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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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2025년체제와 새로운 한반도

 

변혁적 중도의 때에 다시 그리는 남북관계

 

 

정현곤 鄭鉉坤

정치학 박사, 전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운영위원장. 공저 『천안함을 묻는다』, 편서 『변혁적 중도론』 등이 있음.

hkmslove@hanmail.net

 

 

12·3 내란이 헌법재판소의 윤석열 파면 결정과 헌법적 절차에 따른 새로운 대통령 선출로 진압되었다. 내란세력의 죄를 제대로 수사하고 처벌해야 하는 과제가 남아 있는 가운데, 이들이 남북의 군사적 충돌을 지속적으로 시도했다는 점에서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 위기가 허술한 평화 속에서 자라났음도 확인되고 있다. 민주개혁과 평화는 동시적인 과제임이 분명하다.

그런 점에서 2019년 2월의 하노이 북미정상회담 ‘노딜’은 두고두고 아쉽다. 그 순간은 분명 한반도 평화프로세스가 멈춰선 날이기도 하다. 그때의 실패로 우리는 더욱 강력해진 북한의 핵무기체계를 마주하게 되었다. 65개에 달할 것으로 추정되는 핵폭탄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다탄두미사일, 극초음속미사일,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1이 북한이 보유한 핵무기 고도화의 실체로 보인다. 그 현실에 대해서는 북의 핵시설을 여러차례 살펴본 미국의 핵 전문가 시그프리드 헤커(Siegfried S. Hecker) 박사의 표현이 적절해 보인다. “북한이 핵무기로 미국과 그 동맹국을 위협할 수 있는 단 3개국 중 하나로 부상”2했다.

 

 

40여년 만에 달라진 힘의 균형추

 

사회주의 국가들이 체제위기에 봉착했던 1980년대 중·후반, 위기는 어김없이 북한에도 찾아왔다. 북한은 1984년에 ‘8·3인민소비품생산운동’을 발의하고 해외자본 유치를 위한 ‘합영법(合營法)’도 제정하며 생산력 독려에 나선다. 그러나 북한은 1987년에 140개 서방 채권은행단으로부터 채무불이행 국가로 지정되고 만다.3 1989년 베를린장벽의 붕괴를 시작으로 사회주의 국가들이 연이어 무너지는 가운데 북한은 체제를 유지했지만 사회적·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가장 눈에 띄는 지표는 1991년 소련과의 교역이다. 1990년에 22억 2300만 달러였던 교역액이 이듬해인 1991년에 3억 6500만 달러로 급감한다.4 소련은 경제뿐 아니라 정치 영역에서도 북한에 충격을 안기는데, 1990년 9월의 한소수교가 그것이다. 소련의 행보로 남한의 유엔 가입이 현실화되고, 북한은 부득불 반대하던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에 동의하게 된다. 1991년 9월의 일이다. 그뒤 1992년 8월에는 한중수교가 이어진다. 이로써 남북 사이 힘의 균형추는 흔들리고, 그 무게중심은 특히 미국의 영향하에서 남한 쪽으로 급격히 기울게 된다.

당시 북한은 핵무기 개발을 지렛대 삼아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시도한다. 남북한 유엔 가입이 실현된 조건에서 북미수교나 북일수교 등 한소·한중 수교에 어울리는 교차승인을 통해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를 추구할 수 있으리라는 견해5도 유력했다. 그러나 사회주의권 붕괴의 연장선상에서 북을 바라보는 시각이 더 우세했기에 이후 한반도 정세는 ‘적대적 북미관계’라는 골격이 규정짓게 된다.

북한의 핵개발을 둘러싸고 북미 사이의 긴장이 지속되었지만 둘의 관계를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에 대한 원칙은 비교적 분명했다. 북한이 조성하는 군사적 위협과 북한에 대한 안전보장이 맞교환되는 ‘상호위협 감소’, 근본 해결책으로서의 ‘관계 정상화’, 그리고 방법으로서의 ‘평화체제’가 그것이다. 이러한 원칙은 서로를 이해하는 시간이 쌓여 형성된 것이지만 미국이 언제나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공화당의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2002년에 북한을 ‘악의 축’이라 규정하고 북한이 우라늄 농축으로 핵무기 제조에 근접했다는 의혹을 제기하며 1994년의 ‘제네바합의’6를 뒤집는다. 물론 2009년 4월 오바마의 대화 원칙에 장거리미사일로 응답한 평양의 선택도 문제해결을 어렵게 했다. 그럼에도 기본적으로는 서로간의 관계 정상화를 기초로 평화를 이룬다는 원칙을 지향하려 한 점에서 지난 30년간의 북미관계 역사는 교차승인의 취지와 닮아 있다. 그렇다면 핵문제는? 이 굴곡진 시간을 교차승인의 완결로 가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면 핵문제는 미국으로서도 북한으로서도 그 과정을 지연시키는 변수인 셈이다.

자, 그렇다면 이제는 상호인정의 준비가 되었는가? 이에 대해서는 지난 6월 11일(현지 시각) 백악관 대변인 캐롤라인 레빗(Karoline Leavitt)의 다음과 같은 말이 힌트가 될 수 있다. “2018년 싱가포르에서 열린 첫 북미정상회담 때와 같은 관계 진전을 원한다.”7 이는 그 직전 트럼프가 김정은에게 보낸 친서를 북한이 수령 거부했다는 보도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나온 말로, 트럼프로서는 하노이에서 마무리하지 못한 일을 다시 시작해보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물론 김정은이 이 출발점에 함께 서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분명해 보이는 점은 하나 있다. 한반도에서 힘의 균형이 40여년 만에 대등한 지점에 도달했다는 사실이다.

 

 

북의 변화와 내부의 개혁

 

북한은 2018년 판문점 남북정상회담에 앞선 4월 20일에 노동당 중앙위원회를 열어 ‘경제와 핵무력의 병진노선’을 사실상 폐기하고 ‘경제건설 집중노선’으로 전환하겠다고 선언했다. 이같은 경제중심 노선은 2021년 8차 당대회에서 ‘가장 중요한 혁명과업’으로 ‘사회주의 경제건설 총력집중’이 강조되면서 재확인되었다.8 그러나 핵개발에 대한 제재 탓에 외부 자원을 유입하기 어려운 북한 여건에서, 수치로 나열되는 성과로 그 성패를 알기는 어렵다. 근로의욕을 높이고 이것이 내부 자원의 이용효율을 높여가며 작으나마 생존의 길이 모색되고 있는가 하는 점이 중요한데, 이는 경제개혁 조치의 실현과 효과에 달려 있는 일이다.

북의 경제개혁은 김정일이 입안한 2002년의 ‘7·1경제관리개선조치’가 기준이 된다. 농업과 기업, 무역 부문에서 수익성 지표를 도입해 생산성을 끌어올리고 시장을 키운다는 전략이다. 국가의 역할은 최소한의 생산지표를 제시하고 그에 맞는 납부의무만을 지우는 것으로 조정하고, 잉여생산물은 판매해 해당 조직의 재정으로 충당할 수 있게 한다는 구상이다. 7·1조치는 김정일이 2001년 중국 개혁·개방의 상징적 지역인 상하이 푸둥지구를 방문해 ‘천지개벽’이라 할 만큼 감탄한 인식에 기초하여 설계된 것이기에 시장경제에 대한 실험으로 이해되었다. 실제로 쌀과 같은 생필품은 물론이고 중간재 시장의 허용과 수입품의 유통까지 이루어지면서 시장은 커갔다.

그러나 당시의 개혁은 당 계획재정부가 설립된 2005년 7월부터 제동이 걸린다. 시장경제의 부작용을 공격하며 계획경제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당의 입김이 강해진 것이다. 그후 북은 2009년 화폐개혁을 단행하여 시장에서 벌어들인 개인 수익을 몰수하고 상설종합시장 폐지와 개인영리기업 몰수도 단행한다. 그러나 이같은 개혁 반동은 심각한 패배로 끝난다. 주민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쌀값이 폭등했고 공급부족 문제는 민심을 폭발시켰다.

김정은 시기 들어 경제성장은 가장 중요한 국가전략이 되었고 7·1조치가 다시 소환되었다. 달라진 점은 크게 두가지다. 주요하게는 농업과 기업, 무역 부문에서 조직들의 자율성과 시장을 더 키우되 그 모두를 계획경제 속에 위치시켰다는 점이다. 둘째로 각 개혁조치들을 인민경제계획법, 기업소법, 자재관리법, 무역법, 농장법 등 관련 법률에 담았다는 점이다.9 이제 시장은 과거처럼 허용과 통제 사이에 어정쩡하게 있는 보조적 영역이 아니라, 경제의 각 부분을 연결 짓는 고리가 되어가고 있다. 북한 당국이 시장경제를 키우면서 이것을 국가체계 안에서 운영할 방법을 어느정도 터득한 셈이다.

물론 북한의 경제개혁을 어느 수준에서 볼 것인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사회주의 경제개혁은 국가별로 다양하게 나타나지만 흔히 세가지 특징은 공유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첫째, 개별 생산단위의 권한 및 자율성을 확대하고 금전적 인센티브 제도를 도입하는 것, 둘째, 국가가 계획하는 영역을 축소하고 생산단위의 의무를 경감하는 것, 셋째, 시장 합법화 및 확대 조치를 취하며 시장의 제도적 안정화를 추구하는 것이다.10 이런 기준에 비추어서 본다면 북한의 경제개혁은 사회주의 경제개혁의 일반적 수준에 부합한다. 다만 개방의 수준이 기대에 전혀 미치지 못하는 것은 핵문제에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상황요인을 빼고 운영역량만으로 향후 개방 가능성을 평가한다면 긍정적이다. 조선로동당의 정책합의 수준이 높고 생산·유통 조직들도 수익지표를 중심으로 운영해본 경험이 쌓였기에 개방에 따른 체제 불안요인을 크게 두려워할 것 같지는 않다. 물론 이것은 투자개방에 한정되며 자유왕래를 보장하는 일반개방은 여전히 관광특구를 중심으로 제한하려 할 가능성이 높다.

결국 김정은 시기의 경제개혁은 자령갱생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개방을 위한 내성 키우기의 의미를 포함한다. 그러나 남북 경제관계 단절의 시간이 쌓이면서, 남북간에 서로의 필요를 줄이는 결과도 동시에 낳을 수 있다.

 

 

두 국가 관계와 특수관계의 상충

 

현재의 남북관계는 ‘특수관계’와 ‘두 국가 관계’가 논쟁하는 형국이다. 특수관계는 남북이 “국가간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라는 규정이다. 1991년 12월 13일 체결된 남북기본합의서(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에 담겨 있으며 우리의 ‘남북관계발전에 관한 법률’에도 명시된(제3조) 남한의 공식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두 국가 관계의 경우, 알려지기로는 2023년 12월 26일부터 개최된 북한의 노동당 중앙위 제8기 9차 전원회의에서 남북관계를 ‘교전 중인 적대적 두 국가’로 규정하면서부터이다.11 두 국가 관계는 사실상 1991년 남북이 유엔에 각각 가입함으로써 국제적으로는 이미 공인된 것이기도 하며, 당시 유엔 가입을 밀어붙인 쪽이 남한이므로 남한의 또다른 공식입장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북한이 남한처럼 두 국가 관계로 가는 것이 큰 사변은 아닌 셈이다. 동시에 두 국가 관계와 특수관계의 사이도 사실 멀지 않은데, 이는 남한의 통일방안이 두 국가 관계에 기초한 ‘남북연합’이라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남한으로서는 두 국가 관계와 특수관계를 함께 사용해왔다고 할 수 있다. 북한으로서도 2000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북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가 우리의 ‘연합제’와 공통성이 있다고 했기에 특수관계론 속에 두 국가 관계를 담은 셈이다. 결국 특수관계와 두 국가 관계는 서로 배척한다기보다 현실의 두가지 양상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다만 최근 북한이 언급한 두 국가론은 ‘적대적’이라는 앞말을 떼어놓고 읽을 수 없다. 적대적 관계는 해소해야 한다. 사실 적대적 두 국가 관계는 북미 사이의 관계규정으로 더 익숙하다. 미국과 북한조차도 여러차례 적대적 관계를 해소하고 호혜적 관계로 가고자 했으니 남북이 적대적 관계를 해소해야 하는 것은 당연지사다. 그렇다면 적대적 관계를 해소하고 난 후 두 국가는 어찌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1991년의 남북기본합의서는 국제사회에서의 ‘두 국가’라는 기초 위에서 통일로 가야 한다는 방향을 못 박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2000년 남북정상회담의 ‘6·15남북공동선언’에 이르러 두 국가 관계 위에서 통일의 방법론까지 거론한 것이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한다는 조항(제2항)이다. 그러나 이제 북이 두 국가 관계를 더욱 강조하는 형국이라면 남북연합의 설계도 북의 조건을 더 감안해서 만들어가야 하겠다.

북의 태도 변화는 남한에 대한 북한의 필요가 급격히 줄어들었다는 점에서 우선 확인된다. 경제적 필요는 물론이지만 정치적 필요도 거의 사라졌다. 일단 경제적 차원에서 보면 북한의 생필품 수요는 중국이 대체한 지 오래되었다. 기대를 모았던 문재인정부 시기에도 남북교역은 북미교섭과 미 대북정책의 영향을 받았고, 하노이회담 노딜 이후에는 남북관계에 극단적 단절만이 이어졌다.12

두번째는 북의 전략에서 통일문제가 후순위로 밀리는 조건의 변화가 생겼다는 점이다. 이는 북의 통치방식 변화와 맞물려 있다. 북의 입장에서 통일문제는 당·국가의 방향이며, 미완의 혁명 완성이 통일로 완결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통일문제의 주도성을 유지해 통치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 북의 리더십에 있어서도 중요한 문제였다. 통일문제는 북의 경제난을 설명하는 명분으로도 작용해왔는데, 미국이 통일을 막고 있는 실체라는 주장 속에서 미국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군사력 운용에 국가적 자원을 써야 하며 그것이 경제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논리이다. 이 논리는 1960년대 북이 4대 군사노선을 운영하며 국방비를 대폭 늘렸을 때가 시초로 뿌리가 깊다. 북이 체제위기에 처하며 핵무기 개발에 나섰던 1990년대에는 특히 이 논리가 매우 절박하게 필요했다. 북이 이제 통일문제를 핵심의제에서 제외한다는 것은 통일문제를 떨쳐버려도 상관없는 수준의 새로운 통치방식이 나왔다는 뜻이다. 북이 통일문제를 뒤로 미루는 두 국가론을 제기하는 바탕에 ‘우리 국가제일주의’가 있고, 우리 국가제일주의가 등장한 것이 북이 핵무력 완성을 선언한 다음 날인 2017년 11월 30일이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13 핵무기를 통한 대미 방어체제의 완성이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수령체제에 새로운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특수관계와 두 국가 관계의 유기적 인정은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에서부터 2000년 6·15공동선언에 이르는 기간에 남북이 만든 평화와 공존의 실체이며, 이후 20여년을 지탱해온 평화의 질서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특수관계를 제외한 두 국가 관계는 잠재적 위험이 크다. 가능한 위험의 수준은 과거 노태우정부 이전 시기, 남북간 충돌이 일상화되었던 적대적 상태와 비할 바가 아니다. 특히 경계선에 있는 서해는 두 국가 관계에서는 더욱 위험한 지역이 될 수 있다.

한반도에서 1953년 정전협정체제가 여전히 변경되지 않고 있다는 점도 큰 문제다. 이로 인해 북이 핵무기체계를 계속 강화해간다면 두 국가론은 더욱 위험해진다. 두 국가간의 군비경쟁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한반도가 화약고가 되어간다면 가장 큰 손해를 보는 쪽은 남한일 것이다. 특수관계를 통일문제로 곧바로 치환하지 않으면서 당장의 긴요한 평화관리 속에 두는 지혜가 필요한 국면이다.

 

 

한미연합군사훈련이 평화문제의 제1의제

 

한반도평화 문제의 출발지는 북미정상회담이다. 하노이의 실패가 아니라 싱가포르의 원칙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현재 북미관계는 더 불안해진 미국의 지도력, 러시아의 거부권에 막힌 유엔의 대북제재, 핵무기 고도화와 더불어 러시아와 동맹관계를 회복한 북한이라는 새로운 변화 위에 있다. 무엇이 의제가 되어야 할까? 주목할 부분은 2019년 6월의 트럼프·김정일 판문점 회동이다. 여기서 다루어진 것이 한미연합군사훈련 중지 문제였다. 그 맥락은 하노이회담 결렬 이후 리용호 북 외무상의 기자회견 발언에서 짐작해볼 수 있다. 그는 “제재 해제를 요구한 것은 그것이 미국에 더 쉬운 일일 것 같아서였”지만 비핵화 조치를 위한 최우선 과제는 북에 대한 미국의 안전보장이라고 말한 바 있다.14 따라서 그로부터 4개월여 뒤 판문점에서 김정은이 트럼프에게 제기한 것은 바로 그 안전보장과 관련한 얘기로 이해된다. 그러나 그해 8월 한미연합훈련 재개가 결정되면서 남북관계와 북미관계는 본격적으로 교착 및 악화된다.

한미연합훈련 문제는 남한보다는 미국의 선택에 좌우된다는 점에서 큰 어려움이 있다. 이 훈련의 역사에 비추어 보건대 이는 전적으로 미국의 필요와 결정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실전훈련을 할 장소로 남한이 선택된 데는 북의 위협 방어라는 명분하에 수용성이 높았던 점이 작용했지만, 지금 와서는 이 훈련이 단지 북한만을 겨냥한 것은 아니며 중국을 압박하는 미국의 전략 속에서 움직인다고 봐야 한다. 현재 상황이 바뀐 가장 큰 지점은 역시 북이 핵무기 고도화를 완성하는 단계에서 중국과 러시아의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미국을 위협할 수 있는 국가가 되었다는 점이다. 북한의 군사력은 중국과 러시아가 미국 견제를 위해 북한을 활용할 수 있는 전략적 가치가 되며, 미국으로서도 북한을 자기 쪽으로 당겨야 할 동기는 있는 셈이다.

우리로서도 잠수함을 포함한 북의 해상전력이 러시아 등의 도움을 받아 급속도로 발전하는 사태는 서해에서의 군비경쟁을 초래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기에, 지금 북을 멈추게 할 동인이 필요하다. 특히 두 국가 관계 속에서 서해에서 영토경계선 문제가 촉발된다면 한반도 위기는 폭발력이 커지게 된다.

한미연합훈련의 중지는 북의 핵무기 동결과 교환된다. 북한은 핵물질·핵탄두를 포함한 모든 핵 관련 활동과 대륙간탄도미사일, 육상 장치뿐 아니라 잠수함과 같은 해상 발사장치, 추진체 시험 등 핵무기체계 내 모든 활동을 동결하게 된다. 한미연합훈련이 언제라도 재개될 수 있는 것처럼 북의 핵무기 수준도 현 상태에서 동결될 것이지만, 각각의 무기체계의 불능화와 같은 핵군축의 문제라면 평화체제 단계의 핵심의제로서 논의될 것이다. 논의만 무성했던 과거를 반성해볼 때 동결상태를 감시하고 통제할 수 있는 체제를 운영하는 일이 신뢰조치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동시에 중요해지는 문제가 바로 남북 사이의 ‘9·19군사합의’다. 2018년 9·19군사합의는 접경지역에서 남북의 군사력이 전개되지 않도록 하는 통제의 의미를 지녔지만, 군비통제 전반을 논의할 수 있는 기구의 설립까지 이어지지는 못했다. 한미연합훈련 문제가 조정된다면 9·19군사합의도 남북 공동의 군사 논의기구를 만들고 운영하는 단계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결국 한반도평화에 있어서 남한의 역할은 한미 군사협력의 방식 전환과 군축 프로세스로의 진입 여부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분단체제 극복을 향한 변혁적 중도의 시각

 

우리의 입장에서, 한반도평화 위기가 일단 큰 고비를 넘었다. 12·3 내란이 남북 사이의 국지전 속에서 진행되었다면 남한의 민주주의는 파괴되고 남북이 대결자세로 들어서면서 분단체제가 다시 한번 공고화되는 길을 걸었을 것이다. 그러나 북은 반응하지 않았고 역으로 남북의 통로가 되는 길을 부수고 방벽을 쌓았다. 대개의 분석은 러시아 파병의 여건 때문이라거나 북한 내부의 경제성장 전략에 비추어 남한 사태에 말려드는 것이 위험하다는 판단을 해서라고 본다. 맞을 것이다. 다만 필자는 상황요인만은 아니라는 판단이다. 일단 북의 리더십이 더이상 군사대결을 지향하는 남한의 세력을 자신의 체제 유지의 대항체로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보인다. 이는 핵무기체계 고도화가 주는 심리적 체제안전 효과일 테지만 포착되는 의미는 따로 있다. 향후 남한 내에서 자신의 기득권을 수호하기 위해 북한과의 군사충돌을 유도하는 특정 수구세력의 행태가 반복되더라도, 그것이 북의 리더십 차원에서 이용할 가치가 있고 이득이 되는 현상으로 복무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로써 “남과 북의 수구세력이 극과 극으로 대치하고 있으면서도 어떤 의미에서는 교묘한 공생관계에 있는”15 분단체제의 중요한 구조 하나가 현저히 약화되는 중이다.

이제 북한은 어떤 길로 갈 것인가? 아주 점진적으로 사회주의 일반 개혁의 길을 갈 것으로 본다. 장기적으로는 중국이나 베트남을 상상하는 것도 가능하다. 당 주도의 정치체제와 시장경제를 동시에 운영하는 모델이다. 그렇다면 경제적으로 발전된 남한의 존재가 북으로 하여금 개혁·개방을 하지 못하게 하리라는 설명도 힘을 잃은 것일까? 여기서 북이 내놓은 대응책이 두 국가론이다. 두 국가론의 배경으로 김정은이 직접 남한의 흡수통일론을 언급했다는 것16은, 핵무기체계 완성의 자신감과는 별개로 통일문제의 틀에서 남한은 여전히 북의 위협요소라는 의미이다. 결국 평화로운 두 국가 관계로 정착되더라도 통일문제의 틀 속에서 당분간은 남한과 만나지는 않겠다는 것이 두 국가론의 정책적 함의가 된다.

분단체제의 변혁과 관련하여 남한사회의 변화는 북한보다 역동적이다. 그 출발이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분단체제에서 자양분을 얻는 군사독재가 물러나고 민주체제가 성립되었다. 남한사회 내부 개혁의 힘이 분단체제의 일각을 허무는 순간이었다. 더 중요한 계기는 2000년에 첫 남북정상회담이 열리면서 찾아왔다. 북한의 존재를 위협적 대상에서 포용의 대상으로 바꾸며 분단체제에도 일대 전환이 일어났다. 그러나 남한사회는 지속적으로 개혁을 심화하며 분단체제 극복에 결정적인 힘을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적대적 북미관계의 축이 계속해서 작동하면서 평화가 흔들렸고 남한사회 내부의 수구세력 또한 분단체제에 기대어 수차례 집권을 이어갔기 때문이다. 그 역사적 시간 속에 촛불혁명이 위치해 있는 것은 민주개혁과 평화의 길에 맞선 분단체제 기득권의 저항 또한 완강했다는 의미이다.

2019년 2월 하노이의 실패와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중단으로부터 에돌아온 6년여의 시간 속에 윤석열정권의 탄생과 몰락이 있다. 사익에 몰두하며 ‘반국가세력’ 운운하는 행태에서 드러나는 엽기성을 볼 때, 그들이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정부의 뒤를 이어 정권을 잡은 일 자체가 ‘변칙적 사태’17일 것이다. 결국 그들은 분단체제에 기대어 장기집권을 꿈꾸며 내란을 벌이고 만다. 그때 군대를 막아선 시민들은 물론 명령을 거부한 군인, 법과 질서를 중시하는 일부 ‘보수’인사도 내란 진압의 대열에 함께 섰다. 6월 민주항쟁 시기 ‘호헌철폐’로 뭉친 만큼의 폭넓은 세력 결집이었다. 1987년 6월의 민주항쟁이 분단체제 기득권의 핵심에 있던 군사독재를 퇴거시킨 것처럼 2024~25년 빛의 혁명도 분단체제 핵심에 있는 내란세력의 몰락을 이끈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재명정부의 탄생은 남한사회에서 분단체제를 해체해온 여러 시간의 정점에 있는 일대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남한사회가 내란세력을 물리치고 ‘변혁적 중도의 때’18에 도달한 지점에서 분단체제를 허무는 마지막 작업이 우리 앞에 놓여 있고 그것이 평화를 이루는 일이다. 두 국가 관계의 측면에서 적대성을 해소하고 평화관계로 진입하는 비교적 가까운 입구는 우선 대북전단 살포 문제의 완전한 해결이다. 대북전단은 적대감의 실질적 표현이자 전쟁 수단의 하나인 심리전 요소이기에 평화상태의 중요 변수가 된다. 9·19군사합의 복원의 경우, 북미간 평화대화와 연동되어 진행될 것으로 보는 편이지만, 한국이 선제적으로 9·19군사합의에 담겨 있는 군비통제 조치를 취함으로써 평화문제에 주도성을 가질 수도 있으리라고 본다. 이때 중요한 것이 ‘남북정상회담’이다.

남북정상회담, 두 국가의 공식명칭에 준해 ‘한조정상회담’을 하게 되는 일은 평화로운 두 국가 관계가 이루어졌음을 의미하기에 향후의 협력질서를 정하고 가야 한다. ‘조선’이 일반국가로서의 기준을 만들어가고 있는 조건을 감안하건대 새로운 관계 형식은, 남북 각각이 법적·제도적 보장을 통해 서로의 관계 수준을 정해가는 방식이 될 것이다. 한국의 입장에서도 정부와 의회의 합의이자 국민적 동의를 구하는 민주적 절차가 될 것이므로 바람직하다. 이 과정에서 중단기적 목표로는 정상회담 정례화, 정경문제의 분리를 통한 경제협력 확대, 민간 교류 및 협력 강화 등을 논의해야 한다. 낮은 단계의 국가연합 질서가 법·제도 형식을 띠고 시작되는 것이다.

‘조선’이 내건 두 국가 관계는 한국에게도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분단체제가 해체되어가는 조건에서 ‘조선’에게도 자체의 사회주의 개혁을 위한 시간이 필요하기에 ‘한조관계’에서 성급한 협력성과를 기대하지 않아도 되며 평화 관리에 집중할 수 있다. 평화가 충분히 관리된다면 내부의 개혁도 더 탄력을 받을 것이다. 이렇듯 87년체제를 넘어선 새로운 체제, ‘2025년체제’의 내적 기반이 쌓여갈 때 분단체제 극복도 눈앞에 다가올 것이다. 한반도평화와 민주개혁의 동시성을 보는 시각을 우리가 공유하는 기반으로 삼아 ‘변혁적 중도의 힘’을 모아가야 한다. 지금이 그러한 ‘변혁적 중도의 때’라면, 분단체제에도 변혁의 순간이 오고 있음이 당연하지 않은가.

 

 

  1. 핵폭탄 수 65개는 2023년에 제출된 2024년 추정치이다. 시그프리드 헤커 『핵의 변곡점』, 천지현옮김, 창비 2023, 558면. 북의 무기체계에 대해서는 홍민 외 「북한 조선노동당 제8차 대회분석」,『KINU Insight』 2021년 1호, 26~32면.
  2. 헤커, 앞의 책 555면.
  3. 정규섭 『북한외교의 어제와 오늘』, 일신사 1999, 195~96면.
  4. 임수호 『계획과 시장의 공존』, 삼성경제연구소 2008, 96면.
  5. 교차승인은 1975년 9월 유엔 총회에서 키신저(H. Kissinger) 당시 미국 국무장관이 “북한 및 북한의 동맹국이 대한국 관계개선 조치를 취하면, 한국과 미국도 그것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할 용의가 있다”고 제안하면서 공식화되었다. 「美日中蘇의 남북교차승인 유엔서 제안…키신저의 한반도 인연」, 연합뉴스 2023.11.30.
  6. 제네바합의는 핵개발로 의혹을 받던 북의 5MWe 실험용 흑연감속로를 동결하고 대체에너지를 위한 2,000MWe 경수로를 제공하는 교환을 기본으로 했다. 이를 통해 장차 양국의 관계를 대사급으로 격상시켜가자는 합의를 담고 있으며, 미국이 북한에 핵무기 위협을 하지 않는다는 약속도 포함되었다. 임동원 『피스메이커』, 창비 2015, 607~11면.
  7. 「백악관 “트럼프, 김정은과의 소통에 열려 있어”」, 한겨레 2025.6.12.
  8. 홍민 외, 앞의 글 34면.
  9. 임사라·양문수 「김정일 시대와 김정은 시대의 경제개혁조치 비교연구」, 『현대북한연구』 25권 1호, 2022, 75면.
  10. 임사라·양문수, 앞의 글 80면.
  11. 김정은 위원장의 발언은 다음과 같다. “북남관계는 더이상 동족관계, 동질관계가 아닌 적대적인 두 국가 관계, 전쟁중에 있는 두 교전국 관계로 완전히 고착됐다.” 「김정은, ‘남북관계 근본적 전환’ 선언…“적대적인 두 교전국 관계”」, 연합뉴스 2023.12.31.
  12. 미국의 제재 원칙이 남북관계를 어떻게 제약했는가에 대해서는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의 인터뷰 참조. 이남주·임종석 대담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재가동의 길」, 『창작과비평』 2020년 여름호 321~46면.
  13. 정영철 「북한의 두 개 국가론」, 『통일과 평화』 16집 1호, 2024, 24면.
  14. 헤커, 앞의 책 531면.
  15. 백낙청 『흔들리는 분단체제』, 창작과비평사 1998, 157면.
  16. 김정은은 남한을 향해 “우리 제도와 정권을 붕괴시키겠다는 괴뢰들의 흉악한 야망은 ‘민주’를 표방하든, ‘보수’의 탈을 썼든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며 “외세와 야합해 ‘정권붕괴’와 ‘흡수통일’의 기회만을 노래는 족속들”이라 말했다. 「김정은, ‘남북관계 근본적 전환’ 선언…“적대적인 두 교전국 관계”」, 연합뉴스 2023.12.31.
  17. “변칙적 사태의 엽기적 종말”이라는 표현을 따랐다. 백낙청 「‘변혁적 중도’의 때가 왔다」, 『창작과비평』 2025년 봄호 16면; 백낙청 『변혁적 중도의 때가 왔다』, 창비 2025.
  18. 같은 글.

정현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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