 생을 살면서도 어떡해서든 삶을 지속시키는 국면을 맞는다고 할까요. 최근에는 한국소설에서 주로 내면을 골똘히 들여다보는 가운데 우울에 침잠해 길을 잃는 인물들을 접하다가 천명관 소설의 인물들을 접하니 신선하더라고요.

 

조해진 천명관 작가는 단편보다는 장편이 더 많이 알려진 편이죠. 실제로 장편 수가 더 많기도 하고요. 최근 몇년 사이 연이어 출간된 『고령화 가족』(문학동네 2010)과 『나의 삼촌 브루스 리』(전2권, 예담 2012)도 장편이었는데, 오랜만에 단편집을 읽을 수 있어서 일단 반가웠어요. 이번 단편집에 수록된 작품들은 유난히 나이에 대한 상념이 많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소설에는 어쩔 수 없이 작가의 최근 고민이나 생각의 변화가 담기게 마련인데, 나이듦을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인물들을 보면서 실제 작가도 삶에 대해 이렇게 태도가 바뀐 건 아닐까 상상하면서 읽었습니다.

 

송종원 인물의 개성과 건강함으로 이야기를 시작했지만 이 지점을 작가의 작법상 맥락으로 보자면 힘있는 서사의 구성과 관련 있어요. 인물 안에 이야기가 있다기보다 이야기 안에 인물이 있도록 그려지죠. 천명관 소설에서는 인물이 한 상황이나 정서에 고착돼 있지 않고 변화할 수밖에 없는 계기가 돌발적이면서도 자연스럽게 펼쳐져요. 가령 「파충류의 밤」에서 불면이 지속되면서 반죽음 상태에 있던 주인공이 자살하는 소년을 구해냄으로써 삶의 강렬함을 내뿜는 장면이나, 「핑크」에서 우연한 사건이나 고양이 같은 소소한 장치를 통해 타인의 삶 속에 개입하게 되는 장면 등이 그랬어요. 사건, 또는 이야기의 전환을 만들어내는 데 정말 남다르더라고요. 이야기의 진폭이 남다르다는 것은 또한 소설의 결말을 보면 알 수 있어요. 결말 이후에도 무언가 더 씌어져야 할 것 같은 인상이 자주 남죠. 이 작가가 아직도 더 풀어낼 수 있는 이야기가 남았구나 하는 느낌을 준다는 거예요. 물론 때론 결말이 느닷없이 맺어졌다는 인상을 주는 경우도 있어요. 「동백꽃」 같은 작품이 그렇죠.

 

강경석 저는 「우이동의 봄」이 다른 작품에 비해 훌륭하고 잘 짜인 작품 같아요. 감동적으로 읽기도 했고요. 작가가 나이 어가며 원만해진 것일 수도 있지만, 이 작가에겐 기본적으로 인간 일반에 대한 신뢰가 있습니다. 그게 이 작품에서 아주 아름답게 펼쳐진 것 같아요. 손자가 할아버지의 암 판정 사실을 내내 밝히지 않다가 우이동 벚꽃놀이에서 밝히는 장면이나 보수적이었던 할아버지가 김대중을 찍은 적이 있다고 슬며시 고백하는 장면에서는, 소극적일진 몰라도 장삼이사의 보잘 것 없는 선택들이 세상의 어떤 변화를 만들어낸다는 생각이 넉넉한 실감으로 살아나죠. 삶이 팍팍하더라도 목전의 사태들에 너무 얽매여 일희일비하지 말자는 위로 같기도 해서 좋았습니다.

그에 비해 다른 작품들은 다소 편차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냥 입담에 의지해서 익숙한 이야기들이 반복되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이하 「칠면조」)나 「전원교향곡」의 경우 『차남들의 세계사』와 마찬가지로 하층민의 고달프고 억울한 삶이 특정 대상을 향해 터져나오는 결말인데요. 사실 그 대상들 또한 억압의 본질은 아니었잖아요? 「칠면조」의 최사장이나 「전원교향곡」의 돼지를 처치했다고 억압이 종식되는 것은 아닐 텐데 그 다음 얘기가 너무 허전하다는 느낌이에요.

 

송종원 지적하신 「칠면조」나 「전원교향곡」의 문제, 그중에서도 「칠면조」는 앞서 말씀드린 결론이 덜 마무리된 경우에 해당할 것 같아요. 느닷없는 사태의 전환에 더 써질 수 있는 이야기가 있는데 단편 분량으로 급히 마무리했어요. 반면 아이가 개에게 물어뜯긴 충격적인 사건을 떠올려보면 「전원교향곡」의 결말은 수긍이 가는 편입니다. 인물의 억눌린 심정이 축사에 불을 내는 것으로 이어진 결말이 저는 심리적으로 충분히 납득이 되더라고요. 죄책감이나 외적 억압에 억눌린 인물이 자기를 처벌하는 방식으로 서사를 짤 때, 자기를 파괴하거나 삶 자체를 손쉽게 부정하는 방식의 이야기도 가능할 텐데, 천명관은 거의 본능적으로 자기파괴와 삶의 부정으로부터 늘 한발짝 벗어난 지점에서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 같아요.

 

조해진 확실히 인물들에게 자기파괴적인 욕망은 없는데, 마지막에 가서 독자의 예측과 다른 충동적인 선택을 많이 하는 것 같아요. 아까 강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문제의 본질적인 해결과는 상관없이요. 「칠면조」에서 경구가 빈 트럭을 훔쳐 무작정 남쪽으로 가는 선택을 하는 게 대표적이죠. 보통의 인물들이 크고작은 일탈을 선택했기 때문에 좌절이나 멜랑콜리로부터 벗어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강경석 충동적 결말이 흔한 관념적 좌절이나 멜랑콜리의 포즈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것은 맞지만 그 충동이란 것조차도 합리적으로 설명될 수 있어야 하지 않나 싶어요. 그렇지 못하면 그조차 또 하나의 관념일 테니까요. 그런 면에서 저는 이 작가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삶과 세상에 대한 시선의 깊이가 살아 있는 「우이동의 봄」 쪽에 손을 들어주고 싶어요.

송종원 일전에 천명관 작가를 만나는 자리에서 듣기로는, 독자들이 좋았던 작품을 꼽아주는 것을 보면 두 부류로 나뉜다고 하더라고요. 「우이동의 봄」 파가 있고 「파충류의 밤」 파가 있다고.(웃음) 자전적 체험의 요소가 큰 작품과 문학적 구성의 요소가 큰 작품의 차이일 수도 있을 텐데요. 소설 창작자의 입장에서 조해진 선생님은 어느 쪽이 더 좋으신지 궁금하기도 하네요.

 

조해진 저도 「우이동의 봄」이 참 좋았고, 읽으면서 소설이란 뭘까 다시 생각해보기도 했어요. 「우이동의 봄」처럼 잔잔한 감성을 전하는 소설이 왜 문학적으로는 문제작이 되지 못하는 걸까, 나아가 저 자신 역시 이제껏 왜 그렇게 치밀한 구조와 소설적 의미를 중시했을까, 이런저런 고민을 해봤습니다. 언젠가는 저도 「우이동의 봄」처럼 쓰게 될지, 그때는 좀 다르게 쓸 수 있게 될까 싶었습니다. 물론 시선의 깊이가 전제되어야 잔잔한 감성에 설득력도 가지게 되겠지요.

 

강경석 「파충류의 밤」도 좋은 작품이지만, 작가가 식자층에 속하는 인물을 다룰 땐 어딘지 실감이 느슨하다는 인상이에요. 그에 비해 「우이동의 봄」은 특별한 구성적 의도에 구애됨 없이 가난한 일상의 몇몇 풍경을 오래 들여다보게 만들어줍니다. 잔잔한 소설이라고 말씀하셨는데, 바로 그 느긋한 속도감과 시선의 정지상태가 이 소설의 주제의식을 견인하는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영화로 치면 롱테이크(장면전환 없이 한번에 촬영하는 기법편집자) 촬영 같은 게 아닐까요?

  

김솔 소설집 『암스테르담 가라지세일 두번째』

 

166-암스테르담가라지세일_fmt강경석 김솔 작품집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작가의 첫 소설집이고요. 전체적으로 소설쓰기 자체에 대한 성찰이 두드러집니다. 주석이나 서브텍스트를 다양하게 활용하면서 그런 면이 강화되는 것 같고요. 표제작은 「암스테르담 가라지 세일 두번째」(이하 「암스테르담」)지만 아마 작품세계 전체를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은 「소설 작법」인 것 같습니다. 어느 늙은 장인(匠人)의 일생을 소재로, 한 사람의 작가와 두 사람의 소설가 지망생이 공동창작을 통해 소설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데, 소설의 정체성에 대한 물음이나 소설이 재료로 삼고 있는 현실에 대한 해석 문제를 치밀하게 배합해서 보여주죠. 한편 대부분의 작품이 많은 배경지식을 요하기도 합니다. 「은각사」의 경우 미시마 유끼오(平岡公威)의 『금각사』를 모르면 결정적으로 독서 제약이 있을 것 같더라고요. 다른 작품들도 대체로 그렇습니다.

그런 한편 작품집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는 출구가 보이지 않는 세계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을까 하는 ‘생존’ 문제인 것 같아요. 작가의 등단작인 「내기의 목적」도 글로벌한 환경에서 주인공의 살아남기가 실패로 돌아가는 과정이고, 「소설 작법」도 주인공들이 문학계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이냐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죠. 「은각사」는 고립된 소년·소녀들의 이야기고 「피그말리온 살인사건」은 성형이라는 적나라한 생존의 도구에 대한 얘기예요. 그런데 작품들이 생존의 의미 자체를 탐사하고 있는 것 같진 않아요. 벽처럼 단단한 세계는 이미 불가항력적으로 주어져 있어서 돌파 불가능한 것처럼 형상화되어 있죠. 그래서 소설이 하는 일은 그러한 세계상을 소설의 형식과 스타일로 아주 치밀하게 다양한 버전으로 베낀다고 할까요? 예컨대 「은각사」 같은 경우는 작품의 구성 자체가 떨어지는 벚꽃잎의 형상을 모사한 것 같아요. 형식이나 스타일로 현실세계를 모사하는 것에 이 작가의 특징이 있는 것 같습니다.

 

조해진 작품집을 관통하는 주제가 ‘살아남기’라는 데 공감하고요. 살아남으려는 인물이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기교적으로 세련된 풍자도 있는 것 같아요. 현실과 닮은꼴인 작품 속 세계를 만들었다는 말에 공감하면서도, 결국 그 세계를 통해서 현실이 과연 올바른가 하는 윤리적인 질문을 던지는 듯 보입니다. 「소설 작법」에서 소설쓰기 자체를 보여주며 과연 이 소설쓰기는 그 소설쓰기가 맞는 건가, 이게 정말 소설인가, 여기 나오는 기성작가를 우리는 과연 작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질문들을 유도하잖아요. 개인적으로는 「암스테르담」이 참 재밌었는데요. 한국작가가 한국소설을 이렇게 쓸 수도 있구나 싶어서 창작자로서 약간 충격으로 다가왔어요. 저도 네덜란드 사람이 나오는 소설을 쓴 적이 있지만 그 인물은 한국 출신 입양아였거든요. 한국작가라면 보통 그런 식으로 어떻게든 한국이라는 정체성과 연결고리를 만들어서 쓰는데, 이 작품은 한국과는 전혀 상관이 없고 그게 필요하지도 않은, 그저 세금을 덜 내고 싶어하는 암스테르담의 동거 커플 이야기잖아요. 작가가 살고 있는 세계를 중심으로 영역을 넓혀가려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를 아예 벗어난 창작도 가능하구나 싶어서 상당히 신선했습니다.

 

송종원 읽기가 정말 수월하지가 않더라고요. 왜 그런가 생각해보니 서사의 골격을 이루는 의존화소(依存話素, bound motif)보다 서사의 몸집을 이루는 자유화소(自由話素, free motif)가 압도적이에요. 가령 「소설 작법」 같은 경우를 보면 서사의 골격은 이렇죠. 표절작가로 낙인찍힌 도메크란 인물이 자신의 소설작법 1기 수강생 마사오와 공손승을 데리고서 한때 전태일의 동료였던 한 노인에 관한 이야기를 공동소설로 창작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러한 골격을 바탕으로 그들이 소설을 써나가는 과정에서 봉착하는 문제 또는 마사오와 공손승이 창작한 일부의 이야기를 도메크가 평하는 동안, 작가 자신의 소설에 대한 의문과 생각에 가까워 보이는 여러 질문과 화소 자주 직접적으로, 때론 병치적인 구조적 맥락을 통해 소설의 몸집을 만듭니다.

가령 소설과 현실을 짝퉁 명품과 진짜 명품에 비교하며 소설가는 자신이 쓰는 이야기가 진품이 아니라는 것을 늘 인식해야 한다는 이야기라든지, 모조품을 진품으로 둔갑시키는 자본의 논리가 민주주의를 실천한다는 것을 빌미로 모조품 같은 소설조차 대단한 것으로 치부하는 현실에 대한 비판, 그리고 진품 같은 현실조차 팔릴 만한 모조품으로 생산하는 현장에 대한 비판적 질문까지 정말 흥미롭고 복잡다단한 문제들이 뒤엉켜 있더라고요.

「암스테르담」의 경우 레즈비언 동거 커플이 이별을 완수하기 위해 자신들이 동거기간에 같이 사용했던 물품을 처리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죠. 이별을 하기 위해 연애의 소비비용을 정산해가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겠죠. 그 과정 속에 맞닥뜨리는 세금과 기후의 문제 등은 연애라는 사적이고 낭만적인 관계의 내부에 긴밀히 작동하는 국가제도와 지역성의 문제 또는 확률의 문제까지 지적으로 예리하게 묘파해내는 작품으로 읽었습니다.

 

강경석 그렇게 읽을 수도 있겠지만 저는 이런 상상을 해봤어요. 「암스테르담」이 만약 네덜란드어로 번역되어 네덜란드인에게 읽힌다면 어떨까. 정작 들의 입장에서도 이 소설이 흥미롭게 읽힐까. 제 생각에 그렇지는 못할 것 같아요. 이 작품은 어디까지나 지금까지의 한국소설에 대해 의문을 던지는 한국소설입니다. 하지만 그 질문이란 게 이제 와선 그리 낯설지 않은데다 한편 너무 단순하지 않나 싶은 생각도 드는 거죠. 「소설 작법」에서 민주주의와 중산층을 가짜 명품과 연결시킨 것 같은 작가의 발랄한 통찰이 좀더 확대되었으면 좋았겠다 싶어요. 현실세계 혹은 그에 상응하는 기성의 소설형식을 고정불변의 막다른 벽으로 설정하고 뒤돌아서 지금까지의 소설형식에 대한 회의에 몰두하기보다는 현실의 유동성에 대응하는 소설적 실험의 유동성도 보여줬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아요.

 

조해진 일부러 가독성을 떨어뜨리는 것은 아닌가, 독자가 쉽게 작품 속으로 들어가거나 작품에 공감하는 것을 원치 않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은각사」 같은 경우 역순소설인데, 보통은 역순소설도 내용상 연결이 되긴 하거든요. 그런데 이 소설은 각각의 에피소드가 아무런 연결이 안되어 있어서 가독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죠. 「피그말리온 살인 사건」에서 거의 사용되지 않는 단어들을 일부러 퍼즐처럼 끼워넣고 거기에 각주를 달아놓은 형식도 작가의 그런 의도를 가늠하게 했고요. 어쩌면 작가는 기존의 소설형식이라든지 전형성을 뒤엎고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려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송종원 한국어로 소설을 쓰다보면 자칫 동시대 한국적 문화감각에 동화되어 상황이나 사건을 구성하기 쉬운데 김솔의 소설에는 독특한 반성적 거리감각이 내재되어 있는 듯합니다. 소설에 이국의 역사적 맥락을 활용하는 이유도 저 거리감각을 증폭시키기 위한 장치가 아닐까 생각되고요. 때론 이 거리감각이 효율적인 효과를 거두지 못한 채 과도하게 실험된 측면이 있다는 데는 공감하는 바입니다. 특히 「피그말리온 살인사건」의 경우 생경한 단어를 부러 활용한 형식이 소설집 해설자 김형중(金亨中)의 의미부여만큼인지는 저도 의문입니다.

 

강경석 하지만 첫 소설집이 이만치 뚜렷한 색깔을 지니거나 치밀하기는 역시 쉽지 않을 겁니다. 작가의 이후 작업을 기대해보기로 하고 시 분야로 넘어가겠습니다.

  

신미나 시집 『싱고,라고 불렀다』

  

166-싱고,라고 불렀다_fmt강경석 신미나 시인의 첫 시집인데요. 이 시들에는 일종의 낯익은 듯 새로운 데가 있는 것 같아요. 농촌의 풍부한 체험이 아주 전통적인 서정적 작법을 통해서 드러나고 체험에 튼튼히 기반을 둔, 또래의 시인들에게서 보기 힘든 정서가 보여요. 그런데도 제가 읽기에는 특히, 1부의 몇몇 작품만 봐도 배경이 농촌일 뿐이지 굉장히 세련된 시를 쓰는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어요. 왜 그럴까 생각해보니, 시적 방편으로서 서정적 수사를 활용한다기보다는 몸에서부터 우러나오는 내재화된 서정을 보여주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그래서 오히려 의식적 실험시들에 비해서 촌스럽지 않고 세련됐다는 느낌을 주는 것 같고요.

 

조해진 저도 말씀하신 대로 사유가 아니라 몸으로 체득된 정서 같은 게 느껴졌어요. 사실 신미나의 시는 요즘 젊은 시인들이 잘 쓰지 않는 세계를 담고 있잖아요. ‘여공’ ‘상여’ ‘아궁이’ ‘마을회관’ 이런 소재는 사라져가는 터라 더 애틋한 면이 있는 것 같아요. 애틋하기만 하면 촌스럽거나 구시대적이라는 느낌이 들 수도 있을 텐데 저도 강선생님처럼 오히려 세련된 시라고 생각했어요. 어떤 정서를 만들고 그것을 이미지화해서 현실로 다시 가져와 끝내는 시적 장치가 보이는데, 바로 이런 지점이 세련된 느낌을 주는 근원이 아닌가 싶어요.

 

송종원 표현적인 측면에서 ‘세련됨’이 분명 작동하고 있습니다. 말의 밀당이라고 할까요. 어느 순간에 말을 멈춰버려서 분위기와 여운을 만들어내는 기법이 능숙하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때로 그 멈춤이 시적 상황에 대한 인식조차 멈추는 기능을 하면서 특정 정서에 고착되는 느낌도 없지 않아요.

시집 전체를 통독하고 ‘싱고’라는 말을 들여다보니 두가지 연상이 떠오르더군요. 하나는 근대 초기 모던한 도시로의 탈출을 꿈꾸는 여성화자의 심정을 노래한 ‘신고산 타령’이었고, 또 하나는 ‘신고(辛苦)’라는 단어였습니다. 이 시집에는 말 그대로 여러 종류의 신산한 고생담이 담겨 있어요. 아버지의 고압적인 가부장적 태도 때문에 겪었을 마음고생과 언니와 엄마의 평탄치 않은 삶을 옆에서 지켜보며 가졌던 안쓰러움, 또한 도시를 열망하면서도 거기에 자연스럽게 안착하지 못하여 비롯된 고생담 등등. 그런데 그런 이야기들이 불러일으키는 연민과 슬픔의 정서는 이미 한바탕 우리 문단을 잠식하고 지나간 상투적 정서가 아닐까란 생각도 들어요. 소설로 치면 신경숙(申京淑)의 『외딴방』(문학동네 1995) 같은 작품에서 익히 펼쳐보였던 정서가 아닐까요?

 

강경석 익숙한 정서인 것은 맞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에서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어요. 「싱고」가 이 시집에서 가장 훌륭한 작품이라기보단 시인의 시관(詩觀)을 보여주는 작품인 듯해 계속 언급하게 되는데, 여기서 ‘싱고’가 잃어버린 개를 찾아다니면서 느꼈던 아주 특수한 개인의 체험이나 감정을 부르는 말로 되어 있잖아요. 그 개별적이고 고유한 순간은 어떤 비유적 장치로 대체할 수 없이 일단 가칭으로 ‘싱고’라고 붙일 수밖에 없는 어떤 형태라는 의식이 뚜렷하죠. 그런 점이 새롭다고 할 수 있겠고, 반대로 김소월(金素月), 서정주(徐廷柱) 류의 전통서정을 답습해 긴장이 떨어진 작품들도 심심치 않은 것 같습니다. 「상여꽃점」같이 조로한 톤이 도드라지거나 시조의 리듬을 연상케 하는 작품들이 그런 인상을 줘요.

 

조해진 농촌이 배경일 때는 대부분 화려한 도시에 대한 동경이 나오기 마련인데요. 신미나 시에서의 도시는 대부분이 변두리라는 게 특이했어요. 길음동이라든지 삼전동 가락공판장, 혹은 미아동, 이런 도시 주변부가 주로 호명되고 있죠. 제가 소설을 써서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시집 전체가 소설 같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줄거리가 있는 것 같았죠. 전형적인 지방의 불행한 집이 있어요. 아버지는 손가락이 없는데 매일 술만 마시고, 어머니는 폭행에 노출되어 있고, 언니들은 서울에서 여공으로 일하고요. 한편 ‘나’는 자라서 가까스로 상경하지만 서울 변두리에서 가망 없이 살다가 이상한 남자를 만나서 연애하고 또 속절없이 무너지는, 20~30년 전 이야기 같지만 지금도 분명 계속되고 있는 소설적인 서사가 그려졌습니다.

 

송종원 시집 전체를 소설로 읽으면 이 소설은 도시에 동경을 가진 소녀가 고향에서 자라다 그곳을 떠나는 데서 출발하죠. 「소매치기는 예쁘다」 같은 시에는 도시에 대한 동경이 분명 표현되어 있어요. 상경하고 나서는 조선생님의 말처럼 도시의 주변부를 떠돕니다. 또한 그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연애사는 사랑-상실의 구조를 반복합니다. 이 반복의 구조에서 비롯된 상실감에 고착된 상태가 자기연민에 빠지기 쉬운 경로처럼 보이는 면이 있어요.

 

강경석 시와 소설은 물론 다르지만, 그런 맥락에서 보더라도 통상적인 고향-대도시 서사를 벗어나는 탈주선이 있는 것 같아요. 오히려 자신만의 체험에 고유한 이름을 붙이려는 독자적인 작업을 향해서 나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죠. 뭔가 ‘다른 시’를 쓰기 위해 삶의 구체성을 누락하지 않겠다는 뚝심이랄까요? 새로움에 대한 조급증을 극복한 게 이 시집의 미덕이라고 봐요. 유행에 휘둘림 없이 자신의 진짜 주파수에 언어를 맞추는 거죠. 「싱고」도 그렇지만 「첫사랑」 같은 시는 정말 아름답습니다. 거기 새로움이 있느냐 없느냐보다 우선해야 할 물음은 그것이 고유한가 고유하지 않은가여야 하지 않을까요?

 

조해진 저도 비슷한 생각을 했습니다. 체험으로 얻은 서정에는 근원적으로 한계가 있겠지만, 이 시집에서는 그 한계를 내적으로 뛰어넘으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였어요. 보일 듯 보이지 않게 정서를 표현하는 방식으로요. 그래서 중간에 뚝 끊어버린다든지, 어떤 대상을 다른 것으로 치환해서 표현한다든지 한 점에서 의미가 있는 시집이 아닌가 싶었어요. 정서는 새롭지 않은데 기교는 세련되었다는 점에서 말이죠. 특히 분명한 슬픔을 몽상이나 우주적 상상으로 환원하여 보여주는 「이마」 「받아쓰기」 「산 너머」 「낮잠」 등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송종원 이 시인에게서 특별한 탈주선이 있었다고 가정한다면 “태어나지 않은 아이”라는 제목으로 묶일 수 있는 시편들이에요. 이게 2부의 제목인데, 제가 보기엔 3부의 좋은 시편들 몇몇이 저 제목 아래 정리되어도 좋았을 거 같아요. 가령 「흙잠」이나 「파랑파랑파랑파랑파랑」 같은 시들. 거기에는 잉태되었으나 미처 세상에 나오지 못한 생명을 미세한 감각으로 포착하는 지점들이 있어요. 나를 건드리고 지나간 것들을 몸에 새겨둔 감각이라고도 할 수 있을 텐데, 이 지점에서 산출될 정서는 상실감이나 슬픔으로만 한정지을 수 없을 거예요. 그런데 시인은 그 시에서도 침묵으로 그 정황을 감싸는 듯한 모습을 보이죠. 모던한 도시가 자신에게 가한 폭력이나 무책임한 남성성에 대한 인식적인 저항이 거의 보이지 않는 이 아쉬웠어요.

  

김현 시집 『글로리홀』

 

166-글로리홀_fmt조해진 김현의 『글로리홀』은 말 그대로 낯선 시집이에요. 내용도 주로 퀴어나 SF 같은 소재를 다루고 있고요. 퀴어나 SF가 아주 희소한 소재는 아니지만, 시집 전체가 그런 소재로 관통되는 시집은 없었잖아요. 형식적인 면에서도 각주를 시의 연장으로 확장한 것이나 유명인의 이름을 비틀거나 여러 나라의 인명을 사용한 점이 특이하고, 상당히 산문적이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여러 실험적인 시도가 들어 있는 시집입니다. 무엇보다 퀴어 감성을 이만큼 사실적으로 표현한 작가는 처음이지 않나 싶어요. 「늙은 베이비 호모」를 읽으면서는 마치 저 자신이 운동장을 지켜보고 있는 소년을 사랑하는 또다른 소년이 된 것 같았어요.

퀴어를 다룬 다른 시나 소설은 소재적으로만 접근할 때가 많은데 김현의 시에 나오는 퀴어는 왜 이렇게 사실적이고 절절할까를 생각해보면, 김현은 그저 사랑 자체를 그리기 때문인 것 같아요. 사랑이 와해될 때도 외부적인 압력이 아니라 그 관계 자체의 한계에서 오는 환멸이 그려져요. 틀니를 빼고 사랑을 한다든지 애인의 정액 냄새를 감수한다든지 하는 구절들은 장치나 소재로써 활용된 사랑이 아니라, 사랑 자체에서 오는 쓸쓸함을 담아낸 것 같습니다. 곧이어 다룰 김행숙의 시는 죽음이 전면화되어 있다는 느낌인데 비해, 김현의 시는 죽음이 자주 등장하거나 전면화되진 않지만 밑바닥에 계속 깔려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환멸의 끝에 있는 죽음을 계속해서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요. 영화와 애니메이션, 대중가요가 나오고 대통령을 풍자하기도 하는 경쾌한 면이 분명 있지만 저는 이 세계관이 아주 비관적이라고 느꼈어요. 지구를 향해 오는 행성의 이름이 ‘죽음’이라든지 창밖으로 죽음이 머리에 흰 빛을 이고 오는 풍경을 담은 작품들에서 그런 비관성이 잘 드러나죠.

 

송종원 역시나 퀴어적인 언어가 한국시에 전면적으로 등장했다는 것 자체가 우선 의미있겠죠. 보통 문학이나 시가 육체성에 민감하다고 하지만 한국문학에서는 아직 남성/여성작가의 이분법이 통용되고, 근간에 들어 소설에서 종종 동성애적 정황이 그려지긴 하나 여전히 많은 작품에서 사랑은 이성애적 문법으로 그려지고 있죠. 그런 점에서 보면 이 언어들의 도래가 다소 늦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형식으로 보자면, 다양한 장르를 혼합하는 연출에 능한 시인이 등장했다고 할까요. 소설과 SF, 영화, 포르노그라피의 형식을 차용하면서 쓰인 시들이 흥미로웠어요. 해설자가 요령있게 설명했듯 시인이 단순히 시적 화자와 거리를 두는 차원을 넘어 시인과 완전히 구분되는 캐릭터의 창조자 혹은 연출자로서의 면모를 갖는 경향성이 2000년대 이후에 많이 보이는 듯합니다. 서정시의 문법을 살짝 비틀어 쓴 「목성에서의 9년」은 이 시집에 그려진 사랑의 성격을 다소 쉽게 드러내는 편이에요. 사랑과 혁명을 등치시켜 바라보고 또 그것이 국가 안에 자리를 잡지 못한 채 난민적인 것이 되어버리는 식의 결말은 이 시에 그려진 동성애적 사랑의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죠.

 

강경석 사랑을 혁명과 연결하는 발상은 김수영(金洙暎)으로부터 시작해서 이제는 제법 익숙하고 어느 면 자연스러워진 것도 같아요. 많은 사랑노래들이 사실 혁명가이기도 했고요. 다만 지금이라면 김수영처럼 쓰기보단 김현처럼 말하는 방식이 정말 혁명적인 것일지도 모르죠. 잘 잡힌 웅변이 아니라 말로는 설명할 길 없이 터져나오고야 마는 신음이나 비명 같은 소수자들의 사랑노래라면 그럴 수도 있을 겁니다. 글로리홀 저편의 미지의 대상과 나누는 슬프고 고독한 사랑 말이지요. 하지만 저로서는 읽기가 여간 버거운 게 아니었어요. 「늙은 베이비 호모」나 「고요하고 거룩한 밤 천사들은 무엇을 할까;」 같은 작품들이 참신하면서도 어떤 절실함을 담고 있어서 감동적으로 읽긴 했지만 뒤에 실린 박상수(朴相守)의 해설이 아니었다면 지금도 텍스트 어딘가를 헤매고 있었을 거예요. 저는 이 시집에 등장하는 수많은 하위문화 서브텍스트들을 접하면서 끊임없이 왜냐고 물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러면서 든 생각 한가지는, 어쩌면 이 ‘왜’라는 질문 자체, 인과율적 논리에 집착하는 독법 자체가 방해물이 아닌가 하는 것이었어요. 그게 이성애중심적 논리일 수도 있고요. 이래서야 이런 혼종적이고 수평적인 나열의 리듬 또는 글로리홀 이편과 저편 사이의 소통방식을 온전히 감득하긴 어렵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러고 나니 시가 조금 보이는 것 같기도 했죠.

하지만 그럼에도 과연 이런 급진적인 기획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오히려 흐리는 건 아닌지 하는 의문이 사라지진 않네요. 자상한 해설을 읽고 처음엔 감탄했다가 이내 허망하다는 느낌이 든 것도 그 때문이에요. 암호문은 해독하고 나면 끝이지만 시는 독해 이후가 시작이잖아요? 그 이후가 흐릿해요. 무상하게 흩어지며 감정 없이 바스러져가는 산문적 언어운용이 모종의 상실감이나 절망감을 전해주기도 하지만 정작 할 수 있고 하고 싶은 말은 거꾸로 침묵 속에 갇히는 것만 같았던 거죠.

 

송종원 저는 비명이나 신음소리보다는 아까 조해진 작가께서 이야기하셨던 것처럼 둔탁한 절망감에 가까운 걸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게 사실은 약간 답답하게 보이는 면도 있었어요. 등장하는 캐릭터들이나 그들이 내뱉는 언어는 강한 데 비해 그것을 조율하는 연출자의 태도는 다소 무기력해 보인다고 할까요. 다양한 장르적 요소 이미지 차용하면서 연출자의 실존은 자꾸만 뒤로 밀려난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장르적 요소나 하위문화적 요소가 시인의 육성을 방해하는 면이 있는 건 아닐지…… 또 하나 짚을 것은 성정체성을 찾아가는 서사가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배분받지 못한 존재 내지 공동체 내에 안착하지 못한 타자에 대한 고민과 연대의 감각을 키워간다는 거예요. 이는 서시인 「비인간적인」이란 작품을 보면 잘 드러나요.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는 사람들의 집회현장에서 시민으로서의 정체성과 인간의 말에 깃든 연대의 가능성을 질문하는 방식으로 씌어졌.

 

강경석 아까 나왔던 혁명 얘기랑 비슷한 것 같네요. 그렇게 보니 직접적인 퀴어적 현실, 감수성에 대한 분석이나 해석만을 낳는 결과를 피하기 위해 우회적 장치를 많이 쓴 것은 아닌가 싶네요.

 

송종원 SF를 차용하는 형식 때문인지 태양계처럼 우주적 차원의 요소를 활용한 시편들이 많이 작용하죠. 구형(球形)인 지구와 원형의 글로리홀의 형태적 유사성 때문인지 지구란 단어도 자주 사용되고요. 그런데 실감의 차원에서 보자면 이런 형식이 과연 효과적일까란 생각도 듭니다. 정서의 차원에서만 놓고 보자면 기형도(奇亨度)의 「빈집」과 김현의 「지구」는 유사하거든요.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와 “우두커니 빛이 사라지기 시작하는 잿더미 속에서 푸른 눈은 비로소 자신이 이곳에 남은 마지막 시시한 가로등 로봇임을 인정했다”라는 구절의 비교만 봐도 그렇죠. 그런데 정서적 감염력 내지 호소력은 전자가 뒤의 것보다 훨씬 크거든요.

 

조해진 가독성과 호소력 차원에서는 보통의 시보다 몇배 이상 길다는 점이 고려되어야 할 것 같아요. 시인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장황해졌을 수는 있어요. 어쩌면 이 시인은 소설가처럼 뚜렷한 서사를 만든 다음에 시를 쓰는 것 같기도 한데, 그러다보니까 시가 길어진 게 아닌가 해요. 그런데 소설처럼 플롯이 촘촘하게 짜인 것은 아니다보니 독자가 읽기에 부담스러울 수도 있겠죠. 거의 모든 시에서 절반 정도의 분량을 차지하는 각주도 독자가 몰입하기 어렵게 만드는 부분이고요. SF에 대해서 특별히 덧붙일 말이 있다면, 김현은 SF 중에서도 특별히 인조인간에 대한 관심이 많은 것으로 보여요. 왜 하필 인조인간을 설정했을까 생각해보면, 그것도 결국 비관적인 세계관과 관련이 있지 않나 여겨집니다. 불완전한 인간에 눈길을 주는, 혹은 인간은 결국 완전하지 않다는 감성이랄까요. 아무튼 문제적인 시집인 건 분명해요. 첫번째 시집으로 이미 확고한 세계 하나를 보여주었으니까요.

 

강경석 그 세계로 더 많은 독자들이 드나들 수 있는 길이 열리면 더욱 좋겠지요. 우리 문학이 감당해야 할 의제 하나를 내용과 형식 모두에서 전면화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문제적인 시집이니까요.

  

김행숙 시집 『에코의 초상』

  

166-에코의초상_fmt강경석 오늘 좌담의 마지막 대상작이죠, 김행숙 시인의 네번째 시집입니다.

 

송종원 개인적으로 오늘 다룬 시집들 중에 가장 활기가 넘치고 역동적인 느낌을 받았습니다. 암울하고 절망적인 요즘 시대 분위기와 관련해서는 이 시집을 읽고 위안을 받은 면모도 없지 않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니, 이 시집에서는 폐허라는 장소 혹은 죽음이란 시간성은 어떤 변화의 기미를 늘 동반한다는 뉘앙스를 계속 풍기거든요. 일상 속에서 나와는 다른 사람들이나 예상치 못한 사건과 부딪치면 무언가 다른 것을 발견할 여지가 있다고 말하는 듯한 여유로움이 있더군요.

 

조해진 저도 비슷한 맥락으로 읽었어요. 사실 김행숙의 이번 시집엔 제가 소설에서 쓰고 싶은 내용이 많았어요. 그래서 공부를 많이 한 느낌입니다. 하나의 인간이 하나의 인생을 사는 걸까? 아니면 끊임없이 단편적인 죽음을 경험하는 것일까? 이런 의문이 들어서 쓰고 있는 소설이 있거든요. 이 시집에서 계속 죽음을 경험하는데, 이 죽음은 가상의 죽음이잖아요. 또다른 삶을 위한 죽음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이 죽음이 세계의 전환이라든지 동심원 등으로 표현된 점도 인상적이었어요. 해설을 보니 하이데거(M. Heidegger) 철학을 많이 거론하셨더라고요. 하이데거의 ‘현존재(現存在)’는 죽음을 끊임없이 현재로 가져와 떠맡아야 하고, 그렇기 때문에 항상 불안할 수밖에 없는 존재잖아요. 제가 보기에도 김행숙 시인은 하이데거 사상에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아요. 하지만 현존재의 고유성이자 본래적 자아로 확립해주는 요소 중 하나인 불안은 제거된 듯 보였어요.

 

송종원 불안이 제거되었다기보다 불안을 품으면서 기다리는 태도가 많이 보였어요. 시집의 전반부에는 불안과 폐허의 이미지가 많이 나오거든요. 멈춰버린 시간 같은. 그런데 좀더 읽어나가면 기다림의 태도 같은 게 느껴져요. ‘좀더 기다려봐요, 조금씩 변하고 있어요’라고 말한다고 할까요. 이 견디면서 기다리는 목소리를 통해 어떤 희망의 기미를 느낄 수 있어요. 가령 「8가 없어진다면」이란 시를 보면, 그런 태도가 더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것 같더라고요. 시 전반부의 불안과 고난에 노출된 화자의 목소리가 한눈을 팔면서 변화의 여지를 만들어내죠. 사실 8이란 숫자를 뉘어놓으면 형태상 ‘무한’의 기호잖아요. 이 시의 8시가 딱 그렇죠. 유한성을 넘어서 무한의 경계에 기웃대는 시간대로 그려집니다. 불안과 고난에 잠식당하지 않은 삶의 무한한 활기를 노래하는 거죠.

 

강경석 저는 김행숙 시에 나타나는 여유랄지 인내가 뭘까 생각해봤어요. 전작 『타인의 의미』(2010)나 『이별의 능력』(2007)을 보면 매우 감각적인 시인이 분명하고 그래서 유명해지기도 했는데요, 그럼에도 그런 감각의 논리보다는 오히려 현실에 대한 성찰의 결과를 자기 식으로 잘 표현하는 것 같아요. 『타인의 의미』에 「너의 폭동」이란 시가 있어요. “한번 부정하고 한번만 더 부정하면 나는 혼자 생각하지 않을 것 같애. / 나는 저 수천개의 발과 함께 쿵쿵”이란 구절이 있는데, ‘너’가 타인이잖아요. 타인의 문제, 타자성에 대한 탐구, 나와 타자의 만남을 다뤄온 시인이 ‘너의 폭동’을 목격하고 바라는 데까지 갔는데, 이번 시집에 보면 ‘타인의 의미’라는 관념적인 표현보다는 고통스런 순간에 대한 표현이 나오더라고요. ‘타인이란 무엇인가’를 넘어서 타인과 나의 접합을 매개하는 것이 고통이며, 내가 그 고통에 어떻게 접속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의식이 중심적으로 다뤄지는 것 같고요. 「아담의 농담」을 보면, 고통은 내 안에 내재하는 고통인 게 아니라, 고통 자체를 외화해서, 내 몸에서 “30센티 40센티” 떨어져 있다고 하잖아요. 고통으로부터 거리두기랄지 고통과 함께 동거할 수밖에 없는 관계를 그리는 거죠. “통증으로부터 달아나는 중인 머리라면” “통증에 연결되어 있다면” 같은 구절이 “시민들의 폐활량이고 침묵의 지평선”이라는 구절로 이어지면서 삶의 보편적 고통을 가운데 두고 그로부터 멀어졌다가 가까워지는 메아리랄지 호흡을 뚜렷하게 형상화하고 있어요. 이런 요소들이 성찰의 깊이를 보여주죠.

 

조해진 타인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 타인에게 나를 투사하는 거라면, 그래서 나와 타인 사이의 경계를 지워나가는 거라면 이번 시집에서 이러한 시도 여러번 확인할 수 있었어요. 「연못의 관능」에서는 여러 회사를 전전하다 지금은 놀고 있는 친구와 ‘나’가 잉어가 둥글게 헤엄치는 연못가에서 서로의 혀를 깨물고, 「유리창에의 매혹」에서는 ‘나’만이 어둠이 ‘거울 속처럼 너의 얼굴을 가져’가는 걸 알고 있죠. 나아가 타인이 ‘나’에게 투사를 하기도 하고(「타인의 창」), 타인의 죽음을 통해 ‘나’의 삶의 방식을 가스불처럼 점검하기도 하고요(「이웃 사람」). 관찰이나 연민의 대상이 아니라 언제라도 ‘나’가 될 수 있는 타인이기에 그를 껴안을 수 있는 여유가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송종원 호평이 이어지는 분위기네요. 김행숙의 이번 시집에 감염이 되면 마구 긍정하는 기운이 샘솟는 것도 같아요.(웃음) 그런데 한편으로 무한에 대한 긍정의 기운이 너무 커다란 나르시시즘의 상태는 아닐까라는 의심도 살짝 들기는 해요. 더불어 내 자신이 시에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고 있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강경석 특히 전반부에 마음에 드는 작품이 많았어요. 「아담의 농담」 「연못의 관능」 「밤에」가 아주 매력적이었죠. 또 「도시가스공사의 메아리」도 재미있게 읽었어요. 「아, 서사극」에서는 “그래서, ‘우리는 끝’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같은 대목이나 이어서 “숨이 끊어지려고 하는데 이야기는 어디에서도 끊어지려고 하지 않습니다”라고 끝나는 부분이 계속 끝, 종말만 이야기해오다가 시작을 이야기하니까 반갑고 좋았어요. 시작과 끝은 사실 메아리니까요. 그런데 이 시집에 대한 불만이라고 한다면 여전히, ‘좌뇌형’ 시가 많다는 점이겠죠.(웃음)

 

송종원 좌뇌형/우뇌형을 이성/직관이라는 구분법으로 이해한다면, 제가 앞서 나르시시즘을 언급한 것은 오히려 이 직관적 낙관성, 이를테면 ‘우뇌형’ 감성을 긍정할 수 있는가의 문제였어요. 가령 「타워」라는 시를 보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타는 단순한 경험을 가지고 뭔가를 기다리면서 고양되는 순간을 딱 포착해내더라고요. 그런데 시를 읽으며 그 고양감에 푹 빠져 있다가 다시 산문적인 세계에 돌아오면, 엘리베이터가 상승하는 것과 우리에게 다른 미래가 다가오는 것 사이 연관성이 사실은 논리적 비약이 아닌가, 그래서 일종의 나르시시즘이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더라는 말이었어요.

 

강경석 관념이나 인식을 전달하는 시가 꽤 있는 건 분명합니다. 나르시시즘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변적인 면이 심심치 않은 건 맞죠. 하지만 이런 방면으로도 형상과 인식이 조화를 이루는 경우엔 표제작 같은 가작(佳作)이 나오기도 합니다. 「타워」도 저는 좋게 읽었고요.

 

조해진 「에코의 초상」은 표제작이라서 그런지 시집 전체의 메시지가 함축되어 있는 것 같아요. 소재도 그렇고, 메시지도 그렇고요. ‘나’는 타인이기도 하면서 ‘나’이기도 하죠. “어떤 얼굴은 꿈에서 보는 것 같고 어떤 얼굴은 영원히 보게 될 것 같아서 너의 마지막 얼굴 같고,” 이런 구절은, 계속 그런 코드로 읽어지 몰라도, 가상의 죽음을 경험하고 온 ‘나’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 ‘나’에서 타인을 보기도 하겠지만 결국은 진짜 ‘나’를 보는 것은 아닌가, 그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강경석 기존의 ‘나’로부터 다른 ‘나’가 되어가는 것이잖아요. 무한 회귀하는 메아리 속에서 나날이 변화하는 시적 자아의 면모 때문에 가상의 죽음이란 얘기가 가능할 것 같아요. 「에코의 초상」은 특별히 기억해둘 만한 작품이 분명한 것 같아요. 어떤 메시지를 던진다기보다는 고통의 표정을 드러내는 것 자체가 여러 사회적인 사건들을 연상시키기도 하고요. 전체적으로 의문문이이나 문답형 문장이 많아요. 끊임없이 묻고 답하는 순환의 과정을 통해서 조금씩 나아가는 방식으로 시집이 구성되어 있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송종원 첫시집 『사춘기』(2003)에도 많은 의문문이 등장하죠. 처음 그 시집을 읽었을 때 이 시인은 알면서 모르는 척 묻는 게 아니라, 정말 몰라서 묻는 거구나 하고 느꼈어요. 김행숙 시의 중요한 태도 중에 하나가 ‘모름’을 중히 여긴다는 거예요. 이 시인은 자주 모르기 때문에 뭔가를 새롭게 느끼고 알아내는 과정으로 나아가는 거 같더라고요. 저도 이 시집의 표제작이 참 좋았어요. 도시 저녁의 고독과 지친 군중 속에서 공존하는 미지의 에로스적인 것을 발굴하고 변화의 기미를 포착해내는 과정을 담은 그 시는 이번 시집 특유의 개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면이 있습니다.

 

강경석 말씀 잘 들었습니다. 이쯤에서 좌담을 마무리했으면 하는데요. 조해진 작가님 오늘 장시간 함께해주셨는데 보람있는 시간 보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조해진 처음에 말씀드렸듯이 저는 평가하는 사람이 아니다보니 혼자 신작들을 읽을 때는 제 작업과 연결되는 지점이라든지 인상 깊은 부분 위주로 기억하게 되는데요. 이번 기회에 다층적으로 읽어보기도 하고, 함께 읽은 작품들에 대 다른 해석을 들을 수 있어서 뜻깊게 생각합니다. 특히 신인 시인 두명의 시집을 정성스럽게 읽어서 좋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말주변도 워낙 없고 그리 냉정한 시선을 갖고 있지 못해서 제대로 말을 한 것인지 걱정이 되긴 하네요.

 

강경석 역시 문학은 혼자 하는 게 아니라 온 사회가 함께하는 협동작업이라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하게 됩니다. 두분 긴 시간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것으로 겨울호 문학초점 좌담을 마치겠습니다.(2014.10.24. 북까페정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