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K서사의 보고 『완월회맹연』: 완월회맹연 번역연구모임 『현대역 완월회맹연』
『완월회맹연(玩月會盟宴)』은 안겸제(安兼濟)의 어머니 전주 이씨(1694~1743)가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한글 대하장편소설이다. 총 180권에 달하는 분량은 현재 출간되고 있는 현대역본으로 추산해 보면 4~500면 분량의 책 18권에 해당한다. 하지만 오늘날의 독자들에게 이 작품은 낯설 수 있다. 가람 이병기가 1940년 조선어문학 명저 가운데 이 작품을 포함시키고 “인간행락(人間行樂)의 총서”라고 소개했으나 굴곡 많은 현대사를 거치면서 이 명저는 잊혔기 때문이다. 1976년 창덕궁 낙선재에 소장되어 있던 소설들과 함께 그 존재가 다시 드러나면서 주목을 받았지만 배경을 중국 명나라로 하고 있어 『완월회맹연』은 중국 번역소설일지 모른다는 의혹을 받았다. 또 안겸제의 어머니 전주 이씨가 지은 작품이라는 기록이 나왔음에도 선뜻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80권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인데다 경전이나 역사서 및 그밖의 문헌들에서 온 지식들이 능숙하게 구사되고 있어서 당시 여성들의 지식 수준으로는 쓰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논란을 거쳐 지금은 전주 이씨가 단독으로 썼거나 공동 창작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8세기에 이르면 시인들뿐만 아니라 임윤지당(任允摯堂)처럼 철학적인 저술을 남기거나 이빙허각(李憑虛閣)처럼 백과사전을 편찬할 정도의 지식을 가진 여성지식인들이 속속 등장했다. 전주 이씨도 그런 여성 중 한 사람으로 자신의 모든 역량을 소설쓰기에 쏟아넣었던 인물일 것으로 추측된다. 전주 이씨의 가계를 연구한 한길연에 의하면 전주 이씨에게는 지적인 여성 동료들이 있었던 것 같다. 전주 이씨의 올케인 풍양 조씨, 전주 이씨의 언니, 전주 이씨의 조카며느리 기계 유씨는 『시경』이나 『예기』를 공부하거나 소설 듣기를 좋아했으며, 성현의 훌륭한 말을 모아 기록하거나 시간이 나면 글쓰기에 몰두하곤 했는데 집안 남성들도 이를 지지하며 함께 즐기곤 했다. 규방 안의 이러한 지적인 분위기와 함께 당시 여성들에게 인기를 끌었던 한글장편소설의 독서와 창작 열기도 『완월회맹연』 창작에 중요한 몫을 했다. 그런데 전주 이씨는 집안에서 읽고 즐기는 데서 더 나아갔다. 임윤지당이나 이빙허각이 학문적 저술을 남긴 것과 달리 허구적인 세계를 구축해서 인간을 탐구하는 데 자신의 힘을 쏟았다. “궁중에 흘려보내 명성과 영예를 넓히고자 했다”는 조재삼(趙在三)의 기록에서 보듯 전주 이씨는 이 작품을 통해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 싶어하기도 했던 적극적인 여성이었다.
당시 궁중이나 양반 가문에서 즐겨 읽었던 한글장편소설에는 중국을 배경으로 한 가문 혹은 두 가문의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가문의식을 강하게 드러내는 작품들이 많았다. 『완월회맹연』도 그중 하나로 명나라 영종 때를 배경으로 정씨 가문의 부침과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삶을 생생하게 다루고 있다. 명나라를 배경으로 했지만 이는 정치적 사건들을 직접 다루는 데서 오는 부담을 덜기 위해 한글장편소설이 종종 택했던 문학적 관습이다. 비록 명나라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이 작품에 묘사된 가문들이나 그 속의 인물들은 당쟁을 통해 정치적 부침을 겪었던 조선후기 대표적인 가문들과 인물들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전주 이씨가 살았던 시대가 신임옥사(辛壬獄事, 1721~22), 정미환국(丁未換局, 1727) 등을 통해 가문의 몰락과 회복이 극적으로 이루어지던 때였고, 전주 이씨도 이러한 동향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당시 주요 가문의 여성들은 조정에서 일어나는 정치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가문을 수호하는 데 적극적이었으며 여성들의 삶이 정치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자각했다.
『완월회맹연』의 서사세계는 정한-정잠-정인성-정몽창 4대에 걸친 정씨 가문의 사람들을 중심으로 조정의 정치적 상황, 결혼을 둘러싼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그 내용이 짐작되지 않는다면 박경리의 『토지』가 윤씨 부인과 최서희 그리고 그 아들들을 중심으로 19세기 말에서 해방에 이르는 시기의 정치적 상황, 사랑과 결혼을 둘러싼 이야기로 전개되는 것을 떠올려도 좋겠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정씨 가문을 이상적인 가문으로 또 정씨 부자를 이상적인 군자, 영웅으로 그리고자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가족들이 모여서 만들어내는 분위기다. 이 작품의 서두는 인상적이다. 함께 모인 정씨 가족들의 분위기가 너무 안정되고 즐겁고 단란하기 때문이다. 정인광이 고모의 딸인 상연교를 짓궂게 놀리는 장면이나 이들을 바라보며 웃음 짓는 어른들의 모습, 남매가 서로 자기 자식들을 자랑하는 장면은 작가가 바라는 이상적 가정의 모습이 아닌가 싶게 유쾌하고 화목한 분위기를 전달해준다. 이러한 안정된 분위기는 정한이 아들이 없는 맏아들 정잠을 위해 둘째아들인 정삼의 아들 인성을 후계자로 정해주고 이어진 완월대의 잔치에 모인 사람들과 자녀들의 혼인 약속을 맺는 것으로 절정을 이룬다. ‘완월회맹연’이라는 제목, 완월대에서의 약속은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안정이 얼마나 허약한 것인지는 곧 드러난다. 가장인 정한이 죽고, 정잠의 부인이 죽어 새로 소교완을 부인으로 맞으면서 정씨 가문은 변화를 겪게 된다. 이후 정씨 가문은 도적떼의 습격으로 아이를 잃고, 정잠이 전쟁으로 출정하면서 가족이 흩어지게 되고, 남은 가족들은 곤경을 겪으며 일찍이 했던 혼인 약속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 서두의 잔치 장면에서 보듯 정씨 가문은 안정과 번영을 누리고 있고 이를 잘 유지하기 위해 미리 후계자를 정해두기까지 했다. 그러나 안정과 번영을 약속한 가문 내부에는 후계자를 둘러싼 갈등의 빌미가 내장되어 있었고 그로부터 가문은 균열되기 시작한다. 『완월회맹연』은 이러한 균열이 어디서 비롯되는지, 가문의 위기를 초래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질문하면서 복잡한 관계망 속에 놓인 인물들의 행동을 실감나게 재현한다.
이 작품은 정씨 4대뿐 아니라 정씨 가문과 혼인 관계를 맺는 장씨, 이씨, 소씨, 주씨, 한씨 가문의 상하층 인물들을 등장시켜 가족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거의 모든 갈등과 사건을 끝없이 이어간다. 또한 가정생활의 즐거움과 괴로움, 관계 속에서 생겨나기 마련인 사랑과 미움, 인생의 즐거움과 어리석은 욕망을 보여준다. 그 중에서도 유교적 가부장제 하의 여성들이 겪어야 하는 폭력적인 현실을 비판적으로 보여주는 한편, 여성들의 재능과 욕망, 어떤 고난에도 꺾이지 않는 강인함, 여성들의 목소리를 가감 없이 보여준다. 작가는 여성 인물을 묘사하면서 종종 성인(聖人)에 비유하곤 하는데 이는 새롭다. 열녀나 현녀에 대한 비유도 여전히 사용되지만 여성을 성인에 비유하는 것은 기존의 은유체계를 위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여성에 대한 기대와 이상이 달라졌음을 의미한다.
『현대역 완월회맹연』(1~6권, 휴머니스트 2022~24)을 읽는 재미는 무엇보다 사람들을 보는 재미에서 온다. 작가는 수많은 인물들을 등장시키면서도 그 인물들을 세심하고 생동감 있게 묘사한다. 이는 인간에 대한 섬세한 관찰이나 삶에 대한 깊이 있는 숙고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 작품은 한국소설사의 성취이자 여성문학의 성취로 오늘날 주목받는 K서사의 힘이 어디서 왔는가를 보여주는 보고(寶庫)라 할 수 있다.
* 이 글은 세교연구소의 서평웹진 <잔다리서가>에 소개된 서평입니다.
김경미 / 이화인문과학원 교수
2024.11.26. ⓒ창비주간논평·잔다리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