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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 한국의‘보수세력’을 진단한다 ①

 

한국 종교의 보수성을 어떻게 볼까

개신교를 중심으로

 

 

박노자 朴露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동아시아학 및 한국학 교수. 저서로 『당신들의 대한민국』(전2권) 『하얀 가면의 제국』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나를 배반한 역사』 등이 있음.

 

강인철 姜仁哲

한신대 종교문화학과 교수. 저서로 『한국 기독교회와 국가, 시민사회: 1945∼1960』 『전쟁과 종교』 『한국의 개신교와 반공주의』 『한국의 종교, 정치, 국가: 1945~2012』 등이 있음.

 

진보와 보수, 개신교의 분기(分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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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朴露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동아시아학 및 한국학 교수. 저서로 『당신들의 대한민국』(전2권) 『하얀 가면의 제국』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나를 배반한 역사』 등이 있음.

박노자 『창작과비평』 이번 호가 창간 50주년 기념호라고 들었습니다. 이런 뜻깊은 자리에서 한국의 개신교에 대해, 이 분야의 전문가이신 선생님께 질문 드리고 함께 한국적 근대, 자본, 그리고 종교라는 거대 맥락과 연결시켜 논의할 기회가 생겨 매우 기쁩니다. 『창비』에서 저희 대담에 이어 한국사회의 보수성 문제를 지속적으로 다룬다는데, 후속논의도 흥미로울 것 같습니다. 저는 한국 불교를 전공 삼아 공부해왔지만, 개신교에 대해서는 사실 문외한에 가깝습니다. 일단 총론적인 부분부터 말씀드리자면, 대개 불가 안에서는 ‘불교 근대화의 실패’를 자주 한탄하곤 하는 것을 아시죠? 아무래도 근대 민족주의·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한 거승대덕(巨僧大德)이라면 만해 한용운 스님 외에는 거의 보이지 않는 불교 입장에서는 개신교의 처지가 부럽긴 합니다. 초기 민족주의 운동가들을 보면, 김규식 서재필 안창호부터 시작해서 개신교의 기여도가 눈에 띄고, 병원이나 학교 설립 등으로 물질적·제도적 근대화에 기여한 것도 한눈에 바로 보입니다. 거기에다 1970~80년대 사회운동에서는 민중불교보다 민중신학의 비중이 훨씬 컸기에, ‘개신교’와 ‘근대성’을 동일시하는 태도도 이제 거의 상식이 된 셈입니다. 경쟁자라고 할 수 있는 타 종교 입장에서도 사실 그렇죠.

그런데 일면으로 보면, 개신교에는 서로 다른 두개의 종교가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한쪽에는 소수지만 한백교회 등으로 대표되는 민중신학의 기독교, 즉 급진적인 기독교와 역시 일부지만 다소 자유주의적 경향의 목사들이 있습니다. 한데 나머지, 즉 ‘일반’의 개신교를 보면 전혀 다른 그림이 펼쳐집니다. 예컨대 기본적인 신앙 형태의 차원에서는 그런 ‘일반’의 개신교가 과연 그렇게까지 현재적 의미에서 ‘근대적’인가, 즉 여타의 한국 종교들과 그렇게까지 다른가라는 질문부터 절로 생깁니다. 사실, 과학적 합리성이 확립된 근대에 와서는 “신에게 빌어서, 제물을 바쳐서 복을 얻는다”는 ‘교환형 접신’이랄까, 일종의 시혜/수혜적 절대자와의 관계랄까 하는 것 자체가 과연 어느 정도 여전히 유의미한가 자문해볼 수 있죠. 전통적인 ‘기도’라는 것이 결국 자신의 공포심 내지 불안심리를 잠재우는 심적 장치라는 것도 종교인까지 대체로 인식할 것입니다. 그런 일이라면 기도로도 명상으로도 마음챙김 등 여러 방법으로 할 수 있는데, 기도한다 해도 더이상 그 기도가 초자연적 효과를 가져오리라고 그다지 믿지 않는 게 ‘근대’가 아닌가 싶습니다. 근대, 특히 자본주의 후기 도심인의 종교란, 결국 ‘마음 조절’의 한 방식으로 자리잡아간다는 것이 종교학에서의 정설인 듯합니다. 한데, 한국 개신교는 위에서 언급한 불교 등과 그다지 다르지 않게 여전히 ‘기도’와 ‘은총’의 종교 같습니다. 즉 전통사회나 근대 도심소비사회 발달 이전의 초기 근대적인 ‘초자연적인 힘에의 의존, 그리고 물질적 시혜 기대’라는 집단심리를 그대로 보유하는 듯합니다. 이런 기복종교로서의 한국 개신교의 그다지 ‘근대 발전적’이지 않은 모습에 대해 그 안에서는 과연 어떻게 인식하는지, 그리고 학술적으로 어떻게 해명해야 할지 고견을 여쭈어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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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철姜仁哲 한신대 종교문화학과 교수. 저서로 『한국 기독교회와 국가, 시민사회: 1945∼1960』 『전쟁과 종교』 『한국의 개신교와 반공주의』 『한국의 종교, 정치, 국가: 1945~2012』 등이 있음.

강인철 저 역시 박노자 선생님과 뜻깊은 대화의 기회를 갖게 되어 무척 기쁩니다. 박선생님 말씀대로 기복주의 신앙이 개신교 전반에 널리 퍼져 있고, 그것이 근대사회와 어울리지 않는 듯 보이며, 여러가지 부정적 결과를 낳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다만 이 주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전에, 지난 수십년 동안 한국 개신교의 핵심적인 특징으로 굳어져온 것, 굳이 이름 붙이자면 ‘두개의 개신교’ 현상이라고 부를 만한 것에 대해 미리 언급해두는 게 불필요한 오해와 논란을 막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우리 사회의 개신교가 단일하지도 동질적이지도 않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같은 그리스도교이면서도 한국 전래(傳來) 후 줄곧 단일교단 체제를 유지해온 천주교와 대조되는 개신교만의 특징이기도 하지요. 개신교의 교파주의는 선교 초기부터 유명했지만, 1950년대 이후 교파 분열을 연이어 겪으면서 더욱 심해졌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파악한 바로는 2008년 현재 개신교로 분류되는 교단의 수가 무려 291개에 달했습니다. 여러 유형화 방식이 가능하겠으나, 정치적·사회적 성향을 기준 삼을 경우엔 개신교를 두 그룹으로 나누는 게 유용할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 지난 반세기 동안 정치·사회적으로 뚜렷하게 구분되는 개신교 내부의 두 흐름 내지 세력이 갈등적으로 공존해왔다고 보는 것이지요.

 

 

보수 우위로의 세력관계 역전

 

제 판단으론 한국에서 ‘두개의 개신교’ 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나기 시작한 때는 1960년대 후반부터였습니다. 그 이전에는 개신교 내부에서 신학적·교리적 차이주로 자유주의적인 진보신학과 근본주의적인 보수신학 사이의 차이가 점점 현저해졌음에도 정치·사회적 지향 면에선 별다른 차이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이 시기엔 ‘신학적 진보성’이 반드시 ‘정치적 진보성’을 의미하진 않았어요.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고요. 오히려 현세적 구원과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진보신학(참여신학) 쪽이 친일-친독재 등 퇴행적인 정치활동에 더 적극적으로 나설 가능성이 높았던 게 사실입니다. 참여신학의 공허함이랄까요, 사회참여·정치참여를 지지하는 참여신학은 일종의 빈 그릇과도 같은 것이어서, 그 안에는 가장 반동적인 내용물부터 가장 급진적인 내용물까지 모두 담길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다 1960년대에 정치성향의 분화와 신학적·정치적 지향의 수렴이라는 두가지 변화가 중첩되면서 ‘보수 개신교’와 ‘진보 개신교’라는 양대 세력이 모습을 드러내게 됩니다. 이후 보수와 진보 진영은 각각 자신의 정치·사회적 입장을 정당화하는 세련된 신학적 기반까지 갖춤으로써 비교적 일관된 태도를 유지하게 됩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를 중심으로 결집한 진보 개신교가 반체제적인 민주화운동·인권운동·민중운동에 나섰던 반면, 보수 개신교는 겉으로는 성속이원론-정교분리론을 내세우면서도 기존 체제에 대해 지지와 순응의 태도를 보였던 것이 1960~80년대의 지배적인 패턴이었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개신교 교세의 70~80%를 차지할 만큼 보수 개신교의 양적 우위가 명백했음에도 이 시기에 한국 개신교를 대외적으로 대표했던 것은 소수파인 진보 개신교였다는 것입니다. 보수 개신교를 구성하는 교단들의 분산성·분열성·비조직성과 대조적으로, 진보 개신교 세력은 단단하게 결속했고 세계교회협의회(WCC)나 외국계 선교회 등 개신교 국제네트워크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당시 NCCK 내부에도 보수성향 인사들이 꽤 많았죠. 그러나 군사정권과의 격렬한 충돌로 희생자가 속출하는 상황에서 이들은 자기의 보수적 목소리를 자제하면서 진보적 소수파에게 ‘조용한 동조’를 보내는 편이었습니다. 이런 요인들이 ‘저항적 소수의 주도성’을 뒷받침했고, 그로 인해 당시 개신교의 사회적 이미지도 진보 쪽에 가깝게 형성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가 민주화 이행기로 접어든 1980년대말부터 보수와 진보 개신교 간의 세력관계는 역전되었고, 그에 따라 한국 개신교의 대외적 대표성도, 개신교에 대한 사회적 이미지도 모두 보수 쪽으로 확연히 기울었습니다. 1960~80년대를 거치면서 보수와 진보 개신교 사이의 양적 격차는 더욱 벌어졌습니다. 이 기간의 보수적인 교단 및 교회는 진보적 교단·교회에 비해 훨씬 빠른 양적 성장을 구가했습니다. 또 이 시기에 많은 교회들이 세계적인 초대형교회로 성장했습니다. 예컨대 1993년에 미국 잡지인 『크리스천 월드』가 선정한 ‘세계 50대 개신교회’ 중 절반에 가까운 23곳이 한국 교회였습니다. 같은해에 신자수 70만명을 넘어 세계 최대 교회로 기네스북에 오른 여의도순복음교회를 비롯하여, 세계 최대의 장로교회, 세계 최대의 감리교회가 모두 한국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초대형교회들 중 ‘진보 개신교’ 성향은 단 한곳도 없습니다.

지난 30년 동안 한국 개신교 지형에서 일어난 변화는 ‘보수 헤게모니의 확장’으로 압축될 수 있습니다. 그 요인으로 네가지를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 보수 개신교의 조직력이 전례 없이 강해졌습니다. 특히 1989년에 창립된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가 지리멸렬했던 보수 개신교를 강하게 통합하는 구심체로 등장했습니다. 둘째, NCCK 내부에서도 교회와 국가의 충돌 시기에 침묵했던 보수파가 ‘독자적인 목소리 내기’ 내지 ‘자기권리 찾기’에 나섬으로써 진보적 소수파의 입지를 더욱 위축시켰습니다. 셋째, NCCK1996년에 보수 교단인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여의도순복음교회로 대표되는를 회원으로 영입함으로써 NCCK 내에서조차 보수 헤게모니가 확고부동한 현실이 되었습니다. 넷째, 한기총은 NCCK와의 개신교 대표성 경쟁에서 점점 우위에 서게 되었고, 이런 상황을 배경으로 2000년대초에는 비록 성공하진 못했지만 NCCK를 아예 흡수통합하려 시도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NCCK가 미국 등 서구 교회들의 지원 감소로 재정난에 허덕이는 가운데, 2000년대 이후 보수 개신교가 조직과 재정 등 거의 모든 측면에서 진보 개신교를 압도하게 된 것이지요.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1980년대말 이후의 또다른 변화는 보수 개신교가 종전의 성속이원론-정교분리론이라는 외투마저 벗어던지고 직접적인 사회참여·정치참여 노선으로 선회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한기총이 보수 개신교의 사회참여를 주도했고, 노무현정부가 출범한 2003년초부터는 도심 광장에서 대규모 집회와 시위를 벌이는 ‘정치적 행동주의’ 단계로 성큼 나아갔습니다. 실상 초대형교회 두세곳만 힘을 모으면 몇만명이 참석하는 시국기도회의 웅장한 스펙터클을 만들어내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이들이 정치무대에 빈번하게 출현하게 되자, 자연스럽게 보수 개신교가 언론과 대중의 집중적인 관심을 끌게 되었습니다. 이를 배경으로 ‘종교권력’ 담론이 등장하기도 했지요. ‘애국 기독교’라는 보수언론의 찬사가 쏟아지는 가운데 보수 개신교는 (허수가 많은 재향군인회, 자유총연맹이나 다른 관변단체들을 제치고) ‘시민사회의 최대 보수세력’으로 화려하게 등극했습니다. 이런 현실을 감안해서 이번 대화에서도 ‘두개의 개신교’라는 현실에 유념하되 논의의 초점을 보수 개신교 쪽에 맞추었으면 좋겠습니다.

 

 

기복주의의 확산과 한국적 자본주의로의 포섭

 

이쯤에서 원래 주제인 개신교의 기복주의 신앙 문제로 돌아가보죠. 기복주의에 대한 학계의 관심은 대부분 그것의 역사적 기원 문제에 쏠려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와 관련해선 외래종교인 개신교가 조선의 현세구복적(現世求福的) 종교문화와 만나 토착화 내지 문화접변을 겪는 과정에서 독특한 기복주의 신앙이 형성되고 확산되었다는 게 가장 널리 퍼진 견해 같습니다. 이 경우 개신교 기복주의 신앙의 시작은 19세기말로까지 소급되는 셈인데요. 그렇지만 제가 보기엔 한국의 전통적 종교문화가 과연 현세구복적인지도 의심스럽고, 같은 그리스도교이면서도 개신교보다 100년이나 먼저 들어온 천주교에선 왜 기복주의 논란이 적은지를 설명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기복주의 신앙의 기원을 식민지시기 외국인 선교사들의 성속이원론-정교분리주의에서 찾는 게 그나마 조금은 더 설득력이 있지 않나 싶어요. 선교사들이 성속이원론-정교분리를 내세워 현실참여 자체를 죄악시하니, 내세 지향적 신비주의나 현세 지향적 기복주의 등 내향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신앙형태로 흐르기 쉬웠던 게 아닐까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제가 보기에 개신교 기복주의가 본격적으로 확산되고 번성한 시기는 해방 후, 특히 급속한 산업화가 이루어진 1960년대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요컨대 개신교의 기복주의는 시대에 뒤떨어진 ‘전근대적’ 신앙형태가 아니며, 오히려 ‘한국적 근대’에 성공적으로 적응한 신앙형태일 가능성이 높다는 겁니다. 1960년대의 한국에서는 성령체험을 통한 거듭남을 강조하면서도 건강이나 재물 같은 현세적 축복을 동시에 강조하는 신오순절주의(neo-pentecostalism) 신앙이 빠르게 확산됩니다. 세계 최대의 개신교회로 성장한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의 ‘삼박자 구원론’ ‘삼중 축복론’이 대표적인 사례인데요, 예수 믿고 구원받는 영적 축복이 재물·물질의 축복, 치유·건강의 축복까지 동반한다는 구원론입니다. 부()의 추구가 탐욕으로 비난받기는커녕 신의 축복의 증거로서 긍정적으로 재해석되는 가운데, 한국 개신교는 ‘부와 건강의 종교’로 거듭났던 것입니다. 1970년대 이후 개신교는 부유층과 부자동네에서 유난히 강세를 보이고 있기도 합니다. 앞에서 한국 개신교회 특유의 ‘초대형화 현상’에 대해 언급했지만, 대형화된 교회들은 대개 여의도·강남·분당신도시 등 수도권과 전국 대도시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2000년대 이후 발표된 한국상장회사협의회의 연례보고서들에 따르면, ‘상장사 임원의 전형’은 줄곧 “서울 강남에 사는 50대 남성 개신교인”이었고, 종교를 가진 상장회사 임원의 절반가량이 개신교인이었습니다.

기복주의는 이처럼 한국적 근대에 적응한 신앙형태일 뿐 아니라, 개신교가 ‘한국적 자본주의 질서’에 한편으론 적응하고 한편으론 포획되었음을 입증하는 지표이기도 합니다. 자본주의 질서로의 적응과 포획이라는 이 측면은 우리가 개인기복주의적인 개개 신자들보다는 집단과 조직, 즉 교회에 주목할 때 훨씬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상층계급 성원들이 교회조직의 상층부를 차지하는 방식으로 자본주의적 계급질서가 교회 안에 고스란히 이식·재현되고 있습니다. 또 기복주의라는 비옥한 토양 위에서 시장논리가 종교 영역으로 깊숙이 침투하면서 종교의 상품화 및 산업화 경향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교회들이 점점 기업조직과 비슷해지는 ‘교회의 기업화’ 양상 또한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교회를 주식회사영혼주식회사에 빗대기도 하지만, 많은 대형교회들은 오히려 재벌체제를 닮아가는 것 같습니다. 일부 초대형교회의 실질 자산가치가 수조원에 달한다거나 사랑의교회가 예배당 건축에만 2천억원 이상을 쏟아부은 사례에서 확인되듯이 초대형교회들의 자산과 자금동원력은 엄청납니다. 많은 초대형교회들이 종교 영역 내부로는 곳곳에 지()교회(지성전)를 세워 ‘수직적 계열화’를 이루고, 종교 영역 외부로는 신문·방송사, 대학·학교법인, 민영교도소, 사회복지기관, 병원, 납골묘원 등을 설립하거나 인수하여 ‘수평적 계열화’를 이룸으로써 재벌처럼 문어발식 확장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교인들의 공동자산이자 공적 자산인 교회를 사유화하여 가족에게 세습하고, 은퇴 이후에도 원로목사로 남아 수렴청정을 하는 모습도 재벌가의 모습과 유사합니다. 회사자금을 마음대로 사용하는 재벌 회장들처럼 담임목사가 아무 간섭 없이 교회 돈을 함부로 사용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대부분의 교회가 유아교육기관, 교육관, 주차장, 교회묘지·납골당, 수양관 등을 완비한 ‘규모의 경제’를 추구함으로써 종교시장에서의 경쟁력 강화를 도모하는데, 이 경쟁의 패배자는 (타종교 교당이 아닌) 인근 지역의 군소 개신교회가 되기 십상입니다. 개신교 교세가 정체 내지 퇴보하기 시작한 1990년대 이후에도 소형교회 신자가 대형교회로 ‘수평이동’함에 따라 대형교회가 더욱 비대해지면서 부익부 빈익빈의 교회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주변 개신교회들이 협력대상이 아닌 경쟁상대로 간주되는 셈인데, 개신교 내부에서조차 시장경쟁논리가 관철된 것입니다. 이밖에도 ‘교회 장사’일 수밖에 없는 교회 매매가 성행하고, 전임자에게 전별금이라는 명목의 거액을 제공하면서 담임목사 지위를 사실상 구매하는 일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한국 개신교 특유의 극심한 교단 분열 때문에 대부분의 교단이 재정적으로 빈곤해졌고, 젊은 성직자들이 교회를 신설하려 해도 교단에서 아무런 재정적 도움도 주지 못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오로지 자기 힘만으로, 온전히 자기 책임 아래 감당하기 어려운 거액을 투입하여 교회를 개척한 젊은 목회자들은 절박한 생존압력 때문에라도 자연스레 비즈니스 마인드나 투자-수익의 관점에 젖어들기 쉽습니다. 요행히 교회의 양적 성장에 성공할 경우 이 교회의 목사들은 필경 교회를 자신의 사유물처럼 여길 가능성이 높을 것입니다.

 

 

배타성의 근원, ‘영적 전쟁’ 프레임

 

박노자 정치적 차원에서 ‘근대성’이란 아마도 오늘날의 의미에서는 예컨대 자유주의, 절차적 민주주의, 국제평화나 다양성 존중 및 타자 이해에 해당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자본주의후기인 오늘날에 전통적인 기독교 지역들의 도심인 입장에서 본다면 아무래도 ‘십자군’식의 이슬람관보다 기독교와 이슬람교 공존을 모색하는 쪽이 더 근대적일 것이고, 총동원식 권위주의 질서보다 각자의 권리들을 챙길 줄 아는 자유민주주의적 질서가 더 근대적일 것입니다. 한데, 한국 개신교의 경우 수많은 보수 교회들의 입장은 이와 정반대입니다. 한국의 주된 ‘타자’인 북한에 대해서는 ‘이해하려는’ 입장이라기보다 공격적 선교 등으로 주체사상을 기독교로 대체하려는 공세적 입장이고, 절차적 민주주의나 자유주의를 경시해온 박근혜정권을 지지하면서 박정희정권의 총동원형 권위주의에 대해서는 전혀 비판적이지도 않습니다. 역시 개신교 집단 내부에서 이 부분에 대한 의식이 어떻고, 이를 어떻게 분석할 수 있는지 여쭈어보고 싶네요.

 

강인철 지적하신 바에 깊이 공감합니다. 대체로 한국의 보수 개신교는 글로벌 시대의 규범인 관용과 공존의 다원주의적 윤리와는 거리가 멉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타자를, 나아가 ‘타자의 타자’를 만들어내고 부정적 낙인을 찍고 저주를 퍼붓고 공격적인 태도를 드러냅니다. 대체 왜들 이럴까요? 저는 보수 개신교인들 사이에 널리 퍼진 영적 전쟁(spiritual warfare) 프레임이 이와 깊은 관계가 있다고 봅니다. 영적 전쟁 프레임은 선악이원론에 기초한 우리/그들 대립의 이분법적 세계관, 전쟁이라는 상황 정의, 그리고 이 세상에서의 영적 전투는 궁극적인 선/악 및 진리/거짓의 거대한 힘들이 충돌하는 ‘우주적 전쟁’의 일부라는 인식 등으로 구성됩니다. 영적 전쟁 프레임에서 볼 때, 한국 개신교가 국내외에서 맞서 싸워야 할 주적(主敵)은 단연 공산주의와 이슬람교 두가지입니다. 국내에서는 때때로 불교와 동성애도 개신교의 적수 내지 원수 자리에 놓이는 것 같습니다. 좌익, 무슬림, 불교도, 동성애자는 모두 ‘악한 영()’의 지배 아래 있다고 간주됩니다. 그런데 사탄·마귀 같은 사악한 영의 조종을 받거나 그 앞잡이노릇을 하고 있는 이들과는 대화나 타협·공존 노력 자체가 애초 헛되거나 위험한 것이기에, 이런 프레임을 내면화한 신자들의 정체성은 ‘영적 전사’나 ‘잠재적 순교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특별히 무슬림에 대한 호전적 태도는 보수 개신교가 주도하는 해외선교와 관련이 깊고, 그런 면에서 비교적 최근에 나타난 현상입니다. 한국 개신교의 해외선교는 1980년대말부터 급격히 활성화되어, 2000년대초부터는 한국 개신교가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의 선교대국’이 되었다는 보도가 잇따랐습니다. 2009년말에는 드디어 ‘해외선교사 2만명 시대’를 활짝 열게 되었습니다. 급팽창기로 접어든 1990년대 이후 개신교 해외선교의 특징 중 하나로 이른바 ‘미전도 종족’을 겨냥한 ‘전방개척선교’ 전략이 빠르게 확산되었던 점을 들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크리스천 인구 비율이 낮은 지역들로 선교 인력과 자원을 집중 투입한다는 것인데, 결국 그곳은 이슬람교·불교·힌두교 지역 그리고 현재와 직전의 사회주의사회들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이슬람 및 사회주의 국가들은 외국인의 자국인 대상 선교활동 자체를 불법화하여 처벌하고 있기에, 해외선교에 수반되는 리스크와 긴장이 엄청나게 증폭됩니다. 선교사들은 마치 비밀공작원처럼 기업가·사회사업가·교육자 등으로 신분을 위장할 수밖에 없었고, 그럼에도 체포·투옥·추방되는 선교사가 속출했습니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인질로 붙잡혀 처형당하는 선교사마저 나왔습니다. 해외선교 현장에서 영적 전쟁 프레임에 딱 부합하는 전투적인 상황이 거의 일상화되다시피 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비슷한 시기에 해외선교·포교를 활성화했으면서도 그 대상지역 가운데 이슬람·사회주의 사회의 비중이 낮고, 한인(韓人) 대상 종교활동과 토착 현지인을 위한 비종교적 봉사활동에 주력해온 천주교·불교·원불교·증산도와 개신교의 결정적인 차이였습니다.

긴박한 현지 상황을 전달해주기도 하고 영적 전사들의 무용담을 소개하기도 하는 선교사의 편지와 영상자료, 귀국보고회, 간증집회 등이 선교헌금을 제공하는 신자와 선교 현장 사이에서 매개체 역할을 담당합니다. 매년 수천명의 신자가 휴가나 방학을 이용하여 직접 단기선교여행을 다녀오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를 들어 막 귀국한 단기선교단원들이 주일예배 시간에 나와 자신들이 카이로나 치앙마이의 유서 깊은 사원을 둘러싼 채 “무너져라”라는 통성기도를 함께 바친 후에 소리 높여 ‘십자가 군병’ 같은 찬송을 불렀노라고 자랑스레 보고한다면, 신자들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종종 전해지는 선교사 체포나 폭행, 예배소 방화 등의 소식은공격적이고 정복주의적인 선교로 인한 불필요한 충돌이 아니라잔인하고 야만적인 현지 종교지도자에 의해 일방적으로 희생당한다는 ‘박해-순교 프레임’을 통해 해석되곤 합니다. 현지 충돌의 희생자는 ‘순교자’로 추앙받고 주기적인 기념사업의 대상이 됩니다. 이런 분위기를 배경 삼아 2008년경부터는 국내에서도 반()이슬람 선전, 이슬라모포비아(Islamophobia) 선동이 보수 개신교계에서 본격화되었습니다. 국제결혼 전략이나 이주 전략 등 다양한 음모론 버전이 있지만 대부분 ‘오일머니를 앞세운 이슬람의 한국정복 음모’가 그 핵심입니다. 이명박정부 때의 이슬람채권(수쿠크) 도입 반대운동이나, 최근의 할랄식품단지 건설 반대운동도 동일한 음모론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국내에 거주하는 무슬림 대부분이 가난한 나라에서 온 외국인노동자라는 점에서, 이들에 대한 공격은 인종차별이나 제노포비아의 성격마저 띠고 있습니다.

영적 전쟁 프레임은 다원주의적 가치관과 충돌할 뿐 아니라, 민주주의적 가치들과도 별로 어울리지 않습니다. 적과의 치열한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사령관을 중심으로 일치단결하는 게 중요하므로, 영적 전쟁 프레임은 오히려 전체주의적 사고와 친화적입니다. 교회조직에 대한 충성심과 만장일치는 미덕으로, 민주적 견제와 토론문화는 아까운 시간과 자원을 낭비할 뿐인 악덕으로 치부되기 쉽습니다. 민주적 교회운영을 주장하는 내부 비판자들은 영적 전투를 두려워하는 겁쟁이거나, 눈치만 살피는 이기적인 기회주의자로 몰릴 수도 있습니다. 전래 이래 오랫동안 ‘민주주의의 훈련장’으로 칭송받았던 한국의 개신교회들에서 왜 내부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는지, 나아가 한국사회의 민주화가 진전된 1990년대 이후에 왜 ‘개신교 민주주의의 조종(弔鐘)’일 수밖에 없는 교회세습이 빠르게 확산되는지를 이해하는 데도 영적 전쟁 프레임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세습은 ‘교회 사유화와 성직자 독재의 기묘한 결합’이라는 점에서 교회 내부 민주주의의 완전한 파탄을 의미합니다. 역사가 비교적 짧지만 특정 목사가 설립 혹은 부임 후 몇십년 동안 장기재임하면서 권위주의적 지배체제를 구축한 ‘자수성가형 대형교회’에서 교회의 사유화 및 세습이 가장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설득과 회유가 잘 통하지 않을 때 종교적 독재자들은 스스로 영적 전쟁의 사령관 위치에 서서 세습 반대자를 적그리스도나 사탄의 세력으로 공격해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고 신자들의 집단따돌림을 유도하곤 합니다. 교회세습의 중요한 효과 중 하나는 원로목사의 ‘종신지배’를 보장한다는 것인데, (대형교회들에서 세습이 아닌 정상적 리더십 교체가 종종 원로목사-담임목사 갈등으로 이어지는 반면) 세습일 경우엔 원로목사-담임목사 갈등이 거의 없는 편입니다. 신자들은 그렇게 조용하게 세습체제에 길들여져갑니다.

 

 

반공·반북주의와 십자군식 해외선교의 폐해

 

박노자 요즘 같은 시대에 반공 내지 반북 이야기를 듣는 것은, 무엇보다 경이롭기부터 합니다. 반공은 공산주의 반대를 의미하는데, 북한이 과거에 과연 공산주의를 실천했느냐 아니면 그냥 좌파적인 개발주의 정권이었느냐라는 질문을 떠나서라도, 오늘날 공산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저로서는 불분명하기만 합니다. 지금의 북한은 일부 경제단위들에 노동자 해고권부터 대외무역 자율권까지 부여한 혼합형 경제의 국가입니다. 공산주의와 무관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과거 현실사회주의보다 차라리 1990년대 중반의 중국에 더 가깝습니다. 그렇다면 반북의 근거는 무엇이어야 할까요? 북한의 세습 독재가 반북의 근거라면, 위에서 말씀하신 대형교회들의 세습 목회자를 과연 어떻게 봐야 할지…… 그리고 독재를 싫어하는 게 핵심이라면 둘 다 권위주의적인 ‘북의 김정은, 남의 박근혜’로부터 골고루 거리를 두는 게 논리적이지 않겠습니까?

 

강인철 정말 그렇습니다. 공격할 상대 자체가 거의 다 사라졌다는 점에서 세계사적으로 봐도 분명 죽어가고 있는 반공주의를 왜 한국 개신교는 계속 살아 있게 만들지 못해 안달일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개신교가 오랜 세월에 걸쳐 방대한 ‘반공 인프라’, 다시 말해 반공주의의 활력과 생명력을 유지시키는 반공주의 재생산 기제들을 자체적으로 구축하고 잘 운용해왔기 때문인 것 같아요. 개신교에서 반공주의의 교리화(敎理化) 과정은 식민지시대에 이미 어느정도 완결되었습니다. 개신교의 맹렬한 반공투쟁 덕분에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십자가는 반공의 탁월한 상징으로 자리 잡았고, 같은 시기에 한국 개신교의 압도적 다수 세력인 장로교에선 반공투쟁의 주역인 이북 출신 월남자들이 교권을 장악했습니다. 여기서 개신교 반공 인프라를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지만, 각종 전쟁기념 의례들과 관련 교회력(敎會曆), 서부연회나 평양노회, 황해노회를 비롯한 이른바 ‘망명(亡命)’ 연회·노회 등 개신교에서만 발견되는 독특한 반공 인프라들이 1950년대부터 등장했습니다. 1980년대에는 순교자 기념사업이 본격화되어 순교성지의 개발과 성역화, 성지순례 등이 활발해지는데요, 문제는 개신교 순교자와 순교성지의 거의 전부가 ‘반공 순교자’와 ‘반공 순교성지’였다는 것입니다. 1970~80년대에 민주화운동을 이끈 개신교 지도자들 역시 반공주의자였지만 ‘반공주의의 정치적 오남용’ 문제를 줄기차게 제기하는 등 나름대로 반공주의에 대해 비판적 성찰을 해왔던 데 비해, 보수 개신교 지도자들은 반공주의와 반공투쟁을 성화(聖化)하고 거기에 종교적 성격을 불어넣는 데 매진해왔던 셈입니다. 19882NCCK가 “반공이데올로기를 종교적인 신념처럼 우상화하여 북한 공산정권을 적대시한 나머지 북한 동포들과 우리와 이념을 달리하는 동포들을 저주하기까지 한 죄를 범했음을 고백”했던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을 발표하자, 이에 반발한 보수 개신교계가 총결집하여 한기총을 결성했던 일은 그런 점에서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1990년대에는 개신교 반공주의에 ‘생명수’를 무한정 공급하는 새 원천이 생겨났습니다. 바로 앞서 언급한 해외선교입니다. 사회주의블록 붕괴와 냉전체제 해체, 한중(韓中) 수교와 남북교류 확대를 배경으로 한국인 개신교 선교사가 소련·동유럽 등 구 사회주의 사회들과 중국으로 밀물처럼 몰려갔습니다. 이윽고 중국은 가장 많은 한국인 선교사가 밀집한 지역이 되었고, 그들 중 상당수는 북한-중국 접경지대에서 직간접적인 북한 선교나 탈북자 지원활동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국과 북한 당국의 엄격한 외국인 선교 금지정책 때문에 중국 선교와 북한 선교는 모두 현행법상 불법이고, 따라서 선교사들은 신분을 숨긴 채 최대한 은밀하게 활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이런 위험천만한 활동을 벌이던 선교사의 체포, 투옥, 실종, 강제추방이 끝없이 이어지는 모습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보수적인 개신교인의 시선으로 보면, 이것은 북한·중국을 무대로 벌어지는 숭고하고도 영웅적인 박해-순교 드라마의 생생한 장면, 반공주의에 새로운 현실성과 긴장감·생기를 불어넣는 사건이 될 수 있습니다. 반공주의와 공산권 선교가 결합함으로써, 북한·중국 선교가 개신교식 반공투쟁의 새로운 방법이자 영역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입니다.

더 생각해봐야 할 대목은, 우리 사회 기득권층의 반공·반북 담론이 종종 그러하듯이 개신교 반공주의도 다른 이해관계나 동기기득권체제 유지를 위한 수단, 정치적 반대세력을 제압·배제하는 수단, 수치스런 과거행적에 대한 자기합리화 수단 등를 감추기 위한 편리한 명분일 뿐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해방 직후 친미·반공주의가 친일파의 생존 및 권력쟁취 수단으로 활용되었다는 사실을, 반민특위에 소환된 친일 종교인 중 개신교인의 비중이 두드러지게 높았다는 사실과도 연결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개신교의 맹렬한 반공주의는 개신교가 우리 사회 기득권구조의 일부로 공고히 편입되었음을 입증하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보편적 가치 및 인권 담론과의 충돌

 

박노자 그런데 ‘보수성’이란 꼭 정치적 입장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정치적 반북과 함께 한국 교회의 보수성을 상징하는 게 사회문화적 보수성입니다. 사실 ‘보수’라기보다 ‘수구(守舊)’란 용어야말로 더 맞을 듯합니다. 조선시대 ‘가통 잇기’를 연상케 하는 목회자 자리 세습을 앞서 언급했는데, 또 하나는 동성애에 대한 맹목적 반대입니다. 동성애에 대한 종교적 배척은, 성()을 ‘후사 잇기’ 수단으로 인식했던 전통사회나 남성성을 군사적으로 획일화했던 1960~70년대 이전의 산업사회에서나 자연스러웠습니다. 한데 오늘날 사회에서는 ‘번식’과 ‘생존’이 직결되는 것도 아니고 남성을 획일적으로 ‘전사’ 내지 ‘산업일꾼’으로 여겨 동성애자를 이런 규준에 불합격하는 실격자로 보는 것도 전혀 아니지 않습니까? 한국 개신교의 동성애 혐오는, 특히 이미 성의 다양성 존중에 익숙해진 젊은 세대로서 그저 하나의 ‘퇴행’쯤으로 보일 뿐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과연 이 부분을 어떻게 보는지도 궁금하지만, “도대체 왜?”라는 질문도 드려보고 싶습니다. 도대체 저들은 왜 성경에 등장하는 청동기의 동성애 금기에 대해 디지털시대에도 이렇게까지 매달릴까요?

 

강인철 신학자가 아니기에 제가 이 문제에 만족스런 답변을 드리긴 어렵습니다. 다만 앞서 제기한 논점의 연장선 위에서 약간 다른 해석을 시도해볼 수는 있지 않을까 합니다. 제가 보기에, 전쟁과 동성애야말로 축자영감설(逐字靈感說) 혹은 성서무오설(聖書無誤說)로 대표되는 개신교 근본주의 신앙의 영향이 가장 잘 드러나는 쟁점인 것 같습니다. 성경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아마도 구약의 여호와(야훼)는 ‘전쟁하는 신’이 되고 동성애자는 ‘불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한편으론 전쟁과 동성애에 대한 근본주의적 해석이 서로 수렴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보수 개신교 측은 앞서 말한 영적 전쟁 프레임을 통해 동성애 문제를 이해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영적 전쟁 프레임의 유무(有無)야말로 동성애 문제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접근에서 결정적인 차이를 가져오는 요인입니다. 예컨대 천주교의 경우 보수 개신교와 마찬가지로 동성애를 교리적으로 단죄하지만, 그럼에도 이 문제를 영적 전쟁 프레임으로 접근하진 않습니다. 그러기에 약간이나마 인간적 연민의 틈새가 생겨나고, 그런 한에서는 현실의 차별·냉대·억압으로 인한 동성애자 및 가족·친지의 아픔을 껴안거나 개선하려 노력할 여지가 존재합니다. 그런데 동성애 문제를 영적 전쟁 프레임으로 접근하게 되면 얘기가 전혀 달라집니다. 이 프레임은 우리/그들의 적대적 이분법에 기초하여 타자(그들)를 ‘비인간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또 이런 사고방식이 강하게 내면화된 사람일수록 인권 감수성이나 생명 감수성은 둔화되는 대신 공격성과 호전성은 증폭되는 경향이 나타납니다. 여기에는 동성애자에 대한 사회적 억압·차별을 정당화할 뿐 아니라, 그들에 대한 폭력적인 대응을 허용하거나 직간접으로 유도함으로써 증오범죄로 이어질 가능성 또한 존재합니다. 결국 보수 개신교가 동성애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은 ‘영적 전쟁 프레임에 기초한 타자(동성애자)의 비인간화’로 압축됩니다. 이때 동성애자는 악한 영(악령)에 사로잡힌 이들이거나 세상을 타락시켜 지배하려는 사탄의 도구이기에 강제적으로라도 제거되어야 할 존재 정도로 치부되기 쉽습니다. 만일 어떤 동성애자가 개신교인이라면, 그가 이런 ‘비인간’ 낙인을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비정상 인간’이라는 새로운 낙인을 수용하는 것 정도겠지요.

동성애는 개신교의 사회적 보수성을 보여주는 허다한 사례들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보수 개신교는 헌법을 비롯해 우리 사회 공공영역을 지배하는 자유·평등·박애·관용 등의 보편주의적 가치나 자유주의적 인권담론과 자주 충돌해왔고, 그로 인해 사회적 비난에 직면하는 일이 잦았습니다. 종립(宗立)학교에서의 강제적인 종교교육, 붉은악마 응원단 명칭에 대한 시비, 단군상 철거 운동, 주5일근무제 반대, 개방형 이사 도입을 위한 사립학교법 및 사회복지사업법 개정 반대, 과도한 친미(親美) 행태, 성직자 소득세 납부 거부, 특권적인 기독교재산관리법 제정 시도, 특정 서적·영화·가수의 판매·상영·공연 금지 추진, 방송사의 대형교회 성직자 비리 고발 프로그램들에 대한 극렬한 반발 등이 우선 떠오릅니다. 보수 개신교의 국가보안법 개정 반대, 한반도대운하와 4대강사업 지지, 미국산 쇠고기 수입협상 지지,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반대 등도 적잖은 비판에 직면한 바 있습니다. 이에 비해 보수 개신교가 상당한 여론의 지지를 업고 공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몇가지 드문 상황이 가능한데, 그게 바로 국내 무슬림, 양심적 병역거부자, 동성애자 등 세 그룹의 사회적 약자들을 공격할 때인 것입니다. 이를 감안한다면 동성애자에 대한 보수 개신교의 공세는 앞으로도 지속될 공산이 크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막강한 영향력과 부실한 공신력의 결합

 

박노자 일단 위의 질문들을 종합해보면, 그런 것입니다. 과거에 ‘근대성의 기수’로 보였던 한국 개신교가 오늘날에는 ‘시대에 뒤떨어진 기복, 북한·동성애 혐오, 세습과 비리’의 종교라는 이미지를 줍니다. 자본주의 후기에 우리 앞에 나타나는 각종 사회·정치·환경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일조한다기보다 그 자체가 커다란 사회적 문제덩어리로 평가되고 있죠. 왜 그렇게 됐을까요? ‘근대성’에 대한 사회의 관념이 진보돼도 한국 개신교의 ‘근대’ 이해의 수준이 군사주의, 획일주의, 내부 권위주의, 초자연적 주술력에 의존하려는 기복의 수준에 여전히 머물러 있다는 것일까요? 아니면 권위주의정권하에서, 1960~80년대 반공주의 이데올로기와 현세구복 위주로 성장해온 개신교가 여전히 경로의존적 차원에서 그 모델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인가요? 강선생님의 고견을 꼭 듣고 싶은 대목입니다.

 

강인철 지적하신 대로 한국에서 근대성의 기수로 공인됐던 개신교가 요즘에는 안타깝게도 ‘전근대적 근대’를 상징하는 문제덩어리처럼 비치고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서구사회와 비교할 때 한국에서는 근대성과 종교의 관계가 상당히 다르게 전개돼왔습니다. 특히 유럽에선 근대화와 세속화가 동시 진행되었지만, 한국에선 근대화가 종교의 쇠퇴를 뜻하는 세속화와 병행되지 않았습니다. 위정척사(衛正斥邪)를 표방한 일부 유교 수구파를 제외하면, 불교·천도교를 비롯한 한국의 주요 종교 대부분이 근대성과의 긍정적인 관계 맺기를 추구했습니다. 물론 개신교가 그 선두에 위치했지요. 이런 상황에서 한국사회가 근대화될수록 종교인구는 늘어갔고, 그에 따라 주요 종교들 수중에는 더 많은 힘과 자원이 쌓여갔습니다. 특히 개신교는 세계가 주목할 정도의 눈부신 성공스토리를 한국 땅에서 써내려갔습니다. 개신교는 일찍이 1950년대초에 불교를 뒤쫓는 한국 제2의 종교로 올라섰고, 1980년대에는 불교와 맞먹는 교세를 자랑하게 되었습니다. 개신교 측에서는 신자수가 1천만명을 넘어섰다고 주장하는데, 신뢰도 높은 인구센서스 통계로도 개신교인이 1995년에 이미 876만명에 이르렀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어쨌거나 분명한 사실은 20세기 후반의 압축적 근대화 과정에서 개신교의 사회적 영향력이 엄청나게 커졌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종교의 ‘사회적 영향력’과 ‘사회적 공신력’의 상관관계에 대해 잠시 생각해보죠. 우리는 사회적 영향력을 “특정 종교가 다른 사회부문에 변화를 초래하거나, 그 변화를 저지할 수 있는 능력”으로, 사회적 공신력을 “특정 종교에 대한 긍정적인 사회적 인식과 평가”로 간단히 정의할 수 있을 겁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1960년대 후반부터 ‘두개의 개신교’ 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났고, 이때부터 1980년대까지는 진보 개신교가 한국 개신교를 대표하면서 개신교에 대한 개혁적·진보적 이미지를 주도적으로 형성해왔습니다. 이 시기에 소수파인 진보 개신교는 사회적 영향력은 적은 편이었을지언정 공신력은 대단히 높았습니다. 그러다 1980년대말부터 개신교 내에서 ‘보수 헤게모니의 확장’ 경향이 관철되었고, 그에 발맞춰 개신교의 대표성과 사회적 이미지도 보수 쪽으로 빠르게 이동했습니다. 이제 대부분의 보통사람들은 ‘한국 개신교’ 하면 자연스레 ‘보수 개신교’를 연상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보수 개신교의 전형적인 이미지는 ‘사회적 영향력은 강하지만 공신력은 매우 낮은 종교’인 게 현실입니다. 바로 이게 화근입니다. 특정 종교가 영향력에 부응하는 공신력 수준을 유지할 경우, 그 종교는 사회발전에 기여하는 요소로 인정되면서 사회 전반으로부터 환영받을 것입니다. 특정 종교의 공신력이 낮더라도 영향력도 같이 하락할 경우, 혹은 공신력과 영향력 모두 낮은 수준에 머물 경우, 그 종교의 부정적 측면들이 사회 전반에 가하는 충격은 약할 것이고 따라서 대중의 관심도 끌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특정 종교의 영향력이 증가하는데 공신력은 감소하는 경우, 강한 영향력 때문에라도 그 종교의 부정적 측면들이 사회 전반에 두루 악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고, 그 종교가 대중에 의해 ‘문제 집단’으로 낙인찍힐 확률이 높아집니다. 보수 개신교가 주도하는 한국 개신교가 요즘 바로 이런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이죠.

앞으로는 어떻게 될까요? 한국 개신교는 시민사회의 대로와 골목마다 단단한 진지를 구축해놓고 퇴행적 가치들을 생산하고 전파하는, 그럼으로써 보수 기득권구조의 영속화에 기여하는 강고한 보수 풀뿌리조직으로 계속 역할을 하게 될까요? 결국 ‘선택’과 ‘세력’의 문제일 것입니다. 1990년대에 보수 개신교마저 사회참여 노선으로 전환하고 2000년대에는 정치적 행동주의로 나아감으로써, ‘두 개신교’ 모두가 정치참여에 나선 셈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참여신학이나 정치신학은 어떤 내용물이든 담을 수 있는 빈 그릇일 뿐입니다. 개신교는 향후 어떤 정치참여를 선택하게 할까요? 보편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공동선정치’를 선택할까요, 아니면 협소하게 정의된 교회의 제도적 이익을 목표로 하는 ‘파당정치’를 선택할까요? 21세기의 한국 개신교를 주도해갈 세력은 ‘보수 개신교’일까요, 아니면 ‘진보 개신교’일까요, 아니면 중도적 입장의 ‘개혁 개신교’일까요? 종교, 특히 절반 이상의 한국인과 종교인구의 거의 전부를 차지하는 3대 종교불교, 개신교, 천주교는 시민사회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크고 가장 잘 조직되고 훈련된 부문에 해당합니다. 그뿐 아니라 종교는 많은 사회들에서 민주주의를 양육하고 떠받치는 중간집단 내지 소그룹으로, 사회적 약자들의 의지 대상이자 보호자로, 신뢰·호혜성·연대성 같은 사회자본의 주요한 원천으로 기능해왔습니다. 낙관하긴 어렵고 개신교에 허락된 시간도 얼마 안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다고 한국 개신교가 이런 기능을 회복하리라는 희망을 아예 내려놓기엔 좀 이르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참, 박선생님, 우리 대담이 지금까지 개신교에만 초점을 맞춰왔는데요, 개신교의 라이벌이자 한국 최대 종교인 불교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요? 식민지 시기의 사찰령부터 불교재산관리법, 전통사찰보존법 등을 거쳐오면서 정치적 종속성과 순응성을 키워온 불교의 보수성도 참 뿌리가 깊어 보입니다. 최근에는 동국대 총장·이사장 자리를 둘러싼 갈등, 수배 중이던 민주노총 위원장의 조계사 피신과 관련된 미묘한 긴장 상황이 대중의 관심을 끌기도 했지요. 특히 작년 1116일 저녁에 국고보조금이 대부분을 차지할 수천억원 규모의 ‘총본산 성역화’ 불사(佛事)를 위해 조계종 총무원이 시내의 한 컨벤션센터를 빌려 성대한 모금행사를 개최했는데, 그로부터 불과 서너시간 후에 한상균 위원장이 예고 없이 신변보호를 부탁하며 조계사로 잠입해서 조계종 측을 곤혹스럽게 만들었었죠. 한달 가까이 이어진 불교-국가, 불교-시민사회 사이의 팽팽한 밀고 당기기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한국 불교의 현주소를 이보다 잘 보여주는 장면이 또 있을까 싶었습니다. 아무튼 우리의 토론 주제를 한국 불교에 적용한다면 어떤 얘기가 가능할지 무척 궁금해집니다.

 

 

종교가 다시 ‘희망의 공장’이 되기 위해서는

 

박노자 강교수님의 답변을 읽고 많은 것을 이해하게 됐습니다. 말씀하신 내용을 제 나름의 방식으로 소화하자면, 고도성장기와 그후에 한국 개신교는 한국 자본주의와 상호작용하면서 일면으로 자본주의에 나름의 자본축적 정당화 이데올로기(“부자는 바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이다”)를 제공해주고, 또 일면으로는 특히 제도적으로 자본주의의 지대한 영향을 받은 셈입니다. 말씀하신 교회 매매나 상속 등은 어떻게 보면 기업의 일반적 행태를 방불케 하고, 영적 전쟁의 프레임은 자본주의사회의 일상인 경쟁이라는 본바탕으로부터 출발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불교가 과연 기본적으로 얼마나 다를까 싶습니다. 주류 불교에서는, 업설이나 공덕론이 공개적으로 자본주의적 불평등을 합리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전생에 불()·()·() 삼보(三寶)에 귀의하고 보시를 많이 한 공덕으로 업장이 소멸돼 현생에서 부자가 됐다” 하면서 경제적 부를 ‘영적 생활’과 연결하는 것입니다. 특히 재산이 많은 거찰들은 대형교회처럼 ‘경영’의 대상이 됩니다. 조계종 종립 동국대에서는 ‘사찰경영전문지도자’ 과정이 개설돼 있으며 관련 교재도 출판됩니다.

기업을 따르다보면 기업인의 일상도 절로 익히게 되는데, 이는 불교 계율과 상충될 때가 많습니다. 언론에서 가끔가다가 고급 승려들의 술판, 도박판, 불법 토지매각, 나아가서 축처(계율 위반의 남녀동거 관계) 등 성 관련 의혹들이 보도되는데, 기업계와 크게 다르지 않은 행태라고 볼 수 있죠. 물론 일반 언론에서야 가끔 보도되지만 조계종 등 불교계의 영향하에 있는 교계 언론들은 훨씬 자제하는 편입니다. 잘못하면 ‘다칠’ 수도 있으니까요. 기업들도 ‘반기업 정서를 부추기는 언론’에 광고 압박을 하지만 조계종 같은 경우에는 한발 더 나아가서 고급 승려의 행태에 비판적이었던 『불교닷컴』 『불교 포커스』 등 일부 교계 비판 매체들을 ‘해종언론’으로 규정하여 거기에다 사찰 광고를 싣는 것 등을 전면 금지했으니 말입니다.

말씀하셨듯이 국가보조금 등의 여러 현안들이 국가와의 협조에 걸려 있기에 불교계는 정권과의 정면충돌을 회피합니다. 한상균 위원장에게 자진출두를 종용해온 불교계 일각의 행동을, 대체로 이 부분과 연관지어 해석해볼 수 있습니다. 한데 또 한편에서 불교계는 사회적 애물단지로 전락한 보수 기독교와의 차별화 전략 차원에서 노동문제에 노동친화적 입장에서 개입하는 시도도 하고, 또 통일문제에 상당한 적극성을 보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보면 ‘진보성이 있는 종교’로 평판을 받아 최근 20여년간 급성장해온 천주교를 ‘벤치마킹’ 하는 듯한 분위기입니다. 그리하여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한상균 위원장에게 공권력으로부터의 ‘보호’를 제공해주는 입장을 표명해온 것입니다.

그런데 사회에서 지탄받아온 보수 기독교와 뚜렷하게 ‘다른’ 행보를 표면적으로 취한다고 해서, 현재의 불교가 과연 진보적 종교로 발전할 수 있을까요? 불교 집단 안에서는 민중불교 시절의 문제의식을 일부 계속 견지하고 있고, 나아가 특히 환경문제에 예리한 관심을 보여온 일부 진보세력도 실존합니다. 한데 대부분의 사찰이 주로 기복의례에 기대어 경제적으로 유지되며 종단 권력자들이 주로 이같은 ‘사찰경영자’의 이해를 우선적으로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서 이러한 소수의 영향력은 불가피하게 심히 제한돼 있죠.

결국 기독교도 불교도 실제로 자본화 과정을 겪으면서 동시에 자본주의의 병폐인 착취나 소외, 경제적 불안, 불평등, 경쟁 등에 지치고 피로해진 사람들에게 ‘힐링’ 내지 도피 등 개인적 ‘해결’의 가능성에 대한 환상을 제공해주는 셈이 됩니다. 삶에 지친 개인이 교회에 들러 기도하거나 사찰에서 기도 내지 명상을 하면 다시 ‘기운을 팍팍 받고’ 또다시 똑같은 처절한 생존투쟁의 제자리로 돌아가는 게 한국에서의 서민 신도·교도의 일상이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헬조선’의 세상에서 기도에 대한 믿음은, 어쩌면 취약한 개인에게 주어진 정신건강의 마지막 보루일 수도 있겠죠. 그런데 만에 하나 부처님 내지 관세음보살이 대입기도를 하는 모든 어머니들의 소원을 다 들어주신다면 서울대의 입학정원은 아마도 수십만명이 돼야 하지 않을까요? 다르게 이야기하면, 이마가 닳도록 기도해도 ‘헬조선’의 구조란 한치도 바뀌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신도층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월급쟁이 내지 서민들의 고통이 더욱 태심해지는 상황이 되면, 한국의 종교들이 오늘날 세계 천주교처럼 본격적인 ‘자본주의 비판’에 나설 가능성이 있진 않을까요? 지금도 저성장이지만, 혹여 성장은 아예 끝나고 한국경제가 한층 본격적인 위기 내지 공황의 상황에 빠질 경우에 말씀입니다. 지면사정상 곧 마무리로 가야겠지만 ‘민중’종교로의 부분적 회귀라도 일각에서나마 가능할 것인지 강교수님의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강인철 자본주의체제를 비판하고 변혁하려는 민중종교의 가능성, 참으로 가늠하기도 실현하기도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인류의 오랜 반려자로 존속해오는 동안 종교가 진보와 보수를 넘나드는 ‘다기능적인’ 제도임을 과시해온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긴 보수, 짧은 진보’라고나 할까요, 한국을 포함한 대부분 사회들에서 종교의 사회적 기능을 볼 때 보수의 시간은 매우 길었던 반면 진보의 시간은 짧았습니다. 박선생님 말씀대로, 신자들의 사회적 구성과 태도가 동질적으로 되어갈수록, 다시 말해 기존 정치경제질서와 갈등할 잠재력을 가진 쟁점에 대해 신자들이 더욱 비슷한 태도를 취하게 될수록 민중종교로의 전환은 용이해질 것입니다. 또 지배세력의 종교사상과 확연히 구별될 뿐 아니라 그와 대립되는 자율적인 종교사상도 반드시 필요할 터인데, 개신교의 민중신학, 불교의 민중불교나 참여불교 사상, 천주교의 제2차 바티칸공의회 신학과 해방신학 등이 좋은 예일 것입니다. 아울러 이런 대안적인 종교사상을 발전시키고 신자에게 전파·교육하는 ‘유기적 지식인’ 역할을 담당할 사람들도 필요할 것입니다. 대안적인 종교사상이 공식적인 ‘사회교리’ 형태로 제도화되어 있고, 그것을 실천하기 위한 전문화된 공식기구들저는 이를 ‘종교 내 사회운동 부문’이라고 부릅니다만이 존재할 경우 민중종교의 가능성은 그만큼 커질 것입니다. 이 방면의 후발주자인 불교 쪽에서도 최근 사회노동위원회나 화쟁위원회 같은 공식기구가 속속 등장하는 중입니다. 나아가 종교조직이 국가권력과 지배세력의 영향으로부터 조직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자유로워져야 민중종교로의 전환이 용이해질 것입니다. 몇몇 종교에서 점점 심해지는 ‘국고보조금 중독증’은 매우 우려스럽지만, ‘특혜와 종속성의 교환’으로 특징지어지는 국교제도는 한국에 존재하지 않고, 불교·유교에 대한 국가의 법률적 통제도 최근 많이 이완되었습니다. 이런 점들만 놓고 보면 한국의 종교 상황이 민중종교로의 전환에 꼭 불리한 것만은 아니라고 판단됩니다.

신규 신자의 충원 감소나 기존 신자의 이탈 증가 등 뚜렷한 위기 징후가 점증하는 가운데 종교지도자들이 뭔가 획기적인 혁신이 시급하다는 위기의식을 공유할 때 진보로의 전환 가능성은 한층 커질 것입니다. 2005년도 통계청 인구센서스에서 개신교 인구가 감소하고 불교 인구가 정체한 결과가 나오자 개신교 전체가 발칵 뒤집히고 불교계 역시 소란했는데요, 조만간 발표될 2015년도 인구센서스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눈여겨봐야겠지요. 총인구의 절반 가까운 방대한 무종교인구가 존재한다는 게 한국 종교지형을 특징짓는 중요한 요소입니다만, 한때 종교인구의 급성장을 뒷받침함으로써 일종의 ‘종교예비군’ 역할을 담당했던 무종교인들이 지난 20여년 동안 기성 종교 및 종교인에 대해 점점 부정적이고 냉담한 태도로 바뀐 것도 종교지도자들에겐 상당한 혁신에의 압력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세속적 시민운동 등 종교 외부로부터 가해지는 혁신압력 역시 때론 민중종교로의 전환을 촉진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외적 압력은 종종 양날의 검처럼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상당수의 개신교 지도자는 ‘안티기독교 운동’이나 방송사의 교회 비리 고발 프로그램, 종교재정 운용의 투명성을 높이려는 종교법인법 제정운동 등을 혁신을 위한 긍정적인 자극으로 받아들이지만, 대다수 보수 개신교인은 ‘좌파와 윤리적 자유주의자들의 기독교 박해’라는 식으로 편리하게 해석한 후 똘똘 뭉쳐 스스로를 더욱 폐쇄시켜버리곤 합니다. 그러니 결국 종교 내부의 개혁역량이 성장해 서로 연대하고 조직화하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그런데 내부의 불만세력이 아무리 많을지라도, 신자로서의 정체성은 유지하나 종교조직 바깥에 머무는 ‘휴면 신자’ 혹은 아예 다른 종교로 떠나려는 ‘개종자’가 다수가 되면 종교의 변혁전망은 오히려 어두워지기 십상입니다. 교권세력의 탄압을 감수하면서도 끝까지 남아 종교의 변혁운동에 참여하는 ‘개혁가’가 많아져야 합니다. 지금도 종교는 도처에서 폭력과 분열을 조장함으로써 우리의 삶터를 디스토피아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동시에 종교는 도처에서 ‘절망의 대량생산 체제’에 맞서 힘겹게나마 유토피아적 꿈과 상상을 부단히 생산해내는 ‘희망의 공장’으로 기능하고 있기도 합니다. 정의로운 평화(just peace)를 향한 희망을 세상에 끊임없이 공급함으로써, 종교가 인류가 만들어낸 최고의 발명품임을 스스로 입증해 보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박노자 결국 일언이폐지하자면, 한국의 종교, 특히 개신교는 한국적 근대의 모든 문제를 그대로, 또는 어떤 경우에는 일반에 비해 더 심한 형태로 안고 있으면서도 어쩌면 언젠가 이 문제들을 풀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저도 그렇게 희망하면서 한국 불교 공부를 계속하려고 합니다. 함께 대담해주시고 귀중한 지식을 나누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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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글은 2016년 1월 5일부터 29일까지 박노자와 강인철 두 대담자가 전자우편을 통해 나눈 대화를 옮긴 것으로, 2회에 걸친 서신교환을 바탕으로 작성되었다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