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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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의 목소리 | 창비에 바란다

 

문화자본 재분배를 위한 인문학

디자인 연구자 박해천 인터뷰

 

 

박해천 朴海天

동양대 공공디자인학부 교수. 저서 『콘크리트 유토피아』 『아파트 게임』 『아수라장의 모더니티』 등이 있음. ecri11@naver.com

 

황정아 黃靜雅

한림대 한림과학원 HK교수, 본지 편집위원. 저서 『개념 비평의 인문학』, 편서 『다시 소설이론을 읽는다』 등이 있음. jhwang612@hanmail.net

 

 

『아수라장의 모더니티』(워크룸프레스 2015) 마지막 장()에 기록된 축약본 ‘테크노-자서전’으로 미루어 스스로를 ‘변종 디자이너’로 규정하는 박해천 선생은 ‘스탠더드한 『창비』가 왜 나 같은 변종을?’로 짐작되는 의구심을 안면 가득 담은 채 인터뷰 자리에 나왔다. 창비에 대한 그런 인상은 자주 목격되고 진술된 바이기에 나는 일말의 상처 따위 받지 않기로 단단히 준비해두었고 내심 그런 의구심을 해소해주고야 말리라 결심한 터였다. 그리고 그건 처음부터 내가 이기고 들어가는(?) 게임이었다. 왜냐. 창비의 일원인 나는 박해천의 ‘변종’적인 작업에 상당히 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해천이 그간 해온 작업에서 눈길을 끌었던 점을 요약하자면 크게 두가지다. 하나는 『콘크리트 유토피아』(자음과모음 2011)에서 『아파트 게임』(휴머니스트 2013), 『아수라장의 모더니티』로 이어지는 그의 분석과 비평이 문화연구라는 면에서 갖는 특이성이다. 문화연구에서 개인이든 집단이든 특정한 정체성을 가진 대상에 접근하는 방식은 매우 다양할 것이다. 드러난 자기서사나 이데올로기를 헤집어볼 수도 있고 감춰진 내면의 욕망과 집단무의식 쪽을 파고들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대개 해당 주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는가에 초점을 둘 때가 많다. 박해천이 전면화하는 것은 가령 소련제 탱크나 포니 자동차, 적산가옥이나 이층양옥 같은 것, 그리고 무엇보다 한국인의 욕망을 압도적으로 수렴한 듯 보이는 아파트다. 그는 이처럼 우리를 둘러싼 주요 ‘인공물’의 등장과 교체를 통해 역사적 변화를 읽어내려 하며 때로 그 인공물들을 서사의 주체로 내세움으로써 다른 조망(眺望)을 확보하려 한다. 

 

 그렇죠. 제가 진행하는 작업은 ‘인문학 분야’의 문화연구와 그런 점에서 차별성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우리의 일상성을 규정하는 사물의 존재양식, 즉 도시부터 주거공간을 거쳐 스마트폰에 이르는 인공물의 생태계에 관심이 많습니다. 인식, 관념, 표상보다는 인공환경의 물질문화에서 출발해 그것이 우리의 신체감각이나 인지과정과 상호작용하는 과정에 주목하는 것이죠. 요즘 자주 이야기되는 ‘정동(情動)’이라는 개념과 연결되는 측면이 있습니다. 사실 소설 등 문학작품을 많이 참고하는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이를테면 박완서 선생의 작품에는 그런 영향관계가 디테일하게 잘 묘사되어 있거든요. 저는 이런 접근이 우리가 근대화 과정을 통과하면서 어떤 인간으로 변모했는지 생각해볼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고 봅니다.

 

왼쪽부터 박해천, 황정아.

 

문학비평의 시선에서도 소설 속 인물들이 어떤 의식적인 생각과 기분을 갖는가보다 그들이 공간과 사물로부터 거의 무의식적으로 새기는 감각과 정서를 건드린 대목이 한층 인상적일 때가 많다. 오늘날의 소설에서 편의점과 고시원과 원룸과 대형마트가 배경이 된 장면들을 떠올려보면 알 수 있다. 박해천이 말하는 ‘디자인 연구’란 그렇듯 인공물의 디자인뿐 아니라 그것이 인간의 삶 자체를 디자인하는 것까지 아우른 표현이다. 그런데 그의 분석이 가장 신랄해지는 건 세대 연구와 맞물리는 지점에서다. 더 구체적으로는 87년체제 수립의 주역으로 자부하면서 이제 대부분 오십대로 접어든 이른바 86세대를 다룰 때인데, 진보시민이라는 키워드로 세대적 정체성을 구축해온 이 집단은 ‘아파트 게임’에 적극 참가한 중산층 소비자라는 다른 얼굴도 갖고 있다.

 

아, 제가 그다음 세대인데요, 원래 자기가 속한 세대를 비판하기는 어려운 반면, 바로 윗세대의 행태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비판하곤 하잖아요. 저도 제 세대에 관해선 이야기 잘 못합니다.(웃음) 보통 한국사회에서 사람들은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가와 무관하게 청년기에 무엇을 했는가를 중심으로 자신의 현재 정체성을 정의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제 작업 일부가 그런 문제에 좀더 세밀하게 접근하려는 시도일지도 모르겠네요. 최근에는 도시리서치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동남권 지역에 집중된 베이비붐 세대의 숙련노동자 중산층 모델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2015년 자료를 보니까, 현대중공업의 정규직 약 만오천명 중에 오십대 이상이 차지하는 비중이 50퍼센트 이상이라더군요. 제가 느끼기에 80년대 말 노동자대투쟁의 주역이면서 중산층으로 진입할 수 있었던 오십대 중후반의 노동자 계층은 학생운동을 했던 86세대 대졸 엘리트들과 ‘형제애’라고 부를 수 있는 유사가족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서로에 대한 객관적 평가가 힘든 것도 이런 정서적 문제가 개입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아무튼 저는 제 작업이 중산층 문화의 역사적 형성 과정을 지역적·계층적 관점에서 새롭게 규명하는 데 도움을 주리라고 생각합니다. 중산층에 주목했던 건 실제로 디자인이라는 전문 분야의 등장 자체가 역사적으로는 중산층과 직결되어 있기도 하고, 중산층의 삶에 대한 동경이 한국 역사에서 굵직한 사회변화의 동력으로 작용했다고 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런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에서 현재의 문제적 세대, 즉 고도성장의 수혜를 받지 못한 가정에서 자라 중산층의 소비문화로부터 배제된 특정 계층의 청년세대에도 관심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김애란 작가의 단편 「하루의 축」(『비행운』, 문학과지성사 2012)에 나오는 공항 청소노동자의 자녀세대쯤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현재는 이들에게 직접 말을 건네는 건 고사하고 ‘재현’조차 제대로 해주는 매체가 없는 상황인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어디 사십니까,라는 언뜻 단순해 보이는 질문에 대한 답이 거처의 형태와 소재 이상으로 많은 정보를 갖게 된 시대, 그럼에도 거기에 담긴 사회정치적 함의에 대해서는 은근히 말을 삼가는 시대에, 삶의 공간이 우리 자신에게 불가피하게 남기는 자국들을 받아들이고 살피는 일은 엄밀한 자기인식에 필수적인 과제일 것이다.

이 또한 다분히 ‘스탠더드’한 선입견의 발로일지 모르지만 과학고-카이스트라는 진학경로를 생각할 때 박해천이 이런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사정이 특별히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돌이켜보면 제가 다녔던 고등학교가 매우 독특했던 것 같습니다. 진보 성향의 선생님들이 많이 계셔서 사회과학서적들을 쉽게 접할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87·88년 시점의 광주라는 도시 자체에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지요. 친구들과 집회가 열리는 도청 주변을 서성이다가 근처 서점에 들러 서가에 꽂힌 ‘창비신서’의 제목을 죽 훑어보곤 했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를 떠올릴 때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는 장면은 87년 대선 패배 직후 광주 도심의 스산한 풍경입니다. 그 폐허 같은 황량함은 쉬이 잊히지가 않습니다. 카이스트도 공대라는 특수성, 서울에 있는 대학들과의 시차 때문에 약간 독특한 면이 있었습니다. 한손에는 정성일씨가 편집장으로 있던 영화잡지 『키노』, 다른 손에는 리영희 선생님의 『전환시대의 논리』(창작과비평사 1974), 이런 식의 ‘리버럴한’(?) 조합이 가능했거든요.

 

창비가 언급된 틈을 타서 이 인터뷰의 실질적 기획의도라고 할 질문을 던졌다. 『창작과비평』을 얼마나, 또 어떻게, 혹은 언제까지 읽으셨는지?

 

안 그래도 지난 인터뷰들에서 거의 ‘창비와 나’ 식의 이야기를 하는 걸 보고 곰곰이 저 자신을 돌아봤죠. 몇몇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80년대 후반 『창비』 영인본 판매사원 아저씨가 캠퍼스에 유령처럼 출몰하던 장면이나, 90년대 초반 사회주의권 붕괴의 여파로 일군의 민중문학론자들이 창비의 문학 담론에 한수 접고 ‘전향’을 선언하던 장면, 그리고 소설 『동의보감』과 『나의 문화유산답사기』가 베스트셀러가 되고 공지영 소설과 최영미 시집 광고가 신문지면에 게재되던 장면 등등. 바로 그즈음에 저는 창비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좀더 동세대적인 문화, 특히 대중문화를 다루는 잡지 쪽으로 옮겨갔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2000년대 중반 이후에는 인터넷 데이터베이스를 통해 선별적으로 찾아보게 되었고요. 그래도 책장을 뒤져보니 중요한 쟁점이 특집으로 다루어질 때마다 구입해서 읽었더군요. 일년에 한호 정도? 데이비드 하비(David Harvey)의 논문(「실현의 위기와 일상생활의 변모」)이 실린 지난 가을호도 구입해서 봤는데, 막상 도시문제보다는 거대담론 쪽에 치중되어서 약간 실망스러웠습니다. 반면 해당 특집의 보론격인 김종엽 교수의 글(「지구적 자본주의에 도전하는 교육개혁의 길」)은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역시 ‘이기고 들어간다’는 건 혼자만의 착각일 뿐이었는지 이야기는 창비에 대한 쓴소리로 이어졌다.

 

하비 글과 특별대담(데이비드 하비·백낙청 「자본은 어떻게 작동하며 세계와 중국은 어디로 가는가」)을 읽으면서 느낀 것이기도 하지만, 창비에는 ‘담론적 팽창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경향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근본적 갱신이나 대전환 같은 주제를 이야기할 때조차 기존의 스펙트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인상을 받곤 합니다. 저는 여기에 독특한 정신주의적 태도, 그러니까 전근대의 선비 모델과 근대의 지식인 모델이 결합된 ‘지사(志士)’적 태도가 잠재해 있지 않나 의심하는 편입니다. 그런데 과연 지금의 한국사회를 조망하는 데 그런 관점이 도움이 될까요? 제 짐작으로 『창비』 주독자층도 ‘지식인 모델’의 영향권 아래 성장한 오십대 이상일 것 같습니다. 최대한 아래로 내려오더라도 저 같은 70년대 초반생 정도? 제 또래를 기점으로 아래 세대의 독자층은 ‘지식인 모델’과는 무관하게 각각 전문적인 관심분야로 분화해나갔으니까요.

 

거대담론에 시선을 보내느라 놓쳐버린 것은 없는가 하는 지적은 늘 두고 새겨야 할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현실의 세부까지 가닿지 않는 담론을 경계하자는 건 창비의 오랜 다짐이기도 하다. 다른 한편 ‘대전환’이라는 키워드가 나타내듯 한국사회의 전면적이고 근본적인 변화라는 거대서사의 차원은, 성공적인 수행 여부와는 별개로 창비가 중점을 두고 탐구하려는 영역이다. 전문분야나 관심영역의 분화는 어느정도 불가피하고 또 바람직하기도 하지만, 하비도 지적했다시피 ‘어떻게’만 묻고 ‘왜’를 묻지 않는 이 시대에 거대담론이야말로 재조명해야 할 주변화된 담론이 아닐까. 그 점에 관해 어떤 공감을 얻지는 못한 듯하지만, 창비뿐 아니라 문화적·학술적 제도의 안팎이 다 놓치고 있는 잠재적 독자에 대한 고민만큼은 공유할 수 있었다.

 

 스마트폰 세대, 특히 남성 청년들의 독서체험 부족이라는 문제는 사실 창비만의 것이 아니고 현재 한국 대학이 직면한 문제기도 해요. 특히 문화자본이 빈약한 소득분위 하위계층의 청년 집단을 고려한 새로운 형태의 인문학 교육을 모색해야 하는 시점이 아닌가 싶습니다.

 

‘독자와 함께 더 나은 세상을’이라는 창비 50주년의 다짐에 충실하기 위해선 박해천 선생이 말한 이 ‘새로운 인문학 교육’의 구상이 절실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공동의 관심사를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된 인터뷰였다. 오랜 시간 함께 이야기 나눠주신 박해천 선생께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