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다시, 평등을 묻는다: 광장에서 깨어나는 새로운 감각
벼랑 끝에 놓인 민주주의를 구출하기 위해 다시 광장이 열렸다. 언제나 그랬듯이 광장은 또한 민주주의를 질문하고 새롭게 만들어내는 장이다. 이번 광장에서는 비정규직 노동자, 이주민, 성소수자, 도시 빈민, 농민, 학교 밖 청소년 등 저마다의 이름으로 모인 청년 여성들이 내용과 형식 모든 측면에서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중에서도 우리 사회가 반드시 되짚어봐야 할 점은 민주주의의 대들보라 할 수 있는 평등에 대한 감각이다.
“평등은 남근과 질이 같은지를 따지는 논쟁이 아니라, 모든 몸이 섹스나 젠더와 상관없이 동등하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명확히 하는 것이다.” 이 말은 필자가 즐겨 인용하는 평등의 정의다. 다양한 페미니즘 강의를 진행하며 내세우는 강의 목표 역시 이 문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자명해 보일지 몰라도, 이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토론이 필요하다.
많은 학생이 젠더를 ‘사회문화적 성’으로 정확히 정의한다. ‘생물학적 성’인 섹스와 구분해내는 것은 물론이다. 성별 고정관념을 다룰 때는 훨씬 유능하다. 거의 모든 학생이 성별 구분 없이 누구나 핑크색을 좋아할 수 있으며, 누구나 간호사가 될 수 있다는 점에 주저없이 동의한다. 이는 한국사회의 성평등 수준이 과거보다 높아졌음을 방증한다. 그러나 동시에 젠더에 대한 오해도 깊어져온 듯싶다.
가장 큰 오해는 젠더가 성차를 존중하는 개념이 아니라 성차를 부정하는 개념이라고 인식하는 경향이다. 그 원인을 두가지 현상으로 추론해볼 수 있다. 하나의 현상은 우리 사회에서 ‘성별 고정관념’ 지식이 젠더에 관한 한 거의 독점 지식의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성별 고정관념은 젠더 발상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한 단서이자, 개인적‧사회적 개선 과제를 제안하기에 용이한 도구이다. 즉 전형적인 성역할 구분을 비판하고, 그 구분을 생물학적 운명으로 믿게 만든 것이 사회적 기획이라는 인식을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남성 여성 할 것 없이 양성의 특성을 두루 갖춘 사람이 심리적으로 건강하고, 사회적으로도 유능하다는 심리학 연구들도 힘을 실어주었다.
그러나 성별 고정관념에 관한 지식이 대중화되면서 유의해야 할 함정도 있다. 성별 고정관념은 성차가 생물학적 본질이 아니라는 하나의 설명 방식을 제공할 뿐이라는 점이다. 또한 성별 고정관념 역시 제도와 문화, 지식과 권력이 얽혀 만들어진 복합적 현상이라는 점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으면, 성차별을 개인의 심리적 의지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로 잘못 인식할 위험이 생긴다. 무엇보다 성별 고정관념 지식에만 의존해 젠더를 이해할 경우, 성차를 회피하고 몸과 신체의 중요성을 간과할 수 있다.
이러한 지적이 이미 오래전부터 제기되어왔음에도 왜 대중적인 인식으로는 확산되지 않을까? 이는 또다른 현상, 즉 성차를 남성과 여성의 생식기 차원으로 환원하려는 사회적 충동이 여전히 강력하다는 점과 연결된다. 초‧중‧고등학교 성교육 교과서는 여전히 성차를 생식기의 차이로, 성차별은 개인의 성별 고정관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를 통해 ‘사회적인 성’ 젠더는 성차와 분리되고, 성차는 남근과 질의 차이로 축소되며, 성차별 문제는 개인의 의식 수준 차원으로 갇히고 마는 것이다.
비단 성교육 교과서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사회의 성평등 논의는 남근과 질이 같은지 아닌지를 따지는, 즉 남성과 여성의 생물학적 능력 차이가 있는지 없는지를 따지는 논쟁으로 변질되고, 성차별 문제는 구조가 아니라 개인의 능력과 의지 문제로 환원되어왔다. 특히 군가산점제 위헌 판결 이후 지난 수십년간 젠더 개념을 오용하고 공격해온 정치는, 평등에 관한 우리 사회의 상상력을 이러한 틀에 가두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른바 ‘젠더 갈라치기’에 가장 적극적이었고 또한 가장 성공한 정치인인 이준석 의원이 지난 총선에서 내건 공약이 상징적이다. 그는 ‘군필’ 여성만 경찰과 소방 공무원에 채용하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했다. 이 공약이 군가산점제와 마찬가지로 직업 선택권과 평등권이라는 헌법상의 권리를 침해한다는 점과 현재 병역 시스템에서 실현 가능한지에 대한 의문을 제쳐두더라도, 더욱이 이준석 의원 스스로가 이를 모를 리 없다는 점도 차치하더라도 그 ‘공정’의 의미는 따져 물을 필요가 있다.
주목해야 할 점은 그가 내세운 공정의 의미가 ‘군가산점제 부활’과 ‘여경 무용론’을 주장해온 사람들이 제기한 것과 똑같다는 점이다. 그 공정에는 현재의 병역제도가 국가 안보에 헌신할 표준적인 시민을 남성으로 전제하고, 여성의 몸은 시민적‧정치적 역량이 없는 열등성의 지표로 간주해왔다는 성찰이 빠져 있다. 또한 특정 직업군에서 특정 성별이 과소대표되는 것을 막거나 남성과 여성의 다른 몸이 존중되면서도 직업활동에 문제가 되지 않는 방법을 고민하려는 의지가 없다. 다시 말해 젠더 관점이 결여돼 있다.
대중적인 오해와 달리 젠더는 성차를 부정하지 않는다. 누구나 간호사뿐 아니라 경찰관도 소방관도 될 수 있어야 하는 이유는 모든 몸이 같아서가 아니라, 모든 몸이 동등하게 중요해서라는 것이 젠더 관점이다. 젠더는 성차를 단지 생식기가 아니라 몸으로 발현하고 몸으로 저장되는 노동과 돌봄을 통해 사유하자고 제안하는 개념이다. 그러니 노동이 존엄하고 돌봄이 풍요로운 세계를 지향하지 않는다면, 특히 정치가 그러하다면 젠더 관점이 설 자리는 사라진다. 이준석 의원의 지론이었던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를 슬로건으로 삼아 탄생한 윤석열정권은 여성가족부 폐지라는 공약 정신에 충실하게도 모든 정책 용어에서 여성과 성평등을 지워왔다. 주 69시간 노동에 대한 법제화를 시도하고, 돌봄을 출산과 인구 정책으로 환원하는 식으로 그 의미가 실체화했다. 노동과 돌봄의 가치가 체계적으로 부정돼왔지만, 역설적으로 그가 그 끝에 벌인 계엄은 이에 맞서는 시민의 정의와 평등의 감각을 일으켜 세우고 있다.
앞서 인용한 평등의 정의는 엘리스 콜레트 골드바흐(Eliese Colette Goldbach)의 『러스트벨트의 밤과 낮』(오현아 옮김, 마음산책 2020)에서 가져왔다. 쇠락해가는 미국 공업지대이자 바이든과 트럼프가 맞붙은 2020년 대선의 격전지였던 러스트벨트. 골드바흐는 그 러스트벨트의 한 제철소에서 일한 여성노동자였다. 젠더 개념이 성차에 대한 존중, 노동과 돌봄의 가치에 대한 존중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강의실에서 이야기하려면 지난한 토론이 이어져야 한다. 그러나 실제 노동과 돌봄의 장소는, 그리고 광장은 순식간에 배움의 장을 열어젖히고 확장하는 역능을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 이 장소들에서 정의의 감각, 평등의 감각은 머리뿐 아니라 온몸의 감각으로 실현되고 체현된다. 반짝이는 응원봉을 치켜세워 「다만세」를 목청 높여 부르고, 은박 담요 한장과 서로의 차이를 돌보는 마음으로 눈보라의 밤을 지새우는 여성들의 광장이, 다시 평등의 의미를 묻고 있다.
엄혜진 /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2025.1.14. ⓒ창비주간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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