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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김호정 『발부리 아래의 돌』, 우리학교 2018

그 소녀를 생각한다

 

 

장혜령 張慧玲

시인 jaineyre@naver.com

 

 

179_482그 소녀를 생각한다.

1977년 아홉살 되던 겨울, 낯선 남자들이 타고 온 검은 차에 실려 간 아빠와 영문도 모른 채 일별하는 소녀. 아빠는 몸이 아파 병원에 갔고, 병원이 멀리 있어 지금은 아빠를 보러 갈 수 없다는 엄마의 말을 새기는 소녀. 언니와 두 동생과 매일 저녁 “아빠가 건강해져서 빨리 돌아오게 해주세요” 기도하는 소녀. 엄마가 시 읽는 어린 딸을 염려하는 줄도 모르고 뿌시낀의 「삶」을 암송하던 조숙한 소녀.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현재는 언제나 슬픈 것”.

긴 기다림 끝에도 아빠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년 후 아빠는 광주의 한 대학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이모를 따라 도착한 그 낯선 도시에서 소녀는 처음 죽음을 알았다. 바닥에 발이 닿지 않는 부유감 속에서 고개를 숙인 채 걸었다. 소녀는 과묵해졌다. 집에 돌아온 엄마가 묵묵히 제사상 차리는 모습을, 아빠의 영정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상에 놓인 아빠는 정물처럼 고요했다. 소녀의 아버지는 ‘재일교포 간첩단 조작사건’의 희생자 중 한명인 김추백씨다.

잠시 숨을 고른다. 쉽게 읽을 수 있는 기록이 아니다. 쉽게 읽어서도 안 될 시간이다. 그 시간을 소녀는 견디고 살아남아 어른이 되었다. 그 40여년의 시간을 담아 한권의 책을 써냈다.

그녀는 대학에 입학하고 어른이 되고도 아버지가 왜 돌아가셨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날 어머니에게서 아버지가 간첩으로 몰려 억울하게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아버지는 교도소 안 공장에서 작업을 하다 쓰러졌고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한 채 감옥에서마저 추방되었다. 그로부터 열흘 후 아버지는 숨을 거둔다. 어머니는 장롱 속에 20여년 전 탄원서와 판결문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중에는 아버지를 선박 화물칸에 실어 제주로 띄워 보낸 운구 영수증도 있었다. “시체 1구, 운임료 7만원.”

가족은 뒤늦게 천주교 인권위원회를 찾아가지만 당시 그런 문서만으로는 아버지의 무죄를 밝히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로부터 10년 뒤인 2005년,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만들어졌다. 그녀는 진실 규명을 신청하기 위해 증거를 직접 찾기 시작한다. (당시 위원회에 접수된 사건은 1만건이 넘었고, 조사를 착수하는 데만 2년이 넘게 걸렸다.) 진실 규명 결정이 나고도 재판이 개시되는 데만 또 몇년. 그렇게 다시 10년이 흘렀다.

누군가 기억의 조각을 모아 이 진실의 퍼즐을 맞춰주길 기다리기 이전에, 그녀는 자기 기억의 주인이 되어야 했다. 아버지를 둘러싼 사건을 기록한 1만장의 문서를 읽고 또 읽었다. 생존자와 가족, 그들의 지인들을 찾아다니며 사람들이 가슴에 묻어만 두었던 이야기를 들었다. 처음부터 책을 쓸 생각은 아니었다. 그러나 써야 했다. 독재자는 사라졌지만 독재자의 유령이 이곳에 남아 세계를 수십년 전 그때로 되돌리려 하고 있었다.

다른 이유도 있었다. “그런 안타까운 일이 있었구나.” “이제라도 밝혀져서 다행이다.” 주위의 따뜻한 말로도, 대법원의 무죄 판결로도, 죽은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으며 상처는 결코 쉽게 회복되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가 과거로만 남는 것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와 그녀가 마주한 생존자들은 그 시간을 현재로 살고 있었다.

우리가 제대로 대면하지 않은 시간은 언제고 우리를 급습한다. ‘재일교포 간첩단 조작사건’의 피해자 대부분은 제주 출신이었다. 여기서 사건과 무관해 보이는 식민과 4·3, 한국전쟁의 기억이 다시 소환된다. 피해자 중 어떤 이는 식민통치 시절 공부를 하고자, 돈을 벌고자, 혹은 징용으로 일본에서 살아가야 했고 훗날 고향 제주로 돌아와 고초를 겪었다. 어떤 이는 제주에 남았으나 무고한 사람들이 학살되는 것을 보고 가족과 일에만 몰두해 살아갔으며, 어떤 이는 4·3 때 아버지가 처형당한 뒤 빨갱이란 오명을 씻기 위해 기꺼이 우익의 편에 섰다. 피해자들의 서사는, 이 사회의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암흑처럼 우리 발밑에 남아 있다는 증거이다.

책의 후반부는 희생자의 유족이지만, 사건의 타자이기도 한 저자가 또다른 타자들을 만나는 장면으로 채워져 있다. 그중 가장 놀라운 것은 그녀가 일본까지 가서 마주한 사람들의 모습이다. 1977년 일본과 제주를 오가다 간첩으로 몰린 또다른 피해자 강우규씨의 석방을 도운 일본인들이 있었다. 1970년대 일본의 전후세대는 반전평화와 민족차별 문제에 관심을 두고 재일조선인 문제를 방관하는 일본정부에 비판적 활동을 했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들은 피해자가 일본으로 귀환하고 세상을 떠난 지난 30여년간 그 아내의 생활을 돕고 재일조선인 문제에 관심을 둔 실천적 연대로 활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소설가 무라까미 하루끼는 1995년 토오꾜오 지하철 사린가스 사건의 피해자와 범인으로 지목된 신흥종교 옴진리교의 일반 신도들을 인터뷰해 책을 낸 적이 있다.(『언더그라운드』 1·2, 문학동네 2010) 하루끼는 서둘러 가해자를 만들어내고 처벌함으로써 사건을 종결하려는 사회에 문제가 있다고 느꼈다. 그는 피해자가 아니었으나 그들 하나하나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자 했다. 입장이 다르다는 이유로 우리가 대화를 끊는다면 이 사회는 어디로도 더 나아갈 수 없으리라 여겼다.

나는 이 책에서 문득 하루끼의 말을 떠올렸다. 대화를 멈추지 않으려는 이들의 얼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 사회를 전진시킨, 오랜 시간을 기다려서라도 타자와 마주 앉고자 하는 그들의 용기를 생각했다. 이 책을 쓰며 그들의 뒷모습을 끝까지 붙잡고 있었을 한 사람의 절박한 손을 떠올렸다. 하지만 끝내 알 수는 없었다. 그들은 어떻게 타자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끌어안을 수 있었을까. 어떻게 그것을 자기 삶의 일부로 삼아 살아갈 수 있었을까.

아버지는 박정희정권의 국가폭력 희생자였지만 어린 저자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대통령의 죽음 앞에 눈물을 흘린다. 그날 교실에 앉아 있던 수많은 아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녀의 질문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박근혜씨도 아버지가 죽던 날 울었을까. 그녀는 김일성의 죽음 앞에 눈물 흘리던 티브이 속 북한 아이들의 모습에서 기시감을 느낀다. 그것은 언젠가 나도 떠올려봤던 질문이다. 우리의 눈물은 어떻게 다른 걸까. 우리의 눈물은 어떻게 연결되어 있을까.

“그녀 아버지의 복원과 내 아버지의 신원. 두 가지를 뫼비우스의 띠처럼 이을 수는 없다. 그 회귀를 끊어내야 새로운 지평이 열린다. 평평해진 세계 속에서는 아무것도 더할 게 없는 투명한 슬픔들이 어쩌면 조우할지도 모른다.”(27면)

책을 다 읽은 날 밤, 나는 책에 쓰이지 않은 소녀의 이야기를 가만히 떠올려보았다. 눈 내리는 날, 소녀는 꿈을 꾼다. 발자국 하나 찍히지 않은 깨끗한 새벽. 잠에서 깨어 창밖을 내다보니 집 앞 골목에서 빗자루로 눈을 쓸어내는 아빠가 보인다. 손을 흔들어 아빠를 부를까. 그러면 아빠가 사라질지도 몰라. 그래서 부를 수가 없다. 눈이 멎으면 아빠가 사라질지도 몰라. 소녀는 그래서 꿈속의 골목에 오래 눈을 내리기로 한다. 그렇게 기억하기로 한다.

기억은 빼앗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쓰이지 못한, 전해지지 않은, 검열 도장이 찍히고 먹칠이 된 편지들, 찢기고 날조된 기록들 속에서도 어떤 기억은 살아남았다. 독재와 억압 속에서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도 기억을 잃지 않은 한 소녀가 있었다. 그녀가 이제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