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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이웃집 천사를 찾아서

세월호 트라우마, 어떻게 극복할까

 

 

정혜신 鄭惠信

정신과 전문의, 서울시 정신보건사업지원단장. ㈜마인드프리즘 대표 역임. 고문피해자모임 ‘진실의 힘’ 및 쌍용차 해고노동자 가족 치유센터 ‘와락’ 설립에 참여. 현재 안산 치유공간 ‘이웃’에서 활동중. 저서로 『남자 vs 남자』 『사람 vs 사람』 『홀가분』 『당신으로 충분하다』 등이 있음.

 

진은영 陣恩英

시인, 한국상담대학원대학교 문학·인문학상담 교수. 시집 『일곱개의 단어로 된 사전』 『우리는 매일매일』 『훔쳐가는 노래』 , 저서로 『순수이성비판, 이성을 법정에 세우다』 『니체, 영원회귀와 차이의 철학』 『문학의 아토포스』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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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가는 일이 참 많이 힘들다.’ 세월호참사 이후 안산에 있는 서울예대에 강의를 나가는 작가들이 괴로워하며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작가들만 그런 건 아니다. 와동분향소에 참배하러 갔다 온 많은 사람이 그렇게 고백했다. 그런데 그날 이후 짐을 싸서 그곳으로 아예 살러 간 사람이 있다. 정신과의사 정혜신이다. 그녀는 지금 자신이 와동에 마련한 치유공간에서 세월호 유가족을 비롯해 세월호참사로 상처받은 많은 사람들과 매일 함께한다. 911일 조용히 문을 연 이 치유공간의 이름은 ‘이웃’이다. 나는 그곳을 찾아가며 에밀리 디킨슨(Emily Dickinson)의 시구를 떠올린다. “지상에서 천국을 찾지 못한 사람은 하늘에서도 천국을 찾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어디로 이사 가든 천사들이 우리 옆집을 빌릴 테니까.” 나는 지난 몇년간 여러 곳을 지나며 이 시구를 떠올렸다. 그렇지만 그녀를 만나러 가는 지금만큼 이 시구가 마음 깊이 맴돌았던 적은 없다. 그곳에 가면 이웃집 천사를 찾을 수 있을까? 정혜신 선생은 죽음의 동공처럼 삶과 영혼이 깊이 파인 안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

 

진은영 세월호참사 이후 6개월이 흘렀습니다. 세월호 이야기가 많이 피로하다며 이제는 그만 들었으면 한다는 이들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유가족을 위해서라도 마음을 추스르고 일상으로 돌아와야 할 때라고 이야기합니다. 물론 유가족을 끝까지 도와 사건의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거리와 광장에서 싸워야 한다는 이들도 있습니다. 또 선생님처럼 희생자 아이들의 학교와 집이 있는 동네로 무조건 달려온 사람도 있지요. 선생님은 단원고 학생 희생자가 가장 많이 발생한 와동에서 유가족을 만나는 치유공간을 마련하셨는데요. 어떻게 이들과 함께하시게 된 건지요?

 

鄭惠信 정신과 전문의, 서울시 정신보건사업지원단장. ㈜마인드프리즘 대표 역임. 고문피해자모임 ‘진실의 힘’ 및 쌍용차 해고노동자 가족 치유센터 ‘와락’ 설립에 참여. 현재 안산 치유공간 ‘이웃’에서 활동중. 저서로 『남자 vs 남자』『사람 vs 사람』 『홀가분』 『당신으로 충분하다』 등이 있음

鄭惠信 정신과 전문의, 서울시 정신보건사업지원단장. ㈜마인드프리즘 대표 역임. 고문피해자모임 ‘진실의 힘’ 및 쌍용차 해고노동자 가족 치유센터 ‘와락’ 설립에 참여. 현재 안산 치유공간 ‘이웃’에서 활동중. 저서로 『남자 vs 남자』『사람 vs 사람』 『홀가분』 『당신으로 충분하다』 등이 있음

정혜신 그동안 정신과의사로서 저는 국가적인 재난으로 PTSD(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트라우마)를 겪는 분들을 주로 상담해왔어요. 고문피해자들을 오랫동안 상담했고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을 돕기 위해 평택지역에 심리치료센터 ‘와락’을 만들어 활동하기도 했어요. 모두 국가폭력으로 인한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는 사람들이었죠. 그러다가 세월호참사 이후에 큰 고통을 겪는 이들을 도울 만한 부분이 있는 것 같아서 하던 일을 모두 정리하고 안산으로 들어왔습니다. 단원고 생존학생들이 학교에 복귀하기 전 중소기업연수원에 있을 때 함께 숙식을 하며 단원고 교사와 생존학생 부모의 심리적 위기상황에 치유적 개입을 했습니다. 생존학생들이 사고 초기에 접했던 정신과치료에 대한 반감이 매우 심각한 상태였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직접 다가가기보다는 교사와 부모의 혼란을 줄여주고 상황에 대한 통제력을 갖도록 심리적으로 도우면 아이들이 안정될 수 있다고 판단했거든요. 그래서 단원고 2학년 담임교사들의 집단상담과 생존학생 부모와의 대화에 가장 집중했습니다.

걱정을 많이 했는데 다행히도 첫날 아이들이 학교에 잘 들어갔습니다. 연수원에 있는 동안에 여자아이들은 슬픔과 고통을 표현하는데 남자아이들은 거부하거나 피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유가족도, 엄마들은 많이 우시는데 아빠들은 그런 걸 잘 못하잖아요. 아이든 어른이든 남자들은 감정적인 표현을 힘들어하죠. 그런데 등교 첫날에 남학생들이 아주 많이 울면서 돌아가신 선생님과 희생된 친구에게 편지도 썼어요. 그간 친구들에게 못했던 이야기를 한 거지요. 그러고 나서 선생님과 친구에게 보내기 위해 편지를 태웠어요. 이제 이 아이들은 치유를 위한 첫발을 뗀 셈인데, 여전히 이들에게 많은 도움이 필요합니다. 지금은 주로 치유공간 ‘이웃’에서 유가족 심리상담을 하고, 희생학생 형제자매를 위한 치유시스템을 만들고 있습니다. 생존학생 부모를 위한 치유 프로그램도 진행하지만 유가족을 돕고 있는 안산 사회복지사들의 감정소진도 상당해서 그들을 위한 프로그램도 진행하고 있습니다.

 

 

넘어지는 쪽으로 핸들을 꺾어야 쓰러지지 않아요

 

陣恩英 시인, 한국상담대학원대학 교 문학·인문학상담 교수. 시집 『일곱개의 단어로 된 사전』『우리는 매일매일』 『훔쳐가는 노래』 , 저서로 『순수이성 비판, 이성을 법정에 세우다』『니체, 영원회귀와 차이의 철학』 『문학의 아토포스』 등이 있음.

陣恩英 시인, 한국상담대학원대학 교 문학·인문학상담 교수. 시집 『일곱개의 단어로 된 사전』『우리는 매일매일』 『훔쳐가는 노래』 , 저서로 『순수이성 비판, 이성을 법정에 세우다』『니체, 영원회귀와 차이의 철학』 『문학의 아토포스』 등이 있음.

진은영 유가족을 ‘시체장사꾼’으로 매도하는 악의적인 시선이 있기도 합니다만 세월호 피로감을 이야기하는 이들이 특별히 냉정하고 몰인정해서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주변의 지인 중에도 세월호 팔이가 지겹다, 그만했으면 좋겠다고 푸념하는 경우가 있었거든요. 제가 화도 나고 당황스럽기도 해서 그 친구에게 왜 그러느냐 물었어요. 그랬더니 계속 이야기해봐야 딱히 도움을 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 사회가 변할 것 같지도 않은데, 괴롭게 똑같은 이야기를 왜 반복해야 하느냐는 것이었어요. 세월호 이야기를 그만하고 싶은 마음 깊은 곳에는 무력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는 마음이요. 그런데 바꾸어 생각해보면 조금이라도 도움을 줄 수 있고 변화시킬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세월호가 지겹다는 말을 더이상 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건이 지겨운 것이 아니라, 결국 큰 고통과 불행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무기력한 우리 자신이 못 견디겠는 것이니까요. 어떻게 하면 우리가 고통받는 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다가갈 수 있을까요?

 

정혜신 멀리서 보면 도움을 줄 수 있는 틈이 보이지 않아서 막막하고 무기력하지만 가까이 와보면 달리 보일 수 있어요. 그래서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선 그분들이 어떤 고통을 겪고 있는지 섬세하게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해요. 어떤 유족 어머니가 요즘 집밖을 잘 못 나오세요. 나왔다가 애 데리고 길을 가는 부모를 보면 ‘저 사람은 지금 나 보라고 유세하는 거야?’ 하는 생각이 들면서 막 때려주고 싶대요. 돌아서서 생각해보면 그러고 있는 자신이 참 기막히게 느껴져서 바깥에 못 나온다는 거죠. 다른 경우는, 유족 부부가 사고가 난 이후 지금까지 집에 들어가지 않고 계속 차에서 잠을 자요. 아이를 잃었는데, 낮에는 집에 들어가도 아이가 학교 간 것 같고 친구 만나러 간 것 같아서 괜찮대요. 근데 밤에 부부만 있으면 애가 죽었다는 것이 너무 실감 나는 거죠. 그 상황을 견디기가 고통스러워서 밤에 집에 못 들어가요. 집 앞에 차를 세워놓고 거기서 자고 아침에 집에 가서 씻기만 하고 다시 나오는 거예요.

유가족만 고통스러운 건 아니에요. 생존학생이나 그 부모님 입장에서는 유가족들을 보면 무조건 죄의식을 느껴요. 아이들이 등교할 때 유가족 부모님 이삼십명이 오신 적이 있어요. 애들에게 잘 지내라고, 친구들 몫까지 네가 다 하라고 얘기해주면서 안아줬지요. 그럼에도 이 아이들은 희생된 친구들 부모님 만나면 가슴이 두근두근하는 거예요. 누가 뭐라지 않아도, 혼자 살아 나온 것에 대한 죄의식이 들고 질책당할 것 같은 거죠. 이런 여러 빛깔의 아픔들이 우리 주위에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완료에 대한 욕구가 있어요. 영화를 보기 시작했으면 끝까지 다 보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려는 게 인간의 본능이라는 거죠. 그런데 완료하지 못하고 중간에 억지로 끝나면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하고 거기서 계속 맴돌아요. 재난으로 누군가와 갑작스럽게 이별을 하는 경우처럼 갑자기 죽음과 관련한 엄청난 트라우마를 겪으면, 잊어야 한다,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아무리 말해봐야 소용이 없어요. 완료되지 않고 중간에 툭 끊어진 이 욕구가 마음 안에서 충분히 완료되도록 도와줘야 돼요. 그래야 이 슬픔의 경험, 이 고통의 느낌으로부터 떠날 수 있어요. 그게 흔히 말하는 애도예요. 우리는 애도가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도 막상은 서로 애도를 막아요. 많이 울고 많이 슬퍼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제대로 못 울어요. 아이 아빠가 막 참고 있으니까 부인은 이렇게 생각하는 거죠. ‘저 사람도 너무 힘들 텐데 가장이니까 울지도 못하고 참는구나, 나 때문에 더 힘들면 안되지.’ 하면서 옆에서 안 울고 참아요. 형제자매가 죽은 아이들은 ‘부모님이 형을 잃고 더 힘들 텐데 울지 않으시는구나, 그러니까 나도 그냥 참아야지’ 하게 되지요. 다시 그 아이들 옆에서 부모님이 참는 식이에요. 결국 서로가 서로를 배려한다면서 아무도 애도를 하지 못해요. 그러면서 사람들이 서서히 비틀리거나 병이 나게 되는 거죠.

어린 시절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울 때, 가다가 넘어지려고 하면 넘어지는 방향 쪽으로 핸들을 꺾으라는 얘기를 듣잖아요. 어렸을 때는 그 말이 이해가 안 가는 거예요. 이쪽으로 넘어지려고 하면 반대로 꺾어야 안 넘어지지 넘어지는 방향으로 핸들을 꺾으면 되나? 그런데 직접 배워보니까 그 말이 맞더라고요. 살다보니까, 사람 마음의 법칙도 똑같아요. 우리가 살다가 너무 슬플 때, 슬픈 쪽으로 핸들을 꺾어야 넘어지지 않습니다. 슬픈 것이 너무 당연할 때 반대쪽으로 핸들을 꺾으면 반드시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무너지게 되어 있어요. 마음껏 슬퍼해야 합니다. 슬플 때 더 안정적으로, 더 편안히, 더 실컷 슬플 수 있도록 격려해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넘어지지 않고 더 빨리 빠져나올 수 있어요.

 

진은영 생존학생과 유가족이 슬픔을 안에 가두지 않고 충분히 잘 흘러나오게 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 제일 시급하군요. 그러기 위해 해야 할 일과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일이 무엇일지요. 사실 많은 분들이 이런 일에 함께하고 싶으나 구체적으로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정혜신 일단 더이상의 상처를 주면 안되지요. 유가족을 가까이서 만나는 분들도 유족에 대한 오해를 많이 해요. 옆에서 보니 이해 안 가는 모습이 보인다고도 하고요. 유족이 호프집 가서 술 먹으면서 웃고 떠드는 걸 보고 저 사람이 유족 맞나,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거예요. 어떤 유족 아버지하고 상담하다가 들은 얘기인데요, 사고 나고 한달 조금 넘었을 때인데 아버지들이 항상 모여 있는 사무실 티비에서 그동안 늘 세월호참사 뉴스가 틀어져 있었대요. 그런데 언제부턴가 채널이 돌아가기 시작하다가 한번은 류현진 선수 야구경기 중계를 튼 거예요. 아빠들이 무심코 보다가 재밌어졌고 어느 순간 환호를 했대요. 그러고 나서 서로를 돌아본 거죠. 우리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야, 이런 생각으로요. 그 아빠가 그 얘기를 하면서, 세상에, 애를 잃어놓고서는 야구를 보다가 환호하다니, 내가 인간이냐 하면서 괴로워하더라고요. 네, 인간이죠. 인간이니까 그러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가 머릿속에 유족이란 모름지기 이러이러할 것이라는 틀을 가지고 보면 그 사람들한테는 매우 가혹한 폭력이 돼요.

실제로 유가족에 대한 그런 선입견 때문에 바깥출입을 못하는 부모님들이 있어요. 밖에서 누구랑 얘기하다가 무심결에 웃는 모습을 보고 다른 사람들이, 저 엄마는 계모 아니야?라고 수근거리는 소문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대요. 애를 잃은 엄마도 어떤 상황에서 얘기하다가 웃을 수 있는 거예요. 유족은 우리가 볼 때마다 계속 울어야 하나요? 우리는 그럴 거라고 착각해요. 자기의 전제가 잘못된 건데 유가족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거죠. 우리가 보고 있는 모습이 그 사람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것은 굉장히 중요해요. 그 사실만 감지하고 있어도 우리가 누군가한테 그렇게 폭력적인 사람이 되지 않죠. 그걸 인식하지 못하면 본의 아니게 누군가에게 비수가 될 수 있는 거고요. 안산에서 제가 하고 있는 주된 일 중 하나는 생존학생들이나 유가족이 주변 사람들에 의해 이런 2차 트라우마를 겪지 않도록 유가족의 상태를 알리고 이들을 배려하는 방법을 교육하는 것입니다. 유가족이 느끼는 마음의 고통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면 그들을 아주 크게 오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오해로 인해 서운한 마음을 주변인들이 다른 곳에 전하고 또 그 이야기에 살이 붙으면 유가족에 대한 악의적 루머가 떠돌게 되고…… 그러면서 유가족이 국민들로부터 고립되는 상황이 벌어지는 거죠.

 

진은영 그렇군요. 세월호 유가족처럼 PTSD를 겪는 사람들이 부딪히는 심리적 어려움으로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정혜신 고문피해자나 해고노동자를 대상으로 트라우마 상담을 하다보면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현상인데요, 모든 트라우마 환자에게는 가해자가 있어요. 예를 들어 80년대 고문의 가해자는 정권 책임자 전두환(全斗煥)과 고문수사관인 것이죠. 억울하게 조작돼서 빨갱이로 십년, 이십년 감옥에서 살다가 나오니까 자식은 빨갱이 새끼가 되고 부인은 떠나갔어요. 자기 삶도 물론 파괴될 대로 파괴됐고요. 그럴 때 그분들을 상담하게 되면 누구에게 분노를 제일 강하게 드러낼까요? 정권의 최고권력자일까요? 아니면 자신을 고문했던 사람? 그렇지 않고요. 내가 감옥에 있을 때 내 새끼를 안 돌봐준 형수, 그런 식이에요. 쌍용차 해고노동자들도 당시에 아주 무자비하고 살인적으로 진압한 조현오(趙顯五) 경찰총장이나 진압현장의 경찰특공대가 아니라, 같은 공장 라인에서 일했는데 해고되지 않았던 동료 중에서 관제데모에 나와서 해고된 자신들에게 ‘물러가라!’고 외쳤던 사람들이나 파업 때 자신에게 새총을 쐈던 옛 동료들에게 가장 강한 살의를 느껴요.

경찰총장도 이명박정권도 아니고 왜 주변 동료일까요? 어떤 거대한 트라우마가 생겼고 그 트라우마 사건의 명백한 가해자가 있어요. 그런데 그 가해자가 나와 너무 멀리 있고 압도적인 힘을 가진 경우에는 피해자들 안에서 서로 상대적인 가해자를 찾는 일종의 심리 게임이 발생해요. 내 자식을 안 돌봤던 형수와 큰형, 어려웠을 때 내가 도와준 이모가 바로 옆 동네에 사는데 내가 감옥에 갔을 때는 이모가 내 집에 자기 자식들이 못 가게 한 일, 그런 일이 사무치는 거죠. 그런데 그 이모 입장에서는 친척이 빨갱이로 잡혀갔는데 그 집과 왕래하면 자기 식구들도 다 잡혀가는 거고 가정이 풍비박산 나는 거예요. 그래서 못 간 것일 수 있는데 그런 합리적인 판단이 안 서는 거예요. 피해자들끼리 상대적인 가해자를 찾는 상황에 빠지면 실질적인 가해자는 싹 사라져요. 피해자들이 서로 갈등하면서 집단이 와해돼요.

지금 세월호 트라우마에서도 똑같은 현상이 나타나는데요. 처음에는 분노가 제대로 구조작업을 못한 해경이나 청와대, 정치권을 향하다가 점점 세월호 일반인 희생자 가족이나 단원고 유가족 부모와 생존학생 부모 간에, 또는 단원고 유가족 상호간에 분노나 미움이 생겨나요. 또다른 공통의 적은 학교예요. 단원고 선생님들 말이죠. 유족이나 생존자 부모에게 학교나 선생님 얘기를 꺼내면 눈빛이 달라진다고 느낀 적이 많았어요. 선장이나 대통령보다 학교와 선생님들에 대한 분노가 더 구체적이고 생생하고, 때론 더 크다고 느낀 적도 있었어요. 그런데 이 감정이 객관적으로 그분들의 잘못을 따져서 해결되는 문제는 아니에요. 실제로 잘잘못의 여부와 무관하게 주변사람에게 자신의 분노를 표출하는 것이 이런 경우에 일어나는 아주 공통적인 현상이라는 거죠. 피해자들끼리 서로 상처를 주고받으면서 상처가 더 깊어지는 현상이 벌어지고요.

 

 

아이에 대한 사랑을 완료할 수 있는 시간을

 

진은영 유가족의 그런 고통을 가까이서 지켜보는 안산의 이웃들에게는 어떤 점을 집중적으로 교육하시는지요?

 

정혜신 시청의 한 공무원이 저한테 개인적으로 한 이야기인데요. 희생자 가정에 방문을 하면 아이 사진이 있잖아요. 그러면 ‘누구 엄마’ 하며 그 아이 이름을 불러도 되느냐 아니면 이름을 부르지 말아야 하느냐, 사진을 보고 알은척을 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이런 문제로 고민이 된다고 해요. 그 경우 당연히 ‘누구 엄마’라고 부르셔야 돼요. 아 얘가 걔구나, 잘생겼네, 인상이 어떠네, 얘 어떤 애였어요? 이렇게 물어보고 얘기를 해야죠. 유족 입장에서는 아이 얘기가 제일 하기 어려울 수 있지만, 세상에서 그 얘기만큼 하고 싶은 얘기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이 주변에서 다 쉬쉬하고 피하면 누구하고도 그 얘기를 할 수가 없잖아요. 아무도 그에 대해서 말을 걸어주지 않으면 이 유족은 평생 그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해요. 레코드판이 튀듯이 계속 거기서 튀는 거에요. 그러면 삶이 그 순간에 정지된 채로 더이상 진도가 안 나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웃들은 유가족이 관계의 진도를 나가서 완료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셔야 합니다.

제가 ‘이웃’에서 시작한 치유적인 방법 중 하나가 이것과 깊은 관련이 있어요. 죽은 아이의 친구들이 있잖아요. 생존학생뿐 아니라 중학교 동창도 있고 교회 친구도 있고 학원 친구도 있고요. 그 친구들이 아이를 잃은 친구 부모님에게 편지를 쓰는 운동이에요. 그건 이 친구들의 치유 프로그램이기도 하고 희생학생의 부모님을 치유하는 시간이기도 해요. 살아 있는 친구들이 내 안에 있는 희생학생에 대한 기억, 경험, 추억, 느낌을 구구절절 써서 친구 부모님한테 보내는 거예요. 이 편지를 전달하는 사람을 저희는 ‘노란 우체부’라고 하는데 그 우체부가 부모의 반응을 듣고 친구들한테 전달하는 것까지 과정에 포함돼요. 친구들이 부모님을 위로하겠다고 와서 그냥 자기들 얘기를 하다 가면 부모가 엄청 상처를 받아요. 내 아이만 없구나, 쟤네들은 저렇게 사는구나, 대학을 가겠구나, 내 아이는 평생 교복 입은 모습에 갇혀 있겠구나, 이런 게 더 뚜렷해진단 말이죠. 그런데 친구들이, ‘수련회에 같이 갔는데 ○○가 이런 말을 해서 엄청 웃겼어요. 얌전한 줄 알았는데 그때부터 ○○ 별명은 이거예요.’ 이런 식의 얘기를 하면 부모가 친구 안에 살아 있는 아이를 느끼는 거예요. 내 아이의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는 느낌을 받으니까 이 친구가 살아 있는 게 고마운 거죠. 그리고 그동안 사춘기 아이와 소통을 많이 못해서 그저 허무하게만 느껴지던 아이의 삶이 생생하게 꽃피어 있었다는 걸 실감하면서 위로를 받아요. 이게 이 치유의 핵심이에요.

한편으로 부모의 반응을 친구들한테 알려주는 것도 아이들 치유에 중요한 요소예요. 아이들이 편지를 쓰고 다 불안해하거든요. 자기가 뭘 잘못 써서 혹시 친구 부모님이 상처 받지 않을까 하다가 그 반응을 알려주면 마음도 편해지고 그동안 그렇게 미안하던 친구를 위해서 뭔가 한 것 같은 생각이 들죠. 사실 아이들이 처음에 편지를 쓰면 ‘힘내시고 용기 잃지 마세요’ 같은 말을 쓰거든요. 저희는 그런 얘기는 쓸 필요 없다고, 친구와 있었던 아주 구체적인 일, 감정들을 쓰라고 해요. 그게 왜 부모한테 위로가 되는지 다 설명해주죠. 그래야 안심하고 이야기를 펼치니까요. 이런 것이 치유의 메커니즘 속에서 진행되는 편지쓰기 활동입니다.

이런 식으로 친구들이든 이웃의 다른 엄마든 그 아이 얘기를 적극적으로 하셔야 돼요. 상실한 아이와의 관계에서 완료되지 않은 것을 완료할 수 있도록 그 사람에게 충분한 기회를 주고 더 얘기를 하고 더 많이 느끼게 해주기, 그것이 치유의 핵심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유가족들이 아이들의 휴대폰 복원 후에 남아 있는 사진들을 같이 공유하는 일도 치유에 도움이 되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아이의 휴대폰에서는 발견할 수 없었던 사진인데 친구의 전화기에 찍힌 사진 중에 내 아이가 있을 수 있지요. 부모들이 서로 그걸 찾아주고 아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서로한테 굉장히 좋은 치유자가 될 수 있어요. 이런 것들을 지금 희생자 부모들이 하고 있거든요. 참 좋은 자생적 치유법이에요. 부모 중에서는 유품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니까 정리를 하신 분들도 있고요, 정리하지 못하고 가지고만 있는데 어떻게 하는 게 좋겠느냐고 물어오시는 분들도 많아요. 저는 조금 더 가지고 있으라고 얘기하죠. 정답은 없는데, 그걸 정리한 분들 중에서 나중에 후회하시는 경우를 너무 많이 봤습니다. ‘내가 그때 아이 물건을 왜 정리했을까, 그냥 보고 싶을 때, 그리울 때 더 꺼내볼 수 있도록 좀더 가지고 있을걸’ 하면서 괴로워해요. 유품을 통해서 아이와 더 얘기하는 과정이 충분히 이루어진 후에 결정을 하셔도 됩니다.

그렇게 슬픔에 몰입하다보면 우울증에 빠지지 않겠느냐고 걱정하는 시선도 있는데요, 그렇지 않습니다.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은 병이 아니에요. 그들은 원래 환자였던 사람이 아니에요. 어느날 갑자기 교통사고 난 것과 마찬가지 상황인 거예요. 내가 원래 몸이 약했으면 어떤 자극 때문에 우울증에 빠지거나 더 나빠질 수 있죠. 그런데 트라우마 사건에서는 더 마음껏 애도하고 빠져들수록 빨리 빠져나올 힘을 가질 수 있어요.

 

진은영 유가족들의 청운동 농성장을 방문하셨을 때는 남은 자녀들을 돌보는 법에 대해서도 강연하셨다고 들었어요.

 

정혜신 아이들은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이 상황에 대해서 자기 나름대로 상상하고 생각을 여러 방식으로 진행시키면서 상처를 받기도 하거든요. 그런 생각들을 잘 끄집어내서 부모님이나 주변의 어른들과 대화를 나누게 하거나 상담을 통해 다룰 수 있는 기회가 있어야 합니다. 의외로 아이들은요, 부모님을 위해서, 부모님이 걱정할까봐, 힘들까봐 자기 얘기를 못합니다. 왕따 때문에 자살하는 아이들이 있잖아요. 그렇게 괴로웠으면 부모한테 왜 얘기 안했을까 하며 부모들이 가슴을 치는데, 평상시에 대화가 안되거나 사이가 나빴던 부모여서가 아니고요. 의외로 그때 아이들이 하는 공통적인 생각은 나 때문에 부모님이 더 가슴 아플까봐예요. 그러니까 충분히 얘기할 수 있도록 하려면 부모가 먼저 이야기를 꺼내셔야 해요.

언니를 잃은 중학생 아이가 하나 있는데요, 학교 가서 갑자기 선생님 등에 숨었어요. 언니가 보인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부모가 너무 놀란 거죠.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긴 게 아닐까 걱정하시길래 제가 그랬어요. 저는 모르는 아이들인데도 진도 신원확인소에서 종일 있으면서 희생된 아이들을 지켜보았더니 한동안 걔네들이 저한테 말을 걸었어요. 그런 느낌이 한동안 있었어요. 아이가 자기 언니가 찾아왔다고 느끼는 것은 심리적으로 뭔가 하고 싶은 작업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경험, 그 존재, 그것과 대면하는 시간들, 그 순간들을 막으시면 안됩니다. 당연히 보일 수 있고 들릴 수 있고 꿈에 계속 나타날 수 있죠. 너무나 정상이에요. 나타나줬으면 하는데 안 나타나서 가슴앓이하는 부모들이 더 많아요. 눈에 보이는 거 얼마든지 좋아요. 다시 만나면 언니한테 무슨 얘기 하고 싶니? 하면서 같이 충분히 얘기해야죠. 그러면 아이가 언니를 무서워하지 않고 그런 상황이 왔을 때 자기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언니와 해야 하는 작업들을 하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단원고 2학년 교실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는 것은 매우 다행스런 일입니다. 생존학생이나 3학년 학생 들이 가끔 그 교실에 들어가곤 해요. 친구나 친한 후배 자리에 앉아서 울다가 편지를 쓰기도 하거든요. 일상으로 빨리 돌아와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빨리 잊어야지 잊어야지, 내가 그러면 안되지, 멀리 털어야지, 정신 차려야지 하면 문제가 더 생겨요. 희생학생 형제 중에서 그런 아이들을 몇명 접했어요. 공부한다고 밤 열두시, 한시에 들어온대요. 괴로우니까 공부에 빠져든다는 거예요. 그게 꼭 좋은 신호가 아닐 수 있어요. 아빠들 중에서도 일에 열중하시는 분들 있잖아요. 괴로움을 잊기 위해서 그 괴로움의 크기만큼이나 무언가에 강하게 몰입하는 건데, 그게 그렇게 쉽게 되지도 않지만 당장 집중이 된다 해도 나중에 어느 순간 ‘내가 내 아이를 위해 제대로 슬퍼해주지 않았다, 못했다’는 생각이 쓰나미처럼 밀려오면 그땐 정말 휩쓸려 떠내려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유가족이나 생존학생에게 너무 의도적으로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고 주문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사람 마음은 충분해지면 자연스럽게 돌아옵니다. 그것을 믿으셔야 합니다. 사람에게는 본래 가지고 있는 건강성, 균형성이 다 있어요.

 

 

트라우마 치유에는 진상규명이 가장 중요합니다

 

진은영 슬픔을 딛고 자연스럽게 현실로 돌아올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더이상은 광장과 거리에서 진상규명을 호소하지 말고 개인적인 치유작업을 통해 슬픔을 극복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기도 하고요. 이제는 개인의 치유적 관점에서 접근해야지, 세월호참사를 사회적인 차원에서 다루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치유적 관점은 이런 입장들과는 큰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 관점을 선생님께서는 ‘사회적 치유’라고 표현하셨지요?

 

정혜신 얼마 전 유족들이 시내에서 서명받을 때 등장했던 ‘엄마부대’ 보셨나요? 광화문의 단식현장에 와서 폭언을 하고 갔잖아요. 언제까지 이럴 거냐고, 당신들이 국민에게 미안해해야 한다고 유족에게 비수를 꽂고 갔어요. 이런 분들이 주변에 많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언제까지 기억을 해야 할까라는 질문에 답하려면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들의 심리에 대해 먼저 말씀드려야 해요. 트라우마를 겪은 이후부터 그들의 시간은 우리와 다릅니다. 트라우마라는 상처를 입고 그 상처가 벌어지면 이 사람들의 시간은 거기서 정지합니다. 예를 들면 예전에 10대 시절 죽음의 위협 속에서 성폭행을 당한 여성이 30년 후에 그 남자를 찾아가 살해한 사건이 있었어요. 사건 이후에 생물학적으로 나이는 먹었지만, 심리적으로는 멈춘 거죠. 계속 그 언저리에서 사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사람이 찔러 죽인 때는 30년 후가 아니고 성폭행 당한 다음날인 거예요. 이런 것이 트라우마입니다. 일반적인 스트레스와 완전히 다릅니다.

세월호참사가 있은 지 반년 이상 지났지요. 유가족에게 이제 반년이나 지났는데, 당신들 언제까지 이럴 거냐?라고 말하면 이분들은 화나고 서운하기 전에 깜짝 놀라실 거예요. 이분들은 어제 당한 일이에요. 낮이나 밤이나 꿈에서나 계속 그 언저리를 배회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시간이 지났으니 잊으라니요. 시간을 전혀 감각할 수 없는 상태라는 거죠. 그게 트라우마의 본질이에요. 치유가 안되면 삶의 진도를 나갈 수 없고 다음 과업으로 넘어갈 수 없는 것이 트라우마입니다. 우리의 시간과 그들의 시간이 전혀 다르다는 것, 내 시간은 흘렀어도 그 사람들은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트라우마의 치유냐, 어떻게 하면 이 사람들의 삶이 멈추지 않고 나아갈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서 가장 핵심은 진상규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신과에는 수백가지의 질환이 있어요. 우울증, 불안증, 정신분열증, 알코올중독, 강박증 등 많은 질병이 내면의 심리적인 문제 때문에 생기는 병들이에요. 그런데 유일하게 내인성(內因性)이 아닌 외인성(外因性)에서 시작되는 질환이 있어요. 바로 외상성 스트레스 증후군, 즉 트라우마예요. 정신과의 수백가지 질환이 자기 생각이나 환경적인 문제들을 생각하면서 치료되지만 외부적인 문제 때문에 삶이 어마어마하게 일그러진 경우에는 그 외부적 요인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치유가 시작될 수 없어요.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을 살펴보면 물론 분노와 무기력증도 그를 힘들게 하고 망가뜨리지만 결정적으로 살 수 없을 만큼 힘들게 하는 감정은 억울함입니다. 정신과 질환 중에 자살률이 가장 높은 병이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이에요. 사람이 억울하면 살 수가 없어요. 죽지 않아야 할 아이들이, 죽을 이유가 하나도 없는 아이들이, 다 구조가 될 수 있는 아이들이, 여러가지 문제가 꼬이고 겹치면서 억울하게 죽었어요. 그리고 거의 온 국민이, 그것도 생중계로 그 아이들의 죽음을 다 지켜봤어요. 진상규명을 위해 유가족들이 동분서주하는데, 그것은 바로 치유되려는 몸부림인 거예요. 그 과정 중에 있는 유족에게 과일을 하나 깎아주거나 물을 가져다주거나 잠깐 어깨를 주물러주거나 하는 소박한 봉사나, 진상규명을 위해 서명하고 잠시라도 도움을 주는 모든 분들은 세월호 트라우마의 근원적인 치유자입니다. 그런 점에서 마음을 추스르게 하는 것은 정신과 의사보다 이웃이 할 수 있는 일들이 더 많은 것이죠. 그래서 저는 사회적 치유의 중요성을 끊임없이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진은영 사회적 치유의 중요성에 대해 들으면서 어쩌면 많은 분들이 더 복합적인 감정을 느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공동체 전체가 나서서 해결해야 할 커다란 상처인데 나는 눈물을 흘리는 것 말고는, 아주 사소한 일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구나, 이런 깊은 무력감을 느끼는 것이지요. 그동안 많은 분들이 자신의 가족이 희생된 듯한 충격, 공범이 된 듯한 죄책감, 이 사회를 엉망으로 방치한 것에 대한 수치심, 결정적인 원인제공자들에 대한 분노 등 아주 복합적인 감정의 회오리를 자기 안에서 느끼며 혼란스러워했습니다. 이 공동체적 치유의 첫발을 어떻게 내디뎌야 할까요?

 

정혜신 아주 간절한 마음으로 움직일 때 사소한 것이라도 사람들 마음속에 깊숙이 내려박힌다는 것을 믿으셔야 해요. 어느 유족 어머니가 국회에 처음으로 단식하러 가던 날 저에게 이런 문자를 보내셨어요. 자기가 진도체육관에 처음 있을 때, 밤이 되면 너무 추워서 자기도 모르게 체육관에서 웅크리고 잠이 들었다고 해요. 그런데 어떤 여학생이 옆에 오더니 핫팩 몇개를 자기 다리 사이랑 등에다 넣어주고는 깰까봐 얼른 가더라는 거예요. 잠결에 언뜻 그 여학생을 보았는데, 그분이 그 이후에 마음이 크게 흔들린 거예요. 너무 고맙다,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내 새끼하고 가족밖에 생각 않고 살았구나, 자기 전 생애를 반성하셨다고 해요. 내가 지금 아이를 잃었지만 앞으로는 더이상 이기적으로 살지 않겠다, 그렇게 다짐했다고 제게 길게 쓰셨어요. 이분이 지금 정말 열심히 투쟁하세요. 투쟁하는 이유가 내 아이는 죽었지만 다시 이런 일이 있으면 안된다는 거예요. 저는 그 여학생이 정말로 깊고 깊은 치유자라고 느낍니다. 그런데요, 그 여학생이 자기가 넣어준 핫팩 때문에 한 유족 부모의 삶이 통째로 바뀌었다는 것을 알까요? 상상도 못할걸요. 그런 만남, 그런 순간에 의해서 사람 마음이 흔들리는 거지 다른 거창한 것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그 여학생에게 어떤 간절함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20대 초반의 학생이 무슨 연고로 거기 와서 허드렛일을 하고 있었겠어요. 그런 간절함이 다른 사람을 움직이게 만들고 의미있는 무언가를 주는 것이죠. 그것이 저는 치유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치유는 굉장히 소박한 것입니다. 사람 마음을 어떤 순간에 살짝 만지는 것, 별것 아닌데 사람이 휘청하는 것, 그냥 울컥하는 것, 기우뚱하는 그 어떤 순간. 그것이 바로 치유의 순간입니다. 정신의학의 관점에서 어떤 사람이 최고의 치유자인지 궁금해하는 분들이 있어요. ‘상처 입은 치유자’(wounded healer)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상처를 입어본 사람이 치유받아본 경험을 통해서 최고의 치유자가 된다는 거예요. 자기 상처가 어떻게든 치유되는 경험을 한 사람은 사람이 무엇으로 움직이는지를 이미 경험한 사람이에요. 그런데 사람은 누구나 상처가 있어요. 상처 없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아요. 그래서 자기 상처를 인식하고 인정해서 치유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치유자가 될 수 있어요. 그런 사람이 누구한테든 최고의 치유자라 할 수 있습니다.

안산시민은 416일 이후에 모두가 상처 입은 사람이 되었어요. 가까운 이웃이 큰 아픔을 겪고, 본인도 감정적으로 크게 상처 입었죠. 80년 광주에 있었던 분들을 보면서 저는 치유적인 사람이 많다고 느꼈어요. 상처를 경험하고, 그 과정을 살아냈기에 치유적인 요소에 굉장히 민감하게 된 분들이죠. 지금 세월호 유가족과 함께해주시는 분들 중에 그런 사례가 많습니다. 작년에 태안 해병대캠프 사고로 아이를 잃은 부모님들도 진도체육관까지 내려와서 마음을 보태주셨지요. 저는 이 지역공동체가 시민들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고 삶에서 가장 큰 고통의 순간에 처한 이웃에게 가장 좋은 치유자가 되어주길 바랍니다.

 

 

상처받은 사람이 최고의 치유자

 

진은영 선생님 말씀 속에서 헨리 나우웬(Henri Nouwen)의 ‘상처 입은 치유자’라는 개념이 큰 울림을 갖는 것 같습니다. 나우웬은 사제이면서 심리학자였지요. 그가 목회자들의 중요한 덕목으로 상처 입은 치유자의 면모를 강조했기 때문에 저는 그동안 이 단어를 종교적 맥락에서만 받아들였습니다. 물론 한국교회는 그런 종교적 의미조차 제대로 받들지 못해 유가족에게 상처를 줬다는 이야기도 들립니다. 여러명의 희생자들이 다니던 안산의 한 대형교회에 세월호 유가족들이 서명을 받으러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두번째 주일에는 서명운동은 한번으로 됐다며 더이상 오지 말라고 이야기해서 기독교 신앙을 가진 유가족들이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해요. 그동안 가장 깊이 마음을 나눴다고 느꼈던 공동체로부터 배척당하는 기분이었을 것 같습니다. 선생님은 치유공동체를 만드는 방식 중 하나로 ‘동네촛불’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시기도 했지요?

 

정혜신 다른 집회에 가면 딱딱한 발언하고 행진하다 막히고 경찰하고 몸싸움하고 그랬는데, 동네에서 이웃들과 촛불을 들 때 조금 다른 분위기로 함께할 수 있어요. 내 자신에게 주목해주고 들어주고 보듬어주는 느낌의 모임 말이에요. 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얘기들을 하면서 쉴 수 있는, 그러니까 고향집에 와서 아랫목에 몸 누이듯이 진행되는 촛불모임이면 좋겠어요. 저는 이웃이 함께 모이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 모임을 집회처럼 가져가는 것은 별로 효과적이지 않을 것 같아요. 지금 유족들은 하고 싶은 말이 아주 많거든요. 그러니까 그런 기회를 주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거죠. 한 인간으로서 자기 삶을 자꾸 얘기하도록 만들어야 해요. 그렇게 함으로써 말하는 사람도 더 홀가분해지고 듣는 사람도 그 마음에 더 많이 공감하게 되고 애달파하게 되죠. 그러면 이 문제에 대해 더 돕고 싶은 마음도 들고요.

그런데 세월호 집회에서 유족들이 발언하는 걸 보면, 어떤 분들은 운동가처럼 얘기하세요. 특별법의 당위성을 피력하고, 우리의 이야기 중 이것은 날조된 거고, 저것은 국정원에서 어떻게 한 거라는 식으로요. 물론 중요한 이야기죠. 분명히 알아야 하는 부분이고요. 그러나 그것만으로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이지는 않거든요. 유족이 가지는 한 인간으로서의 고통, 아이에 대한 그리움, 나와 우리의 삶에 대한 생각, 이런 것들을 더 많이 공유하면 사람들 마음이 유족들이 원하는 쪽으로 더 기울어질 거라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한 인간으로서의 자기 내면을, 마음을, 감정을 내놓을 수 있게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것이 중요해요. 특히 저는 광화문 앞의 집회처럼 자극적인 영상을 틀어놓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예요. 유족 부모님 중에서도 그 영상 때문에 광화문에 못 가는 분이 꽤 많아요. 보통 사람들도 충격적인 동영상을 보면서 결국에는 고통스러우니까 세월호를 자꾸 밀어내고 싶어해요. 사람은 자기를 보호하게 되어 있거든요. 그렇게 자극적인 것은 오래갈 수 없고, 오히려 더 피하고 외면하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자꾸 들여다보고 싶게 해야 공감대가 넓어지는 것이지 고통스러워 열어보기도 어려우면 공감대가 넓어질 수 없어요.

 

진은영 상처받은 이가 최고의 치유자이고, 슬픔의 과정에 함께 동행하는 이웃이 가장 훌륭한 치유자라는 선생님의 말씀이 참 부드럽고 아름답게 들리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정말 급진적인 주장이기도 하지요. 현대의 전문가주의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이야기니까요. 모든 영역에서 전문가로 구성된 위원회가 필요하고 우리 사회에는 쓸 만한 전문가가 없어서 문제라는 것이 많은 이들의 생각이기도 한데요. 실제로 말씀만 그렇게 하신 게 아니라 그런 관점에서 서울시 치유프로그램도 진행하고 계시지요?

 

정혜신 네, 제가 서울시 정신보건사업지원단장이에요. 서울시민 전체를 대상으로 ‘서울시 힐링 프로젝트’를 작년부터 하고 있어요. ‘누구에게나 엄마가 필요하다’라는 프로그램인데요. 이 프로그램은 전문가가 비전문가들을 대상으로 하는 치유가 아니라, 프로그램에 참여해서 치유를 경험한 시민이 그다음에 자기가 직접 치유를 진행하는 구조예요. 한마디로 시민 치유활동가를 양성하는 겁니다. 10월부터는, ‘누구에게나 엄마가 필요하다—세월호 트라우마 편(가칭)’이에요. 세월호사건으로 상처 입은 이들, 이른바 국민적인 우울증을 겪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치유 프로그램이에요. 한번 참여하는 데 세시간 정도 걸려요,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 무력감과 죄의식 그리고 아이에 대한 감정이입 정도가 직업상 남다를 수밖에 없는 교사들, 그리고 고2 학생들. 이렇게 세 집단을 대상으로 할 예정이에요. ‘누구에게나 엄마가 필요하다’가 서울시민을 위한 프로그램이어서 거기서 먼저 하긴 하지만 이 프로그램의 원래 취지는 주위로 자꾸 번져나가게 하는 거예요. 서울시민도 이렇게 힘든데, 안산시민은 얼마나 힘들겠어요. 그래서 이 프로그램을 안산에서도 하려고 해요.

이 프로그램을 거친 모든 시민은 치유활동가가 될 수 있어요. 그런데 이렇게 말씀드리면 선무당이 사람 잡는 게 아니냐고 걱정하세요. 어설프게 하느니 그냥 같이 가슴 아파하고 손잡아주고 이야기 들어주는 정도로 만족하겠다고요. 치유활동가라고 하니 두려움이 생긴다고 하시죠. 그게 자격증 없는 이들이 갖는 사람에 대한 건강한 두려움입니다. 그건 치유자 역할을 할 때에 굉장히 중요한 덕목이에요. 자격증 있는 이들은 사람에 대해서 갖는 건강한 두려움이 없어요. 왜냐하면 자격증이 있으니까, 그리고 뭔가 지식이 있다고 생각을 하니까. 그런 이들이 오히려 더 많은 상처를 줘요. 인간에 대한 건강한 두려움을 가진 사람이 치유자로서 더 적합하다고 생각하기에 저는 이런 모델을 구상했어요. 그러니까 이 치유프로젝트는 다시 본질로 돌아가자는 프로그램이에요. 자기가 치유를 받아야 돼요. 한 인간으로 참여해서 스스로 치유적인 경험을 하면 치유가 무엇인지 체득하게 되는 거죠. 그렇게 정서적인 체득을 먼저 한 다음에, 근데 우리가 왜 좋아졌지? 내가 왜 편안해졌지? 이런 것들을 지적(知的)으로 정리할 수 있도록 도와드려요. 그리고 진행하기 전에 리허설하는 걸 봐드려요. 실제 진행할 때도 관리자가 따라가서 보고요. 이런 구조로 되어 있어요. 그런데 관리자나 리허설 도와주는 사람이 이전 단계에서 이미 이걸 해보신 분이에요. 세월호 트라우마는 안산의 거의 대부분 사람들이 치유자가 되어야 해결할 수 있어요. 전문가 몇명한테 의지해선 할 수 없어요.

제가 여기서 말씀드리는 치유는 전문적인 상담기법을 얘기하는 건 아니에요. 비유를 하자면요, 우리가 집밥을 만들 수 있잖아요. 자격증 없어도 아무나 조금 덜 맛있든 어쩌든 만들어 먹고 살잖아요. 그리고 심지어 고급요리는 안 먹어도 문제가 없는데, 집밥을 오래 못 먹으면 사람이 정서적으로도 문제가 생겨요. 그러니까 맛은 덜해도 집밥은 우리한테 심리적으로 중요한 바탕이 되는 요소란 말이죠. 지금 제가 말하는 치유는, 시민들이 모두 치유활동가가 되어 집밥을 만드는 과정이에요. 고도의 정신질환이 있어서 의료적인 개입을 해야 되는 경우는 물론 전문가한테 보내야죠. 거기 가서 입원을 하거나 약을 먹거나 해야죠. 그런데 지금 얘기하는 것은 일상적으로 살다가 생기는 여러가지 심리적인 어려움들이에요. 심하지 않은 찰과상에는 병원 가서 줄 서지 않고 집집마다 있는 상비약으로 치료하잖아요. 그런 것은 우리가 해결할 수 있지요. 심리적인 영역에서도 그런 부분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가정상비약같이.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스트레스나 심리적 어려움에 대처하는 치유는 우리가 스스로 처리할 수 있어야 되는 거예요. 우리가 더 잘할 수 있는 영역이 있어요. 이 프로그램은 그러한 치유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공유하는 거예요. 그리고 정신과의사 대부분은 인생에서 닥쳐오는 일반적인 심리적 어려움에 대한 전문가가 아니에요. 정신질환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의학적 치료를 하는 사람들이고, 그 의학적 조치를 할 수 있는 자격증이 있는 사람들이죠. 정신과의사들이 인간의 고통, 상처를 다 해결할 수 있는 훈련을 받지도 않았어요.

 

 

다양한 피해자들에 대한 섬세한 이해와 배려가 필요한 때

 

진은영 결국 세월호참사 유가족의 모든 이웃집에 천사들이 살도록 하는 프로젝트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그렇다면 ‘이웃’의 핵심활동 중 하나는 이웃 치유활동가를 양성하는 것이겠고요. 안산지역의 이웃 치유활동가 100명 양성이 목표라는 이야기도 들은 것 같습니다. 그밖에 ‘이웃’을 꾸려가고 유가족을 만나면서 특별히 어떤 점을 염두에 두고 계신지요?

 

정혜신 피해자 그룹에서 특정 집단에 집중적으로 감정이입을 하다보면 다른 집단한테는 본의 아니게 상처를 주거나 안티세력을 만들 수 있어서 그 부분을 세심하게 배려하면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섬세하게 움직이려면 피해자 그룹에도 여러 층위가 있고 그 관계가 복잡하다는 것을 아셔야 해요. 일반인 희생자 유가족이 있고 실종학생 가족이 있고 희생학생 유가족이 있어요. 그리고 생존학생과 그 부모도 있고 단원고 선생님들도 있어요. 안산지역에서 초등학생과 중학생을 가르치던 주변의 교사들이 있고요. 단원고는 아니지만 중학교 때 친구들이 많이 죽은 학생들이 있고, 단원고에도 세월호에 탑승했던 2학년뿐 아니라 1학년, 3학년 학생도 있어요. 또 그 1학년과 3학년의 학부모들이 있고요. 그러니까 피해자군의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어요. 그런 상황에서 2학년 아이들에 대해서 계속 이야기하고 2학년 학부모만 계속 발언하면 3학년 학부모는 반감이 생길 수 있어요. 2학년 학부모와 생존학생한테요. 그런 점들을 고려하지 않으면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피해자 사이에 상대적인 가해자와 피해자가 다시 생겨요. 그리고 이런 문제가 조화롭게 처리되지 않으면, 극단적인 가정(假定)이지만 3학년 부모들이 밖에 나가서 생존자 부모에 대한 안티세력이 될 수도 있다는 거죠. 그런 갈등의 고리가 여러 층위로 있어요.

세월호 탑승자 안에서도 비슷한 갈등이 생겨나죠. 실종자, 생존자, 유가족이 대책위를 같이하잖아요, 생존자 가족 중에서는 전체 회의에 갔다 오면 많이 힘들어하는 분도 있어요. 유가족 입장을 생각하면 자기 의견이나 감정, 생각 등 많은 걸 눌러야 하기 때문이지요. 생존학생 부모도 천형과 같이 짊어져야 되는 짐이 있는 거예요. 생존자 아이가 보이는 트라우마 때문에 씨름하는 부모는요, 자신이 어려운 건 아무도 모른다고 느낍니다. 요즘 점점 아이들이 약 처방받는 경우가 늘어나고, 당시의 얘기들을 초기보다 더 적극적으로 하기 시작해요. 그러니까 부모가 감당하기가 어려운 거예요. 부모들도 맨날 우시고요. 지금까지는 살아 돌아온 아이가 여러 문제를 일으키고 아이 관리를 하느라 이야기를 못했는데 요즘 차츰 본인이 받은 트라우마를 이야기하기 시작해요. 사고현장에서 아이를 찾기 직전까지의 그 시간이 있잖아요. 그 순간 자기의 감정상태, 그때 자기가 상상했던 것, 만약에 아이를 못 찾으면 나는 어떻게 하나 하는 극도의 불안감을 슬로우비디오처럼 순간순간 떠올리게 되는 증상을 공통적으로 겪고 있어요. 지금까지는 한번도 떠올려보지 못했던 거죠.

그 트라우마 때문에 부모님들의 불안이 전체적으로 높아져 있거든요. 그러니까 아이들 통제를 과하게 하게 되지요. 그래서 애들이 심리적으로 퇴행을 하거나, 아니면 거세게 반발을 하거나 양쪽으로 가게 되는 거예요. 굉장히 비합리적인 수준까지 아이를 통제하는 기저에는 부모들의 트라우마가 있는 겁니다. 부모 자신의 불안이 통제가 안돼서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상담을 해야 하지만 부모치료도 중요한 겁니다. 그런데 이런 얘기를 유가족 앞에서는 정말로 하기 힘든 거죠. 유가족이 이 사실을 알면, 이해하기 어려우니까요. 유가족 입장에서는 어떤 고문을 당한다 해도 아이만 살아 있다면 백번이고 천번이고 받아들이겠다는 마음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우리는 지금도 이렇게 싸우고 있는데, 당신들은 자식도 살아 돌아왔는데 그런 게 뭐가 걱정이냐, 이런 섭섭한 마음이 들게 되는 거죠. 그런데 모든 고통은 개별적인 것이고, 주관적인 것이고, 내 손톱 밑에 가시 박힌 것과 옆 사람 몸이 썩어 들어가는 게 다르지 않을 수 있는 것이 사람임을, 각자가 자신에게 너무나 무거운 고통을 가지고 있음을 쉽지 않지만 받아들이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생존학생을 비롯해 세월호 피해자들이 다시 2차, 3차 트라우마를 겪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추모의 여러 과정에 자연스럽게 참여하면서 치유의 과정을 경험해야 하는데 그러기 힘든 장벽들이 존재해요. 예를 들면 아이들이 초기에 악성 댓글로 너무 큰 상처를 받았어요. 사실 아이들이 12일 도보행진 참여 문제로 그전 몇날 며칠을 토론했어요. 유가족 부모들이 국회에 가서 노숙하고 농성하는 걸 보며 아이들이 무언가 하고 싶어했어요. 자기 친구들 그리고 그 부모님들께 해줄 게 아무 것도 없다, 그러니 이거라도 하자. 그래서 도보여행에 참여하려고 하는데 한편으로는 그간의 악플 때문에 부담과 염려가 되는 거예요. 그때만 해도 인터넷 검색창에 ‘단원고’를 치면 ‘특례입학’이 연관검색어로 나왔어요. 이렇게 매도하니까 아이들의 건강한 반응이 자연스럽게 나오기가 힘들어졌어요.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생존학생 부모들이 악플로 아이들이 상처받는 것을 보면서 보수화되는 부분이 있지요. 불안, 두려움, 이런 것들도 이해받고 존중받아야 되는 감정이에요. 아이의 내면상태와 부모의 트라우마로 인한 불안과 두려움을 고려하면 평상시처럼 합리적인 사고체계가 작동하지 못한다는 것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그러니까 세월호 유가족에 대한 ‘일베’류의 악플뿐 아니라 생존학생 부모들의 소극적이거나 방어적인 태도에 대해 너무 쉽게 이기적이고 보수적이라고 비난하시는 것도 지양하셨으면 합니다.

 

 

치유과정은 예술적이어야 합니다

 

진은영 단원고 희생자 유예은 학생의 열일곱살 생일이 지난 1015일이었죠. 선생님께서 제게 ‘이웃’에서 열리는 예은이 생일모임에서 예은이가 가족과 친구들에게 전하는 말을 시로 써달라고 요청하셨습니다. 세상 떠난 아이의 마음에 내가 과연 다가갈 수 있을까, 자신의 삶보다 더 소중했던 아이를 잃은 부모 마음을 어떤 언어의 결로 어루만질 수 있을까 도무지 자신이 없어 몇시간을 고민했습니다. 그런데 예은이의 마음과 목소리를 담기 위해서 예은이 아빠 유경근씨의 페이스북도 열심히 기웃거리고 예은이가 친구들과 봄날 벚꽃 아래서 노래 부르던 동영상이나 해질녘 해먹에 누워 있는 사진을 오랜 시간 물끄러미 바라보며 지낸 일주일이 저에게는 참 특별하고 치유적이었어요. 그렇게 예은이 시를 쓰고 난 뒤에는 세상 떠난 아이의 도움과 지원을 받아 넝마처럼 너덜거리는 세상을 조금씩 매만지고 고쳐볼 수 있을 것 같은 용기가 생겼어요. 저처럼 시나 소설을 쓰는 사람들, 그리고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체험을 통해 예술적 치유의 순간을 자주 만나기도 하는데요. 선생님도 문학이나 예술을 단순히 치유의 수단이나 매개로 사용하는 것을 넘어, 치유의 예술성을 믿고 계신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선생님이 노란 편지쓰기 작업을 하시는 것, 그리고 시를 통해 희생자 아이의 목소리를 전하고 가족과 친구들이 교감하게 하는 것 등은 치유과정에 문학, 더 넓게는 글쓰기 활동을 아주 깊숙이 개입시키는 작업인 듯합니다. 예술의 치유적 능력과 치유의 예술성에 대한 선생님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정혜신 저는 정신의학에서 말하는 정신분석이라는 말 자체가 마음에 안 드는데, 그런 기능적인 접근으로는 사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느낌이 있어요. 예술이야말로 사람을 온전히 이해하게 해주는 하나의 관점, 태도라고 봐요. 예술적이어야 치유적이고 치유적인 것은 반드시 예술적이라고 보는 거죠. 단순히 미술치료, 음악치료, 동작치료 이런 걸 말하는 게 아니에요. 예술치료라고 할 때의 예술은 아름다움의 극치를 말하는 건데, 어떤 사람은 음악을 들으면서 자기 안의 어떤 아름다움이 자극받는 순간을 경험하고 어떤 사람은 시골집을 지나다가 아기옷이 빨랫줄에 걸려 있는 걸 보면서 아름다움의 극단을 느낄 수 있는 거잖아요. 저는 그런 것들을 다 예술성이라고 봐요. 그러니까 지금 이렇게 죽을 만큼 고통스럽고 삶이 산산조각 난 것 같은 사람이, 예를 들어 누가 호박을 쪄온 걸 보고 문득 ‘그래 호박이 나올 때가 되었지’ 하고 생각하는 것, 그것도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 기운이 결국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런 미세한 떨림을 일상에서 많이 느끼면 느낄수록 온전하게 치유가 되는 것이지, 분석하고 설명하고 해법을 제시하는 것이 치유가 아니라는 거죠. 모든 인간은 (자기)치유적이에요. 아름다움을 많이 느끼면 느낄수록 더 그렇게 되는데, 그런 아름다움이 바로 사람한테 주는 치유적 자극이라고 봐요.

 

진은영 치유공간 ‘이웃’이 아름다움의 힘으로 이 모든 고통과 슬픔의 의미를 이해하려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곳이 되었으면 합니다. 소중한 말씀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정혜신 고맙습니다. 지금까진 ‘이웃’을 방문하고 싶다는 시민들에게 조금 더 기다려달라고 했었어요. 유가족들이 이 공간에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해서요. 그런데 이제는 시민들의 방문이 문제가 되지 않을 듯해요. 오히려 유가족에게 힘이 될 것 같습니다.(2014.10.24 치유공간 ‘이웃’)

 

 

에필로그: 사랑의 과학을 위하여

 

1906년 미국의 쌘프란시스코에서 지진이 발생해 3천명이 죽고 도시가 초토화되었을 때, 현장에 있던 작가 매리 오스틴(Mary Austin)은 많은 시민들이 집은 잃었지만 가정은 잃지 않았다고 전했다. “시민들이 단순히 벽과 가구가 있는 장소 대신 가정이 될 만한 장소와 정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월호참사로 아이와 가족을 잃은 사람들 곁에서 고통스럽게 말한다. 가정을 잃었지만 삶을 잃어선 안된다고. 그러나 냉정히 말해 우리는 가정을 잃은 사람들에게 삶을 이어갈 장소와 정신을 제공하는 대신, 죽은 아이들과 겨우 살아 돌아온 아이들을 참담할 정도로 모욕했으며 사건의 진실을 밝혀달라는 가족의 애원을 묵살했다.

치유공간 ‘이웃’에 들어섰을 때 내가 처음 느낀 것은 안도감이었다. 유가족이 잠깐이라도 쉬고 그리워하며 삶을 이어갈 장소가 있다는 걸 눈으로 확인했기 때문이다. 물속에서 아이들을 데려온 이야기며 아이 없는 집에 들어가는 기분이며 진실을 밝히려는 과정에 참여하면서 생기는 새로운 상처와 고민까지 수많은 이야기가 흘러다니는 장소였다. 정혜신 선생과 대화를 나누었던 유난히 밝은 방은 각별히 방음에 신경을 썼다고 한다. “제대로 울 곳조차 없는 이들을 위한 장소예요”라고 소개하던 그녀의 따듯한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참 섬세하고 시적인 배려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어지는 설명은 이랬다. 아이 잃고 집에 돌아온 밤, 부모가 통곡을 하니 옆집에서 따라 울었다. 밤마다 울음소리가 이어졌다. 그러다 100일쯤 지나자 옆집에서 신고를 했다고 한다. 야박한 이야기로 들리지만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아이 잃은 부모를 생각하면 여전히 안됐고 아이가 그리 된 것도 한없이 가엾지만 출근도 하고 내 아이를 학교에도 보내야 하는 입장에서는 밤새 들려오는 울음소리를 계속 듣고 있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런 이웃의 고충을 알기에 부모들은 목놓아 울지 못하고 숨죽이며 흐느낀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방해받지 않고 아무 때나 달려와서 실컷 울 수 있는 공간이 꼭 필요했다.

정혜신 선생의 ‘이웃치유자’는 감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상처받은 이들의 상황을 잘 관찰하고 그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치밀하게 헤아리는 기민한 정신의 결과물이다. 그녀는 사랑의 과학자다. 이웃에 대한 환대와 사랑은 아둔할 정도의 희생적이고 선량한 마음을 통해 실현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 마음의 신비가 강조될수록 우리는 무력감과 자괴감에 빠진다. 소수의 몇몇을 제외하면 우리는 이웃에 가닿을 만큼의 신성을 가지고 있긴커녕 생계 때문에 사랑의 순결을 유보해야 하는 무력하고 불완전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내가 만난 그녀는 이웃집 천사가 되기 위해 위대한 사랑이 필요하다고 강변하지 않았다. 다만, 부서지기 쉬운 존재들이라서 우리가 서로 사랑할 수 있다는 것과 그래서 다가가고 사랑하는 일에도 배움이 필요하다고 그녀는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