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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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런 홀링허스트 『아름다움의 선』, 창비 2018

‘레알’ 심미주의자의 동성애 이야기

 

 

박여선 朴麗仙

영문학자 kirillo7@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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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의 선』(The Line of Beauty, 전승희 옮김)은 1982년 포클랜드전쟁 승리의 여세를 몰아 새처(M. Thatcher)가 이듬해 총선에서 보수당의 압승을 이끈 시점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민족주의와 반이민정서 및 포퓰리즘을 활용하고 자유주의 시장경제를 지향한 새처주의(Thatcherism)는 소설 전체에 퍼져 있는 공기와 같다. 새처가 창조해낸 영국적 정체성은 찬란했던 대영제국에 대한 민족적 향수와 무자비한 자유시장경제원리를 결합한 모순 위에 서 있었다. 당시 영국 국민의 상상력과 정서는 영광스런 과거에 대한 짙은 향수가 묻어나는 상류계급 중심의 머천트아이보리(Merchant-Ivory)류의 영화나 비슷한 종류의 텔레비전 사극들이 쏟아내는 전원적이고 아름답고 고상한 영국의 이미지들에 지배당해 있었다. 앨런 홀링허스트(Alan Hollinghurst)는 이런 역사적 맥락을 고스란히 포착한다. 영국성에 대한 새처주의의 시그널은 이중적이었는데, 인종적·문화적으로 배타적이면서도 계급적으로는 시장지향적 자유주의를 지지했다. 소설에서 레바논 출신의 성공한 사업가인 베르트랑과 그 아들 와니가 인종적으로 문화적으로 은밀하게 조롱과 혐오를 받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재력 덕분에 최상위계급에 받아들여지는 이유다. 작가는 이러한 시대의 이중성을 다양한 층위에서 엮어내면서 아이러니를 주요 서사무기로 활용한다. 소설의 중심인물인 게이 청년 ‘닉 게스트’는 ‘배타’와 ‘섞임’ 사이에서 서성거리는 인물로 그의 이중성은 이 소설의 가장 흥미롭고 문제적인 지점이다.

홀링허스트는 2011년 『빠리리뷰』(The Paris Review)와의 인터뷰에서 이 작품을 통해 보수당 토리(Tory)가 만들어낸 돈과 권력의 세계에 미혹된 “잘못된”(fallible) 한 개인과, 이 보수가 만들어낸 세계가 겪고 있는 내적 붕괴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고 한다. 런던 상류계급이 누리는 권력, 자본력, 호화로운 문화를 동경하며 경계인으로서 그 주변을 배회하는 주인공 닉은 이 세계에 초대받았다기보다 스스로 초대한 ‘손님’으로서 상류문화를 동경하는 중산층 속물이자, 영국적이면서도 이국적인 미를 추구하는 심미주의자, 고전주의자이면서 동시에 포스트모던주의자, 유색인 애인을 선호하는 백인 동성애자다. 이 문제적 인물의 의식을 중심으로 작가는 상류층 보수세계 내부에 존재하는 계급적·인종적·성적 차이에 관한 모순들을 날카롭게 비판하는데, 그 비판의 방법은 아이러니다. 닉의 이중성과 긴밀히 연결되며 아이러니가 다층적으로 구축되는 것 또한 이 소설의 흥미로운 점이라 할 수 있다. 작가는 심지어 아이러니조차도 아이러니하게 제시한다.

아름답고 고급하고 화려한 것들에 대한 닉의 순전한 탐미적 취향은 미적 가치가 문화적 자본이 되는 사태에 일부러 무심한 듯해서 읽는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데, 다른 한편 닉의 미학주의에는 순수한 데가 있기도 하다. 그에게 미의 소유 여부는 돈과 자본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이의 시선과 취향과 감상능력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즉 미의 ‘소유’란 아름다움을 알아보고 느끼고 향유하는 것이다. 실제로 소설에 등장하는 상류계급 인물들은 닉이 소유한 미적 감수성이나 대상의 예술적 가치를 알아보는 지식 및 취향이 부족하다. 그들은 대상에 대한 물리적 권리를 그저 ‘소유’하는 데 만족하는데, 닉은 그런 물건들을 소유할 재력은 없지만 그들의 진정한 가치를 알고 음미할 능력이 있다는 점에서 자신이야말로 ‘향유’함으로써 ‘소유’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닉이 은밀히 즐기는 자신만의 아이러니인데 작가는 닉의 이런 아이러니한 자부심, 아이러니 그 자체에서 의미를 찾는 그의 순진함과 무력함을 다시 아이러니하게 부각한다.

작가는 보통의 “당신은 정치적으로 어느 쪽이냐”라는 질문을 “당신은 미(美)적으로 어느 쪽이냐”라는 질문으로 대체한다. 이 질문은 정치적 정체성 대신 미적 정체성을 삶의 기반으로 삼겠다는 닉의 의지를 표현한다. 그러니 닉에게는 동성애 문제에서도 정치적 차원에서의 퀴어 정체성이 아니라 미적 차원에서의 퀴어 정체성이 더 중요하다. 특히 이 질문을 부제로 쓴, 마약과 문란한 성행위 등 온갖 문제적 행각들이 자세하게 묘사되는 2부에서 닉이 도덕적 원칙에 종속되지 않으려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닉은 헨리 제임스(Henry James)의 인물들이 도덕적으로 점점 추해져갈수록 오히려 서로를 더욱더 아름답게 보는 아이러니에 대해 말하는데, 2부에서 묘사되는 닉 자신의 인생이야말로 이러한 아이러니의 체화나 다름없다.

그런데 작가는 여기에 또다른 아이러니의 겹을 놓는다. 온갖 굴욕을 당하면서도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닉에게서 엿보이는 어떤 순수한 갈망, 신비로운 것, 도달할 수 없는 것, 위험한 것, 존재를 풍요롭게 해주는 비밀, 도덕이나 윤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 시간을 정지시키는 환상, 이 환상을 ‘소유’하기 위해 심지어 진실에 저항해야 한다면 그것도 어쩔 수 없다는 닉의 지극한 심미주의적 태도는 혐오감과 동시에 호기심을 발동하기 때문이다. 죽음까지 감싸 안는 닉의 그러한 충실함에서 역설적으로 어떤 비감이 생겨난다. 일생 무언가를 위해 한번도 싸워본 적 없는 닉은 그런 자신을 자조하면서도 역시 자신의 길을 가겠다는 태도를 고수하며 결국 자신의 길을 가고야 만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렇듯 모든 의미의 층에 아이러니가 겹겹이 쌓여 있으니 작품을 읽으면서 끝까지 혼란스러웠던 문제는 이 소설에서 동성애를 통해 제시되는 인종, 문화, 감정, 계급, 살의 ‘섞임’이 결국 새처주의의 동일성을 지향하는 문화이데올로기에 어느 정도나 저항적인 것이며 이러한 ‘섞임’이 궁극적으로 어느 정도나 유의미한 해방과 자유의 가능성으로 제시되고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소설에서 작가는 사랑이 세계를 엮어주는 것이며 서로 다른 세계가 섞이는 중요한 경로는 사랑이라고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닉이 지닌 한계를 아이러니하게 계속 드러내는 동시에 또한 꾸준하게 닉이 타자의 세계와 접촉하면서 자신의 세계를 만들고 성숙하는 과정을 그려내기 때문이다. 물론 또다른 아이러니의 층위에서 이는 그가 닳고 타락하고 소진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러나 적어도 1부에서 닉은 리오와의 사랑을 통해 불가능해 보이는 ‘섞임’의 가능성을 현실화할 여지가 있었다. 문제는 이들의 사랑이 집 없는 사랑이었다는 데 있다. 집이 없다는 것은 자아를 표현하고 누릴 장소, 영역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길에서 시작했던 그 사랑은 끝내 길에서 끝나버렸다. 이 시대가 그들의 사랑에 허락한 조건에는 지속적 관계를 가능케 할 집이나 생활 같은 것들에 대한 전망은커녕 상상조차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집 없는 사랑은 마치 고급스런 집을 모방한 호텔 같은 아파트에서 사랑을 나누는 닉과 와니의 관계에서도 반복된다.

경계에서 서성대다 결국 페든가에서 추방당한 닉은 마지막 장면에서 자신의 모든 환상의 결정체였던 페든가 거리의 길모퉁이를 바라보며, 아름다운 것은 ‘길모퉁이’가 아니라 ‘길모퉁이라는 사실’임을 깨닫는다. 길모퉁이는 길의 끝이자 동시에 다른 길과 맞닿아 있고 한 길의 끝은 새로운 길의 시작이다. 에이즈 검사 결과를 기다리던 닉에게는 그것이 삶과 죽음의 갈림길이지만 그 현현의 순간에 그는 안타까운 자신이 사랑의 길 위에 서 있음을 발견한다. 높고 낮은 것을 평행으로 연결하는 아름다움의 선, 우아하고 아름다운 것과 상스럽고 저속한 것을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섞는 아름다움의 선을 추구하는 닉, 그것이 도덕적·정치적·현실적 진실에 저항을 요구할 수도 있으므로 심미주의자의 용기가 필요하다는 닉, 그것이 그가 찾은 사랑에 이르는 길이라 암시하는 닉. 이 문제적 인물의 모든 잘못된 오류들, 그 오류들의 재현에 촘촘히 스며든 아이러니로 인해 무자비하게까지 느껴지는 홀링허스트의 우아한 스타일이, 정말 생각할수록 지독한 작가의 미학적 리얼리즘이, 책을 덮고도 한동안 오랜 반향으로 남는다.

박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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