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희망은 어찌 이리 격렬한가
“희망은 어찌 이리 격렬한가.”
스테판 에셀(Stéphane Hessel)은 나치의 수용소에 갇혀 있으면서도 아뽈리네르의 이 싯구가 들어 있는 「미라보 다리」를 읊조렸다. ‘저항이야말로 창조하는 정신’이라고 말했던 그는 지치지 않는 낙관주의로 나치 수용소를 탈출해서 다시 레지스땅스가 되어 싸웠다.
“희망은 어찌 이리 경쾌한가.”
계엄 선포 이후 이 나라 20대가 보여준 반응은 경쾌하고 발랄했다. 선배 세대의 집회가 갖는 무거움과 비장함을 보란 듯이 걷어내며, 응원봉을 흔들었다. “가만히 있으라고 해서 다 죽었잖아요.” 십년 전 가만히 있으라는 말을 믿고 있다가 죽은 학생들을 그들은 잊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달려나왔다는 것이다.
다 쓸어버리겠다는 전체주의적 욕망에 맞서
윤석열은 정치력이 없다. 정치도 실력으로 하는 건데 실력이 없다. 지도력이 없다. 조무래기들 모아놓고 큰소리치는 일만 했지 지도자가 되기 위한 노력을 해본 적이 없다. 국민을 화합하고 통합하는 능력이 없다. 정치철학이 없고, 지적 능력이 떨어지고, 권력을 선용하려는 생각이 없다. 그러니 권력을 폭력적으로 써야겠다는 유혹에 빠지는 것이다.
좌파 종북세력을 일거에 척결해야 한다는 비뚤어진 확신부터 ‘부정선거’를 저지른 자들을 잡아다 족치면 다 해결된다는 망상, 그걸 뒷받침하는 군부의 왜곡된 충성심과 선관위원장을 내가 다루겠다고 야구방망이를 준비하라고 시킨 전직 정보사령관까지, 계엄은 우리나라가 순식간에 깡패국가로 전락할 수 있었다는 걸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민주주의의 가장 취약한 지점을 이들은 파고들었다. 이들이 볼 때 민주주의는 비효율적이다. 상대를 인정해야 하고, 상대방의 지적과 비판을 들어가며 토의해야 하고, 합의를 이끌어내야 한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 그런 꼴을 보고 있자니 차라리 싹 쓸어버리는 게 낫다는 생각이 끓어오른다. 싹 쓸어버리겠다는 건 전체주의적 욕망이다. 열망이 끓고 있을 때 가장 잘 먹히는 게 선동이다. 히틀러가 그랬다. 반유대주의, 반공산주의, 반동성애를 활용해 선동가가 되었고 그것으로 권력의 정점까지 갔다. 그사이에 열망은 광기로 바뀌었고, 결국 전쟁의 광풍으로 지지자들을 끌고 가서 멸망에 이르게 했다.
지금 극우세력은 계엄을 정당한 대통령의 권한 행사라고 외친다. 군대를 동원해서라도 좌파를 척결해야 한다고 믿는다. 앞으로도 이 태도를 절대 바꾸지 않을 것이다. 이 집단의 광기에 나라를 맡기면 우리나라도 결국 멸망으로 갈 것이다. 이번에 확인한 것처럼 남북 간의 전쟁을 부추기는 일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법과 정의에서 이탈하면 가장 사악한 동물이 되는데, 그중에도 다루기 어려운 게 무장한 불의”라고 했다. 윤석열이야말로 무장한 불의로 민주주의를 전복시키려 한 사악한 동물이다.
계엄으로 인해 민주주의를 지키는 것이 지금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사실’보다 내가 어떻게 ‘인식’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이들이 많아지면서 과학적 태도를 버린 지 오래고, 서로 인정하고 대화하는 민주주의도 짓밟아버린 이들이 넘쳐나지만 그래도 민주주의를 포기하면 안 된다. 최재천 교수의 말대로 ‘무엇이 옳은지를 논의하지 않고 누가 옳은지를 가지고 다투고 있는’ 것이 우리 정치의 현실이다(최재천 『숙론』, 김영사 2024 참조). 누가 옳은지를 갖고 다툰다는 건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는 걸 전제로 한다. 그러니 나는 옳다는 확증편향자만 넘쳐나는 것이다. 정치도 민주주의를 지키고 유지하기 위해 하는 것인데 극우세력의 저 완강함과 무지와 폭력으로부터 십년 이십년 어떻게 민주주의를 지키며 나라를 끌고 갈 것인가, 그게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끝내 희망이 이긴다
의회가 큰 역할을 했다. 계엄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거론되자 국회사무처는 만일 계엄 상태가 되면 무얼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사무총장과 간부들을 중심으로 몇차례 논의한 바 있다. 미리 대비했기 때문에 신속하게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이다. 의장을 바로 공관에서 빠져나오게 하고, 국회 담을 넘어온 우원식 의장을 계엄군이 난입한 후 의장실이 아닌 5층 모처에 은닉한 채 실시간 대책회의를 하고 상황을 체크했다.
국회 담을 넘다가 어떤 의원은 손이 골절되고, 어떤 의원은 바지가 찢어지고 살점이 떨어져 나갔으며, 어떤 의원은 밀어주는 시민과 끌어내리는 경찰 사이에서 난간에 다리가 끼어 부러질 뻔했다. 담을 넘는 의원들 중 일부는 이미 진입한 계엄군에 붙잡힐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본회의장으로 걸어간, 공포의 밤이었다. 가공할 폭력의 밤이었다. 국회가 계엄 해제를 의결하지 못했다면 유혈사태가 났을 것이다. 국회는 해산되고, 선관위는 붕괴되고, 정치인과 사법부 수장이 끌려가 감금되고, 경제는 지금보다 더 요동치고, 나라는 결딴났을 것이다.
국회로 달려간 국회의원보다 더 훌륭한 시민들이 여의도로 몰려와 나라를 구한 밤이었다. 절체절명의 밤이었다. 장갑차를 몸으로 막아선 시민이 있었고, 중무장한 계엄군의 총부리를 맨손으로 잡으며 부끄럽지 않냐고 외친 당직자들이 있었다. 계엄군이 여당 정책위의장 방 유리창을 깨고 난입할 때 어느 길목, 어느 곳을 막아야 하는지를 가장 잘 아는 이들이 국회 방호과 직원들이었다. 방호과 직원 179명을 포함한 국회 직원 오백명과 수백명의 야당 보좌진이 집기로 바리케이드를 쌓은 뒤 707특수임무단에 소화기를 뿌리며 맞섰고, 후문으로 들어온 공수특전여단에 소화전을 끌어다 물을 뿌리며 계엄 해제를 의결할 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 건곤일척의 싸움에서 민주주의의 축적된 힘이 계엄을 이긴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서울 전지역에 대설주의보가 내린 밤, 얇은 은박 담요 한장으로 밤을 지새우며 민주주의를 지키는 인간 키세스. 저 간절함이 이긴다. 눈을 맞으며 이박삼일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 정좌한 아름다운 키세스들. 저 절박함이 이긴다. 하루하루 극한과 맞서는 저 지치지 않는 낙관주의가 이긴다.
“희망은 어찌 이리 격렬한가.”
도종환 / 시인
2025.1.6. ⓒ창비주간논평
커버 이미지: 정혜경 의원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