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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한국의 문학, 이제 어디로

 

비평의 질문은 어떻게 귀환하는가

신경숙 소설과 90년대 문학비평담론

 

 

백지연 白智延

문학평론가. 평론집 『미로 속을 질주하는 문학』이 있음. cyndi89@naver.com

 

 

1. 표절 논란 이후, 비평의 질문

 

신경숙(申京淑)의 「전설」에 대한 표절 문제가 제기된 후 많은 시간이 흘렀다. 언론의 집중적인 보도와 논평들은 차츰 정돈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논란의 확산 계기를 제공한 창비로서는 반성과 쇄신의 책임이 갈수록 무거워짐을 실감한다. 표절 문제에 대응하여 창비에서 내부논의 없이 나간 첫번째 보도자료의 잘못이 남긴 파장은 간단하지 않다. 그것은 다음날 발표된 사과문을 포함하여, 『창작과비평』(이하 『창비』) 가을호의 머리말과 백낙청(白樂晴) 편집인의 페이스북 발언, 그리고 현재의 국면에서 객관적인 논의를 전개하려는 시도들에도 여전히 무거운 부담으로 드리워지고 있다.1) 지금의 상황에서 돌아보면 표절 논란의 과정에서 창비가 신속하고 활발한 방식으로 대중과 소통하지 못한 문제점도 크게 다가온다. 내부에 존재하는 다양한 의견들을 생산적으로 드러내면서 공론장과 소통하는 과정의 필요성은 현재뿐 아니라 미래의 지속적인 과제라고 생각한다.

신경숙의 「전설」이 작가 본인은 읽은 사실을 망각했다지만 미시마 유끼오(三島由紀夫)의 「우국」의 영향 아래 씌어졌으며 어떤 경위로든 해당 대목을 거의 그대로 재생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작가는 자신의 부주의로 인한 표절 사실을 시인하며 사과하였고 출판사 역시 작가의 의사를 존중하여 해당 작품집의 출고를 정지하였다. 『창비』 가을호 머리말에서도 강조했듯이 이러한 조처는 문제에 대응하는 힘겨운 시작일 뿐이다. 단시간에 문제가 해결된다고 장담하기보다는 공론 속에 표출되는 불만과 질타를 환기하면서 생산적인 문학비평의 쟁점으로 연결시키는 데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지난 계절의 논의들을 차례로 살펴보면 작품 자체에 대한 문학적 해석도 많이 등장했음을 알 수 있다. 표절 논란이 작품에 대한 실질적인 해석들로 이동하는 전환점에 윤지관(尹志寬)의 중요한 문제제기가 있었다. 윤지관은 “기억하든 못하든 「전설」에는 「우국」이 아니면 설명하기 어려운 단어나 문장의 유사성이 존재하는 것은 누구의 눈에도 분명하”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그러나 유사한 문장이나 단어가 들어 있고 구성이 흡사하다고 해서 표절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말한다.2) 그가 주장하는 문학적 차용의 범위나 「전설」의 작품 평가에 대해서는 비평적 이견이 있을 수 있다. 핵심적인 것은 이 글이 창작의 영역에서 벌어지는 창조와 모방의 관계를 본질적으로 환기했다는 점에 있다. 장정일(蔣正一)은 윤지관과 다른 층위에서 “작가〓창조자”라는 낭만주의 신화를 비판하며 “작가의 창조성이란, 사회와 역사를 비롯한 외부와의 교섭에서 나온 산물이며 그가 받았던 교육과 독서 편력도 거기에 포함된다”3)라는 문학 창작의 기본 속성을 강조한다. “표절을 윤리적이게 하는 것은 명시성(출처 표시)이 아니라 원본을 빌려 쓴 사람의 원본과의 대결 의식이며 원작을 극복하려는 노력, 곧 작품성이다”라는 전언은 오래전 그 자신이 개입하여 이인화, 박일문과 벌인 90년대초의 포스트모더니즘 논쟁 및 표절 논란을 떠오르게 한다.4)

윤지관과 장정일의 견해는 표절 논란이 한 방향으로 치닫고 있을 때 문제의 근본적인 발생 지점을 일깨우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문학의 영역에서 다양한 논의들이 진행될 수 있는 상대적인 참조가 되었다.5) 이처럼 문학작품의 창작원리에 대한 논의와 더불어 저작권과 표절의 관계에 대한 문제도 제기되었다. 저작권 개념은 근대문학이 어떤 방식으로 ‘개인의 소유권’을 지닌 상품으로 서게 되는가를 새삼스럽게 알려준다. 저작권의 측면에서도 표절 문제가 지닌 함의는 단순하게 정리되기 어렵다. 가령 장은수6)가 다양한 표현의 차용과 인용, 패러디, 오마주에 대한 섬세한 고려를 요구하면서도 표절은 “어떤 개성적 ‘문장’의 ‘인용부호’ 없는 절취(截取)일 뿐”(58면)이라고 단정하는 과정은 저작권 문제를 둘러싼 복잡한 갈등과 혼란을 잘 보여준다. 그는 특정 문장의 ‘절취’를 표절의 근거로 제시하였다가 급작스럽게 “문학의 표절 기준은 내적 자율의 영역이지 외적 규칙의 영역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양심의 문제이다”(70면)라고 결론짓는 등 논지의 혼란을 보여준다. 장은수는 문자적 유사성을 추출하는 층위에서 표절 시비를 멈출 수 있다고 주장하며 대신 모티프나 구조적 유사성 등의 다양한 층위로 번져나가는 표절 논란을 경계한다. 그러나 그가 제시하는 ‘문장 레벨’로 한정된 표절 범위는 창작의 자유를 보장하는 안전한 울타리가 되지 못한다. ‘절취’의 개념을 담고 있는 한 표절에 대한 판단은 문장의 동일함에서 끝나기 어려우며 모티프, 주제의 유사성까지 수많은 층위의 유사함을 판정의 시험대에 올리게 된다.7)

문학의 원천인 창조와 모방의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에서부터 저작권과 표절 문제의 관계, 그리고 문학권력론의 제기라는 광범위한 주제들은 단시간에 결론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풀어나가야 할 여러 문제들이 있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뼈아프게 와닿았던 것은 창비 문학비평담론의 평가라고 할 수 있다. 『오늘의 문예비평』 가을호 좌담에서 구모룡(具謨龍)은 표절 문제가 창비 담론의 문학적 발현이라는 층위에서 사유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분단체제론’이나 ‘87년체제의 극복’ ‘동아시아담론’ 등은 냉전체제의 와해 이후 창비 담론의 생산적인 국면입니다. 문제는 창비가 자신의 주도적인 담론에 상응하는 작품을 옹호했느냐 하는 점입니다”(40면)라는 그의 발언은 그동안 창비의 문학비평담론이 사회담론과의 연계 속에서 어떤 쇄신을 시도해왔는가를 성찰하게 한다. 그것은 작품이나 현실을 담지 못하는 경직된 담론이 있다면 그것을 점검하고 고민해야 한다는 궁극적인 요청으로 다가온다.8) 그런 점에서 90년대 이후의 창비 문학비평담론이 신경숙의 소설을 포함한 다양한 경향의 작품을 무차별하게 수용해왔다는 지적들을 상투적인 비판으로 외면해온 적은 없는지 스스로 돌아보게 된다. 이번 표절 논란 과정에서 그러한 비판은 신경숙의 작품에 대한 가치평가와 문학사에 대한 해석으로 확장되어 터져 나왔다. 특히 ‘리얼리즘의 퇴화’로 거칠게 토로되는 방향성에 대한 질타는 1980년대에서 1990년대를 넘어오는, 그리고 현재까지 지속되는 비평의 결정적인 한 흐름과 연결되어 있다. 이 글이 이러한 광범위한 문제의식을 감당하기는 버겁지만 80년대 급진적 문학이론들이 남긴 진영논리를 극복하려는 리얼리즘론의 논쟁 과정을 짚는 것으로 논의를 시작해보겠다.

 

 

2. 진영논리의 극복과 리얼리즘 논쟁

 

정은경(鄭恩鏡)은 표절 논란을 다룬 글에서 신경숙 문학의 신화화를 비판하며 “96~97년 창비 진영에서는 문학담론적으로 진정석, 최원식, 황종연 등으로 대표되는 논자들의 ‘리얼리즘과 모더니즘 회통론’과 화합론이 본격 제기되었는데, 이를 통해 ‘신경숙 문학’은 양 진영의 ‘명분도 갖춘 화해와 통일의 상징’이” 되었다고 주장한다.9) 이 글에서 창비가 폐기한 ‘문학적 이념 진영과 당파성’은 ‘가치지향성’ 혹은 ‘공동체에 기반을 둔 새로운 가치’ 등으로 표현된다. 정은경이 이야기하는 ‘가치지향성’은 대체로 70~80년대를 거치면서 성장하고 심화해온 민족문학론, 민중문학론 및 리얼리즘론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읽힌다. 그가 90년대 이후 창비가 지향해온 문학비평담론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성취는 어떤 방식으로 구체화된 것인지 묻는 것이라면 공유하는 의제가 열리는 셈이다. 그러나 먼저 이 글이 전제로 삼는 80년대/90년대 문학의 차이와 ‘진영’의 의미를 짚어보지 않을 수 없다. 정은경은 문학사 인식에서 관행적으로 답습되어온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문예사조적 대립구도를 옮겨와 현재 문학담론의 ‘진영’으로 치환한다. 이러한 구도 속에 소환된 96~97년 리얼리즘 논의는 80년대 후반의 비평담론을 주도한 급진적 문학론과 뒤섞여 함께 해소되는 흐름으로 읽혀버린다.

정은경의 글에서 80년대와 90년대 문학의 차이를 설명할 때 당연한 전제처럼 등장하는 이항대립적 틀을 새삼 문제삼은 것은 이러한 논리 구도가 한국문학 비평과 연구들에서 일정한 편향으로 반복되기 때문이다.10) 예컨대 장성규(張成奎)는 “1980년대 민족민중문학론의 인식구조와 1990년대 내면의 발견으로 표상되는 비평의 인식 구조는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11)라는 전제를 제시한 후 현재의 표절 논란과 문학권력 논의의 구도가 결론적으로는 “순수와 참여, 또는 모더니즘과 리얼리즘 등의 이항대립적 비평 구도가 해체된 이후 더이상 이들 ‘진영’들이 날카로운 자기성찰과 타자에 대한 인식을 수행하지 못하”(193~94면)는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판단한다. 그는 “기실 리얼리즘 ‘진영’에서 신경숙을 호명하기 전에 먼저 수행해야 할 비평적 작업은 1980년대 일련의 급진적 리얼리즘론에 대한 객관적 평가”(189면)였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장성규의 이러한 논평은 90년대 이후 리얼리즘 논의가 진척시킨 성과에 대한 최소한의 실증적 접근조차 과감히 생략해버린 문제점을 노출한다. 실제로 90년대에 진행된 리얼리즘 논쟁사 속에서 가장 치열하게 점검되었던 것은 급진적 문학운동이 파생시킨 진영논리와 관념적인 현실이해였다. 백낙청은 80년대 급진적 리얼리즘론의 자체적인 한계를 분석하면서 “876월항쟁 이후 민족문학이 새로운 과제에 부응하지 못한 내부적 요인이 더 결정적”12)이라고 지적하였으며 최원식(崔元植)은 후일 논쟁을 돌아보며 “ ‘개인적 개인과 계급적 개인의 분리’를 몰각하고, 전형의 이름 아래 평균성에 매몰된 측면이 있”13)80년대 문학의 관념성을 비판한다. 90년대 벽두의 리얼리즘 내부의 이론 모색과 이후 1996~97년 진정석(陳正石) 김명환(金明煥) 윤지관이 주도한 민족문학론과 모더니즘 논쟁, 1999년 최원식의 리얼리즘-모더니즘 회통론, 2001년 임규찬(林奎燦) 황종연(黃鍾淵) 윤지관이 다시 촉발한 리얼리즘-모더니즘 논쟁에서도 이러한 80년대식 급진적 리얼리즘론이 남기고 간 관념성과 도식성의 극복은 중요한 논점이었다. 여러가지 복잡한 갈래 속에서 진행되는 90년대 리얼리즘 논쟁사는 단순한 해소의 과정으로 정리되기 어려운 맥락들을 거느리고 있다.14)

정은경과 장성규의 견해는 표절 논란이 문학사 평가로 확산되는 가운데 90년대 리얼리즘 논쟁구도를 80년대 급진적 리얼리즘론과 묶어 단순화해버리는 문제점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물론 이러한 결과를 단지 왜곡과 과장으로만 보고 싶지는 않다. 어떤 의미에서건 그것은 ‘신경숙 문학’이 상징하는 다양한 경향의 90년대 문학이 관습적인 리얼리즘 논의를 어떻게 뒤흔들었는가에 대한 평가를 현재적으로 요청하기 때문이다. 신경숙을 포함하여 장정일 윤대녕(尹大寧) 은희경(殷熙耕) 성석제(成碩濟) 배수아(裵琇亞) 김영하(金英夏) 등의 소설로 이어지는 90년대적 문학의 낯선 흐름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는 당대 리얼리즘 논의에서 중요한 고민거리였다. 리얼리즘과 모더니즘 논의의 과정에서 진정석이 “‘근대성에 대한 미적 대응’을 기준으로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을 포괄하는 ‘광의의 모더니즘’ 개념”15)을 제안한 것도 작품과 만나는 새로운 해석방식에 대한 탐색에서 비롯된다. 지금 그 글을 읽으면서 오히려 눈에 들어오는 것은 버먼(M. Berman) 식 모더니즘 개념의 활용보다도 ‘리얼리티’에 대한 언급이다. 그는 현재 필요한 것이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을 함께 동원하여 리얼리티 속으로 겸허하게 침잠하는 일”(164면)이며 “리얼리티야말로 모든 문학적 형상화의 출발점이자 근거이고 종착역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리얼리즘론은 스스로를 과감히 해체하고 늘 새롭게 생성되는 리얼리티에 몸을 열어놓아야 한다.”(164면)라고 말한다. 다양하고 낯선 리얼리티들이 출현하고 있는 현실에서 그것을 포착하고 해석하기 위해서는 리얼리즘의 전면적인 자기쇄신이 요구된다는 주장이다.

리얼리티야말로 모든 문학적 형상화의 출발점이자 근거라는 이 호소는 진정석이 말했듯이 리얼리즘의 관습적 이해 및 개념의 자명함을 비판하는 문학논의들에서 생산적인 암시를 얻을 수 있다. 진정석은 데리다( J. Derrida)와 하이데거(M. Heidegger), 로런스(D. H. Lawrence)의 예술론과 진리관을 비교하면서 전통적 리얼리즘론의 근거를 이루는 반영론과 재현주의를 재검토한 백낙청, 언어의 물질적 힘과 예술적 창조 자체의 ‘혁명성’을 통해 반영론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정남영(鄭男泳), 언어와 수사학의 주제를 리얼리즘론과 연결하려는 방민호(方珉昊)의 논의를 간략하게 언급한다.16) 이렇듯 반영론과 재현주의를 새롭게 검토하는 논의가 당시 한국문학사의 지평에서 적극적으로 수용되고 전개되었다면 ‘리얼리티’ 및 리얼리즘 논의는 훨씬 풍부하게 이루어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당시 논쟁의 일부는 리얼리즘에 의한 모더니즘 인식, 혹은 모더니즘에 의한 리얼리즘 흡수라는 대립적 구도 속에 흘러갔다. 이 격렬한 토론의 과정은 고압적인 민중주의, 공식화된 리얼리즘, 미적 근대성의 의미를 비판하고 점검하는 데 일정한 역할을 하였으나 ‘리얼리티’의 의미를 다양하게 살피는 리얼리즘론의 심화와 쇄신으로 나아가기 쉽지 않았다.17)

리얼리즘론의 쇄신을 갈망하는 치열한 논쟁이 그 당시 더이상 진전을 이루지 못한 원인은 여러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중의 하나는 문학사 속에서의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대립구도를 현재의 문학지형 속에 옮겨오는 비평적 도식이다. 90년대 전개된 리얼리즘-모더니즘 논쟁을 종합적으로 토론하고 극복하려는 최원식의 ‘회통론’ 역시 그런 의미에서 다시 새겨봐야 한다.18) 최원식은 “리얼리즘/모더니즘의 창안된 정체성을 떠나 작품의 실상으로 직핍하면, 리얼리즘의 최량의 작품들은 통상적 리얼리즘을 넘어서는 순간 산출되었으며, 모더니즘의 최량의 작품들도 통상적인 모더니즘을 비월(飛越)하는 찰나에 생산되었다는 것에 다시금 주목할 필요가 있다”19)라고 주장하였다. 최원식의 제안은 리얼리즘 논의의 오랜 갈등을 ‘근대의 적응과 극복’이라는 이중과제의 문제의식으로 옮겨 사유하려는 의욕적이고 야심찬 시도를 보여준다. 근대가 품은 모순을 직시하려는 그의 시도는 1930년대 모더니즘 소설이나 ‘중도적 성향’의 작가들이 머금은 문학의 사회성을 풍요롭게 읽어내는 데 기여하였다. 소설사에서 김유정(金裕貞)과 박태원(朴泰遠) 이태준(李泰俊) 채만식(蔡萬植)에 대한 균형있는 해석 역시 이러한 논의의 성과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한국근대문학사의 이분적 도식을 넘어서려는 그의 시도가 다시 끌어들이는 대립의 구도일 것이다. 이 논의에서 ‘회통’의 전제로 소환된 ‘통상적 의미’의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개념은 그 자체로 많은 균열을 갖고 있다. “모사론/비모사론의 방법적 대립에다 근대극복/근대비판이라는 역사관의 대립을 추가”20)한 이 구도는 리얼리즘을 관습적인 개념 속에 집어넣고 그것을 다시 해체하는 안이한 작업으로 갈 수 있다. 카프 비평 이래로 우리 문학비평사에서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이 일정한 기간을 두고 서로 긴장관계를 일으키고 생산적인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다시 80년대 문학과 90년대 문학의 대립이라는 구도로 옮겨오면 “문학사적인 주류와 관행을 과녁 바깥으로 완전히 내몰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제일의 표지로 삼”21)게 되는 문제점을 피하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회통은 갈라진 지점을 껴안는 해결책이 아니라 문제의 기원을 들여다보는 출발점으로 다가온다.

다소 길게 전사(前史)를 짚었지만 90년대 문학비평담론 속에서의 리얼리즘 논쟁사는 ‘가치지향성’이 소멸되는 과정이 아니라 오히려 ‘가치지향성’을 지향하는 담론이 현실과 벌여야 하는 고투의 순간들을 보여준다. 2000년대 이후 창비의 문학담론은 분단체제론과 87년체제론, 이중과제론, 세계문학론, 동아시아문학론, 문학과 정치, 장편소설론 등 다양한 주제를 경유하며 리얼리즘 논의를 펼쳐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80~90년대 문학사적 논쟁의 순간들이 드러낸 갈등의 쟁점을 학술적 해석 속에 체계화하고 대중적으로 가시화하지는 못했던 듯하다. 결과적으로 90년대의 리얼리즘에 대한 문학사적 논의는 자료의 객관적인 해석이 생략된 채 표절 논란에 쉽게 연루되었다. 리얼리즘 논쟁이 남긴 갈등의 지점을 지금의 문학을 사유하는 비평의 쟁점으로 살리는 것은 이제 필자를 포함한 후학들의 비평적 몫으로 고스란히 돌아온 셈이다. 문학사 안에 끈질기게 존재하는 상호배타적인 이항대립 구도를 비판적으로 통찰하면서 새롭게 문학을 사유하는 길이 필요한 것이다. 표절 논란과 문학권력 비판을 덧입은 90년대 문학비평담론은 이렇듯 쉽지 않은 과제를 지니고 우리 곁으로 귀환하였다.

 

 

3. 여성, 고유한 개별자의 삶

 

90년대의 신경숙 문학은 서로 다른 이념적 성향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허물고 만난 ‘명분도 갖춘 화해와 통일의 상징’에 불과한가. 창비의 ‘가치지향성’ 폐기를 단정하는 이러한 주장의 바탕에 리얼리즘 논의를 단순화하는 진영논리와 문학사 내부에 존재하는 문예사조사적 시각의 오랜 관습이 동시에 작용하고 있다는 점을 앞에서 살펴보았다. 그 연장에서 당대 신경숙 소설에 대한 90년대의 비평적 평가들이 일관된 상찬으로 ‘행복한 합치’를 보였다는 주장들 역시 세심하게 살펴야 한다. 작품에 대한 호평이라도 각자 바탕은 다를 수밖에 없으며 비평에서는 어떤 근거로 작품의 성취를 평가했는지가 더 중요하다. 작품에 대한 상찬만이 있었다는 것도 무리한 일반화이다. 뛰어난 작품으로 거론된 『외딴 방』(1995)만 하더라도 성취와 한계는 당시 비평에서 함께 논해졌다. 가령 염무웅(廉武雄)은 이 작품의 성취를 인정하면서도 문체의 감상성, 소설 속 ‘희재언니’의 형상화에 대해 비판하였으며 백낙청 역시 작품의 성취와 함께 인물형상화나 지역감정을 다루는 측면에서 ‘산업역군의 풍속화’로서 완벽에 미달한 부분들을 지적하였다.22)

90년대 신경숙 소설을 읽는 비평의 관점을 주도했던 것은 ‘내면성의 문학’에 대한 고찰이라고 할 수 있다. 황종연과 박혜경(朴惠涇)의 분석이 대표적인데 여기서 ‘사인성(私人性)’이라는 명명은 신경숙 소설의 ‘내면성’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인용되었다. 황종연은 신경숙의 초기 소설들에 나타난 ‘개인적 경험의 특수한 세목들’과 ‘동화되지 않는 타자의 존재’를 90년대 문학의 중요한 특성으로 부각한다.23) 그의 분석에 따르면 신경숙 소설은 가족관계에 의해 떠받쳐지는 폐쇄된 친근성 또는 동일성의 세계에 강한 애착을 드러내며 ‘모성’ 역시 이에 호응하는 가치가 된다. 박혜경도 “90년대 문학이 보여주는 사인성의 세계의 한 극단에 서 있는 작가가 신경숙”이며 소설에 등장하는 고립된 여성들이 타자와의 관계에서 깊은 절망과 상처를 체험한 사람임을 주목한다.24) 신경숙 문학에 대한 초기의 비평들을 대표하는 두 평자의 글은 감각적이고 유려한 작품 분석을 통해 지금까지 신경숙 소설의 해석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한 논거가 되어왔다.

황종연과 박혜경이 주목한 ‘개인의 내면성’은 신경숙 소설의 개별 인물들이 지닌 심리적 상처와 갈등을 섬세하고 설득력있게 풀어내는 통로가 된다. 그러나 두 평자의 글이 공유하는 ‘내면성’의 담론은 여성인물의 내면을 바깥 세계와 고립된 ‘사적인’ 것으로 한정한다.25) 이는 가족과 고향 역시 철저하게 고립된 여성 타자를 위무하는 아늑하지만 폐쇄적인 동일성의 세계로 읽게 한다. 여성의 ‘내면’을 ‘사적’인 영역으로 집중시키는 담론을 끝까지 밀고 가면 실존적 주체의 체험에 대한 특권적인 해석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작가 자신이 경험한 이야기를 진실하게 표현하면 할수록 그것이 뛰어난 작품성으로 연결되고, 그 체험이 소진되는 순간 태작이 나온다는 안이한 해석에 이르는 것이다. 보수적인 가족주의와 모성의 신비화로 신경숙의 소설을 일관되게 비판하는 논의들 역시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내면성 담론에 기초하고 있다. 여성인물들의 내향적인 성격, 고향과 가족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 속에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순응하는 문제적인 현실인식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이번 표절 논란을 계기로 더욱 격화되었다. 신경숙 소설을 ‘소녀적이고 감상적인 문학’ 혹은 ‘보수적 가족이데올로기의 구현’으로 몰고 가는 과도하고 경직된 논의들이 따져보면 이렇듯 깊은 뿌리를 갖고 있는 셈이다.26)

신경숙의 소설이 재현하는 인물들은 가부장적 삶 속에 존재하는 여성의 현실을 고스란히 담아내면서도 그것에 온전히 귀속되지 않는 독특한 면모를 갖고 있다. 신경숙의 문학이 그려내는 ‘개인’을 복합적인 논의 지형에서 살펴야 하는 이유는 이 ‘개인’에 대한 형상화가 그의 소설들의 성취도를 가늠하는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풍금이 있던 자리』(1993)와 『오래 전 집을 떠날 때』(1996), 『외딴 방』, 『엄마를 부탁해』(2008) 등의 세계와 『깊은 슬픔』(1994), 『리진』(2007)의 세계가 갖는 밀도의 차이는 어디서 오는 것인가. 이러한 격차는 기존의 평론들이 지적했듯이 감상주의의 분출에서도 비롯되지만 무엇보다도 ‘개인’을 다루는 문학적 형상화의 방식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신경숙의 좋은 소설들은 단자화된 ‘개인’이 자신의 방을 걸어 나와 ‘사회’와 만나는 경로를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이 ‘개인’ 자체가 공동체와 관계되어 있다는 사실을 섬세한 문학적 형상화 작업을 통해 보여준다. 장편 『외딴 방』은 그 성취의 정점을 드러낸 작품이다.

장편 『외딴 방』은 단편 「외딴 방」(1988)의 체험을 질료로 다루고 있지만 개인적으로 이 성취의 기원이 되는 것은 「모여 있는 불빛」(1993)27)이라고 생각한다. 이 작품은 신경숙 소설의 체험적 원천이라고 여겨지는 농촌과 가족을 배경으로 글쓰기의 욕망이 어떤 방식으로 독특한 문학적 장치를 이루며 개인의 삶을 풍부하게 그려내는가를 잘 보여준다. 글이 안 써져서 고민하던 ‘나’가 우연히 어머니에게 ‘송아지 사건’의 전모를 듣게 되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나’는 그 사건을 듣고 흥미가 생겨 30매 분량의 짧은 소설을 썼다가 고모에게 뜻하지 않은 오해를 산다. 「모여 있는 불빛」이 가족과 고향에 관련된 가장 내밀한 에피소드를 풀어놓으면서도 자기고백적인 체험으로 환원되지 않는 이유는 사실과 허구의 긴장관계를 포착한 덕분이다. 소설 속에서 ‘이야기’들은 각각의 의도가 ‘실패’하는 과정을 통해 갇혀 있던 세계를 뚫고 다른 세계로 스며든다. 어머니는 ‘나’에게 아버지가 심란한 이유를 설명하느라 송아지 이야기를 꺼냈는데, ‘나’는 그것을 작품의 소재로 삼는다. 내가 쓴 소설은 노부부의 삶을 곡진하게 형상화하는 데 초점이 있는데 생각지 않게 고모의 항의를 받는다. 고모 역시 나에게 집안의 궂은일을 광고하는 것이 소설이냐고 따지지만 사실 옛날이야기 속에 집안 이야기를 섞어 또다른 이야기로 만들어내는 역사는 고모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이처럼 뜻대로 풀려나가지 않는 이야기들의 꼬임 끝에 주인공에게 기습적으로 던져지는 아득한 질문은 “소설이라는 게 뭣이냐?”(96면)라는 물음이다. ‘책 읽는 어린 그녀’가 성장하여 자신의 글쓰기 욕망을 탄생시켰던 헛간으로 되돌아와 신문을 펼쳐들고 ‘소설의 의미’를 곰곰이 되짚어보는 작품의 한 장면은 신경숙 소설의 ‘개인’이 생동하는 현실과 깊이 맺어져 있음을 은유적으로 보여주는 결정적인 대목이다. 그 순간 화자는 문학만을 꿈꾸며 성장해온 한명의 작가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평범한 부모의 딸이고 고모의 조카로서 ‘고달픈 인간 생활’을 마주한다. 화자가 안식을 구하고자 찾아온 고향과 가족은 오히려 소설 쓰는 행위의 근본을 날카롭게 묻는다. 그들은 사실과 허구, 문학과 삶의 긴장관계를 확인시키는 실체로 육박하는 것이다. 화자는 “글의 실마리가 되어줄 것 같았던 그 힐끗의 기미”(75면)가 누군가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소설’이 되기까지는 지난한 고투가 필요함을 생생하게 자각한다.

이 지점에서 소설이 창조하는 ‘개인’을 읽어나갈 때 “개별자를 개별자로 대하며 나의 관념을 덧씌우지 않는 읽기야말로 ‘타자의 윤리학’을 이행하고 낯선이(létranger)를 ‘환대’하는 길”28)이라는 작품 읽기의 태도는 중요한 비평적 참조가 된다. 그동안 신경숙의 소설은 ‘농경공동체’의 상상력과 ‘구로공단 체험세대’의 자장 속에서 작품의 성취가 논의되어온 면이 크다.29) 그러나 작품의 성취는 실존적 주체가 진솔하게 체험을 드러내는 문제로 모두 해명되기 어렵다. 사실관계를 바탕으로 작품 속에서 고유하게 탄생하는 ‘개인’을 그 자체의 개별자로 대하는 것, 그것은 특정 소설에만 필요한 독법은 아닐 것이다. 소설 속의 ‘개인’이 누구나 상상할 수 있는 공감의 인물이 되기란 결국 가장 고유한 인물로 형상화되는 과정을 통해서 가능하다.

「모여 있는 불빛」에서 글쓰기의 욕망은 삶과 관계된 ‘나’를 깨닫게 하는 은유적인 장치이다. 『외딴 방』에서 그러한 글쓰기의 은유는 시제의 변화라는 독특한 서술 장치를 동반하면서 여러 인물들과의 관계 속에서 성장하는 ‘나’의 모습을 생생하게 구축한다. 이처럼 예외적이면서도 전형적인 특성을 동시에 지닌 생동하는 ‘개별자’의 형상화는 백낙청의 「『외딴 방』이 묻는 것과 이룬 것」에서 정치하게 분석된다.30) 평자는 ‘나’가 작가가 되려는 열망을 품고 그것을 실현시켰다는 점에서 소설 속의 다른 여성 노동자들과 구별되지만 상경하는 농촌 자녀들이 마주치는 일반적인 모순 속에 던져졌다는 점에서 경험의 대표성을 지닌다고 본다. 같은 맥락에서 희재언니 역시 ‘나’나 외사촌과 다르면서도 그 시대의 평균적인 ‘외딴 방’ 거주자에 가깝다. ‘나’와 ‘희재언니’는 예외적인 특성을 갖고 있으면서도 삶의 일반적인 범주에서 전형적인 경험을 갖고 있는 고유한 개인의 모습인 것이다. 평자는 희재언니의 기억을 힘겹게 지니고 살아온 ‘나’가 “그녀를 객관화하면서 동시에 그녀와 자신의 일체성 비슷한 것을 깨닫는 경지에까지 도달하”(287면)는 과정에 이 소설이 주는 깊은 감동이 있음을 설명한다. 이 세심한 작품 분석은 ‘일체성 비슷한 것을 깨닫는’이라는 표현을 통해 주인공이 기억과 벌이는 고투가 얼마나 힘겨운가를 전달한다. ‘나’가 가장 힘들어하고 두려워했던 것은 ‘희재언니’를 떠올리고 그녀의 비극적인 삶에 자기 마음을 대입해보아야 하는 순간이다. ‘나’가 과거와의 기억과 싸우며 간신히 ‘그녀’를 객관화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녀와 완전한 동일시는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희재언니와 ‘나’의 최종적 관계는 문자 그대로의 동일시라기보다 참된 의미의 화해이며, 일정한 동일시를 거친 뒤 마침내 그녀와의 작별이 이루어”(288면)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렇듯 그 자체로 존재하는 고유한 인격으로 소설의 인물들을 대하면서 그의 예외성과 대표성이 구축되는 과정을 읽어나가는 비평의 방식은 작품에서 ‘새롭게 생성되는 리얼리티’로 독자의 시선을 이끌어간다. 그 과정은 ‘통상적’으로 거론되어온 재현과 전형의 의미를 넘어서는 독특한 리얼리즘론의 확장을 보여준다.

세계와 관계된 ‘고유한 개별자’를 문학작품에서 만나는 일은 비평의 시야를 어떻게 넓혀주는가. 좋은 작품은 ‘있는 그대로의 삶’을 충실히 보여주면서도 그 삶에 귀속되지 않는 ‘다른 세상’을 함께 보여준다. 표절 논란이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아니지만 신경숙 소설은 보수적인 가족주의의 혐의와 전통적인 모성성을 지향한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 그의 소설 속 인물들이 드러내는 온순하고 내향적인 특성 역시 수동적인 인물형으로 읽히곤 했다. 그러나 그의 소설이 때때로 누설하는 헌신적인 모성은 그 자체로 완결된 이미지라기보다는 균열과 모순을 보여주는 것에 가깝다. 예를 들어 『엄마를 부탁해』를 읽을 때 떠오르는 엄마의 형상은 가족에게 하염없이 소진당하는 희생적인 여성인 동시에 한편으로는 누군가와도 무관하게 자기의 꿈과 욕망을 설계하는 고유한 개별자이다. 소설에서 엄마가 앓는 뇌졸중은 이렇듯 가족이 아는 엄마와 실제의 엄마가 갖는 간극을 드러내는 육체적 증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지점에서 “근대의 이중성이 여성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근대는 여성 앞에서 그 모순적 ‘본질’을 한결 여실히 드러내”게 된다는 말이 뜻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31)

비평이 문학작품을 깊이 이해하고 그것을 통해 삶의 심연을 들여다보고자 하는 충동은 한 작가의 사적인 곤경을 근심하는 것과는 무관하다. 그런 점에서 표절 논란은 신경숙 소설로부터 시작되었지만 신경숙 소설을 넘어서 그동안 비평에 개입되었던 관습적 이해의 방식들을 세세히 돌아보게 한다. 개인과 사회, 남성과 여성,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이념과 욕망 등의 무수한 근대적 이항대립은 90년대를 건너서 사라진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지금의 비평 속에서 참조되고 되돌아왔다. 이 완강한 세계는 지금껏 우리의 문학비평이 제대로 감당해본 적이 없는 표절이라는 가장 예민한 화약고와 엉켜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 그런 점에서 모든 비평은 자신이 작품에 건넨 숱한 말들의 역사와 연결되어 있다. 표절 논란 이후 비평가로서 가장 힘든 시간은 그 말들의 역사를 돌아보고 스스로의 발자취를 확인하는 순간들이었다. 가장 날카롭고 거친 비판의 글을 읽다보면 그 밑바닥에는 작품에 대한 깊은 애정을 지닌 비평들이 무심히 흘리고 갔을 뾰족한 말들의 조각이 나온다. 처음에는 애정을 가지고 발신했을 그 기록들이 어디로 옮겨가고 쌓이고 흩어졌는가를 찬찬히 따라가는 과정이 반드시 소모적이지만은 않을 것이다. 부족한 이 글이 여기 놓일 수 있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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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표절 논의를 합리적인 방향으로 전개하려는 노력을 담은 최근의 글로 황정아의 「표절 논란, ‘의도’보다 ‘결과’가 본질이라면」(창비주간논평 2015.10.7)과 김종엽의 「표절과 자비의 원칙 」(한겨레 2015.10.7), 정홍수의 「쇠스랑으로 다시 발을 찍는 시간: 신경숙씨를 생각하며」(창비주간논평, 2015.10.21)이 있다.

2) 윤지관 「문학의 법정과 비판의 윤리」, 『창작과비평』 2015년 가을호 363면.

3) 장정일 「표절을 보호해야 한다」, 『시사In』 2015.7.25.

4) 90년대 포스트모더니즘 수용과 연관된 표절 논란은 장정일 「베끼기의 세가지 층위」, 『문학정신』 1992년 7·8월 합본호 참조.

5) 『문학과사회』의 좌담(황호덕·김영찬·소영현·김형중·강동호 「표절 사태 이후의 한국문학」, 『문학과사회』 2015년 가을호)이 대표적 사례이다. 좌담 참석자들은 「전설」 해당 대목의 표절 사실을 전제한 후, 윤지관의 논의를 언급하며 「전설」과 「우국」의 영향관계 및 비교 평가를 각자 세심하게 펼치고 있다. 황호덕은 「우국」이 남성적 말하기 방식을 극단까지 몰고 가는 작품이라면 「전설」은 여성적 화법으로 ‘다시쓰기’한 작품이라고 본다(392~93면). 김영찬 역시 「전설」이 “「우국」의 구조를 차용해 그 소설의 남근적 주제를 여성적 시선으로 다시쓰기 한 소설로 볼 여지가 있”(393면)음을 이야기하였다. 최원식은 작품의 논란이 된 대목은 표절이라 하더라도 작품 전체는 “표절관계가 아니라 영향관계”임을 분석하고 있으며(최원식 「우리 시대 비평의 몫?」, 『문학동네』 2015년 가을호 49면) 권희철 역시 “「전설」은 「우국」의 표절이다”라고 확언하면서도 두 작품이 “서로 다른 주제를 갖고 있고 서로 다른 감정들을 다루기 때문에 그것이 이 유사한 구절들조차 미묘하게 바꿔놓고 있는 것”(8면)이라고 말한다(권희철 「눈동자 속의 불안」, 『문학동네』 2015년 가을호 8면).

6) 장은수 「무엇을 표절이라고 할 것인가」, 『문학동네』 2015년 가을호.

7) 그런 점에서 장은수가 비판하며 갈라서고자 하는 정문순의 표절 논의(정문순 「통념의 내면화, 자기 위안의 글쓰기」, 『문예중앙』 2000년 가을호 참조)는 그 나름대로는 일관적인 방향성을 취하며 확장되는 구도를 갖고 있다. 특정 대목의 동일함을 표절로 확정하면서 단죄하는 프레임은 그다음 수순을 취하여 구조의 유사성, 모티프의 유사성, 주제의 유사성 등으로 뻗어나갈 가능성이 많다.

8) 그런데 비판의 진의를 감안하더라도 “세계문학론에 상응하는 작가로 황석영의 문학적 성취를 지지한 것은 옳은 선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와 동떨어진 신경숙 같은 작가가 왜 창비의 옹호대상이었는지는 의문입니다.”(구모룡, 『오늘의 문예비평』 2015년 가을호 좌담 40면 참조)와 같은 대목은 수긍하기 어렵다. 이러한 논의는 자칫하면 작가나 작품을 진영의 논리나 이론의 적용 대상으로 제한할 수 있는 문제점을 보여준다. 이론이 현실에서 산출된다고 하더라도 그 주제에 문학작품이 명확하게 호응하는 것은 아니며 주제적으로 호응한다고 해서 곧장 비평적인 지지를 얻는 것도 아니다. 문제적인 작품의 출현은 항상 이론을 파고들어 그것의 도식과 균열을 사유하게 만든다.

9) 정은경 「신경숙 표절 논란에 대하여」, 『창작과비평』 2015년 가을호 317면.

10) 1980년대와 대립되는 1990년대 문학의 특성을 규정하는 ‘민주화’세대 담론의 도식성과 문제점을 비판적으로 고찰한 최근 논의로는 졸고 「‘가능한 미래’를 성찰하는 문학」, 『창작과비평』 2015년 여름호 17~20면 참조.

11) 장성규 「신화의 종언, 또는 한 시대의 시작: 신경숙을 둘러싼 비평 담론에 대한 비판적 에세이」, 『실천문학』 2015년 가을호 187면.

12) 백낙청 「2000년대의 한국문학을 위한 단상」, 『창작과비평』 2000년 봄호(『통일시대 한국문학의 보람』, 창비 2006, 187면).

13) 최원식 「80년대 문학운동의 비판적 점검」, 『민족문학사연구』 제8호, 1995년 하반기(『생산적 대화를 위하여』, 창작과비평사 1997, 55면).

14) 90년대 리얼리즘 논쟁에 대한 비평적 고찰과 세부적인 주제의 분석은 별도의 지면을 필요로 한다. 90년대초의 리얼리즘 논쟁은 실천문학 편집위원회가 엮은 『다시 문제는 리얼리즘이다』(실천문학사 1992)를 참조할 수 있으며 96~97년의 리얼리즘-모더니즘 논쟁은 최원식의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회통」(『현대 한국문학 100년』, 민음사 1999)과 백낙청의 「2000년대의 한국문학을 위한 단상」, 임규찬의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을 둘러싼 세 꼭짓점」(『창작과비평』 2001년 겨울호)에서 종합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중 임규찬의 논의가 촉발하여 윤지관 황종연이 함께한 리얼리즘-모더니즘 논쟁은 김명인의 「자명성의 감옥」(『창작과비평』 2002년 가을호), 유희석의 「최근 리얼리즘-모더니즘 논쟁에 관하여」(『창작과비평』 2003년 봄호)에서 그 평가를 살필 수 있다.

15) 진정석 「모더니즘의 재인식」, 『창작과비평』 1997년 여름호 152면.

16) 같은 글 173면. 언급된 자료는 다음과 같다. 정남영 「단절의 경험과 창조적 개인」, 『내일을 여는 작가』 1996년 9·10월호 및 「바꾸는 일, 바뀌는 일 그리고 문학」, 『창작과비평』 1996년 겨울호; 백낙청 「로런스와 재현 및 (가상)현실 문제」, 『안과밖』 창간호(1996); 방민호 「정치성·미소니즘」, 『실천문학』 1996년 겨울호 및 「언어·수사학」, 『한국문학』 1997년 봄호.

17) 이론적 논쟁과 더불어 ‘리얼리즘론의 심화와 쇄신’을 시도하는 실제 작품비평의 성과로 백낙청의 작업을 주목할 수 있다. 뒤에서 살피게 될 『외딴 방』론과 ‘진성 모더니스트’의 성과와 한계를 논한 『에세이스트의 책상』론, 그리고 리얼리즘론과 분단체제론의 결합 시도라고 할 수 있는 『손님』론이 그에 해당한다. 「소설가의 책상, 에쎄이스트의 책상」, 『통일시대 한국문학의 보람』, 창비 2006; 같은 책의 「황석영의 장편소설 『손님』」.

18) 최원식의 ‘회통론’에 대한 집중적인 검토로는 백낙청의 「2000년대의 한국문학을 위한 단상」, 임규찬의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을 둘러싼 세 꼭짓점」, 황종연의 「살아있는 혼돈을 위하여」(『탕아를 위한 비평』, 문학동네 2012)가 있다.

19) 최원식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회통」, 『현대 한국문학100년』; 『문학의 귀환』, 창비 2001, 57~58면.

20) 백낙청 「2000년대의 한국문학을 위한 단상」, 『통일시대 한국문학의 보람』 197면.

21) 임규찬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을 둘러싼 세 꼭짓점」, 『비평의 창』, 강 2006, 36면.

22) 염무웅 「글쓰기의 정체성을 찾아서」, 『창작과비평』 1995년 겨울호; 백낙청 「『외딴 방』이 묻는 것과 이룬 것」, 『창작과비평』 1997년 가을호.

23) 황종연 「개인 주체로의 방법적 귀환」, 『문학과사회』 1993년 겨울호 1317면.

24) 박혜경 「사인화된 세계 속에서 여성의 자기 정체성 찾기」, 『문학동네』 1995년 가을호 31면.

25) 심진경은 90년대에 부각된 개인의 ‘내면성’ 담론이 여성작가의 작품을 읽는 데 특정한 도식으로 작용하는 문제점을 비판한다. 그는 90년대 여성문학 및 여성문학담론이 유례없는 활기에 휩싸여 있다가 2000년대에 이르러 갑자기 소강상태에 이르는 비평적 맥락을 분석하며 자서전과 자기고백의 문학, 성장소설을 여성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그것에 과도한 미학적 의미를 부여하는 논의들이 여성문학의 범주를 협소하게 만들었다고 분석한다. 심진경 「2000년대 여성문학과 여성성의 미학」, 『여성과 문학의 탄생』, 자음과모음 2015.

26) 여성문학적인 관점에서 신경숙 소설의 여성인물이 지닌 복합적인 측면에 대해 주목한 사례로 강미숙과 김양선의 논의가 있다. 이 두 평자는 신경숙의 소설의 여성인물이 “가부장적 질서 속에 존재해야 했던 여성인물들의 복합적 반응을 포착한 보기 드문 인물유형”임을 주목하며 신경숙 소설의 모성이나 여성성을 가부장사회의 미덕과 곧바로 연결시키는 도식적인 해석에 반대한다. 강미숙·김양선 「90년대 여성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신경숙과 김인숙의 근작을 중심으로」, 『여성과사회』 5호, 1994.1, 143~46면.

27) 신경숙 「모여 있는 불빛」, 『오래전 집을 떠날 때』, 창작과비평사 1996.

28) 백낙청 「우리시대 한국문학의 활력과 빈곤」, 『문학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일』, 창비 2011, 133면.

29) 김윤식 「농경사회의 상상력과 구로공단 상상력」, 『농경사회 상상력과 유랑민의 상상력』, 문학동네 1999, 142면.

30) 백낙청 「『외딴 방』이 묻는 것과 이룬 것」, 『통일시대 한국문학의 보람』, 창비 2006.

31) 김영희 「페미니즘과 근대성」, 이남주 엮음 『이중과제론』, 창비 2009, 13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