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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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예시인 특집

 

박소란 朴笑蘭

1981년 서울 출생. 2009년 『문학수첩』으로 등단. noisepark510@hanmail.net

 

 

 

미자

 

 

밤의 불광천을 거닐다 본다 허허로운 눈길 위

미자야 사랑한다 죽도록, 누군가 휘갈겨 쓴 선득한 고백

비틀대는 발자국은 사랑 쪽으로 유난히 난분분하고 열병처럼

정처없이 한데를 서성이던 저 날들이 내게도 있었다 미자,

적멸을 드리운 세상의 모든 상처 곁에 격렬히 나부끼던 이름

미자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어디로 떠나갔을까

부패한 추억의 냄새가 개천을 따라 스멀거리며 일어선다

겨우내 그칠 줄 모르고 허우적대던 절름발이 가랑눈과

그 불구의 몸을 깊숙이 끌어안아 애무하던 스무살의 뒷골목

여린 담벼락마다 퉤— 보란 듯이 흘레붙고 싶었던

지천한 허방 속 야생의 짐승처럼 똬리를 틀고 아귀 같은 새끼들을 싸지르고 싶었던

내 불온했던 첫사랑, 미자는

아직 그 어둔 길 끝에 살고 있을까 아니다

아니다 어쩌면 미자는 처음부터 없었던 게 아닐까

돌이켜보면

사랑이란 이름의 무수한 날들은 하나같이 사랑 밖에 객사했듯이

눈의 계절이 저물면 저 아픈 고백 또한 다만 질척이는 농담이 되고 말 일

미자는 지금 여기에 없고 사랑하는

미자는 나를 모르고 기어이 내 것이 아니고

 

 

아현동 블루스

 

부랑의 어둠이 비틀대고 있네 텅 빈 아현동

넋 나간 꼴로 군데군데 임대 딱지를 내붙인 웨딩타운을 지날 때 불현듯

쇼윈도우에 걸린 웨딩드레스 한벌 훔쳐 입고 싶네 나는

천장지구 오천련처럼 90년대식 비련의 신부가 되어

굴레방다리 저 늙고 어진

외팔이 목수에게 시집이라도 간다면 소꿉질 같은 살림이라도 차린다면

그럴 수 있다면 행복하겠네, 거짓말처럼

신랑이 어줍은 몸짓으로 밤낮 스으윽사악 스으윽사악

토막난 나무를 다듬어 작은 밥상 하나를 지어내면

나는 그 곁에 앉아 조용히 시를 쓰리 아아 아현동,으로 시작되는

주린 구절을 고치고 또 고치며 잠이 들겠지 그러면

파지처럼 구겨진 판잣집 지붕 아래

진종일 품삯으로 거둔 톱밥이 양식으로 내려 밥상을 채울 것이네

날마다 우리는 하얀 고봉밥에 배부를 것이네

아아 그러나 나는 비련의 신부, 비련의

아현동을 결코 시 쓸 수 없지 외팔의 뒤틀린 손가락이

식은 밥상 하나 온전히 차려낼 수 없는 것처럼

이 동네를 아는 누구도 끝내 행복할 수는 없겠네

영혼결혼식 같은 쓸쓸해서 더욱 찬란한 웨딩드레스 한벌

쇼윈도우에 우두커니 걸려 있고 그 흘러간 시간의 언저리

도시를 떠나지 못한 혼령처럼 서 있네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