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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평등 민주주의, 돌봄의 사회화를 향한 새로운 시작



김종미



2025년 6월, 민주주의를 향한 시민들의 정치적 열기는 여름 공기보다 뜨겁다. 지난 3년간 윤석열정권하에서 침식되던 민주주의의 회복을 바라는 시민들의 열망은 ‘빛의 혁명’이라는 이름 아래 새로운 정권 창출로 이어졌다. 그 결과 출범한 이재명정부는 폐지 대상으로 거론되는 등 갈라치기 정치에 악용되어온 여성가족부를 성평등가족부로 확대·강화하기로 결정했다. 이재명정부의 이같은 조치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윤석열정부의 반민주적 권위주의에 맞서 응원봉을 들고 여의도를 가득 메운 수백만의 시민들, 그중에서도 주도적 역할을 했던 젊은 여성들의 존재는 이미 이러한 방향을 예고하고 있었다. 이제 거리의 외침은 정책으로, 저항의 에너지는 제도적 전환으로 이어져야 한다. 성평등 민주주의는 실질적 효능감으로 이어져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성평등가족부로의 강화는 단지 부처 명칭의 변경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오히려 다음과 같은 근본적 질문을 던져야 한다. 새로운 정부는 성평등 민주주의의 핵심의제를 얼마나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국가정책으로 구현할 수 있는가? 윤석열정부는 여성가족부 폐지를 시도하며 젠더 갈라치기를 정치적 도구로 활용하는 전형적인 반민주주의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 시기 여성가족부는 사실상 정책 실행기관으로서 기능을 상실한 채, 물리적·심리적 위축의 ‘빙하기’를 겪었다. 새로운 정부는 여성운동과의 협력적 관계를 회복하고, 젠더 거버넌스를 재정립해야 한다. 시민들이 요구한 성평등 민주주의는 단순한 슬로건이 아니라 국가운영의 기본원리가 되어야 한다.


지난 20여년간 한국사회의 젠더갈등은 신자유주의적 전환, 가족해체, 노동시장의 변화 등 구조적 요인 속에서 더욱 첨예화되었다. 한국사회에서 가족제도는 더이상 삶의 안정성을 보장하지 않는다. 1인 가구가 40퍼센트에 이를 정도로 새로운 가족 형태는 보편화되고 있다. 청년 여성은 OECD 국가 중 성별임금격차가 가장 큰 노동시장에 진입하여 경력단절의 불안감을 마주하며 살아간다. 청년 남성은 병역의무와 불안정한 미래라는 구조적 장애물 앞에서 박탈감을 경험하며, 일부는 그 감정을 여성혐오로 표출한다. 하지만 이 갈등의 근원은 젠더의 문제가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불안정성이다. 그럼에도 극우정치세력은 미디어를 통해 이를 성별 갈등으로 환원·재생산하고 있다. 정책은 이와 같은 구조적 원인을 진단하고, 젠더관계 변화의 긍정적 효과를 촉진하고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설계되어야 한다. 이전 정부는 성평등 정책을 체계적으로 후퇴시켰다. 예컨대 2021년 여성가족부는 「경력단절여성등의 경제활동 촉진법」을 「여성의 경제활동 촉진과 경력단절 예방법」으로 개정하는 성과를 이루었지만, 윤석열 정부는 성별임금격차를 축소하거나 가리는 방식으로 노동시장에서 저평가되어온 여성노동의 문제를 비가시화하려 했다. 「제3차 양성평등 기본계획」에 비동의간음죄 도입 “검토계획”을 넣었다는 이유로 실무자들에게 경고조치를 취한 것은 성평등정책에 대한 알레르기 반응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새로운 국민주권정부의 성평등가족부는 성별임금격차의 해소, 돌봄노동의 정상화 및 성평등인권이 보장된 안전한 사회라는 세가지 원칙을 명확한 정책목표로 설정해야 한다. 이와 동시에 행정적 조사권과 집행 권한의 부재라는 기존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제도 개편이 병행되어야 한다. 한국사회가 저출생·초고령화의 구조로 전환되면서 기존 가족구조는 해체되고 있다. 가족해체는 돌봄의 위기로 직결된다. 더이상 ‘남성은 생계부양자, 여성은 무상의 돌봄제공자’라는 구도는 유효하지 않다. 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가 주장했듯 ‘동등한 돌봄제공자’ 모델로 전환되어야 하며, 이는 돌봄의 사회화를 통해 실현될 수 있다. 즉 돌봄이 가족내의 비가시화된 부차적 여성노동이라는 관념을 해체하여, 사회적으로 가시화되고 필수적인 노동으로 인식을 전환시키고 돌봄노동자에 대해 제도적 보장을 마련해야 한다. 돌봄노동의 정상화는 구조적으로 성별에 기반하여 과소평가되거나 아예 무시되어온 영역을 정당한 가치를 평가받을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이다. 최근 호주의 공정근로위원회(Fair Work Commission)가 성별에 기반하여 구조적으로 저평가된 보육, 약무, 기타의료관련 노동 및 사회복지 등 돌봄노동에 대한 임금격차의 시정을 결정한 사례는 참고할 만하다.


민주주의의 핵심가치로서 돌봄은 서로의 필요를 돌아볼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돌봄노동은 단순히 모성과 감정에 끈끈하게 연결된 노동이 아니다. 돌봄노동이 경제적 상호부조를 통해 민주적 시장에서 성장동력의 역할을 맡을 수 있게끔 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남성도 동등한 경제주체로서 사회화된 돌봄 노동시장에 참여해야 한다. 돌봄의 책임은 모두에게 있으며 그 책임은 단지 도덕적인 것 이상의 경제적 동력으로 전환될 것이다. 성평등에 입각한 돌봄은 사회구성원의 권리이자 책임이며, 이 가치에 대한 사회적 합의 없이는 어떤 개혁도 실현되기 어렵다.


1998년 여성특별위원회로 출범한 여성가족부는 모진 풍파를 거치며 25년간 구조화된 성불평등을 다루는 특별한 역할을 해왔다. 새정부의 성평등가족부로의 확대·강화는 새로운 열망과 도전에 직면할 것이다. 단순한 여성정책의 영역이 아닌 사회에 확산하는 젠더갈등과 같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조직으로 개편되어야 할 것이다. 여전히 여성가족부의 폐지를 주장하는 세력은 보건복지부나 고용노동부 등으로 기능을 분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성별임금격차, 젠더폭력, 돌봄노동과 같은 핵심 영역은 쉽게 분리될 수 없으며, 별도의 컨트롤타워가 필요하다. 성평등가족부는 다른 부처와의 연결과 협력을 유도할 수 있는 새로운 조직구조를 창출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부처간 파트너십’(inter-departmental partnership)이라는 형태로 기존 칸막이 행정체계를 유연하고 협력적 소통이 가능한 조직으로 전환할 수 있는 핵심적 조직으로 기능해야 한다. 정부조직의 개편은 단순한 효율성의 문제가 아니라 성평등 민주주의적 거버넌스를 실현하기 위한 설계여야 한다.


새 정부에서는 여성들이 여전히 겪고 있는 성별임금격차, 젠더폭력, 저평가된 돌봄노동의 현실을 해결하기 위한 실질적 권한과 예산을 성평등가족부에 부여함으로써 성평등 민주주의가 국가 운영의 기본원리로 작동하기를 기대해본다. 시민들에게 정책적 효능감을 제공하지 못한다면, 뜨거운 에너지는 균열과 혐오의 정치를 부추기는 원천이 되기 쉽다. 응원봉을 들고 광장에 선 시민들이 바란 것은 단지 정권교체가 아니었다. 그들은 더 평등하고, 불안과 고립이 해소된 삶을 원했다. 성평등 민주주의는 단지 한 부처의 문제가 아니라 새로운 국민주권 정부가 실현해야 할 핵심 국가 원리이다.



김종미 / 코번트리대 교수, 전 여성가족부 여성정책국장

2025.6.25. ⓒ창비주간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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