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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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은 崔智恩

1986년 서울 출생. 2017년 창비신인시인상으로 등단. choi_ce-@naver.com

 

 

 

사랑하면 안 되는 구름과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구름에 대해*

 

 

저는 매일 생각하고 있어요

 

아버지의 잠 아버지의 입술 아버지의 그네 저는 어디까지 아버지를 닮아갈까요 아버지의 잠 아버지의 입술 아버지의…… 어디까지 닮아볼까요

 

입술을 열면 희고 단단한 알약이 이빨처럼 쏟아질 것 같습니다 입 안 가득 졸피뎀 약속처럼 예감처럼 흔들리는 그네 이제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다만 나의 검은 개에 대하여 천천히 이야기할 시간

숨을 크게 쉬어봅니다

 

삼나무가 심어진 숲길을 달리고 있습니다 차창 밖으로 초록이 매섭습니다 불꽃의 모서리를 닮았습니다 창문을 열어볼까요 바람을 쥐어볼까요 계란을 쥐듯이 살짝만 그래요 살짝만 어느새 알이 부화하고 작은 새를 쥔 것 같아요 펄떡이는 심장을 쥔 것 같아요 바람을 갖고 놀듯 두 눈을 깜박일까요 두 사람이 마주 보고 놀면 어떨까요 좋아요 셋은 어떨까요 그게 아니면 바다처럼 누워볼까요 서 있는 것도 마찬가지겠죠 그네는 어디에 매달까요 그네라니요 그런 말은 참을까요 참아야죠 좋아요 다음 들어오세요 좋아요 다음 들어갑니다 아무리 달려도 구름 번식하는 구름 사산하는 구름 그 아래 아버지의 몸 아버지의 입술 아버지의 그네 아버지의 모서리가 검네요 하얀 옷을 입은 사람은 다가와 내 몸에 문장을 새기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보름은 더 됐을 거래요 검은 동공 안으로 소견을 적어줍니다 모서리는 다 닮아갑니다 이 눈으로 밤의 하늘로 옮겨갈까요 만져집니까 모서리 펄떡거리는 심장의 촉각 착각 속에서

꿈을 꿉니다

 

젊은 아버지와 앳된 어머니가 서 있습니다 성당 안으로 빛이 들고 있습니다

“이제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어리석은 사제는 이것을 사랑이라 부르기로 합니다 두 사람은 교회를 떠나 서로의 얼굴이 투명해질 때까지 걸어가십시오”

신부의 퇴장과 함께 두 사람의 식이 끝나고 그리고 생활이 그리고 가난이 그리고 건설과 그리고 붕괴 그리고 현장과 그리고 건축 그리고 혁명 그리고 투쟁이 그리고 공포 그리고 여름 그리고 폭염 그리고 겨울 나라는 약속 어리석은 자녀가 두 사람 사이에 섰습니다 모든 것이 희미해집니다 침침합니다 마침내

기록적인 폭설

 

이빨과 잠의 물방울 하루 한번 잠의 그림자를 잡아요 놓치지 말아요 물이 차오르는 월세방 창문 없이도 창을 넘어갈 수 있습니다 뒤틀리는 뼈 뒤틀리는 걸음 뒤틀린 글씨 그것은 심장의 뼈를 닮아갑니다 그리고 오래된 집 오래된 서랍에 오래된 잠이 너무 오래 약을 먹은 사람은 잠들기 전에 아침 약을 삼키고 있습니다 아버지 이건 잠의 약속 하루 한알만 약속은 너무 늦어도 너무 일러도 안 돼요 약속은 스스로 약속은 구속 약속은 미래 약속은 성실 약속은 믿음 아버지 잠을 믿어요 그래, 나는 너를 약속했다

 

오늘은 학교에서 무얼 배웠니 물고기도 물이 무서울까 꽃은 정원사의 기쁨이 될 수 있을까 영원 속으로 사라진 사람의 죄와 용서 모르는 고양이의 장례 같은 어리석고 부끄러운 것에 대해서요 그래, 더 어리석고 부끄러워지겠구나

 

아버지가 키우던 검은 개는 이제 다 늙고 나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꼭 그럴 때면 나를 바라보기 위해 태어난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오래 본 건 꼭 한번 만져본 것 같고 너무 오래 보고 있으니까 나는 금방이라도 두 눈이 멀 것 같고 입술을 열고 잠의 이빨들을 하나하나 입 안에 심으면 검은 개가 아버지의 검은 개가 짖습니다 짖기 시작합니다 나는 개의 동공 속으로 들어갑니다 밤이에요 어느새 다시 그 밤 안에 와 있습니다 개는 내가 올 줄 알았다는 듯이 다 안다는 듯이 머리맡을 지킵니다 개의 머리 위로

구름이 순하게 숨을 쉽니다

 

일어나세요 주인님 충성을 약속해요 명령을 주세요 그네를 밀어드릴까요

 

아버지가 검은 개를 꾸짖습니다 나는 혼나는 기분이지만 아무도 벌하지 않아요 검은 개가 나를 오래 핥고 있습니다 깨어나지 않아도 좋은 꿈 오래 꾸고 나면 이곳과 저곳이 뒤바뀌어 있지 않을까요 여기가 안이라면 얼마나 더 걸어야 밖을 볼 수 있을까요 여기가 밖이라면 얼마나 더 집을 잃어야 잠을 청할 수 있을까요 한번은 아버지의 그네를 쫓다가 바다까지 걸었습니다 안과 밖이 뒤집히는 파도를 보면서 나는 저게 다 살아 있다고 말했습니다 살아서 자라고 살아서 찾아내는 평화가 있다고 검은 개가 속삭입니다 그러니, 살아 그때 검은 개는 꼭 내가 낳은 것 같았습니다 마주 보았습니다 검은 개가 나를 보고 나는 검은 개를 보았습니다 우리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보이지 않아요 투명하게 보이지 않는 것을 앉힙니다 마주 보고 또 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봅니다 끝없이 보다가 어제는 밖에서 아버지가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나를 가졌을 때 단 과일을 입에 문 것 같았다고 들려주었습니다 안에선 모르는 밖의 단맛을 상상해보기도 하는 거지요

 

알람이 울리고 부재중 전화를 확인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하나하나 안부를 읽고 있을 때였습니다 미래는 약속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미래는 나를 앞질러 걸어갑니다 나는 밖에서부터 가져온 답을 보냅니다

 

가는 중이에요

 

불을 끄고 방을 나설 때

나는 잠시 돌아보았습니다

 

검은 개는 조용히 빈방을 지키고 있을 겁니다

 

 

--

* 조연호 「근친의 집」

 

 

 

열일곱

 

 

비 맞는

자두

 

자두나무에 묶어둔

긴 줄을 따라가면

 

물웅덩이

나를 따돌리듯이

 

텅 빈 하늘

 

그 위로 다시 비 맞는

빗방울

 

숨으면 마주치는

애꾸 고양이 피부병을 앓는다

 

마주 앉아

흠뻑 젖으면

 

몸에선 새로운 뼈가 돋을 것 같아

 

오월이었다

 

다리를 절뚝이는 어린애가

허밍을 흘리며 나를 앞서 지날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