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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주간논평

‘블랙리스트’ 근절과 예술지원정책의 전환

강경석

강경석

문화계 블랙리스트 파문으로 더욱 또렷해진 사실이지만 문화예술 분야 정부지원을 둘러싼 해묵은 갈등과 최근의 적폐 들은 촛불시민의 관점에서 재점검될 필요가 있다. 이를 정면으로 문제 삼고 근절 대책을 압박하는 힘 또한 촛불시민들로부터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출범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이하 조사위)의 성패도 이 점을 얼마나 깊이 인식하느냐에 달렸음은 물론이다.

 

지원주체와 수혜자 사이의 단단한 갑을관계

 

지난 21일, 조사위 주최의 분야별 현장토론회가 처음으로 열렸다. 첫 테이프를 끊은 것은 문학 분야였다. 이 자리에서는 그간의 문학 지원정책들이 안고 있던 다양한 문제점들이 성토되었지만 초점은 예상대로 블랙리스트 파문에 집중되었다. 중앙 또는 지방 정부에 의해 공적으로 조성된 자원(예산, 인력, 시설 등)을 활용한 문화예술 지원은, 예술가 개인 또는 단체의 창작활동이나 그 활성화를 위한 프로그램이 공공적 가치에 부합하는 차원에서 완수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협력’하는 일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주는’ 쪽과 ‘받는’ 쪽 사이엔 그 본래의 취지와 무관하게도 모종의 갑을관계가 성립되기 마련이다. 지원을 필요로 하는 수요는 많은데 자원은 늘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블랙리스트 파문의 핵심도 박근혜정권이 문화예술계 장악을 위해 이러한 ‘갑’의 조건을 반헌법적이고 후안무치한 수준으로 휘둘렀다는 데 있다.

 

그러나 피해사례를 낱낱이 밝히고 관련자를 찾아내 처벌하거나 으레 그래온 것처럼 감시체계를 강화하는 땜질식 제도개선만으로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어렵다. 대략 참여정부 시기부터는 예술위원회나 지역문화재단 같은 민간 전문기구들이 지원 실무를 집행하고 있는 추세여서 어느 정도 풍토가 개선되긴 했지만 지원주체와 수혜자 사이의 갑을관계는 여전히 단단하게 구조화되어 있다. 주는 쪽은 예산집행의 적정성과 투명성을 관리하느라 지원금 정산 등을 빌미로 간섭 아닌 간섭을 지속할 수밖에 없고 받는 쪽은 문화예술의 진흥이 국가의 의무로 되어 있음에도 지원에서 배제되지 않기 위해 잠재적 범죄자 취급을 당하는 굴욕을 감내할 수밖에 없다. 법과 제도의 사각지대를 ‘요령껏’ 활용하기만 한다면 ‘합법적 블랙리스트’도 얼마든지 가능하고 실제로도 의혹은 끊이지 않는다.

 

시민에게 권한을 되돌려줘야 하는 이유

 

혹자는 실무를 담당하는 민간전문기구들의 독립성 보장을 대안으로 제시하기도 하지만 기관대표의 인사권과 사업예산의 배분 권한이 정치권력과 관료사회에 있는 한 그것은 ‘권력’의 양식에 호소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기 어렵다. 이렇게 해서는 블랙리스트 파문과 같은 역진 사례의 재발 가능성이 불식되지 않는다. 따라서 지원금의 배분과 지원여부의 결정 권한을 시민들에게 돌려줄 필요가 있다. 작게는 문화예술 분야에 관심이 많은 해당지역 주민들 중 추첨을 통해 선발된 다수가 공개로 진행되는 심의에 참여하여 권한을 행사하는 방안이 있고 더 크게는 이미 전국적으로 만들어져 있는 문화예술 전문기구들의 사업 관련 주요 결정들에 시민들이 직접 관여하는 방안도 있을 수 있다.(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중앙 예산의 지역 이관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기관의 책임자와 실무자 들은 기획자이자 조력자로서, 전문가들은 자신들의 예술적 식견을 기탄없이 피력하는 자문역으로서 본래의 위치로 돌아가게 된다. 참조할 만한 일부 사례들에 비춰볼 때 문화예술 분야의 전문가들이 내리는 ‘고뇌에 찬’ 결단에 비해 일반시민들의 그것이 결코 뒤떨어지리라고는 단정할 수 없으며 어느 면에선 문화예술 지원사업의 근본정신에도 이것이 더 부합하는 측면이 있다. 지원실무를 담당하는 정부나 민간기구들의 권한과 자원은 본래 시민으로부터 나왔으며 지원을 통한 예술적 성과의 최종수혜자도 결국 시민이기 때문이다. ‘주는’ 쪽도 ‘받는’ 쪽도 원칙적으로는 권한과 책임을 위임받은 대리자들일 뿐이기 때문에 기존의 구조화된 갑을관계는 여기서 설 자리를 잃게 될 여지가 충분하다.

 

제도화된 참여, 문화예술지원 패러다임 전환의 시작

 

지난 겨울과 봄을 수놓은 촛불의 물결이 일종의 문화제적 성격을 포함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안다. 돌이켜보면 2000년대 이후의 광장문화 전체가 그랬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도 확인되는 것처럼 시민들의 일상적 문화열은 시장에서의 대중문화 소비와 무관하지 않지만 그와 끝내 일치되진 않고 시장에서 실패한 ‘순수예술’과 무관한 듯 보이면서도 완전히 동떨어져 있지 않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지적해 왔듯 문화예술 분야에 대한 공적 지원이 시장실패의 보전책이 되긴 어렵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국가(지역)대표콘텐츠 만들기’식의 ‘선택과 집중’에 해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시장실패의 문제를 시장주의적 발상으로 해결하는 데는 한계가 따르기 때문이다. 이제는 ‘선택과 집중’이 아니면 예술인 대상의 기초생활보장사업에 불과해진다는 식의 이분법적 사고를 벗어나야 한다. 그 절묘한 중간지대, 아니 독자적 제3지대에 한 나라의 문화와 예술의 수준을 뒷받침할 공공적 거점을 세우는 일은 시민참여의 제도화라는 이토록 작은 전환에서 비로소 새로운 한걸음을 내딛게 될 것이다.

 

강경석 / 문학평론가

2017.9.27. ⓒ 창비주간논평