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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조성환 『한국 근대의 탄생』, 모시는사람들 2018

‘개벽’이라는 대담한 호명

 

 

황정아 黃靜雅

문학평론가 jhwang61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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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이른바 근대전환기를 돌아보는 우리의 시선에서 어떤 착잡함을 지우기란 쉽지 않다. 때로 그 느낌은 냉철을 가장한 패배의식에 이르거나 앙심을 못 이긴 격분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고난과 저항을 비장하게 재연하며 감상적인 ‘정신승리’를 구가하지 않는 이상, 식민과 분단과 전쟁으로 이어진 근대사의 시발점을 구원하는 일이 간단할 리는 없다. 여기서 ‘구원’이라는 말은 벤야민(W. Benjamin)의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1940)에서 빌려온 표현이다. 그는 역사의 기록이란 실상 야만의 기록이라 하면서도 야만적으로 짓밟힌 과거에 어떤 “은밀한 지침(指針)”이 있어서 그것을 포착하면 패배와 실패로 낙인찍힌 그 과거를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희미한 메시아적 힘”이 우리에게 있고 그 힘을 발휘하도록 과거가 우리에게 요청한다는 것이다.

벤야민이 요약한 이런 근사한 임무에서 영감을 받는 역사가도 많으리라 짐작된다. 역사가가 아니라도 역사에 어떤 간지(奸智)가 있어서 멀리 돌아서라도 정의가 실현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누구라도 품어보았음직하다. 그러나 뒤집어보면 어떤 과거를 패배라 기록하고 있는 현재의 역사 역시 우리가 받아들였기에 존재한다. 우리에게 있다는 메시아적 힘이 희미한 이유도 패배는 패배일 뿐이라는 ‘은밀하지 않은 지침’이 한층 강하게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과거를 구원하는 일은 현재를 구원하는 일마저 요구하며, 역사를 ‘다시 쓴다’는 비유는 단순한 재해석을 넘어 재실행, 곧 ‘다시 행하기’를 지칭한다.

『한국 근대의 탄생: 개화에서 개벽으로』는 이런 어려움에 정면으로 도전하며 야심차게 ‘구원’ 임무에 착수한다. 우선 제목부터가 의미심장한 재해석과 재실행을 함축한다. 저자가 의식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의 탄생’이나 ‘~의 발견’ 등 어떤 시원을 함축한 표현들은 이 무렵의 학계에선 그 인상과 달리 탄생보다 모방과 반복을, 발견보다 번역과 수용을 지시할 때가 많다. 이 책은 탄생이라는 말이 갖는 본래의 면모를 복구하면서 그 새로움의 의미를 이중 삼중으로 증폭시킨다. 일차적으로 이 책의 핵심용어인 ‘개벽’ 자체가 말 그대로 ‘새로운 세계를 열자’는 뜻이다. 더욱이 동학에서 출발한 ‘개벽파’는 서구적 근대의 새로움과는 다른 새로움을 지향했으므로 말하자면 ‘새로운 새로움’이라는 의미가 더해진다. 탄생의 새로움은 저자가 수행하는 개벽연구에도 적용된다. 근대전환기를 개화냐 척사냐 하는 구도에 가두어 결과적으로 개화파를 승인하게 만드는 관행을 깨고 개벽파를 이 시기의 핵심 주체로 새롭게 구성해내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생겼다는 성경말씀까지 거슬러가지 않아도 이름이 갖는 힘, 더 정확히 말해 ‘호명(呼名)’이 갖는 힘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책을 비롯한 개벽연구가 거둔 일차적인 성취는 개벽을 개벽이라 부른 바로 그 대담한 호명이다. 개벽이라는 말 자체는 “19세기말의 조선 민중들이 유학적 세계관과는 다른 ‘새로운(modern) 세계를 열자(開闢)’는 의미로 사용한”(16면) 것이지만, 오늘의 개벽연구는 어쩌면 개화나 척사보다 더 무참한 실패로 묻혀 있던 이 과거의 말에서 ‘은밀한 지침’을 발견한다. 그리하여 어떤 반어(反語)나 비유도 아닌, 생생하게 살아 있는 이름으로 다시금 개벽을 불러낸 것이다. 이 책에서 동학을 비롯한 근대전환기 개벽파의 계보는 여기서 숭고했으나 패배한 혹은 패배했으나 숭고한 저항을 넘어, 독자적이고 전면적인 문명전환을 기획한 사상운동으로 제시된다. 문명전환 운동으로서의 개벽파는 당시에도 “개화파나 척사파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한국사회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126면)했을 뿐 아니라, 서구 따라잡기라는 기본적으로 개화파적인 전망에 갇힌 현재를 구원하는 일에도 핵심 자원이 될 수 있다. 따라서 ‘개벽’이라는 대담한 호명은 단순히 연구대상을 새롭게 보는 문제가 아니라 보는 행위마저 새롭게 만드는 문제, 다시 말해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도입하는 일이다.

이 책은 개벽파의 특이성을 주로 두가지 전선에서 입증하고자 한다. 하나는 전통 혹은 중국사상과의 대비인데, 동학이 재유교화가 아닌 탈유교화였고 중국의 도학(道學)과 다른 천학(天學)이었음을 내세우는 등 “개벽을 주창한 동학사상 자체가 한국사상사에서의 개벽”(110면)임을 강조한다. 특히 “탐구의 대상이 아니라 외경의 대상”(37면)으로서 ‘하늘’에 초월성을 부여하면서도 “하늘과 인간이라는 두 중심”을 설정하여 한층 역동적인 차원을 개시했다는 논의가 흥미롭다. 다른 하나는 서구적 근대문명과 대비시키는 방식으로, 서구적 근대화에 몰입한 개화사상과의 차이라든지 실리나 실용과 다른 실심(實心)으로서의 실학개념, 이성 중심의 근대성이 아닌 영성 중심의 근대성, 자기수양을 내포하는 문명전환으로서의 혁명관 등을 논한다. 여기서도 초월지향성이라 할 수 있는 ‘영성’이 합리성에 근거한 제도변혁보다 더욱 강력하고 발본적인 실천을 추동한다는 점이 강조되어 있다.

이런 논의들은 때로 엄밀한 논증이라기엔 다소 느슨하고 기계적이지만 더 정교하고 두텁게 다루어야 할 만큼 중요한 주제임을 설득하기에는 충분하다. 재유교화와 탈유교화를 가르는 기준은 어떻게 설정되어야 할까, 동학의 천학이 말한 하늘의 ‘불완전성’에는 어떤 다른 의미가 함축되어 있을까, 개벽파의 초월성을 서구이론의 초월성 비판에 노출시키면 어떻게 될까, 개벽파의 민주주의나 평등은 오늘날의 개념과 어떻게 다를까, 개벽파의 생명사상은 근대적 생명정치에 어떤 대응논리를 제공해줄까 등등 여러 파생적인 질문들도 생기는데 그것들을 파고드는 과정에서 뜻밖의 발견이 이어지리라 기대하게 된다.

그런데 ‘개화에서 개벽으로’라는 부제가 펼쳐놓는 지평에 비해 제목의 ‘한국 근대’는 오히려 시야를 좁히는 느낌을 준다. 서론에서 저자는 일본과 달리 한국은 왜 근대화되지 못했는가 하는 오랜 질문의 답으로 “개화적 근대화에는 뒤졌을지 몰라도, 개벽적 근대화로는 동아시아에서 제일 앞섰다”(20면)는 논의를 준비했노라고 말하지만, 이렇게 답을 함으로써 오히려 그 질문을 ‘질문다운 질문’으로 만들어주는 효과가 발생한다. 근대화에 따른 온갖 문제들이 산적한 오늘의 시점에서 볼 때 ‘한국은 왜 근대화되지 못했는가’보다 더 무의미한 질문이 있을까. 개벽을 근대와 연결하고 이를 한국적 근대(혹은 ‘자생적 근대’나 ‘토착적 근대’)라 부름으로써 근대 개념을 둘러싼 불필요한 논란도 생길 수 있다. 저자는 근대를 역사적 시대구분이 아닌 ‘새로움’의 의미로 사용하고자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의미의 혼란도 혼란이고 전체 논의에서 역사성이 소거될 우려가 커지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한국적인 것을 서구적인 것과 대립관계로 논하는 방식은 서구를 단순화할 위험이 많은데 이 책에도 서구, 특히 서구적 근대가 쉽게 처리되는 대목들이 있다. 저자는 서구적 근대를 이미 숱하게 비판받아온 계몽주의적 합리성이나 폭력적 반(反)생명주의 등으로 묘사함으로써 한국적 근대의 우월성에 간단히 손을 들어주는가 하면, 서구적 근대의 핵심가치로 널리 인정받는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한국적 근대가 유교전통과 갖는 차별성을 논하는 데 동원할 뿐 본격적인 대결 소재로 삼지 않는다. 무엇보다 서구적 근대를 규정하는 핵심 요소이자 그런 근대의 극복에 있어서 핵심 난관인 자본주의 문제에 이렇다 할 언급이 없는 점은 이 책의 커다란 공백이다.

그런 점에서 ‘개벽’을 서구적이든 한국적이든 ‘근대’에 매어두지 말고 차라리 ‘근대극복’의 전망과 연결하되 그 도정에서 근대화의 압력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를 묻는 편이 저자의 문제의식에도 더 부합하리라 본다. 그럴 경우 개벽사상의 중요성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개화나 척사 등 당대의 여러 세계관과 사상만이 아니라 오늘날의 근대 비판론이나 탈근대 이론들과 대비하는 연구도 필수작업으로 요청될 것이다. 과거를 ‘구원’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 과거가 스스로 이미 구원되어 있음을 알아보는 일이기도 하지만 또 어느 정도는 과거로 하여금 스스로 제기했으나 풀지 못한 문제들에 다시금 마주 세우는 일이기도 하다. 개벽연구가 개벽사상의 단순한 반복일 수 없는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