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미국우선과 중국특색 시대가 한국의 가능성이 되려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2기 정부가 출범했다. 8년 전 그의 첫 집권 때 내세우기 시작했던 미국 우선주의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GA)”라는 슬로건과 함께 한층 더 짙어졌다. 그 건너편 중국에서는 2013년 집권하여 세번째 임기에 들어선 시 진핑(習近平) 주석이 집권 초기부터 표방했던 중국의 꿈과 길, 혹은 중국특색 사회주의의 건설이라는 노선을 강화하고 있다. 이미 1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미국에선 미국 우선주의를 내건 보호주의가, 중국에선 중국특색을 내건 국가주도적 경제체제가 강화되고 있다. 앞으로도 양자의 갈등과 경쟁에 비례해 이른바 자국우선(優先)과 자국특색(特色) 노선도 더욱 강화될 것이다. 즉 지금은 미중이 각각 미국우선과 중국특색을 노골적으로 주장하는 시대다.
각각은 결코 일시적인 슬로건이 아니다. 미국 우선주의는 전후 미국이 이끌었던 신자유주의적 경제원리나 자유주의적 국제질서가 해체되는 근본적인 시대변화를 반영한 변화라고 평가되고 있다. 특정한 개인이나 정당의 일시적인 선거구호가 아니라는 것이다. 시 진핑이 얘기하는 중국특색의 사회주의 역시, 중국 내에서는 그것이 “사회주의와 시장경제를 조화시키라”던 덩 샤오핑(鄧小平)의 오랜 숙제에 대해 중국공산당이 개혁개방 40년의 경험과 모색을 종합해 제출한 최종답안이라고 말하고 있다. 시 진핑의 임기에 국한될 흐름이 아니라는 얘기다. 미중갈등이 지난 10년 동안 우리의 경제적·지정학적 대외환경을 변화시켰던 것처럼, 앞으로 세상은 미국우선과 중국특색이라는 흐름이 낳는 변화에도 본격적으로 마주해야 한다. 이 시점에서 그것이 우리의 대외환경이나 세계경제의 질서에 던지는 의미가 무엇인지도 한번 따져보아야 한다.
첫째, 미국우선과 중국특색의 시대는 미국과 중국을 제외한 국가들에게 피해와 부담을 준다. 중국특색 사회주의란 결국 국가주도적 경제체제이자 산업육성이다. 이제 중국과 글로벌 가치사슬 속에서 경쟁하고 있는 각국의 기업들은 정부의 지원 속에 성장한 중국 국유기업들과 힘겹고 불공정한 경쟁을 벌여야 한다. 한편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 우선주의는 그동안 전세계가 자유무역 원칙과 체제 속에서 쌓아온 성취와 신뢰를 부정하고 있다. 벌써 미국은 동맹국들을 포함한 주요 교역국들에 관세 부과를 위협하며 ‘관세 전쟁’이라는 보호주의의 악순환 위험을 초래하고 있다.
둘째, ‘특색’이나 ‘우선’은 강자의 논리일 뿐 세계가 함께 지향할 비전이 될 수는 없다. 지금 미중 양국은 자신의 이해를 위해 세계 시장경제가 함께 지향하고 건설해야 할 미래상을 해체하고 있다. 중국특색이란 말뜻 그대로 중국만이 가질 수 있는 역사적 특징이자 산물일 뿐이다. 중국이 그동안 인상적인 고도성장 경험을 보여준 것은 사실이지만, 그 공산당식 정치체제나 국가주도적인 경제체제를 다른 개도국이 따라서 활용해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국 우선주의에서 출발한 미국의 방침이나 정책들도 마찬가지다. 세계 1위의 경제력과 국력을 가진 미국이 아니고는 어떤 나라도 흉내 내볼 수 없는 길이다. 더구나 냉전 이후 세계가 어렵게 만들고 지켜온 자유무역 질서나 기후변화 대응 협력은 이제 나 몰라라 하겠다는 게 미국 우선주의의 실상이기도 하다. 그 부정적인 파장을 전세계가 떠안아야 한다. 걱정스럽고 조마조마할 따름이다.
마지막으로, 이런 상황에서는 누구의 편을 들기도, 진영 질서가 생기기도 어렵다. 과거 냉전시대에는 미국과 소련이 각기 시장경제와 계획경제라는 나름의 체제모델을 제시하고 여러 나라와 함께 각자의 진영을 구축해서 경쟁을 벌였다. 많은 나라가 그중 한 진영에 속했고, 계획경제와 사회주의 실패에 따른 역사적 책임도 함께 졌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미중 어느 쪽도 진영을 구축할 체제모델을 제시하지도 않고, 그에 필요한 글로벌 공공재를 제공하지도 않는다. 그나마 가치와 동맹에 공을 들였던 미 바이든 대통령도 물러났다. 그냥 양국이 자기 길을 거칠게 독주하는 양상이다. 글로벌 사우스라고 불리는, 그 어느 쪽 손도 들지 않는 집단이 형성되고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냉전시대와 달리 세계는 지금 한편에 빙의(憑依)하기보다 양쪽 모두에 냉정하게 거리를 두고 있다.
중국특색과 미국우선의 시대를 어떻게 헤쳐가야 할까? 이런 시대에 미국과 중국을 기준점으로 그 사이에서 어느 쪽과 얼마만큼의 거리를 둘 것인가를 생각하는 관점은 사고의 차원을 낮추어 운신의 공간을 스스로 좁힌다. 미중 사이에서 적절한 포지셔닝을 하는 게 대외전략의 핵심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실상 미국우선과 중국특색의 논리에 가스라이팅 당하는 길이기 쉽다. 세계 10위권의 경제력과 5위권의 제조업 실력을 가진 나라의 대외전략이 미중 사이의 처신(positioning)일 수는 없다. 우리에게는 남북간 군사적 긴장을 관리하고 공존을 모색해야 한다는 아예 차원이 다른 과제도 있다. 연전까지 유행했던 이른바 가치외교가 미국의 대통령이 바뀌고 한국에서 계엄 사태가 터지면서 얼마나 무력하고 민망한 상황에 처했는지도 이미 경험했다.
이 시대에 대처하는 출발점은 미국과 중국 사이의 이질성과 불화뿐 아니라, 미중 두 나라와 다른 모든 나라 사이에 생기고 있는 이질성과 불화도 셈에 넣는 것이다. 미국과 중국 두 기준점 사이의 처신으로 대외전략을 환원하려는 생각은 세상에 미국, 중국, 한국 세 나라만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데서 나오는 답답함과 조급함의 산물이다. 그렇지만 세상에는 중국특색과 미국우선의 시대에 당(當)하여 이들의 이질적 행보를 냉정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190개의 나라(유엔 회원국 기준)가 더 있다. 유럽도 일본도 인도도 호주도 글로벌 사우스도 모두 비슷한 상황과 고민을 마주하고 있다.
이렇게 우리 앞에 놓인 풍경을 다시 그려놓으면, 전보다 더 많은 공간과 시간, 차원과 파트너가 눈에 들어온다. 우리도 한국우선의 사고와 한국특색의 전략을 생각해볼 여유가 생긴다. 물론 미국우선과 중국특색을 따라서 해보자는 것은 아니고, 그럴 수도 없다. 그렇지만 전략의 기준점을 우리 자신에게 두는 길은 있다. 예를 들어 글로벌 경제 안에서 한국이 가지고 있는 경제적 정체성은 선진 제조업 수출국이다. 지금 미국 우선주의가 자유무역 질서를 약화시키며 우리의 수출환경을 불안하게 하고 있다. 중국특색의 국가주도적 경제체제가 만드는 불공정한 경쟁구조는 아예 우리 제조업 기반 전체를 위협하고 있다. 이걸 방지하고 견제하자는 것은 누구 편을 드네 마네 하며 탈 잡을 일 없는 정직한 우리의 국익이다. 동시에 지금껏 글로벌 사회에서 우리가 누려온 가치와 원칙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길이며 더 많은 나라들과 진지하게 연대할 수 있는 기반이기도 하다. 그런 걸 잘 해내는 상상력과 전략이 필요한 시대다. 2024년 한국의 GDP는 세계 12위였는데, 우리 앞에 있는 11개국은 바로 주요 7개국(G7)과 브릭스 4개국이다. 딱 그들뿐이다. 고생하며 이만큼 나라를 키웠으면 이제는 그 크기에 걸맞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설도 지났는데 새해에는 친미니 친중이니 하는 얘기를 좀 덜 들었으면 좋겠다.
지만수 /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
2025.2.4. ⓒ창비주간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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