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문학초점

 

 

이 계절에 주목할 신간들

 

 

안현미 安賢美 시인.

시집 『곰곰』 『이별의 재구성』 『사랑은 어느날 수리된다』 『깊은 일』 등이 있음.

gomgom69@naver.com

 

오연경 吳姸鏡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쓰는 기계의 존재론」 「김수영, 신화인가 현재인가」 등이 있음.

korin2@hanmail.net

 

전기화 田己和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황정은 다시」 「부풀어 오르는 모녀서사」 등이 있음.

octobervoice@naver.com

 

 

왼쪽부터 오연경 전기화 안현미 Ⓒ 신나라

왼쪽부터 오연경 전기화 안현미 Ⓒ 신나라

 

 

오연경 안녕하세요. 가을호 문학초점 진행을 맡은 오연경입니다. 전기화 평론가, 안현미 시인과 함께 이 계절에 주목할 만한 신간들 이야기를 나눠보겠습니다. 오늘 다룰 책은 요즘 문학의 경향성과 변화, 세대 간의 차이를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작품들 같습니다. 두분 반갑습니다.

 

전기화 두분 선생님과 함께 대화 나누게 되어 기쁘고 반갑습니다. 지난 계절 나온 단행본 가운데 널리 읽히길 바랐던 작품들이 있었고, 퀴어문학의 폭발 또한 2020년 한국문학의 현장에서 누락되어서는 안 될 지점이라고 생각하며 좌담을 준비했습니다.

 

안현미 제가 20세기 기반의 감수성의 소유자라서요,(웃음) 여섯권을 따라 읽는 것만으로도 쉽지는 않았습니다. 소박하게나마 제가 읽은 느낌을 나누려고 용기를 내서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박선우 『우리는 같은 곳에서』(자음과모음)

 

189_361

오연경 먼저 박선우 소설집 이야기를 나눠보겠습니다. 퀴어서사로 주목받고 있는 작가의 첫 소설집인 만큼 평가와 반응이 어떨지 궁금하더라고요. 여덟편의 단편이 실렸는데 어떻게 읽으셨나요.

 

전기화 그간 문예지를 통해서도 몇편 따라 읽어왔는데 이렇게 한권으로 엮이니 작가의 스타일이 분명하게 느껴져서 좋았습니다. 문장이 아름답고 서정적인데, 특히 도입부를 쓰는 방식이 독자들로 하여금 호기심을 가지고 들여다보고 싶게 한달까요. 읊조리는 주체의 내면을 지속적으로 응시하는 소설도 있지만, 도입부에서 그려진 내면에서 빠져나와 다른 이의 시점으로 옮겨가 서사를 전개해가는 등의 변주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안현미 작가 스스로 인물을 설정할 때 성별을 가장 고민했다고 고백(‘작가의 말’)하는 데서 퀴어소설을 쓰는 사람으로서의 고민이 엿보였습니다. 2018년에 등단해 불과 2년 만에 소설집을 낼 정도이니 주목받는 신예라는 점을 새삼 느꼈어요. 퀴어가 우리 문학에서 대세라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트렌드처럼 느껴지긴 하는데요, 오늘 다루는 시집과 소설도 대체로 퀴어서사에 얽혀 있습니다. 강혜빈 시집은 적극적으로 자기 정체성을 내세우고 있고, 양안다 시집도 실제 시인의 의도는 그렇지 않을 텐데 퀴어적으로 읽혀서 혼란스러운 면이 있었어요. 하지만 트렌드라고 해서 나쁘다는 뜻은 아니고요, 박선우가 “이제 나는 ‘나’의 성별을 고민하지 않는다”(249면)라고 말하게 되기까지의 섬세함과 단단함이 저한테 잘 와닿았습니다.

 

오연경 저도 ‘웰메이드’라 할 수 있을 만큼 단편소설로서의 상징성이나 압축성이 잘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문체나 감정을 묘사하는 결이 굉장히 섬세해서 시를 읽는 것 같았어요. 「휘는 빛」을 보면 “이 세상에는 누를 수 있는 버튼들과 그 순서가 정해져 있는데, 멋대로 하나를 건너뛰어버리면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196면)갈 수 없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여기에 실린 소설들은 어떻게 보면 이미 누를 순서를 놓친 버튼을 다시 누르려고 노력하는 이야기 같아요. 멋대로 건너뛰어버렸다는 죄책감과 이제라도 눌러야 한다는 과제를 끊임없이 현재로 소환해서 지나간 일들을 완수하려 하죠. 이미 끝나버린 관계 같아도 편지라는 형식으로든 우연한 만남으로든 유령의 형태로든 다시 현재로 이어지게 되는 독특한 서사성을 지녔다고 생각합니다.

 

전기화 분명 박선우는 형식적인 측면에서도 주목할 만한 소설들을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퀴어 남동생에게 누나가 접근해가는 방식을 취한 「고요한 열정」은 누나 ‘연수’에게 초점이 맞춰지는데, 연수가 동생 ‘연후’의 자리에 가서 서보기까지의 과정에서 거리감과 이물감도 느껴지고, 뒤늦은 반성과 자기객관화를 거쳐 뜻밖의 이해에 도달하는 흐름이 설득력 있었어요. 비록 그것이 연후의 입장에서는 완전한 오해일지도 모를 일이지만요. 윤이형의 「루카」(『러브 레플리카』, 문학동네 2016)가 떠오르기도 했는데, 「고요한 열정」에선 연후가 부재하는 애도의 대상이 아니라, 그 자신도 대학원생이자 작가이자 생활인으로서 자기 몫의 삶을 알뜰하게 꾸려가는 인물로 나오는 점이 좋았고요. 연후와 연수의 관계는 단절되지 않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조정되어야 할 삶의 문제로 남겨지는 셈이라, 이렇듯 관계의 미래를 떠올릴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오연경 최근 젊은 작가들의 소설에서 방법론적으로 솔직하고 과격한 표현들을 많이 보게 되는데 박선우의 소설은 확실히 좀 다른 결을 지니는 것 같습니다. 작품마다 확실한 메시지가 있고 그것을 소설의 구조 속에서 자연스럽게 녹여내려 한다는 점에서 정공법으로도 생각됐어요. 인물들이 늘 끝까지 최선의 노력 상태에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관계 자체에 대한 이러한 충실성이 일종의 주체의 윤리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소수자로서의 당사자적 경험과 감정은 고유한 주체성이지만, 관계 맺음에 관한 고민은 결국 보편적인 것이기도 한데 박선우는 다양한 접근법을 활용해 이 차원에 이르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들어요. “감히 바랄 수 없는 일을 소망하는 심정”(248면)이라는 작가의 말을 읽으며 누구나 누릴 수 있다고 여기는 평범한 일상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얼마나 평범하지 않은지, 얼마나 소중하고 기적 같은 일인지 새삼 느꼈거든요. 그런데 만약 이 소설집이 퀴어문학이 아니었다면 그냥 작가가 예민하고 섬세한 감각의 소유자구나 정도로 생각했을 것 같아요. 즉 이 소설을 보편적인 사랑의 한 갈래나 관계 맺기로 확장해서 읽는 것이 퀴어문학의 어떤 고유성을 소거하는 일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다고 퀴어서사로만 초점화한다면 너무 손쉽게 하나의 마스터키를 쥐는 일 같고요, 작품의 결을 다양하게 읽되 특수성에 대한 존중을 유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되더라고요.

 

안현미 세권의 소설집 가운데 박선우 소설집이 가장 간절하고 섬세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런데 따뜻하고 부드러운 소설들이지만, 여덟편이 서로 겹쳐지고 유사하단 인상도 있어서 왜일까 하는 의문을 품기도 했습니다. 「빛과 물방울의 색」을 읽으면서는 일본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2004)가 떠올랐는데요, 전반적으로 이 작가의 톤은 한국영화로 말하면 「비 오는 날의 수채화」(1989)와 비슷한 게 아닌가 싶어요. 이성애를 당연한 것으로 상정하는 편견을 지우고 나면 사랑과 관계에 대한 여러 엇비슷한 이야기로 읽힐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퀴어라는 키워드가 있기 때문에 같은 사랑이라 해도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드러낼 수 없었던 이들의 이야기로서 읽게 되고 문학적으로 새롭게 와닿지만요.

 

전기화 인물의 퀴어 정체성이나 성별뿐 아니라 시점(視點)과 같은 소설의 형식 또한 예민하게 자각하는 작가 같아요. 등단작이자 표제작이 된 「우리는 같은 곳에서」는 남편과 아내, 남편의 옛 애인인 ‘영지’가 만나는 내용으로 여기서 여러차례 시점이 교차됩니다. 먼저 1인칭 ‘나’(영지)의 목소리로 시작하는데, 이어 “거기까지 말한 뒤 영지는 고개를 푹 숙였다”(47면)라고 하면서 새로운 인물이 ‘나’로 등장해요. 마지막에는 그들을 호명하는 서술자가 등장하고요. 이런 식으로 교차하는 시점의 효과를 잘 활용해서, 세 인물 사이에서 우연하게 빚어지는 아슬아슬한 온기도 포착해낼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동시에 불필요한 면도 생기는 것 같은데요, 예를 들어 「휘는 빛」에서는 ‘지수’의 불륜 설정이 나오고, 「고요한 열정」에서는 ‘연수’ 전남편의 불륜이 회고적으로 삽입됩니다. 인물들 모두에게 나름의 사정과 각각의 서사를 부여하기 위한 시도 같기도 하지만, 반드시 필요했는가 하는 의문이 남고 다소 도구적인 설정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오연경 서사적으로 반드시 필요했는가 하는 문제도 있지만, 관계를 주제로 삼으면서 모든 것을 개인 대 개인의 감정 문제로 수렴시키고 몰입하는 경향이 있어 통속성을 띠는 것 같아요. 하지만 표제작을 보면 순간적인 감정과 두려움을 잘 포착했기 때문에 세 사람의 통속적 관계가 통념에 갇히지 않는 순간을 그려낼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내일이면 “다시는 서로 만나려 하지 않을”(69면) 사이지만 그 밤, 그 시간만큼은 통념에서 벗어나 감정의 공동체가 되는 순간이거든요. 다만 현실에서 우리가 젠더 정체성만 갖고 살지는 않고, 어긋난 관계를 회복해야 하는 문제만 겪는 것도 아니잖아요. 나이, 계층, 직업 등 중첩적이고 다중적인 정체성을 지닌 채 현실의 복잡다단한 문제들을 겪고 있는데 박선우 소설에선 그런 부분이 배경으로 흐려지고 있어요.

 

안현미 작가가 멀리서 보려는 태도를 가진 것 같아요. 「우리는 같은 곳에서」를 보면 미술대 교양수업 장면에서 원근법 이야기가 나와요. 양안다 시에서도 소실점 이야기가 반복되고요. 그처럼 멀리서 보려는 시각이나 다르게 바라보려는 자세를 두 작가가 공통적으로 취하는 게 저한텐 흥미롭고 재미있는 지점이었습니다. 다만 박선우의 소설은 발화의 톤이 조금 높아도 좋겠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아마 그건 제 개인적인 취향 탓이겠지만 “점점 막 나가는 자신이 마음에 들었다”(「소원한 사이」 188면)라고 말하는 주인공에게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진술의 형식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두번째 소설집에서는 작가가 좀더 과감해져도 될 것 같아요.(웃음)

 

 

조우리 『내 여자친구와 여자 친구들』(문학동네)

 

189_366

오연경 조우리는 2011년 대산대학문학상으로 등단해 올해 『라스트 러브』(창비)라는 중편소설을 냈습니다. 소설집으로는 이번이 처음인데요, 노동, 계급, 세대, 젠더의 문제가 함께 섞여들면서 우리 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이 다각도로 드러나 있습니다. 특히 2000년대 이후 한국문학에서 김애란 소설로 대변되던 청년의 삶이 현재는 어떠한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엿볼 수 있어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전기화 데뷔한 지 근 10년 만에 첫 소설집이 나왔는데 이처럼 시차를 두고 나온 작품집은 오랜만인 것 같습니다. 요즘은 워낙 단행본을 빠르게 묶어내는 게 대세잖아요. 마지막에 실린 「개 다섯 마리의 밤」은 2011년 한진중공업 희망버스를 모티브로 삼고 있는데, 기사를 보니 지난 6월 말에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정년을 앞두고 마지막 복직투쟁을 벌인다고 하더라고요. 작품으로는 이미 2011년에 문학적 형상화가 된 사건이지만 현실에서는 완결되지 않고 계속 진행 중인 셈입니다. 세월호참사 직후에 쓰인 「11번 출구」의 경우엔 작가가 단행본 수록 과정에서 수정을 거쳤다고 밝혔고요. 이러한 시차를 확인하는 것이 저에겐 흥미로운 경험이었습니다.

 

안현미 여덞편의 소설에서 주요인물은 대체로 여성으로 나오죠. 남성은 운전을 가르쳐주는 강사(「우리가 핸들을 잡을 때」) 정도의 조연으로만 등장합니다. 여성노동을 다루는 방식에 있어서도 기존과 좀 다른 면이 있었어요. 「미션」을 보면 “어디서든, 너도 꼭 너를 지켜. 그게 우리를 지키는 일이 될 거야”(96면)라고 하잖아요. 내부고발자라는 사회적 이슈를 작가가 자기 시선으로 캐치하고 숙성시켰다고 할까요. 독자로 하여금 그 여성과 연대하고 후원하고 싶게 만드는 서술방식이라서 좋았습니다. 작가가 팬픽 활동을 했다고 하던데, 제 편견일지는 몰라도 팬픽은 ‘덕질’ 같은 것 아니에요? 덕질로 시작해서 이렇게 사회현실을 드러내는 무게감 있는 소설로 나아간 점을 응원하고 싶었습니다.

 

전기화 저도 「미션」이 굉장히 인상적이었고, 여성의 노동을 재현하는 최근의 여러 소설 가운데에서도 반드시 거론되어야 할 작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소설은 직장 내 성추행 문제와 갑질 문제를 포함하여 노동하는 여성의 일상에 스며 있는 차별과 폭력을 잘 보여줍니다. ‘박물관의 공공재’처럼 다루어지다 실신까지 한 ‘수아’는 결국 권고사직을 당한 뒤 한국을 떠나고, 업무 스트레스로 원형탈모에 불면을 겪던 ‘미경’은 내부고발을 하지만 이후에도 공황장애나 도피성 수면 등의 문제를 겪어요. 이들 여성 청년 노동자들이 온몸으로 겪어내는 문제가 저에게는 즉각적인 생존의 문제로 다가오더라고요. 그런 와중에도 제도적 해결에 기대조차 걸지 못한 채, 스스로를 잘 돌보고 각자가 각자를 지켜야 한다는 말을 주고받는 인물들의 모습이야말로 지금 우리 사회의 현실을 비춰주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오연경 결국 할 수 있는 게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을 지키는 일이라고 담담하게 말하는 지점이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 겨우 내가 되겠지”(「서른」, 『비행운』, 문학과지성사 2012)라고 했던 김애란의 절망과는 또다른 것으로 다가왔어요. 각자를 지키는 일이 ‘우리를 지키는 일’이 되리라는 점에서 연대의 가능성이 보이긴 하지만, 작중에서 수아와 미경은 “너를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아”(92면)라고 말하는 관계가 되어버렸잖아요. 어려운 시절을 함께 통과했는데, 고통스러운 과거를 상기시킨다는 이유로 끊고 싶은 관계가 되고 만 거예요. 이처럼 고통의 연대조차 거절한 상태로 자신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고립적이고 절망적인 일일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개 다섯 마리의 밤」에서도 학자금 대출을 갚기 위해 공장에서 일하는 지유가 자신을 “멈춰도 달려도 별 뾰족한 수가 없어서 그냥 하염없이 걷고 있을 뿐인, 아주 성실한 상태”(235면)라고 인식합니다. 그러니까 노동의 성실함이 자아실현이나 현실과의 투쟁이기는커녕 가까스로 생존하고 있는 상태에 불과하다는 거죠. 자신을 지키는 것, 견디는 것, 생존하는 것이 최선의 삶의 상태라는 안타까운 현실인식을 엿볼 수 있었어요.

 

안현미 뒤표지에 쓰인 정세랑 추천사를 보면 “조우리의 소설을 읽을 때, 숨쉬기가 편안하다”라고 해요. 그런데 저는 이 책이 가장 읽기 어려웠거든요. 읽으면서 자꾸자꾸 숨이 막혀서 자주 숨을 멈추고 고르게 되더라고요. 30년 동안 여성노동자로 산 제 개인적인 경험에 비추어보건대 조우리의 소설은 해고된 여성과 해고될 여성의 서사가 아닐까 싶어서요. 적어도 아직까지는 승리하지 못한 여성들의 이야기랄까요. 지금 이런 목소리가 나오는 것이 굉장히 소중하다 여겨지지만, 냉정하게 평하자면 근미래에 해고당할 여성들의 이야기여서 답답한 면이 있었어요. 그건 소설적 형상화가 너무 잘되어 있어서 제가 30년 동안 경험했던 비관적 현실을 다시 소설적 실감으로 생생하게 느꼈기 때문이겠지만, 젊은 소설가의 작품에서 우리 시대와는 다른 ‘낙관적 미래’를 읽고 싶은 제 희망 때문이기도 하겠지요.

 

전기화

전기화

전기화 그렇지만 「우리가 핸들을 잡을 때」와 「물물교환」을 읽으면서는 노동하는 중년 여성의 캐릭터가 이만큼 입체화된 적이 있었나 싶었습니다. 소위 ‘아줌마’로 분류될 수 있는 이들을 자기 나름의 윤리적이고 실용적인 기준을 가진 존재로 드러내주잖아요. 「우리가 핸들을 잡을 때」의 ‘엄마’와 ’금자씨’는 참고 넘어가는 태도로 일관하지 않아요. 정당하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는 사과를 요구해 자기존엄을 지켜내면서도 동시에 매우 실용적인 생활감각 또한 갖추고 있습니다. 한편 「물물교환」의 ‘여자’는 고민하고 행동하며, 그 행동으로 인해 달라진 노인의 반응에 다시금 고민하는 등 소박하지만 분명한 윤리적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노동하는 중년 여성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장류진의 소설 「도움의 손길」(『일의 기쁨과 슬픔』, 창비 2019)과 「연수」(2019)가 떠오르기도 했지만, 장류진 소설은 기성세대를 바라보는 젊은 여성의 시선이 좀더 두드러진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차이를 보인다고 생각해요.

 

오연경 최근에 노동시나 노동소설의 외연을 넓혀 재조명하자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하고 80년대의 노동서사를 잇는 계보는 사라졌다는 말들도 더러 나옵니다만, 이러한 논의들 속에서도 사실 여성노동은 첨예화되지 못해왔지요. 조우리 소설은 여성노동자의 현실을 섬세하게 드러내면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어떤 지점을 만들어내는 것 같습니다. 노동의 구조나 부조리한 제도 등 거대한 것과의 싸움을 그리는 게 아니라 일터에 만연한 남성중심적인 관행이나 일상화된 무례함, 폭력적인 언행 등 이전까지 그냥 넘겨왔던 것들을 용인하지 않겠다는 태도, 더이상 회피하거나 도망가지 않으려는 태도를 유머러스하고 따뜻하게 보여주죠. 「우리가 핸들을 잡을 때」나 「물물교환」에 잘 드러나 있는 것처럼 노동자와 젠더 정체성이 겹치는 지점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첨예하게 그리면서 그것을 타개해나가는 건강한 방식이 조우리 소설의 특장인 것 같아요. 한편 이 소설집에는 「내 여자친구와 여자 친구들」 같은 본격 퀴어서사도 있는데, 표제작은 어떻게 읽으셨나요?

 

전기화 무척 좋게 읽었어요. 레즈비언 커플이 맺고 있는 헤테로(hetero) 여성들과의 관계가 버거우면서도 손쉽게 단절할 수만은 없는 중요한 것으로 그려지고, 그 관계를 어떻게 감당하고 조절해야 하는가에 관한 고민이 잘 재현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소설의 마지막에서 ‘나’와 ‘정윤’이 돌잔치에 굳이 들어가지 않고 선물을 전하고 셀카만 찍은 뒤 훌쩍 떠나버리는 결말도 산뜻했어요. 조우리의 소설 속 인물들은 무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산뜻함의 미덕을 지닌 것 같아요. 다만 이 소설에서 ‘나’의 시각을 경유해 그려지는 헤테로 여성들이 다소 평면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보편’의 세계에 편입되어 있는 여성들은 기성의 질서에 손쉽게 편승한 것처럼 환원되어버리는데요, 퀴어문학에서 헤테로 여성과의 관계를 상상할 때에 종종 예비된 비관이 나타난다는 점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오연경 표제작은 커밍아웃 이후의 일상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미덕을 지니고 있어요. 커밍아웃 이전의 정체성 혼란이나 커밍아웃 자체에 대한 주목이 아니라, 이제는 커밍아웃 이후의 일상이 어떻게 지속될 수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할 차례라는 작가의 생각이 엿보였어요. 커밍아웃 자체는 당사자의 문제일 수 있지만, 그 이후의 일상은 주변과의 관계로 확장될 수밖에 없고, 퀴어적 삶을 일상화하는 것은 당사자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과제가 됩니다. ‘내 여자친구와 여자 친구들’이라는 제목부터가 그런 문제의식을 함축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다만 전기화 평론가 말씀처럼 제목에서 ‘여자 친구들’로 명명되는 헤테로 여성들은 군집으로만 드러나기 때문에 다소 이분법적인 구도가 전제될 수밖에 없다는 게 저 또한 아쉬웠습니다. 마찬가지로 남성 역시 일방적인 시선으로 단순하게 그려진 면이 있는데요, 「우리가 핸들을 잡을 때」에서 금자씨의 전남편이나 최실장, 운전연수 강사인 남성, 「나사」에서 보험회사에 다니는 K 같은 인물이 그렇죠. 물론 「11번 출구」의 ‘남자’와 같은 예외적인 남성도 있지만요.

 

안현미 그런데 남성들을 그렇게 그릴 수밖에 없었던 데는 이유가 있는 것 같아요. 우리가 흔히 이상한 사람을 보고 ‘나사 빠졌다’라고 하는데 「나사」에서 K의 의자에 정말로 나사가 빠져 있잖아요. 대외적으로는 보험회사에 다니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 같지만 K의 의자는 나사 빠진 의자인 거죠. 그리고 화자인 ‘나’가 아르바이트를 한 호프집을 보면 사장이 세명이나 되거든요. 이건 남성들이 만들어놓은 테두리 안으로 여성이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줘요. 이미 남성들이 기득권을 쥔 제도 안에서 여성은 아르바이트밖에 하지 못하는 존재인 거죠. 심지어 그 아르바이트를 그만두자 사랑하는, 아니 사랑하는지는 잘 모르겠는데요,(웃음) K조차도 화자에게 근성이 없다고 말합니다. 남자들은 멀쩡한 직장에 돈도 있는데 여성으로선 너무 춥고 외로워요. 그런 현실이 조우리 소설에 잘 녹아 있습니다. 또래 작가들 중에 여성노동을 이만하게 쓰는 사람이 또 있을까요? 조우리 소설이 지닌 활력이 굉장히 인상적이었고, 앞으로의 행보가 더욱 기대됩니다.

 

 

김성중 『에디 혹은 애슐리』(창비)

 

189_371

오연경 다음으로 2008년 등단해 어느덧 중견작가의 반열에 오른 김성중의 소설집입니다. 앞선 두 작품집하고는 결이 좀 다르다 볼 수 있겠는데요, 작가가 속한 세대만 아니라 소설의 미학적인 형상화 방식도 다르기 때문에 나눌 수 있는 얘기가 여럿 있을 것 같아요.

 

안현미 저는 여섯권 중에서 제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아무래도 같은 세대라 그랬을까요. 동화적인 상상력과 결혼에 대한 단상들, 이국적인 이야기들 덕분에 종합선물세트 상자의 뚜껑을 열었을 때 같았달까요.(웃음)

 

전기화 상상력을 발휘해서 현실을 비틀며 넘어가버리는 작품도 많고 비교적 리얼리즘의 관습에 충실한 소설들도 있는데요, 화자나 시점 등도 모두 달라 다채롭고 스펙트럼이 넓은 소설집이라는 게 첫인상이었습니다. 다만 어떤 공통점 같은 걸 찾자고 한다면, 저는 인물이 가진 비확정적인 태도를 들고 싶습니다. 표제작 「에디 혹은 애슐리」에서 이런 점이 잘 드러나는데, 아무도 늙지도 죽지도 않는 긴 시간이 찾아와서 사람이 자기 정체성을 얼마든지 실험할 수 있고 확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설정이에요. 일견 굉장히 불안한 세계일 것 같지만 성별을 고민해왔던 주인공은 그걸 즐기고 나중에는 “내 몸에 딱 맞는 옷을 재단해 입은 것처럼”(52면) 느끼거든요. 애슐리도 에디도 아니어도 된다는 걸 받아들이면서, 확립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확립하지 않는 것으로 나아간다는 점이 좋았습니다. 그리고 성별에 대한 혼란이 자기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의 문제가 되니까 거기서 안도감을 느낀다는 점, 트랜지션이나 퀘스처닝 같은 용어를 획득하면서 나도 익명이 된다, 보편이 된다고 감각하는 점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오연경 저도 젠더를 퀘스처닝이나 일종의 실험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걸 이렇게 가볍고 유쾌하게 유희적으로 그려낼 수 있구나 싶어 놀랐습니다. 그런데 주제 면에서는 결코 가볍지만은 않은 게, 백년이라는 시간을 벌려놓고 모두의 죽음을 유예시키고 나니까 우리 문명이 규정하고 있던 젠더 이분법이 얼마나 인위적인 것인지가 드러나잖아요. 젠더가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라는 관점을 넘어 아예 옷처럼 바꿔 입을 수 있는 것이고, 그처럼 바뀌고 있는 유동적인 상태 자체가 정체성일 수도 있다는 점을 전략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보편성을 재배치하거나 보편성이라는 이름의 억압을 해체한다는 면에서 쾌감을 느끼게 해주죠.

 

전기화 이번 소설집에서 또 한가지 인상적인 건 우정을 그리는 방식이었습니다. 「해마와 편도체」에서 열여덟살 ‘나’와 예순다섯 노인 ‘편도체’의 관계를 통해 세대를 넘어서는 우정을 보여주고, 「배꼽 입술, 무는 이빨」에서는 말하는 나무인 ‘목부’와의 조용한 우정이 그려져요. 「상속」에서는 ‘기주’와 ‘진영’, 그리고 ‘선생님’이 맺는 연대기가 주목되고요. 우정의 재현에 관한 작가의 꾸준한 애착과 관심이 느껴져서 좋았습니다.

 

오연경 「상속」에서는 제자인 기주 언니가 선생보다 나이가 많고,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진영과 기주 언니는 동료이자 친구죠. 세대, 직업, 지위, 학력 등이 복잡하게 얽힌 관계들은 통념이나 관습에 의해 쉽게 포섭되지 않는 다양한 우정의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안현미 저는 「정상인」에서 드러나는 우정에도 주목해보고 싶어요. 운동권 후일담으로 볼 수 있는 소설인데, ‘정상인’이라는 인물의 계보 없는 세계관에 대해서 화자가 줄곧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거든요. 어찌 보면 구시대적이라 할 수 있는 우정이나 연대와 같은 감각이 소설에 감돕니다. 저만의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제가 김성중이라는 작가를 잘 알기 때문에 더 재미있게 다가온 것 같은데, 본인의 삶에서 여러 일들을 겪으면서 이처럼 ‘미워하면서 사랑하는’ 감각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은 아닐까 싶어요. 예컨대 남성성에 대해 비판을 하자면 누구라도 그 욕을 들어줄 사람이 있어야 하잖아요.(웃음) 경험에서 비롯한 우정에 대한 관심이 소설에 녹아든 게 아닐까 합니다.

 

오연경 사실 저는 「정상인」이 이 소설집에 묶인 것이 의아할 정도로 좀 이질적이라는 느낌을 받았어요. 소설집 전반에 낯선 이름을 쓴달지 공간을 다양화해서 이국적인 느낌을 주거나 마술적 리얼리즘을 구현했다고 할 만한 작품이 많은데, 「정상인」은 그야말로 운동권 후일담 소설에 가까워 보였거든요. 그런데 이 소설에서 느껴지는 것은 그 시절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나 새로운 의미화보다는 당시의 독서 경험, 세미나를 통한 관계, 두꺼운 책이 불러일으키는 감정 등 추억이나 그리움이었어요. 물론 저도 비슷한 세대라 그 시절을 떠올리며 읽었는데, 어쩌면 이 소설은 작가 자신에게 더 의미있는 작품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안현미 그런데 ‘우정의 자본’을 이야기하는 장면에서는 작가의 유머가 돋보이지 않나요. “『자본론』을 쓰는 동안 맑스가 엥겔스한테 받은 돈, 그 책이 쓰이는 데 들어간 ‘자본’을 생각해보”(94면)라는 말이 흥미로웠어요. 작가가 어떤 세대인지 드러나는데 아마도 과거 한총련 운동권 끝물을 경험했을 김성중으로서는 꼭 한번 쓰고 싶던 소설이었을 겁니다. 「레오니」나 「마젤」을 비롯한 나머지 소설에서도 성경이나 동화를 차용해서 독자를 마술적인 세계로 이끌어가지만, 그게 저한테는 아주 새롭다기보다 익숙한 정서였어요. 그래서 더 좋게 읽었고요.

 

오연경

오연경

오연경 낯선 기법을 쓰지만 익숙한 정서라는 평에 동의합니다. 「레오니」에서는 지나간 전통이라 할 수 있는 대가족 중심의 공동체가 보이는데, 한국적인 배경이었다면 구태하게 여겨졌을 세계가 필리핀을 배경으로 해서 낯설고도 환상적인 세계로 그려집니다. 이민자의 삶은 고단하기 마련임에도 화자는 “세상이 크다는 것, 그 커다란 세상에 내가 아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28면)으로부터 용기와 위안을 얻는다고 말하지요. 최악의 경우에는 “이 식탁 밑으로”, 가족 곁으로,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말도 하고요. 전세계 곳곳에 흩어져 살아가는 이민자의 삶이 현실이라면, 오년마다 한번씩 모이는 고향에서의 축제는 예외적인 시간이자 위로의 공간으로 그려지고 있어요. “그 밤을 이루는 대가족의 잠, 그 깊은 숨소리”(29면)가 주는 위로는 익숙한 정서지만, 제각각 먼 곳에 흩어져 살아가는 삶의 양식 속에서 그 관계성의 가치를 다시 조명하려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죽은 아내의 사진을 훔쳐간 나무를 쫓는 이야기인 「나무추격자 돈 사파테로의 모험」도 그렇게 읽히죠. 사파테로가 구덩이로 떨어져서 부드럽고 포슬포슬한 흙을 먹으면서 앞으로 나아가다 세계의 중심에까지 닿는 낯선 이야기지만, 인간의 근원적 고독에 대한 마술적이고 에로틱한 위로로 볼 수 있어요.

 

안현미 그 단편은 고골(N. Gogol)의 소설 「코」(Hoc)를 떠올리게도 하더라고요. 그런데 동화적이고 마술적인 세계여서 그런지, 미래에서 현재의 나를 조망하는 듯한 시선이 곳곳에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런 시점 활용은 어떠셨나요?

 

전기화 처음에는 오류인 줄 알았는데 소설들을 끝까지 읽어보니 작가가 의도적으로 그런 시점을 활용한 것이더라고요. 예컨대 어린이 화자의 시점으로 그려지는 「레오니」에서도 “제가 덴마크에서 대학을 다니게 된 것도 삼촌이 애써주셨기 때문입니다”(17면)라든지 “우리 가족은 십오년 후에 각자의 운명으로 뿔뿔이 흩어졌거든요”(25면)라는 문장이 불쑥 튀어나옵니다. 이야기 곳곳에 지금의 화자보다 더 많이 아는 미래의 서술자가 등장하는데 효과적으로 활용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조금 의문이 남네요.

 

오연경 어떻게 보면 먼 미래에서 내려다보는 전지적 서술자의 관점을 어린아이의 목소리에 의탁하여 의뭉스럽게 이야기를 끌어가는 장치로 활용한 것 같아요. “우리 앞의 식탁 좀 보세요”(14면) 하고 독자에게 말을 걸기도 하고요. 과거를 액자 안에 집어넣는 일반적인 구성과 달리 액자라는 틀 안팎을 자유롭게 들어갔다 나왔다 하면서 쓴 것 같은 느낌이에요. 「해마와 편도체」의 마지막 문장 “먼 미래에서 지금 이 순간을 들여다본 비밀”(84면)이라는 게 김성중 소설의 시점의 비밀이 아닐까요?

 

안현미 영화적인 편집, 영상 같은 느낌이랄까요. 작가가 실제로도 말을 재미있게 잘하는 사람인데, 소설에서도 입담이 돋보이는 것 같아요. 이야기를 술술 만들어내는 힘이 있고요. 그런데 「마젤」 같은 경우에는 주제의식이 앞서 너무 많은 말을 하고 있는 듯도 했습니다.

 

오연경 네, 지나친 상징화를 통해 메시지를 의도적으로 전달하려 한 장면들도 보입니다. 그렇지만 이처럼 다양하고 새로운 관계성들을 그려보려 한 시도는 유의미한 것 같아요. 요즘 1인칭 당사자성 서사가 주목을 받으면서 작위적이거나 미학적인 만듦새를 부러 기피하는 경향이 있는데, 작가는 시의적절한 고민을 자기만의 소설 작법으로 그려내려 노력한 것 같습니다.

 

안현미 좋은 소설은 우리를 다른 차원으로 데려갑니다. 그런 점에서 제게 이번 소설집은 환상과 현실의 날개를 단 우주선을 타고 꿈속을 날아가는 모험 같았습니다. ‘작가의 말’을 보니 작가가 글을 쓰러 까페에 가서 때로는 꾸벅꾸벅 졸기도 했다고 해요. 그리고 자신에게 가장 절실했던 단어가 용기였다고 말하죠. 작가도 일종의 노동하는 여성인데, 육아와 노동 사이의 갭을 견디면서 잘해내고 있는 듯합니다. 이 책을 통해 그 용기가 우리한테 전해졌다고 생각하고, ‘성공’했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고형렬 『오래된 것들을 생각할 때에는』(창비)

 

189_377

오연경 다음으로 시집 이야기를 나눠보겠습니다. 고형렬 시인은 워낙 오랫동안 활발히 활동해온 분이어서 이번 시집이 기존에 추구해온 시세계 가운데 어떤 지점에 있는지 짚어보는 일도 필요하겠습니다. 시인은 이전에도 속초나 고성 주변의 여러 지명들을 제목이나 상징으로 주요하게 써왔는데, 이번 시집에도 장소성이 직접적으로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장소의 상실이나 그리움 같은 정서 외에도 한 장소에 여러 장소가 겹쳐지거나 갈라져나가는 것을 통해 초월, 소멸, 허무와 같은 이야기를 펼쳐나가는 듯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이번 시집에서는 일상성에 밀착하려는 노력이 두드러져 보였고, 특히 시 쓰기에 대한 시를 새롭게 써보려는 시도가 인상적이었어요.

 

안현미 등단 40년을 맞은 시인이고 우리 시사에서 개성적인 목소리를 내어온 분인데 어느덧 열한번째 시집이 나왔죠. 이번 시집의 제목이 ‘오래된 것들을 생각할 때에는’인데, 본인의 고향인 강원도 고성 이야기가 많이 나와요. 책 마지막에 실린 ‘시인의 산문’을 보면 “시인이 되는 것보다 시가 되고 싶다”(199면)라고 하는데, 어쩌면 순도에 가까운 시인으로서의 자세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았어요.

 

전기화 시집이 총 4부로 나뉘어 있는데 각기 성격이 다르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1부에서는 장자(莊子)의 영향이 많이 느껴졌어요. 잠언적인 성격이 짙고, 「물고기의 신화」 「종로 5가에서 사가지고 온 달리아 뿌리」 「새들의 죽음」 등의 시가 인상적이었습니다. 2부로 넘어가면서부터는 말씀하신 공간성, 장소성이 눈에 띄었습니다. 고성 북천이 근원적인 그리움의 대상으로 자리 잡고, 시인의 현재 거처로 짐작되는 양평은 세속의 공간, 평양은 꿈의 공간으로 느껴지고, 비선대를 인격체처럼 대하는 부분도 흥미로웠어요. 지역이나 공간에 대한 특수한 감각이 있고, 유동성이나 변화의 여지를 주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3부에서는 편지처럼 읽히는 시들이 눈에 들어왔는데요, 개별적인 존재에 관해 말하는 시가 많았어요. ‘뉴욕에서 잠든 박민흠 시인에게’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사서함의 가벼운 눈발」은 떠나간 분을 향한 정성스러운 이별의 시작(詩作)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지막 4부로 가면 대상에 대해 좀더 직접적으로 감정을 표출하는 시들이 많습니다. 시인의 시세계가 이 모두에 다 걸쳐져 있는 것일 텐데, 저에게는 1부와 4부가 다소 이질적으로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오연경 보통 한국 남성 시인들의 경우 오랜 시력의 끝에 해탈이나 초월을 이야기하면서 선시(仙詩)로 빠지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와는 달리 고형렬 시인은 허무의 정서를 주되게 그리면서도 여전히 일상이나 장소성에 발붙이려 하는 자세를 보여줍니다. 「종로 5가에서 사가지고 온 달리아 뿌리」가 인상적인데요, 구근에서 어떻게 눈이 나서 싹이 트고 꽃이 필까를 고민하다가 “견딜 수 없는 알 수 없음”이라는 말을 해요. 그런데 그 깨달음은 종로 5가에서 식물을 사 와서 화단에 심는 일상의 구체적인 행위에서 비롯한 것이잖아요. 일상에서 느끼는 알 수 없음이라는 상태를 견디지 못하고, 그 견디지 못하는 것을 다시 일상의 말로 풀어내면서 견뎌내려는 모습이 보입니다. 가장 생활적인 장면에서 가장 초월적인 깨달음의 순간까지를 꿰뚫는다고 해야 할까요.

작법에서도 여전히 치열한 실험을 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비선대와 냉면 먹고 가는 산문시 2」 같은 경우가 대표적이죠. 김수영(金洙暎)이 “눈이 온 뒤에도 또 내린다”(「눈」)라고 쓰면서 쓰기의 과정을 재현했듯이, 시인은 아예 제목에 산문시라고 써두고 “비선대에서 냉면을 먹고 아로니아 길을 가려고 생각하는 산문시는 (…) 길에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라고 서술하면서, 공간을 점유하며 걸어가고 있는 과정과 산문시가 써지는 과정을 겹쳐서 보여줍니다. 시인은 이것을 “아로니아 길”이라고 명명하는데, 비선대, 냉면, 산문시라는 서로 다른 것들을 엮어서 삶의 길과 시작(詩作)의 길을 동시에 보여주는 방식이 신선하게 느껴졌습니다.

 

안현미 시집에 아로니아라는 낱말이 반복해 등장하는 점이 흥미로운데, 의도적으로 쓰인 소재 같아요. 이국적인 열매인 동시에 이미지적으로 선명하고 구체적이니까요. 제가 특히 재밌게 본 시는 「아로니아의 엄마가 될 수 있나」였습니다. 고형렬의 시세계에서는 완전히 새로운 시라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아로니아를 집에서 기르고 있는데, 아로니아의 아빠가 될 수 있나도 아니고 엄마가 될 수 있나 하고 묻죠. 남성 시인으로서 이렇게 표현한 점이 신선했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종로 3가, 광화문, 혜화동, 고성 등 공간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호명을 하지만 시간성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지 않나요? 공간은 좍 펼쳐놓으면서도 언제 어느 때다 말이 없는 것은 전생과 현생, 어쩌면 후생까지도 살려는 자세 같아요.

 

오연경 그런 의미에서 시를 신화적으로 풀어냈다고도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장소를 호명할 때 그곳에 내재되어 있는 시간성을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래요. 「흰 구름과 풀」에서는 “돌 곁에서 풀은 파랗게 살아간다”라고 하는데, 사실 돌은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는 것이고 풀은 같은 자리에서 해마다 새로 돋아나는 거잖아요. 「돌의 여름, 플라타너스」를 보면 “정치도 분노도 없고 잡지도 기억도 없다”지만 그 와중에 “실외기 소음이 들린다”라고 합니다. 한쪽에서는 완전무결한 망각의 상태인데, 똑같은 공간에서 일상의 생활과 소음은 계속되는 대비가 드러나는 대목이죠. 「비선대(飛仙臺)」에서도, 비선대는 백년 천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을 자연의 거대한 바윗덩어리인 반면 ‘나’라는 사람은 사십년 전과는 달라져 있어요. 인간의 유한함과 영구적인 장소성을 대비하면서 허무의식을 구체화하고 있습니다.

 

안현미

안현미

안현미 허무와 관련해 가장 기억에 남는 구절을 꼽자면 “잃은 것도 얻은 것이라면/잃은 것은 없다”(「전철 인생」)였어요. 98편의 시에서 계속 이야기되는 것들이 바로 이러한 허무, 혹은 허무의 신앙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허무를 이야기하면서도 완전한 몽상이나 자동기술로 가지 않는다는 점은 꽤 특이해요. 이런 독특한 자리에 서 있기 때문에 시인이 전통적인 리얼리즘 시를 쓰는 사람, 서정시를 쓰는 일군의 시인들 틈에서 외로울 것도 같고요.(웃음)

 

전기화 어쩌면 시인의 시가 허무로만 일괄되지 않는 것은 ‘시’에 대한 시인의 믿음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이는 시에 관한 시들을 통해 잘 드러난다고 생각하는데요, 이를테면 “시와 언어는/먼저 간 것들보다/아직 이곳에 남아 있는 것들의 미완이다”(「거미막을 밟다」)라는 구절이나 “아름다운 것이 맨 나중에 온다면/가장 아름다운 시는 모든 것의 맨 끝에/서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아로니아의 엄마가 될 수 있나」) 하는 구절들은 시인의 시론에 관해 유추하게 했고, 그 자체로 아름답고 모호하여 계속 곱씹어보게 됐어요. 사실 저에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시는 「서울 사는 K시인에게」였습니다. “모든 것이 낯설어, /그냥 한통 써보는 시답잖은 편지”라며 토로하는 화자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낯섦과 두려움과 막막함으로 감지하고 이를 진솔하게 표현합니다. 그 앞에 실린 「서울, 어느 평론가와 시인과 함께」와도 같이 읽어볼 수 있을 것 같고, “반성할 틈도 없이” 들이닥치는 시간 속에서 떠밀려가는 삶에 대한 상실감이 느껴지는 「벌써 2020년대가 왔어요」도 엮어서 볼 수 있겠어요. 그러나 그러한 망실 속에서도 시인이 놓치지 않으려고 하는 대상이자, 스스로 “죽음 속에서 흙을 밀어올리고 피어”(「시의 옷을 입다」)나는 주체로서의 ‘시’ 자체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오연경 방외인이나 주변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많이 드러나죠. 속초, 고성, 양평 등 지역 이야기를 하는 것도 중심적이고 도시적인 것들로부터 멀어져 있기 때문일 겁니다. 그 중심이라는 게 소위 문단일 수도 있고 권력이나 기득권을 지닌 자리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우린 서로 행불자가 됐”(「서울 사는 K시인에게」)다고 말할 때에 그 이면에는 자부심도 있으리라 생각해요. 어느 한곳에 고착되지 않고 여전히 뭔가를 찾아 헤매고 고민하는 사람의 자부심이랄까요. 「풀편(篇)」에서 “소년보다 더 소년적인 어른이 되었다”라고 하는데, 이 구절이 시인의 자기형상 혹은 시인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시인상이 아닐까 싶습니다.

 

안현미 시인은 자신이 비사회적으로 변했지만 그걸 소외라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더라고요.(「고형렬 시인과의 짧은 인터뷰」, 창비 블로그, 2020.6. 2) 문단이나 주류나 서울이라는 중심 공간에서 멀어진 것을 자발적 가난과 같은 상태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또 “나는 내가 심심하지 않다”라고 하는 데서는 단지 서울에서 지역으로 내려간 게 아니라 정신의 귀향이랄까요, 선적이면서 전위적인 태도가 보여요. 또 시인은 ‘몬순’ 동인으로도 활동하고 있는데, 한·중·일 최초의 국제 동인이죠. 젊은 시인들이 젠더를 횡단하듯이 고형렬 시인은 공간을 가로지르고, 동북아적인 지역성으로 확장과 연대를 해나간다는 점이 놀랍습니다. 그런 실천적 힘이 있으니까 혼자 놀아도 재미있을 수밖에요.(웃음) 진은영 시인이 추천사를 통해 “시인의 높이와 깊이와 길이에 놀”랐다고 이야기한 데 동의하면서, 자신의 시세계를 계속 새롭게 탄생시키고 갱신하고 있는 시인이 아닐까 합니다.

 

 

양안다 『숲의 소실점을 향해』(민음사)

 

189_382

오연경 다음으로는 젊은 시인들의 시집을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양안다와 강혜빈은 각각 1992년, 1993년에 태어나 2014년, 2016년 데뷔했어요. 비슷한 타임라인을 가지고 있는 남녀 시인인데, 그중 양안다는 다작이라 할 만큼 등단하자마자 많은 작품을 발표하며 활발하게 활동해왔죠. 연극적이고 산문적인 요소를 많이 쓰는 편인데, 장시가 많아 이번 시집 두께도 상당하더라고요. 공동체적인 희망을 찾기보다 선생이나 기성세대 등에 대한 증오를 드러내면서 완전히 내던져진 우리 안에서 서로의 마음에 다가가려는 노력,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지난하고 불가능한 일인지를 겪어내는 절망을 동시에 보여준 시집이라 생각합니다.

 

안현미 대표적인 구절이 “이제 포기하는 것조차 포기했어 ”(「케이크를 자를 때 칼의 주인은 누구」)라고 볼 수 있겠죠. 엘리, 몬데, 단처럼 여러 시에 겹쳐서 등장하는 인물 이름이 많고 방공호라는 공간이 자주 그려진다는 점도 독특하게 보았어요. 그리고 「아몬드나무 가이드」를 보면 “혼자 우는 숲/혼자 죽는 춤/혼자 꾸는 꿈”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그 3행이 각각 시 바깥으로 빠져나와 이어지는 시들의 제목이 되기도 하더라고요. 이런 실험적인 시도를 통해 청춘들, 이십대의 심상을 그려내고 있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고형렬 시에는 없는 어떤 용광로 같은 들끓음이 있었고, 소실점을 향해 간다고 하지만 소실되려면 아직 갈 길이 먼 세대의 중얼거림으로 읽혔어요.

 

전기화 저는 양안다의 시세계에 진입하는 일이 처음에는 쉽지가 않더라고요. 이번 시집이 『작은 미래의 책』(현대문학 2018) 『백야의 소문으로 영원히』(민음사 2018)와 이어지는 삼부작이라고 하여 함께 읽으니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인물들이 더욱 눈에 띄었는데, 그들이 발화하는 내용과 그들 사이의 관계성은 조금씩 변주되고 있었어요. 시를 읽으며 점차 시인이 건설한 하나의 세계에 진입하고 있음을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오연경 양안다의 세계에서 느껴지는 것은 좀 속되게 이야기하면 ‘가출팸’의 정서 같은 것인데, 부모로부터 도망쳐 선생도 윗세대도 없이 같은 처지의 동료들에게 기대어 생존해야 한다는 거죠. ‘방공호’라는 시어에서 드러나듯이 삶 자체를 방어적인 것으로 상정하고 있어요.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시집 제목이 ‘숲의 소실점을 향해’라는 점이에요. 저는 시인이 두개의 세계를 양쪽 끝에 그려놓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첫 시 「나의 작은 폐쇄병동」에서처럼 다들 갇혀 있고 병들었으며 회복하려 노력하는 일만이 최선인 세계가 있고, 저 멀리 소실점으로 수렴되는 곳에는 타오르는 숲의 세계가 있습니다. 여러개의 선이 하나로 모이는 소실점은 어떤 지향이나 목적지와도 같지만, 거기까지 가려면 너무나 멀고 심지어 그곳의 숲은 이미 불타고 있는 위기상황인 거예요. 그럼 이 가출팸은 어디로 가야 할까요. 재가 되어가는 소실점을 바라보면서 지금-여기의 아주 일시적이고 잠정적인 작은 공동체 안에서 각자의 마음 돌보기에 매달릴 수밖에 없어요. 서로의 마음을 알아주려 노력하지만 그마저 쉽지 않고 회복도 어려운 상태에서 모두 끊임없이 상처받고 망가져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전기화 저도 방공호나 폐쇄병동으로 상징되는 아주 조그만 공동체로서의 ‘우리’를 그리는 시도가 흥미로웠습니다. 이후에 살펴볼 강혜빈 시집에서 화자가 ‘우리’를 호명하면서 수행적으로 구성해낸다면, 양안다 시집의 ‘우리’에는 회의감과 환멸감이 깃들어 있는 듯도 했어요. “나는 우리라는 이름 안에서 망가지고 있다”(「조각 꿈」)라거나 “우리는 가족과 친구들, 연인을 잃어 가며 누가 더 슬퍼하는지 가늠하”고 “서로를 위로하는 데에 많은 목소리를 버려야 했고 마음을 내려놔야 했으며 진심을 감추어야 했다”(「혼자 죽는 춤」)라는 구절에서처럼요. 어쩌면 양안다 시에서 ‘우리’란 갈등, 외로움, 사랑, 증오 등의 감정이 폭발하는 아름답고도 파괴적인 작은 공동체이고, 그래서 분열적이고도 역동적인 공간 같습니다.

 

안현미 그런데 ‘시인의 말’을 보면 “나의 미래이자 낙하산이 되어 준 친구들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있어요. 마냥 비관적으로만 볼 일은 아니지 않나, 저는 조금 다른 감각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다만 중얼거리고 망설이고 머뭇거리고 있는 모습 같았어요. 초반부에 실린 「공포의 천 가지 형태」에서 “마음을 죽인 사람의 마음을 죽이는 데에 온 마음을 기울이고 싶었다”라고 하지만, 후반부로 가면 「혼자 우는 숲」에서 “이게 호르몬 때문이면 마음이란 게 다 무슨 소용일까 너무 이상하고 너무 아픈 일이야”라고 말하잖아요. 자기 마음에 대해서도 머뭇거리면서 계속 질문을 던지고 있는 모습이에요. 어쩌면 그래서 이렇게 많은 인물과 화자가 필요했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한 사람의 목소리로 이야기하면 자아분열이 될 테니까요.

 

오연경 ‘마음’이라는 시어가 정말로 많이 등장하는데 특히 “온몸에 기름을 붓고 불을 붙인 다음/타들어 가는 몸으로 다가가는 것/그 몸을 안아 주지도/외면하지도 못하는 것/그런 게 마음이라면”(「여름잠」)이라는 시구가 강렬하더라고요. 타자의 마음이란 그 당사자성 안에서는 불타오를 만큼 뜨거운 것인데, 그것을 안아줄 수도 외면할 수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하지만 “우는 건 너인데 눈물을 보는 건 언제나 나였다”라는 마지막 문장에서 타자의 마음을 보아야 한다는 의무를 놓지 않고 있죠. 한편 「휘어진 칼, 그리고 매그놀리아」를 보면 “네가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게 무서워”라고 합니다. 이 구절이 아주 압축적으로 마음에 대한 태도를 드러내는 것 같아요. 어차피 내 마음은 위로받을 수도, 사랑으로 극복될 수도 없는 것이지만, 내가 무섭다는 감정에 빠져 있을 때 타자는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게 가장 고통스럽다는 거죠. 마음은 타자를 통해 자기 존재를 증명하려 하지만, 그것은 좀처럼 쉽지 않은 일입니다. ‘우리’에 대한 열망과 절망이 공존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겠지요.

 

안현미 “회복자들은 삶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거리의 높이와 뿌리를 직시하는 것”(240면)이라는 해설(박동억)도 있는데, 이 점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그것이 ‘회복자들의 윤리’일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대로 있어도 괜찮다고, 고장 난 낙하산일지 몰라도 나는 기꺼이 너의 낙하산이 되어 펼쳐지겠다고 말해주는, 머리가 으깨질 때까지 함께하는 동병상련의 마음 같은.

 

오연경 회복자라는 건 앓고 있는 동시에 낫고 있는 상태잖아요. 그런 면에서 우울하면서도 단단한 어떤 근력이 느껴지기는 합니다. 길고 산문적인데도 읊조리는 속엣말과 터져나오는 대화체를 속도감 있게 끌어가는 리듬이 매력이에요. 주술적이고 빨려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주죠. 그런데 한계라고 해야 할까요, 현실의 어떤 면은 완벽히 소거되어 있는 듯해요. 「다른 여름의 날들」을 보면 “계획된 슬픔” “나에게 닿기 전부터 이미 존재하는 슬픔” “내가 원하지 않았던 그것”이라고 합니다. 세상에 던져졌을 때부터 이미 망해가는 상태였다는 것은 단순히 멜랑꼴리나 우울로 설명할 수 없는 젊은 세대들이 공유하는 정서일 거예요. 그런데 뒤에 다룰 강혜빈 시집에서는 유사한 세대감각이 현실을 짐작하게 하는 서술에 기대고 있다면, 양안다의 시에서는 주어진 슬픔이 어디서 비롯한 것인지 알 수 없이 운명론적이고 존재론적인 것으로 주어져 있어요. 시인이 구축한 세계가 어디에 닻을 내리고 있는지 알기 어려웠습니다.

 

전기화 아무래도 저는 ‘소실점’의 의미를 천착해보게 되는데요, 「우리들은 프리즘 속에서 갈라지며 (하)」에서는 소실점이 ‘우리’가 다시 만나는 미래의 지점으로, 「폭우 속에서 망가진 우산을 쥐고」에서는 멀어져가는 네가 끝내 사라지는 지점으로 읽혀요. 제가 다소 비관적으로 본 것 같기도 하지만, 저는 결국엔 ‘우리’ 자체가 와해되어 사라지는 흐름으로 읽었습니다. 아마도 타오르는 숲의 강렬한 이미지 때문일 겁니다. 시집에서 ‘엘리’라는 인물이 인상적이었는데 「우리들은 프리즘 속에서 갈라지며 (하)」에서 ‘영’은 방공호에서 쓰러진 채 발작하는 엘리를 향해 “네가 나빠. 다들 잘 감추며 사는데. 발작하는 네가 나쁜 거야.”라고 소리쳐요. 그런데 시집의 후반부에서 숲은 타오르고, 엘리는 타오르는 숲을 증언한단 말이죠.(「중력」 「다른 여름의 날들」) 엘리의 입을 틀어막으려고 해도 “숲이 타오르고 있어”라는 구절은 반복 삽입되고, 엘리와의 대화를 마지막으로 시집은 닫힙니다. 이러한 시집의 구조로 본다면 숲의 소실(消失)점이란 사실 숲이 불타서 파괴되어버렸음〔燒失〕을 뜻하는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어요. 그런 점에서 ‘우리’의 전망 또한 이 시집 안에서는 찾을 수 없을 것 같고요.

 

 

강혜빈 『밤의 팔레트』(문학과지성사)

 

189_386

오연경 강혜빈의 첫 시집 『밤의 팔레트』입니다. 시인은 ‘파란피’라는 이름의 사진가로도 활동하고 있죠. 한권의 시집을 단순히 성장담으로 환원할 수는 없겠지만, 자기를 부정하는 괴로움이나 낙인에 대한 두려움이 강했던 시기에서 자기긍정, 나아가 자기표현으로 향해 가는 과정이 담겨 있는 듯해서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안현미 시인이 직업을 다섯가지나 가져본 적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얼마나 고되었을까 싶은데 인터뷰 영상을 찾아보니 다행히 밝은 모습이었습니다. “옥상에서 떨어지기 직전에/나는 다시 태어났다”(‘시인의 말’)라는 고백도 있는데, 옥상에서 떨어지려던 그 영혼이 첫 시집을 통해 자신을 발화하면서 많이 회복되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본인한테도 또래 여성들에게도 의미있는 시집일 거예요.

 

전기화 저도 시인의 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나는 다시 태어났다”라는 선언에서는 자신에 대한 담담한 수용과 확신이 느껴졌고 “울고 싶을 땐 울자/힘껏 사랑하자”라는 구절은 ‘나’가 자신에게 하는 다짐이자 ‘너’에게 전하고 싶은 말로도 읽혔습니다. 그리고 “내가 너의 용기가 될게”에서는 ‘나’에게서 ‘너’로의 확실한 이행과 ‘나’와 ‘너’의 연루됨이 읽혔는데, 이 다섯줄의 흐름 자체가 시집의 지향을 보여준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제가 강혜빈의 시에서 좋았던 것은, 사소하다고 볼 수 있을 부사어들이 적실한 곳에 배치되면서 시의 정조를 반전시키는 장면들이었습니다. 「드라이아이스」를 보면 “그럼에도 나라는 것이,/감히 두 눈을 감으려 할 때”라고 하는데, 여기서 “감히”라는 시어가 인상적이더라고요. 이 단어 하나를 통해 앞서 반복되던 불확실한 방황의 포즈가 반전되면서 결기가 전해집니다. 「커밍아웃」에서는 “축축한 비밀”이 “알록달록한 비밀”로 전환되는 지점도 감각적이었지만, “옷장에서 알록달록한 비밀이 흘러나와/자라지 않는 발목 아래로, 말을 잊은 양탄자 사이로/기꺼이 불가능한 토마토에게로”라고 할 때 “기꺼이”라는 부사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렇게 “감히”나 “기꺼이” 같은 시어에서 배어나오는 화자의 태도가 독자에게 가닿으면서 영향을 미친다고 느꼈고, 시를 읽으면서 그런 디테일에 주목하게 됐습니다.

 

오연경 그런 디테일한 부사 하나에도 드러나듯 자기만의 독특한 문체로 확실한 시적 태도를 만들어내고 있어요. 경어체와 반말을 오가거나 비격식체나 구어체를 끼워 넣거나 이탤릭체를 활용하면서 입말 같은 느낌을 잘 살려냈어요. 양안다가 서사적인 장면화를 통해 연극 같은 시세계를 구축한다면 강혜빈은 생생하고 자연스러운 입말과 도발적인 말투에 기대어 감각적인 진술의 힘으로 밀고 나간다는 생각이 들어요. 다만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 감각적 표현이 때로 지나쳐 장식적으로 사용될 때가 있다는 겁니다. 가령 「팬지의 섬」을 보면 “멍들어가는 오후” “묽은 잠” “늙은 햇빛” “시든 약속” “딸꾹질하는 파도” 등 어휘마다 감각적 수식어를 붙이는 경향이 반복되고 있어요. 물론 시 전체의 분위기나 의미에 기여하는 부분도 있겠지만, 습관적으로 등장할 경우 공소해지는 느낌이 있습니다.

 

안현미 물론 전반적으로는 발랄하고 거침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ghost」에서는 “머리맡/시든 개 한 송이와 함께 잔다”라고 하는데, 한마리가 아니라 한송이인 거예요. 시에서 허용되는 표현들을 아주 산뜻하게 가져다 쓰고 있습니다. 시들이 모두 컬러풀하기도 한데, ‘강혜빈=파란피’라는 자기만의 상징이 있다는 게 장점이겠죠. 그리고 SNS에 시집의 제목을 따서 ‘밤팔러’라고 자처하는 팬들도 많다고 해요. 우리는 지금 이렇게 텍스트로 읽고 있지만, 이 시를 온라인 플랫폼에서 공유하면서 좋아해주는 독자들이 이미 많이 있는 거죠. 그 덕분에 시인이 퀴어라는 자기 정체성을 좀더 가볍고 명랑하게 보여줄 수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있는 것 같아서 부럽기도 하고요.(웃음)

 

오연경 1부에서 「너는 네, 대신 비,라고 대답한다」라는 시도 재미있었어요. 세부분으로 나뉜 이 시에서 첫번째 부분은 “지금부터 뒤꿈치를 밟으면서/쫓아오는 그림자가 있다 ” 로 시작하고 두번째 부분은 “지금부터 그림자를 앞질러/걷는 뒤꿈치가 있다 ” 로 시작합니다. 이탤릭체로 제사(題辭)처럼 제시된 두 구절은 어떤 태도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죠. 쫓기는 와중에도 정체성을 숨기거나 도망치는 데 급급하지 않겠다는 태도, 여전히 ‘뒤꿈치’지만 오히려 그림자를 앞질러 뚫고 나가겠다는 적극적인 태도가 보여요. 화자는 “어떤 투명함도 전시할 생각이 없으니까”라는 쿨한 말투로, “몸속에 흐르는 물까지 전부 상상할 거니? ”라는 도발적인 질문으로 관음증적 시선에 대응합니다. 이게 실제로는 감당하기 쉽지 않은 현실인데, 시인은 “어디에서도 살 수 없는 쨍강쨍강/그러나 와장창도 아니게”라는 발랄한 묘사로 그 현실의 어려움을 직관적으로 와닿게 하죠. 이처럼 감각적이고 자유로운 표현이 앞서 안현미 시인이 말씀하신 독자들의 새로운 향유방식하고도 잘 맞아떨어지는 것 같아요.

 

전기화 저는 그런 명랑함과 유쾌함의 이면에 대해서까지 생각해볼 수 있기에 이 시집이 의미있는 것 같아요. 이를테면 1부의 「꽃을 든 사람의 표정이 무엇인가 잘못되었다」에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우리겠습니까”라는 질문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 질문은 ‘덩어리들’과 적대하는 ‘우리’의 전선을 그으려는 시도로 느껴졌거든요. 그 전선이란 “못 머리에 휴지를 심는 사람에게/몇 명의 이해가 필요한지 알고 있다면”이라는 구절 중 ‘못 머리의 휴지’로부터 공중화장실의 나사형 불법카메라를 연상할 수 있는지 여부에서 그어질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한편 2부에는 유년기와 성장기에 관한 시들이 많습니다. 「돌아오려면 어디서부터 잘못된 이야기」를 보면 “나는 왜 나일 때만 목소리가 갈라지는 걸까”라고 묻고, 「등헤엄」에서는 “꽁무니에 가느다란 똥을 달고 나아가는/부끄러움을 모르는 지느러미의 기분”이라는 표현도 나타납니다. 시적 화자의 수치심과 자기분열, 자기혐오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인데, 이마저도 직시한 가운데 3부로 도달하기 때문에 3부에서의 환희가 더욱 커지는 것 같습니다.

3부에서는 ‘우리’에 관한 화자의 발화들이 주목됩니다. 「몇 시의 샴」에서 “나는 우리가 느끼는 감정을 응원해 모두들 눈 코 입을 가질 수 있을 때까지 오늘도 싸우고 구르고 부딪히겠지만”이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러한 긍정은 상황에 대한 진술이 아니라, 수행적인 발화로 읽혀요. 화자는 ‘보통’과 ‘보편’에 대해 의식하고 스스로를 검열하면서도 “있잖아, 보통이란 뭘까”라고 되물으며 정말이지 계속해서 ‘세계를 밀어내면서’ 나아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인지 3부의 시들은 스스로를 긍정하기로 선택한 주체들이 이전으로 돌아가지는 않겠다는 불가역성의 결기를 내보이는 것처럼 읽힙니다.

 

오연경 네, 3부에 이르면 자기 목소리에 힘이 더 실리는 것 같아요. 「몇 시의 샴」에서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잘 봐//그것이 우리가 죽어가는 방식 ” 이라고 할 때 비장함이 깃든 당당함이 느껴집니다. ‘잘 봐’라고 하는 건 무슨 과시가 아니라 그동안 ‘보통의 삶’으로 인정되지 않았던 것을 드러내겠다는 의지고,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던 세상을 향해 똑바로 보라는 명령이기도 해요. 짧고 단호한 명령으로 강렬한 임팩트를 불러일으키는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전기화 앓고 비관하면서도 다독이고 껴안고 다짐하며 ‘되어가는’ 과정이 잘 나타나요. 이를테면 「홀로그램」에서도 “우리가 졌다는 미신 ” 과 싸우는 화자가 나타나거든요. 이런 과정을 거쳐서 마지막 시 「무지개가 나타났다」에 이르러 “팔레트 위에서 뒤섞”이며, “똑같아 보이지만 모두 다”른 ‘우리’가 나타나 무지개를 확고부동한 현실로서 선언하는데, 이 장면은 특별하게 기억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안현미 1부는 ‘물방울(현재)’, 2부는 ‘빛(과거)’, 3부는 ‘무지개(미래)’ 이렇게 염두에 두고 묶었다고 해요. 첫 시집을 이렇게까지 집중력을 가지고 탄탄하게 묶었다는 점에 깊은 감동을 느끼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제가 이 시집을 읽으면서 가장 놀라웠던 건 양안다 시인도 그렇지만 이제 정말 세대가 달라졌구나 하는 점이었어요. 우리의 다음 세대는 자신의 목소리가 어떤 ‘컬러’인지, 그 ‘컬러’가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고 자신있게 말하고 있다는 점만 보더라도 말이죠.

 

오연경 마지막 시 「무지개가 나타났다」가 빚어내는 선언적인 효과를 보면서 황인찬의 시 「우리의 시대는 다르다」(『사랑을 위한 되풀이』, 창비 2019)가 떠오르기도 했어요. 황인찬이 우리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선언했듯 강혜빈도 “물방울들은 똑같아 보이지만 모두 다”르다면서 무지개가 나타났다고 선언하거든요. 첫 시집의 마지막 페이지에 이 시를 배치하면서 자신있게 출사표를 던지고 끝내는 것 같았습니다. 이런 점은 퀴어 정체성을 전략적으로 활용하기도 했던 미래파 시인들과의 차별성으로 볼 수 있을 듯해요. 「무지개가 나타났다」 같은 시는 당사자가 아닌 제삼자인 화자를 앞세우거나 퀴어를 전략으로만 활용해서는 결코 나올 수 없는 선언이니까요. 최근에 성소수자 중에서도 여성 성소수자에 주목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퀴어 안에서의 미세한 차별이나 여성 성소수자의 비가시성에 대해 이야기되는 상황이라서 강혜빈 시집이 더욱 소중하고 희귀하게 읽혔습니다.

 

안현미 그 당당함에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선언과 고백의 ‘파란피’가 되도록 많은 곳으로 흘러가기를 바랍니다. 비록 “우리의 애칭은 늘 그런 식이지/잡초. 멍청이. 잡초. 돌연변이.”(「타원에 가까운」)를 무한 반복한다고 해도 말이죠.

 

오연경 오늘 이렇게 여섯권의 신간을 두루 살펴볼 수 있어서 즐거웠습니다. 긴 시간 수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기화 두분 선생님과 함께 대화를 나눌 수 있어 좋았습니다.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안현미 좌담을 준비하면서 작가들의 유튜브 영상을 많이 찾아봤어요. SNS나 다양한 플랫폼을 통해 작품에 대해 얼마든지 활발히 소통할 수 있는 시대에 우리 이야기가 어떤 의미인지 고민이 되기도 했는데, 독자분들이 조금이나마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기를 바랍니다. (2020.7. 22 창비서교빌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