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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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이 계절에 주목할 신간들

 

 

김소연 金素延

시인. 시집 『극에 달하다』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눈물이라는 뼈』, 『수학자의 아침』, 산문집 『마음사전』, 『시옷의 세계』 등이 있음. catjuice@empas.com

 

김영찬 金永贊

 문학평론가. 저서로 『근대의 불안과 모더니즘』 『비평극장의 유령들』『비평의 우울』,역서 『성관계는 없다』』(공역)『근대성과 페미니즘』(공역)  등이 있음. youngcritic@kmu.ac.kr

 

백지연 白智延

문학평론가. 평론집 『미로 속을 질주하는 문학』 등이 있음. cyndi89@naver.com

 

 

 

백지연 이번호 문학초점 좌담에서는 평론가 김영찬 선생님을 모셨습니다. 예리하고 섬세한 감각으로 작품에 직핍하는 선생님의 평문을 평소 좋아해온 독자인데요. 이 자리에서 어떤 이야기를 함께 나누게 될지 궁금하고 기대됩니다.

 

김영찬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최근 작품들 읽고 격의 없이 이야기 나누는 자리로 생각하고 왔어요. 한편으론 시집을 읽고 이야기하는 흔치 않은 기회라는 점이 끌리기도 했고요. 어릴 때부터 나름 시를 즐겨 읽고 좋아했는데 정작 등단 후로는 오랫동안 시의 문밖에서 서성거리는 입장이 된 것 같아요. 젊은 시인들의 작품을 열심히 따라읽지 않던 입장이라서 걱정도 되고 김소연 시인 앞에서 시 이야기를 하려니까 떨리기도 합니다.(웃음) 여러모로 많은 것을 배운다는 마음으로 왔습니다.

 

김소연 저도 책 읽는 과정은 즐거운데 정색하고 좌담을 나누는 게 어렵습니다. 특히 평론가 앞에서……(웃음) 이번 계절에는 책 한권 한권이 모두 강렬해서 독서만으로도 버거웠습니다. 지난호에는 김정환(金正煥) 시인께 기대면서 자유롭게 시 이야기를 했다면 이번에는 김영찬 선생님 믿고 편하게 소설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왼쪽부터 김소연, 김영찬, 백지연. Ⓒ 이영균

 

416세월호참사 작가기록단 기록 『다시 봄이 올 거예요』

 

백지연 그동안 문학초점에서는 시와 소설만을 다뤘는데 이번에는 구술서사를 함께 다뤄보려고 합니다. 『다시 봄이 올 거예요』(창비 2016)는 세월호 생존학생과 형제자매의 육성을 기록한 구술기록집입니다. 세월호 관련하여 최근에도 『엄마, 나야』(문학동네 2015), 『세월호, 그날의 기록』(진실의 힘 2016), 『4월이구나, 수영아』(서해문집 2016) 등이 출간되었지요. 문학의 범주를 넓게 본다면 구술기록 및 르뽀르따주는 서사의 중요한 갈래이자 자원인데요. 문학사에서는 이것이 기록문학이라는 범주 속에서 활발히 연구되고 있고요. 특히 『다시 봄이 올 거예요』는 청소년들의 시선과 목소리를 중심에 놓았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습니다.

 

김영찬 사건 자체를 기록하고 고발하는 것과는 다른 책이었는데요. 참담한 사건을 겪은 후 남는 감정의 흔적, 삶의 파장들, 힘겹지만 그 자리를 딛고 일어서려는 다양한 몸짓들, 목소리들이 담겨 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개인적으론 세월호사건과 관련된 여러 증언과 기록을 읽는 것 자체를 힘들어했어요. 이 책도 세월호사건으로 친구와 형제를 잃은 아이들의 생생한 트라우마가 때론 담담하고 때론 천진한 어조를 뚫고 고스란히 전해져와 여러번 멈칫하고 책을 덮었다 다시 읽고 그랬어요. 그런데 그렇게 힘겹게 읽으면서, 의외로 나 스스로 용기랄까 그런 걸 가질 수 있게 되더라고요. 어떤 측면에서는 읽는 행위 자체가 일종의 적극적인 응답의 행위가 될 수도 있겠구나라는 경험을 했습니다. 희생당한 친구와 형제자매에 대한 그리움과 회한, 고통과 자책감,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존학생이자 남아 있는 자로서 뭔가 해야겠다는 애틋한 의지, 용기 같은 것들을 드러내고 있어요.

 

김소연 세월호 관련 책들을 여러권 읽었는데 같은 사건을 다룬 기록인데도 읽을 때마다 이건 내가 몰랐던 이야기구나 합니다. 이 책은 십대 청소년들에게 시각이 잘 정돈된 어른 청자가 귀를 기울여주는 기획인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청자의 문학이라고 명명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생존학생과 그 형제자매 들이 지금까지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개개인의 목소리가 기록되어 있어 곁에서 지낸 듯한 실감도 납니다. 세월호사건 이후 이런 얘기는 처음 해본다고 고백하는 친구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이 책을 통해 이 아이들도 친구의 발화에 귀 기울이는 청자가 되겠지요. 물론 이 책을 읽는 우리도 드넓은 청자이고요. 저는 이 책을 통해 문학에서 청자의 세계라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도 됐던 것 같아요.

 

백지연 구술기록의 경우에는 특히 청자와 화자 간의 정서적 몰입이 굉장히 섬세하고 깊게 이루어지는 듯합니다. 표현 하나하나에서 기록작가의 깊은 고민이 와닿았어요. 생존학생과 형제자매의 이름을 쓸 때도 구술자의 요구에 따라 실명과 가명을 자유롭게 쓴 대목이라든가 생존학생을 대체할 단어를 쉽게 찾지 못하여 긴장 속에서 이 표현을 쓴다고 설명하는 대목이요. 더불어 이 책에는 현실적으로 발화할 수 없는 희생자들의 목소리가 스며 있는데요. 친구들, 형제자매들의 고백을 통해서 오히려 발화가 불가능한 희생학생들의 목소리가 더욱 생생하게 상상됩니다. 그런 점에서 책을 읽을 때 가슴이 더 쿵쿵 뛰며 깊은 울림이 느껴졌고요.

 

김소연 선장이 사형선고를 받아야 한다는 서명에 자기 이름을 적을 때 손이 벌벌 떨렸다고 고백하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명백한 죄인이지만 내가 죽어 마땅하다고 단죄할 수 있는가에 대해 의문을 품더군요. 문학이 자주 던져온 질문과 같은 선상에 서 있구나 했습니다.

 

김영찬 희생과 위로에 대한 통념적인 서사가 묻어왔고 억압해왔던 목소리들, 미세하게 요동치는 아이들의 내면을 생생하게 드러내고 있더라고요. 한편으로 우리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아이들 수준에서의 윤리감각까지도 아주 섬세하게 보여주고 있어요. 도저히 발화할 수 없었던 주체의 목소리, 억압되었던 목소리, 이런 것들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생각하게 만들고요.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서 억눌려왔던 아이들의 아픔과 그걸 어떻게든 이겨내려는 안간힘이 고스란히 전해져 눈물겹기도 했지만 그러면서 이상하게도 저 자신이 위로를 받기도 했습니다. 이 책과 함께 김소연 시인도 참여하신 『엄마, 나야』도 읽었는데요. 이 시집도 ‘말하기’와 ‘듣기’라는 행위 자체를 적극적으로 문학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좋은 사례로 다가와요. 그런 듣기와 말하기가 치유나 위로, 연대의 중요한 시발점이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가 아닌가 싶습니다.

 

백지연 저도 『엄마, 나야』를 읽으며 문학과 증언은 어떻게 만나는가를 생각해봤는데요. 육성시의 경우 참여한 시인들에게도 쉽지 않은 작업이었을 것 같아요. 아이들의 목소리가 되어 엄마에게 들려주는 시를 쓰지만, 그 바탕에는 시인 각자의 고유한 세계와 언어가 있고요.

 

김소연 『엄마, 나야』 출간 전에 ‘생일시(生日詩)’ 쓰기에 참여한 시인들 몇몇이 좌담을 했습니다. 시인들은 문학한다는 자의식을 버리지 않으면 그 아이와 내가 분리되어 그 아이의 목소리를 낼 수 없다는 한계와 번번이 만났고, 그럴 때 갈등 없이 기꺼이 몸에 밴 문학적 자의식을 내려놓고 생일을 맞는 그 아이가 되려고 했다는 겁니다. 뭐라도 하고 싶다는 소박하고 인간적인 욕구가 그 시작이었고요. 근데 쓰고 난 후에 저마다 아팠대요. 저도 쓰고 나서 한 이틀 몸살을 앓았거든요.

 

김영찬 문학적인 영매로서 자기를 내놓았던 시인들이 겪었을 책임감과 고통의 무게가 그대로 전해지는 느낌입니다. 그런데 한편으론 듣기와 쓰기와 읽기의 행위가 겹쳐지는 그런 복합적 과정이 고통에 대한 이입을 위로와 치유로 전환하는 걸 가능하게 했다고도 할 수 있겠죠.

 

김소연 『엄마, 나야』 작업을 하고 유가족 농성 현장에 찾아가면서 느끼게 되는 것은, 그 위로라는 것이 희한한 방향성을 가진다는 겁니다. 위로하려다가 오히려 위로를 받거든요. 위로한다고 다가왔던 사람들한테 아이들이 상처받는 장면도 『다시 봄이 올 거예요』에 많잖아요. 위로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도 이 책을 통해 세세히 배웠네요.

 

백지연 책을 읽고 나면 세월호참사가 우리 사회의 전환점이 됐으면 좋겠다는 학생들의 간절한 목소리가 깊게 와닿습니다. 기록서사의 미학은 결국 ‘관점’에 있다는 말도 있는데요. 고통을 겪는 사람들을 관습적인 형상화에 가두지 않고 복합적인 시야에서 드러내려는 시도가 필요하죠. 주제를 공론장으로 확장하고 읽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허구적 서사의 형식 못지않게 글쓰기의 형식이 다채롭고 도전적일 필요가 있다는 생각도 했고요.

 

김영찬 이 구술기록집이 그런 시도의 소중한 성과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세월호참사 이후 어른들의 서사가 얼마나 무능했는가를, 그리고 한편에서는 이 “허락받지 못한 애통함”(345)의 목소리들을 어떻게 소외시키고 억압해왔는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어요. 이 점은 사실 우리 문학에도 중요한 문제제기가 될 것 같아요. 기성 문학의 언어와 상상력이 낭패와 무력감에 빠져 있을 때 그게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지점을 보란 듯이 생생하게 살려내고 있거든요. 고통과 피해의 서사로 수렴되지 않는 다양하고 복잡한 감정의 결들과 침묵 속에 묻혀 있던 내일의 ‘동료시민’으로서 아이들의 서사와 윤리감각 같은 것들 말이죠. 이 모든 성과는 아무래도 구술기록의 출발점인 ‘듣기’에서 비롯되는 거겠죠. 그 점에서 이 책은 ‘나’가 아닌 ‘너’의 이야기를 몸을 낮춰 귀 기울여 들어주는 행위가 문학적 행위의 출발점일 수 있다는 잊기 쉬운 진실을 새삼 일깨워주는 것 같습니다.

 

 

윤대녕 장편소설 『피에로들의 집』

 
 백지연 기록서사와 달리 소설장르는 허구의 구축을 통해 그 사건에 응답한다는 점에서 다른 통로를 갖는데요. 윤대녕(尹大寧)의 『피에로들의 집』(문학동네 2016)은 최근 한국사회의 여러가지 문제들에 어떤 식으로든 응답하려는 소설의 고민과 모색을 깊게 드러낸 작품으로 다가왔습니다. 이 작품은 전직 연극배우이자 극작가인 주인공이 ‘마마’라는 여성에게 제안을 받고 아몬드나무하우스에 입주하면서 만나는 상처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요. 작가는 도시난민의 문제나 유사가족의 형태, 소통과 연대의 가능성 등을 염두에 두고 이 책을 썼다고 밝힌 바 있지요(247). 먼저 책을 읽으신 김영찬 선생님의 소감이 궁금합니다. 평소 윤대녕 소설의 오랜 팬을 자처해오셨는데요.(웃음)

 

김영찬 윤대녕 소설을 오랫동안 따라읽어오고 좋아해온 독자는 맞아요. 『피에로들의 집』도 매우 인상깊게 읽었습니다. 어떤 점에서 이 소설은 세월호사건의 충격을 소설의 몸으로 받아낸 사례로 다가왔어요. 『다시 봄이 올 거예요』에 보면 한 학생이 이런 말을 해요. “그래도 할 수 있는 걸 해야죠.”(348) 윤대녕의 이번 소설에선 그처럼 ‘어찌 됐든 그래도 할 수 있는 걸 해야겠다’는 작가의 의지 같은 게 읽히더군요. 사실 이 소설은 서사적 균형이나 구조적 긴장이 중간중간 느슨해지고 흐트러지고 있어요. 그건 분명 미학적 결함일 텐데, 저에겐 오히려 거기서 역설적으로 세월호사건의 충격을 경험한 작가로서의 고통과 중압감, 그럼에도 불구하고 짊어지기로 한 어떤 절실한 책임감의 무게 같은 게 비감하게 느껴졌어요. 그래선지 타인에 대한 관용과 윤리적 책임에 대한 긴 대화나 세월호를 직접 언급하는 교술적 진술 같은 게 끼어들어가면서 윤대녕 소설 고유의 절제미 같은 것들이 흐트러지고 있고요. 그러면서 한쪽에서는 깊은 상처와 고통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고통의 치유와 공감을 이야기합니다. 전체적으로는 윤대녕 소설의 오래된 미학적 관성과 새로운 윤대녕 소설의 지향, 이 둘이 서로 다투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백지연 이 소설에서도 윤대녕 소설의 관성으로 살아 있는 것은 인물들이 나누는 대화들이죠. 윤대녕 소설의 인물들은 생활세계 속에서 나눌 것 같지 않은 비유와 문어체적인 어투를 즐겨쓰곤 하는데요.

 

김영찬 그런데 그 독특한 대사가 비현실적이지는 않은 게, 일상대화에서도 윤대녕 작가가 그런 말투를 쓰거든요.(웃음)

 

백지연 저도 소설만 읽다가 작가를 처음 만났을 때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아, 실지로 이런 말투를 쓰시는구나 하고요. 소설 인물이 쓱 걸어나와 제 앞에 서 있는 기분이었어요.(웃음)

 

김소연 윤대녕의 이전 소설에도 그 말투를 두고 인물들끼리 트집을 잡는 장면이 종종 등장했습니다. 이 소설에서도 “언제나 그렇게 연극 대사조로 말하나요?”(27면)라고 현주가 명우를 처음 만났을 때 묻죠. “그 대사조의 말투 정말 짜증나”(78면) 하고 현주가 한번 더 트집을 잡고, “자네, 그 딱딱한 대사조의 말투 좀 바꾸면 안되겠나? 이제 슬슬 신물이 날 것 같은데. 지금 자네가 서 있는 곳은 무대가 아니야, 알겠나?”(109~10면) 하고 마마도 야단을 칩니다.

 

백지연 재미있는 것은 그렇게 상대방의 말투를 문제삼는 여성인물들조차 똑같은 말투를 쓴다는 점이죠. 벗어나고 싶지만 결국 가지고 갈 수밖에 없는 자기 세계에 대한 확인 같기도 했고요. 이번 소설에는 김영찬 선생님이 지적하신 대로 윤대녕이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고유한 세계, 그리고 그것을 벗어나려는 격렬한 시도가 함께 있어요. 주인공이 입주자들의 사연을 듣고 치유를 도와주는 적극적 행동을 부각하면서 서사적 균열들이 생기는데 그것까지도 작가가 의도적으로 감행하는 과정처럼 보였고요.

 

김소연 세월호 이후의 시간을 고스란히 견디며 이 작품을 쓴 것을 생각한다면 이 소설을 쓸 수밖에 없었겠다 싶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런 상상도 해보았습니다. 만약 이 작품이 윤대녕이라는 소설가가 한참 멋있게 활동하기 시작하던 90년대에 나왔다면? 관념적인 소설이라며 아쉬워했을 듯합니다. 인물이 유형화된 측면이 없지 않고, 서사의 매듭이 풀려나가는 방향도 이상적이고 바람직하기만 합니다. 너무 착한 소설인 거죠. 중심인물인 명우는 말투 빼고 모든 면에서 전능합니다. 특히 가장 이상적인 청자로서 모두의 사연과 교감하는 영웅에 가깝게 그려놓았습니다.

 

김영찬 전 반대로 생각해봤는데요. 사실 윤대녕 소설의 고유한 매력은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을 꿈꾸지만 그게 이미 불가능함을 알고 있는, 그래서 결국은 그 불가피한 운명을 힘겹게 수락하는 쓸쓸한 우울의 비극적 정조 같은 것이거든요. 그런데 『피에로들의 집』은 오히려 윤대녕 소설의 그런 고유한 특성을 강박적으로 억제하려고 한 게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있어요. 현실적 문제의식을 드러내되 윤대녕 고유의 방식으로 자기 세계를 더 밀어붙일 수는 없었을까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고요. 그런데 여기에 타인의 아픔에 대한 공감과 ‘공동체’ ‘우리’ 같은 범주가 끼어들고, 그러면서 자기의 세계를 뭔가 변화시켜야겠다고 하는 작가의 의지가 인물들의 말로 계속 표출되거든요. 새롭게 시작해야 된다, 변화가 필요하다, 새살이 돋아야 된다,라는 직접적인 자기언급적 진술이 군데군데 돌출하고 있어요. 그런 것들을 보면서 저는 이 소설 자체가 무언가를 무너뜨리고 다시 짓는 걸 모색하는 과정의 산물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기존의 세계를 유지하면서 심화시켜나가는 작업이 작가한테는 어떻게 보면 더 편한 작업일 수 있을 텐데요. 그걸 버리고 이전과는 다른 세계로 가려고 한다는 것, 그러면서 생살이 돋는 과정에서의 불가피한 불균형을 어찌 됐든 감당하려고 한다는 것. 거기서 저는 또 새삼스럽게 이 작가에 대한 신뢰를 확인하게 됐습니다.

 

백지연 저도 개인적으로 윤대녕 소설에 등장하는 감각적인 기호들과 심미적으로 묘사된 도시 공간들을 무척 좋아하는 독자입니다. 서울 공간만 하더라도 종로와 인사동, 성북동의 거리를 이처럼 그윽하고 아름답게 그려놓는 소설이 없죠.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나 고흐의 그림을 다시 찾아보고 영화 「셜리의 모든 것」과 이 소설을 겹쳐 읽는 과정이 매우 좋았어요. 그런데 까다롭고 고독했던 주인공이 치유와 소통을 추구하는 행동의 변화를 보여주는 과정이 독자로서 쫓아가기 버겁기도 했습니다. 읽으면서 주인공의 설정이 극작가가 아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잠깐 했는데요.

 

김영찬 여러 사회적 이슈들을 적극적으로 소화하려는 움직임이 다소 급박한 서사 전개로 드러나는 아쉬움이 없진 않죠. 그래도 이 소설에서 열어 보이는 치유의 세계가 그렇게 돌발적으로만 여겨지진 않았어요.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고등학생 정민의 상처를 이해하고 위로하고 공감하는 방식의 묘사였는데요. 그냥 같이, 말없이, 하염없이 걸어요. 저는 이 대목이 참 감동적으로 다가왔는데요. 어떤 점에서는 윤대녕 문학의 앞으로의 방향을 암시하는 장면으로도 읽혔어요. 답을 찾아 그렇게 같이 걸어가겠다는 거죠. 말없이 공감하면서. 『다시 봄이 올 거예요』의 「닫는 글」에서 “위로는 ‘말’이 아니라 ‘간절히 원했던 답을 함께 찾아 나서는 사람’이었을 것이다”(347면)라는 말이 나오는데요. 마찬가지로 윤대녕 소설의 인물이 시도하는 공감과 치유의 제스처가 뭔가를 꼭 해결해보려는 행위였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요. 장르는 서로 다르지만 이 구술기록집과 윤대녕 소설을 함께 읽으니까 두 세계가 공명하는 느낌을 받아서 저는 참 좋았어요.

 

김소연 저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김태용 감독의 영화 「가족의 탄생」(2006)에서 그려진 대체가족의 모습이 떠올랐어요. 영화에서는 섬세한 사연들이 촘촘히 작동되면서 혼자로 남겨진 인물들이 자연스럽게 가족으로 묶이게 되는데요. 『피에로들의 집』에서 ‘아몬드나무하우스’는 마마에 의해 기획된 공동체 공간이라서 상대적으로 사실감이 떨어지게 다가왔어요. 명우는 심지어 스카우트되다시피 그 집에 입주하게 되고요. 아까 정민이와 주인공 명우가 담담하게 걷는 장면이 좋다고 하셨잖아요. 정민이가 먼저 명우를 찾아가서 함께 걸었는데, 정민이라는 인물이 과연 명우를 찾아갈 만한 성격인가 하며 갸우뚱해집니다. 명우도 처음에는 글쓰기의 슬럼프에 빠진 자의식이 강한 남자로 나오는데 소설이 전개될수록 쿨하고 다정한 남자가 계속 그려지니까 혼동이 와요. 이 남자에게 무슨 마력이 있어서 여성들이 쉽게 마음을 여나 하는 생각도 들고요.(웃음)

 

김영찬 음…… 저는 쉽게 동일시되던데요?(웃음)

 

백지연 윤대녕 소설의 매력적인 남성을 질투하거나 회의하는 남성독자는 간간이 봤는데 동일시하는 분은…… 처음이네요.(웃음) 아무튼 내성적인 주인공이 다정하고 개방적으로 변화하는 연결고리가 좀더 드러났으면 하는 게 있죠.

 

김영찬

김영찬 그런 아쉬움도 없진 않지만, 근본적으로 이 소설이 공동체나 유사가족의 가능성을 보여주면서도 거기에 투신하거나 섣부르게 낙관하거나 희망을 보여주거나 그렇지는 않거든요. 주인공이 정민이와 걸을 때도 결국 강조되는 것은 “현재와 과거가 혼재된 상태에서 각자 자신에게만 집중하고 있었다”(205면)라는 점입니다. 낯선 사람들이 가족 이상의 유대를 소망하지만, 그것을 가질 수 있다고 믿는 환상의 직전에서 멈춰버리는 그런 균형감각이 느껴졌어요.

 

백지연 어쩌면 여성인물의 서사가 튼튼하지 못했다는 게 핵심이 아닐까요. 소설의 ‘마마’가 윤대녕의 소설 「탱자」의 고모와 「제비를 기르다」(이상 『제비를 기르다』, 창비 2007)의 어머니처럼 개성적으로 그려질 수는 없었을까 아쉽기도 했어요. 마마의 파란만장한 과거가 일대기 요약보다는 서사 속에서 얽히면 좋았겠다 싶은 생각도 들고요. 복선처럼 놓인 현주의 출생에 대한 비밀도 마찬가지고요. 사실 이런 아쉬움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과감하게 현실과 부딪치려는 윤대녕 소설의 변화를 흥미롭게 보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윤대녕 소설이 사회적인 소재들을 다루지 않은 것은 아니거든요. 후일담 문제부터 시작하여 미래사회 이야기를 탐구한 작품들도 있고요. 단편에서도 구제역이나 세월호사건을 다루었습니다. 그런 시도의 연장선에서 보자면 『피에로들의 집』은 가장 진전되고 다듬어진 이야기구조를 보여주죠. 힘들게 열어 보이는 변화의 출구가 분명 있다고 생각돼요.

 

김소연 시도 그런 것 같아요. ‘세월호 이후의 문학’이라는 게 가능한 말이라면 암중모색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어요. 그런 맥락에서라면 이 소설은 충분히 의미가 있죠. 더욱 풍부한 결을 지닌 텍스트가 창작될 거라는 기대감도 갖게 되고요.

 

 

윤이형 소설집 『러브 레플리카』

 
 백지연 『러브 레플리카』는 윤이형(尹異形)의 세번째 단편집인데요. 장르적 소재를 활용하면서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탐색하는 윤이형 소설의 개성을 여전히 잘 보여줍니다. 주제들은 훨씬 더 다양하고 확장된 느낌인데요. 문명비판적인 상상력을 바탕으로 최근 사회에서 부각되고 있는 소수자 문제, 기억과 애도의 문제, 종교 이야기, 여성 문제가 적극적으로 다뤄져요. 수록작 중에서는 「대니」와 「루카」를 인상깊게 읽었습니다.

 

김소연 저도 무척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윤이형 소설에도 커뮤니티라고 표현해야 될 것 같은, 공동체 같은 게 매번 존재합니다. 「루카」에서 그 준거집단과 개인의 관계에 던지는 질문들이 새로웠습니다. 몸담고 성장해온 한 세계에 자연스레 동기화된 자가 뒤늦게 깨닫게 되는 혼란, 너무 늦게 깨달았을 때에는 다른 관점을 갖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현상 등을 제시하면서, 어떻게 이 동기화를 극복해내는가 하는 문제제기를 하죠. 루카와 딸기가 각자 쓴 씨나리오도 그 맥락이었고, 「쿤의 여행」과 「대니」도 같은 맥락에서 읽혔어요. 익숙한 우리들의 질서나 관습에 대해 인물들이 끊임없이 각성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진짜 생눈을 뜬 각성 단계에서 모든 이야기들이 발화되는 게 느껴져서 감동적이었습니다.

 

김영찬 윤이형 소설은 SF적인 설정과 이야기 공법에 자기세대의 감각을 결합시키는 데서 독특한 감수성과 개성을 보여주는 것 같아요. 「큰 늑대 파랑」(『큰 늑대 파랑』, 창비 2011)이 그런 매력을 뿜어내는 좋은 예였는데요. 새로운 것을 지향하면서도 기존의 진부해 보일 수 있는 문학적 관습이 묘하게 혼합되어 있기도 하고요. 저도 「루카」를 흥미롭게 봤는데요. 소설에서 루카의 아버지가 딸기에게 자기의 내밀한 심경을 고백하는 장면은 작위적으로 읽혀 불편하기도 했는데 한편으로 그 작위성이 다른 층위에서 이야기의 생동성을 불러일으키는 이질적인 요소로 작동하기도 하고요. 그래서 읽을수록 묘하다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소연

김소연 「루카」가 다루고자 하는 이야기가 동성애와 기독교의 대립구도라고만 파악해버린다면 이 소설을 상투적으로 읽을 수밖에 없게 되는데요. 이 소설에서 제가 흥미로웠던 점은 그 대립구도를 가져와서 이야기의 방향을 낯설게 끌고 가는 지점이었습니다. 루카의 아버지인 목사는 동성애자인 자기 자식을 이해하지 못했던 슬픔이며 신에 대한 회의를 고백하는데, 딸기는 이 사람과 교감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간절히 듣고 싶어하는 루카에 대한 이야기도 해주지 않기로 결정합니다. 교감과 이해가 작동되지 않습니다. 작동되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이해할 필요가 없는 세계를 단호히 거절하고 이해받고 싶어하는 자를 단호히 용인해주지 않으면서, 냉정하게 자신의 세계를 지키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루카의 아버지가 겪은 이야기들이 낱낱이 서술되는데, 그 이해의 몫을 독자에게 건넵니다. 충분히 이해 가능할 만큼의 서술들이기 때문에, 딸기의 단호한 입장보다는 목사의 회한에 독자가 몰입할 여지가 더 많도록 이야기가 배정됩니다. 이 지점이 저는 특별하게 다가왔습니다.

 

김영찬 저는 애초의 작위적 설정이 계속 마음에 걸려서 그 목사의 회한이 잘 와닿진 않더군요. 그런데 한편으로 윤이형 소설에 나타나는 그런 방식의 ‘신선해 보임’이 어디서 비롯되는가를 좀 다른 관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도 들어요. 「쿤의 여행」에 보면 “괜찮아요, 자라지 않아도”(114면)라는 말이 나오는데요. 이 말이 참 흥미롭다는 생각을 했어요. 이건 성숙에 대한 거부라기보다 미성숙에 대한 너그러운 자기긍정에 더 가깝거든요. 어쩔 수 없는 미성숙에 대한 체념적 승인이라고나 할까요. 거기서 역설적으로 어떤 성숙한 태도 같은 게 느껴지기도 한다는 거죠. 윤이형 소설 자체가 전반적으로 그런 것 같아요. 저 개인적으로 윤이형 소설은 참 자라지 않는구나,라는 느낌을 받는데요.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그런 미성숙 이면에 뭔지 모를 성숙함이 몰래 숨어서 살짝 비치기도 하거든요. 그 둘의 긴장이 있어요. 그게 정서적으로 묘한 매력으로 다가오기도 하고요. 사실 이 점은 윤이형 소설의 기본 정조하고도 무관하지 않을 것 같은데요. 선택의 여지가 없는 현실에서 주어진 그대로의 ‘어쩔 수 없음’을 ‘나’의 자리로 승인할 수밖에 없다는 인식에서 오는 달콤한 멜랑콜리라고나 할까요.

 

백지연 윤이형 소설의 성장서사에서 사회적인 부채의식을 배경으로 한 이 세대 특유의 길티플레져(guilty pleasure)를 읽어낸 해석들도 있었죠. 이야기하신 달콤한 멜랑콜리와도 연관되는 듯합니다. 가령 「대니」와 「쿤의 여행」은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에 대해 흥미롭게 문제를 제기하지만, 대상과 작별한 인물이 느끼는 상실과 슬픔의 정서를 전달하는 것으로 이야기의 초점이 이동해요. 「러브 레플리카」의 마지막에서 “그것이 정말로 내 감정이라고 확신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187)라는 표현이 나오는데요. 좀더 들여다보아야 할 문제들을 ‘알 수 없는 감정’의 맥락에서 결론짓는 방식들이 꽤 많습니다.

 

김영찬 저도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문제를 더 파고들지 않고 멈춰버리는 듯한 느낌이에요. 아까 제가 SF의 이야기 공법과 기존의 문학적 관습이 결합되어 있다고 했는데, 어쩌면 그 점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 같아요. 한편으로 혹시 작가는 그런 모호함을 문학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게 아닌가 하는 쓸데없는 의심이 든다는 거죠.

 

김소연 윤이형 소설은 아슬아슬하면서, 절대로 결론을 내려서는 안되는 종류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아요.

 

김영찬 문제는 결론을 내리고 안 내리고가 아니죠. 뚜렷한 결론을 내릴 필요도 없고요. 다만 문제설정이나 그에 대한 인식이 불명확한 건 아닌가라고 묻고 싶어요. 윤이형 소설이 포스트휴먼적인 문제제기를 하면서도 끝에 가선 결국 휴먼으로 돌아오는 것도 사실 그것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아요. 「대니」 같은 소설이 대표적이죠. 문제를 제기했는데 그 핵심을 파고들어가지 않고 표면을 스치고 지나가는 듯한 지점이 분명히 있어요. 그래서 전반적으로 모호하다는 인상을 주는 거죠. 그게 딱히 의미있는 미학적 효과를 불러오는 것도 아니고요. 그런데 사실 이런 문제는 윤이형 소설만의 것은 아닌 것 같아요. 요즘 젊은 작가들의 몇몇 소설에서 많이 보이는 현상이거든요. 결말을 모호하게 흐려버린다든가 모호한 분위기의 연출을 앞세운다든가 하는. 제가 볼 때 많은 경우 그 모호함은 문학이론서에 나오는 어떤 문학성의 지표라기보다 문제인식의 불철저함을 가리는 장식인 것 같아요. 물론 윤이형 소설이 전적으로 그렇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한편으로 무언가를 분명하게 선택할 수 없는 세대의 의도적인 미성숙의 곤경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김소연 서로 다른 이야기를 교차시킬 때, 각각의 서사가 지닌 의미보다는 그 서사들이 충돌하고 겹쳐지는 배치 자체를 보여주려는 의도가 이 소설의 플롯이 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것을 중심서사로 보느냐, 어떤 것을 보조서사로 보느냐 하는 것은 독자의 판단이지만, 윤이형은 흔히 보조서사로 치부됐던 모티브들을 중심서사로 다루려 한 것 같아요.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이야기는 그게 아니라 이거예요’ 하며 애를 쓰고 있는 거지요. 「쿤의 여행」에서 쿤이 인간에게 기생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쿤에게 기생하는 것일 수 있는 것처럼, 「대니」에서 싸이보그에게서만 온전한 사랑을 받는 할머니처럼. 그렇게 전도된 구도 자체가 저는 윤이형이 보여주는 결론이라고 생각합니다. 메시지로서가 아니라 세계를 재구성하듯이요.

 

백지연 그런데 이질적인 이야기들을 포개고 전도된 구도를 제시하는 것만으로 서사의 전복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을까요. 「대니」에서 할머니에게 대니가 아름답다고 말해준 것 자체는 감각적으로 새롭고 찡할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할머니의 내면을 투사한 것으로도 다가와요. 소설에서 대니가 지닌 싸이보그의 정체성은 독립적으로 다루어지기보다는 인간적 관점에서 관찰된다고 해야 할까요. 근본적으로 윤이형 소설이 지닌 모호성은 이 타자를 형상화하는 방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기계로 산다는 것, 소수자로 산다는 것이 뭔지, 과연 각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평등의 문제는 무엇인지가 관념적인 전언보다는 구체적인 서사 속에서 탐색되길 바라는 마음인데요.

 

김소연 윤이형은 다른 소설들이 이야기를 시작하는 지점, 발단단계를 깊게 파고든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어쩌면 발단 이전까지의 서사를 다룬다고 표현할 수도 있겠습니다. 인간의 일에 대하여, 시작과 근원에 대하여 묻고 또 묻는 것이지요. 「대니」도 할머니와 대니의 관계가 맨처음 어떻게 맺어질 수 있는지에 집중해요. 「루카」에서도 딸기와 루카가 처음 만나는 장면을 치밀하게 묘사하고 시간이 많이 흘렀어도 처음 만난 그때를 치열하게 떠올리죠.

 

김영찬 말씀을 들으니 충분히 설득력있는 독법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그게 어떤 면에서 매력적으로 읽히기도 하지요. 다만 중요한 건 무엇을 어떻게 그리느냐가 아니라 그 문제의 함축을 얼마나 집중력있게 파고드느냐겠죠. 그래도 어떻게 보면 이런 의도적일 수도 있는 소설적 미성숙이 주는 망외(望外)의 매력이 있다고 할 수는 있겠죠.

 

김소연 진짜 이 세상은 끝에 와 있다는 걸 실감하는 세대에겐 가장 자연스러운 방식일 수 있지 않을까요. 끝에 와 있으니까 시작을 사무치게 그리워하면서 형상화할 수도 있지 않을지요.

 

김영찬 이야기를 쭉 나누면서 든 생각인데요. 윤이형 소설이 보여주는 세계는 ‘존재의 민주주의’의 멜랑콜리가 아닌가 싶습니다. 나와 타인 사이엔 건널 수 없는 강이 있지만 그럼에도 그 간격과 차이는 존중되어야 하고 그 개인을 형성해온 각기 다른 저마다의 역사가 갖는 가치도 마땅히 그것대로 승인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있거든요. 또 작가의 소설세계 전체가 보여주는 장점 역시 사람 하나하나가 가지고 있는 각기 다른 미세한 감정의 빛깔과 결을 포착하고 그걸 섬세하게 그려놓는 방식에서 나타나고요. 근데 이게 ‘어쩔 수 없음’에 대한 체념적 승인에서 비롯된다는 게 흥미로워요. 특히 「루카」에서 선명하게 드러나죠. 「루카」에 이런 진술이 있어요. “어떤 일들은 그저 어쩔 수 없고 어떤 일들은 노력해도 나아지지 않으며 함께 살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어떤 사람들과는 함께 살 수 없다.”(150면) 그런 어쩔 수 없는 세대의 멜랑콜리한 감수성과 새로운 정치성을 말하는 주제의식이 절묘하게 결합되어 있어요. 젊은 세대에게 윤이형 소설이 매력적으로 읽힌다면 그런 이유겠지 싶어요. 비관적인 현실을 체화한 젊은 세대 나름의 새로운 민주주의에 대한 감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백지연 다양한 층위의 주제들을 심화하는 데 불균형한 측면들이 있지만 고유의 감각을 통해 문제적인 이야기들을 꾸준히 포착하려고 하죠. 「루카」에서 “눈물이 만들어져 모이고 있었다”(137)라는 구절이 정말 윤이형다운 묘사라고 느꼈는데요. 인공적이고 감각적인 세계에 대한 열망을 내면의 감수성으로 끌어들이는 지점에 윤이형 소설의 흡인력이 있는 듯합니다.

 

김소연 기성 질서로 좀처럼 들어가지 않으려는 그 다양한 이야기들이 윤이형만의 고유한 세계라고 할 수 있는데요. 그런 점에서 저는 미성숙해 보이는 화자가 등장하는 윤이형의 세계를 지켜주고 싶은 독자이기도 합니다.

 

 

백은선 시집 『가능세계』

 
 김소연 앞서 세월호 이후 한국문학에 어떤 변화가 있다는 이야기를 나누었는데요. 안희연(安姬燕)의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창비 2015)와 백은선(白恩善)의 『가능세계』(문학과지성사 2016), 이 두 시집을 저는 그 맥락에서 읽어도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세월호 이후 문학적 태도에 변화가 생긴 경우가 아니라, 세월호 이후에 처음 등장한 세대의, 첫 발화를 목격한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거든요. 『가능세계』를 읽으면서 저는 절규를 형상화했구나 싶었어요. 박솔뫼 소설 『백행을 쓰고 싶다』(문학과지성사 2013)에서 비명 때문에 광장으로 나가는 장면도 떠올랐는데요. 시를 읽다보면 미친 듯이 절규에 매달린다고 여겨집니다. 매달릴 게 절규밖에 없다는 몸짓 같다고 할까요. 절규를 하다가 목소리가 잦아들고 힘이 빠져 소진될 즈음엔 새로운 캐릭터가 시의 프레임 바깥으로 나와 바통을 받아들듯 계속 비명을 지르고 절규해요.

 

김영찬 그런 절규와 비명이 시집 전체를 받치는 장시 형식과 관계가 있는 거겠죠.

 

김소연 그렇지 않을까요. 시가 길어질 수밖에 없는 것도 그런 맥락이고. 시가 긴데도 한곳을 빤히 노려보고 응시한 채로 같은 목소리를 내거든요.

 

김영찬 전 솔직히 말하면 시들이 어려웠어요. 나중에 다룰 박희수 시들도 그렇고요. 하필 이 어려운 시집을 읽자고 한 두분이 한편으로 야속하기도 하고.(웃음) 아무튼 저는 백은선 시를 읽으면서 이 세대가 표출하는‘끝에 대한 감각’을 생각해봤는데요. 어떤 정돈된 형태의 종말론적 비전은 아닌 것 같고요. 고여 있는 현재와 닫힌 미래를 살아가는 젊은 세대가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세대적 감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시를 보면 그런 말들이 많이 나오더라고요. “이게 끝이면 좋겠다 끝장났으면 좋겠다 (…) 이미 실패했지만 다시 실패하고 싶다”(「가능세계」)처럼요. 끝을 예감하면서도 어찌 되든 간에 써야 된다는 절박한 자의식이 느껴지고요.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시를 쓴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시쓰기에 대한 자의식적 물음을 반복하고 있어요. 그런 물음들의 집중적인 반복이 인상깊게 다가왔습니다.

 

백지연 장시(長詩)를 쓰는 방식 역시 개성적입니다. 우리가 장시를 생각할 때 떠올리는 서사성이나 스토리구조가 의도적으로 분쇄돼요. 시간의 흐름을 추측할 수 없게 하는 숱한 단절적 이미지들이 등장합니다. 그건 세계에 대한 절망적인 인식과도 연결되는 것 같고요. “시작과 끝은 맞물려 있다. 동시에 태어난다. 딱딱한 혀 딱딱한 얼음 딱딱한 세계”(「파충」)처럼 애초에 달라지지 않는 완고한 세계라는 거죠. 그런데도 이런 세계에 시가 온 힘을 다해 부딪치는 거예요. 쓴 것을 또 쓰면서 이 절망적인 세계를 어떻게든 전환시키고 싶은 분투가 느껴져요.

 

김영찬 중요한 건 어떻게 부딪치는가겠죠. 「사랑의 역사」라는 시를 보면 “사람의 목소리를 녹음해서 틀고 그걸 다시 녹음하고 (…) 이런 식의 과정을 계속해서 거치면 마지막에 남는 건 돌고래 울음소리 같은 어떤 음파뿐”이라는 표현이 나와요. 시적 화자는 목소리를 걸러서 남은 그 음파로 시를 쓰겠다고 하고요. 실제 현실을 최대한 증류시키고 걸러냈을 때 남는 소리. 그런 언어를 발명하고 싶다는 거겠죠. 그런데 이어서 거꾸로 그 “돌고래 울음을 녹음하고 틀고 녹음하기를 반복한다면 어떻게 될까”라는 물음을 던지고는 “그건 모른다. 모르지만 너무 슬플 것 같다”고 쓰고 있어요. 이런 분투가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외면하지 않는 거죠. 「고백놀이」에서처럼 접속사에 대한 집착도 눈에 띄는데요. 그것도 같은 맥락에서 읽혀요. 두 사물을 연결하는 낡은 비유 같은 것과는 다른 방식의 사물의 배열과 호흡이 어떻게 가능할지에 대한 상상과 모색이겠죠. 그렇게 현실과 언어를 증류시켜 추상화해서 가닿을 수 없는 것으로 설정하고 그럼에도 거기에 가닿으려는 불가능한 시도를 연출하는 방식으로 시쓰기의 자의식을 표출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김소연 어쩌면 이 세대는 무엇을 쓸 수 있는가보다 어떻게 써야 하는가를 더 많이 생각하는 것 같아요. 쓰는 것을 포함한 자기 삶 전체를 퍼포먼스화하는 경향도 있고요. 행위예술가의 예술행위와 닮은 점도 있는 것 같습니다. 백은선 시가 던지는 질문이나 독백 같은 것들이 완전히 낯선, 처음 듣는 목소리가 아니잖아요. 그런데 분명히 다른 태도가 있죠. 작품으로 남는 시를 쓴다기보다는 시를 쓰고 있는 행위 자체를 퍼포먼스화하는 경향. 김수영(金洙暎) 시인이 했던 ‘온몸으로 밀고 나가면서 쓰는 시’라는 말에 대한 진짜 화답처럼 느껴지는 시집이었습니다. 물론 김수영이 말한 맥락과는 다르겠지만요.

 

김영찬 시적 퍼포먼스라는 말이 실감나는데요. 백은선 시는 그냥 절망은 아니고 절망을 절망한다고 해야 할까요. 그리고 갇혀 있다는 의식, 끝에 대한 자각, 그 절망의 감각을 역설적으로 지금의 현실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조건으로, 나아가 말하기와 시쓰기의 포지티브한 전제조건으로 전환시키는 발상이 흥미로웠어요. 그런데 시를 쭉 읽다보면 다른 한편으론 이런 의문이 들기도 해요. 이를테면 이런 방식의 절망의 시적 퍼포먼스 혹은 시적 자의식의 연출이 그 자체로 너무 과장된 연출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문득문득 든다는 거죠. 시를 쓰고 있는 ‘나’를 보고 있는 ‘나’의 시선에서 일종의 나르시시즘이 느껴진다고나 할까요.

 

백지연 한편으로는 이런 몸짓이 가닿는 구체적 현실이란 과연 어떤 것인가라는 물음도 품게 되는데요. 4부 시들을 보면 그 실마리 중의 하나로 여성으로서 겪는 학대나 폭력, 성적 상징이 나타나 있어요. 시집 전체를 보면 큰 비중은 아니지요. 그런데 앞에서 본 절실한 분투의 몸짓에 비교한다면 여성적 체험의 문제를 절망적 인식과 연관해 서술하는 대목들이 생각보다 안이했어요. 「성스러운 피」도 그렇고 「샹주망 아버지」도 그렇고 분명히 의도하는 바가 있는 이야기들이거든요. 그런데 이런 소재들을 다룰 때 나오는 상투적인 프레임을 쉽게 벗어나지 못하더라고요.

 

김소연 그 시들이 등단작인데 아마 학습되어온 여성을 벗어던지는 이니시에이션(initiation)으로 읽어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네요.

 

백지연 시집에 함께 묶인 이상 자기 세계의 바탕을 드러낸 것이니까 꼭 초기작의 문제만은 아닐 것 같은데요. 어떤 점에서는 싸우고자 하는 괴물 같은 세계의 실체가 너무 고정적으로 파악된 것은 아닐까 싶어요. 덧붙여서 시들에 등장하는 알 수 없는 기호들도 궁금증을 주던데요. 조그만 달을 그려넣는다든가 레이스 모양 같은 그림들도 있고요. 마치 자기만 알아보게 팔목 안쪽이나 새끼손가락에 예쁘게 새겨넣는 타투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김소연 장시를 쓸 때 분절이 있을 수도 있고 반복이 있을 수 있고, 또 아까 김영찬 선생님이 접속사 이야기도 했지요. 그렇게 끊임없이 쉼없이 절규를 해야 하는 와중에 말을 뱉을 수만은 없을 때의 막간, 대나무의 마디자리 같은 지점에서 그런 기호들도 들어오지 않았을까요. 쓰면서 더이상 아무 말도 생각이 안 날 때에도 계속 쓰고 있겠다는 의지를 지녔다면 이런 기호들이 가능할 수 있다는 상상을 해봤어요.

 

김영찬 흥미로운 지적이네요. 근데 저도 덧붙이자면, 말이 되는 소리일지는 잘 모르겠는데요, 백은선 시는 의식적으로 감각적인 것을 외면하는 포즈를 취하면서 정서에 대한 정서, 감각에 대한 감각 같은 걸 써보려고 하는, 일종의 메타적 지향을 드러내는 것 같아요. 감각적인 것들을 증류시켜보려는 작업, 그리고 그걸 실연(實演)하는 끝없는 읊조림 같은 거라고도 할 수 있겠죠. 전 앞에서 말씀하신 그 기호들을 그 과정에서 흘리고 가는 무의미한 소리의 흔적들로 읽었는데요. 근데 다른 한편으로는 「밤과 낮이라고 두번 말하지」 같은 시를 보면, 모른 척하고 싶고 의미없다고 말했지만 그럼에도 불쑥불쑥 출현하는 저 감각적인 것들을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고민 같은 것들을 곳곳에서 모호한 어법으로 극화하기도 해요. 그런 방식으로 새로운 시를 쓰려는 충동과 그것이 가능할지에 대한 회의와 불안을 희미하게 공존시켜요. 그래서 백은선의 좋은 시는 이 둘이 만들어내는 충돌과 긴장이 시를 굴려가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어요. 그런 게 어떤 멜랑콜리한 활력을 부여하고 있다고나 할까요.

 

김소연 이전 시인들은 끝에 서 있는 절박함을 말할 때 보통 씨니컬한 태도를 취했지요. 위악적인 포즈도 있고 세계를 조롱하는 듯한 태도도 있었고요. 백은선의 시에는 그런 것이 하나도 없어요. 순진무구하고 열렬하게 말하죠. 여기가 끝이라고. 그 자체가 호감인 것 같아요. 백은선은 끝에 서서 새로운 태도로 시를 쓰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고전들이 지녔던 순수하고 열렬한 목소리를 냅니다.

 

김영찬 어떻게 보면 매우 고전적이면서도 오히려 더 패기가 느껴지는 면이 있고. 다음 시집이 기대되는 시인입니다.

 

김소연 다음 시집을 어쩌려고 이런 첫 시집을 세상에 던져놨나, 다음 시집을 감당할 수 있으면 정말 존경스럽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박희수 시집 『물고기들의 기적』

 

백지연 백은선 시에서 박희수(朴熙秀) 시로 넘어가는 길도 만만치 않게 가파른데요,(웃음) 이번 계절에는 문학이 보여주는 다양한 실험의 현장들을 한꺼번에 만나는 듯싶습니다. 박희수의 시집은 굉장히 다채로운 세계를 담고 있어요. 언어를 그림으로 형태화해 보이는 시도도 있고 단어의 음절들도 시험해보고, 설화세계나 고전적인 서정의 세계도 그려보고요. 그중 눈에 띄었던 것은 표제작에 나오는 ‘물고기’ 이미지가 중심이 되는 서정적인 세계들의 변형입니다. 자연적인 이미지를 활용해서 존재의 기원을 찾는 낭만적이고 고전적인 주제가 바탕에 흐르고 있어요.

 

김소연 90년대의 시인들의 첫 시집에 이런 느낌이 많았어요. 한 시인이 탄생할 때까지의 통과의례를 첫 시집에서 보여주고 그다음부터는 특정한 기획 아래 씌어진 시집을 출간하곤 했는데요. 2000년대부터는 그런 첫 시집이 거의 없어요. 첫 시집부터 철저히 기획된 느낌을 주었죠. 2000년대에는 심보선(甫宣)의 첫 시집 정도가 그런 풋풋한 느낌으로 다가왔고요. 시인은 이런 식으로 탄생하는구나,라는 것을 목격하게 하는 소중한 정보들이 그런 시집에는 담겨 있어서 각별한 느낌이 드는데요. 박희수의 첫 시집도 같은 맥락에서 각별합니다.

 

김영찬 박희수 시에도 백은선 시가 가지고 있는 ‘끝에 대한 감각’이 있어요. 그래선지 시집 전반적으로 구르고 달리고 흐르고 피어나고 하는 운동성의 이미지가 있는데도 그것들이 생명력보다는 부패하고 퇴락하는 이미지와 결합되어 나타나는 것 같고요.

 

백지연 딱딱하고 폐쇄적인 세계를 보여주면서 실제로 그 세계 사이를 흐르는 이미지들은 굉장히 운동성 있으면서 유동적이에요.

 

김영찬 그리고 세계 속의 ‘나’는 알지 못하는 어떤 요구에 의해 떠밀려가는 존재고 전체 속의 무력한 작은 일부에 불과하다는 감각이 곳곳에서 표출되죠. 그런가 하면 한편에서는 그에 맹렬하게 맞서는 강한 시쓰기의 자의식을 드러내요. 「로드Load」 같은 시가 그 예인데요. 한편으론 기존의 언어관습을 해체하고 재배치하는 언어적 방향전환이 모든 걸 돌려놓으리라는 기대가 있죠. 그러면서 또 말이 사라지거나 죽어도 “가슴의 감각은 남”아서 “맞게 발음한다면 굳어진 진흙을 깨뜨리는 부드러운 물줄기의 열쇠로/다시 돌아올 것이다”라고 하는데요. 말이 표현할 수 없는 세계조차도 그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말을 통해서만, 아니면 차라리 말이 사라진 그 자리의 흔적을 통해서만 더 생생하게 감각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랄까요. 저는 이게 조금은 모호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언어와 언어의 흔적을 통해 경직된 현실을 풀어헤치고 현실을 생생하게 감각할 수 있다는 믿음의 색다른 표현으로 읽혔어요. 이런 생각이 시에 대한 고전적인 신뢰와 거리가 먼 건 아니겠죠. 이 시에서도 그렇지만 때로는 이렇게 시에 대한 고전적인 신뢰와 대척점에서 벌어지는 새로운 실험들이 있고요. 그런 측면에서 불협화음이랄까 그런 충돌의 지점들이 보였어요.

 

백지연 말씀대로 결국 시인이 지향하는 것은 이 절망적이고 획일화된 세계를 물렁물렁하게 만들어서 변형시키고 자기 식으로 움직여보고 싶은 건데요. 아직 그 세계를 새롭게 조형하는 선명한 방식을 찾은 것 같지는 않았어요. 여기저기서 시와 언어를 생각하는 자신의 다짐들이 돌출되는데 그 목소리가 어디에 안착할 수 있는지 궁금해지더라고요.

 

김영찬 아까 이 시인이 거쳐온 모든 세계가 이 시집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는 이야기도 나왔는데, 여러 세계가 혼합되어 있어서 그런지 시간적 흐름을 짐작하기 어려운 것도 특이했어요. 최근에 쓴 시들은 어떤 계열인지 궁금해지기도 하고요.

 

김소연 저는 이 시인이 지향하는 정체성은 1부에 나타나 있다 가정하고 어떻게 하다 여기까지 왔는지 살펴보는 데 뒷부분 시들의 도움을 받으며 이 시집을 파악했어요.

 

백지연 1부에서 이 시집의 운동성이 잘 와닿는 시는 「달리기」였어요. 폐허 같은 세계 속에서 쉬지 않고 뭔가를 만들어내고 움직이려는 시적 의지가 와닿았습니다. 「강변북로」나 「물고기들의 기적」은 낭만적이고 서정적인 시적 지향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훨씬 가독성이 있었고요.

 

김소연 정말 뭔가 이끌려서 썼다 싶은 느낌이 드는 건 「기묘하게 힘찬 합창」이었어요. 무엇이 가장 시적인 태도인가에 대한 고민을 다 놓아버리면서 쓴 느낌이었습니다.

 

백지연 백은선 시도 그랬지만 박희수 시에도 수수께끼 같은 암호, 기호며 그림들이 등장합니다. 「주사위의 집」은 정말 정직하게(!) 주사위 모양을 그려서 보여주고요, 김소연 선생님도 시를 쓰면서 이런 기호나 도표, 그림을 시도해본 적이 있는지 문득 궁금해지는데요.

 

김소연 한번도 없어요.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 적도 없는 것 같아요.

 

김영찬 이런 실험들을 보면 독자가 내 시를 어떻게 읽을까에 대한 생각보다는 내가 해온 것들, 나의 세계를 보여주고 싶다는 의지가 더 강렬하게 느껴져요. 가령 「전체성」이라는 시를 보면 이 세계의 전체성은 무언가 결함이 있는, “가다 막히는 좁은 시냇물” 따위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비치고는 이어 이렇게 말합니다. 읽어볼까요? “본격적인 시에 앞서서메르카토르 도법//두 눈을 뽑아들고/거리에 선다//이제부터 굴러오는 모든 것은 길이 될 것이다//눈사태/난폭해지는 별의 회전”. 기존 세계에 대한 관념을 무시하고 자기 나름의 시적 왜곡을 통해 새로운 전체성을 발명하고 길을 만들어가겠다는 강렬한 도전의식의 표현이겠죠.

 

백지연 백은선이 언어를 계속 세상에 문지르는 방식으로 자기의 분투를 표현했다면 박희수는 선언적으로 자기의 발언을 뿜어내는 느낌이에요. 자기가 본 세계를 조형화해서 제시하고, 또 그것을 부수는 몸짓을 취하고요. 두 시집이 저에게 난해하게 다가온 것은 표현의 문제만은 아니고요. 태도는 강렬한데 이야기하는 세계의 구체성이 뭘까, 자기 세계의 고유한 주제는 잘 보여주지 않는 느낌이었습니다.

 

김소연 이 세대부터는 대표작이 없는 시인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시 몇편으로 시세계를 대표할 수 없고, 시집 전체가 하나의 물성을 이루는 것. 이런 흐름이 결코 우연적인 게 아니라 시인들이 지향하고 추구하는 길이라는 사실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백지연 저는 소박한 독자로서 섭섭하기도 합니다.(웃음) 시집을 읽는 재미는 내가 읽고 가장 좋았던 작품 한편을 고르는 과정이기도 한데요. 확실히 백은선과 박희수의 시집을 읽으면서 흥미로운 시, 인상적인 시를 말할 수는 있는데 어떤 시가 가장 좋은 시, 가장 대표적인 시라고 자신하기는 어려웠습니다.

 

김소연 하나의 작품에 자기의 세계를 집중하고 응축시키는 것에서 의도적으로 벗어나려는 것 같아요. 작품에 대해서 사고한다기보다는 내가 뭐 하고 있나 어디로 가고 있나 어떤 식으로 버티고 있나 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요.

 

김영찬 저도 섭섭한데요. 어찌 됐든 기성의 세계를 뚫고 자기만의 새로운 길을 만들어나가려는 시도라 할 수 있겠죠. 그 시도에서 젊은 시인들의 분투가 충분히 읽히고요. 그런데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 시들을 읽어나갈 때 방언을 듣는 듯한 느낌도 들어요.(웃음)

 

김소연 그 반응이 가장 정확한 느낌일 수 있죠. 어쩌면 이 시인들은 선생님이 지금 하신 말씀에 ‘내 시가 그렇게 이해하기 어려웠나’ 생각하지 않고, 제대로 통했다고 생각할 것 같은데요.

 

김영찬 아, 그런가요?(웃음) 근데 이해는 되면서도 한편으론 이해하기 어려운 점도 있네요. 세상에 자기를 열고 어떻게든 다르게 가닿으려는 모색이 이해의 통로를 차단하고 자기의 골방을 폐쇄적으로 구축하려는 충동과 슬기롭게 어울릴 수 있으려나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하고요. 그리고 사실은 좀 묘한 어긋남이 느껴졌어요. 새로운 언어를 발명하려는 충동과 어디선가 본 듯한 익숙한 표현이나 어법에 대한 의존이 착종된 것 같다고나 할까요.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그 둘의 어색한 긴장 자체를 문제화하는 시적 자의식이 얼핏 비치기도 하고. 아무튼 좀더 지켜보면 분명하게 알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김혜순 시집 『피어라 돼지』

 

백지연 이제 『피어라 돼지』(문학과지성사 2016)를 이야기해볼까요. 한권의 책을 읽으면서 이렇게 다양한 느낌을 경험한 것은 오랜만입니다. 통쾌하고 후련하고 어느 순간 가슴을 찌르는 듯 슬프다가, 깔깔거리는 등 작품이 이끄는 대로 마구 휩쓸리면서도 그것이 힘들지 않은 신기한 독서 체험이었는데요. 시집의 1부 ‘돼지라서 괜찮아’는 소재적으로는 2011년 구제역 파동을 다룬, 그 자체로도 완결된 장시입니다. 이것을 출발점으로 하는 2~4부의 시들이 현실과 역사의 다양한 이슈들을 시 속으로 적극적으로 끌어들이고 있죠. 강렬한 서사성을 지니면서도 리드미컬하게 단숨에 읽히는 시집이었어요. 현실의 충격이 온다고 해서 그걸 바로 작품이 받아 적기는 쉽지 않습니다. 구제역 사건만 하더라도 그런 소재인데 이 시집에서는 풍자와 해학, 자기해체를 통하여 매우 생동감있는 이야기를 끌어냅니다. 읽으면서 이전의 민중시에서 느꼈던 풍자적 해방의 힘도 느꼈고요. 풍자하는 게 자칫하면 도식화되기 쉬운데 전혀 그렇지 않았어요. 지금까지 김혜순(金惠順) 시의 도정에서도 이 시집은 특별할 것 같은데요.

 

김소연 풍자와 해학이라고 호명할 수 있는 대목에서 읽는 사람으로서 안심하게 되는 부분이 있죠. 장치 하나가 시인과 독자 사이에 놓이니까. 이 작품이 지닌 이 뜨거운 이야기를 글러브를 끼고 손에 들 수 있게 되는 셈인 거죠. 그래서 이 뜨겁고 따가운 이야기에 기꺼이 웃을 수 있고 즐길 수 있고. 저는 이 시집이 김혜순 시인의 열번째 시집이라는 점을 생각했을 때 더욱 놀랐습니다. 『우리들의 음화』(문학과지성사 1987)나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문학과지성사 1994)에서부터 줄곧 김혜순 시인은 현실의 문제를 시 속에 끌어들여왔습니다. 무슨 용광로처럼요. 열번째 시집에서도 이렇게 맹렬하게 질문을 던지고 있고, 춤추고 있고. 특히 「바람의 장례」는 세월호사건에 직면하여, 단원고 운동장 한복판에서 썼을 것 같은 시인데, 이 버거운 문제를 육체화해내는 데에 이토록 유연하고 민첩할 수 있을까 싶어요.

 

김영찬 뭔가 다들 찬사를 보내는 분위기인데요.(웃음) 저도 읽으면서 매우 강렬하고 통쾌한 느낌을 받은 시집입니다. 시가 민첩하고 춤을 춘다는 표현이 딱 맞는 거 같아요. 1부가 특히 인상적이었어요. ‘돼지라서 괜찮아’라는 표현은 아까 윤이형 소설에 나왔던 “괜찮아요. 자라지 않아도”라는 말과 선명하게 대비돼서 흥미로웠는데요. 윤이형의 ‘괜찮아’에서 뭔가 소극적인 인상을 받는다면 김혜순의 ‘괜찮아’에선 적극적이고 통쾌한 확장과 월경, 자유로운 포섭과 해학적 포용의 의지가 강하게 느껴져요. 이를테면 ‘돼지 되기’라고 해야 하나요. 인간과 세계의 ‘돼지성’을 이야기하면서 시의 몸이 말 그대로 돼지가 돼서 진창 속을 뒹구는 듯한 느낌이었어요. 읽으면서 압도되는 면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백지연 여기서는 돼지가 나고 내가 돼지이면서 그 경계 자체가 사라지죠. 흔히 얘기하는 ‘되기의 행위’도 뛰어넘어 모든 것들이 자연스럽게 용해된 세계입니다. 종교나 명상도 마찬가지로 다뤄지는데요. 면벽수행 이야기로부터 시작하여 자연스럽게 몸에 대한 사유를 펼쳐나가요. 현실의 고통에 몸을 담그면서도 그것을 뚫고 나와 사유하는 지점이요. 그 대목이 우리를 해방시키는 것 같아요. 세월호를 다룬 시를 읽을 때는 참담한 현실을 투시하면서도 낙담하지 않는 센 에너지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지 궁금했습니다.

 

김영찬 돼지 자체가 그래요. 그건 비유도 상징도 아닌 그냥 돼지이기도 하고 세계 그 자체이기도 하고 돼지처럼 다루어지는 사람일 수도 있고 또 그걸 훌쩍 넘어서는 어떤 것이기도 하죠. 시의 눈과 몸이 돼지처럼 그 한가운데 풍덩 들어가 있는 거예요. 그러면서 그냥 뒹굴면 재미가 없겠죠. 거기서 자기를 여러 갈래로 분화시키기도 하고 돼지 안으로 들어가는가 하면 또 빠져나오기도 하는 거죠. 그러면서 단지 돼지가 되거나 이 세계의 축소판으로서 돼지적인 세계에 머무는 게 아니라 그 안에서 수많은 차원의 스펙트럼을 만들고 겹쳐놓고 운동하게 만들면서 그 사이에 또 길을 내고 그 무수한 차원을 자유롭게 넘나들고 있어요. 그 과정에서 흘러가는 활달한 운동성과 명랑성이 무척 좋았습니다. 그런 자유분방한 시적 변신과 에너지의 흐름이 기묘한 해방감을 줘요.

 

벡지연

백지연 김혜순 시는 여성시의 계보로 보더라도 후배 시인들에게 많은 영감과 상상력을 제공해왔죠.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흔드는 다양한 이미지와 상징, 어머니와 딸에 대한 은유 등 제가 떠올리는 김혜순 시의 이미지가 있어요. 그런데 이번 시집은 그런 고정관념을 흔들더라고요. 좋았던 시 중에 「수박은 파도의 기억에 잠겨」가 있는데요. 문학적 여성성의 범주를 확 넓혀버렸어요. 이 시에서는 수박을 생각하며 연애편지를 씁니다. “사실 이 나이의 여자가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우리나라에선 죄를 짓는 일과 같습니다/수박에게나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라는 구절에서 실컷 웃었어요. 가슴이 찡하면서도 읽는 사람을 누추하지 않게 만들더라고요. 수박을 두고 고백하다가 결국 가슴에 박힌 수박을 끌어안는 장면이 무척 좋았는데요. 연애시를 이렇게 쓸 수 있구나 싶어서 무척 새로웠습니다.

 

김영찬 그냥 새롭다는 말로는 부족할 것 같습니다. 김혜순 시에는 그 자체로 기존의 관념이나 비유나 상징을 무력하게 만드는 힘이 있어요. 이게 어디서 오는 걸까를 생각해봤는데요. 이런 게 시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어떤 것, 시를 얽어매고 있는 의장 같은 걸 훌훌 벗어던지고 세계의 맨살에 시의 맨살로 부딪친다는 느낌이죠. 시의 몸을 끊임없이 바꾸면서요. 이를테면 건드렸다가 물러나고 또 스며들고 통과하기도 하고. 그러다보니 시의 몸에 온 세계가 담겨오고 그걸 다시 이리저리 휘젓는 듯한, 기묘하게 광활한 자유로움이 느껴져요. 그러다보니 기존 비평의 언어도 무력하게 만들어버리는 것 같아요. 뭐라고 규정하면 멀리 달아나 있고 또 뭐라고 말하면 덜 말한 것 같고…… 경계와 한계를 뛰어넘는 시적 자유의 에너지, 이런 것들이 너무나 압도적으로 펼쳐지죠.

 

김소연 이런 자유운동 같은 것들이 어떻게 빚어질 수 있었을까를 상상해봤는데요. “시의 체면을 세워주기가/너무도 힘든 시절이었다”라는 ‘시인의 말’에 우선 공감이 됐어요. 문학의 체면을 세워주기가 너무 힘든 시절을 우리 모두가 보내고 있으니까요. 우선 김혜순은 가장 깊은 곳까지 내려가서 시에는 아무 체면이 없구나라는 생각에 이를 때까지 끙끙 앓아요. 그리고 난 후 소낙비 그친 다음날 맑은 시야를 확보하는 것 같은 세계를 보여주죠. 아무리 무거운 것도 거뜬히 들어올리는 회오리 같은 바람을 일으키듯이 리듬을 타면서요. 시인이 세상에 첨벙 투항해버리는 그 자체로 시를 쓴다는 게 어떤 건지 배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백지연 김혜순 시를 읽으면서 여기서 사유되는 여성성의 문제가 우리 소설 속에서도 드러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문학이론에서건 작품에서건 여러가지 이론들을 경유하면서 활발하게 탐색되어오던 여성성의 주제가 어느 순간에는 제자리를 빙빙 맴도는 듯한 느낌이 있습니다. 성별이 지워진 여성, 침묵하는 여성, 말할 수 없는 여성에서 징후적인 읽기를 하는 과정도 어느새 상투화되고 있다는 생각이고요. 소설에서 관습적인 여성인물을 벗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면벽수행하다가 뛰쳐나가는, 그렇게 활달하고 자유로운 움직임을 보고 싶기도 하거든요.

 

김영찬 비슷하지만 다른 얘기일 수도 있겠는데요. 김혜순 시를 여성시의 계보 속에서 많이 이야기하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여성시, 혹은 여성성의 구도 속에서 김혜순 시를 이야기하면 좀더 다채로운 의미 부여를 제한해버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김혜순 시가 갖는 자유로운 확장성을 관습적 구도 속에 가두어버리게 될 수도 있다는 거죠.

 

백지연 말씀처럼 관습적인 구도에 고정된 여성성의 개념이야말로 문학적 상상력을 위축시키죠. 그런데 한편으로 『피어라 돼지』는 여성임을 제대로 사유하는 게 인간과 세계를 사유하는 데 핵심적인 통로임을 잘 보여주는 시집이 아닐까 싶어요. 여성으로서의 관점이 문명에 대한 사유나 인간존재의 성찰, 사회적 재난의 문제를 현실적으로 성찰할 때 굉장히 중요한 바탕이 된다는 생각이 들고요. 여성이라는 조건이 세계를 이해하고 표현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게 아니라 굉장히 해방적인 에너지를 주는 느낌이었는데요.

 

김소연 저는 이번 시집에서 풍자와 해학이 강렬해지면서 김혜순 시의 목소리 중에 젠더의 목소리가 아무래도 중성화된다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그게 좀 서운하기도 했습니다.

 

김영찬 전 오히려 그런 젠더의 목소리까지도 뛰어넘는, 어디에도 한정할 수 없는 다성적이고 유동적인 목소리의 울림이 느껴지던데요. 근데 「파리로서」라는 시를 보면 이분이 돼지로도 모자랐는지 파리가 되더군요.(웃음) 파리의 눈으로 세상을 보니까 “풍경이 백만개로 쪼개”지고 “분침과 초침 사이”에서 몸통도 백만개로 쪼개지고 “그물코 하나에 나 하나/억만개의 내가 무르익고 있다”라고 노래해요. 그 ‘나’는 또 백만개 억만개의 세계이기도 하죠. 자기를 무수히 쪼개고 쪼개 세계 속으로 던지고 급기야 자기 자신이 억만개의 세계가 되고 또 그 세계의 목소리가 되는 거지요. 전 이 작품이 김혜순의 시적 방법론에 대한 흥미로운 암시로 읽혔어요.

 

백지연 이야기하다보니 김혜순 시를 포함하여 오늘 살펴본 작품들이 모두 최근 문학작품들의 변화과정을 실감하게 합니다. 전망이 쉽게 보이지 않는 것 같은 현실을 그대로 직시하면서도 새로운 전환의 실마리를 찾아보려는 역동성이 느껴졌다고 할까요.

 

김소연 기다리고 있던 변화들이 최근 문학에서 탐색되고 있는 것 같아 우선 반가웠습니다. 세계의 깊은 바닥, 막장이라는 인식이 작품들을 공통적으로 관통하는 것 같았는데요. 막장이라는 인식을 따라가다 문득 새로운 시작에 서 있다는 느낌과 만나는 경이가 있었어요.

 

김영찬 젊은 작가들뿐 아니라 중진작가들이 자신의 세계를 쇄신하면서 치열하게 모색한 과정들이 무척 반가웠습니다. 한국문학의 미래를 쉽게 낙관하기 힘든 시대인데요. 앞으로 이런 시도들이 모이고 쌓여 한국문학의 보람찬 활력으로 이어질 수도 있겠구나 하는 기대와 신뢰 같은 것이 생긴 느낌입니다.

 

백지연 열띤 토론을 나누느라 시간이 금세 지나간 것 같네요. 긴 시간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