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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기획 | 표절 문제와 문학권력

 

문학의 법정과 비판의 윤리

신경숙을 위한 변론

 

 

윤지관 尹志寬

문학평론가. 저서로 『민족현실과 문학비평』 『놋쇠하늘 아래서』 『세계문학을 향하여』 등이 있음. jkyoon@duksung.ac.kr

 

* 이 글은 필자가 7월 23일 한국작가회의 홈페이지(http://www.hanjak.or.kr) 게시판에 여론재판으로 표절작가라는 부당한 낙인이 찍힌 작가 신경숙에 대한 변호의 뜻을 회원들에게 알리고, 이후 8월 3일까지 아홉차례에 걸쳐 올린 ‘변론’을 모은 것이다. ‘변론’은 주제별로 시일을 두고 올렸으며, 의미있는 반론이나 질문이 있으면 다음 ‘변론’에 반영하겠다고 한 바 있다. 그러나 연재하는 동안 별다른 반론 없이 글이 마무리되었기에, 군데군데 교정 차원의 손질 외에는 그대로 싣는다.

 

 

1. 변론을 시작하며

 

한겨레 문학전문기자 최재봉(崔在鳳)씨의 표현 그대로 한 동세대 작가가 신경숙(申京淑)을 표절혐의로 ‘고발’한 이후 그야말로 “폭풍 같은 한달”이 지났다. 최기자는 한겨레 716일자 기사 「표절과 문학권력을 넘어서」에서 이 사태를 정리하는 가운데 “신경숙의 표절 사실 자체에 대해서는 대체로 공감대가 이루어”졌고, 이제 “표절을 방지하고 찾아내며 처벌하기 위한 방안 마련”에서부터 ‘문학권력’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과제로 남았다고 썼다. 어느정도는 객관적으로 보이는 면도 있고, 언론이라면 여론을 반영하는 것이 일차적인 책무이기도 하겠다.

그러나 이런 식의 정리가 크게 빠뜨리고 있는 것이 있다. 이 폭풍이 여론재판이라는 ‘광풍’의 성격을 띠었고 여기에 언론이 엄청난 기여를 했다는 사실이다. 이응준(李應準)씨의 고발이 있자마자 언론들의 선정적인 보도가 시작되고, 진작부터 문학을 권력투쟁의 장으로 보던 평단 일각의 비난공세가 언론과 인터넷을 통해 확산되면서 순식간에 신경숙은 ‘상습적인’ 표절작가로 전락하고 주요 문학출판사들은 ‘돈만 밝히는’ 부도덕한 권력집단으로 매도되었다. 거의 마녀사냥에 흡사한 국면이 펼쳐져서 다른 의견을 내놓는 것이 두려울 정도로 갖은 험담과 욕설이 난무하고 언론들은 이 흐름에 편승하여 논란을 부추기고 다른 목소리는 아예 차단하기도 했다.

문학에 대한 평가는 이런 식의 여론재판으로 결판날 일이 결코 아니다. 문학에서의 표절 문제도 창작행위를 이해하는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문학담론 차원에서 논의될 일이지 ‘묻지마 식’ 여론상의 다수결로 결정하고 단죄해버릴 일이 아니다. 다산포럼(http://www.edasan.org, 714일자)에서 내가 「문학에서 표절이란 무엇인가: 신경숙 사태를 보는 한 시각」을 쓴 것은 작가에 대한 일방적인 단죄가 도를 넘었고 이것이 비단 당사자만이 아니라 문학의 남아 있는 영역조차 근본에서부터 허물고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문학의 문제가 문학 나름의 논리에 따라서 정리될 기회도 없이 여론재판부터 시작되고 법적 대응이 운위되는 것 자체가 한 작가의 표절 혐의와는 비교가 안되는 문학에 대한 최악의 추문이다.

이 광풍을 거치는 동안에 신경숙은 혐의에 비해 그야말로 과도한 징벌을 받았고 그와 함께 우리 사회에서 문학의 위상도 그나마 가지고 있던 품격을 내던지고 여론이란 것의 먹잇감이 되는 치욕을 견뎌야 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원래 언론은 선정성을 한 특성으로 한다. 세계적인 명성까지 획득한 한국의 대표작가가 부도덕한 표절행위를 한 것이 발각되었고 그것이 내부고발에 의해서라니 언론이 그렇게 흥분한 것도 이해가 간다. 그러나 한편 언론은 다른 의견에 대해서도 귀를 열고 현상을 보는 여러 시각들을 소개하면서 공정을 기하기도 해야 한다. 그러나 이번 사태에서 거의 모든 언론이 이 책임을 방기하였다.

물론 폭풍이든 광풍이든 잦아지는 순간이 오고, 아무리 할 말이 있더라도 “소나기는 피하고 봐야 한다”는 속담도 있다시피 침묵을 지키는 것이 상책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최기자의 말대로 표절방지 대책을 세우고 문학권력을 해체하고 하는 것이 평단의 책무일 수도 있지만, 그 근거 자체가 과도한 여론재판의 결과라면 우선 사실여부부터 점검하는 것이 순서다. 신경숙이 과연 표절작가라고 단정되어도 좋은 것인지? 그것도 상습적인 표절을 해왔다고 단죄되어도 좋은 것인지? 달리 보는 시각도 엄연히 있는데 최기자뿐 아니라 누구라도 이런 판정을 당연시하면서 문단의 책무 운운한다면 그것은 부당한 일방적 정리일 뿐이다. 그러니 한번 짚어보자는 것이다. 사실을 확인하고 되짚어보는 것, 그것이 이 광풍이 휩쓸고 간 초토(焦土)를 정리하는 첫걸음이 되겠기 때문이다. 내가 신경숙을 위한 변론에 솔선 나서기로 한 것은, 한 여론재판 피해자의 억울함을 풀어야겠다는 뜻도 있지만, 만신창이가 된 한국문학을 추스르는 최소한의 기반을 확보하고자 하는 비평가로서의 책임의식도 작용하였다. 변론을 의뢰한 적도 없는 작가에게는 양해를 부탁드린다.

문학을 두고 하는 논의와 평가, 즉 문학의 법정은 현실의 법정과는 다르고 대중의 여론과도 무관하다. 또 판정을 위한 시간 또한 장기간을 요구한다. 당대에 비난받고 폄하되던 작가나 작품이 후세에 높이 평가되는 사례는 문학에서 비일비재하다. 문학을 평가하는 기준은 사람마다 시대마다 차이가 있기 때문에 그 판정은 긴 대화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문학의 법정에서 하는 변론도 그런 대화의 시작이고 궁극적인 판정을 위한 한 입장의 표명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과연 얼마나 승산이 있는 변론일지 전망이 그리 밝지는 않아 보인다. 무엇보다 최기자도 정리한 것처럼 이미 일심판결이 압도적으로 나 있는 상황이고, 그 근거도 없지 않다. 우선 누가 보아도 분명해 보이는 증거를 제시한 최초고발자가 있고, 그것을 확증해주는 목청 큰 논자들이 즐비하며, 소위 누리꾼이라는 이름의 대중이 시퍼런 눈을 뜨고 이들의 뒤에 버티고 있다. 급기야 문단의 거목이라고 할 『태백산맥』의 저자 조정래(趙廷來)씨까지 나서서 표절사실을 당연시하면서 아예 절필하라고 일갈했다. 이 막강한 고발자들의 위세 앞에서 누가 감히 승산을 말하겠는가? 아마도 내가 이 일을 맡겠다고 누구에게 의논이라도 했다면 친구들은 손을 홰홰 저으면서 말릴 법하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라고.

그렇지만 위안도 없지 않고 나름대로 운산도 없지 않다. 설혹 대세에서 밀린다 하더라도 무엇보다 평론가로서 소신을 지켜나간 데서 오는 충족감이 그 선물일 것이다. 승산이 아주 없지도 않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 사태 이후 작가의 표절 혐의 부분들을 모두 검토해보았지만 「전설」에 대한 이응준의 고발을 근거로 신경숙을 표절작가로 몰기에는 무리가 많고, 또 상습범의 증거로 내세우는 다른 작품들의 표절 의혹도 근거가 부실하거나 최소한 논의의 여지가 있음을 확인하였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 유리하게 여겨지는 것은, 여론재판에 참여한 거의 절대다수의 대중은 고발대상인 작가의 「전설」을 읽지도 않았을 것으로 짐작되고 더구나 미시마의 「우국」을 읽은 사람은 더 드물 것이 분명하다는 점이다. 문제를 제기한 평론가들이나 조정래씨야 설마 그렇지 않겠지만, 그동안 표절 의혹이 제기되었던 다른 작품들의 경우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한다.

서울 안 가본 사람이 서울에 대해 더 잘 안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 다음에야, 그렇게 남의 말만 듣고 단죄에 가담하다보면 군중심리에 휩쓸리기 십상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두고두고 께름칙한 일이 될 것이다. 따라서 여론상 불리한 상황에 있는 변호사로서 나는 충분한 자료를 접하지 못하는 일반 대중이 판단의 근거로 삼을 수 있을 만한 자료를 최대한 제공하려고 한다. 문학의 법정은 설혹 여론이 바뀐다고 해서 승소했다 할 수 없겠지만, 일단 이들이 공정한 판단을 할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하는 것이 나의 임무 가운데 하나일 법하다. 만약 단죄부터 하던 대중이 “아, 이 문제가 그렇게 단순하게 볼 일이 아니고 여러가지 따져볼 일이네”라고 느끼기만 해도 나의 변론은 소기의 성과를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 그럼 이응준의 고발장 검토에서부터 시작해보겠다.

 

 

2. 이응준의 고발장에 대한 검토

 

신경숙과 동세대 작가인 이응준은 인터넷매체인 『허핑턴포스트코리아』 616일자에 「우상의 어둠, 문학의 타락: 신경숙의 미시마 유키오 표절」이라는 글을 기고한다. 이 글에서 그는 20년 전 발표된 신경숙의 단편소설 「전설」의 일부 문장이 미시마 유끼오(三島由紀夫)의 「우국」의 표절임을 폭로하면서 그런 행위를 “문학적 야만”이라고 극렬하게 비난하고 이 표절 사실에 대해 한국문단은 “‘뻔뻔한 시치미’와 ‘작당하는 은폐’”를 자행하여 결국 “한국문학의 참담한 타락을 가져”왔다고 질타한다. 그리고 한국문학을 대표해온 작가의 표절 폭로와 썩어빠진 한국문단에 대한 이 비난은 한 용기있는 문인의 내부고발로 칭송되면서 곧바로 언론과 인터넷을 통해 급속도로 퍼져나가 불과 일주일 만에 작가는 상습적인 표절작가로 단죄되고, 상업주의에 물들어 타락한 한국문단을 뒤엎고 개편해야 한다는 목소리들이 줄을 잇는다. 고발자의 의도는 아마도 100% 이상 충족되었고 이 고발을 ‘법적 검토’까지 거쳐서 게재한 『허핑턴포스트코리아』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응준의 고발이 저절로 정당성을 획득하는 것은 아니다. 성공한 탓에 그 고발의 문제점은 더 악화되었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그의 글은 고발대상인 작가를 문학 내부의 논의가 아니라 외부, 바로 여론재판에 회부할 목적으로 씌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글을 읽으면 신경숙을 도덕적 타락자로 매도하여 비난여론을 불러일으키려는 의도가 너무나 역력하다. 글이야 어떻게 쓰든 쓰는 이의 자유겠지만 표절이라는 민감한 문제를 문학적 논의의 차원을 건너뛴 채 여론재판으로 몰아가는 것이 과연 문인으로서 올바른 행동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왜 이 글이 여론을 겨냥한 선동인지 짚어보겠다.

이응준은 서두에서 거두절미하고 신경숙의 표절 혐의가 가장 확실해 보이는 문단을 제시한다. “두 사람 다 실로 건강한 젊은 육체의 소유자였던 탓으로 그들의 밤은 격렬했다”로 시작하는 「우국」의 문단을 “두 사람 다 건강한 육체의 주인들이었다. 그들의 밤은 격렬하였다”로 시작하는 「전설」의 문단과 병치시킨 것이다. 그리고 바로 다음과 같이 글을 시작한다.

 

자, 이제 눈을 감고, 내가 말하는 장면을 각자의 머릿속에 그려보자. 대한민국 최고의 유명, 유력 소설가 신경숙은 문단의 까마득한 선배인 김후란 시인이 번역한 일본의 대표작가 미시마 유키오의 (…) 단편소설 「우국」의 한 부분을 가만히 펼쳤다. 이어 신경숙은 자신이 청탁을 받아 쓰고 있는 중인 단편소설 「전설」의 원고에 「우국」의 그 한 부분을 거의 그대로 옮겨 타이핑한다. 이 원고는 1994년 계간 『문학과사회』 겨울호에 실린 뒤 1996년 창작과비평사에서 출간된 소설집 『오래된 집을 떠날 때』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곧이어 그는 “미시마 유키오의 「우국」에 대한 표절로 저렇게 적발되고 있는 신경숙의 「전설」의 일부분”이 “순수문학 프로작가로서는 도저히 용인될 수 없는 명백한 작품 절도행위”라고 고발한다. 혐의 제기도 좋고 거기에 대한 공분도 좋다. 그러나 그는 마치 자기가 그 절도현장을 목격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 장면을 그려내면서 독자들에게 눈을 감고 상상해보라고 한다. 여론재판을 염두에 두지 않고서는 쓸 수 없는 방식의 글쓰기다. 이처럼 치밀하게 계산된 효과를 노리고 작성된 고발장은 작문훈련이 된 문인이기에 가능한 것인데, 이러니 별 경력조차 없는 나 같은 변호인에게는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겠다.

신경숙의 작품에 대한 표절 논란은 과거에도 몇차례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매번 한때의 논란으로 그친 것은 그것들이 대개 1)표절이라고 단정 지을 만한 근거가 부족하거나 최소한 이견의 여지가 있고 2)신경숙의 작품활동이 그런 의혹을 넘어설 정도로 문단이나 독자의 인정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이번 고발장은 무엇이 다른가? 새로운 의혹은 없이 15년 전에 나왔던 것 가운데 가장 ‘확실하다’고 여겨지는 한 가지 사례에 초점을 맞추었고 그것이 최대한의 고발효과를 발휘할 수 있도록 수사학을 동원한 것이며 그 수사학이 겨냥하는 곳은 이 의혹에 대해서 이미 알 만큼 아는 문학인이 아니라 일반 대중이다. 그리고 이 한가지 확고한 증거를 근거로 삼아 「딸기밭」 「작별 인사」 『기차는 7시에 떠나네』 등 기왕에 논란이 되었던 작품들도 ‘상습적인’ 표절의 흔적과 증거들이라고 단정 짓고, 나아가서 더 조사해보면 더 많은 표절이 나올 것이라고 예단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실로 작가를 송두리째 망가뜨리겠다고 작정한 사람이 아니라면 할 수 없는 그야말로 ‘독한’ 고발이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보자. 제시된 「전설」의 일부 구절의 표절 혐의와 그 이후에 다른 작품들에 제기된 의혹은 그 정도에서 큰 차이가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이어질 변론에서 하나하나 짚어볼 것이다.) 「전설」이 확고한 증거로 보인다고 해서 다른 작품들도 자동적으로 그만한 표절 혐의를 가지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응준은 득의만만하게 외치는 듯 보인다. “봐라, 이렇게 도적질하는 현장까지 보여주었는데, 이거 하나만 봐도 다른 사례들은 말할 것도 없지 않느냐, 나아가서 이 작가의 모든 작품들이 이런 도적질의 결과물이다”라고. 이것은 추단에 의한 선동이지 입증이 아니다.

핵심은 역시 그가 제시한 유일한 증거, 즉 「우국」에서 훔친 것으로 제시된 「전설」의 일부 문장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이다. 사태가 터진 후 두 작품을 비교해서 읽어본 결과 나는 「전설」의 그 문단이 「우국」이 없었으면 그런 표현으로 나오지 않았을 것이라는 데 동의한다. 작가의 기억에서는 지워졌을지 모르지만 과거 어떤 식으로든 작가는 「우국」을 접한 적이 있었고 그것이 이 작품을 쓰는 데 영향을 미친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작가의 기억 여부와 무관하게 일부 문장의 이런 유사성만으로 그 작품이 곧장 표절작이 되는 것은 아니다. 창작행위에서 독서를 통한 영향은 어떤 작가에게나 있기 마련이고, 자신의 작품에서 다른 작가의 작품 내용이나 표현들을 빌려오고 활용하는 일은 다반사로 일어나며 문학에서 차용은 폭넓게 인정된다. 문제는 그 차용이 표절이냐 아니냐를 판정하는 기준이 일반에서 생각하듯이 그렇게 분명하지 않다는 데 있다. 문학에서 차용은 어설픈 베끼기에서부터 창조적 변용까지 걸쳐 있기 때문에, 그 차용의 수준에 따라서 그리고 새로운 작품의 완성도와 성취에 따라서 판단은 달라진다. 일부 단어나 문장의 유사성만을 따져서 표절여부를 판정하는 것은 좁은 시각으로, 문학의 자유로운 표현영역을 제한하고 언어의 학습과 그 문학적 활용의 복잡한 관계를 무시하는 결과를 빚는다.

한가지 비유를 들어보겠다. 언어로 이루어진 작품의 숲이 있다고 하자. 이 언어의 숲은 그 나름대로 품격과 특성을 가지고 울창하게 우거져 있고, 그 숲을 조성한 사람의 취향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하자. 그런데 어떤 사람이 어느날 그 숲을 조사해보겠다고 들어가서 그 울창한 숲 속에서 다른 숲에서 본 나무와 흡사한 나무 몇그루를 찾아내고서 사진으로 찍어 그 숲에 가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그 숲이 다 가짜라는 증거로 제시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사람들은 그 사진만 보면 당연히 그렇게 믿을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빠진 것이 있다. 그 울창한 숲 전체의 풍경도 빠져 있고 그 수상한 나무 몇그루가 주변 다른 나무들과 어떻게 어울리며 자리잡고 있는지도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고발자는 그 모든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고 수상한 나무 하나면 족하지 뭘 더 보느냐고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사진을 보고 분개하면서 그 숲 전부가 그 수상한 나무의 원래 숲을 그대로 베낀 가짜고, 나아가서 그 숲을 조성한 사람의 다른 숲들도 다 가짜라고 단정 짓고, 이제 그런 자는 숲을 더이상 만들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떠들어댄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나무만 보고 숲은 못 본다”는 오래된 경계(警戒)의 한 사례로, 신경숙의 「전설」이 마치 아름답고 풍성한 숲처럼 그 나름의 뛰어난 문학적 성취를 이룩한 작품이고 「우국」과는 모든 면에서 상반되는 특성을 가진 작품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도외시한다. 다음 변론에서 왜 「전설」이 「우국」과는 전혀 다른 작품이며, 「우국」의 구성이나 표현들이 「전설」에서 어떻게 차용되어 전체적인 작품의 성취에 기여하는지를 밝히겠다.

 

 

3. 「전설」과 「우국」의 비교 분석

 

이응준이 고발대상으로 삼은 신경숙의 「전설」의 일부 문장들이 미시마 유끼오의 「우국」을 표절한 혐의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우국」을 모른다던 작가도 그 일주일 후에 두 작품을 거듭 읽어본 결과 “표절이란 문제제기를 하는 것이 맞겠다”고 인정하고 “아무리 지난 기억을 뒤져봐도 「우국」을 읽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이제는 나도 내 기억을 믿을 수 없는 상황”이라고 토로하였다(경향신문 2015.6.23). 이 토로가 진실인지 거짓인지 여기서 따지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우선 진위여부를 확인할 방도가 없기도 하거니와, 중요한 것은 기억하든 못하든 「전설」에는 「우국」이 아니면 설명하기 어려운 단어나 문장의 유사성이 존재하는 것은 누구의 눈에도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사한 문장이나 단어가 들어 있고 구성이 흡사하다고 해서 바로 그것을 표절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문학에서 남의 작품의 구절이나 구상을 ‘차용’하는 것은 일반화되어 있고 어떤 점에서 차용은 문학창작의 가장 보편적인 방법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가령 셰익스피어는 몽떼뉴를 차용하고 밀턴은 창세기를 차용하며 토마스 만은 괴테를 차용하고 T. S. 엘리엇은 보들레르를 차용한다. 그럼에도 이들이 표절작가가 아니라 위대한 작가로 불리는 것은 그 차용을 창조적으로 활용하여 독자적인 세계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즉 차용이 문제가 아니라 그 차용을 통해서 작가가 어떤 수준의 변용을 해냈는가가 초점이며, 엘리엇이 “좋은 시인은 훔친 것을 원래와는 판이한 자기만의 전체적인 감정 속에 녹여내지만 나쁜 시인은 버성기게 엮어놓는다”고 한 것도 이를 설명한 것이다. 다같이 훔쳐도 나쁜 시인은 표절의 혐의를 얻지만, 좋은 시인은 오히려 칭송받는다.

그렇다면 신경숙은 미시마를 어떻게 차용하고 있는가? 이응준의 고발문은 둘의 유사성을 지적하는 것만으로 표절시비는 끝났다는 식인데, 그것은 이 논의에서 가장 중요한 차용의 수준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기계적인 단순논리에 불과하다. 오히려 15년 전에 이 작품의 표절의혹을 제기한 정문순의 평론(「통념의 내면화, 자기위안의 글쓰기」, 2000)이 그 점에서는 훨씬 윗길이다. 정문순은 신경숙의 작품에는 다른 작가의 작품의 모티브와 이미지가 “자기 소설에서 육화되지 못하고 어설픈 흉내에 그치”고 있기 때문에 표절로 떨어지고 만다고 비판한다. 적어도 정문순은 차용이 제대로 작품 속에 결합되지 못한 결과가 표절로 나타나고 있음을 지적한 점에서 이응준과는 달리 문학논의의 기본을 지킨다.

그러나 정작 「전설」을 「우국」의 표절작으로 보는 정문순의 논거는 허술하고 문제가 많다. 우선 정문순은 두 작품이 “남편들이 국가를 위해 목숨을 버릴 때 남은 아내들의 선택에 초점이 맞추어지는 점에서 주요 모티브부터 유사하다”고 지적하고, 이어서 “「우국」의 아내는 남편 따라 죽는 데 일호의 주저도 없으며, 「전설」의 여자는 남편의 실종통보를 받고도 평생을 기다림과 그리움으로 보낸다”라고 설명한다. 글쎄, 도대체 그것이 어떻게 같다는 말인지? 또 표절의 증거로 “10여개의 비슷하거나 거의 동일한 문구는 물론이고 남편의 죽음이나 참전을 담담하게 수용하는 아내의 태도, 역순적 사건구성, 서두에 역사적 배경을 언급한 전개방식 등의 유사성”을 내세운다. 유사한 문구에 대해서는 그것이 단순한 베끼기인지 창조적 활용인지 곧 짚어볼 예정이지만, 일단 역순적 사건구성이나 전개방식의 유사성 운운은 전혀 사실과 다르다(여기에 대해서는 623일 열린 ‘최근의 표절 사태와 한국 문학권력의 현재’ 토론회에서 평론가 정은경씨가 상세히 지적하고 있어 생략하겠다*). 또 “남편의 죽음이나 참전을 담담하게 수용하는 아내의 태도”도 사실과 다르다. 「우국」의 여자는 그렇다 쳐도 「전설」의 여자는 참전하겠다는 남편에게 꽃항아리를 던지면서 항의한다.1)

표절 혐의를 지적하는 글들이 하나같이 유사성을 실제보다 과장하는 것은 「전설」이 「우국」의 표절작임을 입증하고자 하는 의도에서일 터이다. 그러나 이 두 작품만큼 그 내용이나 사고나 감수성이나 문체 등 문학의 중심요소들이 그야말로 정반대인 작품도 찾기 힘들 것이다. 그만큼 이 두 작품은 표절관계이기는커녕 전혀 다른 작품이다. 두 작품을 비교하여 읽지 못한 독자들을 위해서 두 작품의 특징 두가지만 정리해보자.

 

1) 「우국」은 일본 군국주의 시절 국가주의의 대의를 신봉하며 살아가던 젊은 부부가 그 대의에 따라 할복자살 및 자결하는 이야기다. 작품의 대부분의 내용도 바로 이 사건에 맞추어져서 작가는 상세하게 두 사람의 죽음의 날의 광경들을, 이를테면 할복으로 “창자가 튀어나오는” 장면까지 생생하게 그리는 데 집중한다. 그 사실성에 이 작품의 힘이 있다.

「전설」은 아기 시절의 인연에서부터 같이 자라 혼인에 이른 남녀가 전쟁을 맞아서 남편이 참전하여 실종되자 여자가 그를 하염없이 기다린다는 이야기다. 작품은 긴 기간을 포괄하고 있고 여자의 기다림을 마치 전설과 같은 분위기 속에서 시적인 문체로 그려낸다. 그 시적인 이야기투에 이 작품의 힘이 있다.

 

2) 「우국」의 남녀관계는 남자가 주도하며 여자에게 대의를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을 교육시키고 여자도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그 순종에서 쾌감을 느낀다. 남편이 할복할 것을 선언하자 기꺼이 따라죽겠다고 하고, 실제로 남편이 할복하는 장면을 지켜보고 나서 자신도 칼로 목을 찔러 자결하는 것이 이 작품의 결말이다. 한마디로 격렬한, 동물적인 소설이다.

「전설」의 남녀관계는 오누이처럼 서로를 아끼는 평등한 관계이고 여자는 남편의 뜻을 이해하고자 노력하지만 승복하지는 않고 홀로 전쟁의 참상을 견디면서, 인간관계를 파괴하는 전쟁과 남성적인 것의 폭력성에 항의하고 모성의 가치를 체현하면서 결국 할머니가 되도록 자기만의 삶을 살아간다. 한마디로 잔잔한, 식물적인 소설이다.

 

지면만 허용하면 두 작품의 문체 또한 얼마나 현격하게 다른지 실감할 수 있을 문장을 몇개 보여줄 수 있지만 참기로 하겠다. 아무리 두 작품이 생판 다르다고 해도 문장 일부를 그대로 가져다 썼으면 표절은 표절 아니냐는 항변이 들려오기 때문이다. 이제 이 난제를 한번 풀어보자.

「전설」에서 「우국」을 베낀 것으로 구체적으로 지적된 곳은 1) 이응준이 제시한 문단 2) JTBC가 논문표절 감별프로그램이란 것을 동원해서 찾아냈다고 하는 부분, 이 두가지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 문장들이 과연 창조적인 활용에 해당하는지 단순한 표절인지 가려내는 것이 초점이다. 즉 작가가 이 문장들을 통해 차용한 것들을 엘리엇이 말한 대로 “자기만의 전체적인 감정 속에 녹여”내었는가 여부를 판별해내는 일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대목에서 작가는 의식했든 아니든 미시마를 차용하여 그것을 자신의 맥락 속에 기가 막히게 결합시켰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며, 내가 「문학에서 표절이란 무엇인가」에서 신경숙이 「전설」을 통해 엘리엇이 말하는 ‘좋은 시인’임을 보여주었다고 한 것도 이 때문이다. 하나하나 살펴보겠다.

우선 첫째 사례부터 보자.

 

두 사람 다 실로 건강한 젊은 육체의 소유자였던 탓으로 그들의 밤은 격렬했다. 밤뿐 아니라 훈련을 마치고 흙먼지투성이의 군복을 벗는 동안마저 안타까워하면서 집에 오자마자 아내를 그 자리에 쓰러뜨리는 일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레이코도 잘 응했다. 첫날밤을 지낸 지 한달이 넘었을까 말까 할 때 벌써 레이코는 기쁨을 아는 몸이 되었고, 중위도 그런 레이코의 변화를 기뻐하였다. (「우국」)

 

두 사람 다 건강한 육체의 주인들이었다. 그들의 밤은 격렬하였다. 남자는 바깥에서 돌아와 흙먼지 묻은 얼굴을 씻다가도 뭔가를 안타까워하며 서둘러 여자를 쓰러뜨리는 일이 매번이었다. 첫날밤을 가진 뒤 두달 남짓, 여자는 벌써 기쁨을 아는 몸이 되어 있었다. 여자의 청일한 아름다움 속으로 관능은 향기롭고 풍요롭게 배어들었다. 그 무르익음은 노래를 부르는 여자의 목소리 속으로도 기름지게 스며들어 이젠 여자가 노래를 부르는 게 아니라 노래가 여자에게 빨려오는 듯했다. 여자의 변화를 가장 기뻐한 건 물론 남자였다. (「전설」)

 

이 두 문단의 유사성의 정도는 누가 보아도 표절의 혐의를 받기에 충분하다. 고발자인 이응준이 확실한 증거로 유일하게 제시한 곳도 바로 이 대목이다. 둘 사이의 차이라면 「전설」에서 다음 두 문장, “여자의 청일한 아름다움 속으로 관능은 향기롭고 풍요롭게 배어들었다. 그 무르익음은 노래를 부르는 여자의 목소리 속으로도 기름지게 스며들어 이젠 여자가 노래를 부르는 게 아니라 노래가 여자에게 빨려오는 듯했다.”가 추가된 점이다.

둘의 유사성은 부정할 수 없되 나의 관심은 과연 「전설」의 이 대목이 정문순이 지적하는 것처럼 “육화되지 못한 어설픈 흉내”인지 엘리엇의 표현대로 “자기만의 전체적인 감정 속에 녹여낸 것”인지의 여부다. 사실 미시마의 소설에서 이 대목은 작품 전체에서 큰 의미를 차지하지 않고 두 사람의 신혼생활에서 성적으로 눈뜨는 경험을 그린 정도다. 그러나 신경숙의 작품에서 이 대목은 작품 전체에서 남다른 의미를 부여받는다. 미시마의 경우에는 그 뒤에도 더욱 격렬한 성애의 장면이 상세히 묘사되지만, 신경숙에게는 이 부분이 두 사람 사이의 육체적 결합의 의미를 보여주는 거의 유일한 곳이다. 신혼생활에서 경험한 이 일체감의 행복이 있기에 여자는 남자와의 이별 속에서도, 그리고 남자의 실종을 확인한 이후에도, 그의 부재를 견디고 그 지복의 순간을 그리워하며 꿋꿋이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여자가 나중에 “나는 행복한 순간을 가져보았지요. 앞으로 일어날 어떤 일과도 바꿀 수 없는 순간요. 그 순간들은 더이상 내 인생에 아무런 일이 생기지 않는다고 해도 나를 선량하게 살아가게 할 거예요. 그 순간들이 앞으로의 내 생애를 지켜줄 거예요”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경험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작가가 추가한 부분은 작품 전체를 지탱하는 정서에 곧바로 부합하는 뛰어난 변용이라고 본다.

다음으로 JTBC에서 보도한 둘째 사례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두 사람의 가슴에 기쁨이 넘쳐나는 바람에 서로 마주보는 얼굴에는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레이코는 결혼 첫날밤이 다시 찾아온 기분이었다. (「우국」)

 

어느 순간, 두 사람의 내부에 너무도 자연스럽게 기쁨이 넘쳐나는 바람에 두 사람의 얼굴엔 저절로 미소가 떠오른다. 그 미소 속에서 남아야 하거나 떠나야 하는 생각도 지워지고 어렴풋한 두려움도 지워지고 끝없는 벌판이나 깊은 계곡에 폭폭 쌓이고 있는 백설의 시원스러움이 자유롭게 펼쳐졌다. (「전설」)

 

두 예시에서 첫 문장의 유사성은 분명해 보인다. 굳이 부분적인 표절이 아니냐 하면 명백하게 부정하기도 어려울 법하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도 이 문장이 「우국」과는 전혀 다른 감정 속에 결합되어 있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국」에서 이 대목은 남편이 할복자살을 선언하자 여자가 바로 뒤를 따르겠다고 하는 말에 남자가 그것이 교육의 성과라고 여기며 자부심을 느끼는 장면에서 나오는 말이어서 그만큼 비중이나 의미가 작다. 그러나 「전설」에서 이 문장은 작별하던 전날 밤 두 남녀가 마지막 사랑을 나누는 장면에서 활용된다. 첫째 사례와 마찬가지로 작가는 여자의 기다림의 정서가 가지는 기원을 묘사하는 시적인 대목에 이 문장을 활용하여 그 효과를 높인 것이다.

두 대목 모두에서 미시마의 문장은 신경숙의 맥락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오히려 둘의 차이를 현격하게 만드는 데 기여하고 있다. 물론 이같은 차용을 일체 용납하지 않겠다는 염결주의의 입장에서는 이것도 표절은 표절일 것이다. 그리고 작가 자신도 사실 이것이 미시마의 문장임을 의식했다면 이런 식으로 활용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작가가 「우국」을 읽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여 많은 비난을 초래했지만, 그만큼 자신만의 문장을 쓰겠다는 의지가 강하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발언이라고 나는 이해한다.

결론적으로 「전설」이 「우국」의 일부를 차용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며, 나아가서 그것을 전체적으로 다시 쓰기(rewriting) 한 결과라고 해도 아주 근거 없는 주장으로 들리지 않는다. 만약 작가가 (기억이 나서) 그런 차용이나 다시 쓰기가 있었음을 밝힌다 하더라도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고 본다. 그만큼 두 작품은 너무나 다른 세계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일부 문장의 명백한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은 정치인들의 책임회피성 상투어가 주는 반감을 그대로 대중에게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굳이 프로이트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기억이 가지는 복잡한 속성을 생각하면 작가의 말을 그대로 인정하고 싶은 것이 작품을 면밀히 읽어본 나의 마음이다. 작가 자신이 기억에 대해서 쓴 다음의 구절을 읽어드리면서 변론을 마치도록 한다.

 

살아보지 않은 앞날을 누가 예측할 수 있겠는가?

앞날은 밀려오고 우리는 기억을 품고 새로운 시간 속으로 나아갈 수 있을 뿐이다. 기억이란 제 스스로 기억하고 싶은 대로 기억하는 속성까지 있다. 기억들이 불러일으킨 이미지가 우리 삶 속에 섞여 있는 것이지, 누군가의 기억이나 나의 기억을 실제 있었던 일로 기필코 믿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 고 필요 이상으로 강조하면 나는 그 사람의 희망이 뒤섞여 있는 발언으로 받아들인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은 마음이 깃들어 있는 것으로.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4. 다른 표절혐의에 대한 검토

 

이응준의 고발을 계기로 신경숙을 표절작가로 비난할 때는 거의 대부분이 ‘상습적’이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 이응준의 고발장에도 「전설」 외에 표절사례로 세 작품(「작별 인사」 「딸기밭」 『기차는 7시에 떠나네』)이 언급되어 있지만, 이 외에도 언론이나 토론회 등을 통해 비교적 근작인 『엄마를 부탁해』(2008)와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2010)까지 표절 의혹이 제기되어 있다. 사실 한 작품만 표절 혐의가 있어도 문제일 텐데 대표작까지 포함하여 무려 6개의 작품이 표절작이라니, 누가 들어도 ‘상습적’이라고 할 만하고 그 작품들을 읽어온 독자들로서는 실망과 분노에 휩싸일 법하다. 더구나 마지막 두 작품은 발행부수만 각각 200만부와 50만부를 넘긴 베스트셀러이지 않은가!

그러나 「전설」을 제외한 나머지 5개 작품의 표절 혐의는 「전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경미한 것이며, 여기에 표절 의혹을 제기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 것인지조차 의심스럽다는 것이 나의 검토 결과다. 하나하나 짚어보겠다.

 

1) 「딸기밭」의 경우

「딸기밭」은 화자인 30대 여성 ‘나’가 ‘유’라는 여자친구와 금지된 욕망의 경계(동성애적인 충동)에까지 다다랐던 젊은 시절의 경험을 반추하는 작품이다. 이 반추의 계기를 이룬 것이 유의 죽음을 알리는 그 어머니의 편지인데, 한겨레 최재봉 기자가 칼럼(1999.9.21)에서 이 편지가 재미작가 안승준(安勝駿)씨의 유고작 『살아는 있는 것이오』의 서문을 거의 그대로 사용한 것이라고 지적한 것이 표절 의혹 제기의 시작이다. 작가가 이 사실을 인정하면서 “유족에게 누가 될까봐 출처를 밝히지 않았다”고 해명하고 유족에게 사후 양해를 구한 후 작품집에 수록할 때 작품 말미에 “유의 어머니 편지는 고 안승준씨의 유고집 서문의 일부를 변형한 것임”이라는 주를 달면서 일단락되었다.

이 작품의 표절 혐의의 경우 작가가 차용 사실을 분명히했고 작품집 수록시 주를 달았기 때문에 더 확인할 것은 없다. 초점은 과연 작가가 소설작업에서 활용한 자료들의 출처를 어디까지 밝혀야 하는가의 문제로 귀착된다. 작가가 작품을 쓸 때는 구상에서부터 집필에 이르기까지 많은 자료들을 수집하고 활용하게 되는데, 거기에는 기존 작품이나 언론기사를 비롯한 문서로 된 것들도 있고 구술된 증언이나 채록 등 취재나 조사를 통해 확보한 자료들도 있다. 표절 기준을 매우 엄격하게 적용하여 무슨 자료든 활용했으면 반드시 각주로 출처를 밝혀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표절이라는 시각도 있는데, 이것이 현재 표절 논의를 제기하고 끌고 가는 사람들의 입장으로 보인다. 예컨대 표절비난에 앞장선 오길영(吳吉泳) 교수는 “창작과정에서 앞선 작품을 차용하는 경우 적절한 표기와 출처를 밝혀야 한다”고 주장하고, 최재봉 기자도 그런 견해에 동의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문학작품에서 흔히 일어나는 차용에 일일이 각주를 다는 것은 다른 문제를 낳게 된다. 작품에서 활용된 자료의 근거를 다 밝히다가는 리얼리즘 소설이나 역사소설 같은 경우에는 아마도 난해한 학술논문보다 더 많은 각주들이 더덕더덕 붙어 있는 꼴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문학작품은 객관적 입증이 필요한 학술논문이 아니다. 불가피하고 꼭 필요한 경우에 극히 제한되게 출처를 밝힐 수 있겠지만, 작품을 읽는 독자를 위해서도 일일이 각주를 다는 것은 전혀 바람직하지 않다. 어떤 자료까지 출처를 밝혀야 하는가의 문제는 작가의 예술적 판단이나 양심에 맡길 일이지 사안마다 조사하고 규정하려 드는 것은 작가의 창작영역을 침해하는 것이며 자유로운 상상력의 발휘를 제한하는 결과를 빚을 것이다. 물론 「딸기밭」의 경우에는 애초 편지의 출처 정도는 밝혀야 옳았다고 판단할 수도 있으나, 그 자체도 논란의 여지가 있는 부분이지 그것을 표절의 사례로 보는 것은 매우 좁고 편향된 시각이라고 할 것이다.

 

2) 「작별 인사」의 경우

「작별 인사」는 계곡에서 야영 중 물난리로 익사한 화자가 유령이 되어 친구들과의 점심약속 자리를 떠돌며 자신의 삶과 친구들과의 사연을 회고하면서 그 나름의 작별식을 치르는 내용이다. 평론가 박철화(朴喆和)씨가 「여성성의 글쓰기, 대화와 성숙으로」(1999)라는 글에서 이 작품이 마루야마 켄지(丸山健二)의 『물의 가족』의 표절이라고 언급한 것이 사실무근이라는 작가의 항의를 받자 한겨레신문에 「신경숙 씨 주장에 대한 반론」을 써서 그 근거를 제시한 바 있다. 박철화는 두 작품의 모티프가 유사하다면서 「작별인사」가 『물의 가족』의 “구조를 빌”리고 “이미지를 차용”하고 있고 제대로 그것을 소화하지 못한 채 “무늬만 자신의 것으로 해서 다시 포장”하고 있기 때문에, “더 위험한 표절”이라고 주장한다.

박철화의 주장처럼 「작별 인사」는 “죽은 자의 영혼인 작중 화자가 살아 있는 사람들의 세계를 굽어보”는 구조이고 생과 사를 가르는 “물의 이미지”가 사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물의 가족』과 유사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작가가 마루야마를 의식하고 썼든 독자적인 발상으로 썼든 이런 정도의 구조적 유사성과 이미지의 공통성을 표절이라고 본다면 아마도 역사상 수많은 작품들이 표절 혐의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법하다. 평론가 정은경씨가 앞에서 언급한 토론문에서 열거한 것처럼, 만약 모티프나 이미지의 차용을 표절로 보자면, 삐까소의 「한국에서의 학살」은 고야의 「53일의 처형」을, 고흐의 그림 일부는 일본화풍을, 김동인의 「광염소나타」는 아꾸따가와 류우노스께의 「지옥변」을,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황석영의 「아우를 위하여」를, 기형도의 「빈집」 또한 무엇무엇을 표절한 셈이 될 것이다. 또 “물기척”과 “물마루 기척”, “헤엄치는 자의 기척”과 “먼 데서 나를 데리러 오는 자의 기척”이 서로 유사하다고 할 수 있지만, ‘기척’이라는 표현은 사실 신경숙의 작품집 전체에서 수도 없이 나오고, 유령을 등장시키는 방식도 이 작품집의 주된 특성이라고 할 정도도 빈발하기 때문에 『물의 가족』을 그런 구도의 근거로 삼을 이유가 별로 없다. 박철화는 신경숙이 마루야먀의 정신의 매혹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여 무늬만 바꾸었다는 것인데, 내가 보기에는 「작별 인사」의 정서나 내용은 마루야마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 오히려 상반되기까지 하며, 저마다의 고독 속에서 사람들 사이의 친밀함의 의미를 되새기는 작품집의 주제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을 뿐이다.

 

3) 『기차는 7시에 떠나네』 『엄마를 부탁해』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의 경우

앞의 두 작품은 그래도 논란거리라도 될 수 있겠지만, 나머지 세 작품은 사실 표절이라고 내세우는 것 자체가 황당한 추정이고 주장으로 보일 정도로 근거가 희박하다. 우선 『기차는 7시에 떠나네』에 파트릭 모디아노(Patrick Modiano) 작품에 대한 표절 혐의가 있다는 주장은 역시 박철화가 자신의 평론에서 제기한 것인데, 그 근거를 한번 들어보자.

 

무서운 말이 되겠지만 정말 심각한 것은 이 작품의 본질이 ‘허위’가 아닐까 하는 점이다. 허구적 현실로서의 소설 장르의 기원이 아니라, 『기차는 7시에 떠나네』라는 개별 작품의 발생의 기원에 모방대상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우선 ‘기억’의 문제와 관련하여 프랑스 소설가 파트릭 모디아노의 그림자가 너무 짙게 드리워져 있다. 작품 속에서 그의 이름이 언급되기도 한다. 그런데 물론 하늘 아래 새로운 이야기가 없다지만, 적어도 예술이란 ‘다른’ 방식으로 말하기라는 차원에서 생각할 때, 그 둘 사이에 별다른 차별성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대단히 예민한 문제이다.

 

이것이 표절 혐의 제기의 전부인 셈이니 참으로 빈약하기 짝이 없는 주장이다. 설혹 작품의 발생이나 기원에 모방대상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왜 표절인지(만약 그렇다면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는 『오디세이아』의 표절일 것이다), ‘기억’이라는 주제가 공통적이라고 해서 왜 표절인지(만약 그렇다면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수많은 소설들은 모두 표절일 것이다) 도무지 알 수 없다. 물론 박철화는 신경숙의 작품이 모디아노의 글쓰기 방식과 “별다른 차별성이 보이지 않는다”고 주장하지만, 대체 모디아노를 읽고 하는 소린지 모르겠다. 『기차는 7시에 떠나네』와 같이 기억상실증에 걸린 인물이 등장하는 모디아노의 대표작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는 그 문체나 구성 등 글쓰기 방식에서 신경숙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나머지 두 작품 『엄마를 부탁해』와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의 경우도 근거가 희박하기는 마찬가지다. 둘 다 루이제 린저(Luise Rinser)의 『생의 한가운데』의 문장과 비슷한 문장이 나온다는 주장인데, 다음 두가지다.

 

1) 여자 형제들은 서로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든지 혹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든지 둘 중 하나다. (『생의 한가운데』)

 

모녀 관계는 서로 아주 잘 알거나 타인보다도 더 모르거나 둘 중 하나다. (『엄마를 부탁해』) 

2) 사람은 자기 자신에 관해서 얘기해서는 안됩니다. 순전한 이기주의로 보더라도 안됩니다. 왜냐하면 마음을 털어버리고 나면 우리는 더 가난하고 더 고독하게 있게 되는 까닭입니다. 사람이 속을 털면 털수록 그 사람과 가까워진다고 믿는 것은 환상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가까워지는 데는 침묵 속의 공감이라는 방법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 것 같습니다.” (『생의 한가운데』)

 

누군가에게 마음을 털어놓는 일은 가까워지는 게 아니라 가난해지는 일일 뿐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그때 했던 것도 같다. 누군가와 가까워지는 일은 오히려 침묵 속의 공감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구태여 설명할 것도 없이 이런 정도의 유사성을 가지고 표절 운운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리한지는 어느정도의 교양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일이다. 그럼에도 어떤 이는 첫째 사례를 근거로 검찰고발까지 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 사태에 마녀재판의 광기가 어려 있었음을 입증하는 예가 아닌가 한다. 사실 이런 것이 표절 혐의를 받는다면 표절 혐의를 받지 않을 작가는 이 세상에 한명도 없을 것이라고 장담하는 바다. 이 가운데 둘째 사례는 언론에도 자주 거론되었는데, 그렇다면 가령 식민지시대 작가 이상(李箱)의 단편소설 「실화(失花)」에 나오는 말 “사람이 비밀이 없다는 것은 재산 없는 것처럼 가난하고 허전한 일이다”를 여기에 병치해보자. 신경숙이 루이제 린저를 표절했으면 루이제 린저는 이상을 표절한 셈이다. 그렇다면 이상은 누구를 표절했을까? 이런 의미없는 수사는 아마도 검찰조차 회피할 것이고, 문학호사가나 아니면 ‘문학의 검찰’을 자처하는 사람들에게 맡기는 것이 좋겠다.

신경숙은 「전설」의 일부 문장의 표절 의혹 제기 및 고발을 계기로 표절의 ‘상습범’인 양 매도되어 왔다. 그러나 ‘상습’을 입증하는 표절 사례로 제시된 것들은 하나같이 표절로 규정되기에 근거가 희박하거나 무리한 것임이 드러났다. 근거가 어느정도 있는 경우에도 문학에서 표절을 어떻게 이해하고 정의할 것인가에 따라서 해석이 달라진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다음 변론에서 문학에서 표절이란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요즘의 문학론에서 표절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한번 짚어보도록 하겠다.

 

 

5. 문학론에서 표절을 보는 시각

 

표절은 작가라면 해서는 안될 비윤리적인 행위라는 것이 일반의 인식이다. 윤리 문제만이 아니라 저작권이 걸려 있는 경우 법적 문제까지 야기한다. 표절 논란의 역사는 꽤 길지만 특히 최근에 와서 우리 사회에서 정치인의 도덕성 검증이나 학자의 연구윤리 차원에서 사회문제가 되어왔다. 이번 사태가 크게 번진 것도 이런 추세와 무관하지 않을 법하다.

그러나 문학의 경우 표절 문제는 학술논문과는 전혀 다른 차원을 가진다. 문학은 논거가 필요한 학문적 저술과는 달리 상상력에 관련되고 언어의 전복이나 혁신을 포함한 새로운 실험들이 시도되는 예술의 한 분야다. 문학은 작가의 체험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는데 작가에게 독서란 그야말로 창작의 피와 살을 이루는 일상적 체험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다른 작가들로부터의 차용이 문학창작에서 일반화되어 있고 표절에 가까운 차용도 숱하게 일어난다. 차용을 넘어선 명백한 표절조차 문학창작의 한 유효한 방법이라는 주장이 문학이론에서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표절이라면 일체 용납될 수 없다는 것이 불변의 진리처럼 여겨지고 있지만, 실은 이것이 중요한 의미를 띠게 된 것은 근대 자본주의시대에 들어와서다. 즉 근대에 들어와 문학의 ‘독창성’에 대한 믿음이 생겨나는 동시에 그 독창적인 성과에 대한 ‘소유권’을 확립하려는 과정에서 표절이 문제로 떠오른 것이다. 실상 서구의 경우, 근대 초기의 셰익스피어만 하더라도 당대의 역사서라든가 민요 등 자료들을 폭넓게 활용하였고, 때로는 다른 저자의 문장을 그대로 가져다 쓰기도 해서 지금의 기준이라면 표절작가로 불리고도 남았을 터이다.

표절의 기준이 엄격해질수록 작가들의 차용의 범위도 줄어들고 그만큼 자유로운 상상력의 표현영역도 제한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들 가운데 이같은 규제에 맞서는 사례도 속출하는데, 독일의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가 그 한 예다. 그의 대표작 「서푼짜리 오페라」(The Threepenny Opera)는 워낙 18세기 영국작가 존 게이( John Gay)의 「거지 오페라」(The Beggars Opera)의 구성을 빌린 것인데다, 작품에 나오는 노래에 프랑스 시인 비용(F. Villon)의 발라드를 번역한 시행을 그대로 사용하여 당시 한 연극평론가가 표절 혐의를 제기하였다. 다른 작품에서는 영국작가 키플링(R. Kipling)의 4행 스탠자(stanza)를 통째로 자신의 발라드 속에 삽입한다. 브레히트의 이 행위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표절 혐의 제기에 대한 브레히트의 태도는 오히려 당당했다. 그는 차용한 사실은 시인했으나, 자기는 그런 ‘세속사’에 관심이 없고 지적재산권이란 것도 그리 대단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나온 것이다. 나아가서 위대한 문학의 시대는 스스럼없는 표절의 힘을 특징으로 한다면서, 그가 이 표절행위에서는 도저히 셰익스피어와 괴테를 넘어서지 못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브레히트는 표절을 옹호한 셈인가? 그렇다. “좋은 표현의 가치를 아는 누구라도 그것을 다시 써서 옛 표현에 비해 모자라거나 아니면 그것을 무색하게 하는 새로운 표현을 지어내기보다 옛 표현을 전용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바로 브레히트의 말이다. 괴테도 이에 뒤지지 않는다. 그는 『파우스트』의 일부 대목이 셰익스피어를 그대로 베꼈다는 비난을 받자 이렇게 말한다. “그래, 나의 메피스토펠레스가 셰익스피어에 나오는 노래를 부른다. 왜 그래서는 안되나? 셰익스피어의 노래가 그 자리에 딱 맞는데, 구태여 내 것을 만드는 수고를 해야 하는가?”

혹자는 물을 것이다. 셰익스피어나 괴테나 브레히트가 표절을 했다고 해서 표절행위가 꼭 정당하다고 할 수 있는가? 어쨌든 이들도 남의 표현을 자기 것처럼 작품 속에 삽입했으면 비난받아야 하고, 자본주의사회에서 사유재산권이 존중되는 만큼 그 질서를 따라야 하는 것 아닌가? 이 질문은 나름의 정당성이 없지 않다. 실제로 브레히트는 자신의 표절 옹호를 통해 사유재산을 신성불가침으로 보는 부르주아적인 가치관을 비웃고 자본주의사회를 풍자하고 비판하는 기회로 삼았던 것이니까.

그러나 여기서 다시 돌아봐야 하는 것이 바로 이 근대 이후의 사회에서 문학의 위상이다. 문학이 근대사회를 토대로 발전하고 그 현실을 반영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것은 근대 자본주의사회의 가치관에 맞서서, 즉 자본에 기반한 기계문명의 추세에 맞서서 그 위업을 이룩해온 것이다. 근·현대문학의 위대한 작가들이 표절을 범죄시하는 자본주의사회의 속성을 통찰하고 그것을 넘어서는 예술적 표현의 자유를 주창하였고, 작가의 언어표현을 소유권의 문제로 만들고 그 자유로운 활용을 윤리나 법으로 규제하려는 자본주의 장치들에 항거했다는 해석도 그래서 가능하다.

다소간 논란의 여지가 있는 해석이겠지만, 나의 초점은 다음에 있다. 즉 표절이라는 문제가 문학영역에서 이런 특수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일부 문장의 유사성을 빌미로 신경숙 같은 작가를 표절작가로 매도하는 것이 얼마나 편협한 인식인지에 주목하자는 것이다. 물론 모든 베끼기를 허용하는 글쓰기의 무질서를 용인하자는 말은 아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무엇인가? 다 같이 다른 작가의 작품을 훔쳤더라도 위대한 작가와 표절작가를 구별짓는 기준은 어디에 있는가? 결국 그것은 그 작가가 얼마나 독자적인 자기 세계를 작품을 통해서 이룩했느냐의 물음으로 귀결된다. 그리고 이는 비단 서구문학의 경우만이 아니다.

가령 중국에서도 소설에서 남의 작품을 빌려서 활용하는 것, 즉 용전(用典)이 결함이 아니라 오히려 미덕으로 간주되어왔고, 한 중문학자에 따르면 이 용전에는 직용, 화용, 의용, 정용, 반용, 암용 등 다양한 활용 방식이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용전을 함으로써 어떻게 작품의 예술성을 높일 것인가”이다. 그 결론은 나의 변론취지와 동일하기 때문에 인용해보겠다.

 

주어진 작품이 표절이나 도용에 해당되는지를 판정하는 데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판단기준은 그 작품이 완성된 작품으로서 자기독립성을 지니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어느 한 작품이 비록 다른 작가들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고 어떤 요소를 부분적으로 빌려오고 있더라도 그 작품에 의존하지 않고 홀로 설 수 있을 때 비로소 표절이나 도용의 혐의에서 벗어날 수 있다. (…) 장구한 문학사를 통해서 지금까지 수많은 작가들이 표절이나 도용의 혐의를 받아왔지만, 오직 탁월한 예술적 재능을 지닌 작가들만이 이러한 혐의를 벗고 위대한 작품을 창작해낸 대가로 인정을 받아왔던 것이다. (김명석 「창작과 표절 사이」, 『중어중문학』 제33집, 2003)

 

자, 그러면 마무리짓자. 내가 엘리엇을 인용하면서 “훔친 것을 자신의 작품 속에 녹여내는 것”이 좋은 시인이며 신경숙이 바로 그런 경우라고 하자, 대뜸 그렇다면 “성공한 표절은 표절이 아니다”라는 말인데 그것이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와 무엇이 다르냐는 다그침이 왔다. 그에 대한 답변으로 이 변론을 마치겠다. 쿠데타는 성공해도 쿠데타지만, 표절은 성공하면 뛰어난 작품으로 변신한다. 그것이 정치와는 다른 문학의 마술이며 내가 엘리엇과 더불어 “작가들이여, 흉내에 그치지 말고 더 크게 훔쳐라”라고 말하고 싶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6. 문학권력론 비판

 

이응준의 신경숙에 대한 표절 고발이 급작스럽게 사회 일반의 비난여론으로 확산된 것은 언론의 선정적 보도와 인터넷 등을 통한 유포가 결정적이고, 작가 및 해당 출판사의 초기대응이 대중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탓도 있었다. 그런데 그같은 비난여론이 한 작가의 표절 혐의에 대한 실망이나 분노에 그치지 않고 문학계 전체의 ‘타락상’에 대한 무차별 공격으로 비화한 데는 ‘문학권력’ 비판에 앞장서온 일부 평론가들의 역할이 컸다. 이들은 이응준의 고발이 있자마자 그를 문단의 타락상을 과감하게 드러낸 용기있는 문인으로 치켜세우면서, 신경숙의 표절 사실을 감추어온 ‘침묵의 카르텔’이니 ‘문학권력의 횡포’ ‘상업주의에 물든 출판권력’ ‘창비의 오만한 태도’ 등 현재의 문단질서에 격한 비난을 쏟아놓았고, 그것이 여론재판의 광풍을 불러일으키는 데 주효했던 것이다.

이들은 우선 신경숙의 상습표절이 엄연한 사실이고 문학권력이 이를 호도하고 있다고 단정하는 데서 시작하는데,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 일체의 주장을 ‘궤변’으로 치부할 정도로 남다른 확신의 소유자들이다. 이들의 주장은 해묵은 것으로 이번에 터져나온 문학권력에 대한 비난의 언어들은 이들이 10여년 전 제기했던 문학권력 비판을 그대로 복사하고 있다. 당시 언론학자 강준만(康俊晩) 교수를 필두로 권성우(權晟右) 이명원(李明元) 등 평론가들이 주도한 문학권력 논쟁에서 이들은 이미 앞에 열거한 문구들을 글자 하나 틀리지 않게 그대로 동원한 바 있다. 그 당시와 다른 점이라면 신경숙 또한 이들에게 문학권력의 하나로 호명된다는 정도고, 상업주의에 빠져 ‘침묵의 카르텔’로 표절작가를 비호해온 문학권력을 해체하자는 것이 이들의 변함없는 주장이다.

이들의 주장 전체를 일일이 거론할 여유는 없으므로 과연 이들이 말하는 권력이란 것이 무엇인지 한두가지만 짚어보겠다. 이들에 의하면 이번 사태에서 문학권력은 신경숙 본인을 비롯하여 이 작가의 작품을 낸 세 출판사, 즉 창비·문학동네·문학과지성사다. 근거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신경숙이 문단의 권력이라면 그보다 큰 문단권력들도 수두룩하다. 고은(高銀)이나 황석영(黃晳暎) 이문열(李烈) 등 문단의 거목들이 있고 이번 논란에 끼어든 조정래 작가도 거기에 넣을 수 있겠다. 문학권력을 해체해야 한다니, 그렇다면 이 작가들을 다 어떻게 하고 문단을 재편하겠다는 것인지? 또 출판사도 마찬가지다. 누가 뭐래도 이 세 출판사는 한국문학의 지형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해왔고, 각각 많은 작가들과 연결망을 가지고 한국문학을 형성하는 축을 이루고 있다. 이것이 권력이라면 권력이지만, 해체라니 무엇을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 짐작조차 어렵다.

이들이 이런 자가당착에 빠져 있는 것은 문학권력이라는 것이 문학에 있어서는 존중받아야 할 하나의 ‘권위’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문학에도 권력이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을 꼭 억압하고 군림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하는가? 신경숙이든 출판사든 그 권력이란 것은 자본주의사회에 문학이 처한 열악한 환경 속에서 그야말로 고투에 고투를 거듭한 결과 얻어낸 작은 힘이자 기반이기도 하다. 출판사도 기업체인 이상 영업을 하지 않을 수 없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문학적 지향과 수준을 지켜나갈 때에만 권위를 획득하게 된다.

창비를 생각해보자. 문학권력의 본산인 것처럼 비난받는 가운데 창비가 그동안 잡지 폐간이나 대표 구속 등 독재정권의 탄압을 무릅쓰고 꾸준히 실력을 길러온 결과 정치권력에 맞서 문학 전반을 버티는 큰 힘이 되고 있다는 사실은 쉽게 무시된다. 지금 그 ‘힘’을 억압적 ‘권력’으로 환원시켜서 해체의 대상처럼 비난하는 것이야말로 문학을 권력투쟁으로 이해하는 이들의 좁은 시야를 말해준다. 그것이 대부분 대학에 자리잡고 있는 교수이자 평론가라는, 또다른 ‘문학권력’들로부터 주로 나오고 있는 것도 아이러니다. 그렇게 권력해체가 중요하다면 대학이야말로 사학권력들이 노골적인 횡포를 부리는 곳이 아닌가? 그나마 저항의 거점이기도 한 문학권력을 비난하고 그 해체를 말하기 전에 자신들의 존재기반을 흔들어대는 사학권력 해체를 위한 실질적 싸움부터 시작할 것을 권하는 바다.

 

 

7. 최종변론

 

지금까지 나는 신경숙을 상습적 표절작가로 단정 지은 여론재판의 결과가 부당하다는 소신에 따라 몇가지 쟁점에 대해 변론해왔다. 압도적인 반대여론도 여론이거니와 갓 개업을 알린 초짜 변호사인지라 부족한 점이 많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곳이 여론재판장이 아닌 문학의 법정이라면 여기서 그치지 않고 앞으로 문학 당사자들 사이의 대화와 소통을 통한 지속적인 논의가 가능하리라는 믿음으로, 지금까지의 변론을 최종 정리하고자 한다. 내가 말하는 문학의 법정은 비단 문인만이 아니라 독자까지 참여하는 토의의 공간을 뜻한다. 문학의 생산자와 소비자라는 관계에서도 그렇고, 결국 작품은 독서를 통해서 구현되고 재탄생한다는 점에서도 독자는 이 법정의 중요한 배심원이라고 할 것이다. 아울러 여론재판에는 반대하지만 이번 변론을 계기로 ‘표절이냐 창조냐’의 물음에 독자들 또한 국외자가 될 수 없음을 새삼 깨닫는다. 따라서 이 변론은 여론에 휘둘리는 ‘대중’이 아닌 진정한 ‘독자’와의 대화의 시도이기도 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선 나는 신경숙에게 상습적 표절의 혐의를 씌우는 것은 부당하다는 판단에서, 신경숙이 표절작가도 아니거니와 상습표절 혐의에서도 완전한 무죄임을 주장코자 한다. 그 내용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이응준의 고발장에 적시된 「전설」의 경우, 문학론에서 정당한 차용이라고 보는 기준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고 판단한다. 미시마의 「우국」의 문장 일부를 차용하고 있지만, 그것을 독자적인 문학세계의 형성에 창조적으로 활용하고 있고, 자신의 작품의 맥락 속에 녹여냄으로써 작가로서의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일찍이 표절 혐의를 받았지만 이를 이겨내고 거장의 반열에 오른 많은 선배작가들이 밟아온 길이기도 하다. 따라서 세속 차원이 아닌 문학의 차원에서 신경숙의 표절 혐의는 기각되어야 마땅하다고 본다.

 

2) 「전설」의 경우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우국」을 읽은 기억은 나지 않지만 “표절이란 문제제기가 맞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기 때문에 작가 자신이 표절을 인정한 것 아니냐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혐의 제기’가 가능하다는 인정일 뿐이며, 표절을 가장 엄격한 의미로 규정할 경우에 한정된 발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기억 안 난다’는 말이 책임회피라는 비난이 있으나 한편으로 기억의 속성상 작가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여러 증언들(이외수, 이문열, 유시민 등)도 참조하시면 한다. 따라서 가장 좁은 의미에서의 부분표절을 인정하더라도 그 책임추궁은 부주의에 대한 지적 정도에 그쳐야 한다고 본다.

 

3) 표절이 상습적이라는 혐의는 근거가 매우 미약한 것으로 신경숙은 이 혐의에서 완전한 무죄다. 「전설」 이외에 표절 혐의가 제기된 다섯 작품은 그 정도가 매우 경미하여 문제를 삼는 것 자체가 무리라고 판단된다. 이 가운데 어느정도 논란거리가 되는 두 작품 「작별 인사」와 「딸기밭」의 경우, 전자의 이미지나 구성 차용 혐의는 문학에서 허용될 수 있는 범위에 있고, 차용된 글의 출처표시를 안한 「딸기밭」도 고의성이 없는 작가로서의 판단의 결과임이 인정되어야 한다고 본다. 더구나 후자는 작품집 수록시 이미 출처를 밝혀놓았다.

 

이제 변론의 소회 두어가지만 말씀드리면서 마무리하고자 한다. 신경숙은 여론재판에 의해 상습적인 표절작가로 단죄되면서 혹독한 고통을 겪어왔음에도 일부에서는 작가의 절필까지 요구하고 있다. 나 자신은 이런 단죄 자체가 부당하다고 여길뿐더러, 여기에 절필까지 요구하는 것은, 말하자면 경미한 교통질서 위반에 사형선고를 내리는 격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워낙 문학권력론자들의 과격한 언사야 익숙하다 해도, 원로작가인 조정래씨까지 절필을 요구한 것은 유감이 아닐 수 없다. 후배작가의 부주의에 대해 따끔한 충고야 할 수 있겠지만, 절필 요구는 가혹하고 부당한 일이 아닌가 한다. 『태백산맥』의 작가를 존중해온 평론가이자 변호인으로서 절필 요구의 공식 철회를 정중하게 요청드리는 바다.

문학인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이번 사태를 계기로 문학의 위상을 재점검해볼 필요가 있다는 데 동의한다. 한국문학이 위기에 빠져 있는 것은 표절이 만연해서도 아니고 그것을 덮어두는 무슨 ‘침묵의 카르텔’이 있어서가 아니라, 인간과 사회에 대한 활달한 상상력과 사유가 위축되고, 사심 없는 평가라는 비평의 본령이 살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부에서 주장하는 표절의 기준 마련이라거나 징벌위원회같이 작가의 창작영역을 축소시키는 어떤 주장도 배격하는 바다. 다만 문학이라는 장()의 구조적 문제가 무엇인지 점검하고 그것을 개혁하려는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며 그 과정에서 문학권력론자들의 주장도 그 생산적인 부분을 살려나가는 집단적 지혜가 발휘되어야 할 국면이다. 한국문학에 큰 충격과 실망을 경험했을 독자들에게도 이번 사태가 문학을 더 깊이 이해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고, 한국사회에서 문학이 자본과 권력의 포위 속에서 그것을 버텨내고 견제하는 튼튼한 성채가 될 수 있도록 모두가 힘을 모아나가기를 기대하면서 변론을 마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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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은경 토론문은 본지 이번호에 수록돼 있음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