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슘페터 『자본주의‧사회주의‧민주주의』

jasa본질은 ‘혁신’이다

- 7‧30재보궐선거와 슘페터 『자본주의‧사회주의‧민주주의』


재보선이 치러진 지난 7월 30일, 가끔씩 만나는 지인들과 저녁모임이 있었다. 공무원, 중소기업 사장, 대학교수 등이니 서민층이라 할 수는 없지만, 특정 정치세력이나 이념적 지형과는 무관한 이들이다. 마침 선거 당일이어서 그 이야기가 화제에 올랐다. “선거결과가 어떻게 될 것 같아요?”(A사장) “여당이 약간 우세하지 않을까요?”(B교수) “집권세력이 그리 죽을 쒔는데도?”(A사장) “둘 다 못하지만 야당이 더 못하잖아요.”(B교수) “야당 인물들이 더 구식인 느낌을 줘요.”(C국장) “나라를 위해서는 야당도 강해져야 하는데…… 차라리 이번에 왕창 지는 게 나을 것 같아요.”(D교수)

 

그 자리의 선거 이야기는 대체로 야당이 질 것이라는 예측이었고 실제 결과도 그렇게 나왔다. 여러가지 견해가 있겠지만, 6·4지방선거나 7·30재보선을 보면 국민들에게는 뭔가 ‘새로움’을 원하는 흐름이 존재하는 게 분명하다. 많은 국민은 보수나 진보, 여권이나 야권 모두를 낡은 세력으로 보는 것 같다. 한편으로는 기존의 프레임이 유지되기도 하지만, 또 한편에서는 새로운 구도와 세력이 만들어지기를 원하고 있다.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내는 것은 진보세력이나 현재 야권세력이 주로 담당해야 할 몫이다. 그러나 다수 국민은, 여권은 선거 국면에서 ‘새로움’에 관심을 보이는 척이라도 하지만, 야권은 아예 관심조차 없는 것처럼 여기는 듯하다. 이에 대한 발본적인 성찰과 실천이 없으면 야권의 부진과 난조는 길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새로움’을 만들어내는 것은 ‘혁신’이라는 개념으로 말할 수 있다. ‘혁신’이 새로운 현상은 아니지만, 그에 대해 전통적으로 학문적 관심이 높았다고 할 수는 없다. 경제학에서도 주된 관심은 구조 문제에 있었다. 혁신에 관한 연구는 대체로 기존 분과학문 밖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경제학, 사회학, 조직과학, 경영학 등 여러 학문 분야를 아우르는 학문간 연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여러 학문의 출발점에는 역시 슘페터(J. A. Schumpeter)가 있다.

 

슘페터의 혁신 개념의 현재성

 

슘페터는 ‘정체(停滯)’와는 거리가 있는 삶을 살았다. 그는 오스트리아 출신으로서 미국으로 이주하였는데, 지금의 국경으로 보면 7개국(당시 기준으로는 5개국)의 9개 도시에서 살았고 23번을 이사했다. 거대제국이 쇠퇴하는 과정에서 재무장관과 은행총재를 지냈으나 파산의 고통도 겪어보았고 미국에 건너가서는 최고의 대우를 받으며 강의와 저술에 몰두했다. 그는 『이론경제학의 본질과 주요내용』(1908), 『경제발전의 이론』(1911, 1934), 『경기순환』(1939), 『자본주의·사회주의·민주주의』(1942), 『경제분석의 역사』(1954) 등의 저작을 남겼는데, 혁신에 관한 주요 아이디어는 『자본주의·사회주의·민주주의』(한국어판 변상진 옮김, 한길사 2011)에 들어 있다.

 

슘페터는 혁신의 개념은 물론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설명하려 한 최초의 인물이다. 그는 새로움이 만들어지는 과정의 본질을 통찰했다. 특히 혁신과정에 중요한 특징이 있음을 강조했는데, 이는 현재 한국 정치세력의 역량과 최근 선거결과의 의미를 평가하는 데 좋은 기준이 될 수 있다.

 

슘페터에 의하면 혁신은 무엇보다도 근본적인 불확실성을 내포하는 것이다. 혁신에는 남보다 빨리 움직이려는 욕구가 중요하다. 그리고 새로운 방식을 도입하는 데에는 광범한 저항이 따른다. 현재의 여권과 야권에는 모두 혁신을 거부하는 강력한 관성이 존재한다. 누구도 근본적 불확실성을 감내하려 하지 않는다. 여권의 경우 최소한의 리더십이 작동해서 불확실성에 도전하려는 선거기술상의 흉내라도 낸다. 그러나 야권은 뿌리 깊은 분열상과 분파이익에 매몰되어 그마저도 하지 못한다. 방향도 중요하지만 속도도 중요하다. 최근 들어 기민함에 있어서는 여권과 야권의 격차가 더욱 커진 것 같다.

 

『자본주의·사회주의·민주주의』는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 그중 압권은 제7장 「창조적 파괴의 과정」과 제12장 「분쇄되는 성벽」이다. 슘페터는 ‘창조적 파괴’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는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교과서적 상황과 실제 자본주의 현실은 다르다는 점을 말한다. 그에 의하면, 경제학자들이 흔히 말하는 경쟁에 관한 전통적 개념은 여러 조건이 불변한 고정적 유형 내의 경쟁에 지나지 않는다. 참다운 문제는 자본주의가 어떻게 내부에서 옛것을 파괴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여 내부에서 경제구조를 혁명하는가 하는 것이다.

 

‘창조적 파괴’가 절실한 지금

 

슘페터는 혁신, 즉 창조적 파괴 과정을 자본주의의 본질로 보았다. 현실에서 중요한 것은 상대방을 쓰러뜨리는 경쟁이 아니라 ‘새로운 결합’을 추구하는 경쟁이다. 그것은 새로운 생산방법, 새로운 상품, 새로운 조직형태, 새로운 공급원, 새로운 거래경로, 새로운 판매시장 등에서 오는 경쟁이다. 이는 생산의 다과(多寡)를 결정하는 정도가 아니라 생존 자체를 좌우하는 것이다.

 

슘페터의 논의가 자본주의체제를 분석하는 데 한정된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지만, 나는 그의 혁신과 혁신가 개념이 시대와 부문을 넘어 적용되는 측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창조적 파괴 과정은 정치나 제도 영역에서도 핵심적 중요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여야는 종종 상대방과의 투쟁에 초점을 맞추고 단기적 성과에 집착하곤 한다. 그러나 정치집단의 생존 자체를 결정하는 것은 일방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 새로움을 구하는 경쟁으로부터 온다.

 

슘페터는 자본주의의 내부구조를 혁명하는 존재와 과정이 사라지게 되면 그 체제의 성벽이 무너지는 것으로 설명했다. 그는 사람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은 날아다니는 표적을 맞히는 것과 같이 어려운 일이고, 따라서 창조적 파괴와 자본주의의 역동성이 상당기간 지속될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비현실적이지만’ 이라는 단서를 붙여 생산방법이 완벽에 도달하게 되면 자본주의는 위축된다고 보았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진보 그 자체가 기계화되는 상황이 도래하고, 그때 체제가 무너진다고 본 것이다.

 

그는 자본주의체제를 논의하면서 군사적인 비유를 많이 사용했다. 전쟁이 기계화되고 군대의 지휘관이 사무원처럼 되면 영웅적인 장군은 사라진다. 기업가는 평화 시의 장군 같은 신세가 되고, 관료화된 거대집단이 결국은 성벽을 무너뜨린다. 자본주의만이 아니라 정치세력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성벽을 지키는 이는 기계화된 진보가 아니라 “가장 활력에 찬, 가장 구체적인, 가장 의미있는” 타입이다.

 

이제 슘페터의 시야를 빌려 향후의 정세를 전망해보자. 재보선 승리 이후 집권세력에는 과거로의 회귀 움직임이 강해지고 있다. 이러한 경향이 계속되면 그들은 실패 때문이 아니라 성공 때문에 스스로 무너질 것이다. 야권은 계속되는 실패 때문에 어려움에 처해 있다. 그러나 야권이 실패 속에서도 상투화된 이념과 기득권을 고수한다면 그들 역시 붕괴할 것이다.

 

 

이일영 / 한신대 교수, 경제학

2014.8.13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