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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이 계절에 주목할 신간들

 

 

김태선 金兌宣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불가능과 공동체」 「밀레니얼 세대 작가의 삶」 등이 있음.

kimloup@naver.com

 

오연경 吳姸鏡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쓰는 기계의 존재론」 「김수영, 신화인가 현재인가」 등이 있음.

korin2@hanmail.net

 

전기화 田己和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황정은 다시」 「부풀어 오르는 모녀서사」 등이 있음.

octobervoice@naver.com

 

 

왼쪽부터 오연경 김태선 전기화 Ⓒ 신나라

왼쪽부터 오연경 김태선 전기화 Ⓒ 신나라

 

 

전기화 안녕하세요. 지난 계절에 이어 오연경 평론가와 함께 인사드리게 된 전기화입니다. 초대손님으로 김태선 평론가를 모셨습니다.

 

김태선 문학평론가 김태선입니다. 긴장된 마음으로 왔는데 대화에 잘 참여할 수 있을지 걱정도 되네요. 이번에 좋은 책들을 많이 읽게 되어서 한편으로는 참 즐거운 경험을 한 계절이었습니다.

 

오연경 이번 계절도 함께하게 되어 반갑습니다. 기다리던 작품들을 읽게 되어 즐거웠고 오늘 어떤 이야기를 나누게 될지 기대가 됩니다.

 

 

박서련 『더 셜리 클럽』(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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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화 먼저 박서련 소설로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합니다.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인 『체공녀 강주룡』(한겨레출판 2018)을 인상 깊게 읽은 기억이 나는데요, 역사적 인물 강주룡의 생애에 작가의 상상력을 덧입혀 소설로 복원해낸 흥미로운 작품이었습니다. 이번 소설은 워킹홀리데이로 떠난 호주를 배경으로 펼쳐지는데, 과연 박서련이라면 이 소재를 어떻게 풀어냈을지 호기심을 품고 읽게 되었습니다. 워킹홀리데이가 청년들의 버킷리스트이던 시절이 지나고, 이제는 탈낭만화된 이야기도 제법 나오기 시작한 시점이니까요. 다들 어떻게 보셨는지요.

 

오연경 우선 문체가 너무나 사랑스럽고 말랑말랑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본인이 이야기하고 싶은 주제와 스타일에 맞추어서 변신을 잘해내는구나, 이야기를 잘 만들어내는 작가구나 싶더라고요. 가독성과 흡인력도 좋았습니다.

 

김태선 스토리텔링에 참 능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의 이야기를 설정해놓고 결말을 향해 달려가는 강한 힘이 느껴져요. 전작 『마르타의 일』(한겨레출판 2019)에서도 동생의 죽음을 추적하는 과정과 임용고시 준비같이 일상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대비하면서 서사를 이끄는 점이 돋보였는데, 이번 작품에서도 사랑을 찾아 모험을 하는 여정이 다이내믹하게 그려지는 동시에 그 안의 작은 에피소드들이 잘 어우러지고 있습니다.

 

오연경 형식적으로도 새로운 시도가 보여요. SIDE A, SIDE B라는 이름으로 부를 나누고 이야기가 이어지는 길목에 일시정지 버튼, 플레이 버튼을 두고 문체를 다르게 구사했습니다. 카세트테이프 형식을 차용한 것인데 플레이 버튼을 누르면 서술자가 현실에서 겪는 사건들이 재생되고, 일시정지 버튼을 누르면 사건 전개를 잠시 멈춘 채 S를 향한 혼잣말을 진술하는 식입니다. 이 두가지 모드가 적절하게 섞이면서 1인칭 서술의 매력이 배가되는 것 같았어요. 일시정지 버튼에서 서술자가 “이건 진짜 비밀인데”(113면) 하고 말을 걸 때면 정말 옆에서 다정하게 속삭이는 듯한 느낌이 들더라고요.

 

김태선 마지막에는 테이프를 빼는 ‘꺼내기’ 버튼까지 등장해서 재미있었습니다. ‘더 셜리 클럽’도 호주에 실제 존재하는 클럽이라고 해요. 작가가 축제에서 그 클럽을 보고 자기도 영어 이름이 셜리라고 외치고 싶었다고요. 그런 경험이 담겨 ‘설희(셜리)’라는 인물이 나온 것 같습니다. 책을 읽고 ‘더 셜리 클럽’ 실제 홈페이지에 들어가보았더니 보라색과 분홍색으로 꾸며져 있어 “보라색 목소리”(28면 외)로 묘사된 S가 바로 연상되기도 했습니다.

 

전기화 말씀하신 것처럼 이전 작품들에 비해 확실히 밝고 명랑한 분위기이고 지금 세대의 감수성에 맞는 문체와 형식을 도입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소설에서 설희가 호주에서 받는 환대가 인상적이었는데요, 짝사랑 상대인 S의 호의는 물론이고 ‘더 셜리 클럽’의 할머니들도 아낌없는 환대를 보여줍니다. 다소 비현실적이라고 느끼면서도 독자들에게 이 따뜻함을 마음껏 누리도록 하는 일종의 판타지소설이구나 생각하며 읽었습니다. 설희가 특별한 기여를 증명해 보이지 않고서도 ‘더 셜리 클럽’에 임시 명예 회원으로 편입되어, 공동체의 성원으로서 다정함과 권리를 누리는 장면들은 시민권에 대한 이상화된 그림처럼 보이기도 했고요.

 

오연경 주인공이 받는 환대가 판타지로 느껴지는 면이 있죠. 분홍색 표지나 전반적인 만듦새가 예쁘게 포장된 선물 같기도 하고요. 하지만 작품 안에는 이민자와 ‘혼혈인’이 받는 부당한 대우 등 현실의 일면이 엿보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도라’라는 인물은 “너 같은 부류(your kind) 내가 알지. 잘 알아”(58면)라고 설희를 비웃으며 아시아인에 대한 고정관념을 드러내요. 부류를 가르고 차별하는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그런데 ‘더 셜리 클럽’이라는 커뮤니티가 다른 가능성을 열어주지요. 작가는 국적, 세대, 인종 같은 부류를 떠나 ‘이름’이라는 우연성만으로도 무조건적인 연대와 우정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 같습니다. “여자도 남자도 아닌 것 같았다”(32~33면)라고 묘사되는 S 역시 성별이나 인종이나 국적이 아닌 ‘보라색 목소리’와 같은 그만의 독특함으로 식별되는데, 개별적인 관계 속에서 정체성을 모색하려는 작가의 의도가 엿보였어요.

 

김태선 S는 “한국인으로도 독일인으로도 영국인으로도 내가 충분하지 않은 느낌”(102면)이라는 정체성 혼란을 겪는 인물인데, 여기서도 ‘더 셜리 클럽’의 할머니들이 다른 생각을 하게 해줍니다. 선주민 혼혈인인 쌍둥이 할머니들이 설희에게 보내는 엽서에서 “여러 문화적 배경을 지닌 사람들은 그 문화적 배경에서보다 그들을 사랑해 주는 사람들 안에서 정체성을 찾게 된다”, 그리고 “네가 주는 사랑이 그 사람을 완성해 줄 거다”(199면)라고 해요. 서로를 완성하게 해주는 사랑이라고 해야 할까요, 오롯이 자신으로서 존재할 수 있게끔 하는 만남과 연대를 작가가 그리려 했던 것 같습니다.

 

전기화 재미있게 읽었지만 아쉬운 부분도 더러 있었는데요, 일단 형식적으로 보면 대화 곳곳에 영어가 괄호로 병기되어 있어요. 호주가 배경이니만큼 대화의 뉘앙스를 살리고 싶었던 거겠지만, 어느 곳은 문장 전체를 영어로 병기하고 어느 곳은 특정 단어만 병기하는 식이라서 독자에 따라 이런 비일관성이 거슬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연락이 두절된 S를 설희가 찾아 나서는 전개가 저한테는 너무 일방적으로 느껴졌어요. S의 의중을 알지 못한 채 설희가 그 동선을 추적하고 쫓아가는 서사의 흐름에 갸웃하기도 했습니다.

 

김태선 『마르타의 일』에서도 그런 맹목성이 드러나죠. 동생의 복수를 하는 과정에서 누군가의, 특히 전도사라고 하는 남성의 조력에 의존하는 면이 없지 않고, 복수의 과정이 매끄럽게 걸림돌 없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작위적인 느낌도 듭니다. 이번 작품에서도 할머니들의 조력이 그때그때 짜인 각본처럼 등장하고 사건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풀리기 때문에, 갈등을 손쉽게 해결하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오연경 그런데 저한테는 그런 요소들이 일종의 유머로 다가왔어요. 독자에게 윙크를 보내면서 ‘다 알지? 우리 이렇게 하기로 하자’라고 짜고 치는 판을 벌이는 것처럼요. 이미 ‘더 셜리 클럽’의 무슨무슨 지부를 나열할 때부터 코믹한 기분이 들잖아요. 후반부에 서사를 끌어가는 것은 S의 행방을 쫓는 절박한 사건이지만, 그 상황을 통해 “셜리를 돕는 게 우리를 돕는 거니까”(141면)라고 연대의 축제를 마음껏 펼쳐 보일 수 있는 거죠. 다만 작가의 메시지가 어떤 대목에선 너무 도드라져서 그런 유머가 반감되는 면이 있었어요. 쌍둥이 할머니의 엽서도 주제를 너무 압축적으로 드러내고 있어서 정답을 보는 것 같았고요. 그럼에도 호주라는 배경과 여행이라는 장치를 통해 지금 여기의 현실에서는 섣불리 시도하기 어려운 명랑한 세계를 그려냈다는 점, 그것으로 따뜻하고 아름다운 가능성을 선사해주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시도였다고 생각됩니다.

 

전기화 저도 호주라는 이국에서 펼쳐지는 사랑과 환대가 가득한 소설을 읽으니 기분이 환기되어 좋았습니다. 장기화된 코로나 시국에 필요한 소설이 나와주었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사실 박서련 작가는 온라인 문학 플랫폼 ‘던전’의 운영진이기도 한데요, 그 자신이 창작자이면서 창작이라는 행위가 이루어지는 문학장의 조건에 대해 메타적으로 고민하고, 그 고민의 결과로 동료들과 함께 새로운 플랫폼을 출현시켰습니다. 동시대 문학장을 역동적으로 구성해내는 작가라는 점에서도 박서련이 ‘하는’ 문학의 다음 행보가 기다려지네요.

 

 

김금희 『복자에게』(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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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화 『경애의 마음』(창비 2018) 이후 김금희의 두번째 장편소설입니다. 제주로 좌천된 판사 이영초롱이라는 인물이 그곳에서 과거의 기억과 인물들을 만나고, 현재의 삶을 마주하는 이야기인데요, 다양한 맥락에서 읽어낼 수 있는 풍부한 서사라고 생각했습니다.

 

김태선 김금희의 소설을 일관되게 관통하는 주제가 있다면 ‘마음’ 같습니다. 이번 작품에서도 다양한 마음의 형상들을 잘 보여주고 있어요. 특히 유년 시절의 아픈 상처를 공유한 이영초롱과 복자가 삼십대에, 조금 성숙한 듯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성장하지는 않은 상태에서 다시 만나면 어떠한 모습일까 작가 스스로 궁금해하며 써내려간 소설 같아요. 그러한 만남이 빚어내는, 두 마음이 오고 가는 독특한 움직임을 바라보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경애의 마음』이나 소설집 『너무 한낮의 연애』(문학동네 2016)의 경우에는 마음을 다룰 때 상실에서 출발했던 것 같거든요. 인천 호프집 화재사건이 상징하듯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것들, 어제는 있었다가 오늘은 없다는 ‘사라짐’의 관점에서 마음을 살펴보았다면, 이번엔 좀 다른 결이 느껴집니다. “그렇게 해서 함께 걷기 시작한 그애와 내가 그날의 해변 길에 있다. (…) 그해 그 섬에서의 시작이 있었다”(21면)라는 도입부에서부터 달라진 인상을 받았어요. 우리가 헤어지더라도 사라지지 않는 무엇이 있다는, ‘있음’에 대한 확고한 믿음에서 출발한 이야기 같습니다.

 

오연경 제주도를 배경으로 사람, 관계, 기억, 삶의 방식, 전통, 나아가 돌 하나까지 모든 오래된 것들에 대한 존중을 드러내는 것도 그 ‘있음’에 대한 긍정과 연결해 생각해볼 수 있겠네요. 이 소설은 어린 시절에 추방당하듯이 제주도의 한 섬으로 가야 했고 이제는 판사가 되어 그 섬에 돌아온 이영초롱의 성장서사입니다만 그와 동시에 대학 시절에 대한 죄책감을 안고 고고리섬의 보건소 의사로 살다가 지금은 대전에서 새로운 가족을 만든 정희고모의 성장서사이기도 하고, 포부와 신념을 가지고 판사직을 시작했지만 이혼 후 직업인이자 양육인으로서 고충을 겪고 있는 양판사의 성장서사이기도 해요. 또 간호사로 일하다 산재로 아이를 유산한 후 의료원에 맞서 싸우는 고복자의 성장서사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다양한 계층, 다양한 나이대 여성의 성장이 여러 층으로 겹쳐진 채 상처를 주고받고 지지도 해주며 전개되는 이야기가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제주, 하면 일하는 여자들의 세상으로 읽힌다”(189면)라는 말처럼 제주도를 배경으로 하면서 여성 인물이 중심이 되는 서사가 자연스럽게 펼쳐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김태선

김태선

김태선 또 하나 마음에 와닿은 것이 여성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자신들을 롤 모델로 삼지 말라고 말했다”(175면)라는 부분이에요. 황정은의 『연년세세』에서도 어머니 이순일이 자녀들은 “그 일을 이야기로도 겪지 않기를 바”(133면)라고 “끔찍한 일을 겪지 않고 무사히 어른이 되기를, 모두가 행복하기를 바”(138면)라죠. 자기 뒤에 따라올 사람들이 좀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길을 닦아주고자 애쓰는 게 느껴졌습니다. 이 작품에서 드러나는 그런 ‘마음 씀’이 좋았습니다.

 

전기화 저도 일하는 다양한 여성들이 등장하는 점이나 여성 인물들 간의 관계성이 부각되는 장면들에 눈길이 갔습니다. 대체로는 따뜻한 분위기로 읽으신 것 같은데요, 저는 ‘복자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발화자이자 이 소설의 일인칭 화자인 이영초롱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어요. 이영초롱은 판사직에 대해 상당한 회의감을 지니고 있고, 스스로를 “냉랭한 사람”(57면)이라고 인식하며 사람을 잘 믿지 못하는 인물입니다. 자신의 감정을 파악하고 분석하는 데 능숙한 화자이기도 한 덕분에 단순하지 않은 감정의 복합물을 섬세하게 읽어내는 작가의 특장점이 이번 소설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됩니다. 이를테면 어린 시절 고고리섬에서 복자와 나눈 우정을 단순하게 낭만화하지 않고, 자신이 느꼈던 고립에 대한 두려움과 절실함을 정직하게 서술하는 것처럼요. 다만 다른 인물들과 관계 맺을 때 드러나곤 하는 마음의 벽이랄까, 그것의 두께가 한없이 얇아지다가도 갑자기 두꺼워지기도 해서, 저로서는 읽는 내내 이영초롱과 상당히 복잡한 방식으로 관계를 맺어야 했어요.

 

오연경 저는 이처럼 차갑고 날카롭고 당돌한, 소설 속 표현을 빌리자면 ‘요망진’ 서술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만약 서술자가 제주의 공동체적인 정서에 쉽게 동화되는 인물이었다면 가치관이 충돌하는 장면을 그리기 어려웠을 겁니다. 그리고 독자를 위해서도 영초롱이라는 외부인의 시선을 통해 낯선 세계에 대한 거리감을 두고 시작하는 것이 필요했다고 봅니다. 저는 오히려 미안함 속에서도 끝까지 자기 고집과 냉정한 태도를 유지하는 모습이 현실감 있게 다가왔어요. 그리고 영초롱의 이런 인간적 부족함 때문에 복자나 고오세와의 관계가 균형감을 이룰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영초롱은 어린 시절에 공부를 아무리 잘했어도 복자한테 꼼짝 못하고 제주의 문화를 배워야 했고, 나중에 판사가 되어 돌아와서도 ‘촌스러운’ 고향 친구인 고오세한테 ‘판사 에고’가 너무 강하다는 지적을 받잖아요. 배경이나 지위와 상관없이 각자의 개성이나 삶의 경험에서 얻은 지혜를 공유하고 서로 긴장된 관계를 유지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김태선 영초롱이 자신의 좋지 않은 면을 있는 그대로 서술하는 덕분에 독자들은 그의 맹목성도 알아챌 수 있습니다. 복자가 자신을 위해 재판에서 빠져달라고 부탁을 해오자 영초롱은 “너 지금 일종의 선을 넘었어”(217면)라고 분노합니다. 내가 아니면 이 재판은 승소하지 못한다는 강한 믿음은 영초롱 입장에서는 책임감이지만, 남들이 보기에는 맹목적인 돌진이죠. 이런 결함들을 품고 있기 때문에 이 인물의 성장이 더 잘 느껴지는 것 같아요.

 

오연경 그런데 다른 인물들에 비해 정희고모와 이규정의 이야기는 너무 소략하게 처리되어서, 이규정에 대한 정희고모의 죄책감이나 사랑의 감정을 이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이규정이 죽은 후 그녀의 남편과 아들과 함께 사는 독특한 동거형태는 일종의 용서를 구하는 일일 텐데, 고모가 치르기로 한 댓가가 너무 큰 게 아니가 싶었어요. 하지만 “미안함이야말로 가장 인간적인 감정”(66면)이라는 정희고모의 말을 생각해보면, 90년대 학생운동의 명분이나 결과와는 별개로 그것이 개개인의 삶에 남긴 깊은 상처와 그에 대한 돌봄의 책임을 묻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어요.

 

전기화 제주의료원의 산재 사건을 모티프로 삼았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소설 속에는 한국사회의 다양한 역사적 맥락이 동시적으로 작동하고 있거든요. 이영초롱이라는 캐릭터를 설명할 때에 IMF 외환위기의 여파를 빼놓을 수 없고, 제주도민을 보는 시각에도 4・3 사건이 깃들어 있으며, 정희고모의 사연에도 90년대 학생운동의 기억이 강력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어요. 이렇게 인물들의 배후에 핵심적인 사건들이 배치되는 과정에서 이정희와 이규정의 사연이 충분히 다루어지지 못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사회역사적인 맥락 위에 놓인 인물을 입체적으로 형상화하려는 시도가 감탄스러우면서도, 동시에 인물들 각자에게 촘촘한 맥락을 부여하는 것이 200여면 분량의 소설에서는 다소 과하지 않았나 생각도 들고요.

 

김태선 많은 사건들을 언급하기 때문에 이야기의 흐름이 다소 분산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었어요. 하지만 정치적인 큰 사건을 중심에 두고 인물을 활용한 게 아니라 이를 역전시켜 인간의 삶을 앞으로 드러낸 점은 이 소설의 미덕이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요즘은 소설에서의 투쟁방식이 조금은 변했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우리 삶 가까이에 침투해 있는 사회적 문제와 갈등의 요소들을 살피며 대립과는 다른 길을 모색하는 소설들이 눈에 띕니다. 김금희의 소설 역시 단순히 대립만 하는 게 아니고 서로 소통하는 가운데 더 나은 지점을 모색해가는 과정을 그리고자 하고, 특히 마지막 부분이 기억에 남습니다. 아이 재우는 제주민요가 등장하면서 관객이 손을 잡고 화합하는 장면이 나오거든요. 동생 이영웅의 말도 인상적인데 어떤 좌절에 대해서 “실패가 아니라” “인생을 더 깊이 용인한다는 자세”(233면)라고 하죠. 서로 갈등하는 모습도 있지만 용인하면서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태도, 미워하더라도 존중하는 관계의 힘이 보입니다.

 

 

황정은 『연년세세』(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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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화 다음으로는 황정은의 『연년세세』에 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기발표작 두편과 미발표작 두편이 엮였고 이순일이라는 여성과 한영진, 한세진 두 딸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연작소설집입니다. 「파묘」를 통해 압축적으로 제시된 ‘가족’의 이야기가 어긋나면서 덧대어지고 시공간적으로 확장되는 흐름이 읽혔습니다.

 

김태선 처음에는 이 연작을 가족소설로 이해했다가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가족 이야기로 읽을까?”(185면)라는 ‘작가의 말’을 보고 다시 고민하게 됐어요. 그리고 결국 지금 여기의 삶을 살고 있는 여성들의 이야기라는 생각에 다다랐습니다. 가족이라는 말은 따뜻하기도 하지만 가부장제의 여러 억압이나 착취 같은 어두운 면도 담고 있잖아요. 그야말로 전근대적인 남성중심사회에서 여성으로서 살아가야 했던 이순일의 이야기가 「무명無名」에서 너무나 처절하게 드러납니다. 이런 식으로도 사람이 살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아픈 삶, 견디기 힘든 삶이 그려지는데 그럼에도 안간힘을 써서 그를 살아남게 한 것은 무엇일까 생각해보게 됐습니다.

 

오연경 가족 구성원을 엄마, 아빠, 언니 같은 호칭이 아니라 세 글자 이름으로 또박또박 호명하고 있어요. 가족 호칭이 불러오는 끈적끈적한 정서나 역할에 대한 요구와 거리두기를 하면서 한명 한명을 독립된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황정은 소설의 익히 알려진 특징이지요. 이 연작을 가족서사로 보지 않는다 해도 여러 소설에 겹쳐서 등장하는 ‘용서할 수 없음’이라는 것은 가족과 정확히 연결되는 감각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하고 싶은 말」에서 한영진이 엄마에게 어떤 원망의 말도 할 수 없는 까닭은 그 말을 듣는 “이순일의 얼굴을 볼 엄두가 나지 않”(83면)아서예요. 「파묘」에서도 한세진은 자신이 하는 게 정확히 효도는 아니라고, “엄마의 웃는 얼굴을 보았다면 누구라도 마음이 아팠을 거라고, 언제나 다만 그거였다고”(44면) 합니다. 지긋지긋하지만 그의 얼굴에 떠오르는 고통이나 괴로움은 차마 바라볼 수가 없는, 미워하지만 그 미움을 딱히 드러내거나 해결할 수 없고 용서할 수는 더더욱 없는, 그런 상태로 맞붙어 살아가야만 하는 가족의 관계성이 바로 ‘용서할 수 없음’이라는 감각과 연결되는 건 아닐까 합니다.

 

전기화 「파묘」와 「하고 싶은 말」은 기발표작으로 이미 접했지만, 이번에 소설집으로 연달아 읽는 경험이 특별히 좋았습니다. 우선 「파묘」는 굉장히 밀도가 높은 소설입니다. 둘째 딸 한세진을 초점화자로 하여 진행되지만, 소설의 문장과 행간을 살피면 사실상 이 ‘가족’의 역사를 톺아볼 수 있기 때문이죠. 이를테면 한세진의 사소한 동작과 언행 하나하나에는 엄마 이순일을 향한 배려가 깃들어 있고, 그건 구체적이고도 미세한 노동으로 수행됩니다. 한세진의 말대로 ‘효’라는 개념으로 묶기엔 어색한, 인간적 존중에 가깝죠. 한세진은 이순일이라는 한 사람이 지닌 맥락을 풍부하게 읽어내고 인정할 수 있는 여유를 지니고 있어요. 그리고 그 여유란 적절한 거리감을 통해 마련됩니다. 그러나 첫째 딸 한영진의 위치성은 좀 다릅니다. 「하고 싶은 말」에서 한영진과 이순일의 노동은 서로 얽혀 있고 그들의 일상은 너무나 달라붙어 있습니다. 한영진은 자신이 식구들을 먹여 살려왔다는 자부심을 지니고 있지만, 동시에 소위 ‘정상가족’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이순일에게 양육 문제를 절대적으로 의존해왔죠. 같은 모녀관계여도 가족 내 위치에 따라 쌓아온 관계의 질감과 점성이 다르고, 두편의 소설은 일일이 설명하지 않고서도 독자들에게 그걸 느끼도록 합니다.

 

김태선 지금 여기에서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하는 모색이 이 소설의 출발이었을 것 같아요. 「하고 싶은 말」에서 한영진이 남편 김원상에 대해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68면)라고, “그냥, 생각을 덜 하는 것”이라고, 그게 “평범한 사람들이 매일 하는 일”(70면)이라고 합니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의 ‘악의 평범성’을 떠오르게 하는 말인데, 평범성이란 결국 진부하다는 얘기 아닐까요. 진부한 말만 하고 판에 박힌 사고만 할 때 드러나는 악의 모습이죠. 김원상은 한영진과 식구들을 업신여기는 듯한 태도를 보이면서도 무릎이 아픈 이순일을 위해 자기 등을 내어주기도 하고, 그 모습에 한영진의 마음이 다시 누그러지기도 합니다. 이처럼 어떤 일들은 덮어두고 지나가야만 우리가 살 수 있는 것 아니겠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황정은은 거기 침투한 어둠을 자꾸만 돌아보게 해요. 「다가오는 것들」에서 미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윤부경(안나) 사이에서 태어난 노먼은 한국어를 배우지 않았는데, 노먼 자신은 어머니를 혐오하고 무시한 언어를 거부하는 일이라 했지만, 그것이 결국 “안나를 양갈보라고 부른 그 사람들”에 대한 동조이며 “안나의 언어를, 자기 모어를 경멸 속에 내버려둔”(177면) 것과 다름없다는 점이 드러나죠.

 

오연경 한두가지 커다란 나쁨보다 일상의 소소한 나쁨들이 좋지 않은 세계를 만드는 데 압도적인 몫을 한다는 작가의 말이 생각나네요.(『파씨의 입문』 인터뷰, 알라딘 2012.2.19.) “어떤 생각이 든다고 그 생각을 말이나 행동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고 버텨보는 것”(「하고 싶은 말」 70면)은 소소한 나쁨을 줄이는 길일 수 있습니다. 황정은은 이미 전작들부터도 무심히 내뱉은 단어 하나에 어떤 폭력이 깃들어 있는 건 아닌지 예민한 촉을 세워왔어요. 「다가오는 것들」에서 하미영은 ‘명품 도시’라는 말을 용서할 수 없다고 하죠. 거대한 무엇, 가령 4대강사업만 용서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안산에 세월호 희생자 추모공간인 생명안전공원을 세우면서 ‘명품 도시’ 같은 단어를 입에 올리는 이 현실을 용서할 수 없다는 뜻일 거예요.

 

전기화 「무명」 이야기도 좀더 나눠보고 싶습니다. 이 소설은 구술사 작업을 연상시키기도 하는데, ‘대문자 역사’에서 누락된 여성의 삶을 구술로 기록하고 사회역사적 맥락과 연결하는, 여성주의적인 역사 쓰기 방법론의 소설적 버전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이순일은 한국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뒤 고된 식모살이를 하고 파독 간호사를 잠시 꿈꾸며 경제발전 시기를 온몸으로 지나온 인물입니다. 이모인 윤부경을 만나러 가는 때도 1987년으로 설정되어 공기에 최루탄 냄새가 떠돌았다고 묘사되죠. 한 여성이 현대사를 통과하면서 체험한 시대의 질감을 냄새와 맛, 촉감 등의 구체적인 몸의 감각을 경유하여 정교하게 재생하는 소설이라고 생각합니다.

 

오연경

오연경

오연경 우리 소설이 그간 여성이 겪어낸 현대사를 다뤄오지 않은 건 아니에요. 얼른 떠오르는 것으로 박완서의 『엄마의 말뚝』(1980~91), 오정희의 「유년의 뜰」(1980), 황석영의 『심청, 연꽃의 길』(2007) 등이 있는데요, 이들 작품에서 여성은 가부장제, 전쟁, 동아시아 식민지화 등 특정한 역사적 상황과 고정적으로 매개된 채 전형성을 띠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연작소설에서는 한세진과 한영진의 시선으로 그려지던 이순일이 세번째 작품에 와서 직접 자기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입체성을 지니게 됩니다. 할아버지의 “저거 하나 남았어”(102면)라는 말, 고모 가족의 폭력적 부림, 한중언의 무심함, 김원상의 무시, 한영진에게 물려준 순종, 한만수가 내면화한 모성 신화, 안나에 대한 한인들의 멸시에는 면면히 이어져오는 가부장제의 다양하고 복잡한 양상들이 변주되어 있어요. “자기 손으로 건넨 것이 그 아이들의 손으로 넘어가 쪼개졌고 그 파편을 쥐고 있느라 아이들이 피를 흘리는 거라”(109면)는 이순일의 가책에는 나쁜 것을 전수하는 삶의 양식에 대한 자각이 들어 있는 것처럼 보였어요. 시대의 억압뿐 아니라 자기억압, 전수되고 변주되는 억압, 세대 간의 관계 속에서 또다른 방식으로 일상화되어 있는 억압을 이야기한 것이 『연년세세』의 특별한 지점이라고 생각됩니다.

 

김태선 그래서인지 이순일의 방에 대한 묘사가 기억에 남습니다. 무언가를 버리지 못해 “매 세기마다 다른 퇴적물이 쌓인” 듯한 공간인데, 이순일은 거기서 “사라진 것도 잃어버린 것도 아닌 잊은 것일 뿐, 거기 다 있을 테니까”(111면)라고 하며 편안함을 느낍니다. 시간을 기록하는 지층 같은 상징으로서 묘사된 것일 텐데, 다른 소설에서도 앞선 세대의 이야기가 다른 형식으로 지층의 무늬처럼 반복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가령 「무명」은 이순일이 서너살쯤 눈더미에 박혔던 기억으로 시작되고, 「다가오는 것들」의 도입부에도 어머니가 아기를 던지는 장면이 나오죠. 그런 장면의 반복을 통해 어떤 일들은 또다시 벌어지지만, 이순일의 삶과는 다른 방식으로 여기에서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강한 의식을 담았다고 생각됐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실린 「다가오는 것들」이 새로운 흐름에 대한 기대, 불안과 희망을 함께 내포한 작품으로 읽혔어요. 다만 한세진의 삶에 관해서는 조명이 덜 된 것 같아 조금 아쉽습니다. 「파묘」와 「다가오는 것들」에서 초점인물로 쓰였지만, 그의 역할은 목격자로만 머물러 있어요. 한세진의 오늘을 이루게 된 삶의 이력이 더 담겨 있었다면 어땠을까 합니다.

 

오연경 마지막 단편 「다가오는 것들」은 이순일과 윤부경, 그들의 자녀인 한세진과 노먼, 그리고 노먼의 딸인 제이미로 이어지는 세대의 이야기를 하나로 꿰어서 보여주지요. 첫 단편 「파묘」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먼 과거를 돌아 갑자기 현대 뉴욕으로 확 끌려들어오는 것 같아 이질적인 느낌도 들었어요. 하지만 한세진과 하미영의 관계나 그들의 삶의 태도, “안나는 안나의 삶을 살았어, 여기서”(178면)라고 말하는, 노먼과는 다른 제이미의 이해 방식을 보면서 어떤 기대감을 갖기도 했어요. 대단한 로맨스나 화해에 대한 기대가 아니라, 그 결과가 행복하든 그렇지 않든 아무튼 이전 세대와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죠. “울고 실망하고 환멸하고 분노하면서, 다시 말해 사랑하면서”(182면) 삶은 바쁘게 지나갈 테지만, 지금 여기로 다가오는 것은 ‘연년세세’ 이어져온 것과는 다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은경 『한 사람의 불확실』(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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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화 이제 시집 이야기를 나눠보겠습니다. 2017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한 오은경의 첫 시집부터 이야기해보죠.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하나의 일관된 내러티브로 파악하기는 어렵고, 어쩌면 애써 의미를 부여하려는 시도를 어색하게 만들어버리는 시집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오연경 의미나 메시지를 전달하기보다는 진술이나 묘사의 방식으로 어떤 사건이나 감각을 배열해서 현실이면서도 현실이 아닌 세계를 보여주려 한 것 같아요. 공터나 집, 창가, 마당처럼 일상적인 공간에서 단순하게 툭툭 주고받는 일상적인 대화가 오가는데, 누가 말하고 누가 받는지 알기가 어렵고 맥락이 잘 형성되지 않거든요. 표제시에서도 “당신의 지난 일들을 보고 들었습니다 같은 자리에서”라고 말한 뒤 이내 “우리는 정말 같은 자리였던 적 있었을까,” 하고 물음으로써 불확실성을 드러냅니다. 어쩌면 이게 시인이 보여주려는 세계 같아요. 같은 자리에서 보고 들었다 할지라도 각자의 기억과 해석에 의해 구성된 세계는 다를 것이고, 심지어 내가 구성한 세계조차도 다시 왜곡되거나 변형되면서 계속 달라질 수 있는 것이지요.

 

김태선 2010년대 중반 이후 등장한 또래 시인들과 공통된 세대 경험이 담겼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사람의 불확실’이라는 제목에서 박세미의 『내가 나일 확률』(문학동네 2019)이 떠올랐는데, 스타일과 내용은 다르지만 나를 불확실하게 느끼고 자신이 바라보는 것들에 대해서도 불안해한다는 점에서요. 박세미가 기성세대에게 요구받는 ‘나’로 인해 자신과 괴리감을 느낀다면, 오은경은 누군가를 만나고 대화할 때 나의 여러가지 모습, 나와 관계하는 여러 당신들의 모습에 집중합니다. 특이한 점은 그것들을 내러티브로 서술해가는 게 아니고, 마치 동시에 존재하는 레이어처럼 겹겹이 중첩시켜 드러냄으로써 시간성을 탈구하고 이질적인 틈을 만들어낸다는 거예요. 그래서 문장을 따로 떼어놓고 보면 그렇게 어렵지 않은데, 시간의 선형에 따라 읽어내려 하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미로 속에서 헤매게 되죠. 서로 다른 시간과 장소의 인물들이 하나의 시공간에 있는 것처럼 포개어져 반복되는 것으로도 보이는데, 이는 마치 나아갈 길을 찾지 못한 채 방황하는 오늘날 젊은 세대의 현실감각이 어떠한 것인지를 형상화한 듯한 모습입니다.

 

전기화

전기화

전기화 상대에게 말을 거는 화법이 눈에 띄는데, 말을 거는 상대가 유령같이 느껴지기도 했어요. 여러 시에 걸쳐 ‘수지’ ‘유미’ ‘지수’ 같은 고유명사가 나타나지만 특정한 인물이라기보다는 화자의 기억과 경험이 중첩되어 만들어진 유령의 표상처럼 느껴졌습니다. 이를테면 ‘수지’가 등장하는 「눈사람」이라는 시를 보면 “눈”의 겨울과 “매미”의 여름, 과거와 현재가 중첩되어 있고, 어떤 것이 수지의 말이고 어떤 것이 나의 말인지가 뒤섞여 있고 어쩌면 중요하지도 않아요. 엉킨 실타래를 풀듯이 하나씩 풀어내어 여러 사건들을 순차적으로 시간대에 맞춰 배열하는 독법도 가능하겠지만, 기억과 정념이 엉켜 있는 상태를 그대로 통과하길 권유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독자들에게 남겨지는 시적 경험을 언어화하기 어렵고요.

 

김태선 부재하는 상대를 향해 말을 건네는 셈인데, 그럼으로써 그가 ‘부재하는 모습으로서 바로 지금 여기 현전하게 되는’ 그런 기묘한 순간이 현현됩니다. 어쩌면 시인은 시쓰기를 통해서만 가능한 기묘한 형태의 소통을 탐구하려 한 것은 아닐까요. 서로 다른 시간대에 속해 있기에 만날 수 없던 것들을 만나게 하고 또 말을 건네는 일과 같은 것을요. 그런데 한가지 의외인 점은 이런 가운데 누군가를 비난하거나 추궁하는 말들은 굉장히 정확하고 직설적인 언어로 표현된다는 점이에요. 이러한 비난의 말은 부재하는 이들을 다시 이곳으로 불러들이고자 하는 노력으로 보이기도 하고, 혹은 유령처럼 사라지는 것들이 불러일으키는 불확실함이 실상은 화자가 이 세계에서 느끼는 현실감각이라는 걸 방증하는 것 같기도 해요.

 

오연경 ‘시쓰기를 통해서만 가능한 기묘한 형태의 소통’에 대한 탐구라는 말이 적확한 것 같습니다. 특히 시의 곳곳에 질문들이 많이 등장하는데요, 답을 구하는 질문이라기보다는 당연하게 전제되어 있는 확실성에 균열을 가하고 어쩌면 현실에 더 가까울지 모르는 불확실성의 세계를 드러내려는 질문으로 보여요. 「서클」을 보면 “너와 만났던 나는 누구이고 다른 사람들은 다 정체가 뭐야? 내가 누군가가 되었던 것처럼/너도 나를 이해해 줄 순 없었어?”라고 물어요. 내가 늘 다른 누군가가 되어 참여해야 했던 대화의 장면들을 상기하면서 불확실한 정체성과 이해의 어려움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폭풍처럼 쏟아지는 질문들이 따지거나 비난하는 것으로 들릴 때도 있지만 “내가 달리 뭘 할 수 있을까?”(「경험」), “이러는 내가 안전한가?”(「코스모스」), “조금만 버티면/결과가 달라질까?”(「보푸라기」)처럼 불안하고 위태로운 마음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이처럼 오은경 시에서 ‘한 사람의 불확실’이란 기존의 정체성이나 확실성에 대한 의심만이 아니라 자신의 말과 행위가 어떤 파장을 일으키고 어떻게 되돌아올지 예상할 수 없다는 불확실성까지 포함하는 것 같아요.

 

전기화 그런 면이 잘 드러나는 시가 「영향력」 같아요. “나는 내 집에 어째서 수지가 와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지만, 이미 ‘수지’는 와 있고 그로 인해 영향을 받고 있는 상태입니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영향들 속에 이미 둘러싸여 있는 데다가, 실상 ‘나’ 또한 상대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 알 수 없죠. 자신의 존재를 열고 타자의 영향을 받아들이겠다는 적극적인 능동성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침입당하고 침해받는 자의 포즈를 취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손쓸 수 없는 영향력 속에 놓여 있다는 것이 화자의 항시적인 조건 그 자체처럼 읽힙니다.

 

김태선 화자를 불확실하게 만드는 요소 중에 이 세계의 구조적인 문제도 있다는 점을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머리맡을 나는 기어서 지나왔다”(「지진」)라는 시구에서 알 수 있듯, 화자는 무언가를 뚫고 나가려 하지만 그게 엄청난 추진력을 얻지는 못하고 겨우겨우 안간힘을 쓰면서 빠져나오는 모습이에요. 제가 세대적인 경험이 중요하다고 본 것이, 요즘 시인들은 문예지에 시를 발표하거나 시집을 내는 것 외에도 브이로그, 메일링서비스, 웹진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잖아요. 오은경 시의 화자들도 ‘나’와 ‘당신’이라는 심급을 여럿으로 만들고 또 한곳에서 여러 시간을 반복하듯 중층화하는 모습인데 이를 살아남기 위한 다양한 투쟁을 벌이는 것으로 이해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연경 그런데 투쟁의 추진력이 확실성을 해체하는 힘으로는 작동할 수 있겠지만, 해체 이후의 세계가 무엇인지는 모호해요. 「프레임」에서 “나는 중심을 잃었으며 두 손이/가벼웠다”라고 말하지만 중심도 무게도 없는 자유가 “아직 태어나지 않은 나”(「보푸라기」)에게 데려다줄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시들이 대부분 과거형으로 진술된다는 점에서도 시의 에너지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어요. 이 매력적이고 독특한 불확실의 세계가 현재나 미래 시제를 통해 어떤 출구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는 다음 시집을 기대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전기화 시인이 이번 시집을 통해 시도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고민하면서, 첫 시 「매듭」의 “창문에 비친 세계를 이해한다고 믿었지만/나는 세계에 속해 있습니다”에 대해 이리저리 생각해봤어요. 사실 이 문장의 중간은 매듭처럼 묶여 논리적으로 난처한 부분이 있습니다. ‘~지만’이라고 연결되는 이상 앞뒤의 내용이 상반되어야 하는데, 뜻밖에도 화자는 자신이 “세계에 속해 있다”는 상황을 진술하거든요. 이 매듭을 풀어 말이 되게 만들어볼 수도 있을 텐데요, 이를테면 이해라는 것이 대상과의 거리를 요구하는데 이미 주체(시적 화자)가 대상(세계)에 속하였기 때문에 시적 화자의 믿음이 와해되었다고 말해볼 수 있습니다. 다만 지금 이 시집에서 시인은 그 매듭을 풀어보라고 제안하는 게 아니라, 그 매듭을 매듭으로 둔 채 바라보는 쪽인 것 같아요.

 

김태선 시집 전반에 불확실한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길을 못 찾는 화자가 보이고, 기억도 반복되어 등장하고, 사태들도 마치 되감기하듯 나타나지만 결국 화자는 한발짝 더 나아가려는 태도이긴 한 것 같아요. 수많은 가능성이 사산될 수밖에 없는 불확실한 현실 속에서 여러 ‘나’와 여러 ‘당신’이라는 중첩된 기억들을 돌이켜봄으로써 가능성을 탐구해보려는 노력이 보였습니다. 다만 아직은 자신이 불확실한 현실을 마주하는 데에서 멈춰버린 것 같은 느낌입니다. “낯선 풍경을 익숙하다고 느꼈던/나”(「매듭」)가 길을 잃게 되는 경험을 했기 때문일까요. 앞으로 발표되는 시에서는 떠나간 불확실함에서 다가올 불확실함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기를 기대해봅니다.

 

 

유병록 『아무 다짐도 하지 않기로 해요』(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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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화 첫 시집 『목숨이 두근거릴 때마다』(창비 2014) 이후 6년 만에 나온 유병록의 두번째 시집입니다. 함께 실린 박소란 시인의 발문이 시집의 창작 배경을 짐작하게 하는데요, 시집을 잘 보듬으며 닫아주는 역할을 하는 것 같아 좋았습니다. 시인의 개인적 맥락과 긴밀하게 연결된 시집이긴 하지만, 독자들도 각자의 방식으로 깊게 연루돼서 읽을 수 있을 듯합니다.

 

오연경 결결이 섬세하게, 아프게 다가오는 시들이었습니다. 발문과 함께 시인의 에세이집 『안간힘』(미디어창비 2019)을 통해 시가 쓰인 상황을 짐작할 수 있어서 더욱 아팠습니다. 다만 창작 배경에 대한 정보가 먼저 주어지다보니 그 방향으로만 시를 읽게 된다는 점은 아쉬웠어요. 물론 그 덕분에 시집에 더욱 정서적으로 몰입할 여지가 생기는 건 사실입니다. 어쩌면 그렇게 읽히는 것이 이번 시집의 운명이고 그렇게 쓰는 것이 시인이 통과했어야 할 일종의 의례였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김태선 저는 제목부터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아무 다짐도 하지 않기로 해요’라고 하지만 이건 또다른 의미에서 하나의 다짐이잖아요. 역설적인 움직임을 이행하고자 하는 화자의 노력이 제목에서 잘 드러나죠. 아이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담겨 있지만, 여러 다른 상실도 등장합니다. 이를테면 「이사」는 “바람”의 이미지를 활용해 오래 살던 공간을 떠나는 순간을 그려요. 이때 바람은 형체 없이 사라지는 것일 수도 있지만 ‘소망’을 뜻하는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전기화 이번 시집에는 부재가 깊숙하게 깃들어 있고, 이에 관한 남아 있는 이의 태도 문제가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것 같습니다. 슬픔을 견디고 살아가는, 그런 나 자신을 견뎌내는 데에서 비롯된 수치심(「다행이다 비극이다」)이나, 함께 슬픔 속에 남겨진 사람들끼리 살아 있음을 견디는 과정에서 상처를 주고받게 되는 역설(「스위치」) 등 상당히 내밀하면서도 첨예한 문제들이 담겨 있습니다. 시집 구성에도 일정한 흐름이 있는데요, 3부까지 압도적 슬픔에 젖어 있었다면 4부에서는 고요함과 헛헛함의 이면에 무언가가 들끓고 있는 듯했습니다.

 

김태선 4부의 「지구 따윈 없어져도 그만이지만」을 보면 슬픔을 유머로 승화하려는 모습이 잘 드러나지요. 마음이 아픈 시편들이지만, 초점은 상실의 경험 그 자체가 아니라 아이를 잃은 이후에 나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더 맞춰져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오연경 개나 염소 같은 동물이 자주 나온다는 점도 주목됩니다. 이 동물들은 떠나간 아이의 분신이기도 하고 길들여지지 않는 슬픔의 대리물이기도 하고 마음의 고통을 삼켜줄 내면의 동반자이기도 합니다만, 에세이집 제목처럼 결국은 슬픔을 견뎌내려는 모든 종류의 ‘안간힘’을 표현한 것이겠지요. 그런데 「발」에서는 “사나운 짐승의 시간은 이미 오래전의 일”이라고 하면서 “지나간 고통” “길들여진 고통”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물론 그렇게 쉽게 고통이 순해지거나 참을 만해졌을 리는 없겠지만 이제는 아예 고통과 한몸이 되어 “네 발이 내 것 같”고 “내 발이 네 것 같”은 상태가 되었다는 이야기일 거예요. 고통의 “등에 올라”탔다는 것은 고통이 없어지지도 해소되지도 않은 현실을 드러내지만, 이 고통이 나를 태우고 삶의 모든 길목을 걸어갈 발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듯 보였어요. 특히 마지막 연에서 “네 등은 따뜻하고/나는 그 커다랗고 우멍한 눈동자와 마주치는 일이 드물다”라고 한 것은 시인이 오랜 시간을 통해 터득한, 고통과 함께 살아가는 묘법인 것 같아 다행이라 여겨졌습니다.

 

김태선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사실 첫 시집에도 적지 않았어요. 생과 죽음의 비의적 측면을 탐구하려는 자세였는데, 이때는 죽음이 어떤 대상처럼 느껴진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번 시집은 마치 화자가 스스로의 죽음을 겪은 것처럼, 얼마나 깊은지 알 수도 없는 바닥 끝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와서 쓰인 것 같아요. 「그랬을 것이다」에서는 아이가 겪었을 법한 상황을 추체험하듯 하나하나 적어보고 가정해보고 경험해보잖아요. “그랬을 것이다”라는 문장이 반복되며 도저히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감정들을 환기시킵니다. “하루에 다섯편씩만 간신히 읽었다”(118면)라는 박소란의 발문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데, 그렇다고 해서 시인이 독자의 감정에 호소하고 있는 것은 아니에요. 아주 담담하게 그리기 때문에 더 아프게 다가오고, 그것이 이번 시집의 중요한 미덕입니다.

 

전기화 그런데 3부의 「산다」라는 시에 이르면 「그랬을 것이다」에서 나타난 추체험하고는 또다른 방식으로 화자가 자신을 밀어보는 것 같았습니다. “당신의 말투로 인사하”고 “당신의 표정으로 다짐하”고 “당신이 흐느낄 만한 곳에서 흐느”끼고 “당신이 웃을 만한 곳에서 웃”는 시적 화자가 나타나는데, 당신이라는 존재를 삶의 층위로 끌어올려 함께 살아내려는 듯한 모습으로 느껴졌어요.

 

오연경 위로가 내 곁에 찾아와주길 기다린 적이 있다고, 지인들을 향한 서운함을 드러내듯 시인이 쓴 적이 있어요. 그러나 결국 “사람들은 내가 슬픈 이야기를 꺼낼 수 있을 만큼 괜찮아지기를, 그래서 준비해둔 위로를 건넬 수 있기를” 바랐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하죠.(「위로를 찾아서」, 『안간힘』 42면) 전기화 평론가의 말처럼 자신의 슬픔을 객관화해보려는 노력이 있었던 것 같아요. 이번 시집에서 시인이 내딛는 한걸음 한걸음에 그러한 노력과 깨달음이 깃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김태선 「회사에 가야지」는 슬픔을 겪은 한 사람이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의 느낌을 담담하게 서술해나가는 시예요. 회사에서는 아무리 친밀한 동료라 해도 공적인 태도로 임할 수밖에 없잖아요. 그런 간극이 “회사니까/슬픔을 나누는 일은 어색하니까/구원을 찾거나 함부로 조언을 주고받는 곳은 아니니까” “회사의 온도는 늘 적당하지/공기는 늘 아늑하지/사람들은 모두 다정하지”라는 표현으로 드러납니다. 슬픔을 나눌 수 없다는 또다른 슬픔을 이야기하면서도 비애감정에 빠지지 않고 일상의 경험으로 받아들이려는 노력이 보입니다.

 

오연경 고통 이후에도 밥벌이를 계속한다는 것이 또다른 고통일 수 있겠지만 “한평 남짓한 제 자리가 있”(「퇴근을 하다가」)다는 것을 일상의 위로로서 담담하게 받아들이려는 모습 같아요. 마지막 시 「우산」은 슬픔을 소박하고 담백한 유머로 표현한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누군가가 자기 동생이라고, 이제 돌려달라고 우산을 빼앗아가는데 화자는 빈손을 내려다보며 “비가 내리고/당신이 우산을 펼쳤으면 좋겠다”라는 소망을 이야기해요. 누군가 우산을 보고 나의 잃어버린 동생이라고 하는 순간, 남들 눈에는 이상해 보일 만큼의 고통이 어느 사람에게나 있다는 것을, 나아가 비를 피하게 해줄 우산이 누구에게나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죠. “모른 척 지나칠 도리가 없어/당신의 동생을 돌려”준다는 말이 닿을 수 없는 타자의 슬픔에 대한 존중으로 느껴졌습니다. 저 역시 시인의 슬픔에 대한 존중으로 조심스럽게 책장을 넘기게 되는 시집이었습니다.

 

 

김행숙 『무슨 심부름을 가는 길이니』(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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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화 올해 데뷔 21년이 된 김행숙의 여섯번째 시집입니다. 시집을 읽으면서 최근에 봤던 평론이 생각났는데요, 『문학동네』 가을호에서 민경환 평론가가 주민현, 김유림, 조해주의 시를 김행숙의 시와 연결하면서, ‘이후의 뉴웨이브’를 찾는다고 할 때 “무엇의 이후냐는 물음”이 중요하다고 적었습니다.(「우리에게 허락되지 않은 역사의 이중맹검이 여전히 우리를 부른다」) 2000년대 뉴웨이브의 유산 대부분이 암묵적으로 부정되는 가운데에서도 김행숙의 시는 동시대와의 적절한 연결점이 모색되고 있다는 인상인데요, 김행숙의 시작(詩作) 활동이 현재진행형이라는 점에서 이번 시집이 어떻게 의미화될지도 궁금해집니다.

 

김태선 “무엇의 이후냐는 물음” 중 ‘무엇’의 자리에 김행숙을 놓은 까닭은 이후의 시에서 연속과 단절의 지점을 살피려 했기 때문이겠지요. 그렇듯 이번 시집에서 앞선 작업에 연속되는 것과 단절이 일어나는 지점이 함께 발견됩니다. 우선 저는 시인의 발걸음이 조금 무거워졌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에코의 초상』(문학과지성사 2014) 때는 걸음이 좀더 경쾌하고 자유롭게 변신했던 것 같거든요. 그런데 이제는 자신의 육체와 무게를 자각하고 묵직해진 인상이에요. 특히 카프카(F. Kafka)와 관련된 시들이 그러합니다. 「「변신」 후기」에서 “내게 남은 것은 55킬로그램뿐이었다.”라거나 “0.0킬로그램의 그림자” 등 무게를 인식하는 모습도 눈에 띄는데, 이전에 「호르몬그래피」(『이별의 능력』, 문학과지성사 2007) 등의 시에서 금방 휘발될 것 같은 느낌과 기분을 다룬 것과는 확연히 다르지요.

 

오연경 저도 시인의 문체와 작법이 많이 달라졌다는 생각입니다. 지난 시집들을 순서대로 살펴보면 연속적인 변화를 느낄 수 있을 테지만, 첫 시집하고 이 시집만 놓고 보면 그 차이가 현격하게 드러날 것 같아요. 이번 시집이 무겁다는 느낌이 드는 데에는 시의 길이가 길어지고 제사(題詞)나 각주가 화려하게 쓰인 까닭도 있어 보입니다. 카프카를 중심으로 여러 텍스트들을 끌어들여 변주하는 시 작법이 전면화되었어요.

 

전기화 첫 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도입부를 읽으면서는 김행숙의 시적 화자가 이제는 가볍고 기동력이 좋기보다 쇠약해진 것이 아닌가 싶었어요. 기억에 의해 끌려 다니고, 심지어는 돌보아지는 위치에 놓이니까요. 그러면서도 시인 특유의 구어체로 “그러나 처음 보는 노인인데…… 힘이 세군,”이라고 할 때 여전한 위트가 느껴졌고, “기억이 나를 앞지르기 시작했”이라고 문장을 뚝 끊어버리는 마지막 행에서는 문장을 부러뜨려 시의 세계를 미완결로 완결하는 것이 놀랍고 좋았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지점들 때문에 시적 화자가 쇠약해졌다고 평하는 데에 조금은 주저하게 되었는데, 어떻게 읽으셨는지 궁금하네요.

 

오연경 시인도 고백했듯이 투병 경험이 시세계의 변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 같아요. 이전까지는 시적 주체나 인칭의 실험이 자유롭고 미학적인 모험에 가까웠다면, 이제는 진짜 내 몸을 움직여 안개를 헤쳐나가야 하는 실존적이고 존재론적인 도전에 부딪힌 게 아닐까요. 「변신」이라는 시를 보면 “벌레에게 남겨진 인간의 흔적은 무엇이었을까.”라고 묻는데, 이게 굉장히 존재론적인 질문으로 느껴졌어요. 분명 벌레가 되었음에도 왜 여전히 가족들에게 ‘벌레가 된 그레고리 잠자’로 기억되느냐는 것이지요. 시인은 잠자의 흔적이나 인간의 냄새로부터 완전히 탈출한 “완벽한 벌레의 꿈”을 말하는데, 이것이 마치 이번 시집의 꿈이나 언어의 꿈을 말하는 것처럼 들렸습니다. “내게 다른 세계가 열렸다.”라는 문장은 시인의 선언처럼 읽혔고요. 자신의 시와 기억과 삶 속에 얽혀 있는 텍스트적인 조직물들을 하나하나 점검하고 번역하고 재조합하여 새로운 주체의 몸뚱어리이자 세계 자체를 만들려는 시도랄까요. 그래서 자전적인 소설인 카프카의 「변신」만큼이나 시인도 자전적인 변신의 시를 써보겠다는 것으로 저는 이해했어요. 여러 시에 누구의 목소리인지 알 수 없는, 그러나 굉장히 현장감 있는 구어체의 문장들이 따옴표에 묶여 등장하는 것도 이러한 변신의 시도와 무관하지 않은 것 같아요.

 

김태선 따옴표는 ‘나’에 의해서 발화되는 것이 아니라 기억이 만들어내는 이야기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장치로서도 활용되는 것 같습니다. 그간 김행숙 시를 두고 ‘혼성적인 목소리’라는 평이 많았는데 이번 시집을 통해서는 시인이 ‘나’를 지우는 작업, 내 목소리를 지우고 말하기 자체가 말하는 방식을 시도하는 듯해요. 블랑쇼(M. Blanchot)식으로 표현하자면 익명적인 말하기라고 할까요. ‘나가 아닌 말하기’ 혹은 ‘나를 지워가는 말하기’로써, 정체를 특정할 수 있는 혼성적인 주체와 단절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표면의 시’라 명명되었던 것이 깊이를 향해 움직이는 모습도 볼 수 있었고요. 블랑쇼가 문학을 ‘나’에서 ‘그’로 향해 가는 해방의 통로라고 했는데 ‘그’라는 익명으로 이행하는 건 ‘나’라는 한계에서 벗어나는 일인 동시에 ‘나의 죽음’을 이르는 것이기도 하죠. 언어의 움직임이 무거워지고 깊은 곳으로 침잠하는 느낌을 주는 까닭도 ‘나의 죽음’이라는 문제와 닿아 있는 것 같습니다. “내가 없이 내가 걸어가는 것”(「밤의 한가운데」)이나 “목소리는 나를 떠나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고 있다. (…) 나는 나를 쫓아갔지만 목소리는 점점 더 멀어졌다.”(「겨울 - 나무로부터 봄 -나무에로」) 같은 구절도 이러한 시도로 다가왔습니다.

 

오연경 「「변신」 후기」를 보면 “똥을 다 누고 그늘 한 점 없이 사라지”기 전에 “똥을 참으며/써야 하는 것을 급박하게 쓰는 것이다.”라고 카프카의 입을 빌려 말하고 있어요. 일견으로 평하기는 조심스럽지만, 여기서 엿보이는 사라짐에 대한 예감, 상실과 고독의 감정, 쓰기의 운명에 대한 맹렬하고 헛헛한 집착이 어쩌면 시집 전반을 지배하는 것 같습니다.

 

전기화 이번 시집의 묵직함이 주로 이야기되고 있는데 사실 제가 가장 흥미롭게 읽은 시는 「커피와 우산」 「우산과 담배」 「담배와 콩트」 연작입니다. 이 세편의 시는 유령이 된 시적 화자(‘나’)가 ‘너’의 주변을 맴돌며 되뇌는 슬픈 중얼거림의 변주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요, “내가 없는 세계에 당도하게 되는 거야”(「우산과 담배」)라는 표현처럼 여전한 이동성이 감각되기도 합니다. 다만 그 가능성에의 지평이 이전보다 축축하고 느슨하게 확장되는 듯하고, 다수의 시에 인용이 도입된 것도 그 확장을 위한 방법론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연경 저도 이번 시집에서 어떤 이행성을 느꼈는데, 이때의 이행이란 상상이나 공상을 통해 이뤄지는 게 아니라 「변신」에서 “내게 작용하는 중력이 바뀌었다.”라고 말한 것처럼 텍스트들이 만들어내는 중력에 자신을 맡기고 이끄는 대로 따라가는 방식이라고 생각했어요. 「굴뚝청소부가 왔다」에서 “이야기 속으로 깊이 들어가면 불이 붙고, 불이 태우는 것들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이제 끝까지 갈 수밖에 없다는 걸 알게” 된다고 하잖아요. 즉 내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게 아니라 텍스트와 기억에 불이 붙어 불길이 이끄는 대로 끝까지 끌려가보겠다는 뜻이겠지요. 이를 카프카적인 공간감으로 이해하자면 문을 열었을 때 어떤 세계가 열릴지, 어떤 곳으로 연결되고 어디로 빠져나오게 될지 예측할 수 없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겠습니다.

 

김태선 황정은 소설 『디디의 우산』(창비 2019)에 쓰인 문장으로 시작되는 「이 세계」라는 시도 인상적입니다. 신발공장 노동자인 화자가 “이것을 이 상자에 넣었으므로 저쪽 상자엔 넣을 수 없지”라고 말하는데 예전의 김행숙이라면 무슨 상관이냐 하고 양쪽에 다 넣었을 것 같거든요.(웃음) 그런데 이제는 “어둠 속으로 손을 넣어 잘 찾아봐, 이것이 네 신발이야”라고, 역사의 흐름 속에서 네가 신고 걸어갈 신발과 네가 걸어갈 길을 잘 선택하라는 목소리를 내는 것 같습니다. 이를 보건대 어쩌면 시인이 앞으로 현실에 더 밀착한 시세계를 펼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오연경 예전 같으면 양쪽에 다 넣었을 거라는 말씀이 재미있습니다.(웃음) 언어나 세계의 한계를 초월하고자 했던 미래파 시인들의 지난 시도도 의미있었지만, 두곳에 동시에 존재할 수는 없지 않느냐는 물적 토대를 인식한 김행숙의 변화도 흥미롭게 다가옵니다. 다만 시인이 각주를 들여오고 텍스트의 인유를 활용한 까닭에 독서에는 어려움이 생길 수밖에 없어요. 누군가에게는 숨은그림찾기 하듯 구조화하는 재미가 있겠지만, 배경지식이나 전거를 가지지 않은 독자라면 닿을 수 없는 지점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표제시 「무슨 심부름을 가는 길이니?」에서 “소문자 k”이자 “전달책 k”가 화자로 등장하는데, 텍스트의 심부름을 하고 있는 이 시인의 초상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 것인지에 대해서는 좀더 살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어떻든 중견의 위치에서 텍스트의 충실한 심부름꾼을 자처한 시인이 고통 속에서 또다른 시적 화두를 던져준 것만큼은 분명히 놀라운 지점이라고 생각됩니다.

 

전기화 어느덧 좌담을 마무리할 시간이 되었는데요, 돌아가서 책들을 모두 다시 읽어보고 싶어졌습니다. 작품들을 읽고 두분과 함께 이야기 나누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어 기쁘고 감사했습니다.

 

김태선 두분께서 잘 이끌어주셔서 편안하게 이야기 나눌 수 있었습니다. 동시에 앞으로 풀어가야 할 과제들도 생긴 것 같아요. 하지만 모르는 것들이 계속 남아 있어 질문을 멈추지 않고 던질 수 있다는 게 문학이 주는 기쁨인 것 같습니다. 문학작품에 관해 함께 이야기하는 일이 이렇게 즐거운 일이라는 걸 새삼 다시 느끼게 되었습니다. 독자 여러분께서도 이 좌담을 읽는 일이 즐거운 경험이 되기를 바랍니다. 초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오연경 오늘 함께 읽고 이야기한 시와 소설이 개인적으로도 기대했던 작품이어서 더욱 설레는 시간이었습니다. 짧은 시간에 논의하기에 벅찬 감이 있었지만, 오늘 트인 물길을 따라 오래 음미하며 재독의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2020.10.21. 창비서교빌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